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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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a.k.a 안식교)는 안식일이 결부된 구원론과 엘런 화이트에 대한 직통 계시론 때문에 이단 논쟁이 심하다.
강력한 에큐메니컬 성향 교단에서는 정통의 일원으로, 구원론 및 계시론에 민감한 교단에서는 이단으로 분류한다.
국내 개신교계는 조직신학(교의학)에 민감하기에 대체로 이단으로 받아들인다.
같이 보기: 기독교의 종파



설립자
존 스마이스(John Smyth)
설립년도
1609년
침례교세계연맹[1] 총재
토마스 마케이(Tomás Mackey)
교세
대략 4,900만 명[2]
계통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종교
기독교
종파
개신교
교파
침례회
언어별
명칭

한국어
침례회(浸禮會)
영어
Baptist Church
일본어
バプテスト教会
중국어
浸禮宗(浸信會)#
에스페란토
Baptista Preĝejo
1. 개요
2. 역사
2.1. 기원에 대한 견해
2.1.1. 개혁교회와 재세례파
2.1.2. 영국의 종교개혁과 침례회
2.1.3. 신대륙의 로저 윌리암스와 미국
2.2. 정리
3. 특징
3.1. 침례교 정신
3.3. 신앙적 특성
3.4. 조직 특성
3.5. 침례
3.6. 일반침례교인과 특수침례교인
4. 비판
4.1. 반박
5. 한국의 침례회
5.1. 교단 신학교
5.2. 지역 분포
5.3. 주요 교회와 목회자
5.3.2. 한국성서침례친교회[3]
5.3.3. 한국침례교회연합
5.3.4. 침례회 출신 독립교회
5.4. 교단
5.4.1. 이단 시비가 있는 교단
5.4.1.1. 명백한 이단 교단
5.4.1.2. 이단 여부에 논란이 있는 교단
6. 국외의 침례회
7. 나무위키에 항목이 존재하는 인물
7.1. 목회자
7.2. 평신도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침례회()는 16세기 영국의 비국교도운동 및 재세례파에 기원을 두는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세계적으로 약 4,900만 명의 교인이 있다.[4] 한국에서는 장로회감리회 등에 밀려 교세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미국에서는 가장 큰 개신교 교파다.[5] 기독교 내에서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다음으로 큰 교파이며, 개신교에서는 성공회 다음으로 큰 교파이다.[6]


2. 역사[편집]


침례회는 종교개혁의 한 흐름인 재세례파(Anabaptist)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재세례파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만이 받는 세례가 진정한 세례라고 주장하며, 유아세례를 부정했고, 유아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다. 이 당시에는 침례(Immersion)를 주지 않았으며 기성 교회와 같이 세례를 다시 주었다. 정치적으로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현세의 통치 체계를 부정하였다. 재세례파는 당시 가톨릭 교회는 물론이고, 심지어 같은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박해를 받았다. 급진적인 재세례파는 16세기 중반이면 거의 소멸하고, 재세례파의 명맥은 온건파인 메노 시몬스가 이끄는 메노나이트가 이끌게 된다.

침례교와 재세례파 간에 뚜렷한 혈연 관계가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침례회의 주된 특징은 이미 재세례파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침례회는 비록 재세례를 베풀진 않았지만 교회의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야 하며,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침례(Immersion)[7]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유아세례를 부정하였다.

침례회의 사상은 당시 영국 국교회였던 성공회와 상충되었다.[8][9] 침례회는 불세출의 설교가라 불리는 찰스 스퍼전(Charles Spurgeon) 목사와 같은 설교가들을 배출하면서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그 세력은 장 칼뱅의 예정설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선교가 필요 없다는 기존 영국인 선교사들에 반발, 세계 침례회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세워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선교사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21세기 이후 침례회의 기원은 잇달은 연구와 문헌 발굴을 통해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과 '아나뱁티스트 영향설'을 종합해서 보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혀져가고 있다.

일부 급진적인 독립침례회/성경침례교 사람들은 '지계석주의(Landmarkism)'이라는 황당한 가설을 펼치기도 한다. 아나뱁티스트 영향설을 더욱 극단적으로 강화하여 아예 가톨릭 교회 이전에 침례회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이 설은 20세기 초까지는 주류 침례회 교파들에서도 간간히 주장되던 것이었지만, 현재는 위와 같은 이유로 사실상 주류 교파에서는 폐기된 가설이 되었고, 같은 독립침례회 교회들한테조차 도가 너무 지나친 주장이라며 비판하는 곳이 없지 않은 편이다.


2.1. 기원에 대한 견해[편집]



2.1.1. 개혁교회와 재세례파[편집]


오늘날 침례신학대학교의 신학생들은 다양한 신학을 배우는데, 칼빈과 비슷한 모자를 쓴 교수님 혹은 칼빈주의로 인정 받는 교수님은 반드시 계신다. 국내 신학교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나, 이것이 영국 분리주의자를 설명하는데 연상하기 좋다. 침례회도 분명히 영국 종교개혁의 후예이며, 심지어 재세례파조차 스위스 종교 개혁의 선구자 츠빙글리의 제자들[물론 유아세례에 반대하여 파문된 제자들]이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며, 구약과 신약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스위스 종교 개혁을 이끈 하인리히 불링거와 장 칼뱅이 취리히 합의를 통해 일치를 이룬 개혁교회가 이들의 조상격이다.


2.1.2. 영국의 종교개혁과 침례회[편집]


영국의 종교개혁은 칼뱅의 선배이자 스승 격인 마르틴 부처[10], 칼뱅과 신학적으로 일치한 가톨릭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출신이자 이탈리아에서 라테란 수도원장을 지내다가 개혁에 합류한 피터 버미글리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국왕 헨리 8세와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를 도와 시작한 개혁이 메리 여왕의 가톨릭 복고로 위기를 맞았던 것에서 전환기를 맞는다.

유럽대륙으로 피신한 개혁가들과 그들을 따르던 난민들은 부처가 개혁을 이끈 역사를 지닌 스트라스부르, 칼뱅의 제네바 등에서 개혁파와 교류했고, 사실상 개혁교회, 즉 칼빈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성공회 39개 신조에 잘 드러나있는 당시 국교회의 중도적인 태도에 반발했다. 국교회가 가톨릭을 더욱 확실히 배척하지 않는 것이 불만족스러웠던 것. 이들은 청교도의 기원이 되어 스코틀랜드 장로회와 관계를 맺으며 개혁 교회식의 개혁을 주장하게 된다. 이들의 개혁은 곧 내부 분열이 이어지는데, 국교회 내부의 개혁을 주장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만들었던 장로파와, 국교회의 개혁을 포기하고 국교회와 아예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하며 국교회주교제 뿐 아니라 장로회의 어느 정도 권한을 행사하는 총회와 산하 노회(지역회) 그리고 장로가 중심이 된 당회 장로회의 구조까지도 거부하는 분리주의자들로 나뉘게 된다. 이후 분리주의자들은 다시 개교회의 자치를 강조하는 회중교회파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의 결심을 주장하는 침례파와, 교회의 목사 등의 역할 구분 자체를 거부하는 샌디먼 파, 퀘이커 형제회 등으로 나뉘게 된다.

최초의 침례교회는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암스테르담으로 파신했던 일부 비국교도에 의해 1609년에 출현했다. 그리고 일부 침례교인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1611년에 런던 인근에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곧 이어 1641년경 비국교도들 사이에서 침례를 놓고 큰 논쟁이 일어났고 최초의 독립파 교회였던 제일 회중교회에서 침례를 주장한 침례파 지도자인 키핀 등에 대한 대처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제일 회중교회 담임 목사였던 헨리 제시가 침례교도로 전향함에 따라 논란이 격렬해졌고, 헨리 제시는 다시 침례를 받기에 이른다. 강한 침례파들은 제일 회중교회에서 나가 분리 개척하였고, 제일 회중교회에서는 침례와 세례를 자유로이 선택하도록 하여 일단락되었다. 결국 독립파인 회중교회에서는 부모의 의사에 따라 침례를 원하는 경우 유아세례를 주지 않는 식으로 공존했었다. 미국에서는 존 코튼 등 저명한 청교도 회중교회 지도자들이 침례교도를 핍박하였는데 침례교 신앙을 확신한 로저 윌리엄스 역시 박해를 받았다. 모습을 드러낸 침례파에는 크게는 두 분파, 세부적으로 네 분파가 있었다. 특수침례교인의 선조라 할 만한 칼빈주의 진영의 분리파와 온건파, 제 7일 특수침례파, 그리고 보편구원론(일반구원론)을 믿는 일반침례교인의 선조라 할 만한 보편침례파가 있었다.[출처:] 이 시기에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 등이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독립교회 내에서 침례파는 분리되었다. 세례를 인정하는 그룹이 특수침례회, 반대 측이 성서중심주의로 나아가며 합의된 개혁파 교리를 점차 잊어(?)가는 일반침례회의 기원이 되어가는 양상이 된다. 물론 침례파, 퀘이커는 회중교회파와 장로교에게 많은 비판을 받으며 대립하였다.


2.1.3. 신대륙의 로저 윌리암스와 미국[편집]


영국의 성공회가 타락했다고 느끼고 청교도로 개종한 성공회 사제 로저 윌리암스는 27세가 되는 1630년 성공회의 핍박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제정일치의 메사추세츠 보스톤 식민지에서 비 청교도들에게 정치적 핍박이 가해지는 것을 목격하고 보스톤에서의 목회자 청빙을 거절하고서 이주한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인디언 소유의 토지 탈취를 위해 자행된 사기적인 거래를 비판한다. 이에 보스턴 교회는 1636년 로저 윌리암스를 파면하고 재판에 회부했고 윌리암스는 목회중이던 세일럼에서 다시 로드아일랜드의 플리머스로 식민지로 도주하여 1638년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개척한다. 이후 윌리암스는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평화적인 공존을 위하여 의회파와 왕당파가 내전중인 영국에서 이들의 인권을 인정하는 국왕의 인증서를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방의 4개 식민지를 연합으로 묶는데 성공한다. 윌리암스의 헌신으로 탄생한 아메리카 식민지 연방의 정신은 건국의 아버지들 까지 계속해서 이어진 결과 미국 헌법에 로저 윌리암스의 정교분리가 선언되었으며 그 결과 국교제도가 상식이었던 기독교 세계에서 최초의 정교분리 국가인 미국이 탄생하게 된다.

2.2. 정리[편집]


이러한 내막이 있기에 마틴 로이드 존스 등의 회중교회 목회자들이 서술한 청교도 역사책에 분리주의자들의 등장 다음 순서로 침례회가 나오는 것. 즉 기원 자체가 개혁교회라 보아도 무방하나, 침례와 그 의미를 주장하여 시작된 다른 칼빈주의파(장로회, 회중교회파)와의 대립으로 인해 강경파와 온건파가 침례회의 두 기류가 되었다. 이로 인해 보수적인 성서 해석 만을 남긴 강경파인 일반 침례회 교인과 개혁 교리를 간직한 온건파 특수 침례회교인이 같은 교단에 있는 것이다. 또한 침례회 최고의 설교가로 평가 받는 찰스 스펄젼 목사가 스스로 칼빈주의자라 말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다.


