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엘류호/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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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기
2.1. 3월
2.1.1. 콜롬비아 0:0 무 (친선경기)
2.2. 4월
2.2.1. 일본 0:1 패 (친선경기)
2.3. 5월
2.3.1. 일본 1:0 승 (친선경기)
2.4. 6월
2.4.1. 우루과이 0:2 패 (친선경기)
2.4.2. 아르헨티나 0:1 패 (친선경기)
2.5. 9월
2.5.1. 베트남 5:0 승 (2004 AFC 아시안컵 예선)
2.5.2. 오만 1:0 승 (2004 AFC 아시안컵 예선)
2.5.3. 네팔 16:0 승 (2004 AFC 아시안컵 예선)
2.6. 10월
2.6.1. 베트남 0:1 패 (2004 AFC 아시안컵 예선)
2.6.2. 오만 1:3 패 (2004 AFC 아시안컵 예선)
2.6.3. 네팔 7:0 승 (2004 AFC 아시안컵 예선)
2.7. 11월
2.7.1. 불가리아 0:1 패 (친선경기)
2.8. 12월



1. 개요[편집]


코엘류호2003년 경기 기록을 다루는 문서.


2. 경기[편집]



2.1. 3월[편집]


김호곤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임시감독으로 2002년의 마지막 A매치를 치른 대한축구협회는 이듬해인 2003년 1월 5일에 前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움베르투 코엘류를 차기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코엘류 감독을 보좌할 코치진은 공개 모집으로 진행되었는데, 최종적으로 박성화 청소년 대표팀 감독이 수석코치로, 최강희 아시안 게임 대표팀 코치가 어시스턴트 코치로, 박영수 전임 GK 지도자가 골키퍼 코치로 각각 선임되었다.# 이후 코엘류 감독은 2월 26일에 입국하여 대표팀 감독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한달 뒤인 3월 20일에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경기에 출전할 21명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명단은 아래와 같다.
그러나 3월 24일에 추가로 발표된 명단에서 당초 뽑힌 박지성과 이을용이 부상으로 제외된 빈 자리를 우성용(포항), 박진섭(울산), 김남일(엑셀시오르)로 대체하여 최종적으로 22명이 되었다.#

2.1.1. 콜롬비아 0:0 무 (친선경기)[편집]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2003년 3월 국가대표팀 친선경기
2003. 03. 29. (토) 19:00 (UTC+9)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대한민국, 부산)
주심: 파일:일본 국기.svg 가타야마 요시츠구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0 : 0

파일: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2-3-1)
ST
11. 최용수파일:교체 아웃 아이콘.svg 61'
12. 김상식파일:교체 인 아이콘.svg 61'
}}}
}}}
}}}
GK
1. 이운재
  • 경기 평가
2003년 3월 29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콜롬비아를 상대로 감독 데뷔전을 치렀다. 결과는 0:0 무승부로 끝났다. 콜롬비아가 작년 월드컵 본선엔 진출하진 못했어도[1] 피파랭킹 10위권 내 강 팀이었던 걸 생각하면 대단한 선전이다. 게다가 콜롬비아의 상대 수비진에는 지금도 유명한 수비수 이반 코르도바마리오 예페스가 버티고 있었다. 이 경기가 2020년까지 부산아시아드경기장에서 유일하게 승리하지 못한 경기이다. 그 이전과 이후로 부산아시아드에서 열린 나머지 경기들은 모두 승리했다.

여담으로 주장 유상철(울산)은 이날 A매치에서 풀타임을 소화하고, 그 다음날에 18시간 만에 리그 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후반 42분까지 뛰어 혹사 논란이 있었다.# 유상철의 팀 동료 이천수는 이 날 부상을 입어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한편, 유상철과 함께 풀타임을 소화한 이운재(수원), 최성용(수원), 김태영(전남)은 모두 소속팀의 배려로 A매치 다음날에 치러진 리그 경기에서 빠졌다.#

2.2. 4월[편집]


2003년 4월 10일에 일본과의 친선경기(16일)에 출전할 22명의 엔트리가 공개되었다.# 당초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최용수는 소속팀의 차출 거부로 4일 뒤 조재진으로 대체되었다.#
GK(2명) : 이운재(수원), 서동명(울산)
DF(8명) : 김태영(전남), 이상헌(안양), 왕정현(안양), 조병국(수원), 최성용(수원), 박주성(수원), 박진섭(울산), 박충균(성남)
MF(8명) : 유상철(울산), 이천수(울산), 최성국(울산), 김도근(전남), 김상식(광주), 박동혁(전북), 최태욱(안양), 김두현(수원)
FW(4명) : 안정환(시미즈), 최용수(이치하라)[소집제외], 우성용(포항), 이동국(광주), 조재진(광주)[추가합류]
엔트리 대부분이 K리그 소속 선수들이고 일부 J리그 선수도 포함되어있다. 일본 측도 유럽파를 빼고 전원 J리그 소속 선수들로만 엔트리를 꾸려서 사실상 양국 리그 선수들 간의 경기가 되었다.

