추풍오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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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단어의 출처
2. 배경
3. 마지막 북벌
4. 추풍오장원의 의미
4.1. 5차 북벌 이전까지의 상황
4.2. 오장원 진군의 목적
5. 정사 삼국지의 오류
7. 삼국지의 실질적 완결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秋風五丈原(오장원의 가을 바람)

삼국지연의 옛날 판본들의 목차 및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 인용된 시에서 나온 표현으로, 일반적으로는 제갈량의 북벌 최종장인 5차 북벌에서, 제갈량이 가을바람을 맞으며 오장원의 군중에서 세상을 떠났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역사소설 삼국지연의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부분으로 이후에 강유가 연의의 주인공이 되지만, 그의 역할은 후일담으로 제갈량 사후 촉이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쉽게 말하자면 삼국지연의의 실질적인 종장에 해당하는 부분.


1.1. 단어의 출처[편집]


모종강 이전의 삼국지는 240화 구성이 기본이었으며, 이때는 207화가 제갈량이 죽음을 맞이하는 에피소드다.이 화를 다루는 명칭이 판본마다 다른데, 가정본의 목차(則目, 回目)에서는 공명추풍오장원(孔明秋風五丈原)으로 되어있고, 지전본 삼국지에서는 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 5글자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가능한 목차를 7글자로 맞추려고 노력한 가정본과는 다른 부분으로, 가정본과 지전본을 구분하는데 사용하는 주요 차이점중 하나이며, 목차명이 6~8글자를 넘나드는 지전본에서도 5글자 목차는 240편 중 이 1편 뿐이다.

모종강본에서는 제갈량이 수명을 12년 연장하기 위해 오장원에서 기도를 올리는 부분인 103회 '사마의가 상방곡에서 곤경에 처하고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별을 보고 기도한다(上方谷司馬受困 五丈原諸葛禳星)와 104회 '큰 별이 떨어지며 한나라 승상은 하늘로 돌아가고, 위나라 도독은 나무 인형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다(隕大星漢丞相歸天 見木像魏都督喪膽)'의 목차를 가지고 있으며, '추풍오장원'이란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 표현은 모종강본 삼국지연의 38회 '융중에서 천하삼분의 결책을 내고, 손씨가 장강에서 원수를 갚다(定三分隆中決策 戰長江孫氏報讎)',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삼고초려 부분에서 나오는데, 제갈량이 유비의 세번째 방문만에 유비측에 합류할 것을 결심하여 동생 제갈균에게 '뜻을 이루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인용된 시 구절의 한 문장에서 나온다

後人有詩歎曰후인유시탄왈:

후대의 누군가가 시를 지어 이를 기렸다

身未升騰思退步신미승등사퇴보

출세하기 전부터 돌아올 것을 생각했으니

功成應憶去時言공성응억거시언。

뜻을 이뤘으면 그때의 말을 잊지 않았으리라

只因先主丁寧後지인선주정녕후

선주(유비)가 간절히 부탁한 후였기에

星落秋風五丈原성낙추풍오장원。

별은 지고 가을 바람 부는 오장원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는 특정 장면을 묘사하고 그 장면을 기리는 후대의 시들을 인용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 또한 그런 시들 중 하나로 제갈량이 소설상에 처음 등장하는 부분에서 그의 미래, 죽음을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 플래그 같은 의미로 나온다.

일본의 삼국지도 특히 강조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는 이 부분을 다룬 권의 이름이 오장원의 권 이며, 이에 영향을 준 연의삼국지(쿠보 텐즈이, 1912) 는 더 담백하게 오장원에서 제갈 별이 되다(五丈原に、諸葛、星をふ) 라고 목차를 정했다.

다만 추풍오장원을 강조한 일본의 창작물이 몇개 있다. 일본의 근대 시인 도이 반스이(1871~1951)는 '성낙추풍오장원(星落秋風五丈原)'을 제목으로 하여 제갈량의 생애를 묘사한 시를 쓴 적이 있으며, 일본의 삼국지 팬덤에선 상당히 유명한 시로 알려져 있다. 7장 349편의 장편 서사시다. 누군가가 노래를 붙여 군가로 사용된 바 있는 모양이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는 초기 출판한 60권본의 59권, 이후 발간한 30권본의 30권의 이름을 추풍오장원으로 하고 있다.


2. 배경[편집]


촉한 소열제 유비이릉에서 대패하고 곧이어 223년 병사한다. 유비의 유언에 따라 승상 겸 익주목이 된 제갈량맹획의 반란군을 복종시킨다(연의의 칠종칠금). 마침 위문제 조비가 사망하고 위명제 조예가 뒤를 잇자 제갈량은 북벌에 착수한다.

가정의 패배에 기인한 1차 북벌의 실패 이후 위나라와 계속 일진일퇴하였다. 관동의 장합군이 오를 치러 형주로 가 있는 상황이라 제갈량은 진창을 공격하여(2차 북벌) 그들을 이쪽으로 불러들인 사이 후퇴하였고, 3차 북벌에서는 곧바로 진식을 보내어 음평, 무도 2군을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3. 마지막 북벌[편집]


234년, 제갈량은 4차 북벌 이후 국력을 기울여 마지막 북벌을 준비한다. 이때 제갈량의 북벌군의 규모는 약 10만으로 이릉대전 이후 촉이 투사했던 전력 가운데 가장 규모가 거대한 군세였다.