3. 특징[편집]



3.1. 침례교 정신[편집]


신앙의 자유를 지향하는 침례회의 제도적 시작은 영국이지만 현대 침례회의 진정한 정신을 완성한 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로저 윌리암스라고 할 수 있다.

윌리암스는 자신과 다른 성경해석을 배척하며 이를 빌미로 구교와 신교가, 또 신교와 신교가 대립하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피튀기는 전쟁을 일삼는 당대 유럽의 기독교 사회상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배치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써 보여주신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동일하게 향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당시 청교도인들에게 보편적이던, 기독교 거부를 이유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행해진 아무 죄의식 없는 무자비한 탄압을 반성경적이라고 믿어 이들의 인권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는 현재의 미국을 탄생시킨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윌리암스가 확립한 외유내강의 침례교 정신은 비판 단락에서 보여주듯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독선과 오만으로 오염되었다.

침례회가 교리의 불특정을 원칙으로 삼고 다양한 성경해석을 인정하는 것은, 본질에 대한 것은 한 치의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으나 본질이 아닌 그 밖의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것을 허용하는 포용, 곧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신학적인 구현이다. 또한 인간의 이성과 전통에 근거하여 광대한 도그마를 설정하고서 그것과 다른 것은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탄압하는 장로교와 회중교회의 배외주의적 태도에 대한 신학적 부정이기도 하다.

신앙에 있어서도 신학에 있어서도 전통을 절대적으로 배격하는 침례회에 대하여 비판자들은 침례교는 각자가 바퀴를 재발명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바퀴의 재발명은 침례교 정신이 추구하는 본질이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가르쳐주신 새 계명, 곧 죄없는 내가 이웃의 죄를 위하여 스스로를 죽음에 내던지는 십자가의 이웃사랑이 시작이고 마지막이다. 그 이상의 어떤 신학도 필요없다.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지적 욕심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것들 보다 더 많은 것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그 결과 인간은 장로교인과 바리새인들 처럼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규칙과 순서를 신앙에 추가하게 되고, 이는 전통[11]이라는 아름답고 찬란한 이름으로 계승되어 후에는 결국 신앙과 신학의 전통적 권위자들에 근거하여 이웃사랑의 둘째 계명이 하나님 사랑의 첫째 계명보다 작다고 정의한다[12]. 이들은 전통위에서 도출된 새로운 신학에 근거하여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된 자신의 이웃을 잡아죽인다.

현대의 침례회는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죽음을 당할지언정 이웃에게 절대로 칼을 겨누지 않았던 재침례교도들을 다시 배워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적그리스도라고 믿었던 로마의 황제에 대해서 조차 계략이나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침례교 정신은 초대교회의 정신적인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침례교인이 성경에서 배워야 하는 신학은 오로지 예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십자가의 이웃사랑 뿐이다. 침례교인은 이 유일한 신학에서,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 날 까지 머물러야 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십자가의 이웃사랑이라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바퀴를 나의 가정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속에서 매일같이 재발명 하면서.


3.2. 신학적 특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침례회/신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침례회의 대표적인 신학적 특성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 신앙의 자유(soul liberty)
  • 독립된 사제-감독 계층 불인정 원칙으로의 만인제사장설
  • 성경 지상(至上)적인 보수성 (성서자유주의 부정)


3.3. 신앙적 특성[편집]


개인의 신앙적 의지와 자유, 보수적인 성서 해석을 중시하는 교단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다만 이것이 거꾸로 작용하여 침례회의 이름을 딴 이단(정확하게는 사이비)들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별도의 신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이론상 목회가 가능하기 때문. 다만, 한국은 유독 장로회의 교세가 강하기 때문에 장로교회의 교리와 어긋남에도 장로회의 이름을 딴 이단도 많은 편이다.

음주나 흡연에 대해서도 매우 보수적이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센터(Pew Reserch Center)에서 2014년 전화 인터뷰 방식으로 50개 주 35,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Religious Landscape Study에 따르면 미국 내 프로테스탄트의 비율은 46%이며, 그 3명 중 1명인 15% 가량이 침례교인이다. 2007년 삶의 길 연구소(LifeWay Research Center)가 실시한 조사결과 미국 내 개신교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음주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갖고 있으나 남침례교가 음주에 있어서 다른 교파들보다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남침례교는 2006년에도 주류를 제조 선전하거나 사고 파는 행위 주류를 소비하는 행위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도 침례회는 과거 금주법을 지지했던 교단들 중 하나였다.

다만, 위의 설명은 어디까지나 미국 남부와 한국 기준이다. 맨 밑에 하술하듯이 유럽 국가의 침례회나 미국 북침례회(American Baptist Churches, 약칭 ABCUSA)는 대체로 진보적이어서 동성애동성결혼에 우호적이다.[13] 개인의 성경 해석을 중시하기 때문에 보수적이 될 수도, 진보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조직 면에서는 상반되는 성공회와 교리 문제에서는 묘하게 닮아있다. 둘 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이단을 상대하기에 취약하다는 것! 성공회는 자유주의적인 학풍이 강하여 39개 신조로는 이미 출현했던 방식의 이단을 대처하는 수준이며, 침례회 역시 삼위일체와 이신칭의 정도의 기본 교리만 가지기에 취약할 수 있다.[14]


3.4. 조직 특성[편집]


침례회의 교회운영은 다른 개신교의 교단과 매우 다르다. 침례회는 감독을 두는 감리회와 주교를 두는 성공회처럼 중앙집권적 체제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로회처럼 개교회마다 장로 중심의 당회를 두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마다 교회 내의 운영을 위한 기구의 명칭[15]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침례회는 민주주의적 체제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다. 교회의 현안에 대해 모든 침례교인을 대상으로한 회의를 열고, 거기에서 결정된 사안을 교회의 방침으로 한다. 침례회의 중앙 교단인 총회는 '지방회'[16]에 간섭할 권한이 없으며, 심지어는 개교회에도 간섭할 권한이 없다. 그렇다고 총회가 도·시별 지방회에 아예 간섭 안하는건 아니고, 약간은 큰 틀에서 조언하는 수준이다. 총회는 개교회 목사들이 모여 토의를 통해 교단의 나아갈 방향과 협력을 도모하는 기관에 불과하다. 또한 지방회 역시 소속 교회에 간섭할 권한이 없으며, 지방회 역시 개교회들의 협력을 위한 자치모임과도 같다.

침례회의 직분 역시 특성이 있는데 목사 외에 장로, 권사, 집사등을 두는 다른 개신교 교단과 달리 침례회의 직책은 주로 목사집사뿐이다. 침례교회의 성경해석은 사도와 장로직은 동일하게 특별계시가 지속되던 시기에 성령께서 직접 임명하신 한시적인 직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각 침례교회가 장로 호칭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도 장로교와는 달리 목사직처럼 신학이나 교리적으로 어떤 특별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특별히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아 집사도 대외로는 장로로 칭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17][18] 교회의 운영은 당회 혹은 주교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닌, 주로 '사무처리회'라 불리는 전교인 회의를 통해 자유로이 안건을 제출하고 다수결로 결정한다. 대형화된 침례교회의 경우 전교인이 모두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 하므로 교회 정관등을 통해 '사무처리회'의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목회자가 되는 방식도 다른 개신교 교단과 달리 아무나 신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개교회에서 필요한 경우 신학공부를 별도로 하게 하여(주로 신학교에 보내는 방식) 필요한 만큼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 원래의 방식이다. 성소가 있는 침례교인이 목회자가 되기를 원할 경우 사무처리회를 통해 교회 교우들의 인준을 받고 나아가 지방회의 최종인준을 통해 신학생이 되는 것이 원칙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인준 절차는 유지되고 있지만[19] 한국의 개신교의 전체적인 하락세로 인해 신학 공부를 마친 전도사(목사 후보생)가 모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성소식별(discernment)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지만 침례회에서는 성소식별이 중우정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교단의 성소식별이 중우정치를 통해 이루어지면 신학적 훈련이 부족한 인물에 대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목사/전도사 안수의 건이 흔하다.

아무튼 회중교회를 제외한다면 교회론 측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거의 대척점에 있는 교단으로 볼 수 있다.[20]


3.5. 침례[편집]


중국과 한국에서는 기성교회의 세례(Baptism)를 침례(Immerision)라고 칭한다. 침례는 기독교의 Baptism(세례)를 2번 번역하여 표준어인 세례(Baptism)를 침례(Immersion)라고 칭하는 것이다.[21] 미국의 Baptist교회는 세례교라고 칭하지만 한국은 침례교(Immerisionist)라고 칭한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기성 기독교와는 달리, 17세기의 급진적 기독교는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라는 의식이 중요시되었다. 그 근거로 예수세례자 요한에게서 받은 의식이 침수례(Immersion)였다고 주장하며(이는 세례의 본래 형태에 기반한다. 세례 항목 참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명칭인 '세례 요한' 대신 '침례 요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22]

또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믿음의 고백이 없는 침례는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 침례를 받을 수 있는 나이는 교회마다 다른데 어떤 곳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고백'을 할 수 있으니 받을 수 있다고 보는 한편 또 어떤 곳은 세속적 법적 성년기준인 만 17~20세가 되어야 침례를 줄 수 있다고 하는 식이다. 침례 자체가 다른 교파의 '입교'를 겸한다고 볼 수도 있다.


3.6. 일반침례교인과 특수침례교인[편집]


일반적으로 침례교 내부에서 공존하는 교인들이지만 구원관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 두 부류를 일반 침례교인과 특수 침례교인으로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십자가 희생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은혜라는 '일반구원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일반'침례교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나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예정된 이들만을 구원한다는 '특수한(특별한) 은혜라는 개혁교리(특수은총론)'를 따르는 사람들이 '특수'침례교인이다. 주의할 점은 특수침례교인이라도 결론만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예정된 자들만 십자가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이 특수은총론이라는 등의 서술한다. 결론만 아는 것과, 전체적인 맥락을 아는 것의 어감은 전혀 다르다.

현재도 루터파내 강경파, 웨슬리안을 포함한 아르미니우스파, 심지어 강경한 일반침례교인 등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성경을 왜곡한 사람들로 개혁교인과 특수침례교인을 공격하며 매도하는 것은 바로 특수은총론의 결론부 만을 그들이 알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현재 침례교단 내에서도 공존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구원론(일반은총론)을 강하게 밀고 나갈 경우,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 스스로의 직무유기 탓이라는 둥, 행위구원론 논란, 혹은 무능한 절대자라는 등의 비아냥을 피할 길이 없다. 특수은총론을 강하게 밀고 나갈 경우 개혁교회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및 루터교 강경파 연합군의 논쟁이 재현될 여지가 크다.


4. 비판[편집]


성경을 조금만 잘못 해석해도 삼위일체 등의 기독교 핵심신앙을 반박하게 된다. 즉 기독교는 단순히 성경에 대한 독후감 모임이 아니라 2천년 간 교부들과 교단 소속 선생들이 시대를 건너 서로의 신학을 비판하며 체계화해나간 것이다. 그러나 침례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위의 신학적 특성 문단에서 언급된 특성에 기인하여 학부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신학 무용론 덕분에 신학의 중요성이 극단적으로 무시되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침례회가 매우 독단적이고 교단 내, 그리고 교단 간의 교류를 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침례교의 분위기와 주류 기독교의 분위기 차이는 의학과 유사의학에 비교할 수 있다. 실증적 실험과 의학자들 간의 상호대화로 인해 건전하고 효과적인 치료를 추구하는 의학과는 달리 유사의학에서는 개인, 혹은 폐쇄적 집단의 신념과 취사선택으로 인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치료와 환자를 복음과 신자로 바꾸어 생각하면 조금 선명해지리라.

