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전쟁

덤프버전 :



축구전쟁
La guerra del fútbol / Guerra de las 100 horas
Soccer War / Football War(영어)


파일:Guerra-e1362463563768.jpg
▲ 축구전쟁 당시 온두라스군
기간
1969년 7월 14일 ~ 7월 18일
장소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원인
이민자와 국경 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갈등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display: none; display: 엘살바도르"
행정구
]]

[[온두라스|
]] 온두라스
지원국 및 지원 세력

[[니카라과|
니카라과
display: none; display: 니카라과"
행정구
]]

지휘관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파일:온두라스 국기(1949-2022).svg 오스왈도 로페스 아레야노
병력


피해규모


결과
휴전협정
영향
엘살바도르 내전 발발

1. 개요
2. 배경
3. 진행 과정
4. 양측에 끼친 영향
5. 결과
6. 뒷이야기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69년 중앙아메리카온두라스엘살바도르가 100시간 동안 벌였던 전쟁으로 1970년 월드컵 북중미 예선 준결승전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축구전쟁이라고 불린다. 물론 축구가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두 나라 간에 쌓여있었던 악감정이 터지는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1] 전쟁은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이어진 단기전이었지만 실제 전투행위는 7월 29일까지 계속되었고 철군은 8월 3일에야 완료되었다. 전쟁의 후유증은 더욱 커서 엘살바도르 내전이 발발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2. 배경[편집]


엘살바도르온두라스에 비해 면적이 1/5 정도에 불과했지만[2], 인구는 언제나 더 많아서 인구과잉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3] 사실 단순히 땅이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엘살바도르 내에서 농지로 쓸 만한 땅을 이른바 14가문[4]을 비롯한 극소수 부유층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일반 중소농들이 일굴 수 있는 땅은 더더욱 적었다. 당시 엘살바도르 독재 정권은 이들 특권층과 유착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토지 독점을 딱히 해결하지 않았으며 당시 급속히 진행되고 있던 산업화로도 인구과잉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보니 상당수 엘살바도르인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땅이 널널한 온두라스로 이주하였다. 20세기 초 온두라스는 땅은 크지만 노동력은 부족했으므로 엘살바도르인의 이민을 환영했다. 심지어 미개척지를 개발할 경우에는 토지도 무료로 제공했다. 1969년에 이르면 온두라스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인 이민자는 30~50만에 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온두라스 정부는 엘살바도르인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엘살바도르인이 온두라스로 대거 이주하면서 현지인과 빚는 갈등이 자연히 많아졌고, 게다가 온두라스의 인구 증가와 농업기술 발달, 목초지 및 면화 농장의 확대로 인해 이들 이주노동자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애초에 온두라스도 노동력이 부족했지, 국토 면적에 비해 토지사정은 의외로 여유가 없었다.[5] 여기에 엘살바도르 공산품의 온두라스 시장 유입, 기후로 인한 국경선 확정 문제로 충돌이 잦았다.

결국 온두라스에서는 1962년에 새로운 토지개혁법을 발표하여 1967년에 발효했다. 이 법은 엘살바도르 이주민들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토지를 환수하여 자국 빈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중남미에서 수십년 동안 토지개혁이 화두로 나오던 상황에서 엘살바도르인의 토지를 자국 내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면 온두라스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나눠주지 않고도 충분히 달랠 수 있다는 계산으로 통과된 법안이었다. 온두라스 대지주와 대기업들이 주도한 이 토지개혁에 의해 수천 명의 엘살바도르 노동자들이 추방되었고, 엘살바도르가 이에 강하게 항의하면서 팽팽한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가뜩이나 감정이 안 좋을 때 두 나라 간의 1970년 월드컵 예선전이 벌어지자 관중들 간의 충돌에 각종 방해공작이 판을 쳤다. 온두라스에서 벌어진 1차전에선 온두라스 시민들이 엘살바도르 선수단 숙소 바로 옆에서 밤새도록 급조한 축제를 벌였으며 반대로 엘살바도르 홈경기 2차전에선 엘살바도르 국민들이 돌과 썩은 달걀, 죽은 쥐를 숙소 창문에다가 집어던지는건 물론이요 호텔 요리사가 대량의 설사약과 수면제를 넣은 요리를 경기날 아침 온두라스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또 엘살바도르 홈 경기장에 온두라스 국기 대신 웬 꼬질꼬질한 천을 온두라스 국기랍시고 걸어놓았다고 한다.

