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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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5대 국왕
충렬왕 | 忠烈王

파일:고려경릉.jpg
'경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 전경
출생
1236년(고려 고종 23년) 4월 3일
고려 강도[1] 강화군 별궁[2]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즉위
1274년 7월 22일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강안전
(現 개성시)
사망
1308년 7월 30일 (향년 72세)
고려 승천부 신효사[3]
(現 개성시)
능묘
경릉(慶陵)
재위기간
고려의 왕태손
연대 미상 ~ 1259년 7월 21일
고려 왕태자
1260년 9월 8일 ~ 1274년 7월 22일 (13년)
제25대 국왕
1274년 7월 22일 ~ 1298년 3월 2일 (23년)
고려 태상왕
1298년 3월 2일 ~ 1298년 9월 24일 (6개월)
제25대 국왕 (복위)
1298년 9월 24일 ~ 1308년 7월 30일 (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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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심(諶) / 춘(賰) → 거(昛)
부모
부왕 원종
모후 순경왕후
형제자매
4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제국대장공주, 정화궁주
자녀
4남 3녀
종교
불교
존호
광문선덕태상왕
(光文宣德太上王)

순성수정상승대왕
(純誠守正上昇大王)
시호
고려: 경효대왕(景孝大王)

: 충렬왕(忠烈王)
작호
부마국왕(駙馬國王)
일수왕(逸壽王)
절일
수원천성절(壽元天聖節) → 탄일(誕日)[1]

1. 개요
3. 생애
4. 평가
4.1. 협상의 달인
4.2. 개혁 시도
4.3. 원 간섭기
4.4. 제후국으로의 격하
5. 가계
5.2. 아들 충선왕과의 대립
5.3. 며느리 계국대장공주 개가 책동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고려 제25대 군주이자 "'고려의 첫번째 제후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몽골의 '충렬왕'(忠烈王), 고려의 '경효대왕'(景孝大王)이다. 원래의 휘는 '심'(諶) 혹은 '춘'(賰)이었는데 군주로 즉위한 후에 '거'(昛)로 개명했다. 당시 태자였던 원종 순효대왕 왕전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순경태후였다.[4] 어머니가 제6대 무신 집권자였던 최우의 외손녀였으므로 우봉 최씨 세습 무신정권의 혈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 즉 칭기즈 칸의 후예인 황금씨족 출신 황녀와 혼인한 고려의 첫 번째 군주였다.


2. 묘호, 시호, 존호[편집]


묘호는 없다. 고려가 제6대 성종종묘를 건설한 이래로 처음으로 묘호가 없는 군주였다.[5] 이는 고려가 제24대 원종 시대까지는 자국 임금을 천자로 대우해 고려 황제로서 종묘에 모셨지만(외왕내제) 제25대 충렬왕이 승하하고, 제26대 충선왕 시대부터는 몽골 제국의 대칸 겸 원나라 황제의 제후로서 종묘에 모셨기 때문이다.

충렬왕의 시호는 특이하게 세 가지나 올려졌다. 가장 처음 올려진 건 후계자인 충선왕이 고려가 이전에는 독자적인 시호를 올렸다는걸 감안해 올린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으로, 약칭 '상승대왕'(上昇大王)이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신하국으로써 시호는 황제에게 받아야 하니 금방 취소되었다.

두 번째는 '충렬왕'(忠烈王)으로, 원나라 제3대 무종(武宗) 카이산 칸이 직접 하사한 시호로 잘 알려져 있다. 충렬왕 즉위 이후 고려 조정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본격화된 이후부터는 제30대 충정왕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고려 국왕이 원나라 조정의 시법에 따라 (忠)자 시호를 추증받았다.

마지막으로 받은 시호는 '경효대왕'(景孝大王)으로, 원나라를 싫어한 증손자 공민왕(제31대)이 직접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이다. 보통 '충렬왕'으로 불리지만 두 시호를 합쳐 '충렬경효대왕'(忠烈景孝大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충렬왕이 상왕 재위시 받은 존호는 '광문선덕태상왕'(光文宣德太上王)이었다. 왜 존호가 '상왕'이 아닌 '태상왕'이냐면 고려는 '상왕'을 전부 '태상왕'[6]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권신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 제19대 명종과 제21대 희종도 '상왕'이었지만 칭호는 '태상왕'이었다. 원나라가 작위로 내린 작호로는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국왕'(駙馬國王)과 태상왕이 됐을 때 받은 '일수왕'(逸壽王)이 있다.


3. 생애[편집]


조부 고종(제23대)이 붕어했을 때 태자 왕전몽골에 가 있었기 때문에 사왕(嗣王)이 돌아오기 전까지 태손으로서 대리청정을 했으며[7] 1260년 아버지인 원종이 즉위한 후, 1261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1271년 원나라에 갔으며, 세조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와 혼인했는데, 1274년 원종이 붕어하자 고려에 돌아와 즉위했다. 귀국할 때 몽골식으로 머리를 변발하고, 옷도 몽골식으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서 충렬왕의 모습을 보고 대성통곡하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부왕 원종 시절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한 데다가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사위(쿠르겐)가 되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대칸의 간섭이 심해졌지만 사실 충렬왕도 세조구제 이후로 다루가치를 내보내고, 몽골군을 철수시키며 고려의 복식을 지키는 등 나름대로 나라의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힘썼다. 또한 대칸 겸 황제의 부마라는 위치는 상당한 것이라 아들 충선왕보다도 서열은 낮았지만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도 있었으며 원나라의 사신과 다루가치들도 충렬왕으로부터 술잔을 받을 때는 절을 하고 받아야 할 정도로 함부로 굴지 못했다.