파일:침례교거만.jpg

성공회의 주교들이 교황에게 세계 기독교 회의에 대표를 보내어 우리와 서로의 차이를 논하고 함께할 노선을 찾아보자고 요청했을 때 교황이 답했다. 우리는 참된 교회이므로 차이점을 논하거나 협의할 필요가 없다. 개신교 교회가 우리에게서 떠나갔고 우리는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이에 덴버의 침례교인들 또한 이러한 성공회의 요청에 로마 가톨릭과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우리는 논의할 게 없다. 침례교는 민주주의, 영성 그리고 신앙의 자유 측면에서 장로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장로교인, 회중교인, 제자회 교인같은 사람들과, 더 유기적인 관계를 추구하자는 주제로 대화하는 것이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교황의 오만함에는 분노를 표하면서도 침례회의 비우애적 선언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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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Century magazine 1919년 7월 3일호)


그러나 책 한 권만 읽은 위험한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는 말이 있듯이, 성경 한 권에서, 그것도 집단적 독서가 아닌 개인적 독서를 통해 편집적인 신학을 도출해내는 방식은, 천주교는 물론 대부분의 개신교 주류(mainline) 교단에서 침례회를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23]

18세기 철학자이자 신학자 그리고 성공회 주교였던 조셉 버틀러의 말처럼 성경-이성-전통은 기독교 신학을 구성하는 삼각대로 생각할 수 있다.[24] 각 요소는 다른 요소에 의존하고, 세 요소가 올바로 서야 신학이 구성된다. 성경해석은 이성과 교회전통에 의존하고, 교회전통 역시 성경과 이성에 기반하여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마지막으로 이성 역시 성경과 전통의 권위가 허락하는 범위에서만 발현된다. 침례교는 명시적으로 세 요소 중 이성과 전통을 거세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주류교단의 입장에서 볼 때 침례교에 신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성과 전통을 기독교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25]

초기기독교가 로마-유대교 성전권력에 대안체제로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요소 중 공백을 대체하는 것은 반드시 제국의 것이다. 침례교회의 사례를 보았을 때, 이것은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성의 전통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기독교세계(christiandom)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이다. 침례회의 사고체계에서 기독교세계는 19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근본주의 기독교가 전부이며 그 이외는 모두 자유주의에 팔려간 이교도로 취급된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근본주의(혹은 근본주의가 전통적'복음주의'로 착각되는)의 본산인 미국이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다른 곳은 모두 외곽에 불과하다. 기독교세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미국의 맥락에서는 자신들만의 민족 신앙으로서 유효할 수 있지만 미국의 맥락을 벗어난 곳에서는 제국주의적으로 작동한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유독 주류를 차지하는 침례회와 그렇지 않은 한국을 비교하여 '미국이라면 대접받았는데 한국에서 교세가 약해서 그렇다' 따위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가 빈번하다. 장로교-감리회-순복음 일색의 한국에서 말그대로 '한국에서만 소수'인 루터교, 성공회에서도 침례회와 같은 사고가 나오는지를 잘 생각해보자.[26]


4.1. 반박[편집]


침례교 신학에 대한 위의 비판은 다음의 한 마디로 반박이 가능하다.

성경을 신의 정확무오한 계시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인간의 이성으로 기록한 문학책으로 받아들이는가는 개인 신앙의 근본에 위치한 믿음에 대한 문제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성경을 성령이 아닌 이성으로써 조명해야 한다는 기독교 좌파의 종교적 믿음[27]에 근거하여 성경의 명료성을 고백하는 반대 진영을 비하하는 것은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근본주의자와 동일한 오류다. (이들을 좌파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호칭하자. 또는 계몽 근본주의, 계몽 종교극단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게 안믿어진다면 당신은 아마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지옥의 땔감이 된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녀로 택하시지 않은 자들도 사랑하신다. 기독교의 믿음은 논리적으로 설득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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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단락과 같은 비판이 제기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들 중 하나는 한국 개신교계의 주류교단인 장로교 측을 비롯해 많은 교단들이 침례교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특히 한국 기독교계에서 침례교와 일부 개신교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은 고질적 문제인 신사참배에 굴복했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침례교를 많이 까내리는 경향이 있는 것을 무시하기 힘들다.[28]

개인의 성경해석을 중시하다보니 핵심적인 요소를 부정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침례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이다. 만약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진리를 전부 무시하고 개인의 성경해석이 모두 옳다고 말한다면 침례회는 신앙고백서를 만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신앙고백서는 곧 정체성이자 교단 내에서의 강력한 신조(Creed)[29]로 작용한다.[30] 침례회는 회중주의-지역교회 존중의 매커니즘을 지니다 보니 장로교나 감리교, 성공회처럼 교회의 목회자를 노회나 감독이 직접적으로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31] 잘못된 해석을 취하는 이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 조치는 제명 밖에 없는 상황이라 침례회가 잘못된 성경 해석을 방관한다는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침례교는 신학이나 사상을 가볍게 보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을 읽고 해석해 나가는 데에 좋은 참고자료로 바라본다. 이는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또한 주장한 것이다. 성공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프로테스탄티즘 교회는 전통이 성경의 권위를 침범하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감 가운데 발생했고 실제로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전통을 꺼린다. 즉 침례회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며 따라서 비판 문단에 언급된 '책 한권만 읽은 사람이 위험하다'의 원래 의미[32]에 충실한 것이다: 침례교회의 성경중심주의는 이러한 부분이 더 강하게 발현되는 것인데 영국 국교회로부터 오랜기간 강하게 핍박받은 역사가 한 몫 하는 것도 사실이다.

침례교회는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고 유아세례를 부정하는데 이는 교회 공동체 자체가 회심한 중생자들만의 모임으로 보는 교회론에서 도출된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할례를 교회와 유아세례로 치환한 장로교회와의 뚜렷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로 인해 침례교회는 태어나는 즉시 교회의 신자가 되며 세금으로 헌금을 걷는 국교회 주의를 반대했고 이는 종교의 자유, 정교분리[33]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영국과 국교회인 성공회는 이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보고 반대했으며 많은 침례회 목사들과 교인들이 탄압받아 순교했다.(일반침례교회의 창시자 토마스 헬위스도 영국에서 순교했다.)

전통과 목회자/사제에게 권위가 부여되는 것을 반대하고[34] 국교회주의를 반대한 침례교는 역사적으로 아주 오랜 기간 성공회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회중교회가 탄생하는 등 여러모로 성공회와는 악연인 것이다.

침례교회의 1911년 신앙고백서 등을 토대로 교회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침례회는 철저히 성경중심주의적인 교단이며,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장로회가 칼뱅의 해석을 따르듯 한 신학자의 성경해석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성경의 권위는 이성이나 전통에 대해 반드시 우위에 서야한다는 주장인데, 그 위계가 흐트러진 사례가 바로 중세 가톨릭의 부패상과 현대 자유주의 개신교 등이고 이러한 것들이 침례회에서 타파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덧붙여 침례교회의 역사를 보면 침례교회의 신학자, 목사들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엔드류 풀러와 같은 사람들은 고등칼빈주의자였으나 상반된 입장의 여러 주장을 받아들여 자신의 신학을 정비하기도 했다.[35]

위의 비판 문단에 '침례회의 사고체계에서 기독교세계는 19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근본주의 기독교가 전부이며 그 이외는 모두 자유주의에 팔려간 이교도로 취급된다.'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미국의 침례교 중에서도 남침례교단내 극단적 근본주의 진영의 주장이다. 게다가 요즘은 이런 극단주의 양반들이 남침례회를 떠나 자기 살림을 차린 듯 하다[* 이런 미국 중심 주장은 남침례교단보다는 분리된 킹제임스 중심주의 쪽에서 더 많이 들리는 듯 하다.

역사적으로는 18세기 초부터 19세기 말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가 통합되기까지의 시기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말미암은 이신론과 유니테리언주의가 만연한 시대였다. 이러한 가운데 복음주의(Evangelical) 노선을 견지하려는 진영에서 우경화된 입장을 취하면서 일부 목사들이 복음주의에서 극단적 근본주의로 변화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 계기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극단주의 진영은 교단 내에서도 꽤나 골칫거리이다. 그마저도 위에 서술했듯 미국이 새 이스라엘이라 주장하는 분들은 주류 교단에서 많이 떠났고, 이단으로서 정통 침례회로부터 정죄되기도 하는 상황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내용은 일부 극단주의자들, 정통 교단으로부터 떨어져나온 독립적 교단의 주장임에도 침례회 전체의 의견인양 주로 침례교와 사이가 좋지 않은 성공회나 기타 개신교 교단에서 침례회를 향한 부정적 인식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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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Christian Mangazine을 보면 침례교도들이 상당히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당시 미국의 시대배경 상 그들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의 장로교는 19세기 중~말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신학적 쟁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구학파와 신학파가 무작정 통합되어 혼동된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Charles A. Briggs와 같은 이들로 말미암아 19세기 중~말 독일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에 빠져들고 있었고. 결국 독일의 고등비평 가운데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내용을 부정하며 성서의 무오와 축자영감을 폐기하는 데에 이르렀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 안수를 받고 교회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중교회도 신학교와 교회에 이러한 자유주의가 물드는 것을 막지 못하였고 미국의 침례교도들은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침례교회의 한 분파는 자유주의에 빠지면서 완전히 망하여 흡수되어버리기도 했다. 이런 선례도 있다 보니 현재까지도 미국의 침례회는 대개 보수적 성향을 띄게 되는데 위의 Christian Magazine에 나타난 것과 같은 소통의 거부는 다른 교단, 신학자들과의 소통을 거부한다기 보다는 자유주의 교단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적대적 선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37][38]


5. 한국의 침례회[편집]


여타 한국 개신교 교단이 그렇듯 미국에서 들어왔고, 미국 침례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중이다.

한국의 침례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 선교사 맬컴 펜윅(Malcolm C. Fenwick)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가 그 기원이다.[39]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했다.[40] 또한 만주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펜윅의 신학과 성경관은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이러한 특색은 현재의 한국침례회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있다.

1949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교단명이 변경되었으며, 미국 최대의 교단인 남침례회 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와 1950년에 제휴하였고 6.25 이후 존 애버내시(John A,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등의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를 따르는 교인들과 동아기독교회 출신 토착 교인들 간의 신학적 논쟁으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구 동아기독교회 계열, 일명 포항파. 안대벽 목사 중심)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미국 남침례회 선교사 계열, 일명 대전파. 장일수 목사 중심)로 분열되기도 했으나,[41] 1968년 두 파벌이 합동하였다.[42]

현재의 명칭은 '기독교한국침례회'(약칭 "기침")이다.

