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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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아리아인-이란계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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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이란인
이란계 민족
페르시아인(파르시 | 타지크 | 아이마크인) | 파미르인(와키인 | 사리콜리인 | 슈그니인) | 쿠르드인(자자인 | 야지디인) | 페르시아계 유대인 | 발루치인 | 파슈툰인 | 오세트인 | 부하라 유대인 | 산악 유대인 | 타트인 | 탈리시인 | 하자라인 | 소그드인 † (야그노비인) | 루르인 | 길란인 | 타바르인 | 셈난인 | 스키타이인 † | 메디아인 † | 파르티아인
누리스탄인
인도아리아인
다르드인(카슈미르인 | 파샤이인) | 신드인 | 펀자브인(사라이키인) | 벵골인(로힝야) | 싱할라인 | 칼라쉬인 | 자트인 | 네팔인 | 구자라트인 | 구자르인 | 디베히인 | 마라티인 | 라지스탄인(라지푸트) | 힌두스탄인(무하지르) | 비하르인 | 아삼인 | 오디아인 | 콘칸인(고안 카톨릭) | 집시

인도이란어파 지역
독립국
파일:타지키스탄 국기.svg 타지키스탄 | 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아프가니스탄 |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방글라데시 |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 파일:스리랑카 국기.svg 스리랑카 | 파일:네팔 국기.svg 네팔 | 파일:몰디브 국기.svg 몰디브 | 파일:모리셔스 국기.svg 모리셔스
자치 지역 및 다수 거주지
쿠르디스탄(파일:로자바 상징기.png 로자바 | 파일:쿠르드족 깃발.svg 이라크 쿠르디스탄 | 터키령 쿠르디스탄 | 이란령 쿠르디스탄) | 오세티야(파일:남오세티야 국기.svg 남오세티야 | 파일:북오세티야 국기.png 북오세티야-알라니야 공화국) | 파일:1599px-Flag_of_Balochistan.svg.png 발루치스탄(파키스탄령 발루치스탄 | 시스탄오발루체스탄 | 아프가니스탄령 발루치스탄)

언어
인도이란어파
사상
범이란주의 | 범아리아주의
신화
페르시아 신화 | 인도 신화 | 오세트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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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쿠르드족
인민방위대 군인
튀르키예의 쿠르드족
파일:http___com.ft.imagepublish.upp-prod-us.s3.amazoekw.jpg
파일:Kurdistan-women.jpg
이라크의 쿠르드족
페슈메르가 여군[1]
이란의 쿠르드족

1. 개요
3. 인구
4. 언어
5. 문화
6. 종교
7. 역사
7.1. 차별과 갈등, 학살
8. 분열 및 분리주의
9. 국제정세와 쿠르드족
10. 인물
11. 기타
12. 대외 관계
12.1.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
12.2. 미국과의 관계
12.3. 일본과의 관계
12.4. 이스라엘과의 관계
12.5. 러시아와의 관계
12.6. 튀르키예와의 관계
12.7. 이란과의 관계
12.8. 카타르와의 관계
12.9. 이라크, 시리아와의 관계
12.10. 그리스와의 관계
12.11. 대한민국 과의 관계
13. 매체


1. 개요[편집]


쿠르만지어
گەلێ کورد (Gelê Kurd)
소라니어
گەلی کورد (Gelî Kurd)
남쿠르드어
کورد خەڵق (Kurd Xellq)
페르시아어
مردم کرد (Mardom-e Kord)
아랍어
كُرْد (Kurd)
아람어
ܥܡܐ ܩܪܕܘܝܐ (ʿAmmā Qurdaya)
아르메니아어
Քրդեր (Kʿrder)
자자어
Şarê Kurdan[2]
튀르키예어
Kürtler
독일어
Kurden[3]
영어
Kurds, Kurdish People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는 이란계 산악 민족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약 1,500만~2,000만 명이 튀르키예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튀르키예인을 구성하는 민족들 중에서 쿠르만지계 튀르키예인(Kurmanç asıllı Türkler 혹은 Türkiye'deki Kurmançlar)을 구성하고 있다.[4] 언어는 쿠르드어를 사용하며, 쿠르드어는 페르시아어와 근연관계에 있는 언어다. 쿠르드족의 전체 규모는 약 3,3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민족 국가가 아직 건국되지 않은 소수민족 중에서 인구 수가 많은편이다. 현재는 이라크 북서부 유전 지대에 쿠르디의 자치 국가 형태가 존재하며 민족 국가 건국을 시도하고 있다.

2. 쿠르디스탄[편집]


파일:external/www.pen-kurd.org/KurdsTurkey-map.jpg
쿠르드계 민족들의 분포 지역.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에 걸친 지역인 쿠르디스탄에 거주하는데 쿠르디스탄이라는 표현은 쿠르드족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쿠르드족 문제가 가장 민감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튀르키예인, 그리고 이란인, 이라크와 시리아의 아랍인들은 이 쿠르디스탄 지명의 사용을 부정한다.[5] 튀르키예인들은 대체로 쿠르드족 문제가 서방의 언론 플레이로 인해 편향되어 있다고 여긴다.

3. 인구[편집]


일반적으로는 3,000만~4,000만 명으로 추산하며 구체적으로 약 3,3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최대치로 추산하면 약 3,700만 명 혹은 그 이상이라 한다. 쿠르드인들은 3,640만~4,560만 명으로 추산한다. 파리 쿠르드학회의 2017년 연구조사자료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 튀르키예인, 페르시아인(이란인) 다음으로 많다. 서아시아의 주요 각국에 귀속된 쿠르드족의 추정 인구는 튀르키예에 1,200만~2,250만 명, 이란에 800만~1,100만 명, 이라크에 400만~650만 명, 시리아에 200만~300만 명 정도. 기타 그리스, 불가리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러시아[6], 파키스탄, 인도 등에도 소규모로 거주하며 서방 국가에 망명해 거주하는 쿠르드족도 있다. 그외에도 일본에도 망명한 쿠르드인 공동체가 존재한다.


4. 언어[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50px-Kurdish_languages_map.svg.png
쿠르드어 분포 현황(2007)[7]
쿠르드족은 종교가 아닌 사용 언어와 문화로 정체성을 찾는 민족이다.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 이란어군에 속하는 쿠르드어다. 쿠르드어는 페르시아어와 매우 유사하며, 파르티아어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이란어군에 속하는 친척 관계에 있다. 쿠르드어 내부에서도 소라니어 같은 다양한 방언이 존재하는데, 방언 격차가 상당히 커서 상호 의사소통이 안 되는 방언도 있다. 가령 자자어는 사실상 별개 언어 취급하는데, 위키백과의 경우도 다른 쿠르드 제어들은 kurdî로, 자자어는 zazakî로 구분해서 취급하고 있다. 심지어 표기하는 문자도 제각각이다. 튀르키예에서는 라틴 문자를 사용하고,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쿠르드인들은 아랍-페르시아 문자를 사용하며,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쿠르드인들은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

쿠르드어나 고대 이란계 언어들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쿠르드어가 과거 메디아인들이 쓰던 이란계 언어의 서부 방언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세 쿠르드인들의 발흥지가 구 메디아 왕국의 중심이었던 서부 이란의 산악지대이므로 쿠르드인들을 메디아인들의 후손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쿠르드어는 방언도 많고 그 기원에 대해서도 이설이 많다.

5. 문화[편집]


오랜 기간 튀르키예인들과 공존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사실상 문화적으로는 튀르키예인과 전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

다만 이 지역으로 이주한 튀르키예인들이 먼저 거주하던 쿠르드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가령 남동부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전통 문화 중에 남성이 머리에 두르는 수건인 푸시(Puşi)도 원래 쿠르드족의 풍습이며, 이쪽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입는 품 넓은 바지인 샬바르도 원래 쿠르드 옷이다. 이 지방의 민속춤인 할라이(halay)도 쿠르드족의 민속춤.

쿠르드족이 많이 거주하는 남동부 아나톨리아의 튀르키예어 방언에도 쿠르드어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다. 가령 가지안테프 사투리로는 와이셔츠와 같은 종류의 상의를 mintan이라고 부르는데, 쿠르드어와 동일한 어휘이다(튀르키예 표준어는 gömlek). 또한 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놀릴 때 쓰는 어휘인 gundî(군디)도 쿠르드어로 '촌놈'이란 뜻에서 온 말.