쿠빌라이 칸은 원종 시절부터 일본을 공격한다(정일론)는 방침을 세우고, 일본 가마쿠라 막부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국 즉위하자마자 쿠빌라이 칸은 일본 원정을 실시하여 훈둔을 사령관으로 일본에 파견했고, 충렬왕 즉위 원년(1274년) 고려도 김방경을 사령관으로 한 일본 원정군을 파견했다. 고려군은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태풍[8] 때문에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1281년에도 재차 침공했지만 이 역시 태풍으로 실패했다.[9] 일본 원정 준비 때문에 고려는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었으며, 전쟁 물자 징발로 백성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특히 제주도에 군마를 키우기 위한 목마장을 설치했는데 이 때문에 제주도에 이 많아졌다고 한다. 1290년에는 원나라의 반란 세력이 고려를 공격하는 카다안의 침입이 일어났으며, 이 때 충렬왕의 태도는 가히 가관이었다.[10] 몽골의 침입은 끝났지만 수난이 많은 시기였고, 원나라 역시 속국 고려가 망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물자(공급)에 대한 지불은 확실히 했으며, 1291년 고려에 기근이 들자 무려 쌀 100,000석을 공짜로 주기도 했다.

고려 존호
광문선덕태상왕
(光文宣德太上王)

원 작위
일수왕(逸壽王)
관저
덕자궁(德慈宮)
태상왕 재위기간
1298.01 ~ 1298.07 (7개월)

측근 세력들을 활용하여 왕권이 강화된 후에는 긴장감이 풀어졌는지 잔치와 사냥을 즐겼다. 그 때 당시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무비'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충렬왕은 그녀를 대단히 아껴서 사냥하러 갈 때도 항상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다. 당연히 무비는 제국대장공주에게 질투 및 핍박의 대상이었고[11] 그러던 중 몽골에서 세자 왕원계국대장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가 혼인을 마친 후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당시 세자였던 왕원은 원나라에서 급히 귀국했다. 평소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왕원은 고려로 돌아온 후 어머니의 죽음을 평소에 미움받던 무비 등이 꾸민 소행이라 보고, 무비와 그녀의 측근 40여 명을 죽여 버렸다.[12] 마침 원나라 황실의 부마(쿠르겐)라는 끈도 떨어졌고, 수족마저 잘린 상황에서 충렬왕은 정치에 싫증을 느꼈는지 결국 선위를 결심하여[13] 1298년 1월 세자 왕원에게 양위함으로써 한•몽 혼혈인이었던 왕원이 고려 제26대 국왕에 올랐다. 즉위와 함께 충선왕은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발표했는데 당장 그의 <즉위 교서>에만 봐도 잘 드러난다.[14] 앞으로의 개혁 방안부터 시작해 구체적인 사항까지 세세히 열거했으며 그러한 개혁 정책 중 하나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격하된 기존 관제 복구였는데 이것은 충분히 반원 정책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한 조치였다.[15]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충선왕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과 왕실의 치정 문제로 부자 사이를 모략하는 무리가 생기는 등 여러 문제가 겹쳐 충선왕은 즉위한지 불과 8개월 만에 왕위를 빼앗긴 후[16] 원나라로 끌려가고[17]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1306년 충렬왕파가 충선왕파를 공격했는데, 충선왕의 복위를 막기 위해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 부부를 이혼시켜 충선왕의 권력을 대폭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18] 하지만 충선왕파의 빠른 대응과 1307년 충선왕파가 지지하던 무종 카이산 칸[19]이 즉위하자 충렬왕이 역으로 밀려 원나라 대도에 있던 경수사에 감금당했다가, 결국 충렬왕은 모든 실권을 뺏긴 채 고려로 환국했다.

불곡(不穀)한 자가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보우를 받아 참람히 왕위(王位)를 가지니, 지금까지 35년이었다.

그간 나라는 어려움이 많았고 민은 제 일을 할 수 없었으며, 사악하고 비루한 자가 득세하고 충성스럽고 우수한 자는 사라지니, 모두 덕이 없었던 탓이라 마음 속엔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다만 하늘의 보우로 73년을 살았으니, 지금은 깊은 병에 걸려 낫지 않고 있다. 한번만이라도 심양왕(瀋陽王)을 보고 싶어 편지를 보내 빨리 오게 했지만 대기(大期)[20]

가 먼저 왔으니 얼굴을 맞대기를 기대할 순 없을듯 하다.

아!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으니, 이치가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가 전하고 아들이 받으니, 옛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조종(祖宗)의 기업(基業)과 방국(邦國)의 기무(機務)는 모두 심양왕에게 맡기겠다. 너희 신료(臣僚)들은 오로지 너희의 임무를 다하고 왕이 오길 기다리다 내(予) 유훈(遺訓)을 잃어버리지 말고 전하라.

고려사》<충렬왕 세가> 중, 충렬왕의 유교(遺敎)[21]

[22]


아들과의 정쟁에서 참패하고, 고려로 복귀했지만 충렬왕은 정치에 뜻을 잃고 숙창원에서 살며 사냥과 음주가무 등으로 소일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1308년 7월 신효사에서 향년 73세에 승하했다.[23] 충렬왕 사후 2년 뒤인 1310년 원나라 무종은 충렬왕에게 관작을 추증했다.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인량흥화봉경공신(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寅亮弘化奉慶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 - 부마(駙馬) - 고려국 충렬왕(高麗國 忠烈王)'



4. 평가[편집]



4.1. 협상의 달인[편집]


사냥, 여색, 음주가무에 너무 빠져 정사를 소홀히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충이 심해져 결국 제국대장공주가 말릴 정도였으니 충렬왕은 국왕으로서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다만 이와 별개로 협상에서는 확실한 업적이 있었는데 20년 전 부왕 원종이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받아낸 불개토풍의 약속과 고려의 존속을 구체적으로 확약받고 왔다는 점이다. 충렬왕은 1278년 다시 원나라로 찾아가 20년 전 약속을 빌미로 원나라 주둔군을 고려에서 철수시키고 다루가치를 내쫓았으며, 이후 원나라의 군대나 관리가 고려에 주둔하지 않게 된다.