최초 제갈량의 목표는 미현(眉縣)의 위수(渭水) 남쪽까지 진군하고 주둔하며 무공(武功)이란 곳에서 동진하는 것이었다고 위나라 측에선 추측하고 있었다. 무공은 산악지대로 지형이 험준한 편이라 산을 끼고 싸우면 촉군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위나라 입장에서는 촉군의 무공산 행에 대하여 좋든 싫든 장안을 방어하기 위해 요격을 나가 공세적 입장을 취해야만 했으니 제갈량이 무공으로 올 경우 당시 수비로만 일관하려던 위나라의 대전략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생각했던 것. 거꾸로 제갈량이 오장원으로 간다면 위나라와 사마의의 의도대로 전쟁이 진행된다 보았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이 나가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우려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갈량이 오장원 근처에 오도록 무공을 막았다. 그러자 제갈량은 이전의 전쟁과는 다르게 오장원에서 병사들로 하여금 둔전을 실행하고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민심을 획득하는 등 아예 오장원에 눌러앉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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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상으로 보면 촉이 오장원을 점유함으로써 위수 이남이 촉의 세력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장원이 공격하기 쉬운 지형이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 오장원에 주둔한 촉군은 위수와 무공수를 통해 도강 중인 적을 요격할 수 있고, 도강이 성공해도 오장원은 평지에 불쑥 솟은 150m 지점이라 적을 견제하기도 편하며, 강을 건넌 위군이 구릉 위의 적을 공격하기도 힘들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이 먼저 싸움을 걸고 도발함에도 불구하고 수비만 할 뿐 나가 싸우지 않았다. 이에 백여 일 동안 대치가 계속되었고, 양측의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제갈량이 과로와 병으로 쓰러졌다. 제갈량은 양의강유에게 퇴각을 맡긴 후, 장완이 자신의 자리를 계승하게 하고 사망한다.

연의에서는 이 때 사마의가 추격해오자, 강유가 제갈량의 목상을 앞세워 다시 진군해 사마의를 따돌린다(사공명주생중달).


4. 추풍오장원의 의미[편집]



4.1. 5차 북벌 이전까지의 상황[편집]


기존 제갈량의 대전략은 천하삼분지계였으나, 형주공방전 이후 형주를 잃은 상황에서 제갈량의 대전략은 변경된다. 루트가 진령산맥을 넘는 것으로 한정되다보니 옹양겸병을 전략의 핵심으로 삼는다. 이는 1차 북벌에서 잘 드러난다. 1차 북벌은 조운의 별동대가 기곡을 통해 진군하여 장안을 직접 노리는 것처럼 위장시켜 조진의 대군을 블랙홀 속으로 빨아들인 상황에서 제갈량의 본대가 기습 기산진격. 위에 불만이 있었던 남안, 천수, 안정 3군이 제갈량에 호응하는 것으로 제갈량의 의도(옹양겸병)대로 흘러가는 것이다.[1][2]

또 제갈량의 소위 융중대 전략은 유비가 직접 익주에서 출병해서 공격하고, 동시에 상장 한 명(아마도 관우)이 형주에서 북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관중으로의 진출이 오히려 주공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제갈량의 일차 목표는 처음부터 관중의 장악에 있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많다.

만약 제갈량이 장안을 함락시킨다면 옹양주, 즉 관중 일대가 손에 들어오는 셈인데 역대 통일 왕조들을 보면 이 지역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졌다. 관중을 얻은 왕조는 거의 천하통일을 이루어냈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촉한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한나라. 그만큼 관중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 영향력이라는 것이 대단하다. 촉이 군량이 없어서 후퇴한 건 어디까지나 운반의 문제였지 생산의 문제는 아니었으니 옹양과 장안을 얻게 된다면 대번에 구도가 바뀔 수도 있었다.

위의 강대한 국력은 관중-형북-수춘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하북과 중원을 그 배후에서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 건데, 관중까지 상실했다는 소리는 중원이 더이상 안정적인 위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하북이 최전선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위가 우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요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명대신 중 군부 최고 실력자인 조진, 조진 사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사마의가 방어전을 직접 관장하고, 황제인 조예와 최고 권력자인 사마소가 대단히 신경썼던 것이다.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은 하남으로도, 하동으로도 모두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의 요충지임과 동시에 여러 관, 즉 요새로 둘러쌓인 데다 그 내부에 넓은 평야지대가 존재하고, 정치적 상정성에 많은 인구가 존재하는 지역이고, 관서는 전통적으로 서북변을 지키는 강력한 군대를 배출한 지역으로 천하의 광무제가 하북, 중원, 강남을 모두 평정하고도 신중하게 나아갈 정도로 조심해야 했던 지역이며, 파촉은 전국시대 이래로 대량의 물자를 생산하여 물자부족에 시달리기 일쑤인 관서와 관중을 먹여살릴 수 있는 지역이다. 거기다 이 세 곳은 하나로 합쳐졌을 때 극한의 시너지 효과까지 낸다. 셋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 힘은 하북을 뛰어넘는다. 그렇기에 전국시대 진나라는 천하의 1/3을 차지하고 절반의 물자를 생산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 힘으로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옛 진나라(秦)가 전국을 통일했던 힘이 파촉을 먹으면서 나왔던 것처럼 한고제도 여기에 기대어 천하를 제어하였다, 제갈량의 북벌은 농서, 즉 양주지역을 먼저 장악하고 이를 토대로 전력을 증강하여 장안을 비롯한 관중을 확보하는 것으로 충분히 가능성있는 것이었다. 이는 늦게나마 한고조의 재래이다. 유비의 한중왕이 충격이었던 것도 촉에서 한을 일으킨 역사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옹양을 먹은 것은 한신이 삼진을 친 역사와 비교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위와 촉의 국력차가 줄어들면, 촉이 가진 '정통성'의 힘은 굉장히 커진다.