그 외에 1950년 미국 남침례회를 탈퇴한 목회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독립적 교회들의 연합단체[43]인 '성서침례친교회'(약칭 "성침")도 1954년 미국의 아이작 포스터(Isaac Foster, 한국명 표수다) 선교사가 대한민국에 들어와 서울 왕십리에 성서침례교회와 신학교를 설립한 이래 작은 규모이지만,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베뢰아연합을 탈퇴한 교회와 목회자들이 2017년 12월에 미국 북침례회 (American Baptist Churches, ABCUSA)와 신앙과 신학 노선을 함께 할 것을 천명하면서# # ‘한국침례교회연합’(한침)이 설립되었다.


5.1. 교단 신학교[편집]


대한민국의 침례회 산하 고등교육기관

[ 펼치기 · 접기 ]
기독교한국침례회
(기침)

한국성서침례친교회
(성침)

세계베뢰아교회연합[◆]
(세배연)

파일:한국침례신학대학교 UI.svg

신대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파일:성침대 UI.jpg

신대원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파일:베뢰아국제대.jpg

신대원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침례회 계열 초교파[7]
파일:한양대학교 로고.svg
파일:한양여자대학교 엠블럼.svg
한양여자대학교
파일:한양사이버대학교 엠블럼.svg
한양사이버대학교

[◆] 이단 시비가 있는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를 지지하는 교단.
[7] 재단이 침례회 계열이지만 어떤 교단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학교.
,



한국의 수많은 개신교 교단이 교단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여럿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44]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신학교는 1954년 설립된 대전광역시 유성구 소재의 한국침례신학대학교가 유일하다. 1960년대에는 포항파가 설립한 대한침례회신학교도 있었으나 1968년 포항파와 대전파가 합동하면서 침신대에 흡수, 폐교되었으며, 수도권 내의 군소 신학교와 영남신학교 등 침례회 군소 신학교들을 통합하여 1981년 경기도 안성시에 4년제 학력인정 각종학교인 수도침례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2006년 침례신학대와 통합하여 안성캠퍼스로 개칭되었고, 침례신학대로 편입한 학생들을 제외한 수도침례신학교 잔류 학생들이 모두 졸업함과 동시에 2009년 폐교되었다.

한편, 한국성서침례친교회는 1966년 설립되어 2003년 대학원대학교로 개편된 경기도 이천시 소재의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와, 2006년 설립된 서울특별시 성동구 소재의 성서침례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한국침례교회연합(한침)은 2017년 12월에 설립되었고, 다음 해인 2018년 3월부터 한국침례신학교(www.koreanbaptistseminary.org)를 운영하고 있다.


5.2. 지역 분포[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내 5대 개신교 교파[45] 중 지역적 편중(쏠림)이 가장 심하다.

교단의 하나뿐인 신학교가 수도권이 아닌 지방(대전)에 있다보니,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국내 5대 개신교 교단이고 총회가 서울 여의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교회 지역편중이 심각한 수준이다.[46]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충청권 남부 및 경기도 남부, 전라북도 북부 지역, 부산경상북도 동해안 지역[47] 등에서 교세가 강하다. 특히 침례신학대학교가 위치한 대전과 인근 위성도시 지역에 교세가 가장 집중되어 있고,[48] 그 외에 고양, 수원, 부산, 포항, 문경, 예천, 울진, 울릉도 등지가 침례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더욱이 이들 지역으로의 집중은 개교회주의가 강하고 교회 설립이 자유로운 침례회의 특성에 신학교 통폐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지역 거점 신학교의 소멸까지 겹쳐져[49]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50][51]

기독교한국침례회 홈페이지에서 지역별 지방회 목록을 살펴보면 다른 지역은 인구 990만명인 서울만 31개일 뿐 도단위의 경우 잘해야 도시별로 1개, 대도시의 경우는 많아야 4~5개 수준인데 비해 인구 154만 명에 불과한 대전에는 무려 15개의 지방회가 있다. 비슷한 인구수를 가진(151만 명) 강원도만 해도 지방회는 6개에 불과하며, 인접 지역인 충북(159만 명)은 7개, 충남(211만 명)은 12개다. 이를 지역별 인구수 대비로 환산해 보면 서울이 지방회당 31만 9천 명[52], 강원도는 지방회당 25만 1천 명, 충북은 22만 7천 명, 그나마 밀도가 높은 편인 충남도 17만 6천 명 정도 인구를 커버하는데 비해 대전은 지방회당 10만 3천 명 정도 밖에 커버하지 않아 그만큼 인구 대비 침례교회의 비중이 높다는 결과가 나와 침례회의 지역 편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당장 바로 아래 문단에 수록된 국내 침례회 주요교회 명단 중 5개 교회가 대전에 있다!!

국내에서 인구 대비 침례회 비중이 대전보다 높은 지역은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인구수 1만 명 남짓에 별도의 지방회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지역 교회의 절반이 침례교회이며, '리' 단위로 침례교회가 하나씩 있을 정도다.[53][54] 침례회의 교세가 약한 광주광역시, 전라남도[55] 인천광역시, 강원도, 제주도 등지에서는 침례회를 이단으로 오해하는 사례도 적지 않음을 감안하면 이는 심각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교회주의 성향이 강하고 신학교 교수들이나 신학생들의 신학 노선도 천차만별인 침례회의 특성은 교세 집중 지역에 교회가 난립해도 통폐합하기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56] 교단 내에서도 수도침례신학교 폐교 이후 수도권 신학교의 부재[57]와 지역 편중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2010년대 들어 동두천 주한미군 기지 캠프 님블 부지에 침례신학대의 수도권 캠퍼스 설립을 추진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승인까지 얻었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이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승인이 취소되고 말았다.[58]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경우 기독교한국침례회와는 달리 주로 수도권에 교세가 집중되어 있으며, 기침의 중심지처럼 인식되는 대전 지역은 오히려 성침의 교세가 약한 편이다.


5.3. 주요 교회와 목회자[편집]




5.3.1. 기독교한국침례회[편집]


  • 지구촌교회: 최성은 목사(3대, 현 담임), 진재혁 목사(2대, 케냐 선교사 파송), 이동원 목사(원로)[59]
  • 디딤돌교회: 임성도 목사(5대, 현 담임), 박문수 목사(4대, 원로,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역임)
  • 수원중앙침례교회: 고명진 목사(현 담임,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역임), 김장환 목사(원로)[60]
  • 송탄중앙침례교회: 박길호 목사(3대, 현 담임), 배국순 목사(2대, 원로)
  • 대전대흥침례교회: 정인택 목사(7대,현 담임), 조경호 목사(6대, 원로), 안종만 목사(5대, 원로)
  • 갈보리교회: 원재춘 목사
  • 늘사랑교회: 송호철 목사[61]
  • 중문교회: 장경동 목사[62]
  • 여의도침례교회: 국명호 목사[63]
  • 삼호교회: 안종대 목사[64]
  • 강남중앙침례교회 : 최병락 목사(3대, 현 담임), 피영민 목사(2대), 김충기 목사(원로)[65]
  • 연세중앙교회 : 윤석전 목사[66]
  • 서울교회 : 김성봉 목사[67]
  • 서울제일교회: 김형윤 목사
  • 신촌중앙교회: 정인환 목사
  • 빛의자녀교회: 김형민 목사[68]
  • 목동성일침례교회: 윤상욱 목사
  • 영통영락교회 : 고요셉 목사(현 담임), 고흥식 목사(원로)[69]
  • 성광교회: 유관재 목사(현 담임), 유병기 목사(원로)[70]
  • 열린교회: 우경수 목사[71]
  • 열음터교회: 신광은 목사[72]
  • 로고스서원: 김기현 목사[73]
  • 포도나무교회: 여주봉 목사[74]
  • 은혜드림교회: 최인선 목사
  • 부산침례교회: 김종성 목사[75]
  • 영안교회: 박정근 목사[76]
  • 해운대교회: 안효원 목사(현 담임), 송성구 목사(원로)
  • 범일교회: 최재훈 목사(현 담임), 최병산 목사(원로)
  • 새밝교회: 강상원·강밝내 목사(공동담임)
  •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77]
  • 하늘비전교회: 오영택 목사(현 담임), 오관석 목사(원로)[78]
  • 함께하는교회: 김요한 목사[대전][79]
  • 함께하는교회: 김인환 목사(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안성]
  • 점촌침례교회: 김위수 목사[80]
  • 울산소리침례교회: 진영식 목사
  • 생수의강교회: 천명원 목사[81]
  • 성림침례교회: 김종이 목사[82]
  • 충만한침례교회: 이승호 목사
  • 하늘소망교회: 김수현 목사[83]
  • 낮은담교회: 김관성 목사[84]

5.3.2. 한국성서침례친교회[85][편집]


  • 행당동성서침례교회: 이충세 목사[86]
  • 불광동성서침례교회: 김우생 목사[87]
  • 강동교회: 최육열 목사
  • 인천열린교회: 정민철 목사


5.3.3. 한국침례교회연합[편집]


  • 진성교회: 김종포목사
  • 주영광교회: 김근식목사
  • 예수생명교회: 장경남목사
  • 평강교회: 박장환목사
  • 예성교회: 신용배목사
  • 믿음교회: 정금자목사
  • 새나라교회: 이순자목사
  • 참아름다운교회: 여운이목사
  • 신성교회: 차경호목사
  • 기쁨가득한교회: 문상호목사


5.3.4. 침례회 출신 독립교회[편집]


침례회 소속이었으나 초교파 독립교회를 선언한 독립교회와 목회자 목록.
  • 은혜성경교회(윤명길 목사) [88]


5.4. 교단[편집]


  • 기독교한국침례회(기침): 1889년 맬컴 펜윅이 설립한 원산 소재 동아기독교회를 계승한 교단. 해방 이후 미국 남침례회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다. 1968년 남침례회 제휴파와 구 동아기독교파의 합동 이래 침례신학대학교가 소재한 대전과 그 주변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발전하였고 신학교들을 통폐합하면서 사실상 교권을 잡아 왔기에 대한민국 개신교계에서 대전과 기침 교단을 동일시하는 인식이 만연할 정도로 대전을 중심으로 한 충청권 남동부 지역에서 특히 교세가 큰 편이며,[89][90] 서울, 광주·전남강원도, 제주도 지역은 교세가 약한 편이다. 침례회의 특성인 개교회주의와 자율성, 민주주의의 원칙과 개인 의지에 의한 신앙고백, 유아세례 부정을 충실히 지키는 반면 예배전례는 거의 지키지 않는 교단으로, 목사는 예배시 예복(가운)을 대부분 입지 않으며 침례조[91]를 제외하면 강단에 성찬대나 십자가, 기타 장식이 없이 매우 간결하고[92] 예배 형식도 매우 자유롭다. 교단 차원에서는 정교분리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남침례회의 영향을 받은 교단 특성상 신앙은 물론 정치 성향도 특히 보수적이어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등과 함께 대한민국 기독교 우파의 주축을 이루는 교단 중 하나이다.[93] 다른 교단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열린예배, 신사도운동, 극단적 세대주의에 대해서도 교단 내 대다수의 교회들이 관대하거나 적극 수용하는 편이며, 가톨릭이나 WCC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하거나 적대하는 입장을 보이지만, 한기총에 가입하는 등 보수 성향 교단을 중심으로 개신교 연합활동은 어느 정도 하고 있다.