2.2.1. 일본 0:1 패 (친선경기)[편집]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2003년 4월 국가대표팀 친선경기
2003. 04. 16. (수) 19:00 (UTC+9)

서울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서울)
주심: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에디 켄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0 : 1

파일:Japan JFA 2007.pn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90+2' (OG) 조병국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2-3-1)
ST
20. 이동국파일:교체 아웃 아이콘.svg 65'
10. 최성국파일:교체 인 아이콘.svg 65'
}}}
}}}
}}}
GK
1. 이운재
4월 1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비록 후반 막판 개그골을 허용하며 (0대1로) 패하긴 했지만, 일본을 상대로 유례없이 가둬놓고 패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2]
  • 경기 평가
콜롬비아전과 일본전 두 경기 모두 내용 면에선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수 개월 전 월드컵 4강 4위에 진출했던 영광의 기억에 지나치게 도취된 탓에, 중견 강호들을 상대로 1무 1패의 성적을 받아든 코엘류에게 여론은 그리 미덥지 않았단 거다. 감독으로 겨우 2경기를 치렀는데 벌써부터 미덥지 않다고? 문제는 앞서 말했지만 수 개월 전 4강의 기억에서 그 누구도 헤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콜롬비아전은 지진 않았으니 백 번 이해하더라도, 일본은 불과 1년 전에 16강 9위에 머무르며 4강 4위까지 기록한 우리나라보다 월드컵에서 낮은 성적을 기록한 팀인데 이 팀에게 졌다는 것은... 게다가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렇듯 감독으로서 코엘류도 첫 승을 고대할 수 밖에 없었다.

2.3. 5월[편집]


2003년 5월 22일에 일본과의 원정 친선경기에 출전할 23명의 명단이 공개되었다.# K리그J리그 소속 선수를 주축으로 선수를 선발한 지난 달과는 달리 이번에는 소속팀 일정이 있는 송종국을 제외한 모든 해외파를 불러들였다.
GK(2명) : 이운재(수원), 김용대(부산)
DF(8명) : 김태영(전남), 최진철(전북), 이기형(성남), 박충균(성남), 최성용(수원), 조병국(수원), 이영표(PSV)[소집해제], 김영철(광주), 박재홍(전북)[추가합류]
MF(6명) : 왕정현(안양), 유상철(울산), 박지성(PSV)[소집해제], 김두현(수원), 이을용(트라브존), 김남일(엑셀시오르), 현영민(울산)[추가합류]
FW(7명) : 이천수(울산), 최태욱(안양), 차두리(빌레펠트), 설기현(안더레흐트), 안정환(시미즈), 최용수(이치하라), 조재진(상무)
그러나 PSV 에인트호번이 5월 26일에 정규리그 우승이 결정되는 29일에 박지성이영표가 필요해 차출이 불가하다고 통보하여 이들을 제외하고, 빈 자리를 현영민박재홍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2.3.1. 일본 1:0 승 (친선경기)[편집]



파일:Japan JFA 2007.png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월드컵 1주년 기념 한·일 축구 정기전
2003. 05. 31. (토) 19:15 (UTC+9)


주심: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숩키딘 모드 살레

파일:Japan JFA 2007.png

0 : 1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86' 안정환


국내 중계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최창섭
차범근
풀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2-3-1)
ST
10. 최용수파일:교체 아웃 아이콘.svg 56'
19. 안정환파일:교체 인 아이콘.svg 56' 파일:득점 아이콘.svg 86'
}}}
}}}
}}}
GK
1. 이운재파일:교체 아웃 아이콘.svg 56'
21. 김용대파일:교체 인 아이콘.svg 56'

파일:external/img.tf.co.kr/110810_4e41bf76e8d5f.jpg

그 해 5월, 일본 도쿄에서 다시 치러진 한일전에서 후반전 최용수와 교체 출장한 안정환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며, 드디어 감독 부임 이후 첫 승을 신고했다.[3] 뒤이어 국내에서 벌어진 남미 강호와의 2연전... 참고로, 경기장은 둘 다 상암구장이다. 이날 기존의 유상철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진배치했고, 원래 유상철 자리에 이을용을 배치하였다.