또한 원나라의 호구 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하기로 했으며, 고려의 독자적인 조세 징수 권한을 확답받은 것도 충렬왕의 업적이다. 덕분에 고려의 백성들은 직접적으로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원나라에서는 '공출'이라며 고려 조정에 요청해 뜯어가기는 했지만 적어도 백성들이 직접 매년 세금을 내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원종 때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은 것도 충렬왕 시기의 일이었다. 1290년에 서북쪽 자비령 이북의 동녕총관부의 땅을[24], 1301년에는 제주도의 탐라총관부를 원나라로부터 돌려받았다. 다만 조부인 제23대 고종 때 빼앗긴 동북의 쌍성총관부는 돌려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훗날 제31대 공민왕이 무력을 써서 탈환했다. 이후 고려의 여몽 관계가 확립된 것은 충렬왕의 업적이니 협상력 하나는 인정해야 할 듯하다.


4.2. 개혁 시도[편집]


사실 충렬왕이 완전히 개혁과 무관했던 것은 아니었다. 홍자번의 <편민 18사>가 이때 나왔고, 이후 고려 국왕들이 개혁 조치를 위해서 설치하는 전민변정도감을 재설한 것도(최초는 원종) 충렬왕이었다.

근데 이 개혁이란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실체를 쉽게 알 수 있는데 원래 원나라는 몽골과 중국식으로 '노비양천제'[25]를 실시하려고 했는데 일천제[26]를 통해 노비를 불려나가던 권세가들과 충렬왕이 이를 맹렬히 반대하여 무위로 돌렸다. 몽골도 어쩔 수 없어 나중에는 크게 문제삼지는 않아 결국 무위로 돌아갔는데 전민변정도감은 한때 해방된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권문세족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이 또한 충렬왕이 귀족들을 믿지 못하여 천출 측근들을 띄우면서 이뤄진 일로 그 측근들도 권문세족화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편민 18사>를 내놓은 홍자번도 권문세족이어서 그의 <편민 18사>는 수취 체제 중심의 온건한 개혁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료들의 부패를 지적한 부분은 대부분 지방관 등 다른 세력에게 돌리고, 권문세족 관련은 사소한 부분만 언급하고 있다. 고려가 시궁창이 되어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충렬왕의 측근 정치, 무능, 부패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유학과 관련해서는 '경사 6학'을 가르치던 국자감을 개칭했는데 이것이 성균관의 전신인 성균감이다. 문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안향의 건의로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기존의 시문 창작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유학 진흥을 꾀했다. 이처럼 고려의 유학 발달에 안향이나 공민왕의 역할만을 기억하지만 의외로 충렬왕의 업적도 만만치 않았다. 다만 이 모두가 큰 효과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대중적으로도 희미하기 때문에 충렬왕은 왕으로서의 업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특히 공민왕 이전의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도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는 하지만 모두 좌절하고, 개혁에 염증을 느끼는 테크를 밟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민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4.3. 원 간섭기[편집]


충렬왕 치세는 원 간섭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로 이때 고려로 원나라의 문물과 풍습이 많이 들어왔다. 충렬왕 또한 원나라에 자주 들락거리며[27] 몽골어를 잘했고, 원나라의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국이 되면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많이 받았고, 원나라에 빌붙은 부원배, 즉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서, 농민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왕은 의복을 몽골식(호복)으로 바꾸게 했는데 충렬왕 4년 7월에 강수형(康守衡)에게 쿠빌라이 칸

"고려의 복색은 요즘 어떠냐??"

고 묻자

“달단의[28]

의복과 모자를 입었고 조서를 맞이하든지 절일을 하례할 때는 고려 의복을 입고 일을 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이

“내가 고려 풍속은 그대로 놔두겠다고 했고,[29]

이제껏 바꾸라고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바꿨다냐?"

라고 의아해했을 정도였다.

1274년 10월 신유일, 충렬왕이 서북면까지 가서 제국대장공주를 영접할 때 왕의 수행원들 중 이분희 등이 변발하지 않은 것을 보고 왕이 심하게 책망했다. 이렇듯 충렬왕 스스로 주변인들에게 몽골 풍속을 강요했으며, 11월 정축일, 왕과 공주 일행이 개경에 도착했을 때는 재상과 관원들이 국청사 문 앞까지 나가 왕 일행을 영접했는데 이때 호복을 입지 않은 대신들을 골라내 회초리로 때렸다고 한다.

문화적인 면으로는 일연삼국유사가 완성된 시대였으며,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간행되는 등 문화적으로 가치있는 서적들이 많이 나왔다. 유명한 고려 가요 <쌍화점>이 나온 시기도 충렬왕 치세로 알려져 있다. 충렬왕이 개인적으로 음악을 즐겼기에 당대 신하들에게 노래를 자주 작곡하게 했는데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서 충렬왕에 대해 "태자때는 학문에 충실하고 성격도 좋아서 잘 나가다가 막판에 참소하는 말이나 듣고 아들하고 싸우며 항락에 빠지는 등 완전히 타락한 왕"라는 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충렬왕으로서도 재위 초기에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힘썼지만 왕권이 강화된 이후로는 정사를 소홀히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나쁜 모습을 보인터라 왕으로서 무책임했던 군주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4.4. 제후국으로의 격하[편집]


(생략)...신하들이 사사로히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30]

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 하고, 유경내(宥境內)를 대사천하(大赦天下)[31]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생략)

《동인지문사륙》서문 중. 1388년 여말 제32대 우왕 치세에 만들어진 서적인 《동인지문사륙》엔 고려가 충렬왕 치세에 관제 격하를 당하기 이전의 모습이 나온다.