파일:external/karakocan.info/millikiyafetler.png
머리에 푸시를 두르고, 민탄과 샬바르를 입은 쿠르드인의 모습.

한때 푸시는 촌놈들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푸대접됐으나, 2010년 이후 튀르키예에서 남녀 안 가리고 스카프 용도로 두르는 게 유행이 되면서 다시금 여기저기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요리에 대해서는 쿠르드 요리 문서 참조.

샤 라프 나마에서 그들의 기원을 다룬 신화가 나오는데 페르시아 신화조로아스터교 신화와 관련이 있다.

악신 아흐리만으로부터 힘을 얻은 폭군 아지다하카[8]이 1천여년동안 지배를하며 겨울이 찾아왔고, 그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은 그의 양 어깨에 하나씩 돋은 독사에게 바칠 젊은이의 두뇌를 매일 2개씩 진상해야했다. 백성들은 적어도 한 명의 젊은이라도 살리기 위해 하나는 진짜 사람의 두뇌, 나머지 하나는 의 두뇌를 바쳤다고하며, 이렇게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쿠르드족이라고 한다. 다하카에게 아들을 여럿 잃은 대장장이 카와는 백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다하카의 머리를 망치로 쳐서 물리친다. 이 때가 3월 20일이다.

이후 카와는 폭군이 죽었다는 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산 위에 모닥불을 피웠고, 이에 봄은 하루 늦은 3월 21일 그 다음 날에 왔다.

이 때문에 특히 남부와 동부 쿠르드에서는 오늘날까지 모닥불을 만들고 이 불을 뛰어 넘으며서 돌아온 봄을 축하하고, 그들이 큰 힘에 단결하여 맞서 싸운 것을 나타내고 있다.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선 이 일을 파리둔이 했다고도 하고, 일부는 파리둔이 카와와 함께 물리쳤다고도 한다. 페르시아계 문화권에선 이슬람교, 비이슬람교 할 거 없이 이 날을 기념하며, 이것이 중동의 춘분노루즈다.#

쿠르드족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이를 세운 상도 있지만, 역으로 쿠르드족을 박해하는 진영에선 이 상을 반달리즘해서 모욕을 주는 일도 있다.#

6. 종교[편집]


고립된 산악 지대에 살던 이들은 중동 지역의 전통 다신교를 주로 신봉했었으나 현재는 수니파 이슬람교가 대다수이고 일부는 야지디교 신자이며[9], 이란의 쿠르드족은 수니파 신자도 있지만 이란의 주류 종교인 시아 12이맘파를 믿는 이들 또한 많다. 이슬람에 회의를 느끼고 세속주의자로 돌아서는 인구도 있다. 구소련권 국가의 쿠르드족은 무신론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본래 쿠르드인들은 산악 오지의 가난한 유목민이었기에 도회지에서처럼 이슬람이나 기독교 신학이 발달하기 힘든 것도 있거니와, 다른 유목민들과 다르게 통상과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슬람 교리와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교리를 서로 혼동하거나 동시에 믿는 경우가 많았다.[10]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야지드파, 예지드교, 예지드파라고도 불리는 야지디교. 10세기경에 나타난 쿠르드족의 일신교 계통 야즈단파의 분파에다가 미트라교, 메소포타미아 전통, 기독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등의 종교 교리가 섞여서 만든 쿠르드족의 민족종교. 본인들은 최초의 일신교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일신교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종교다.

중동 지역은 소수 종교 집단들이 중세부터 꾸준히 감소하고 사멸해오는 상황이지만,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야지디 신도들이 남아있다. 야지디교도들은 조로아스터를 쿠르드인 성인으로, 유대교를 야지디교를 베낀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나아가 기독교이슬람교야지디교에서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들만의 주장으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모를까. 특히 악마를 숭배하는 종교, 뱀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매도를 받으며 다른 종교로부터 숱한 배척과 탄압을 받아왔다.

다른 중동 민족에 비하면 종교가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적은 편이다. 이는 산악 지대에서 거칠고 팍팍한 생활을 하면서 예배나 종교 생활에 투자할 시간이 부족했으며, 아무래도 세월을 걸쳐 여러 종교가 쿠르드인을 걸쳐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들의 지위도 중동 내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하며, 이들의 사회 참여도 활발한 편이다. 여러 쿠르드계 여성이 참전해서[11]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저승사자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중에 여성에게 죽으면 순교가 되지 않는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 쿠르드 여군들은 저격수로 활약하면서 ISIL의 전의를 꺾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잡힐 경우 잔혹한 학대를 당하였다.


7. 역사[편집]


파일:이란 마르완.jpg
11세기의 쿠르드계 국가들인 마르완 왕조라와드 왕조

고대 문헌에서 아나톨리아이란의 산악지역에 살았다는 수렵 목축민들에 대한 기록인 수메르구티(Guti, Gutian people)나 그리스-로마 기록의 퀴르트(Cyrtians) 혹은 카르두키(Charduchi), 혹은 고대 왕국 우라르투메디아 등에서 쿠르드인의 기원을 찾기도 하는데, 사실 파르티아사산 왕조 시대까지는 여러 이란계 부족 중 하나 정도로 취급되어 왔다. 일단 언어를 비롯 직접적인 기원은 파르티아까지 닿는다고 한다. 이후 중세에 아랍계였던 이슬람 제국의 침공으로 이란이 이슬람 제국에 복속된 뒤 옛 이란의 서부 변경 지역(캅카스-아제르바이잔-구 메디아 일대)에서 이란계, 아르메니아계, 아랍계, 튀르크계 등이 뒤섞이며 단순한 이란계 종족이 아닌 독자적인 종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쿠르드인이다. 예컨대 쿠르드인 출신으로 유명한 살라딘의 조상들은 원래 아랍계 부족이었는데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와서 살다가 점차 쿠르드화된 경우다. 그래서인지 현대 쿠르드인의 외모는 이란인을 닮은 경우도 있지만 전형적인 아랍인의 모습인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아르메니아인을 닮기도 했다.

중세 쿠르드인들의 독립 왕조는 자지라 지방의 마르완 왕조와 아르메니아의 샤다드 왕조 등이 있었으나 지도부만 쿠르드인이었기에 별 주목을 못 받는다. 가장 유명한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의 개국왕 살라흐 앗 딘은 쿠르드 혈통이나 사실상 튀르크-아랍인이었다.[12] 근대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한 사파비 왕조의 황실 역시 따지고 보면 쿠르드 혈통이나 창건자 이스마일 1세의 12대조 할아버지가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한 후 수백년에 걸쳐 튀르크-페르시아화 되었기에 건국 후에는 쿠르드인 정체성은 지니지 않았다. 결국 쿠르드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는 20세기 전까지 출현하지 못한 것이다. 쿠르드인의 국민국가는 1927년 튀르키예 동북부의 아라라트 공화국, 1946년 소련의 지원으로 이란 서북부에 세워졌던 마하바드 공화국의 두 사례뿐이며 둘 다 단명하였다. 이라크 쿠르디스탄도 제압되었고 오히려 21세기 들어 시리아 쿠르디스탄인 로자바가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파일:이란 쿠르드.png
16-19세기 오스만-이란 국경에 있던 쿠르드계 토후국들, 대부분 19세기 중반 중앙집권화로 혁파된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유지한 오스만 제국의 자치구인 쿠르디스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쓰러트리기 위해 독립국가를 세워준다는 약속을 하고 쿠르드족을 끌어들이는데, 문제는 1920년 세브르 조약에는 쿠르드족이 사는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에 쿠르드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이 들어 있었지만, 이를 대체한 1923년의 로잔 조약엔 이런 내용이 빠졌다. 결국 쿠르드족은 영국프랑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의적인 국경선에 의해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 분단되게 된다.

이후 분리독립을 외치는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나왔으나 민족주의 세력이 단합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면서 독립에 실패한 채 각 국가의 소수민족으로서 생활하고 있으며, 20세기가 되면서 문화적인 압력 의전으로 정치세력이 탄생해 큰 인구를 거느리는 튀르키예와 이라크, 이란에서는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자주 박해를 받게 되었다. 특히 튀르키예와 이라크, 이란에서 쿠르드족의 독립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은, 쿠르드족의 규모가 너무 크고 쿠르드족이 독립할 경우 타 민족들도 분리독립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며, 그들의 거주지가 하필이면 석유산지와 겹치는 곳이 많다는 이유도 크다.