  • 경기 결과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데뷔 3경기 만에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한달 전에 있었던 한일전 패배를 일본 안방에서 설욕한 것은 덤이다.

2.4. 6월[편집]


2003년 6월 2일에 우루과이전(8일)과 아르헨티나전(11일)에 나설 23명이 공개되었다.# 기초군사훈련 이수를 위해 훈련소에 입소한 안정환은 소집되지 않았다.

2.4.1. 우루과이 0:2 패 (친선경기)[편집]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2003년 6월 국가대표팀 친선경기
2003. 06. 08. (일) 19:00 (UTC+9)

서울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서울)
주심: 파일:일본 국기.svg 요시다 토시미츠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0 : 2

파일:Uruguay AUF 2002.pn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14' 헤르만 오르노스
53' 세바스티안 아브레우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2-3-1)
ST
10. 최용수파일:교체 아웃 아이콘.svg 68'
18. 왕정현파일:교체 인 아이콘.svg 68'
}}}
}}}
}}}
GK
1. 이운재
첫 상대는 우루과이였다. 지난 번 일본과의 선발 라인업을 그대로 출전시켰다. 우루과이가 저력있는 강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4] 그런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표팀은 무차별 공세를 퍼부었다. 우루과이전 슈팅수는 17-7. 믿지 못하겠지만 대한민국이 17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애무축구는 이때도 빛을 발했다. 17-7이라는 압도적 슈팅수에도 불구하고, 0-2로 패배하고 만 것. 당시 스트라이커로 나섰던 최용수차두리는 적절한 찬스에서 적절하게 홈런을 때려주었다. 참고로, 이날 경기에서 데뷔한 선수가 바로 조재진인데,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네덜란드전에서 이동국이 선보였던 것과 비슷한 중거리포를 남기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상주 상무에서 뛰느라 짧은 머리로 간지를 뿜었던 것은 .

  • 경기 결과
월드컵 4위 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한 국민들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여긴 우루과이에 홈에서 0-2로 패배한 사실을 놓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성급하게 코엘류 경질론까지 다 나올 지경이었다. 더구나 남미 강호 2연전의 다음 상대는 아르헨티나였다.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초상집이었냐면, 16강 진출로 병역특례를 받고 기본군사훈련을 받느라 훈련소에 입소한 안정환을 아르헨티나전을 앞두고 잠시 훈련소에서 빼오기까지 하였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AC 페루자에서 방출당한 뒤 J리그로 선회하며 기량이 주춤했던데다, 군사훈련까지 받았으니 도저히 필드에서 뛸 상태는 못 됐다.[5]

2.4.2. 아르헨티나 0:1 패 (친선경기)[편집]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2003년 6월 국가대표팀 친선경기
2003. 06. 11. (수) 19:00 (UTC+9)

서울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서울)
주심: 파일:태국 국기.svg 룽클라이 몽콜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0 : 1

파일:Argentina AFA 1990.pn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43' 하비에르 사비올라

국내 중계
[파일:MBC 로고(1986-2005).svg
김창옥
차범근
풀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3-4-3)
}}}
}}}
}}}
GK
1. 이운재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경기에서 2골을 허용한 것을 수비 불안으로 파악했다. 코엘류는 데뷔전부터 우루과이전까지 포백 수비의 정착에 힘썼다. 문제는 홍명보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3백에 익숙한 상태였단 거다. 한동안 홍명보를 대표팀으로 부르지 않고 송종국 등 대체자들을 활용하며 3백, 4백을 다양하게 시험해 왔던 전임 감독 거스 히딩크도 다시 홍명보 중심의 3백 수비로 복귀한 바 있었다. 국내 리그를 파행까지 시켜가며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히딩크마저 이럴진대, 코엘류가 월드컵 4강으로 높아진 기대 앞에서 단기간에 4백을 정착시키기는 불가능했다.[6]

결국 아르헨티나전에서 대표팀은 다시금 전가의 보도를 꺼내든다. 바로 멀티플레이어 유상철 카드였다. 기존의 4-2-3-1 포메이션에서 월드컵에 기용했던 3-4-3 포메이션으로 변화를 줬다.# 유상철을 중심으로 다시 3백으로 전환한 대표팀은 놀라울 만큼 끈끈한 수비력을 보여줬고, 비록 (0:1로) 패배하기는 했으나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단 한 골만 내주며 경기 내용면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7]
  • 경기 결과
경기 내용 측면에서 보면 대단히 선전한 경기였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모두 2002 월드컵에서 우루과이는 월드컵 26위,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18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한 팀들인 반면에, 우리는 이들보다 높은 지난 월드컵 4위팀이라는 이유로 눈높이만 높아져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여전히 세계적인 강팀이라는 것을 망각했다.[8]