이런 방해공작 속에서 1차전은 온두라스가 1:0으로, 2차전은 엘살바도르가 3:0으로 승리를 나눠가지면서(각자 홈 구장에서) 1:1(=1승 1패)이 되었다. 이 당시에는 골득실이나 원정 다득점 같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1:0으로 이기나 10:0으로 이기나 똑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만 잘 처리했다면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골득실이나 원정 다득점 같은 복잡한 룰이 만들어진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었다. 축구 때문에 시작된 전쟁은 아니었으며 축구는 마치 제1차 세계 대전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 사건인 사라예보 사건을 시작으로 터졌던 것처럼 단지 기폭제 및 침공 명분이 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1차전이 온두라스의 승리로 끝나자, 엘살바도르의 한 열혈 축구팬 소녀가 패배의 충격으로 권총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살의 아멜리아 볼라뇨스라는 이 소녀는 경기 막판에 온두라스 선수 로베르토 카르도나가 골을 넣어 승리를 가져가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그 길로 책상에 있는 아빠 권총으로 자살해버렸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이 소녀를 국가적으로 추모했고, 방송으로 생중계된 이 소녀의 장례식에는 엘살바도르 축구대표팀, 군 의장대, 심지어 엘살바도르 대통령까지 참석했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달아오른 국민 감정을 더욱 부추겼다.

결국 유혈사태를 우려한 FIFA가 3차전을 제3국인 멕시코에서 열었다. 멕시코는 경기 중 일어날 수 있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10만 명이 입장할 수 있는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에 2만 명만 입장시켰으며, 그마저도 관객보다 경찰이 많았을 지경이었다. 이런 FIFA의 노력에도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이기면 외교 단절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지경이었다. 6월 27일에 벌어진 3차전의 결과는 연장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했다.

온두라스 국민들은 자국 국가대표팀이 패하자 반 엘살바도르 감정이 폭발하여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린치를 벌였다. 이 사태를 구실로 엘살바도르는 7월 14일 민간 여객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의 공군기지를 기습 선제공습하며 결국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민자 문제, 경제 문제, 정치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곪아왔던 두 나라 간 적개심이 축구를 계기로 폭발한 셈이다. 때문에 군대는 물론이거니와 농민들까지 서로 민병대를 조직해서 엽총과 농기구로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전 이후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이미 1968년부터 엘살바도르군은 온두라스 공격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3. 진행 과정[편집]


전쟁은 7월 14일 18시 10분 엘살바도르 공군의 온두라스 군사시설 폭격으로 시작했다. 이날 엘살바도르 육군은 1만 2천명의 병력으로[6] 두 개의 도로를 통해 두 방면에서 신속히 진격하였다. 온두라스군은 갑작스런 기습공격을 당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고, 7월 15일 저녁까지 하루만에 8km 이상 후퇴하였다.

축구전쟁의 전선은 크게 엘살바도르 북서부 찰라테낭고, 북부, 그리고 동부 전선 이 3개로 나뉜다. 전투는 그 중에서도 북부와 동부 전선에서 벌어졌다. 처음 엘살바도르 육군은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를 향해 빠르게 진격했고 오코테페케 주(Departamento de Ocotepeque)의 주도인 누에바 오코테페케(Nueva Ocotepeque) 시와 다른 8개의 도시를 점령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 육군의 쾌속진격은 얼마 안가 온두라스 공군의 제공권 장악과 보급 문제 때문에 그 기세를 상실하고 말았다.

온두라스의 이점은 우세한 공군 전력이었다. 개전 직전 온두라스 공군 대 엘살바도르 공군의 전력비는 2.5:1에 달했다. 온두라스는 기습의 충격에서 곧 회복하여 제공권을 장악했고 15일 엘살바도르의 일로팡고(Ilopango) 공군기지와 원유 시설을 타격하고 엘살바도르군의 보급을 차단하면서 공세를 약화시켰다.