부왕 원종때까지만 해도 계속 기존 천자국 제도를 사용하려고 했다.[32][33] 하지만 충렬왕 때부터 다루가치의 반발로 인해 대다수 제도가 크게 격하되었다.

다루가치가 따졌다: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리 참람할 수 있습니까?"

왕은 검의중찬 김방경, 좌승선 박항을 보내 해명했다: "참람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이 오래토록 전해 왔으니 바꾸길 겁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사(赦)[34]

를 유(宥)[35]로, 주(奏)[36]를 정(呈)으로 바꾸었다.

고려사》<충렬왕 세가> 재위 2년 3월 중 발췌.

  • 1276년을 기점으로 많은 왕실 예법이 격하된다. 대표적으로 '선지'(宣旨)가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폐하'는 '전하'로, '표문'(表文)[37]은 '전문'(箋文)[38]으로, '태후'(太后)는 '대비'(大妃)로, '왕후'(王后)는 '왕비'(王妃)로 바뀌었다.

  • 제사 제도 또한 바뀌었다. 천자의 종묘인 '7묘제' 태묘는 제후의 '5묘제' 태묘로 바뀌었고, '묘호'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올려진 묘호는 "X왕"으로 격하되어 원나라에 소개된다.[39]

  • '시호' 또한 스스로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제후국가, 부마(쿠르겐)가 됐으니 시호는 원나라 천자의 시호를 받아야 했다.[40] 제25대 충렬왕 때 시작해 제30대 충정왕까지 원나라의 시호만 받았고, 고려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는 없었다.[41] 그래서 아들 충선왕이 따로 시호를 올렸다가 포기했다.

  • 관제 역시 격하되어 '2성 6부제'에서 '1부 4사제'로 바뀌었다. 충렬왕때는 그나마 훈위, 오등작 봉작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말기에는 봉군제(封君制)를 시행하게 되었다.

  • 고려가 개국 초부터 제정한 '경'(京)도 충렬왕 34년에 폐지되었다.[42] 천자는 '경'(京)과 '부'(府)를 설치해 수도의 범위와 차별성을 정할 수 있었는데, 고려 국왕은 더 이상 천자가 아니었으므로 '경'(京)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 개성부'는 '개성부 개성현'으로 하락했다.[43]

  • '절일' 또한 폐지되었다. 충렬왕 재위 33년 6월 병오일, 절일을 칭하는 것이 참람하다는 이유로 전면 중단되었고[44], 절일은 500여 년 뒤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고종때 겨우 복구되었다.

  • 태조 시대부터 이어져 온 팔관회도 개수되었는데, 《고려사》 <예지> -팔관회- 에 따르면 충렬왕 재위 원년인 1275년 11월에 팔관회가 열렸지만 기존 장식에 적혀있던 '성수만세'(聖壽萬歲)가 '경력천추'(慶曆千秋)로 고쳐졌고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其一人有慶) 팔표[45]가 내정하고(八表來庭) 천하가 태평해진다(天下太平).'
는 문구도 없앴다. '만세'(萬歲)라고 외치던 것이 금지되어 '천세'(千歲)로 바뀌었다. 또한 국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길에 '황토 즉 누런 흙'으로 포장하지 못하게 했다.
바뀌지 않은 것도 있는데, 원나라는 원래 몽골 유목민족이다 보니 한족과 조금씩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의 몇몇 제도는 격하를 피해 갔다. 의복도 그대로 이어졌다. 노랑색 곤룡포는 천자만이 입는 옷이었지만, 원 황실이 고려 왕복의 색깔은 그닥 신경쓰질 않아 몽골풍 옷을 입을 때를 제외하고, 황포를 유지했다. 또한 원구단 또한 살아남았다. 제27대 충숙왕때까지 원구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원구단은 몰래 살아남아 조선 태조 시대까지 이어졌고, 조선시대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대한제국이 개창되면서 부활했다.


5. 가계[편집]


  • 제1비 제국대장공주
  • 제2비 정화궁주
    • 장남: 강양공 왕자(江陽公 王滋, ? ~1308)
    • 장녀: 정녕원비(靜寧院妃) -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혼인하였다.
    • 차녀: 명순원비(明順院妃) - 한양공(漢陽公) 왕현(王儇)과 혼인했다.
  • 후궁: 숙창원비(淑昌院妃) - 김취려의 증손녀이자, 과부 출신으로 충선왕이 무비 일가족 숙청 이후, 아버지 충렬왕에게 바친 여인이었지만 충렬왕 승하 이후 충선왕이 취하는 패륜을 범했다.
  • 후궁: 반주(盤珠)
  • 후궁: 시무비(柴無比)


5.1. 부인 제국대장공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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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는 유명한 세조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이자 태조 칭기즈 칸의 증손녀로, 원나라에서 유일하게 직계 황금씨족임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이 아닌 이민족의 왕과 결혼한 공주였다. 그 때문에 원나라 내에서 충렬왕의 서열은 제후왕들 중 7위였다고 한다. 이는 자기 아들이자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보다도 높았다고 한다. 결혼 당시 제국대장공주는 16세의 꽃처녀였지만 충렬왕 왕심은 무려 39세의 아저씨였다.