2.5. 9월[편집]


남미 2연전 전패의 충격 탓이었는지, 한동안 대표팀은 흔한 친선전도 없이 수개월을 흘려 보냈다. 그리고 맞이한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예선전에서 대한민국베트남 - 오만 - 네팔 등과 한 조로 편성되었다. 이에 9월에는 대한민국 인천에서 3연전을 치르고, 다음달인 10월에는 오만 무스카트에서 3연전을 치르는 일정이 확정되었다.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은 2003년 9월 8일에 국내(인천) 3연전에 출전할 22인 엔트리를 발표하였다.#
전원 국내리그 선수로만 선발하였고, 국내에서 뛰고 있던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선수 대부분이 승선하였다. 이외에도 K리그에서 기량이 만개한 유망주 선수들도 대거 합류하였다. 지난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김도훈도 2002년 12월 이후로 오랜만에 국가대표에 승선하였다.

2.5.1. 베트남 5:0 승 (2004 AFC 아시안컵 예선)[편집]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4-2)
}}}
}}}
}}}
GK
1. 이운재
  • 경기 결과
5월 31일 일본과의 경기를 제외하면 다득점과 승리를 동시에 해본 적 없는 코엘류호는 출범 후 처음으로 다득점 승리를 거두었다. 공격진, 미드필더진, 수비진에서 한 명씩 골을 넣으며 5골을 수확했다. 긍정적인 점은 잡아야 할 약체를 확실하게 다득점으로 잡아줬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2.5.2. 오만 1:0 승 (2004 AFC 아시안컵 예선)[편집]


파일:2004 AFC Asian Cup.gif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최종예선 E조 2차전
2003. 09. 27. (토) 17:00 (UTC+9)
인천문학경기장 (대한민국, 인천)
주심: 파일:일본 국기.svg 마사요시 오카다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1 : 0
파일:Oman FA old emblem.pn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파일:오만 국기.svg 오만
45+1′ 최성국
파일:득점 아이콘.svg
-

국내 중계
파일:SBS 로고.svg
-
신문선
하이라이트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4-2)
}}}
}}}
}}}
GK
1. 이운재
전반전 종료 직전에 터진 최성국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여 2연승째를 거뒀다.

  • 경기 결과
지난 경기에서 약체 팀을 상대로 다득점 무실점 승리를 거둔 것과 무색하게 골 결정력 부재 문제를 다시 보이며 겨우 한 골만 성공하는 데 그쳤다.

2.5.3. 네팔 16:0 승 (2004 AFC 아시안컵 예선)[편집]


파일:2004 AFC Asian Cup.gif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최종예선 E조 3차전
2003. 09. 29. (월) 18:30 (UTC+9)
인천문학경기장 (대한민국, 인천)
주심: 파일:태국 국기.svg 풍야우 팟 자메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16 : 0

파일:네팔 국기.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18′, 37' 김대의
21′, 45+1', 48' 우성용
22′, 28', 64', 67', 89' 박진섭
54′ 이을용
57′ 이관우
75', 84', 86′ 김도훈
80′ 정경호
파일:득점 아이콘.svg
-

국내 중계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최창섭
차범근
풀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4-2)
}}}
}}}
}}}
GK
21. 김용대

3차전 상대는 아시아 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약체 중 상약체로 꼽히는 네팔이었다. 골키퍼는 이운재에게는 휴식이 주어지고 김용대에게 선발 기회가 돌아갔고, 주장 김태영도 로테이션으로 빠지고 박재홍이 선발로 나섰다. 첫 골이 터지기 전인 전반 18분까지 잘 버티던 네팔은 첫 골이 들어가고 나서 소나기 골을 내주며 무려 16골을 실점하였다. 이 경기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를 거둔 경기로 남았다. 이 경기에서 박진섭이 5골을 넣었고, 우성용은 해트트릭을 했다. 또한 김대의는 2득점 후 교체 되었으며, 김대의와 교체된 김도훈은 후반전을 약 24분만 뛰고 해트트릭을 했다. 이을용은 지난 월드컵 터키전 이후 오랜만에 득점을 올렸고, 정경호이관우는 이 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넣게 되었다.