또 관중+촉이면 방어 면에서 3곳만 지키면 되기 때문에 유리하고 반면 공격은 쉬워진다. 또한 옹양주를 먹으면 일단 촉이 가진 단점 몇 개가 상쇄된다. 촉의 국력을 외부로 안전하게 낼 수 있는 교두보 형성, 그리고 촉이 가지지 못한 기병대의 육성이라는 두가지가 가능해진다. 또한 위의 침공 역시 옹양을 겸병해도 쉽게 막을 수 있는 지형이다. 일단 함곡과 무관만 막으면 관중에 못 들어 오니까 아마 단지 국력+1 정도가 아니라 옹양주 겸병에 성공했으면 시너지 효과는 대단했을 것이며 제갈량 북벌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것이었다. 제갈량 생전에 통일을 이룩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적어도 옹양겸병의 목표를 달성하여 관서전서에서 위나라가 계속 신경쓰게 되었다면 다른 생각을 품는 자들이 나오기 마련이고 공손연 같은 자들이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3] 관중이 수많은 전화로 피폐해졌다고는 하나 송나라 이전 관중의 생산력은 천하를 좌지우지하였고 이것이 촉과 결합한다면 제갈량 이후에도 기회는 계속 생겼을 것이다.

그렇기에 관중 지역은 위에게도 그만큼 중요시되었으며, 그렇기에 제갈량은 관서를 먼저 확보하고 그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관중을 장악한다는 순차적인 전략을 짜고 움직여 갔다. 이게 또 현실성이 없는 것도 아닌 게, 요새로 둘러싸인 관중이라지만 나중에 당태종 시대 힐리가한이 당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장안 근교를 강습, 당 태종을 압박하여 공물을 받아먹은 데서 알 수 있듯 북쪽지역은 방어력이 취약하다. 관서를 장악하고 나면 관중을 남, 서, 북의 삼면에서 공략할 수 있으니 충분히 장악할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성공했다면 하동-하북으로 나아갈까, 사예-연예주로 나아갈까 골라먹으면 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 관중은 괜히 관중이 아니다. 소수로 다수를 막을 수 있는 방어거점이 많은 지역이다. 이 지역을 장악하고 나면 소모전이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위가 계속 움켜쥐려고 노력하는 만큼 이건 반대쪽으로도 성립되지만, 서쪽에서 관중을 치는게 동쪽에서 치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 또 역사로 증명된다. 전통적으로 동쪽에서의 공세를 막아내도록 방어거점이든 뭐든 구축된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에 이 지역 이민족인 저족, 강족, 선비족은 위보다는 촉한과 더 가까운 관계였다. 촉은 이들에게 먹히는 최고의 상품, 즉 소금비단을 가지고 있었다.[4] 실제로 제갈량부터 강유 시절까지 이민족들은 촉의 북벌에 호응하여 위에 반항하곤 했다. 제갈량의 북벌은 위의 이민족 지배능력을 심각하게 저해하여 제갈량 사후 위는 이들에 대한 지배권 안정화를 추구한다.

여기에 좀 더 덧붙이자면 그중에서도 강족은 촉과 더 가까웠다. 유비가 손에 넣은 마초부터 마대까지의 마씨 일족이 강족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고 제갈량 사후 강족의 준동 배후에는 제갈량이 얻은 강유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강유의 심복 왕사는 강족에 엄청난 인심을 얻고 있었다. 마초전을 보면 마등의 아버지가 강족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아들 마등과 손자 마초-마대 형제들을 얻었다고 할 정도며 강유전을 보면 강유가 계속 강족과의 연계를 과시하니, 이렇게 촉한의 북벌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들은 강족과 빈번히 연계했다.[5] 심지어 아직 유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유장이 아버지인 유언의 기업을 이어받은 직후 일어난 조위의 반란에도 강족의 병력을 끌어들여 조위의 반군을 격파할 정도로 촉과 강족은 가까웠다. 이런 바탕에다가 유비 세력 자체가 이민족과 친교를 쌓으려고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집단이다. 제갈량의 남중 정책이나 유비의 오계만이 회유에서 보듯, 촉은 이민족들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데 총력을 다했고 남중의 지배자들은 명목상이로나 실질상으로나 촉의 중앙관직을 받아 활약하게 된다. 이런 이민족 유화책은 촉이 관서 지역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끊임없이 위나라 서부를 괴롭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심지어 촉한의 이민족 유화책은 선비족에게까지 적용되었는데 4차 북벌이 바로 이러한 형태였다. 실제로 제갈량은 선비족과 몇번씩 교섭하여 회유를 시도한 적이 있고, 가비능과 결탁했다. 선비와 지속적으로 싸웠던 전예, 견초, 필궤 중 필궤는 전사, 전예는 포위당할 정도로 위의 이민족 장악력은 약했고, 결국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고 그 세력을 조각조각 찢어놓은 뒤에야 북방이 겨우 안정되었을 정도니 촉한 특유의 이민족 유화책은 위에게 상당한 위협이었던 것이다.


