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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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rl Rappan.jpg
이름
카를 라판
(Karl Rappan)
생년월일
1905년 9월 26일
사망년월일
1996년 1월 2일 (향년 90세)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출신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포지션
라이트 윙 하프, 포워드
신체조건
불명
소속팀
SC 바커 빈 (1924-1928)
FK 아우스트리아 빈 (1928-1929)
SK 라피트 빈 (1929-1930)
세르베트 FC (1931-1935)
국가대표
2경기 1골 (1927)
감독
세르베트 FC (1931-1935)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35-1948)
스위스 대표팀 (1937-1938)
스위스 대표팀 (1942-1949)
세르베트 FC (1948-1957)
스위스 대표팀 (1953-1954)
FC 취리히 (1958-1959)
스위스 대표팀 (1960-1963)
FC 로잔 스포르 (1964-1968)



1. 개요
2. 생애[1]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3. 감독
2.4. 이후
3. 코칭 스타일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5.2.1. 클럽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2][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05년 에서 태어난 라판은 어린 시절, 종종 축구를 즐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유소년 때에는 도나우 빈(Donau Wien)에서 축구를 배웠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1924년부터 SC 바커 빈에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라판은 바커 빈에서 1928년까지 있다가 FK 아우스트리아 빈SK 라피트 빈에서 1년씩 뛴 후 스위스로 이주했다.

라판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4시즌을 세르베트 FC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보냈고 이 기간에 2차례 나티오날리가 우승을 거뒀다.


2.2.2. 국가대표[편집]


라판은 1927년에 오스트리아 대표팀으로 2경기를 뛴 경험이 있다.


2.3. 감독[편집]



2.3.1. 클럽[편집]


세르베트 FC에서 선수 겸 감독 생활을 정리한 라판은 1935년부터 13년간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의 전임 감독직을 맡았다. 이 기간에 라판의 그라스호퍼는 리그 5회 우승, 컵 대회 7회 우승의 꽤 좋은 커리어를 남겼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세르베트에서 다시 감독을 맡았던 라판은 리그와 컵 대회에서 한 번씩 우승을 추가했다. 그리고 FC 취리히를 거쳐 1960년부터 1963년까지 대표팀의 전임 감독으로 커리어를 보냈다.

라판은 1964년부터 1968년까지 FC 로잔 스포르의 감독이 되어 1965년에 리그 우승을 한 번 거머쥐었다. 1967-68 컵 결승에서 로잔 스포르는 1대1로 팽팽하던 후반 43분, 당시 상대팀 FC 바젤페널티 킥을 허용했다. 바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골을 넣었지만 로잔 스포르 선수들은 페널티 킥 판정에 불만을 품고 경기 재개를 거부했다. 로잔 스포르 팬들의 야유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음은 물론이다. 결국 더 이상의 경기는 진행되지 못했고 바젤의 3대0 몰수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스위스 축구계에서 40년 가까이 머물렀던 라판은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1969-70 시즌에 그의 전 소속팀 중 하나였던 SK 라피트 빈의 기술 이사로 근무했고 축구 경력을 마무리했다.


2.3.2. 볼트[편집]


라판은 1930년대부터 조금씩 활용 범위가 넓어져가던 W-M 포메이션에 선수들이 게임 전개 양상에 따라 위치와 임무를 바꾸는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이는 스위스식 볼트 전술이라고 불렸다.

이 전술에서 뛰는 선수들은 자신의 진영에서 머물며 상대가 공격하길 기다리게 되므로 중원의 주도권은 상대에게 내줄 수 밖에 없게 된다. 대신 기존 W-M보다 좀 더 자유롭고 개인에 의존하기보단 더 집단적으로 움직여야 하므로 선수 개개인의 기술적 역량 부족은 상호 보완이 가능하다. 볼트의 수비 전술도 지역과 맨마킹의 혼합으로 이뤄졌으며 현재의 포백과는 다르지만 수비에서 4명의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최초의 시스템이었다. 이 4명의 수비수 중 최후의 한 명이 다른 세 명을 지원하는 방식이라 60년대 이탈리아의 카테나초리베로 시스템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3.3. 스위스 대표팀[편집]


라판은 스위스 대표팀과도 인연이 깊은데 처음 그가 스위스 대표팀을 맡은 것은 1937년이었다. 당시 라판은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의 감독과 대표팀 감독직을 병행하게 되었고 대표팀 감독직은 1938년 월드컵을 대비한 일종의 임시직에 가까웠다.