  • 경기 결과
약체팀을 확실히 제압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이 경기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가장 많은 점수 차이로 이긴 경기이자 최다 득점 경기다. 전원 국내파로만 구성된 대표팀으로도 가볍게 3연승을 거두며 코엘류호의 앞으로의 전망과 여론도 밝아질 것으로 보였으나, 바로 다음 달에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2.6. 10월[편집]


2003년 10월 8일에 오만 3연전 선수 명단이 확정되었다.#
10월 7일에 홍콩과의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에 나섰다가 부상을 입은 최성국만 빠져 21명으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2.6.1. 베트남 0:1 패 (2004 AFC 아시안컵 예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만 쇼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2004 AFC Asian Cup.gif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최종예선 E조 4차전
2003. 10. 19. (일) 22:15 (UTC+4)
술탄 카부스 경기장 (오만, 무스카트)
주심: 파일:태국 국기.svg 파냐 한룸야웅

파일:베트남 국기.svg

1 : 0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74′ 판 반쿠엔
파일:득점 아이콘.svg
-
경기 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4-2)
}}}
}}}
}}}
GK
1. 이운재
베트남 쇼크

슈팅을 16개나 날리고도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오히려 역습 한번에 무너지면서 0:1로 졌다.

  • 경기 결과
베트남에게 패배한 것은 1959년 메르데카컵 이후 44년 만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예선 탈락을 직감한 베트남은 아시안컵 본선 진출을 포기하고 그해 11월 말에 시작될 동남아시안 게임에 대비한 23세 이하 + 와일드카드 3명(만 23세 초과 선수)로만 엔트리를 짰다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FIFA조차도 경악한 참사가 벌어졌으며, 이날 FIFA 홈페이지의 메인은 한국의 충격패로 장식되었다.

2.6.2. 오만 1:3 패 (2004 AFC 아시안컵 예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만 쇼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2004 AFC Asian Cup.gif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최종예선 E조 5차전
2003. 10. 21. (화) 22:15 (UTC+4)
술탄 카부스 경기장 (오만, 무스카트)
주심: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나세르 알 엔지

파일:Oman FA old emblem.png

3 : 1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60′ 알 누비
64′ 무하메드
88′ 라자브
파일:득점 아이콘.svg
47′ 정경호
경기 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2-3-1)
ST
9. 김도훈 파일:경고 카드 아이콘.svg 72'
}}}
}}}
}}}
GK
1. 이운재
베트남전 패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어진 오만과의 경기에서는 1:3으로 역전패했다.선제골을 넣고도 급격히 무너지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경기 결과
이 경기에서 경기 내내 선방을 보여준 알리 알 합시 골키퍼는 이후 노르웨이 리그를 거쳐 프리미어리그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했다. 또다시 FIFA 홈페이지는 한국의 충격적 연패를 메인으로 다루었다. 이 패배로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은 경질 직전까지 갔다.

2.6.3. 네팔 7:0 승 (2004 AFC 아시안컵 예선)[편집]


파일:2004 AFC Asian Cup.gif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최종예선 E조 6차전
2003. 10. 24. (금) 22:15 (UTC+4)
폴리스 경기장 (오만, 무스카트)
주심: 파일:태국 국기.svg 파냐 한룸야웅

파일:네팔 국기.svg

0 : 7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1′ 조재진
5′, 51' 이기형
15′(P), 31', 33' 김도훈
36′ 정경호
경기 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4-4-2)
}}}
}}}
}}}
GK
1. 이운재
앞선 두 경기에서 충격패를 당한 이유인지 네팔과의 마지막 경기는 시작부터 네팔을 사정없이 공격하였다. 경기 시작부터 조재진의 득점으로 사정없이 네팔의 골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지난 인천에서의 경기처럼 전반전에만 6점을 넣었다. 그러나 후반전에 한 골만 추가하는 데만 그쳐 최종적으로 7:0승리를 거두었다.
  • 경기 결과
순위
국가
승점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1
오만
15
6
5
0
1
24
2
+22
2
대한민국
12
6
4
0
2
30
4
+26
3
베트남
9
6
3
0
3
8
13
-5
4
네팔
0
6
0
0
6
0
43
-43
본선 진출 탈락
베트남을 한 경기 차로 3위로 밀어내고 2위로 간신히 본선에 진출하였다. 인천에서 치러진 최종예선 3연전에서 한 경기라도 미끄러졌었더라면, 자칫 직전 대회 3위에 올랐던 대한민국이 차기 대회에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 기록적 대참사로 코엘류호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질 여론이 드디어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임 1년 밖에 안 된 점을 감안하여, 대한축구협회는 유임을 결정한다.