충렬왕은 결혼 당시까지 애매한 처지였던[46] 공주에게 '원성전'에서 따온 '원성공주'[47]로 책봉하고, 원나라 황제를 설득해 '안평공주'의 책봉을 받아내 자신의 부마(쿠르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거기다 황제가 바뀐 뒤 안평공주가 '제국대장공주'로 높여지면서 자신의 원 황실내 입지도 더 강해지게 되었다.

제국대장공주는 탁월한 상업 감각이 있었다. 1274년 16세에 충렬왕과 결혼한 제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상인을 데려와서 고려인삼, 종이, 모시 따위를 원나라가 장악한 실크로드를 통해 머나먼 러시아 제공국과 아랍에까지 팔았다. 이때부터 고려의 물건이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한 지 8년 뒤, 원나라남송을 정복하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완전히 집어삼킨 뒤론 인삼 교역에 날개가 달렸다.

제국대장공주는 12세기초 정강의 변 이후, 남북조로 갈려진 중국을 재통일한 세계 제국 대몽골 울루스의 제5대 대칸이며, 대원제국을 세운 세조 쿠빌라이 칸의 황녀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고려인 관료들에게 몽고풍을 강요하거나 자기가 데려온 측근들을 우대함으로서 그들이 만행을 부리기도 했으며, 상업적인 능력으로 고려에 탕목읍을 두어 축재를 벌이는 등 부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공주의 성격은 엄하고 밝아 자신의 측근들도 잘못을 저지르면 용서하지 않았고, 책임감이 강해 고려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거나, 남편인 충렬왕에게 사냥을 멈추고, 정사에 힘을 쓸 것을 간하는 등 왕비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충렬왕이 사냥나간 곳에 따라 나가서 사냥감이 변변한 것이 없자

"국정 돌보기도 바쁜 왕을, 왜 이런 거위 새끼 한 마리없는 곳까지 끌고 오냐??"

고 호종한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음악에 취미를 가져 내시 및 악공들과 풍류를 즐기는 충렬왕에게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거든요?"

고 해서 중지시키기도 했다.

아래 사례는 충렬왕 11년(1285년), 왕이 환관 김자정(金子廷)을 동경부사(東京副使)로 삼았을 때,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오간 대화이다.

공주: 저는 동경이 대왕의 외가 고을이라 들었는데[48]

맞나요?

충렬왕: 그렇소.

공주: 그러면 그런 중요한 고을 수령에 집안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을 임명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언제부터 고려에서 남반(南班)[49]

출신이 그런 요직을 맡게 된 거죠?

충렬왕: 원묘(元廟)[50]

때부터요.

공주: 대왕께선 역시 원왕(元王)의 아드님이시네요.[51]

이런 엄격한 성격에 투기가 매우 강해서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난 것을 하례하는 연회에서 미리 설치된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그 연회에 마침 정화궁주 왕씨도 참석해 있었다. 정화궁주는 충렬왕이 태자이던 시절 처음 맞이한 아내로, 본래 충렬왕의 첫째 부인이었다가 제국대장공주의 등장으로 인해 무려 결혼 14년 만에 둘째 부인으로 밀려난 비운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때 충렬왕이 정화궁주 왕씨와 자신을 동렬에 놓자 매우 분노했고, 결국 정화궁주를 꿇게 하여 술을 받아냈다. 이에 충렬왕이 어이없어하며, 연회 중에 제국대장공주를 한 번 쳐다봤는데 그걸 "왜 쳐다봐요? 내가 정화궁주한테 막 대한다고 뭐, 지금 따지는 거임?" 하고는 "연회상이고 뭐고 갈아엎고, 나는 내 아들이 있는 데로 갈 거니까, 당장 가마를 가져오라."고 생떼를 부렸다.

동쪽 행랑의 평상에 공주의 자리를 마련했다. 식투르가 말하기를 "평상에 자리를 마련한 것은 공주님을 궁주와 같이 대접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주가 크게 노하여 바로 명하여 자리를 서쪽 행랑으로 옮겼는데 대개 서쪽 행랑엔 예부터 높은 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왕이 잔치를 그만두라 명하자, 공주는 전에서 내려와 크게 곡하며 말하길, "내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련다." 라고 하고 드디어 가마를 재촉하였다.

《고려사》<제국대장공주 열전>

그런데 이건 자기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에 남편이 딴 여자를 끼고 와서는 자기와 동급으로 취급하면, 누구라도 화낼 만한 일이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이 있었지만 충선왕 이외에는 모두 일찍 죽었고, 호색해서 다른 여자들만 찾아대는 충렬왕의 행동이 제국대장공주에게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지, 그녀의 투기는 대단했다. 화풀이로 다른 후궁들과 그 자제들을 족치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특히 충렬왕의 전 정처였던 정화궁주 왕씨의 서열 관계를 가지고 따지거나, 정화궁주와 자신의 시종 수에 관해서 질투하기도 했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 23년(1297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23세의 충선왕은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부왕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무비 탓이라고 생각하여 주변 사람들을 잡아 죽이거나 귀양보냈고, 당시 63세이던 충렬왕은 이에 환멸을 느껴 잠시 왕위를 양위했으나 곧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5.2. 아들 충선왕과의 대립[편집]


충렬왕-충선왕 부자의 악연은 이미 일찌감찌 조짐이 보였다. 총명한 충선왕은 아버지가 국정과 민심을 돌보지 않는 게 불만이었고, 아버지인 충렬왕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혼혈 아들이 못마땅했기에 그런 듯 하지만 이미 어린 시절부터 충선왕은 부왕의 잦은 사냥에 비판적이었고, 이러한 세자를 왕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이었다.