7.1. 차별과 갈등, 학살[편집]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신의 국가가 없는 거대민족이라는 점 때문에,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하였다. 쿠르드족은 지난 100년간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뒤통수를 맞고 뿔뿔이 분단됐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실컷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걸 알아차린 이란 정부가 아주 끔찍하리만큼 이들 단체를 뭉개버렸다.[13] # 이스라엘은 이란 쿠르드인들에게 이렇게 하곤, 되려 튀르키예 쿠르드인들을 뭉갤 때는 튀르키예를 도왔다. 저항조직 PPK 리더 외잘란 체포에도 모사드가 정보를 제공했다는 게 정설일 지경.

아르메니아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아르메니아에선 쿠르드인은 1만 명도 안 되는 소수 민족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아르메니아로선 주변 나라들과 복잡한 상황이라서 쿠르드인들 박대하다간 고달파진다. 게다가 튀르키예 견제에 이들을 쓰자는 의견도 있고 1차대전 이후로 튀르키예군, 전 오스만 제국군에게 학살당할 당시 쿠르드인들이 오스만 제국군과 같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끼어든 가해자임과 동시에 이들도 당시 같이 학살당한 피해자이기에 과거사를 따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에선 언어가 금지되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되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게도 그런 이름들 중 몇몇은 튀르키예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비꼰 적까지 있다. 그럼에도 이 조치는 1990년대까지 계속 이뤄져 왔다. 또한 1990년 초반, 동부 디야르바크르(Diyarbakır) 부근에서 튀르키예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튀르키예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일도 벌어졌다. 실제로 동부쪽은 튀르키예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튀르키예어를 모르는 경우가 수두룩함에도 그런 유목민 노인을 다짜고짜 쏴죽인 일이었기에 튀르키예 군부에서도 우려했다. 게다가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튀르키예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오스만어: diyâr-ı bakır).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14] 이 일은 튀르키예 내 좌파들과 우파 일부도 되려 이런 마구잡이 총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튀르키예의 국제적 입지만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런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고 직속 상관들도 강등 조치를 취했지만, 이 일로 쿠르드인들 과격파들을 응집하게 만들던 계기가 된 바 있다. 튀르키예 영화 에서 이런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렇게 일반적인 이미지는 비극의 민족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사실 쿠르드족 역시 아르메니아 학살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이들은 학살을 주도하면서 동시에 학살당하기도 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이 세계적으로 논란이 될 당시 쿠르드인들은 '우리는?'이라며 분노했었다. 이 당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쿠르드인은 오랫동안 분열되면서 같은 쿠르드인들끼리 적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튀르키예 측은 당시 쿠르드인 학살에 대하여 역시 입을 다물지만, 그 피해자 수는 아르메니아인에 미치지 못할지언정 최저 몇 만에서 최대 3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기에 절대로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다만 쿠르드인들도 튀르키예를 닦달하지 못하는 게 쿠르드인 중에도 학살자가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당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로서도 난감한 상황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나, 튀르키예 극우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아 프랑스로 가서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 대학교수가 되어 튀르키예 인권 운동에 나서고 있는 오르한 파묵스위스 언론 인터뷰에서 "오스만 제국은 100만 아르메니아인들과 13만 쿠르드인들을 학살[15]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듯 당시 쿠르드인들도 배신할까 봐 덩달아 학살당했다는 주장도 실제로 많다. 더불어 이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반강제였다든지, 식구들이 인질로 잡혀서 오스만 제국 민병대로서 학살을 벌여야 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하지만 정확한 사망자가 집계조차 안 된 시리아계 기독교인 학살은 거의 묻혀졌다. 더불어 아랍인 무슬림들도 이 당시 오스만 제국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역시 상당수 학살되었음에도 묻혀졌다. 종교가 아니라 튀르크 민족주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이들은 같은 무슬림이라도 뭉갰기 때문.

사실 쿠르드족을 튀르키예, 아랍 민족과 구분해서 보기 시작한 건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오스만 제국 후기(1875년) 인구조사를 보면, 당시 프랑스 고문관들이 인구조사를 했는데, 제국 내 민족을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무슬림으로 분류해놓고 있다. 당시 사람들에겐 무슬림이냐 아니냐가 중요했지 그들이 어떤 언어를 썼는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16] 또한 쿠르드족의 근대 민족주의는 1930년대 이후 신생 튀르키예공화국이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반발로 성장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사실 모든 쿠르드어를 사용하는 쿠르드인들이 스스로를 '쿠르드' 정체성을 갖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쿠르드의 일파라 분류되는 자자인(Zazay, Zazalar)들은 자신들을 쿠르드와 동일하게 묶는 것을 매우 불쾌해한다.[17] 이는 오래전부터 자자인들이 튀르키예 내에 거주하는 쿠르드계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쿠르만지인(Kurmanc, Kurmançlar) 부족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자자인들이 튀르키예 공화국에 호의적이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 튀르키예 동부에 거주하는 쿠르드들은 대다수가 부족 사회에 속해있다.

쿠르드족의 주된 생업은 목축으로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해 왔다.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인 살라흐 앗딘은 쿠르드족 출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튀르키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중년 가수 이브라힘 타틀르세스(İbrahim Tatlıses)도 쿠르드인이다. "쿠르드인은 밉지만 이보(=이브라힘의 애칭)의 목소리는 좋다" 가 극우의 보편적인 평가인데, 이보가 쿠르드어로 부른 앨범을 내자 극우 단체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이라크, 시리아 내의 아랍인들과도 사이가 무척 좋지 않다.제3자 입장에서 보면 아랍인들의 아랍인 우월주의가 제일 근본적인 문제이다. 쿠르드인과 아랍인 사이의 관계는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인과 아랍인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오히려 더 심하다고 볼 수도 있는게, 심지어 이슬람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쿠르드인조차도 아랍인 무슬림들과 어울리는 것을 멀리하는 편이다. 아랍인 외에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상당수가 아예 쿠르드인들을 사탄의 무리, 로자바는 사타니스탄이라고 부르며 극도로 증오하고 있다. 세속주의 쿠르드인 중에는 와하비즘을 믿거나 이란 신정체제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1970년대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 행정부 시기 이라크에서 국제 유가가 폭등하고 전례없는 경제적 번영을 누릴 때도 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하는 북부 지역은 그 혜택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 실제로 현재 이라크의 쿠르드족 상당수가 오늘날에도 중세 시대 수준의 오아시스 농업이나 천수 농업에 영위하면서 농사를 짓고 사는 실정이다.

2022년 프랑스에서 한 인종차별주의자의 총격으로 쿠르드인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이 이전에도 이민자들을 향해 공격을 해왔음이 밝혀지자 이에 격분한 쿠르드족들에 의해 파리에서 폭력 시위가 벌어진 적도 있다.

8. 분열 및 분리주의[편집]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튀르키예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튀르키예의 지지를 받아서 여기가 무장이 꽤 잘 되어있다)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죽어라 싸웠다. 가령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이후 튀르키예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튀르키예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이 많았다. 게다가 이 PKK를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따로 살다보니 아주 남남이 되었다면서 이라크, 이란, 튀르키예 내 쿠르드인들은 생각도 달라졌다고 할 정도이다. 즉 다른 지역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버렸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튀르키예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살던 쿠르드인들더러 갑자기 만나서 우리 뭉치자(...) 이러면 누굴 따라야 할지 알 수 없다.

게다가 1980-1988년에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을, 이라크는 이란의 쿠르드족을 지원해 서로 갈등 관계에 빠지게 되었고, 사담 후세인의 묵인하에 튀르키예가 이라크 쿠르드 거주 지역에서 군사 작전(PKK 소탕작전)을 수행하게 되자, 이라크 쿠르드족은 튀르키예군에 적극 협력해 튀르키예 쿠르드족 극렬 독립파인 PKK를 공격해서 이란 쿠르드-이라크 쿠르드-튀르키예 쿠르드의 반목이 상당히 심하다.