2.7. 11월[편집]


2003년 11월 10일에 불가리아와의 친선경기(18일)에 나설 22명을 확정, 발표하였다.# 오만 쇼크의 치욕을 만회하고자 해외파 선수를 전부 불러들였다.
아시안컵 예선에서 괜찮은 득점력을 보인 김도훈이 다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센터백 김태영최진철이 빠져 수비 쪽에서 결원이 발생하였으나, 체격이 좋은 불가리아 선수들을 막기 위해서 장신 수비수 위주로 보강하였다.

2.7.1. 불가리아 0:1 패 (친선경기)[편집]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2003년 11월 국가대표팀 친선경기
2003. 11. 18. (화) 19:00(UTC+9)

서울월드컵경기장 (대한민국, 서울)
주심: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숩키딘 모드 살레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0 : 1
파일:불가리아 축구 연맹 엠블럼.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
파일:득점 아이콘.svg
20' 블라디미르 만체프[9]

국내 중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이천규
최경식
하이라이트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3-5-2)
}}}
}}}
}}}
GK
1. 이운재

  • 경기 결과
유례없는 참사와 감독의 경질론이 불거진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 해 가을, 대표팀은 유럽 강호와의 평가전을 계획한다. 본래 크로아티아와 상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만 쇼크의 충격 탓인지 그보다 한 수 아래인 불가리아로 평가전 상대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0대1로) 패했다. 안정환이 1:1 상황에서 때린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가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2.8. 12월[편집]


한중일 3국은 '동아시아축구연맹'의 창설을 합의했다. 그 결과물로 그해 12월, 일본 도쿄에서 제1회 동아시아연맹컵이 개최되었다.
2003년 11월 24일에 20인 엔트리를 발표하였다.# 이후 대회 조직위원회가 엔트리를 23명으로 확대하자 추가로 김두현, 조세권, 김해운이 발탁되었다.#
GK(3명) : 이운재(수원), 김용대(부산), 김해운(성남)[추가발탁]
DF(6명) : 최진철(전북), 김현수(성남), 유상철(요코하마), 김태영(전남), 박재홍(전북), 박요셉(안양)[소집해제], 조세권(울산)[추가발탁]
MF(7명) : 현영민(울산), 전재호(성남), 최원권(안양), 이관우(대전), 김동진(안양), 이을용(안양), 김두현(수원)[추가발탁]
FW(6명) : 김도훈(성남), 최용수(이치하라), 김은중(센다이), 정경호(울산), 김대의(성남), 안정환(시미즈)
최종 명단 전원 K리그와 J리그 소속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1년 전에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출전한 23명 중 K리그와 J리그에 소속된 8명[10]이 발탁되었으며, 월드컵이 끝난 이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U-23 출신 선수 4명[11]도 포함되었다. 한편, 리그가 진행 중이고, 의무 차출을 할 수 없는 유럽파와 중동파는 제외되었다.[12][13] 기존에 유럽에서 뛰던 설기현(RSC 안데를레흐트, 벨기에) 이외에도, FIFA 월드컵이 끝나고 유럽 진출에 성공한 이천수(레알 소시에다드, 스페인), 차두리(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독일), 박지성, 이영표(이상 PSV 에인트호번, 네덜란드), 송종국(페예노르트 로테르담, 네덜란드) 등은 당시 유럽에서 뛰고 있어서 차출이 불가능했다. 이들의 공백은 2004 아시안컵 예선에서 주전으로 뛰었던 이관우, 김도훈, 정경호, 김대의 등이 메웠다.

대표팀은 출국 하루 전인 2003년 12월 1일에 울산대학교 축구부와 연습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에서 박요셉이 부상으로 소집해제 되었다. 대체 자원을 따로 뽑지 않고 22인으로 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2.8.1. 홍콩 3:1 승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편집]


파일:East Asian Football Championship 2003.gif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1차전
2003. 12. 04. (토) 19:00 (UTC+9)

도쿄국립경기장 (일본, 도쿄)
주심: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지미 나피투풀루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3 : 1
파일:홍콩 축구 협회 엠블럼.pn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파일:홍콩 특별행정구기.svg 홍콩
22' 김두현
49' 김도훈
56' 안정환

파일:득점 아이콘.svg
33' 아칸두
경기 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3-5-2)
}}}
}}}
}}}
GK
1. 이운재
  • 경기 결과
홍콩과의 1차전에서 대표팀은 홍콩에 동점골을 얻어맞아 불안함이 되살아나는가 싶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경기해서 3-1 낙승을 거두었다.