  • 한국성서침례친교회(성침): 1950년 미국에서 남침례회를 탈퇴한 목회자들이 설립한 독립교회 연합단체. 1954년 아이작 포스터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서울 왕십리에 자리를 잡고 활동하면서 기침과 달리 서울을 중심으로 주로 수도권의 침례교회에 많이 분포한다. 신앙적으로는 기침보다 더 보수적일 뿐 아니라 다른 교단과의 연합활동이나 교류도 거의 없는 편이다. 개교회주의가 강하면서도 어느 정도 교단으로서의 연합성을 가지고 있는 기침과 달리 성침 교회들은 개교회의 독립성이나 자율성이 기침보다 더욱 강하고 예배전례 면에서도 매우 자유롭다. 다만 예장고신 등과 마찬가지로 정교분리 원칙에 충실한 성격을 추구하고 있어 정치 활동은 거의 하지 않으며 기침에 비해 교세가 매우 약하여 일반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 한국침례교회연합(한침): ‘한국침례교회연합’은 ‘건강한 신약교회’와 ‘역사적 침례교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약 60교회가 참여하여 설립되었다(2017. 12. 12). 이 교단은 미국침례회, 필리핀침례회 등 외국 침례교, 그리고 침례교세계연맹과의 선교 협동을 통해 침례교의 발전에 기여할 계획을 갖고 있다. 교단 설립에 이어서 ‘한국침례신학교’(Korean Baptist Seminary)는 한국침례교회연합 직영신학교로 설립되었다(2018. 3. 1). ‘한국침례교회연합’은 그리스도의 주재권, 지역교회의 자치, 전신자 제사장주의, 민주적 회중정치 등 ‘건강한 신약교회’와 ‘역사적 침례교회’를 구현하고자 설립되었다. 요컨대, 이 교단은 2017년 서울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의 비리 사건으로 해산된 옛 기독교베뢰아연합 내 김기동 목사의 퇴출을 주장하던 반대파 목회자들이 정통 침례회 신학으로의 복귀를 선언하며 결성한 교단이다. 미국침례교회(ABC-USA, 북침례회)와 제휴관계를 맺고 역사적 정통 침례교 신학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기존 기성교회들이 올바르고 건전한 신학적 방향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고 발표하였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미국침례회 사무총장도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한국침례교회연합은 수도권에 신학대학원을 개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역사적 침례교회 신앙과 신학을 갖고 한국 개신교계를 이끌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대학교를 세울 비전을 갖고 있다고 한다.

  • 독립침례교회: 특정 교단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침례회 신학 또는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들. 독립 침례회 자체가 남침례회에서 탈퇴한 목사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고,[94] 침례회라는 특정 교파 신앙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무교단 독립교회나 초교파 교회들과 구분된다. 미국에나 있을 것 같지만 대한민국에도 소수의 독립 침례교회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경우 세례 대신 침례를 베풀고, 신자 개인의 자율적인 신앙 고백을 중시하며 유아세례를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정통 침례회와 비슷하지만, 교단에 소속된 교회들에 비해 근본주의 혹은 공격적이고 강경한 성향이 대다수이며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와 맥이 닿는 경우가 많다. 신학도 정통 침례회(혹은 침례회 정규 교단)와 거리가 멀거나 아예 다른 신학을 가질 수 있고, 일부 독립 침례교회들의 경우 개신교 정통 교단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서울 성경침례교회와 인천 사랑침례교회가 독립 침례교회에 속하며 고인드립 남발 등으로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도 독립 침례교회에 속한다.


5.4.1. 이단 시비가 있는 교단[편집]



5.4.1.1. 명백한 이단 교단[편집]

  • 성경침례교: 밥존스대학 출신 피터 럭크만이 설립한 펜사콜라 성경신학원의 한국 지부. 1995년 이송오가 창시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송오 목사는 '한글킹제임스성경' 라는 성경번역본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사실 교단보다는 독립교회연합정도라고 보면 된다.
  • 대한예수교침례회: 사실 이쪽은 구원파의 한 분파로, 2개의 분파(이요한파, 박옥수파)가 있다. 먼저 구원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던 '기독교복음침례회' 와는 구분이 된 다른 교단으로서 각각 각자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요한파' 는 거의 기성교회/교단처럼 운영되기도 한다, 심지어 자기네들은 구원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상시 전도집회를 통해서 교세를 확장시키곤 한다.
    • 대한기독교침례회: 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파에서 활동하던 구영석이 1980년대 중반 갈라져 나온 분파로, 전라북도 남원시에 총회를 두고 있다. 초창기에는 대한예수교연합침례회 또는 새생명선교회라는 명칭을 썼으나, 2017년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 좋은소식선교회로 변경하였다. 전국적으로 교회 수가 20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군소 교단이며, 스스로는 모라비아 형제단(Moravští bratři)에 뿌리를 두었다고 주장하나 신학적 성향은 생명의말씀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 한국킹제임스성서협회: 1978년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강서중앙교회 담임목사였던 서달석이 1993년 기성교단으로부터 이단 정죄받고 소속교단으로부터 면직처분을 받고 창설한 자생 모임. 구원파의 구원관 및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생명의 서신' 이라는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본인의 번역본 및 저서 그리고 성경강해 시리즈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성경침례교회 이송오목사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5.4.1.2. 이단 여부에 논란이 있는 교단[편집]

  •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기베연): 아래 세베연 설립자인 김기동이 설립한 교단이었다. 1987년경 현재의 기독교한국침례회(위의 주요교회와 목회자에 나온 교회가 소속된 그 침례회)에 소속되어 있던 성락교회와 김기동목사와 관련한 이단시비가 있자 기독교한국침례회를 탈퇴하여 김기동 목사와 뜻을 같이 하는 교회의 목회자들과 함께 김기동목사가 설립한 교단이다. 초기에는 기독교한국남침례회(미국 남침례회와는 무관)라 불리다 기독교한국침례회연맹(기침연맹)으로 개칭, 이후 기침 측에서 이름이 같다며 항의하자 사도행전 17장 11절과 12절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에서 따와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으로 바뀌었다.[95] 하지만 이후 장로회 통합측의 사면철회 사건과 SBS 보도사건 이후 성락교회 내에서 김기동 감독을 지지하는 측(원감파)과 비판하는 측(개혁파)의 대립이 발생할때 기베연 내부에서도 그러한 대립이 있게 되자 결국 교단결의를 통해 해산하게 되었다. # 이후 김기동 목사를 지지하는 측은 세베연을, 지지하지 않는 측은 한침을 각각 설립하였다. 그리고 성락교회의 개혁파(성락교회 교회개혁협의회)는 세베연, 한침 어느 쪽도 속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참고로 기베연은 법적·행정적으로 완전히 해산되었고 아래의 세베연과 한침 은 기베연이 해산, 소멸된 이후 설립된 교단이므로 어느 곳도 기베연의 법적·행정적 후신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 세계베뢰아교회연맹(세베연): 설립자 김기동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의 2016년 사면취소 사태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김기동 목사의 행각이 방영된 이후 성락교회 내부에 김기동 목사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분열이 일어나면서[96] 기존의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기베연)[97][98]이 해산되면서 새로 설립된 교단이다. 성락교회 사태에서 김기동 목사 입장을 지지한다.
  •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가 이끄는 독립 침례교회.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번역본을 출간한 교파이기도 하며, 성경침례교와는 적대 관계이지만 기존 개신교 교단들도 자신들과 뜻이 맞으면 인정하는 편이어서 이단 여부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 파리열방교회: 수장인 S목사는 프랑스에서 침례회측의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고 주장하나, 제대로 된 과정을 통해서 목사가 되었는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파리 교민사회에서 한때 영향력이 일각에서 있지만 연이은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이미지가 실추되어가고 있다.


6. 국외의 침례회[편집]


유럽에서는 재세례파와 특수침례회, 일반침례회가 중심이며, 미국의 침례회보다 급진적이며 진보적인 색채가 더 짙다. 물론 유럽에도 미국의 일부 침례교 교단처럼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침례교 교단이 존재한다. 하지만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99]

한국 침례회는 미국 침례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미국에서는 침례회가 개신교 교단 중 가장 거대하다.[100] 대표적인 교단은 흔히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남부 보수 공화당 지지 기반 지역의 교회들이 중심이 된 남침례회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며, 한국의 침례회는 미국의 남침례회와 가깝다. 이 외에는 남침례회총회와 노예 문제로 분열[101]한 미국침례회총회(American Baptist Convention),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기존 침례회 교단을 탈퇴하고 창설한 전국진보침례회총회(Progressive National Baptist Convention) 등이 있다.

현재 미국의 침례회 목회자 중 유명한 목사는 순회전도집회로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 <목적이 이끄는 삶>을 저술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대표 기도를 한 릭 워렌, 조용기 목사를 비판하여 국내에 더욱 유명해진 존 파이퍼[102], 급진적인 회심을 강조하는 폴 워셔, 칼뱅주의 강해설교가로 유명한 존 맥아더 목사 등이 있다. 각종 고인드립패드립 남발로 유명한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도 있다.[103]

2014년 9월, 미국 남침례회 소속 캘리포니아의 뉴하트 커뮤니티 처치의 담임목사 대니 코르테스가 동성애자와 동성커플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남침례회에서 제명되었다. 대니 코르테스 목사는 자신의 아들 역시 게이었지만, 기독교인이고 목사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음을 깨닫고, 그리고 수많은 성소수자가 이웃으로 존재함을 깨닫고 스스로의 신앙적 양심과 고찰을 통해, 그리고 사무처리회라는 침례회의 절차적 전통을 거쳐서 결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 남침례회는 고수하는 교리를 더 중요시하여 제명한 것이다.[104] 남침례회의 뿌리는 철저한 근본주의임을 다시금 증명한 역사다.

남침례회의 근본주의성은 사회문화적 측면 외에도 미국의 정치적 현실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는데, 남침례회 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의 알버트 몰러 총장[105] 은 조직신학자로서 몰몬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한 인물이다. 심지어는 논문도 썼고 자기 홈페이지에서 까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인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밋 롬니가 몰몬교인임에도 불구, 그가 공화당 후보라는 이유로 지지했으며[106], 롬니의 패배에 대한 논평을 "미국 복음주의자에겐 충격적인 결과", "세속화된 미국에서 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는 후보의 승리"라며 분통을 터트렸다.[107]

이러면 마치 버락 오바마무신론자인 것처럼 보이는데, 오바마는 엄연히 개신교인이다. 오바마가 과거에 속했던 교파인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는 사회 참여를 강조하고 동성애자에게 관대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교단이다. 그리고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오바마 대통령 가족 모두가 백악관 근처의 침례교회에 등록해서 다니고 있다.[108] 또한 해비타트 운동으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역시 남침례교인[109]으로 홍보하다가 지미 카터가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고, 남침례회의 여성 목사 안수를 주장하며,[110] 미국의 종교 근본주의를 경고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과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남침례회 일부에서 지미 카터를 세속주의에 물든 사람이라며 까고 있다.

하지만 저 남침례회조차 진보적이라며 비난하는 극소수의 극단적인 보수성향 독립교회들도 있다. 이들은 특정한 교단을 형성하지 않고 성향만 공유하는 편이다. 대체로 남침례교인들조차 한 수 접어줄 수준의 과격성을 띄고 있는 교회들이다.