이와 같은 복잡한 쿠르드족 내부 갈등은 처음 쿠르드족 문제를 접하는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와, 쿠르드족 독립운동을 어렵게 하는 것 외에 일반인의 쿠르드족 문제 이해를 더욱 어렵고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 쿠르드족 내부의 분열 문제를 모르면 '탄압받는 쿠르드인이 불쌍하다', '쿠르드인들은 왜 통일전선을 결성해 효과적인 해방운동을 벌이지 못하는 것일까?' 등 극히 피상적인 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이라크 쿠르드족은 자치정부를 수립해 독자적으로 발전해나가고 있지만, 이 발전이 다른 나라의 쿠르드족에게 전혀 도움이 되고 있지 않다. 이 현상조차 쿠르드족 내부의 분열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단지 '그들은 불쌍한 민족'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18]

또한 이슬람이 쿠르드의 고유 종교인 예지디교(또는 야지디)를 이단시하며 핍박하여 이들을 증오하고 있고, 인구 상당수가(전 인구 90% 정도) 이슬람을 믿고 있어 소수 예지디교 신도와 화합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 종교적인 갈등이 상당하다.

이렇듯 단지 박해받는 소수민족이라는 하나의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사실 '소수종교 박해'와 '자신들끼리의 분열', '독립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음'은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동정과 지지를 받는 팔레스타인과 달리 쿠르드족의 경우는 팔레스타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쿠르드의 민족역사는 팔레스타인 역사보다 훨씬 긴데다, 민족 의식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만 동정받는 이유는 팔레스타인쿠르드의 주권을 병탄하고 식민통치중인 이라크, 시리아와 동일한 민족인데다, 똑같이 쿠르드인을 핍박하고 주권을 침해하는 이란,튀르키예에게는 반이스라엘을 위해 팔레스타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는 광신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인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과의 전쟁에서 쿠르드족이 최전선에 서게 되면서 분열 양상은 옛날보다는 가라앉은 상황이다.


8.1. 이란의 쿠르드족[편집]


[세계의 분쟁지역] '이란 쿠르드족'이 움직인다

별칭은 동(東)쿠르디스탄. 추정 인구는 330만~800만 명.

1946년소련의 공작에 의해 이란에서도 마하바드 공화국이란 위성국가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란의 공격 이후 결국 1947년에 소멸했다.

1969년과 1971년, 1980년, 1989년에 공산계열 반군의 주도로 몇차례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란군과의 충돌 끝에 대부분 진압되었다. 하지만 2004년 쿠르드 자유생명당(PJAK)과 이란 쿠르드 민주당(KDPI)이 결성되어 PJAK와 KDPI를 중심으로 동쿠르디스탄 일대에서 이란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2018년 7월 21일에 PJAK가 이란 국경의 혁명수비대 기지를 기습공격하여 혁명수비대원 10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

이란 동부 호라산에도 쿠르드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사파비 왕조 시절 우즈베크투르크멘 유목민의 약탈을 막기 위해 쿠르드 부족을 이곳에 이주시킨 것이 시초이다. 보즈노르드쿠찬 일대에 분포하며, 지금도 페르시아어가 많이 섞인 쿠르드어를 구사한다.

전반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상당히 안정된 쿠르드족 분파이며 이란 특유의 다문화국가 모델 덕에 페르시아인의 형제민족으로 묶여서 다른 지역에 사는 쿠르드족들에 비해 그나마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그만큼 페르시아인과 아제리인과의 통혼이 잦아 형질인류학적으로도 많이 섞인 편.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다른 쿠르드족들에 비해서 대우가 나은 것이지 갈등은 적지 않다. 특히 2022년 이란 시위 당시 (테헤란 외에서는) 쿠르드 지역에서 시위의 기세가 불타오르자 이란 당국이 쿠르드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국경 너머 이라크 쿠르디스탄을 향해서도 종종 포격을 하였다.

8.2. 이라크의 쿠르드족[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66px-Kurdistan_2009.png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지도. 녹색은 이라크 중앙정부와 관할 분쟁중인 지역이다.
별칭은 남(南)쿠르디스탄. 추정 인구는 650만 명.

사담 후세인 시절 쿠르드족이 공격을 받고 독가스 학살을 당하면서, 이 지역에는 비행금지구역이 설치되었고 쿠르드족은 이라크 북서쪽 3개주에 걸쳐서 자치권을 얻게 되었다. 쿠르드족 자치구는 민병대 수준이기는 하지만 페쉬메르가라는 독자적인 전투부대도 보유하게 되었다. 이라크 전쟁에서 후세인 정권을 공격하는 미국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이라크가 워낙 막장이다보니, 비교적 치안이 유지되어 안전한 편에 속하는 쿠르드족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다. 2010년대 통계에 따르면 쿠르드족 자치구는 이라크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이다. 수도는 아르빌로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시 주둔하던 지역이다.

북서부 유전지대에서의 원유 수입으로 경제적 이득도 많이 얻었으며, 이는 주로 IS와의 전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악화된 틈을 타서 이루어졌으니 사실상 이라크 내전의 최대 수혜집단. 일방적으로 석유 경제에만 의존하는 아랍인 지역과 다르게 이라크 쿠르드 지역은 자체적인 산업 발전도 활발한 편이라고 한다.

쿠르드라면 이를 가는 튀르키예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튀르키예를 통해서 자체적으로 원유 거래를 하여 서로 막대한 이득을 얻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튀르키예나 시리아의 다른 쿠르드 집단과의 관계는 반대로 소원한 편. 하지만 시리아의 경우 2014년 코바니 전투에서 시리아 쿠르드족들이 IS와 튀르키예군에 포위되어 압살당할 위기에 처할 때 지원군과 무기를 보내 도와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2017년 자치권에서만 만족하지 않고 아예 분리 독립/독립 국가 수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해 독립 찬성을 이끌어냈지만, 이에 이라크 정부가 당장 취소하라고 경고하며 3주 뒤 군대를 투입해 석유밭인 키르쿠크로 진격해 점령하여 사실상 항복하고 말았다.

8.2.1. 이라크 쿠르디스탄[편집]


이라크의 쿠르드족 자치기구. 정식 명칭은 쿠르디스탄 지역. 무장조직으로 페쉬메르가를 갖고 있다. 문서 참고


8.3. 시리아의 쿠르드족[편집]




약소민족의 상징인 쿠르드족.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역사를 갖고 있지만, 독립국가의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누구이고 튀르키예는 왜 이들을 공격했을까요? 한겨레 정의길 기자가 명쾌하게 설명해드립니다. 영상으로 확인하시죠.

쿠르드족과 미국은 오랫동안 동맹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슬람국가(IS) 격퇴를 위해 함께 피 흘리며 싸운 역사가 있습니다. 미국의 또 다른 동맹국 튀르키예가 예전부터 쿠르드족을 공격하겠다고 공언해왔지만, 시리아 주둔 미군이 아슬아슬하게 방패막이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전화통화 직후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의 시리아 철군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곧바로 시리아를 겨냥한 군사작전을 시행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후 지난 9일 튀르키예는 결구 ’평화의 샘’이라는 작전명으로 시리아 북동부에 군사작전을 개시했습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을 몰아내기 위한 대대적인 조치를 감행한 것입니다. 미군이 철수한 직후였으니 쿠르드족은 사실상 미국에 일방적인 ‘토사구팽’을 당한 셈입니다. 이후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로 혈맹을 배신했다는 국제 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비판을 의식했는지 튀르키예와 협상에 나섰고 결국, 양국은 군사작전을 개시한 지 8일 만에 5일간의 '조건부 휴전' 합의를 이뤄냈습니다.

이번 공격으로 수백 명의 쿠르드족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파일:로자바 시리아 현재.png
시리아 쿠르드족 자치정부 로자바의 지도. 실제 통치구역은 녹색이고, 붉은색은 터키군-시리아 반군 장악 지역이다.

별칭은 서(西)쿠르디스탄. 추정 인구는 200만~250만 명.

대부분 시리아 북부에 분포하고 있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정부로부터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19] 1986년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현재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하고 있지만, IS가 멸망하게 될 경우 이들은 언제 시리아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관계로 돌변하여 시리아 정부군과 시리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 그런데 2017년 9월 26일 왈리드 무알렘 시리아 외무장관이 시리아 정부가 쿠르드와의 자치권 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며 쿠르드족 자치권 협상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시사했다. 무알렘 외교장관은 시리아 쿠르드계는 영토 안에서 자치구역 형태를 원한다며, 그러한 계획은 협상이 가능하다고 밝혔다고 시리아 관영 사나통신이 소식을 전했다.