라판의 첫 국가대표팀 경기 상대는 공교롭게도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였고 9월 19일에 열린 이 경기에서 스위스는 오스트리아에 3대4로 아깝게 패했다.

1938년에 접어들어 스위스의 본격적인 월드컵 준비에 매진한 라판은 강력한 월드컵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독일과의 쾰른 원정 경기에서 1대1로 비겼다. 1938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스위스는 5월 21일, 잉글랜드마저 꺾고 본선의 다크 호스로 떠올랐다.

스위스의 본선 1라운드 상대는 독일. 독일은 1937년의 11경기에서 10승을 거둔 강력한 팀이었고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오스트리아 선수들까지 흡수해 단연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던 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경기를 치러보니 독일은 말 그대로 이름값만 높고 문제가 많은 팀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윗선에서 강요한 선수 배합 6대5의 문제였는데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겉으로는 화합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제프 헤르베르거를 필두로 한 독일의 코치진은 스타일도 다르고 감정도 안 좋은[3] 두 팀의 선수들을 단 두달남짓한 시간만에 원 팀으로 녹여낼 수 없었다. 결국 스위스는 예상을 뒤엎고 독일 대신 8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스위스는 독일과의 경기에서 주장 세베리노 미넬리와 공격수 조르주 에비를 부상으로 잃었고 그 여파로 대회 준우승을 거둔 헝가리에 0대2로 패해 8강에 만족해야 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 라판은 스위스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라판은 스위스 대표팀에 복귀했고 에르빈 발라비오의 활약으로 독일을 2대1로 꺾었다. 그 이후의 스위스는 말 그대로 롤코 모드였는데 스웨덴에 2대7, 네덜란드에 2대6으로 대패하기도 했지만 스웨덴에 3대0 승리, 잉글랜드에 1대0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라판의 스위스는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 1라운드에서 룩셈부르크에 2전 2승을 거둬 최종 예선에 진출했고 벨기에의 기권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라판은 본선까지는 대표팀을 맡지 않았고 프랑코 안드레올리가 대신 월드컵 무대에서 스위스를 지휘했다.

1952년에 라판은 3번째로 스위스 대표팀을 맡게 되었지만 복귀 무대에서 서독에 1대5로 대패해 팬들의 여론은 좋지 못했다. 개최국 자격으로 지역 예선 없이 바로 본선에 진출하게 된 스위스는 1954년 4월 25일, 서독과 다시 만났지만 3대5로 패해 복귀전 패배의 복수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전 대회 우승팀 우루과이와는 3대3 무승부, 네덜란드에게는 3대1 승리를 거두고 본선 무대에 나섰다.

스위스는 1954년 월드컵이탈리아, 잉글랜드, 벨기에와 같은 조에 속했고 이탈리아에겐 2대1 승리, 잉글랜드엔 0대2로 패해 1승 1패의 성적을 거뒀다. 같은 1승 1패의 이탈리아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 스위스는 이탈리아를 4대1로 꺾고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8강의 상대는 오스트리아. 스위스는 전반 19분까지 3대0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더운 날씨 때문인지 스위스 선수들은 힘을 잃었다. 결국 오스트리아가 5대7이라는 야구 스코어로 스위스를 물리치고 4강에 올라갔다. 언론에는 라판의 볼트가 부러졌다는 냉소적인 기사가 넘쳐났으며 이 경기는 지금까지 FIFA 월드컵 역사상 최다 스코어가 난 경기로 남아있다.

자국 월드컵 이후 스위스는 흔들렸고 1958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도 실패했다. 결국 1960년에 라판이 다시 스위스 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목표는 1962년 월드컵 본선 진출. 그러나 망가진 스위스 대표팀에게 이는 다소 어려운 임무였다.