2.8.2. 중국 1:0 승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편집]


파일:East Asian Football Championship 2003.gif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2차전
2003. 12. 07. (화) 16:30 (UTC+9)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일본, 사이타마)
주심: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할림 압둘 하밋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1 : 0
파일:China CFA 2002.pn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45' 유상철
파일:득점 아이콘.svg
-
경기 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3-4-3)
}}}
}}}
}}}
GK
1. 이운재

뜨거운 화제를 모은 을용타가 등장한 바로 그 경기였다.

  • 경기 결과
전반부터 대표팀은 중국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마침내 후반 막판, 코너킥 경합 상황에서 주장 유상철의 헤딩이 골문 앞에 가로선 중국 수비수의 머리에 맞으며 들어가 결승골을 뽑아낸다. 그러나 후반전 들어 중국 선수와의 충돌로 이을용이 퇴장당하며 대표팀은 수적 열세에 빠진다. 그러나 중국은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했고, 안정환이 수비수를 여럿 제치며 때린 중거리슛이 중국의 골포스트를 맞고 흘러나오기도 했다. 후반 막판 경합 상황에서, 중국 측의 헤딩이 우리측 골라인에 아슬하게 걸렸다. 당연히 골라인에만 걸리고 말았으니 경기는 그대로 속개되었는데, 중국 선수들은 떼거지로 골 세레머니를 하며 뛰어갔다(...). 이렇게라도 하면 주심이 득점으로 인정해 줄 것으로 여겼, 아니 우겼다고 밖엔... 당연히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고, 볼을 잡은 이관우는 그대로 중국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몇몇 제정신인 중국 수비들이 이관우에게 달려들었고, 이관우는 1:1 상황에서 중국 키퍼를 제치지 못하며 추가골을 넣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1-0으로 끝났다.

여담으로 이 경기는 최용수A매치 마지막 경기다. 이어지는 일본전에 결장하였고 이 대회를 마치고 국가대표로 소집되지 못하였으며 69경기 27득점으로 대표팀 경력을 마무리 하였다.

2.8.3. 일본 0:0 무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편집]


파일:East Asian Football Championship 2003.gif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3차전
2003. 12. 10. (금) 19:15 (UTC+9)

요코하마 국제 종합경기장 (일본, 요코하마)
주심: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산탄 나가링감

파일:Japan JFA 2007.png

0 : 0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
경기 영상

  • 경기 실황
대한민국 선발명단 (3-4-3)
}}}
}}}
}}}
GK
1. 이운재

마지막 3차전 경기는 홈팀 일본과의 한일전. 이로써 2003년에만 우연찮게도 일본과 3차례 한일전을 가지게 된 셈이 되었다. 대표팀은 일본과 막상막하의 치열한 경기를 펼쳤다. 전반 14분 일본의 공격수 오쿠보 요시토가 김도훈의 다리를 걷어차 경고 2분뒤 이번엔 페널티킥을 유도할려다가 헐리웃 액션으로 또 다시 경고를 받으며 퇴장 당했다. 수적으로 앞선 대표팀은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후반에 들어 대표팀은 호재를 맞는다. 안정환이 상대 수비수와 골키퍼까지 따돌리며 텅 빈 골문을 향해 날린 크로스가 아쉽게 흘러나가기도 했다.[14] 결국 열 명이서 싸운 일본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경기는 무재배로 막을 내렸다. 이로써 3차례의 한일전에서 1승 1무 1패를 기록했고, 제 1회 동아시아 연맹컵에서는 2승 1무로 우승을 차지했다[15]. 코엘류호의 첫 국제 대회 우승이었다.

  • 경기 결과
그러나 여전히 여론은 싸늘했다. 앞서 수차례 언급했지만, 오만 쇼크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이룩했던 4강 신화의 기억은 잊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영광의 과거였다. 그런 마당에 오만 쇼크는 물론이고, 수적 우위에서 싸운 일본에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점은 국제 대회 우승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반전시키기엔 한참 부족했다.