16일 이 사태를 보다 못한 미주기구(사실상 미국)에서 사건에 개입하자, 17일 엘살바도르 정부는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인들의 안전과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지 않으면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섰다. 그러나 세계 최강국이 외교 압력을 가하자, 7월 18일 정전이 선언되며 100시간에 달하는 이 전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미주기구 발표에 따르면 중앙아메리카 시각으로 18일 22시부터 정전에 들어가고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자기 점령지에서 96시간 내로 철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군은 정전협정 후에도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온두라스 영내로 계속 진격하여 온두라스 태평양 해안지대 바예 주(Departamento de Valle)의 주도 나카오메(Nacaome)를 포위, 테구시갈파와 나카오메를 잇는 간선도로를 차단했다. 7월 29일에야 엘살바도르가 철수를 선언하고 8월 3일 철수를 완료했다.[7] 이에 온두라스군도 무단으로 엘살바도르의 6개 마을을 점령하고 버티는 바람에 정전 이후에도 한동안 소규모 충돌은 계속되었다. 이 충돌은 미군을 포함한 미주기구 정전감시단이 수습하여 되었으나, 최종 평화협정은 10년이란 세월이 더 흐르고서야 체결되었다.


4. 양측에 끼친 영향[편집]


전쟁 후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은 엉망이 되어서 오랫동안 그 후유증에 시달렸다.

엘살바도르는 공식적으로 전사자 107명을 포함 총 700명의 사망자를 냈다. 미주기구의 경제제재를 받은데다 온두라스가 30만에 달하는 불법 이주자 중 상당수를 추방하면서 대규모 난민을 떠맡게 되어 빈민층 급증으로 사회 불안과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또한 온두라스와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면서 자국의 주요 공업제품 판로 중 하나를 상실하였다.[8] 여기에 좌익 반군의 발흥과 오일 쇼크 때문에 식료품 값이 상승하고 토지 부족이 더 심화되며 농업생산력은 파국을 맞았다. 토지 개혁이 해법이라는 주장이 사회 각계에서 나왔지만 엘살바도르의 정계를 지배하던 군부와 엘리트층의 반발로 또다시 무산되었다.

결국 불만이 쌓이고 쌓이면서 이에 FMLN 등 좌익 반정부군이 정부를 공격하면서 결국 엘살바도르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FMLN은 수도 산살바도르를 점령하여 기존 정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두 차례의 대공세를 펼쳤으나 정부군에게 밀려 패배했으며 결국 1992년 유엔의 중재 아래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내전은 막을 내렸다.

국토가 전쟁터가 된 온두라스는 공식적으로 99명의 전사자와 2천여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났으며 수천여명이 거리에 나 앉았다.[9] 거기다 상당한 농지가 쑥대밭이 되어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온두라스는 울화통을 터뜨리며 재침공에 대한 불안에 떨다가 결국 미군 주둔을 허용하게 되었다. 한편 온두라스 정부는 엘살바도르인들이 무단 점유한 토지를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나눠준다고 했으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는 대부분의 토지가 대지주와 대기업에 넘어가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이후 온두라스는 토지 배분 과정에서의 부패로 정국혼란이 가중되던 와중에 1972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1981년 민주화 이전까지 9년간 군사 독재 정권이 온두라스를 지배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 온두라스 대통령으로서 전쟁영웅이 되어 한 동안 인기가 고공행진했던 오스왈도 로페즈 아레야노[10]가 1971년 민주선거에서 자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1972년에 쿠데타를 또 일으켜서 집권했다가 미국 바나나회사인 치키타에 뇌물을 받은것이 들통난 뒤에 1975년 쿠데타로 자신의 친구인 후안 알베르토 멜가르 카스트로에게 축출되었다는 웃지못할 일이 있었다. 그래도 내전에 휘말린 이웃국가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태평한 나날을 보낸 편이다.[11]

결국 둘 다 농업 국가라서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면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경제 구조였으나 근시안적으로 전쟁을 벌이며 피해를 입었다.