8.3.1. 로자바[편집]


시리아의 쿠르드족 자치기구. 정식 명칭은 북시리아 민주연방체제. 무장조직으로 시리아 민주군과 하위부대인 인민방위대(YPG)를 갖고 있다. 문서 참고.


8.4. 튀르키예의 쿠르드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북쿠르디스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별칭은 북(北)쿠르디스탄. 추정 인구는 1200만~2250만 명. CIA에서는 1420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쿠르드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주로 튀르키예의 동부에 많이 거주한다. 유목을 생업으로 하지만 최근에는 농사도 짓는다.

튀르키예 내에서 쿠르드족의 처우는 점차 개선되는 추세이다. 국영방송 TRT에서 TRT 6채널을 만들어 TV와 라디오로 쿠르드어로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으며, 과거에는 판매가 금지되었던 쿠르드어 교재들도 서점에 등장했다. TRT에서는 TRT AVAZ라는 채널에서 중앙아시아 튀르크 민족들의 언어로 된 방송을 내보내는데 아제르바이잔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투르크멘어, 위구르어 방송을 번갈아가면서 내보낸다. 마찬가지로 TRT 6에서도 시간대에 따라 쿠르만즈어, 자자어, 소라니어로 분류해서 방송한다. 쿠르드어 노래도 시중에서 흔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쿠르드 계열 사회주의 정당인 인민민주당은 튀르키예 대국민의회에서 꾸준히 제3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은 그저 그렇다. 동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튀르키예인들은 상당수가 가까운 일가가 쿠르디스탄노동자당과 정부군 사이의 교전에서 희생된 일이 있기 때문에 쿠르드인 전체를 가족의 원수로 여기는 경향도 여전하며, PPK 리더 외잘란이 잡힐 당시 PPK에 의해 순직한 여러 군경 및 공무원의 유족들이 모여들어서 '외잘란을 처형시켜라!' 라며 울부짖었을 정도다.

1927년 쿠르드인들이 아라라트 공화국이란 작은 나라를 3년이나마 세운 적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여파와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이후로 반발하던 세력 정리 및 당시 소련을 신경 쓰느라 튀르키예가 미처 관심을 두지 못한 틈을 타서 3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라라트산 주변에서 건국이 이뤄졌기에 이곳을 성지로 여긴 아르메니아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이 와중에 5천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죽기도 했기에 아르메니아와 갈등을 빚었었다. 이 때문에 쿠르드인들이 독립한다면 아르메니아와 또 죽어라 전쟁을 벌일 게 뻔하기에, 쿠르드인 독립 문제를 두고 아르메니아도 반대하고 있다. 게다가 아라라트 공화국을 뭉개던 튀르키예군에 쿠르드인들도 대거 있었기에 여기서도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재현되었다. 튀르키예는 쿠르드족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산악 튀르키예인이라 부르면서 이라크-시리아 쿠르디스탄 전체를 오스만 제국 이래로 내려온 튀르키예 고유의 영토라 여기면서 튀르키예 영토로의 귀속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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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패전으로 이라크-시리아 쿠르디스탄이 튀르키예에게서 분리되어 독립 시리아에 귀속되었으나, 튀르키예는 모술 등 쿠르디스탄을 튀르키예령으로 귀속할 것을 요구했다. 에르도안이 실제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인용하는 1920년 오스만 제국의회가 선언한 1차대전 전후 튀르키예의 영역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쿠르드인 자체는 인정하고 쿠르드어와 문화를 가르치고는 있으나,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튀르키예의 동부 공사로 인하여 쿠르드족이 주로 사는 지역이 수몰되면서 친튀르키예적인 쿠르드족까지도 반발하고 있다. 튀르키예 내 환경보호 단체들도 결사반대하여 쿠르드족과 같이 공사현장을 뒤엎고 몸으로 막으며 반발하고 있는데, 튀르키예가 기획하고 있는 거대한 댐들이 세워지면 디야르바크르, 하산케이프 같은 쿠르드족이 엄청 많이 사는 곳이 수몰되며 아니를 비롯한 옛 아르메니아 왕조들의 수도 등도 물에 잠기게 된다. 때문에 아르메니아에서도 같이 반발하고 있어서 이 문제에서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가 힘을 합치게 될 지 모른다. 그리고 이 지역에 가득한 문화재들이 수몰된다고 하여 튀르키예 내부나 국제사회에서도 반대가 많다.

2011년 10월에 튀르키예군 초소를 급습하여 24명이 목숨을 잃었고, 튀르키예측은 이 보복으로 2011년 12월 28일 (튀르키예 측 발표에 의하면) 쿠르드 반군을 폭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쿠르드 측은 사망자가 대부분 민간인이라고 반발했고, 급기야 주지사마저도 현지 성명으로 밀매업을 하던 젊은이들로 반군과 무관하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결국 여당 대표마저도 민간인이라고 인정하고 말았다.

2014년 이라크 내전이 터지면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무장조직인 페쉬메르가의 무장 수준이 서방의 지원으로 상당히 강력해졌고, 이라크 쿠르디스탄이 튀르키예를 경유해 석유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튀르키예도 무턱대고 이라크 쿠르디스탄을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송유관이 튀르키예를 거쳐가면 튀르키예에게도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라크 쿠르디스탄에 한해서만 튀르키예가 협조할 뜻을 비칠 뿐, 튀르키예 내 쿠르디스탄은 역시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르도안 휘하의 튀르키예는 시리아 내전을 틈타 시리아-이라크 쿠르디스탄 일부를 강점하고 튀르키예령으로 편입할 꿍꿍이를 품고 있다.

평균적으로 쿠르드인의 경우 튀르키예인보다 아이를 1명 이상 더 낳으며, 튀르키예인의 경우 대체출산율(2.1명) 아래로 출산율이 떨어진 데 반해 쿠르드인은 높은 출산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으므로, 세대가 지날수록 지금도 적지 않은 쿠르드인의 비중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경향은 튀르키예 동부 쿠르드족 거주지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도시화가 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꾸준하게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튀르키예 정부도 이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어서 '여성은 아이를 3명은 낳아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중. 실업률이나 낮추지? 쿠르드족 일각에서는 "어차피 튀르키예 전체가 조만간 쿠르디스탄이 될 텐데 뭐 하러 독립운동 따위를 해서 앙카라콘야, 이즈미르, 이스탄불 같은 비옥한 도시를 버리겠냐"며 독립운동을 하지 말자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2021년 7월 28일경 튀르키예 밀라스 남서부 지역에서 시작된 대규모 방화사건에 쿠르드족 무장단체가 개입되어 있다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테러용의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응징할것이라 밝혔다.자세한 내용은 튀르키예 산불 항목 참조.


8.4.1.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편집]


튀르키예에서 활동하는 쿠르드족 테러단체 겸 독립단체. 문서 참고.

미국과 서방에선 테러단체로 규정했지만 러시아에선 합법 정당으로 보고있다.

8.5. 야지디족[편집]


종교문자 등의 생활의 차이로 인해 갈라진 쿠르드족의 분파 혹은 친척 민족. 문서 참고.


8.6. 자자족[편집]


종교언어 등의 생활의 차이로 인해 갈라진 쿠르드족의 분파 혹은 친척 민족. 문서 참고.


9. 국제정세와 쿠르드족[편집]


중동 사회의 불안 요소이다. 쿠르드족이 상당수 인구를 차지하는 튀르키예같은 나라에서는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인정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러시아와 유럽, 아시아의 세력 중앙에 위치한 튀르키예가 아주 중요하다. 튀르키예가 약해져서 러시아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면, 러시아가 튀르키예를 넘어 중동과 유럽 전체를 영향권에 둘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며, 대부분의 원유를 중동에서 수입하는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반길만한 일이 아니다.