7. 나무위키에 항목이 존재하는 인물[편집]



7.1. 목회자[편집]




7.2. 평신도[편집]




8. 관련 문서[편집]




9.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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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WA·Baptist World Alliance[2] 침례교세계연맹에서 발표한 수. #[3]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특징은 개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방언 기도를 하지 않는다. 성경을 권위가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며 보수적인 신학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칼뱅주의를 지니는 교회도 있다. 아울러 축도가 없으며, 폐회기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미국도 자유 의지 침례교회나 성서침례교회, 그리고 독립침례교회도 똑같다.[4] 침례교세계연맹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수다. 이는 정식 세례를 받은 성인 교인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성인을 포함한 모든 연령의 교인으로는 약 8,0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5] 약 1,600만 명으로 집계된다.[6] 오순절교회는 교파 자체가 아니라 오순절 신학을 기반으로 한 여러 교파들을 묶은 것이기 때문에 교파의 규모를 따질 때는 포함하지 않는다.[7] 개신교의 대부분 교단들은 '세례'라고 칭하지만, 침례회는 그리스어 성서의 βαπτιξω가 '담그다'라는 의미라는 것에서 물에 온전히 들어간 뒤 나오는 '침수례'를 주장하기에 세례가 아닌 침례라고 부른다. 물론 침례회가 아닌 다른 교단들 중에서도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재림교회, 오순절교회 등과 같이 약식 세례가 아닌 침수례를 주는 교단들이 있다.[8] 성공회는 (모든 국민이 믿어야 하는 국교회로서) 가톨릭/루터교회/장로교회 등 여러 기독교 교파들의 교리를 모두 아울러서(비아 메디아)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기독교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런 성공회에서도 포용하기 힘들었던 기독교 교파 중 하나가 침례교였다. 가장 큰 이유로는 유아세례를 부정하여 세례를 다시 주어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세례를 두 번 주는 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성공회 39개 신조 중 38조의 "그리스도인의 부와 재산은 그 권리와 명칭과 소유에서, 재세례파 사람들이 거짓되고 과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공유물이 아니다."에서도 침례회(재세례파)와 성공회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알리스터 맥그래스 '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참고.[9] 일반적으로 기독교 교파들을 가톨릭주의(보편주의) 교파로부터 개교회주의 교파로 성향에 따라 나열해보면, 가톨릭 교회 - 성공회 - 루터교 - 감리회 - 장로회/개혁교 - 침례교 정도의 순서로 적어볼 수 있다. 요컨데, 침례교는 가톨릭 교회나 성공회의 고교회파와 완전히 대척점에 서있는 교단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 맘 먹고 모든 교파를 포용하려던 성공회가 침례회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이유도, 거칠게 생각해보자면 고교회파와 침례회를 동시에 포용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10] Martin Bucer·Butzer, 1491–1551). 스트라스부르를 중심으로 남부 독일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종교개혁가.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출신으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이자 비텐베르크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를 하이델베르크 토론에서 만났고, 종교개혁에 뛰어들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개혁자들의 연합에 힘쓰며 종교개혁을 진행했고, 제네바 1차개혁에 실패한 뒤 추방된 장 칼뱅을 맞아 신학 교수직을 주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칼뱅의 4중직분(목사, 박사(신학교수), 장로, 집사)과 권징을 비롯한 교회론, 이중예정론을 비롯한 구원론, 성찬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슈말칼덴 전쟁의 패배로 스트라스부르에 가톨릭화가 강요되자, 영국 대감독인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의 초청에 응하여 영국으로 갔고 성공회 개혁을 도왔고, 영국에서 사망했다.[출처:]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554-556쪽[11] 장로의 유전[12] 고르반[13] 침례회 역사에 간접적 영향을 끼친 재새례파(메노나이트) 교단도 현대에는 아미시를 제외하면 진보 성향이다.[14] 반면에 엄격히 칼빈주의 전통을 따르는 개혁침례교회 혹은 특수침례교회는 1689 런던 침례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엄격한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기에 나은 편이다.[15] 운영위원회, 시무연회, 사무처리회 등[16] 가톨릭·정교회·성공회의 '교구', 장로회의 '노회', 감리회의 '연회'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정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이다.[17] 장로교회의 영향도 있지만 안수집사라고 하면 교계의 공식적 자리에 참석할때 침례교의 제도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타 교단에서 '안수집사 말고 장로가 와야 한다'는 마찰이 생겨서 결국 안수집사에게 장로라는 호칭을 주는 것이다.[18] 최근 한국의 개신교의 관습적 절차에 따라 '장로'직책을 두는 침례교회도 늘어나고 있으나, 침례회에서 부르는 장로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호칭'이다. 그러나 이름 자체에 권위가 있는 것은 함정[19] 개교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침례회의 특성상 원칙적으로 엄격하게 선별되어야 할 신학생의 인준이 형식상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교단 헌법(교회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무처리회 절차가 교회마다 다르며 중앙에서 목회자를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소가 없고 은사가 없는 사람이 성적만 맞춰서 신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막기 힘들다.사실 이것은 한국의 개신교의 어느 교단이나 마찬가지지만[20] 사람들에게는 흔히 마리아론 정도가 가톨릭개신교의 차이로 인식되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침례회는 가톨릭과 그 차이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1] 예를 들어서 영문 "I was baptized by immersion"을 한어로 번역하면 "나는 침례를 침례도 받았다" 가 아니고 "나는 세례를 침례로 받았다"로 하는 것이 맞다.[22] 그래서 미국 및 서방 세례(Baptist)교회와는 달리 한국 침례회(Immerisionist)에서는 개역성경에서 '세례(Baptism)'를 모두 '침례(Immersion)'로 변환한 성경을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에 '세례(Baptism)'라는 단어가 나오면 모두 '침례(Immersion)'로 바꾼 것이다. 그 외에는 기존 개역 혹은 개역개정판과 차이가 없다.[23] 물론 침례교 측에서는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에 나오는 '성경의 명료성' 개념을 역으로 이용하여 정신승리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우둔한 자도 성경을 읽으면 그것만으로 구원의 이치를 알기에 충분하다'는 성경의 명료성 테제는 기성교회전통과 성경 사이의 우위를 논하는 논제이지 '사적 독서만으로 신학이 완성된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즉 당대 교회의 구원관이 성경에 배치된 바 이를 배척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교리는 성경에 대한 사적 독서에 이어서 신자간의 대화와 집단적 차원의 성경연구를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성적으로 당연하다.[24] 참고로 이는 원래 영국 종교개혁 과정에서 성공회가 제시했던 테제이다. 성공회의 사제였던 존 웨슬리는 이에 경험을 추가하여 4요소를 제시하였다. 웨슬리는 메소디스트 운동은 성공회 내의 개혁운동으로 여겼으며 평생을 성공회 사제로 살았다. 하지만 성공회와의 마찰로 그는 사제직은 유지되었으나 성공회의 제제와 직무파면으로 성공회 교회에서 목회할 수 없었고 생애 후기에는 감리교회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으면서도 자신은 성공회 사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실질적 창시자로 통한다.[25] 전통의 유지는 개신교에서 뜨거운 논제인데, 성공회는 성경과 충돌하지 않는 전통은 유지시켰다.(성호를 긋거나, 정해진 기도문을 유지시키거나) 하지만 그 외의 개신교들은 주기도문과 같이 성경에 언급되는 기도문이나 전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전통을 배제시켰다. 이는 전통이 그 시대의 복음의 해석을 위한 노력의 역사이기에 그 가치는 인정하나 이는 시대마다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방면에서의 판단이었다. [26] 침례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교단 자체가 통째로 날아갔으며, 루터교는 해방 이후에 들어왔고,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회였기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적국의 교회로 판단되어 폐쇄되고 쫒겨났다. (여기서 조선성공회는 일본 성공회 소속이 아닌 켄터베리 관구소속이었기에 해방 당시 성당을 뺏기거나 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 정교회 소속이었던 한국 정교회는 해방되면서 송두리째 성당이 사라졌다.)[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 성경의 충족성 고백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다. 예장통합등 전 세계적으로 대다수의 신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좌파신학신정통주의의 창시자 칼 바르트는 성경은 인간의 주관과 의지로 기록되었으나 그 너머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며 일견 그럴싸한 주장을 하지만, 만약 그들의 믿음과 같이 성경이 부분적인 영감으로 인하여 인간의 주관과 의지가 혼합되어 있다면 과연 무엇을 근거로 기록자의 인간적 주관을 배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만이 아니라 코란이나 몰몬경, 혹은 그리스 신화에도 계시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이들에 적힌 내용은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무엇에 근거하여 주장할 수 있는가? 이러한 책들도 스스로가 계시라고 증거하고 있다. 왜 성경만 자증적 권위가 있고 이들에게는 자증적 권위가 없는가? 바르트는 여기에다 성령의 조명을 들이댄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엄밀하게 따진다면, 해석자가 받았다고 주장하는 성령의 조명이 참으로 성령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성경에 일단 인간의 주관이 섞여있다면, 좌파 신학자들이 신봉하는 이성에 근거해서는 과연 어느것이 계시이고 어느것이 인간의 주관인지 절대로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충족성과 성경의 명료성을 부정한다면, 성경에서 계시를 찾아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 오직, 내 생각에는(또는 내가 받은 감동으로는) 아마도 이게 계시일것 같다고 아무 근거 없이 주장하는 수 밖에 없다. 좌파신학에서는 계시의 확정이 논리적/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계시일 확율이 높은/낮은 이론들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양자역학? 슈뢰딩거의 계시. 역사가 종료될 때 까지 계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다만 확률로써 존재할 뿐이다. 다른각도에서 보면 계시가 불분명하므로 인간의 구원도 불확실하여 결국 확률로 나타낼 수 밖에 없게 된다. 당신의 구원은 죽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단지 확률로만 나타낼 수 있다. 좌파 신학의 비방처럼 우파 신학이 아무런 근거나 논리도 없이 서 있는 것이 아니다.[28] 1930년대 미국-일본 전쟁 상황에서 미국 선교부가 조선 개신교회에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기독교회가 신사참배했음에 대해서는 안종철의 2008년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 참조. 이 논문에 따르면 한국 장로교에서 존경하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앞장서서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는 논리를 미국과 한국의 장로교단에 설파했다. 그런데 예장 통합 측에서는 연세대 등에 동상을 세우고 후손들을 예우해줄 정도로 언더우드를 숭상하면서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일제로부터 투옥 등의 피해를 받은 조선인 교회에는 냉담한 대우를 했다. 당장에 예장(고신) 교단의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장로회 내에서 철저하게 출옥성도파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자료 제공을 거부하여 고신 교단은 자체적으로 역사편찬위원회를 꾸려야 했다. 단, 신사참배 논리가 도덕적 우월주의로 이어진다면 바리새인식 논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29] 물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조는 국가교회의 소멸 이후 없어졌다고 본다.[30] 물론 침례회가 반신조주의를 전통으로서 가지고 있는 것은 맞으나 설립 당시부터 개교회, 지방회, 총회 단위별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자신들의 신앙과 신학을 분명히 표시하였다. 