조선의 제16대 인조소현세자와의 관계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자 간의 알력이 그렇게 크게 불거지지 않지만 결국 폭발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5.3. 며느리 계국대장공주 개가 책동[편집]


충렬왕-제국대장공주의 금슬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처럼 충선왕-계국대장공주 간의 금슬도 좋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부왕보다 더 심한 편이었다.[52] 그리고 이것을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영 등이 부자간을 이간질하는데 써먹게 된다. 바로 계국대장공주충선왕과 이혼시키고, 고려 왕족과 재혼하게끔 하여 충선왕의 즉위를 막는 것이었다. 언뜻 봐서는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당시 황금씨족인 원나라 황녀의 영향력은 고려의 왕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컸다. 당장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 사후 원나라 황족과 인척관계가 없어지자 충선왕에게 양위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킬 왕족으로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이 결정되었다. 그는 본래 정화궁주 왕씨의 조카로 제20대 신종의 후손이었지만, 충렬왕의 이복동생으로 요절한 시양후(始陽侯) 왕태(王珆)의 양자로 들어가게 됨으로서 형식적으로는 충렬왕의 조카라는 가까운 인척이 되었기 때문인 것도 있었고, 현실적으로 잘 생겨서 공주의 호감을 살 수 있었던 바도 컸다. 서흥후 본인은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계국대장공주가 있는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결국 계국대장공주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거기다 이 일은 당시 원나라에서 성종 테무르 칸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하는 분쟁에 얽히면서, 양측 모두 사생결단으로 진행된다. 당시 원 성종은 후계자가 없는 상태인데다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위구르계 바야우트 부족 출신의 황후 브루간을 위시한 황후파는 성종의 사촌동생이었던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고, 반황후파인 옹기라트 부족[53]은 황제의 조카였던 카이산을 지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충선왕이 카이산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바다와 절친이었다는 것이다. 자연 충선왕 일파는 카이산 형제를 지지했고, 그에 반하는 충렬왕 세력은 아난다를 밀게 됨으로서, 상황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결국 신하들이 선수를 쳐서 카이산(원나라 제3대 무종)을 옹립했다.

결국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연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안서왕 아난다를 지지했다는 이유였지만... 서흥후 왕전 또한 처형되었다.[54]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도 물 말아 먹고 끝이 났으며, 충렬왕은 모든 권한을 빼앗긴 채 쓸쓸히 고려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 세상을 떠났다.[55]

죽기 이전에는 아들인 충선왕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는 등 아들을 향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하여 아내와 아들의 불화 속에서 살다간 비극적인 인물이다.[56]


6. 기타[편집]


  • 충렬왕은 73세까지 살았기에 고려 역대 국왕 34명 중에선 가장 장수한 인물이기도 하다.[57]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은 46년 동안 왕위에 머룰렀던 할아버지 고종. 하지만 고종은 68세에 사망했기 때문에 가장 장수한 국왕은 아니다.[58] 그의 왕후인 제국대장공주가 충렬왕 본인보다 무려 23년 연하였는데 충렬왕은 아내보다 11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충렬왕은 원손(元孫) → 태손(太孫) → 태자(세자) → 국왕 순으로 매우 정석적인 순서로 등극했다.[59] 심지어 세자에게 양위해 태상왕(太上王)까지 해보았으니, 그야말로 유교의 종법에 완벽히 들어맞는 군주였다. 조선시대였다면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완벽한 정통성이 되었겠지만[60], 충렬왕의 시대는 유교 종법이 그닥 선호되지 않았던 고려시대라 별다른 메리트가 없었다.[61]

  • 이후의 고려의 국왕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제33대 창왕까지는 충선왕의 후손이었으며, 마지막 제34대 공양왕은 모계 쪽으로 충렬왕의 현손자가 되었다.

  • 외할머니 최씨가 우봉 최씨 무신정권 제2대 집권자였던 최우의 장녀였다. 즉 최악의 권신이었던 최충헌의 먼 후손인 셈이다. 친손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현손이다. 충렬왕의 외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최충헌이므로.

  • 충렬왕과 충선왕이 대립했던 것처럼 충선왕 본인 역시 후에 자신의 아들이었던 세자 왕감과 대립했고, 끝내 그를 살해했다.[62]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카다안의 침입 당시 행적으로 인해 선조인조가 명군으로 보이는 한국사 최악의 졸렬 군주라고 악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행적에 대해선 해당 문단 참조.

  • <차이나는 클라스>에선 충렬왕의 측근 정치가 원나라의 케식 제도를 보고, 영감을 얻은 결과물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 흔히 이 시기에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주장했다가 여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충렬왕이 직접 주도하여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려 한 사례도 존재한다.
"처음에 왕이 나라의 호구(戶口)가 날마다 감소되자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서처(庶妻)[63]를 두게 하려고 했다. 그 자손에게는 벼슬할 수 있도록 하되, 만약 부부간의 신의를 전혀 지키지 않고 본처를 버리고 새 사람을 따르는 자는 곧 죄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해당 관청에서 시행하기로 논의하고 있었는데 김혼이 예법을 위반했으므로 중지하였다."