시리아에서 시리아 민주화 운동에 이어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자 시리아 내전의 여파로 수니파는 튀르키예 접경지역 및 동남부 사막지대를, 시아파 정부군이 수도를 비롯한 남부 지역을 장악한 과정 속에서 쿠르드족이 북동부의 사막지대를 점령하고 자치권을 확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물론 자치권 자체는 별로 문제가 안 될 수 있지만, 시리아의 정황상 국가 분열의 상황으로 흘러가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쿠르드족에게 국가가 생기는, 그것도 이라크, 튀르키예 등 쿠르드족 접경지역을 아우르는 나라가 생기는 것이다. 그 위치가 서남쪽이 시리아, 북쪽이 튀르키예이며, 동쪽이 이라크이다. 이렇게 되면 영토의 작음, 큼의 여부를 떠나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생기는 상황이 빚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며, 튀르키예, 이라크 등 쿠르드족이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면서도 좋지 못한 관계를 맺은 나라에서는 입 안의 가시가 새롭게 생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에 따라서 주변 나라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 튀르키예는 적극적인 개입마저도 고려하는 중이다. 자세한 과정과 전망은 시리아 민주화 운동 참조. 문제는 튀르키예의 쿠르드족은 물론이고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구에서 시리아의 쿠르드족의 자치권 확립에 대해 껄끄러운 입장을 보여, 쿠르드족의 통일 국가 수립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이미 미승인국의 지경에 이른 수니파 반군 이슬람국가이라크 수니파 지역으로 진격하여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이라크 정부군이 패퇴하자 이라크 쿠르드족이 군대를 결성해 쿠르드 지역을 지키고 있어, 경우에 따라 분리 독립을 해야 쿠르드족을 지킬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고 있어 시리아 쿠르드족과 이라크 쿠르드족이 통일국가를 세울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라크 내전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막장인 이라크 정부군이나 역시 막장인 이슬람 국가보다 오히려 무장 수준이나 장비 수준이 월등할 정도. 과연 쿠르드족들의 수백 년 염원인 '쿠르드 국가'를 건국할 수 있을지... 그러나 시리아령 쿠르디스탄과의 연합에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라크 쿠르드족은 양 쿠르디스탄 지역을 잇는 요충지인 라비아 마을을 빼앗기는 등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자체는 공유하더라도 일반적인 의회를 갖춘 자유 민주주의 독립 민족 국가 노선을 추구하는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구와, 처음에는 공산주의, 최근에는 아나키즘을 비롯한 좌익 투쟁 이론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시리아 민주군을 통해 비-쿠르드계 반지하디스트, 반 아사드 조직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튀르키예, 시리아의 PKK-YPG 노선 간의 이데올로기 차이도 뚜렷하다.

한편 미국 등의 국제 사회는 이라크 내의 이슬람 국가 다에시군에 대한 공습에 들어갔고, 미국은 9월 말 결국 시리아에도 공습을 확대했다. 시리아 쪽의 쿠르드족 밀집 거주지로 시리아 내 쿠르드족이 지배하는 영역은 서쪽부터 아프린과 코바니, 하사카 세 개가 떨어져 있다. 이 중 하사카는 시리아와 이라크령 쿠르드 지역의 경계에 있어서 다에쉬군으로부터 전투 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인데, 정가운데에 있는 코바니에 9월달부터 이슬람 국가군이 공격에 나섰다. 결국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쿠르드족 주민 수십만 명이 튀르키예로 피난을 떠났다. 미국이 시리아 쿠르드족을 돕기 위해 코바니 인근 지역에도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지만, 지상의 시리아 쿠르드족군과 손발이 맞지 않아 이대로라면 10월 초순이 끝날 때까지 다에쉬군이 코바니를 장악하는 게 확실시되는 상황. 코바니 인근 마을을 다에시가 점령한 지 얼마 안돼 그 마을의 시리아 쿠르드족 민간인들을 다에시가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코바니가 장악되면 피난 가지 못한 주민 수만 명이 대량학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이젠 시리아에서 피난 간 쿠르드족 때문에 튀르키예는 쿠르드족 분리주의가 고양될 것을 우려하고 있지만, 이제 코바니를 근거로 다에시가 튀르키예를 침공할 판이라 튀르키예도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받아주긴 하고 있다. 그러나 튀르키예 정부는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지원하러 자원한 튀르키예의 쿠르드족이 시리아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도 하는 상황. 일단 튀르키예 의회는 10월 2일자로 다에시에 대한 군사 공격을 승인했다.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 오스만 1세의 할아버지 쉴레이만 샤의 묘소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튀르키예의 월경지인데, 이곳을 다에시가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0월 5일을 기준으로 다에쉬에 군사 대응 방침은 밝혔지만 어떻게 대응할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한편 이 상황에서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라비아를 되찾는 등 선전하고 있다.

2015년 6월에 다에시 라카와 튀르키예 사이의 길을 차단하고, 코바니를 동부의 시리아 쿠르드족 지배 지역과 연결하는 데 성공하면서 독립국가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특이하게 이슬람국가군 포로들을 학대하지 않고 제대로 대우해준다. 물론 다에쉬라는 입장상 그렇게 영 좋진 않겠지만,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나 시리아군, 자유 시리아군 등 시리아 반군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명분으로 무조건 죽이거나 가혹하게 학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입지가 불안해서 그런지 어느 정도 국제 사회 눈치를 보며 제네바 협약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국제 사회는 튀르키예나 이란 같은 나라들을 빼면 쿠르드 반군에 대해선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쿠르드인들이 그들만의 나라인 쿠르디스탄을 건국한다 해도 과연 정상적으로 나라가 운영될 수 있을까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왜냐면 시리아와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가 좋은 예이다. 자치정부들은 세속주의를 추구하여 광신적이지 않지만, 문제가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지 실제로는 비민주적이다. 특히 자치정부의 집권당은 야권을 탄압하며 집권당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비판만 하면 가차없이 처벌하여 인권 침해와 언론 탄압이 심각하다. 가장 심하게 비난받는 부분은 자치정부들의 군대와 쿠르드 민병대가 이라크 내전과 시리아 내전에서 타 민족인 아랍인야지디인을 대상으로 인종차별과 전쟁범죄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원래 사담 후세인 시절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순니파 아랍인들이 주도권을 상실하자 생긴 반발심 때문에 과장된 점이 크다.[20] 사실이 어찌 되었든 이들도 아랍인과 야지디인 차별 문제로 국제적으로 비판받으며 쿠르드인과 쿠르드 자치정부의 이미지를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 중에서는 쿠르드인들의 국가인 쿠르디스탄 건설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2010년대 이후 난민을 많이 받아들인 독일에서 튀르키예 난민들과 쿠르드족 난민들 사이의 무력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튀르키예와의 대립은 IS 박멸 전쟁 내내 존재해서 튀르키예군이 시라아 접경지를 월경해서 장악하는 유프라테스 방패 작전을 수행하는 도중 쿠르드 무장단체와 충돌해서 미국이 중재를 하기도 했다. 이라크와도 유전지대를 인질삼아 협상에 나서는 등 입지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자신들이 원하는 독립국가는 커녕 자치권 확보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라크 쿠르드가 is전쟁을 틈타 독립을 선포했다가 이라크군에게 발린 탓이 크다.

결국 2018년 말에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시리아에서의 미군 철수를 결정하면서 경색국면이 끝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주변 국가들은 쿠르드족 제압을 준비하고 있다. 일단은 미국이 철군 시한을 좀 지연하고, 튀르키예가 쿠르드족을 건드리면 튀르키예 경제를 붕괴시켜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긴 했으나[21] 이번에도 쿠르드족 민족국가의 설립은 무산되었다는 게 거의 확정이다. 한편으로는 미국이 쿠르드족을 토사구팽하는 이 사태는 예견되었던 것이, 냉정하게 말해, 튀르키예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갖고 있는 이상, 미국이 튀르키예를 버릴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분명했던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IS야 미치광이 군벌에 불과하지만, 러시아 흑해 함대를 틀어막을 튀르키예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9.1. 국익 추구토사구팽[편집]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은 미국의 지원아래 IS를 성공적으로 공격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시리아 쿠르드족은 쿠르드족의 독립을 요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많은 쿠르드족을 보유하고 있는 튀르키예와 이란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가장 많은 쿠르드족이 살고있는 튀르키예 입장에서는 쿠르드족의 독립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2019년 10월 6일 시리아 동북부에 주둔했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시리아 쿠르드족이 보호막을 잃고 튀르키예의 공격에 노출됐다.