이는 침례회는 교리가 없기에 비성서적이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향한 답이 될 것이다.[31] 물론 지방회에서 질책한다.[32] 중세 스콜라철학의 대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나오는 말로, 원 의미는 겉핥기 식으로 여러 권을 읽은 자보다 한 권이라도 꼼꼼히 읽은 이가 무섭다는 것이다.[33] 침례회의 정교분리 주의는 물론 회심을 강조하는 방면에서의 이유도 있으나 정치 위의 교회인 가톨릭의 타락을 경험하고, 정치가 교회 위에 서서 국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성공회를 경험한 결과 정치와 종교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도출해낸 것이다.[34] 침례교회는 전통과 목회자는 존중과 공경의 대상이지 그것 자체가 직접적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고 본다. 전통에 높은 권위가 부여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은 성공회를 제외한 프로테스탄티즘 교회 대다수가 해당한다.[35] 그렇게 탄생한 것이 복음적 칼빈주의이다. (Andrew Fuller-evangelical doctrine 참고)[36] 물론 침례교 내의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은 도라이가 맞다. 생각보다 굉장히 위험한 도라이.팻 로버트슨을 보면 알 수 있다.그리고 덧붙이자면 침례교 내에서 남침례교의 교세가 가장 강한 것은 맞으나 그 내에서도 복음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 침례교는 미국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자[37] 물론 이러한 보수적 성향을 띄는 것은 주로 미국의 남침례회나 남침례회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등지에서 보이며 유럽이나 그 외의 침례회에서는 교회들의 통합과 소통에 긍정적인 성향을 띄는 곳이 많다. 영국에서 신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38] 당장에 가장 유명한 침례회 인사인 빌리 그레이함 목사가 교리적 통합은 불가능할지언정 다른 교파나 가톨릭 교회와의 소통도 마다하지 않은 것을 보면 미국의 침례회도 전과는 달리 많이 변화하긴 했다. 물론 그가 눈에 띄는 것도 맞다.[39] 선교 초기인 1895년 미국 보스턴 소재 엘라싱 기념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E.C.폴링 선교사 부부를 파송,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지역인 강경에 침례교회를 세웠으나 해당 선교회의 자금난으로 이들은 몇 년 못가 철수하였고 펜윅의 대한기독교회로 흡수되었다.[40] 실제 당시 동아기독교 소속 교회들은 경상도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교세가 집중되어 있었다.[41]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당시 침례회 총회장이었던 안대벽 목사를 불신임한 것이 분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42] 사실 이게 말이 좋아서 합동이지, 엄밀히 말해 안대벽 목사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포항파가 급격히 힘을 잃어 대전파에 일방적으로 흡수당한 것이다. 충청권과 더불어 한국침례회의 2대 중심지격인 영남 지방의 침례회 교세가 오늘날 정체되고 대전 지역에 교세가 심하게 편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 합동이기도 하다.[43] 교단에 가까운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지만 소속 교회들이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데다 이름에도 '친교회'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교회를 총괄하거나 제재하는 기능은 없으며, 목회자들의 정보 공유와 신학적 동질성을 위한 친목 단체에 가깝다.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에는 개신교 교단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다.[44] 다만 성결교회의 경우 기성, 예성, 나성 등 각 교단별로 신학교가 1곳 뿐이다.[45] 장로회, 감리회, 성결교회, 순복음, 침례회[46] 그나마 국내에서 지역 편중이 심한 교단들로 구세군, 예장재건, 예장고신, 루터교회, 대한예수교복음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교단의 태동 또는 총회 소재지가 지방이거나 국내에서 교세가 약한 군소 교단으로 서울에 총회를 두는 대형교단인 침례회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4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구세군 대한본영의 교세가 강한 영덕군은 제외.[48] 그 이유는, 상술하였듯이 광복 후 재건된 침례회가 1959년 미국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대전지역 파벌(기독교대한침례회)과 펜윅의 동아기독교회 출신 교인들이 주축이 된 포항지역 파벌(대한기독교침례회)로 나뉘었고, 1968년 대전파가 포항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동하여 지금의 기독교한국침례회가 되었기 때문이다.[49] 1968년 인천 대한침례회신학교 폐교, 2009년 안성 수도침례신학교 폐교.[50] 한 예로,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전 연기군 남면 나성리에 위치하고 있던 한 침례교회는 교회 소재지 일원이 행복도시 예정지에 편입되어 주민들이 이주하게 되자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종시에 정착하여 새로이 유입되는 지역 이주민들을 흡수, 발전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침례신학대학교 인근 대전 유성구 노은동 외곽 지역으로 이주, 그곳에 정착해 흔한 인대전 침례교회가 되어 버렸다. 면소재지인 종촌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통합 교회가 행복도시가 건설되면서 종교용지를 분양받아 새롭게 단장하고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자리잡은 것이나, 인근 송담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합동 교회가 임시로 조치원읍으로 이전했다가 세종시 건설 이후 원래 지역으로 복귀하여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51] 참고로 말하면 대전에 최초의 침례교회인 대전제일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 직후인 1954년이다. 이는 1907년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유성교회), 1919년에 세워진 최초의 성결교회(대전중앙교회), 1937년에 세워진 최초의 구세군교회(대전중앙영문)는 물론 1938년에 세워진 최초의 장로교회(대전제일교회)보다도 훨씬 늦다. 애초에 동아기독교회의 선교구역에 대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 소속의 존 애버내시(John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선교사가 대전에 성서신학원을 세운 것이 대전 지역 침례회 선교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교단 중 대전에 진입한 시기가 가장 늦은 침례회가 신학교를 등에 업고 대전 지역에서 개신교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라 할만 하다. 정작 하단에 있는 침례회 유명인 중 대전 사람은 1~2명 정도인데...[52] 언뜻 보면 지방회 수가 많아서 서울의 침례교회 비중이 가장 높아 보이지만 인구 대비로 계산해 보면 의외로 침례교회 비중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 중의 하나가 서울이다. 그나마 서울 지역의 침례교회는 한강 이남, 특히 서남부권(통칭 영등포권) 및 강남권에 집중되어 있고, 동북부권(통칭 성북권)에는 매우 드물다.[53] 이미 1910년대에 침례회의 모태인 펜윅의 대한기독교회가 울릉도에 상륙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 활동을 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 울릉군보다는 밀도가 낮지만 울진군도 대전보다 인구 대비 침례회 교세가 강한 곳에 속한다. 다만 워낙에 인구수가 적은 오지 지역이다 보니 침례교회 밀도만 높을 뿐 대전처럼 메가처치급 교회를 배출할 정도는 아니다.[54] 물론 시도 단위에서 시군구 단위로 범주를 더욱 좁혀 지방회 소재지에 따른 침례교회 지역 분포를 확인해보면 인구수 대비 침례교회 비율은 단연 대전광역시 유성구가 1위이다. 침신대 인근인 유성구 노은지구 일대만 살펴보아도 개척교회 포함 20개 가까운 침례교회가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55] 전라북도, 특히 대전과 인접한 전북 지역은 호남 지역 침례교회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을 정도로 침례회의 비중이 높다. 그런데 정작 전주 바로 옆동네인 진안이나 장수에는 침례교회가 하나도 없다...[56] 예장 통합, 예장 합동이나 감리회의 경우 교회설립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교단법을 통해 어느 정도 거리 제한을 두어(통합/합동 300 m, 감리회 200 m 등) 특정 지역에 같은 교단의 교회들이 몰리는 것을 막는 반면 성문화된 교단법 자체가 없는 침례회의 경우 이러한 제한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침례회의 비중이 높은 대전의 경우 같은 동 관내에 불과 50 m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침례회 개척교회가 몇 개씩 난립하는 현상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둔산신도시와 노은지구. 심지어는 침례교회가 입주해 있는 한 건물 바로 옆 건물에 또다른 침례교회가 있는 코미디같은 사례도 실제 존재한다![57] 참고로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전체 한국 침례교회의 절반이 수도권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58] 침신대 동두천 캠퍼스 건설로 인해 침신대의 중추 기능이 수도권으로 옮겨가고 결국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대전 지역 교권파 정치목사들이 의도적으로 캠퍼스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로비를 벌여 방해했다는 의혹이 있다.[59] 흔히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목사와 더불어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린다. 교계에서 존경받는 원로목회자 중 한명이다. 현재는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되었다. 2대 담임목사였던 진재혁 목사는 2019년 5월 26일부로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9월부터는 타코마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였던 최성은 목사가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침례회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칼뱅주의 교리를 따르는 목회자이기도 한다.[60] 극동방송의 사장이며, 세계침례회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는꼼수다김용민과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특히 한국 교회의 부흥사를 보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분인데,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 주최로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부흥회의 통역을 담당한 김장환 목사는 이 덕분에 한국 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61]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주축의 교회로 성장하다가 유성선병원 옆으로 이전하였는데, 지하에 건축된 예배당으로 일명 '카타콤'교회로도 불리기도 한다.[62] 기독사랑실천당 대표를 할 뻔했었다. 물론 본인이 안 한다고 해서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베뢰아 아카데미 출신.[63] 고 한기만 목사가 1972년 창립한 교회. 강남중앙교회, 연세중앙교회와 더불어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침례회 대형 교회이다.[64] 서울의 대표적인 침례회 대형교회 중 하나. 1976년, 방배동의 삼호아파트 상가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65] 전 담임목사였던 피영민 목사도 이동원 목사와 동일하게 칼뱅주의 신학자로 유명했다. 본래 침신대 교수였으나, 장로교의 이재훈 목사가 피영민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서 설교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설교 표절의 피해자. 참조.[66] 서울의 대표적인 침례회 대형교회 중 하나. 1986년 연세대학교 학술 정보원 남문 근처 상가 지하에서 개척해 현재는 구로구 궁동에 있다.[67]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가 최초로 설립한 교회로 현재 한국침례회 주류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이다.[68] 2017년 '대학연합교회'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참고로, 담임목사는 이름과 달리 여성이다. 배우 최강희가 다니는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69] 한때 에덴수도원의 후신으로 알려져 이단 논란이 있었던 명인교회 자리에 들어섰다. 고흥식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하였다.[70] 1966년 서울 성산동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하여 1990년대 고양시로 이전하였다. 유관재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71]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통일로 1001) 1001카페로 열린 소통과 함께 20년 이상 매일 복음전도와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에 헌신함. [72] 2014년 2월에 한국 개신교의 기형적인 구원관을 비판하는 저서'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출판하여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박사과정 수학중이며, 다수의 신학서적을 번역, 저술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서적이 한국교회의 대형화, 기업화를 비판하는 '메가처치논박'이다.[73] 평신도에게 다가가기 쉬운 다수의 신학서적을 번역, 저술한 작가로 더욱 유명하다. 작가로 더 유명한 김기현 목사와 신광은 목사는 성향상 재침례파(재세례파)에 가깝다.[74] 미국 남침례회 출신이며, 초교파적 연합 선교단체인 새물결선교회의 회장. 