5. 결과[편집]


전쟁으로 벌어진 인명피해 추산은 다양하다. 3,000~4,000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될 뿐인데 그 대다수가 보복성 학살 피해자이다.

전쟁이 끝난 지 11년이 지난 1980년에 공식적으로 종전했으며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둘다 치안과 빈부격차로 골머리를 앓는 나라였기에 이후 그럭저럭 잘 지내는 듯하다.

간혹 교양서적에선 엘살바도르의 승리로 판단하는 서술도 있지만 엘살바도르 또한 전쟁 전 수립했던 목표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전쟁사에선 일방적인 침공에 따른 방어전에 성공했을 경우 보통은 방어 측이 더 많은 손해를 입었더라도 이겼다고 평가하는 편이다. 막는 쪽이 전장이 되니 손해가 큰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는 전술적 손익이 아닌 전략·정치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가지고 판단한다. 조선이 얼마나 황폐화되었던 간에 임진왜란의 승자가 조선과 명인 것처럼.


6. 뒷이야기[편집]


18일 정전 후에도 한동안 전투는 계속 벌어졌다. 7월 20일에는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달 착륙 중계를 보느라 임시로 휴전하고 중계방송이 끝나자 전투를 재개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전쟁에서는 2차 세계대전한국전쟁 시절 같은 연합군 진영에서 사용되던 전투기인 P-51 머스탱과 FG-1D 코르세어(F4U 콜세어의 굿이어사 라이센스판) 간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온두라스 공군 소속 코르세어를 조종하여 7월 17일 하루만에 엘살바도르 공군기 2기(P-51을 개조한 캐벌리어 머스탱 II 1기, FG-1D 코르세어 2기)를 격추시킨 페르난도 소토 엔리케스는 일약 전쟁영웅이자 국제적인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전쟁의 원인이 양국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인 소수 대지주들의 토지 독식과 깊게 연관되었고 축구전쟁으로 양쪽이 얻었던 것도 없기 때문에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불의 기억》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한 세기 반 전까지도 하나의 공화국에 속했던 중앙아메리카의 두 나라가 축구 때문에 적이 되어 싸운다.

작은 농업 국가인 온두라스는 소수의 대지주들에 의해 지배된다.

작은 농업 국가인 엘살바도르는 소수의 대지주들에 의해 지배된다.

온두라스는 쿠데타로 태어난 군사 독재 정권이 통치한다.

엘살바도르는 쿠데타로 태어난 군사 독재 정권이 통치한다.

파나마에 있는 미국의 '아메리카 학교'에서 교육받은 장군들이 온두라스를 다스린다.

파나마에 있는 미국의 '아메리카 학교'에서 교육받은 장군들이 엘살바도르를 다스린다.

온두라스의 독재자는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고문관을 공급받는다.

엘살바도르의 독재자는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고문관을 공급받는다.

이제 온두라스의 독재자는 엘살바도르의 독재자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고용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제 엘살바도르의 독재자는 온두라스의 독재자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고용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전쟁을 하는 동안

온두라스 민중은 자신들의 적이 엘살바도르 민중이라고 생각하고

엘살바도르 민중은 자신들의 적이 온두라스 민중이라고 생각한다.

1주일간 지속된 두 나라의 전쟁은 4천명의 죽은 자를 남겼다.


국기도 비슷하다
공교롭게도 이 두 나라는 현재 전 세계에서 살인율 1, 2위를 나란히 달리는 국가다(...). 2015년 기준 엘살바도르가 인구 10만명당 108.64건으로 압도적 1위,[12] 63.75건의 살인이 발생한 온두라스가 2위를 차지했다.

축구전쟁 이후 중남미 예선 결승에서 아이티마저 이기고 월드컵 본선에 올라간 엘살바도르는 벨기에전 0:3 패, 멕시코전 0:4 패, 소련전 0:2 패로 3전 전패 무득점 9실점이라는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13년 후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양 팀 모두가 올라갔으나 둘 다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특히 엘살바도르는 이 대회에서 헝가리10:1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완패하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 만난 월드컵 예선인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북아메리카 지역 최종 예선의 경우 온두라스가 단독으로 진출하면서 40년만에 한을 풀었다.