4.2. 오장원 진군의 목적[편집]


사마의는 제갈량이 용감한 자라면 무공으로 가고 아니면 오장원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제갈량이 장안 직공을 걸 거라고 사마의가 판단하고 말한 것인데 정말로 장안 직공을 추구했다면 사마의의 해석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오장원은 농서로 가는 주요한 위치이자 이민족과의 연계도 가능하고 어느 정도 둔전을 통한 자체보급도 가능한 지역이다. 둔전 건은 제갈량이 진짜로 사마의와 대치하고 "오냐, 니가 먼저 나오나, 내가 먼저 집에 가나 한번 해보자!" 같은 버티기식 전략보다는 "내가 여기서 둔전하면서 여러 곳을 찔러대면 사마의가 찔끔해서 나랑 싸움질하겠지?" 라는 식의 유인책이다. 실제로 호보감 맹염이 무공수까지 진출한다거나 여자옷을 보낸다거나 하는 식의 도발이 있기도 했고. 또 곽회가 사마의에게 따끔하게 지적했듯이 '제갈량이 해당 지역을 장악하면서 위와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이민족과 해당 지역 주민들을 흔들 수 있다'는 제갈량의 허를 찌르는 전략을 사마의는 간과한 것이다. 결국 곽회가 이걸 알아채고 일단 한번 막았지만, 이후로도 제갈량은 오장원에 걸터앉은 채로 서쪽을 경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사마의가 먼저 선취한 바로 강 건너인 무공은 전통적으로 장안으로 가는 최후 방어선으로, 여기가 뚫리면 방어하는 쪽은 장안 근교에서 방어선을 치는 수밖엔 도리가 없다. 실제로 이는 안사의 난 당시 당나라의 장안 탈환전, 토번의 침략 당시 당나라의 방어전을 통해 입증된 일이다. 양측 모두 방어전에 들어갔던 군대는 무공이 뚫린 다음에는 장안 근교까지 쭉 밀렸는데 이는 위수, 즉 고대~중세의 수송 기술상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인 수로가 무공을 점령하는 측에게 완전히 장악되기 때문이다.

즉, 234년의 제갈량의 5차 북벌의 일환으로 벌어진 촉군의 오장원 점거는 먼저 적을 도발하고 더 유리한 지형에서 버텨서 선제 공격의 폭탄을 떠넘기는 전략이다. 제갈량은 둔전을 벌이며 장기간 오장원에서 버티고 농서의 여러 거점을 찔러보며 위의 내부 불만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조예사마의의 인내심에 도전했다. 이것은 제갈량이 확고부동한 촉한 신권의 1인자로서 안정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회전을 벌이면 촉한이 위나라를 압도할 수 있다는게 증명된 상태며 덕분에 대규모 둔전까지 시행해 장기전을 노려도 위나라가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을 노려 위나라의 틈이 생기는 순간을 노리는게 가능했기에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6]

오장원 주둔은 정말로 제갈량이 3년간 심사숙고해 준비한 본격적인 장기전 북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 사마의 본대 역시 위수를 장악해 기동전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이때 제갈량의 촉군이 무공수를 건너 사마의를 자극한 적이 있다. 그때 사마의가 위수 강물이 불어난 틈을 타 기병 1만을 뽑아 밀어내려 했는데 제갈량 본대가 화살을 쏴대면서[7] 신속하게 다리를 만들고 완성시켜 도하하려 하자, 사마의는 다시 위수 남쪽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 닥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제갈량도 계속 나와서 싸우라고 북쪽에 도전하는 동시에 무작정 북쪽을 치지 않고 맹염을 시켜 위수 남쪽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늘려나간다. 무공은 종종 장안을 서쪽에서 방어하는 최후 수비선이 되곤 했다는 역사를 지닌 데서 알 수 있듯 산악지대이다. 제갈량이 여기까지 전진해 눌러앉으면 장안은 졸지에 최전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 사마의가 먼저 선점하긴 했지만, 애당초 제갈량이 노린 게 그게 아니었던 것이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공을 포기하면 장안을 내주겠다는 뜻이나 진배없는 소리이므로 진퇴양난의 순간에 사마의는 그냥 가만히 진치고 견수하는 수 밖에 없었다. 과거 노성에서 일전을 벌였다가 처절하게 깨지고 전면전은 회피하기로 결정한 사마의가 이런 행동을 할 리 없고, 실제로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둔전은 애초에 처음부터 제갈량이 계획한 것이었다. 제갈량은 오장원 진군을 위해 미리미리 한중의 해당 통로 쪽에 대규모 식량창고를 준비해 놓고, 무공수를 통한 수로 활용이 가능한 데다 소수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오장원을 점거한 후 후방 백성 위무 및 현지에서의 식량 충원까지 노린 둔전계획을 진격 시점부터 이미 계획했다고 볼 수 있다. 관서부흥책은 아직 시행된 지 1~2년밖에 되지 않았고 이 당시 위의 국력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당시 사마의의 위군은 적게 잡아도 13~20만 사이로 여겨지는데, 이 정도 병력을 유지하는 것은 위나라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다.[8] 실제로 4차 북벌 때도 위나라 전역의 기근으로 인해 상규의 보리를 수확하려다 노성에서 충돌하여 참패한 경험이 있기도 하다. 이후 일단 지형 잡고 물고 늘어져서 돌려보내긴 했지만. 하물며, 아예 대놓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위의 입장에서도 이런 대병력을 대체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또 그런 이유로 사마의가 선공을 걸어오면, 제갈량은 절대적인 지형적 우위를 끼고 있는 오장원에서 그냥 위군을 느긋하게 박살낼 수 있다. 오장원은 그 정도로 촉군에게 유리한 지역이다.