[1] 남미는 우리나라가 속해있는 아시아완 다르게 월드컵 본선 진출이 상당히 어렵다. 브라질아르헨티나의 양강체제가 굳건하고 남미 대륙의 국가들이 대부분 축구를 잘한다. 과거 대부분 스페인의 식민지였고(브라질의 경우에 포르투갈), 그 출신 국가 선수들이 선진 리그 시스템을 구축한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국가(스페인이나 포르투갈)로 넘어가고 거기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적응에도 유리하고 국적 취득 조건도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적을 이중 국적으로 취득해 놓으면 다른 유럽 내 클럽으로 이동할 때 Non-EU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오죽하면 버젓이 남미 대륙에 붙어있는 수리남가이아나는 이들을 피해 이웃 대륙인 북중미카리브 축구 연맹에 가입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국가들은 여기서도 동네북이다. 북중미도 남미처럼 미국-멕시코-코스타리카 3강이 뚜렷한 대륙이고 2022년부터 캐나다도 황금세대를 구축하고 있다 괜히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코파 아메리카를 각각 유럽판과 남미판 미니 월드컵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2002년의 경우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포함해서 파라과이에콰도르가 본선에 직행했고, 이들에 밀린 남미 5위 우루과이는 대륙간 플레이오프로 간신히 본선 티켓을 땄다.[소집제외] [추가합류] A B C [2] 슈팅수로 14:5로 이 수치는 거의 가둬놓고 팬 수준이다. 이천수가 골대를 맞추는 등 안타까운 장면들이 여러 차례 있었고, 골 결정력 부족으로 골문을 여는 덴 실패했다.[소집해제] A B C [3] 이 당시 일본은 유효슈팅을 단 1개만 기록했다. 모든 슈팅을 합쳐도 겨우 3개.[4] 대한민국은 2018년에 우루과이를 상대로 A매치에서 2:1로 이기기 전까지, 상대전적에서 한 번도 우루과이에 이겨본 적이 없었다.#[5] 실제로 안정환은 이날 경기에서 대기만 했을 뿐 출전하진 않았다. 가끔 중계화면으로 짧게 머리를 민 안정환이 비칠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환호성이 울렸다.[6] 여담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4백 수비는 본프레레 - 아드보카트 - 베어벡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정착되었다.[7] 아무리 아르헨티나가 직전 월드컵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였지만 조 2위인 잉글랜드와 단 승점 1점차였으며 만약 최종전에서 스웨덴에게 한 골만 더 넣어 승리했더라면 조 1위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승후보 중에서 간발의 차로 아르헨티나는 16강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조 3위 대회 18위) 게다가 이 당시 아르헨티나 출전 선수 중에서 산티아고 솔라리, 하비에르 사비올라, 파블로 아이마르, 하비에르 사네티, 에스테반 캄비아소, 가브리엘 에인세,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파블로 카바예로 등이 선발이었고, 후안 로만 리켈메막시 로드리게스가 교체로 투입되었는데 거의 초호화 멤버였다. 이 멤버를 상대로 딱 하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뿐이지 경기 내용 면으로 굉장히 선전한 셈이다.[8]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월드컵 트로피를 두 차례 이상 들어올린 전통의 축구 강호이다.[9] 불가리아 자국 명문 팀 PFC CSKA 소피아를 거쳐 프랑스 리그 LOSC 릴과 스페인 리그 레반테 UD, 레알 바야돌리드 CF, RC 셀타 데 비고 등에서 뛴 스트라이커이다. 이 당시에는 릴에서 뛰고 있었다.[추가발탁] A B C [10] 이운재, 최진철, 유상철, 김태영, 현영민, 이을용, 최용수, 안정환.[11] 김용대, 김동진, 김두현, 김은중.[12]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A매치 데이 기간 중에 치러지는 대회가 아니므로 유럽파와 중동파는 차출이 불가능하고, 그 대신 가까운 J리그파와 C리그파는 차출이 가능하다. 물론 서양 구단 소속 선수라고 해서 참석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가령 2019년 겨울에 열린 2019 EAFF E-1 풋볼 챔피언십의 경우에는 당시 메이저 리그 사커 구단인 밴쿠버 화이트캡스 FC 소속이던 황인범은 소집됐다.[13] 그러나 예외적으로 중국은 당시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뛰고 있던 쑨지하이를 차출했다. 근데 쑨지하이도 참작될 만한 사정은 있었는데, 2003-04 시즌에 리그에서만 33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소속 팀에서 벤치여서 차출된 것이 아니고 자국협회와 소속팀 간 협상이 있어서 특별히 보내준 것으로 추정된다.[14] 이때 빈 골문을 향해 정경호가 몸을 날렸는데, 정작 공은 정경호의 머리에 맞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가고 정경호의 몸만 골망을 갈랐다(...). 당시 중계를 하던 송재익의 해설이 일품이었다. "아! 머리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15] 개최국 일본과 같은 2승 1무였지만, 다득점에서 앞서서 우리나라가 1위가 되었고, 일본이 2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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