그가 담임하는 포도나무교회는 새물결선교회의 집회와 교육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사실상 새물결선교회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75] 동아기독교 재건의 주역이었던 안대벽 목사가 1951년 설립한 부산 지역 침례회의 모교회. 침례회 분열 시기에는 포항파의 본산 역할을 하였다. 동래구 안락동 동래봉생병원 인근에 있다.[76] 부산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형 침례교회. 가야동 본당과 센텀(재송동)에 지성전을 두고 있다.[77] 김성로 목사는 본래 체육교사 출신으로, 뒤늦게 침례회 신학을 공부하여 40대 후반에 목사 안수를 받고 강원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마음교회를 개척하여 춘천의 대표적인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며, 2013년 7월 대동 · 대한운수 차고지 맞은편에 있던 예배당을 인수, 이전하였다. 그러나 소위 '부활복음'이 지나치게 비성경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2016년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을 중심으로 이단성 연구조사가 진행 중이다. 침례회에서는 문제가 있는 부분의 수정을 약속했다며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고 있지만, 예장합동은 김성로 목사의 신학사상을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아예 이단으로 낙인찍으려는 분위기. . 결론적으로는 예장합동 제 104회 총회에서 이단성 없음으로 결론짓고 교류금지를 해제하였다.[78] 서울중앙침례교회 월드비전교회 → 하늘비전교회로 교회 명칭이 변경됨. 참고로 담임 목사는 원로 목사의 아들이다.[대전] [79] '함께하는공동체'를 표방하며 4개 교회의 공동체 모임을 각자 가지며 문화사역에 힘쓰고 있다.[안성] [80] 구한말인 1909년 설립되어 110년의 역사를 가진 문경시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1957년 석조로 건축된 현 예배당은 문경시내에서 '돌교회'로 유명하기도 하다.[81] 김기동 목사로 유명한 서울성락교회에서 부목사와 베뢰아아카데미 원장 등을 하다 탈퇴를 하고 개척한 교회이다. 초기에는 부천에 있었으나 서울 금천구로 교회를 이전하였다. 기독교 한국침례회에 정식으로 회원가입을 하고 지방회에 소속된 것으로 보아 신학적으로는 베뢰아 요소들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82] 1987년부터 2005년까지 베뢰아 소속이었다. 그리고 2020년 8월 26일 기준으로 해당 교회에서 광주광역시 코로나 집단감염이 추가적으로 발생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신도가 광화문 집회 참가했다고 전해진다.[83]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명이 아닌 나팔수라는 이름으로 목사활동을 하고 계신다.[84] 담임목사인 김관성 목사는 행신침례교회 담임목사였는데, 2022년 1월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는 내용으로 설교하던 중 교회는 교회를 낳아야 한다면서 자신이 직접 분립 개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행신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따라올까봐 걱정되었는지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동에 개척했고, 2022년 8월 7일 공식적으로 개회예배를 드렸다.[85]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특징은 개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방언 기도를 하지 않는다. 성경을 권위가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며 보수적인 신학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칼뱅주의를 지니는 교회도 있다. 아울러 축도가 없으며, 폐회기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미국도 자유 의지 침례교회나 성서침례교회, 그리고 독립침례교회도 똑같다.[86] 아이작 포스터 선교사가 세운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모교회로 성서침례신학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87] 그는 1938년생이며, 1961년부터 63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담임목사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침례회의 원로인 1934년생인 김장환 목사와도 상당한 친분이 있으며, 그 역시 침례교의 원로라 볼 수 있겠다. 김장환 목사가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원로이며, 김우생 목사는 성서침례교회의 원로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불광동성서침례교회는 대한민국 성서침례교회 중 가장 유명한 침례교회이며, 친교회에서의 영향력이 제법 큰 편이다.[88] 1979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창립되었으나, 2002년4월 기독교 한국침례회 탈퇴 및 근본주의 독립교회로 가입하였다.[89] 실제 대전의 전체 개신교 교단별 비율은 기침 교단이 압도적이지는 않으며, 기감,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침, 기성 순으로 특정 교단에 치우침이 없이 고루 분포하는 편이다. 다만 6.25 이후 남침례회 선교사들의 활동과 침례신학대학의 입지 등으로 인해 대전이 기침 교단의 홈그라운드처럼 인식되면서 침례회 개척교회들이 다른 지역과 달리 유독 대전에서 심하게 난립하며 지역 내 기침의 개교회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리고 이들 교회들은 지역내 개신교 연합행사나 부흥회, 지역사회 봉사 프로그램 등에 활발히 참여하여 명단을 올리며 지역내 다른 교단에 비해 현격하게 눈에 띄는, 사실상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면서 "기침=대전"이라는 고정관념이 고착화된 것이다.[90] 이 외에도 원래 동아기독교회의 거점지였던 원산이 해방 후 북한 영토가 되면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구 동아기독교회 계열 세력들은 기반이 크게 약화된 반면, 엘라싱 기념선교회에서 양수받은 선교지인 충청권 남부지역의 신자들은 원산이나 동해안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관심과 지원 가운데서도 자력으로 지역 내에서 부흥하면서, 해방 이후 남침례회 선교사들의 활동 거점지를 지역 내에 유치하였고 교단이 분열된 후 힘의 균형이 구 동아기독교회(포항파) 쪽에서 남침례회 선교사들(대전파) 쪽으로 기울어 포항파가 대전파에 흡수당하면서 대전 및 충청 출신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구 포항파 세력의 거점지였던 대한침례회신학교를 폐교시킨 것도 이러한 상황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91] 침례를 베풀 때 목사의 인도에 따라 평신도가 들어가는 욕조.[92] 다만 기침의 경우 예장합동과 달리 교단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강단에 십자가를 두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 자율에 맡겨지며, 따라서 개교회 성격에 따라 십자가를 강단에 두는 교회도 일부 존재한다. 특히 침신대가 있는 대전 지역의 침례교회들 중에 십자가를 강단에 두는 교회가 많다. 하긴 대전은 강단 십자가를 교단 헌법으로 금지하는 예장합동 교회들 중에도 십자가를 강단에 두는 교회가 있을 정도로 강단에 십자가를 두는 문화가 보편적이다 물론 전통적인 침례회의 신학 견해상으로는 예배당 강단에 십자가를 두는 것은 십자가를 우상숭배하는 것으로 보아 강단에는 십자가를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실제로 동아기독교 출신들(포항파)이 주를 이루었던 경상도 지역의 침례교회들 중에는 부산침례교회 등과 같이 지금도 예배당 내부 강단에 십자가를 두지 않는 교회들이 많다.[93] 개교회주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침례회 특성상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진상규명 농성에 참여한 최헌국, 양민철 목사처럼 좌파 성향을 가진 목사들도 있기는 하지만 교단 내 교권파 인사들은 대다수가 기독교 우파 성향이다. 기침 내 교권파 목사들인 윤석전(연세중앙교회), 장경동(중문교회), 김장환(수원중앙교회) 목사 등이 어떤 정치 성향을 갖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94] 물론 모든 독립 침례교회들이 침례회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아니며, 다른 교단 출신 목사나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자칭' 목사들이 임의로 침례교회 간판을 걸고 설립한 독립 침례교회들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장합동 출신인 서울중앙침례교회 서달석 목사.[95] '베뢰아'는 오늘날 그리스의 베리아(Veria)시를 가리킨다. Veria는 영어식 표현이고, 한국 천주교는 그리스어 발음을 존중하여 '베로이아'라고 음역했다.[96] 당시 설립총회장인 김기동 감독을 교단에서 제명하는 결의를 하였는데 당시 결의를 했던 총회장이 성락교회에서 개혁파로 직무를 박탈당한 지교회 목사라서 소속교회에서 파면당한 목사가 교단 총회에서 결의한 내용이 유효한가 논란이 있었다.[97] 1987년경 현재의 기독교한국침례회(위의 주요교회와 목회자에 나온 교회가 소속된 그 침례회)에 소속되어 있던 성락교회와 김기동목사와 관련한 이단시비가 있자 기독교한국침례회를 탈퇴하여 김기동 목사와 뜻을 같이 하는 교회의 목회자들과 함께 김기동목사가 설립한 교단이다. 초기에는 기독교한국남침례회(미국 남침례회와는 무관)라 불리다 기독교한국침례회연맹(기침연맹)으로 개칭, 이후 기침 측에서 이름이 같다며 항의하자 사도행전 17장 11절과 12절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에서 따와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기침교단과 교리는 근본적으로 같으나 귀신론(귀신은 불신자의 사후 영이라는 견해) 부분에서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일부 신학적인 부분(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별개라는 견해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다. 산하에 신학교인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가 있었다. 대부분의 개신교인에게는 이 교단과 교단 이름보다는 이 교단 최대의 교회인 성락교회와 김기동 목사 그리고 귀신론으로 더 알려져 있다. 기베연측은 자신들이 개신교의 일부이며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하나, 이단 시비로 인해 실질적으로 기침교단 및 다른 개신교단과의 교류는 없는 실정이다. 2016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서는 귀신론 등이 김 목사의 체험을 기초로 한 비본질적인 개인적 의견일 뿐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은 기성 교회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성락교회를 이단에서 사면하였다. 그러나 불과 며칠 되지 않아 예장통합 총회가 사면을 철회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98] 그런데 귀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가 이단정죄의 이유가 될 수 있는지는 현재도 논란이 많다. 대개 이단으로 분류하는 근거는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지의 여부인데, 귀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 이 때문에 국외에서도 귀신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고, 모두 그 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가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 논리도 각각 존재한다. 개중에는 한국 교회의 주류 학설인 사탄 및 타락한 천사라는 견해도 물론 해당되며, 불신자의 사후 영이라는 견해도 또한 해당된다. 그러나 한국처럼 주류 학설이 아니라고 이단시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이유는 앞서 서술했듯이 성경에서 명확히 정의하고 있는 부분이 없고, 삼위일체 같은 핵심 교리가 아닌 곁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장통합 사면위에서 성락교회가 사면 판정을 받은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99] 진보 그리스도교인 일부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유럽에는 미국이나 한국처럼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교단이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이다.[100] 미국의 옛 주류 교단 5곳 중에서 연합감리교UMC를 제외한 나머지 4곳 신자 수를 다 합친다 해도 남침례회 신자 수보다 수가 적다. 물론 남침례회 신자 수는 연합감리교UMC보다도 2배 많다. [101] 당연히 보수적인 남침례회가 노예제를 찬성했다. 그러나 최근 남침례회는 흑인 목회자를 총회장으로 추대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102] 참조.[103]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는 침례회라는 이름만 쓰는 독립교회이다. 미국의 주요 침례회 교단인 남침례회와 북침례회에게 이단으로 정죄받았다.[104] 참조.[105] Albert Mohler Jr.은 미국의 남침례회 신학자로서 개혁주의근본주의노선을 따르는 보수 교의학자다. 그의 대표적인 어록은 다음과 같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 등의 타 종교는 사탄의 무리다', '천주교'는 가짜 교회다', '요가는 이교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해서는 안 된다.' 남침례회 신학교는 교단의 근본주의적 노선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신학을 하는 학자들이 다수 존재했는데, 교단의 노선과 입맞에 맞는 몰러의 취임 이후 교수진 역시 철저히 근본주의화 되었다. 미국의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몰러를 알 카에다에 비유하며 까기도 한다.[106] 사실 오바마가 동성애 지지 선언이나, 낙태 찬성 의사를 나타내면서 대다수의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공화당을 지지한 건 사실이다.[107] 참조.[108] 참조.[109] 남침례회 안수집사장로로서,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학교 교사로 빠짐없이 봉사할 정도이다.[110] 미국 남침례회는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 남침례회와 달리 한국의 침례회는 2014년부터 여성에도 목사 안수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