물론 오나라가 충분히 위를 물고 늘어지지 못하고 깨진 것은 제갈량에겐 뼈아픈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가 충분히 위의 예비전력을 묶어놓고 있는 사이 사마의가 먼저 선공을 걸어버리면 그대로 박살내고 그 기세로 장안은 물론이고 관중 전체까지 한꺼번에 장악할 수 있었는데, 그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서북으로 가는 위수의 물길을 중간에서 끊어내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고, 북원에서 한번 실패했다고는 하나 촉이 이민족들과 연계할 수 있는 방법이야 많다. 옹양주의 한복판에 말뚝박고 백성들과 병사들이 섞여서 서로 친근히 지내고 위무하고 있는 것은 그것 자체로도 위를 엿먹이는 거나 마찬가지다. 제갈량 사후에도 이 지역에선 아직도 그를 그리워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지경이었는데 이 당시만 해도 촉한군이 대체 언제까지 버티고 있을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고 이전과는 달리 사마의가 수많은 양곡과 책서를 노획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백성들과 연계한 둔전책은 성공적이었다. 결국 사마의 입장에서 바랄 건 제갈량 건강이 나빠지기만을 바라는 요행수 밖에 없었단 얘기다.

오를 막으러 내려갔던 군대가 모두 서북으로 향한다 해도 이건 정말 애매한 상황이다. 지형적으로 오장원은 촉한에게 매우 유리하다. 사마의는 처음부터 오장원 점거를 막지 않고 위수를 넘어 진을 쳤는데 이는 우위인 병력을 가지고도 '난 전면전으로 널 이길 수 없으니 그냥 위수를 이용해 니가 들어오는 걸 막기만 하겠다'는 의사표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위에서도 한번 언급된 이야기지만 이건 촉군 일부가 무공수를 건넜을 때의 사마의의 반응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기병을 1만이나 동원하고도 제갈량 본대가 도하하려 하니까 그냥 귀환했다. 촉군이 도하해 와도 배수진을 친 셈이며 지형적으로는 섬멸의 기회이건만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의 본대가 위남에 있는 이상 북원의 위군은 홀로 떨어져 있는 군대인 셈이라 상당히 위태롭기 때문에 사마의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큰 낭패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곽회가 그것 때문에 사마의에게 진언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오장원은 너무 버티기에 좋은 곳이다. 사마의가 왜 이런 요충지를 그냥 내줬나 싶을 정도로 딱 좋은 곳이다. 언덕이라 소수 병력으로도 버티기 쉬우니 병력 후방으로 분산시켜 둔전해도 괜찮고(오히려 병력 적다고 공격오면 이놈 내 함정에 걸렸구나! 하기 좋은...) 위치 잡아놓고 기다리면서 '니가 공격 안오고 배기겠니? 근데 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리쿡쿡 저리쿡쿡 찔러서 빨리 오게 해보자'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오장원을 위수와 무공수와 산이 감싸고 있는데다 건너면 언덕이니. 이 정도면 사마의가 아니라 사마의 할배가 와도 정공으로는 쉽게 못뚫어낸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의도를 장안 진격으로 오판하고 위수를 장악해 기동방어를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오장원을 내주었을리가 없다.