《고려사》<김경손 열전>
비록 김경손의 아들 김혼[64]이 친구 부인과 간통했던 사건이 일어나 흐지부지되어 실행되지 못했다고 하나 이 경우에는 왕이 직접 주도한 것이니 간통 사건만 없었으면 실제로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카다안의 침입 당시의 행적 이외에 비판받을 점으로 원나라가 고려의 노비개혁을 시도하자 “옛날 우리 시조(始祖)께서 뒤를 잇는 자손들에게 훈계하며 이르시기를, ‘무릇 이 천류(賤類)들은 그 종류가 다르니 진실로 이 무리들을 양인으로 삼지 말라. 만약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뒤에 반드시 벼슬길로 나아가고 점차 요직(要職)을 구하여 국가를 어지럽히기를 꾀할 것이니, 만약 이 훈계를 어긴다면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65][66]


7.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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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작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는 배우 정보석[67]이 충렬왕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8.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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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3대 고종이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천도하면서 원래 '양광도 강화현'이었던 행정단위를 '강도 강화군'으로 승격시켰다. 별칭으로 강화경(江華京)이 있다.[2] 고려 군주 중 유일하게 강화경에서 태어난 군주이다.[3] 원래 정주(貞州)로 개경 개성부의 경기(京畿) 중 하나였지만, 제16대 예종 때 부(府)로 떼어냈다. 떼어낸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 명의태후가 정주 유씨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4] 순경태후는 충렬왕을 낳고, 다음해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5] 제14대 헌종도 처음에는 묘호가 없었지만 사촌인 제16대 예종이 추가해줬기에 예외이다. 폐주인 제18대 의종도 묘호 및 시호를 받지 못했지만 반 무신 반란을 일으킨 서경유수 조위총의 성토로 동생인 제19대 명종이 추가해줬다.[6] 혹 '상황'(上皇).[7] 원래 최의를 무너뜨리고(무오정변) 정권을 장악한 김준은 원종의 동생이자 충렬왕의 숙부인 안경공 왕창을 보위에 올리려 했다. 그러나 고종이 붕어하면서 원종의 왕위 계승과 몽골에서 원종이 귀환하기 전까지 태손 왕심이 대신 섭정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근왕파 신하들이 이를 명분으로 삼아 원종의 왕위 계승을 밀어붙인 탓에 김준은 이를 단념하게 되었다.[8] 일본에서는 '카미카제'(신풍)라고 부른다.[9] 일본 원정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항목을 참고할 것.[10] 자세한 부분은 카다안의 침입 항목 참조.[11] 사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이 민심을 돌보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평소에도 자주 다투었다.[12] 하지만 이게 실질적으로는 부왕 충렬왕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과 다름없던 것이었다.[13] 자의도 있었겠지만 압력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14] 보통 왕의 <즉위 교서>는 형식적인 표현들이 대부분이었다.[15] 이것 말고도 다루가치정동행성 등도 개혁 대상으로 다루고 있었다.[16] 말 그대로 뺏긴 거다. 원나라의 사신이 다짜고짜 옥새를 빼앗았다.[17]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가 10년이 지난 후 충렬왕이 죽고 나서야 고려에 돌아올 수 있었다.[18] 원나라의 간섭하에 있었던 고려는 국왕이 꼭 원나라 황실의 여성과 결혼해야 정권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19] 원나라 무종 카이산은 계국대장공주의 사촌 남동생이었다. 원 무종은 세조 쿠빌라이 칸의 태자 칭김의 차남 다르마발라의 아들로, 장남 카말라의 딸인 계국대장공주의 사촌이었으며, 오히려 장남 카말라의 아들인 이순테무르와 경쟁 중이었다.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던 충선왕이 어린 시절 친했던 카이산을 지지한 것은 처가나 계국대장공주를 엿먹인 셈이었고, 이로 인해 훗날 이순테무르가 대칸이 되고 난 이후, 충선왕은 보복성 조치를 당하게 되었다.[20] 죽음의 때.[21] 유교(遺敎)란,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에 남긴 명령이다.[22] 나라가 엉망이었던 것과 가족 간 불화에 대한 회한을 포함해 책임감과 후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23] 고려의 역대 국왕 중 제일 장수했다. 재위기간은 제23대 고종이 가장 길고, 제11대 문종이 그 다음이다.[24] 동녕총관부를 아예 고려가 돌려받았다고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는 동녕총관부를 요동으로 이전하면서 땅을 반환한 것이다. 요동으로 이전된 동녕총관부는 제31대 공민왕의 제1차 요동정벌의 목표가 되었다.[25]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노비여야만 자식도 노비가 되기 때문에 대가 지나도 노비수가 유지되는 수준에 그치거나 자연스레 줄어드는 효과를 가진다.[26] 아버지와 어머니 중 한 명이라도 노비일 경우 자식이 무조건 노비가 되기 때문에 대가 지날수록 노비수가 자연스레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27] 쿠빌라이 칸 사후 그 후계자인 원 성종 테무르 칸의 즉위식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원 성종이 상석에 앉고, 충렬왕은 제후국의 군주로써 위에서 7번째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28] 타타르. 여기서는 몽골을 의미한다.[29] 고려원나라 사이의 화친 조건 가운데, 고려의 풍속과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조항을 의미한다.[30] 서주 문왕 희창의 자칭.[31] 이 '대사천하'란 표현은 《고려사》에서 최대한 과거의 표현을 직서하고자 한 세종대왕까지도 꺼렸다. 결국 뒤의 '천하'를 빼버려 직서의 한계를 드러냈다.[32] '7묘 9실제 종묘'에 '짐', '폐하' 등 천자식 예법을 그대로 썼으며, 독자적인 묘호와 시호를 바쳤다.[33] 다만 '태자'는 '세자'로 바뀐다. 당시 태자 왕심(충렬왕)이 계속 원나라에 왔다갔다했기 때문에, 왕심이 '태자'라 불리는 걸 원나라가 문제삼았기 때문이다.[34] 천자가 천하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사'(赦)한다고 표현한다.