미국은 쿠르드족과 튀르키예 중에서, 보다 이용가치가 높은 튀르키예를 선택함으로써 쿠르드족이 튀르키예의 공격에 노출되는 것을 방관했다는 지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반미주의자들은 이를 미국의 배신이라면서, 미국을 믿지 말아야한다는 근거로 이용하고있다. 또한 반아랍감정, 반이란감정, 반튀르키예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정작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면서 왜 정작 쿠르드는 무시하냐며 감정적으로 쿠르드를 지배하는 나라들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쿠르드와 동맹관계인 이스라엘이 주로 이런 방식으로 드립을 친다. 물론 이스라엘 역시 이제는 중동을 이루는 나라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했으니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쿠르드 인권탄압 비판을 악용해 팔레스타인을 강압적으로 탄압하는 점에 대한 정당성 및 합리화로 바꾸려 한다는 점은 국제사회에서도 많은 비판과 우려를 받고 있다.

국제정치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곤 하지만 동맹과 우방 세력들의 인심을 모으면서 동시에 남들은 모르게 냉정한 국익도 취해야 한다는 거지, 당장 미국 정계 내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미군 당국자들이나 모두 트럼프를 비판했다.

현 국제질서상 쿠르드족 독립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때, 러시아/이란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이란 쿠르드족, 아사드 정권이 승리한 시리아 쿠르드족)에서 하는 것이 용이하지만 그마저도 불안 방지를 위한 튀르키예의 견제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국이던 러시아던 튀르키예의 가치가 쿠르드족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므로 튀르키예의 몰락이 쿠르드족 독립의 기회라 볼 수 있는데 그마저도 1차대전 이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이 모두 멸망한 덕에 폴란드가 포젠, 갈리치아,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 폴란드)를 모두 얻고 독립한 것과 같이 갑자기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가 한 번에 망하지 않는 이상 완전한 민족국가는 성립할수 없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9년 튀르키예 쿠르드 침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22년 나토 마드리드 정상회의에서는 튀르키예가 스웨덴, 핀란드의 나토 가입 문제에 쿠르드족 송환 문제를 연계시키며 변함없이 쿠르드족을 철저하게 짓밟아버리겠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스웨덴, 핀란드에서는 나토가입이라는 자국의 국익을 위하여 쿠르디스탄 노동자당 PKK와 시리아 무장단체 YPG, 펫훌라흐 귈렌 테러 조직 페토(FETO)#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 2019년 시리아 내 튀르키예의 군사 행동을 이유로 부과했던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 PKK와 페토 관련자 송환에 대한 핀란드, 스웨덴 양국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튀르키예에게 약속하며 쿠르드족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튀르키예는 핀란드, 스웨덴이 튀르키예의 핀란드, 스웨덴의 나토 가입 지지를 대가로 튀르키예와 약속했음을 상기시키며 핀란드, 스웨덴에 있는 쿠르드노동자당, 펫훌라흐 귈렌 테러 조직 관련자 33명을 즉시 튀르키예로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현재 튀르키예는 핀란드에는 각각 6명씩 PKK와 FETO 관계자의 송환을 요청했으며 스웨덴에는 PKK 관계자 11명과 FETO 관계자 10명의 신병 인도를 요구한 상황#이며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핀란드, 스웨덴이 이들을 튀르키예로 신병 인도하기로 한 약속[22]을 지키지 않는다면 핀란드,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막을 것이라고 직접 경고했다.#

10. 인물[편집]



11. 기타[편집]



이브라힘 타틀르세스가 쿠르드어로 부른 노래 '솀맘메(Şemmamme)'를 첨부한다. 밑에 가사도 추가했다. 병풍으로 쿠르드족의 전통 춤이기도 한 솀맘(Şemmam)[23]과 이보 특유의 수건 흔들기 춤(...)에 주목.

Şemmamê Şemmamê Şemmamê bûkê
Dotmamê dotmamê dotmamê bûkê
Wî wî wî … Şemmo
Qurbana te me, Şemmo
Tu nûrê nûran î Şemmamê bûkê
Tu berf û baran î dotmamê bûkê
Şemmamê tu bi xêr hatî Şemmamê bûkê
Tu bûkê bûkanî dotmamê bûkê
Ez te pır hez dikim Şemmamê bûkê
Tu nayê ez çi bikim dotmamê bûkê
Tu dibê xorto bigirî Şemmamê bûkê
Eyb e, fedî dikim dotmamê bûkê
Şemmamê pir zer e Şemmamê bûkê
Ẍezalê dûr merre dotmamê bûkê
Carek te ramîsim Şemmamê bûkê
Xorto birîndar e dotmamê bûkê
솀맘에, 솀맘에, 솀맘에 들어와
삼촌 딸도, 삼촌 딸도, 삼촌 딸도 들어와
이것은 이것은 이것은... 솀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하지 솀맘 (후렴)
너는 빛 중의 빛 솀맘에 들어와
너는 눈과 비 삼촌 딸도 들어와
솀맘에 온 것을 환영해 솀맘에 들어와
너는 신부들 중에서 신부야 삼촌 딸도 들어와
너를 정말로 사랑해 솀맘에 들어와
네가 오지 않으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삼촌 딸도 들어와
너는 말하지, 아이가 울고 있다고 솀맘에 들어와
망신스러운 일이야, 망신스러워. 삼촌 딸도 들어와
솀맘에 아주 빠져들었구나 솀맘에 들어와
가젤아 멀리 가지 마라 삼촌 딸도 들어와
내가 다시 한 번 키스해줄 테니 솀맘에 들어와
아이가 다쳤다네 삼촌 딸도 들어와


또한 2010년에 이브라힘 타틀르세스는 튀르키예인과 쿠르드인 사이의 평화를 주제로 한 노래 '우리는 튀르키예인, 우리는 쿠르드인(Biz türküz Biz kürdüz)'을 불렀다. 후렴구가 무척 인상적인 노래.

Biz Türküz biz Kürdüz yoktur farkımız
Alevi Sünniyiz olmaz gayrımız
Biz Lazız Çerkeziz nedir farkımız
Yıllardır söyleriz budur şarkımız
우리는 튀르키예인, 우리는 쿠르드인 우리는 다를 것이 없어요
알레비파도, 수니파도 이제부턴 구분하지 말아요
우리는 라즈인, 체르케즈인 무엇이 다른지요
오랜 세월 동안 노래합시다. 이 노래를


12. 대외 관계[편집]






12.1.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편집]


독립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해놓고서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 뒷통수를 갈기고 쿠르드족의 분포지역들을 이라크, 시리아, 튀르키예, 이란 등으로 갈갈이 찢어놓았기에 당연히 안 좋다.


12.2. 미국과의 관계[편집]


미국으로선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참 난감하다. 실컷 이용해 먹다가 버리는 것을 수없이 반복했기 때문.


12.3. 일본과의 관계[편집]


일본 정부의 입장은 전적으로 튀르키예 정부의 입장을 따른다. 최근에 난민 심사 중에는 추방못한다는 점, 난민 신청의 횟수의 제한을 둔 법의 허점을 노려, 튀르키예 국적으로 일본으로 입국후, 반려되더라도 지속적으로 난민신청을 하여, 일본에서 불법으로 이민하는 쿠르드족이 문제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사이타마현에 거주하고 있으며, 100여명의 쿠르드족이 튀르키예 인을 집단으로 습격하고, 부상한 튀르키예인을 추가로 폭행하려고 병원까지 몰려가서 경찰이 제지하자 경찰까지 폭행하면서 일본에 있는 쿠르드 족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

이들은 난민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납세를 하지않고 고급차 및 요트를 소지하는 등 호화러운 삶을 SNS로 자랑하고 있으며, 살인과 같은 심각한 범죄행위를 빼고는 인권단체의 지원과 난민 신청자라는 명분하에 풀려나기에 일본의 법률에 따르지 않고 있다. 특히 사이타마 현에서는 위법개조된 고급차를 타고다니면서 주의를 소란스럽게하며#, 밤중에 라이트를 끄고 고속도로를 횡당무진으로 주행하고#, 화물차에 과적재들 당연하게 하고 있는데다가#1#2 초등학생의 나이대의 아이에게까지 공사장에서 일을 시키고 화물차나 크레인을 몰게 하면서, 일본의 법률위반행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SNS에 올리고 있어서 쿠르드족에대한 인식은 악화하는 추세이다.