진짜 제갈량의 진로만 봐도 사마의가 소수병력으로 오장원만 미리 잡아두고 방어진지를 굳혔으면 5차 북벌은 거기서 끝이었다. 오장원을 점거하는 것이 전제가 된 게 5차 북벌이다. 제갈량이 대체 뭔 배짱으로 사마의가 오장원을 그냥 냅둘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하는 대목으로, 오장원 점거를 보면 볼수록 제갈량이 매우 도박적인 갬블러로 보인다. 오장원을 점거 못하면 동오까지 움직여놓고 하릴없이 그냥 야곡만 왔다가는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사마의의 진로를 미리 간파하고 움직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제갈량이 오장원에 주둔한 상태에서 서북변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도 있다. 곽회가 선견지명으로 몇번 성공적인 방어를 해냈지만, 서북변의 위협을 눈치챈 것이 곽회 뿐이고 사마의가 이를 승낙해서 막을 수 있었다는 건 다른 위의 장수들은 제갈량이 서북변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드는 것을 아예 눈치채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옹양주는 이 시점까지도 아직 위에게 완전히 복속당한 것이 아니었고 당시 위가 옹양을 차지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의 북벌에서 천수와 안정, 남안이 흔들린 것처럼, 여기서 촉이 장기적으로 주변을 천천히 장악하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5차 북벌, 오장원 주둔이다. 오장원의 위치상, 촉이 꼭 장안을 먹지 못했다고 해도, 오장원에서 하던대로 둔전하면서 길게 농성할 수 있다면 이 주변의 군사, 행정력을 촉이 점차 늘려감으로써 위의 관중과 옹양주에 대한 지배력이 크게 흔들리게 되며, 이 지역 이민족과 백성들의 인심을 잡고 있던 마초부터 이어지는 마대 일가-강유의 위상을 바탕으로 관중-옹양 겸병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5차 북벌에서 괜히 강유와 마대의 이름이 보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실제 제갈량이 죽었을 때 그전까지는 싸우려 하지 않았으면서 그제서야 후퇴하는 촉군을 추격하다가 촉군이 기수를 돌려 공격하려 하자 바로 퇴각해 본진에 틀어박힌 사마의를 보고 백성들이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말을 지어 불렀으니 당시 관중 백성들이 촉군과 위군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즉 오장원은 이 기세를 바탕으로 급격히 위를 치기보다, 오장원을 거점으로 위의 옹양주 지배력을 줄이고, 반대로 촉의 지배력을 늘리면서 내실을 다지기 위한 북벌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갈량은 사마형제의 관서부흥책을 역이용해 이 지역에서 둔전하며 안정적인 세력확보를 통해 한동안 삼국의 균형을 이루고 안정세를 이룰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아니 고려했으나 도저히 어쩔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제갈량 본인의 건강과 수명 그 자체였다.


5. 정사 삼국지의 오류[편집]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 교수인 최진열 교수는[9] 오장원 전투에 오류가 많다고 주장한다. 자세한 것은 오장원 전투 문서 참조


6.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오장원 전투[편집]


삼고초려 끝에 유비에게 출사해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유비의 뜻을 따랐던 제갈량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대목이라 독자들의 눈물을 빼낸다. 괜히 "삼국지 읽다 책 세 번 집어던질 때" 중 하나를 이 추풍오장원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10]

나관중은 이 부분을 지으면서 극적인 부분을 많이 넣었는데 이 덕분에 공명이 세상을 뜨는 이 장면은 독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한다. 나관중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볼 수 있다.

우선 초주가 재이를 논하며 북벌을 반대하자 공명은 "신 량이 기산으로 다섯 번 나갔으나, 아직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했으니, 지은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11] 신이 이제 다시 전부(全部)를 통솔해, 다시 기산으로 나가서, 맹세코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 바쳐, 한적(漢賊. 한나라의 역적)을 초멸(剿滅)하고, 중원을 회복하는데, 국궁진췌(鞠躬盡瘁. 공경하고 근신하며, 마음과 몸을 바침)하겠사오니, 이것은 제가 죽은 뒤에야 멈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즉 공명의 죽음으로 북벌이 끝난다는 복선을 여기서 붙여 넣는 것이다.

한편 정사는 둘째치고 연의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상장 관흥의 죽음의 소식이 들려오자 공명이 목놓아 크게 통곡하더니 혼절해 바닥에 쓰러져, 한참을 지나서야 깨어난다. 장수들이 이제 그만 마음을 풀라고 거듭 권하자, 공명은 한 사람의 상장도 아까운 마당에 관흥을 잃었다며 탄식한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관흥이 관우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관흥의 죽음은 일정한 상징성도 보이는 것이다. 또 이 역시 그 자체로도 복선이 되는데 "가련하구나! 충의로운 사람에게 하늘이 긴 수명을 내리지 않다니! 내 이번에 출사하면서, 다시 한 사람의 대장을 잃는구나!"라고 말하는 공명이지만 촉한에서 가장 충의로운 사람이 공명임을 감안하면 이건 그 자신에 대한 얘기도 되는 것이다.사망 플래그인 셈.

공명은 다시금 기산으로 출신하지만 이번엔 사마의에게 공격을 당해 병사가 상한다. 이전까지 사마의를 압도하던 장면을 생각하면 공명의 북벌이 험난해졌음을 보여주는 장면. 물론 호로곡 전투에서 공명은 중달을 거의 죽일 뻔하고 위나라 병사의 태반을 상하게 하는 대승을 거두지만 정작 큰 비로 인해 원 목적인 중달을 태워죽이는 데는 실패한다. 공명은 목표가 실패함을 아쉬워하며 모사재인 성사재천을 외치는데 일은 사람이 하나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는 것이다.[12] 이는 이후 공명이 수명이 다했을 때 별에 기도를 하여 수명을 늘리려는 시도가 '반골' 위연에게 의해 방해되어 실패하는 장면과도 합치된다. 독자들은 사마중달을 잡지 못해 대한의 부활이 무산되고 모욕을 당하고도 중달이 더이상 나가 싸우지 않으며 공명의 병이 깊어져 더이상 북벌을 진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膵 死而後已)"라는 말로 상징되는 제갈량의 노력이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成事在天)"라는 명대사로 표현되듯이 하늘 앞에 무너지고 그 자신도 죽음을 맞는다. 조금만 더 하면 대사를 이를 수 있을 것 같음에도 하늘이, 운명적으로 그의 대업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가을 바람이 부는 오장원에서 공명은 세상을 뜨고 독자들은 유비에서부터 이어진 촉의 대업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탄식하며 책을 집어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 관우나 유비가 죽었을 때는 공명이라는 신선과도 같은 든든한 존재가 있었기에 그나마 계속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 공명마저 세상을 등지니 독자들은 '이대로 촉이 무너지는가'라고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공명의 목상으로 사마중달을 내쫒아 사공명주생중달을 이루나, 이는 공명이 살아있었다면 사마의 쯤은 무너뜨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독자들의 아쉬움을 더욱 남기는 에피소드이다. 공명이 퇴장하는 화가 모종강 연의 104회이고 이때부터 남은 회수가 고작 16회이니 사실상 주인공들이 세상을 등진 이후 후일담처럼 진행된다.