[35] 제후가 자기 경역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36]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걸 '주'(奏)라고 한다. 제후가 천자에게 아뢰는 것도 '주'(奏)라 하기 때문에 다루가치가 불평한 것이다.[37] 신하, 제후가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38] 신하가 제후에게 올리는 문서.[39] 예를 들어 '태조'는 '태왕'(太王) 혹은 '조왕'(祖王)으로, '혜종'은 '혜왕'(惠王)으로. 보통 원 간섭기에 쓰인 책들이 전 왕들을 언급할 때 이런 식으로 쓰였다.[40] 시호를 고려에서 스스로 올리면 고려 국왕이 원나라 황제의 제후라는 걸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41] 이는 반원 성향인 공민왕이 재위 6년에 독자적으로 시호를 올릴 때까지 이어진다.[42] 중간인 제4대 광종 시대 '경'(京)이 '도'(都)로 바뀌어 개경이 '황도', 서경이 '서도'가 된 적이 있었다. 제23대 고종 시대 '강도'(江都)가 설치되어 제1수도가 됐지만 개경과 동•서•남경은 '경' 단위를 사용해 경 단위는 살아 있었다.[43] 이는 고려 말에도 회복이 안되었고, 왕조가 바뀐다.[44] 《고려사》 <예지> -가례- '왕태자절일수궁관하병회'의 기록.[45] '팔표'는 팔방(八方), 팔굉(八紘)과 같은 뜻으로 '우주, 온 세상'을 의미한다.[46] 당시 기록을 보면 제국대장공주는 공주의 예우를 받았지만 그냥 '공주' 또는 '쿠툴룩켈미쉬 황녀'로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봉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47] 고려시대의 왕후, 왕비, 비는 자신의 거처인 '궁'이나 '원'에서 따온 '궁주'나 '원주'를 사용했고, 태후는 '전주'를 사용했다. 제국대장공주는 황녀의 지위 때문에 거처인 경성'궁'이 아닌 원성'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원제국의 황녀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원성전에서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주'가 아닌 공주로 책봉했다.[48] 충렬왕의 어머니 정순왕후는 김약선의 딸로 경주 김씨이다.[49] 고려시대 궁중의 숙직, 국왕의 시종·호종·경비, 왕명의 전달, 의장(儀仗)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내관직.[50] 아버지 원종의 묘호를 높혀 부르는 표현이다.[51] 여기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기싸움이 보인다. 충렬왕은 아버지 원종원묘(元廟), 즉 묘호로 불렀는데 공주는 그걸 원왕(元王)으로 격하해 불렀다. 천자의 묘호를 받은 선왕을 두고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보인다.[52] 이 둘은 원나라에서나 고려에서나 별거하고 지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다.[53]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원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외척 집안이다.[54] 《고려사》 <열전> 기록엔 충선왕이 용서해주려 했지만 원나라 승상이 이를 반대해 결국 참수되었다고 적혀 있다.[55] 사건 당시 충렬왕과 충선왕 모두 원나라에 있었다. 거기다 충렬왕은 아들의 사저에 거처하고 있었다.[56] 사실 충렬왕 본인도 전대의 군주들처럼 무신정권 탓에 불행한 삶을 살다간 임금이었다. 전술했듯 무려 30대 중반까지 무신정권을 겪어야 했으며, 모후인 순경태후 김씨가 자신이 태어난지 불과 1년만에 사망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인 고종이 무신정권과 몽골 제국의 압박속에 붕어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후 정실 부인의 격도 낮아지게 되었고, 새로 맞이한 원나라 공주 신분의 아내 및 그 사이에서 낳은 혼혈 아들 충선왕과의 불화까지 감안해보면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던 셈이다.[57] 조선의 역대 국왕들 평균 수명이 47.1세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는 그보다도 더 짧아서 겨우 42.3세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충렬왕은 흔히 원 간섭기 때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무려 30대 중반까지 무신정권을 손수 겪은 인물이었다. 당장 출생연도가 최충헌의 아들 최우 집권 중반기였고, 최씨 정권의 최항, 최의김준, 임씨 정권의 임연임유무까지 다 겪었다.[58] 또한 고종보다 더 장수한 또다른 군주가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19대 명종이다. 그는 72세로 고종 다음으로 장수한 고려 군주이자 충렬왕과 더불어 유이하게 70대까지 산 고려 군주이다.[59] 다만 이 과정이 순탄치 만은 않았던 것이 당시 무신정권하에서 왕실이 기를 못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왕인 원종이 협상을 위해 몽골로 넘어간 시점에서 할아버지인 고종이 붕어하자 그의 유언을 받들어 태손 자격으로 대신 섭정을 했을 정도였다.[60] 조선의 제6대 단종이 이 사례에 속한다. 충렬왕과 똑같이 원손 → 세손 → 세자 → 국왕 테크를 타면서 엄청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숙부인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을 때도 이러한 정통성 때문에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참고로 조선 제19대 숙종도 이 루트를 밟았고, 제22대 정조와 제24대 헌종도 이 루트를 밟았다.[61] 물론 애초에 무신정권에다 몽골의 간섭으로 왕실의 위상이 쭉 흔들리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종법이 제대로 도입되었던 상황이라 해도 큰 메리트는 없었을 것이다.[62] 1310년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무래도 세자의 영향력을 경계해오던 충선왕의 의심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63] 본처 외에 또 장가든 양가집 배우자[64] 생몰년도 : 1239 ~ 1311[65] 출처:https://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085_0010_0060_0190[66] 전근대라는 시대 상황을 감안해도 천민은 종자가 다르므로 양인으로 삼으면 안된다는건 엄청난 망언인 것이 천민이라도 하늘이 낸 백성이라고 여겼던 세종이 보면 격노하여 "고려는 왕부터가 저런 그릇된 생각을 하였으니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건 하늘의 뜻이다."라고 조선 건국 정당성을 위해 선전용으로 써먹어도 할 말없는 수준이다.[67] 2005년작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충렬왕의 증손자인 공민왕을 연기했다. 2012년작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외할머니 최씨의 아버지인 최우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