FIFA 시리즈인 '2006 FIFA 월드컵'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와의 배경으로 한 도전 과제가 나왔으며 '축구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쇼킹한 게 딱 좋아라는 만화책에서도 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여기선 5일 전쟁이라고 나오고 1월 13일에 시작되었다고 나오며 엘살바도르가 승리했다고 나온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전쟁을 다뤘다.#

역사의 시대 2라는 전략 게임에서 football war 라는 이름으로 등장.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두 나라의 영역에서 싸우는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축구전쟁 때문에 이후 FIFAUEFA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관계인 나라 간의 경기를 불허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동 팀들과 이스라엘,[13] 러시아 혹은 벨라루스우크라이나[14],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세르비아 혹은 보스니아코소보, 스페인지브롤터 같은 관계는 한 대회에서 같은 조에 배정하지 않는다. 같은 조에 배정했다간 FIFA와 UEFA는 물론 개최한 국가 측에서 경찰 배치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골치아파지기 때문이다.[15] 대한민국과 북한, 중국과 대만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만만치 않게 서로 사이가 나쁨에도 여기 포함되지 않아서 이들은 같은 조에 배정될 수 있다.


7.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9 05:46:31에 나무위키 축구전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스페인이 침공하기 전 마야 문명에서 축구와 유사한 경기가 있었지만 여기선 이긴 자들이 오히려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중남미 선수들은 자책골 넣으면 처벌을 각오해야 했다.[2] 21,041km2로 경상북도보다 살짝 큰 정도다.[3] 1969년 엘살바도르가 370만명에 온두라스가 260만명으로 40% 더 많았다. 인구밀도를 단순계산하면 7배나 된다. 현재는 엘살바도르 650만명에 온두라스 1,000만명으로 추월한 상태이다.[4] 이들은 엘살바도르 경제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은 탓에 8개 가문 정도로 축소되었다고 한다.[5] 엘살바도르와 달리 온두라스는 크기만 컸지(소위 중앙아메리카의 티베트) 국토 대부분은 살인적인 무더위와 폭우 때문에 경작은커녕 살아남기도 벅찬 밀림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경작지(cultivated land)는 서부의 일부 협소한 지역에 한정되었고 그 면적은 국토의 8%(1983) 정도로 비슷한 시기(1980) 엘살바도르의 경작지보다 아주 약간 넓은 정도였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국토의 40%가 경작지였다. CIA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오늘날에도(2018) 온두라스는 국토의 13.1%만 경작지인데 반해 엘살바도르는 44%가 경작지다. 이제 인구는 온두라스가 더 많은데 농촌 주민 비중은 엘살바도르보다 훨씬 크니 여전히 여유없는 것은 마찬가지다.[6] 대부분 보병으로 한국군 약 1개 사단보다 조금 많은 규모다.[7] 미국은 당시 벌이던 베트남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더라도 중남미 지역만큼은 무조건 개입을 했는데 분쟁이 일어나면 미국 입장에선 좋을리 없기 때문이다.[8] 엘살바도르는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을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급속히 공업화하고 있었다.[9] 전사자 추산치는 최대 250명까지 올라간다.[10] 1963년에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축구전쟁 이전에는 인권침해 등으로 입지가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다.[11] 내전은 없었지만 군대가 반정부세력을 초법적으로 살해하는 건 이 나라도 빈발했다. 3-16첩보대대라는 처형부대에 의해 최소 184명이 강제실종된 것으로 파악된다.[12] 이는 0.7건인 한국의 150배 가까운 수치다.[13] 이쪽은 중동 국가들 때문에 아시아 국가임에도 유럽 예선에서 경기를 치러야만 한다. 중동 국가들 중에서는 잘하는 팀들이 많은데다 중동 국가들도 한둘이 아니니 다른 조에 배정하는 것도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14] 2022년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월드컵 유럽예선 플레이오프에서 러시아를 제외시켜버리면서 없던 일이 돼버렸다. 단 벨라루스는 IOC만 제외되었다.[15] 올림픽도 검은 9월단 이후 개최한 국가는 재수없으면 쪽박 차는 신세가 되었다. 특수부대 배치 비용이 어마어마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