그나마 스승 제갈량의 뜻을 이은 강유가 고군분투하지만 이때 이후로 촉은 약해지게 되고, 강유가 몇 번 출전한 것(구벌중원 九伐中園)[13]을 제외하면 더 이상 공세를 펴지 못한다. 정사에서 압도적인 수세로도 이긴 왕평흥세 전투이 나오지 않아서 이런 부분이 더욱 부각되는데 차라리 흥세 전투를 넣었다면 죽은 공명의 심모원려를 넣을 수도 있어 촉을 응원하는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었겠으나, 연의는 이를 생략하고 이후로 촉이 천천히 무너지는 장면만 보여주게 된다.

장완동윤, 비의가 연달아 죽고, 황호 때문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며, 아들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이 다시 그의 목상을 내보내자 위군이 "아직도 공명이 살아있었구나!" 하며 도망치는 모습은 "제갈량이 살아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준다.

이후 전투는 극히 줄어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삼국지에서는 추풍오장원 후 "장완과 비의가 죽자 유선황호에게 꾀여 뻘짓하고, 손권의 후계자들도 뻘짓하다가 결국 차례대로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의 진나라에게 헌납한다."로 끝낸다. 그리고 위오촉을 멸하고 삼국 통일한 사마염의 서진도 똑같이 막장테크를 타다 흉노족 유씨의 전조에게 망하고 전조의 유총도 서진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중국은 삼국지와 오호십육국을 거쳐 수당에 이르기까지 혼란의 연속만 이어진다.

다만 연의는 이 장면을 집어넣지 않아서 책을 읽는 독자들의 시름을 그나마 덜어준다. 사실 후삼국지 같은 물건도 있으나 연의의 주제 의식을 생각하면 이런 엔딩이 가장 적절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는 역사소설이라는 본연의 장르에 비교적 충실한 작품이라 삼국시대라는 한 시대를 비극으로서 조명하고 굳이 여기에 사족을 넣어 새로운 희망이나 새로운 절망을 더 붙여넣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삼국시대라는 한 시대를 종결을 조망하면서 그 시대의 흐름을 담담히 인정하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히 세월의 허망함과 비극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소위 후삼국지, 반삼국지 류나 그 뒤를 이어 현대에 범람하는 삼국지 대체 역사 소설들과 연의가 차별되는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謀事在人成事在天, 모사재인성사재천)


사마염이 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은 결국 유비, 관우 제갈량, 조조 등 모든 영웅들의 노력이 대부분 허사로 끝났음을 보여주며, "뒷사람들 탄식하며 공연히 가슴 설레네!"(後人憑弔空牢騷)라는 마지막 문장은 권력다툼과 영웅들의 활약이 긴 역사 안에서 갖는 본질적인 허망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두보의 촉상(蜀相)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7. 삼국지의 실질적 완결[편집]


고우영 삼국지, 정비석 삼국지, 와이파이 삼국지 등 대부분의 삼국지가 여기에서 결말이 압축되어 완결된다.

사실 연대상으로는 삼국지의 시작인 황건적의 난(184년)부터 이 시점까지의 기간과, 이 시점부터 오멸망전(280년)까지의 기간이 거의 비슷하다.[14] 삼국지 백년 중 중간의 일이며 이 뒤로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고 거기서 파생된 고사성어(대표적으로 파죽지세라든가... 중국에서는 많이 쓰이는 "사마소의 마음은 길거리 행인도 안다(司馬昭之心路人皆知)" 등도 있다.)도 현대에 많이 쓰임에도 불구하고 매체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 편.

보통 추풍오장원 이후의 기간을 삼국지 후반부라고 칭하며 많이 생략되거나 대접을 잘 못받는 부분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잘해봐야 삼국지 후반부에서 역사의 가장 큰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대사건들인 고평릉 사변이랑 촉한멸망전 정도만 어느 정도 비중을 가지고 그려지는 정도.

추풍오장원 이후로 전반부의 핵심인 영웅담으로서의 성격이, 사실상 군웅할거를 겪었던 마지막 영웅이라고 불릴 만한 제갈량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물론 제갈량과 동세대 거물이고 그 전에도 주요 인물로써 대활약했던 사마의, 손권, 육손 등은 제갈량 사후에도 잘 활동하지만 아무래도 그동안 받았던 비중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거기다 사마의는 오히려 이 시기부터가 인생의 전성기이나 영웅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안 좋은 이미지가 있고, 손권 역시 말년에 초대형 사고를 터트렸다.