1960년 3월 27일, 벨기에와의 브뤼셀 원정 경기에서 3대1 승리를 거두며 라판과 스위스 대표팀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스위스는 칠레, 네덜란드, 프랑스를 상대로 3연승을 거두며 1962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 좋은 분위기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 예선전에서 스위스는 전 대회 호스트이자 준우승팀 스웨덴, 벨기에와 한 조가 되었고 사람들은 스웨덴의 진출을 예상했다. 스웨덴은 스위스에 0대4 패배를 안기며 본선 진출에 거의 다가갔지만 스위스는 스웨덴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3대2로 이겨 진출권을 놓고 양팀은 최종전을 치르게 되었다.[4] 그리고 스위스는 스웨덴을 최종전에서 2대1로 꺾고 8년 만에 1962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본선에서 스위스는 서독, 이탈리아, 칠레에 모두 패하며 말 그대로 본선 참가에만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1963년 6월 5일, 잉글랜드에게 스위스는 바젤 홈경기에서 바비 찰튼에게 해트 트릭을 얻어맞은 것을 포함, 1대8로 박살나며 그들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라판은 11월 3일, 노르웨이에 0대2로 패했음에도 비판을 견뎌냈지만 결국 12월에 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2.4. 이후[편집]


라판은 SK 라피트 빈에서 잠시 있다가 스위스에 다시 돌아와 스위스 축구 협회 이사로 재직했다. 그가 남긴 최고의 업적은 협회가 관리하는 유소년 축구의 연령을 11세에서 9세로 낮춘 것이었다. 이로써 스위스에서 축구가 학교 스포츠로 정착됨과 동시에 축구의 사회적 위상이 더 높아질 수 있었다.


3. 코칭 스타일[편집]


감독으로서 라판은 지장으로 평가받는다.

라판은 지나친 술이나 담배 정도를 빼면 선수의 사생활에 거의 터치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선수들에게 절대 소리치지 않고 자신의 목표가 분명한 감독이었다. 한편으론 선수들에게 엄격한 면이 있어서 그의 전술에 복종을 요구했으며 그에 따르지 않는 선수는 자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선수들의 작은 불만에도 귀를 기울이는 열린 감독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라판의 지도 스타일은 꼰대 스타일로 평가받았다.

그는 전술에 대한 기만에도 능했는데 1938년 월드컵을 앞두고 라판은 프랑스어에 능통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의 특정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경기 전에 팀 라인업을 발표하지 않거나 잘못된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4. 뒷이야기[편집]


  • 라판은 1938년 월드컵독일 대표팀을 이끌 기회가 있었지만 그가 거절했다. Beat Jung에 따르면 그의 가족들 모두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고도 전해진다. 라판 역시 나치당원이었음에도 열렬한 활동이 없어서 그는 큰 문제 없이 스위스 축구계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 라판의 인맥으로 세르베트 FC유러피언 컵에서 뛴 최초의 스위스 클럽이 될 수 있었다. 원래 세르베트의 출전 자격은 1954-55 시즌의 나티오날리가 A 우승팀 라쇼드퐁에 있었지만 그들이 출전을 포기하면서 대신 6위팀 세르베트가 출전하게 된 것이다.
  • 라판은 UEFA 인터토토컵의 창설에도 기여한 바가 있다.


5. 수상[편집]



5.1. 선수[편집]



5.1.1. 클럽[편집]




5.2. 감독[편집]



5.2.1. 클럽[편집]


  • 나티오날리가 우승 6회: 1932-33, 1933-34(이상 세르베트 FC), 1936-37, 1938-39, 1941-42, 1942-43(이상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나티오날리가 A 우승 3회: 1944-45(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49-50(세르베트 FC), 1964-65(FC 로잔 스포르)
  • 스위스 컵 우승 8회: 1936-37, 1937-38, 1939-40, 1940-41, 1941-42, 1942-43, 1944-45(이상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48-49(세르베트 FC)
  • 나티오날리가 준우승 2회: 1934-35(세르베트 FC), 1937-38(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 컵 준우승 2회: 1933-34(세르베트 FC), 1966-67(FC 로잔 스포르)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3] 당시 오스트리아 선수들은 나라를 강제로 없애버린 나치 독일에 감정이 좋았을 리 없고 독일 선수들 역시 오스트리아 선수들에 포용적이지 않았다.[4] 현재의 방식대로였다면 스웨덴의 골득실이 +7, 스위스의 골득실은 0이라 스웨덴이 진출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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