이 시기 이후엔 삼국이 불안정했던 난세에서 삼국 체제가 확실히 정립이 되어 어느 정도 고착화 되었기에 각 세력 내부의 정치극으로써의 요소가 훨씬 강해져서[15] 이야기의 성격이 많이 바뀌는 것도 있다.[16]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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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기에 북벌전에는 대단히 희소식까지 들려왔다. 상용의 맹달이 다시 촉에 귀순한다는 것이다. 상용은 한중에서 형북지방을 잇는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이다. 비록 형주는 잃었지만 상용이 다시 촉한의 영역이 된다면 굳이 진령산맥을 넘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상용에서 직접 남양을 노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사마의가 맹달의 목을 날리고 마속이 등산을 하면서 모든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비록 상용을 얻지 못해도 가정을 틀어막으면 장안에서 오는 위의 지원병을 차단할 수 있고, 조운vs조진, 곽회vs고상이 지리하게 진행되는 동안 본대를 들어서 한쪽부터 각개격파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관서지방을 안정적으로 확보한다면 판세를 길게 보고 전략을 짜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를 바꿀수도 있었던 전쟁이 맹달과 마속 2명의 실책으로 날아간 셈 (물론 마속의 경우에는 그를 기용한 제갈량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2] 강유는 제갈량보다 한술 더 뜬 계획을 세우는데 답중지방(한중의 서쪽에 위치)까지 전선을 확대하여 강족과 연대하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강유가 북벌을 지휘하던 시기 촉한의 한정된 자원으로는 제갈량처럼 기산으로 진격하여 옹양주 전체를 흔들 수 없었기 때문에 답중에서 농서를 직접 노려 양주를 혼란시키고 그렇게 양주가 점령되면 양주에서 옹주로 전역을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답중지방은 강족과 연대가 대단히 쉽다는 이점도 있었고.[3] 공손연이 사마의에게 관광당한 이미지이지만 사실 공손연의 반란 자체는 동방에 있는 고구려의 원군까지 동원해야 했을 정도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4] 유목민족에게 있어서 소금은 가축을 키우는 데 거의 필수적인 요소다. 또 비단옷감은 당대 최고의 방한복으로도 손색이 없고, 귀한 사치품이기도 했다.[5] 실제로 강족과 연계된 사람들 중 마초는 영 양주목, 강유는 영 양주자사로 북벌 사령관 역할을 맡고 있다.[6] 그런 의미에서 5차 북벌에서 확고부동한 1인자를 잃은 촉군이 후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걸 이해하지 못해 닥치고 공격을 주장하다가 팀킬을 저지른 위연은 결국 이런 전략적인 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7] 다른 것도 아니고 제갈량이 발명한 강력한 무기인 원융노였을 것이다. 사마의는 위수를 넘어왔다가 꼼짝없이 무공수 건너편 촉군 본대의 집중사격을 측면에서 받은 셈이다. 맹염의 부대와 맞서는 와중에 측면에서 이렇게 공격받고, 결국 다리가 완성되어 촉군 본대까지 도하해 공격에 나서려하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봐야 한다.[8] 당장 이로부터 10년 후 흥세 전투에서 위나라는 6~7만에 가까운 대군을 대부분 잃고 20년간 촉한의 공세에 방어로만 일관했으며, 30년 후 강유의 한중방어선 계책이 성공했으면 강유에게 옹주를 내줄 수 밖에 없다고 하는 말까지 나왔다.[9]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 교수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갖고 있으며, 수많은 역사책을 출판했는데 2008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 도서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10] 나머지 둘은 각각 관우가 죽는 형주공방전과 유비가 죽는 장면(도원종언). 장비가 암살당하는 장면은 너무 어이없고 김새서인지 잘 꼽히지 않는다.[11] 연의상으로도 무도와 음평은 제갈량이 차지하니 이건 수사적인 표현이다. 다만 여기서는 무도는 강유가, 음평은 왕평이 점령한다.[12]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과도 유사.[13] 더구나 이 때는 대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제갈량의 북벌과는 달리 등애에게 대패도 당했다. 이 사실이 추풍오장원을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14] 삼국지 96년 대서사 중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50년 후, 삼국통일로부터 46년 전이다.[15] 조위는 사마의 가문의 찬탈, 손오는 이궁지쟁제갈각, 손준&손침 형제, 손호의 만행 등으로 세력간의 전쟁보다 세력 내부의 알력 다툼이 비중이 훨씬 커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나마 강유의 북벌 정도가 존재한다.[16] 이렇게 영웅담, 군담으로써의 모습을 과감히 버리고 정치극으로써의 요소를 극대화해서 삼국지를 풀어낸 작품이 바로 대작이라 불리는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이다. 드라마 이름처럼 사마의가 주인공이기에 추풍오장원이 스토리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클라이맥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며, 여타 삼국지 매체들과는 달리 사마의가 군을 직접 지휘하는 제갈량의 북벌을 제외하면 전쟁 장면이 거의 전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