12.4. 이스라엘과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쿠르드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5. 러시아와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쿠르드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6. 튀르키예와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튀르키예-쿠르드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7. 이란과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란-쿠르드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8. 카타르와의 관계[편집]


튀르키예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카타르 정부는 쿠르드족 군벌 집단들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12.9. 이라크, 시리아와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라크-시리아-쿠르드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튀르키예와 이란 못지 않게 이라크, 시리아와도 대립관계에 있다.

12.10. 그리스와의 관계[편집]


튀르키예와 앙숙관계에 있다보니 쿠르드의 독립을 가장 지지하는 국가기도 하다. 다만 주된 관심사가 튀르키예 지역에서 거주하는 쿠르드족을 통해 튀르키예를 약화시키고 서쪽의 그리스, 동쪽의 쿠르드로 하여금 양면 전선을 만드는데에 쏠려있어 이라크나 이란, 시리아 지역의 쿠르드족 문제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다.


12.11. 대한민국 과의 관계[편집]


대한민국은 쿠르드족 문제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고 있다. 쿠르드 문제는 대한민국과 크게 밀접한 외교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에 자이툰 부대파병한 적은 있으나 현지 쿠르드와는 비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한 채 별다른 교전 없이 조용히 주둔하다가 철군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간접적으로 쿠르드족에게 불리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쿠르드족을 강경 진압하고 있는 튀르키예와 외교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특히 군사적으로 튀르키예와 교류가 활발하며, 튀르키예에게 군수 물자를 수출하고 있다. 언론에 공개된, 쿠르드족을 공격하는 튀르키예군의 사진 및 영상에서는 한국에서 수출했거나 기술 이전을 통해 튀르키예에서 생산한 장비들이 목격되고 있다. 튀르키예, 쿠르드 공격에 K9 동원했나(한국경제 기사) 튀르키예에서 자체 제작한 선전 영상(5분 35초)을 보면 '취급주의'와 같이 한국어 표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포탄 케이스가 잔뜩 쌓여 있다. 또한 위의 기사에서 나와있다 시피 K-9 자주곡사포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T-155 프르트나 자주포가 쿠르드 진압 작전에 동원되고 있으며, 2023년에는 알타이 전차 전용 국산 파워팩을 수출했다.

다른곳에서는 나라없는 쿠르드의 처지를 동정하며 독립을 응원하는 여론들도 있지만 당연히 PKK 만큼은 좋지 않게 보는 편.


13. 매체[편집]


기동전사 건담 00크루지스는 쿠르드족 자치구가 모티브이며, 주인공인 소란 이브라힘 역시 쿠르드족 출신이다. 좀 더 자세히 따지자면, 극중 아자디스탄이 현실의 이란과 대응하기 때문에 이란 쪽 쿠르드족이라고 보는 게 맞을 듯. 아자디스탄의 '아자디'라는 단어 역시 쿠르드어로 자유, 해방(liberty)을 뜻한다.

메탈기어 솔리드스나이퍼 울프도 쿠르드족 출신.

넷플릭스의 영화 모술의 주인공 '카와'도 작중 쿠르드 족 출신 경찰관이다.

헌터x헌터쿠르타족의 모티브이다.

2001년에 출간된 소설 <회색바람>에서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쿠르드해방기구(KLO)란 테러조직이 서울에서 테러를 일으킨다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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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르드족 사회는 다른 중동의 이슬람권과 달리 남녀가 평등한 편이다.[2] 자자족에 대해서는 Şarê Zazayan이라고 한다.[3] 독일에 120만 명에서 150만 명에 달하는 쿠르드인이 거주하는 걸로 추산된다.[4] 통상적으로는 튀르키예 쿠르드족(Türkiye Kürtleri)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5] 이라크와 이란의 경우, 각각 쿠르디스탄 지역과 쿠르디스탄 주(페르시아어로는 코르데스탄 주)가 정식 행정구역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지명의 사용을 부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6] 쿠르드계 러시아인 참조.[7] 영어판 위키백과 Kurds 문서[8] 줄여서 '다하카'라고도 한다.[9] 쿠르드를 핍박하는 튀르키예도 수니파 무슬림이 대다수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10] 비슷한 사례로 오스만 제국 시대의 발칸 반도의 산악 시골 지방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동시에 다 믿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주변에 성경도 꾸란도 없고 글도 읽을 일이 없고 외부인하고 접촉할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단', '우상숭배' 같은 말은 그저 먼나라 얘기일 뿐이었다.[11] 2018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된 에바 위송의 '태양의 소녀들'은 쿠르드계 여성 군인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은 쿠르드족하고 불편한 관계인 이란 출신 골쉬프테 파라하니가 연기했다.[12] 다만 아이유브 왕조가 많은 쿠르드 맘루크들을 수용하긴 했다[13] 이 당시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숨겼는데 26년이나 지난 2006년 이란인 자한지르 라즈미로 밝혀졌다.[14] 이 명칭의 유래에는 다른 설명도 있는데, 이미 이슬람 제국 시기부터 이 지역 일대가 아랍어로 '바크르의 땅'이라는 뜻의 '디야르 바크르(Diyār Bakr)'라고 불린 바 있다. 바크르는 이 지역의 주요 부족이었던 바누 바크르에서 따 온 말이다. 1937년 아타튀르크는 이 도시를 방문해서는 도시 명칭 유래가 애매하다고 하여 튀르키예어로 '구리의 땅'을 뜻하는 '디야르바크르'로 명칭을 고정시켰는데, 이는 원래 튀르키예어가 아닌 지명을 튀르키예화한 대표적인 사례로도 꼽힌다.[15] 파묵은 학살자 수를 최저와 최대 주장치에서 중간치로 이야기했다.[16] 실제로 세금부터 시작하여 일상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이냐 아니냐가 중요했지 어느 민족이냐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중시되기 시작했는데, 오스만 시대의 세금 대장인 데프테르(Defter)에 '민족'이라는 항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민족이냐의 기준은 혈통이 아니라 모국어로 결정되었다. 당장 여기 나오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또한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 정교를 믿는 사람들', '아르메니아 정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일 가능성도 크다.[17] 다만 언어학적으로 자자인들의 언어인 자자어(Zazaki, Zazaca)는 일반적인 쿠르드인들의 언어와는 계통상 구분된다. 자자인들을 두고 쿠르드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너무 예외적인 사례를 드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계통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쿠르드'로 묶인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도 있다.[18]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사만 보더라도 독립운동의 분열, 고조선 멸망 이후 나타난 연맹왕국들과 삼국시대, 그리고 후삼국시대라는 분열 시기를 겪었다. 그 당시 국가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바로 이웃한 국가를 침략해서 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이는 수백 년 동안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질감이나 연대의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삼국이 통일될 수 있었던 이유는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심지어 이를 위해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신라에게 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신라에 복종하는 척 해도 속으로는 유민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9세기에 신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하자 이들 지역은 백제 부흥이나 고구려 부흥을 명분으로 삼아서 독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민 의식 자체는 고려 시대에도 계속되는 바람에 삼국부흥운동이 12세기까지 계속해서 일어났다가 여몽전쟁 이후 전 국토가 몽골군 기병과 보병에게 짓밟히는 것을 한반도인들이 목도하고 나서야 유민 의식이 부질없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고 고려라는 국가를 인정하게 된다. 그나마 한반도의 경우 국토가 좁아 통일전쟁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쉬웠고, 불교나 유학 등의 최소한의 공유점이 있었으며, 삼국의 문화, 언어적인 차이 역시 타국에 비하면 차이도 크지 않은 편에 속했는데도 이랬던 마당에 쿠르트족이 살고 있는 서아시아 지역은 국토도 넓은데다가 환경도 한반도보다 훨씬 척박하며, 결정적으로 한반도 국가들은 1개의 민족만 살고 있는 데 반해 쿠르드족은 이라크, 시리아, 튀르키예라는 강대국 틈새에 끼여 있는 소수민족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쿠르드족의 통일 국가를 세우기 위한 조건은 한반도에서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을 수 밖에 없다.[19] 이라크보다 더 심했던 것이 이라크는 그래도 쿠르드족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하기라도 했지만 시리아는 아예 자국내 쿠르드족을 무국적자로 취급하였다.[20] 2017년 이라크군이 이라크 쿠르디스탄 자치정부의 유전을 접수할 때 쿠르드 자치정부의 지배를 받던 이 지역의 아랍인들이 환영하며 쿠르드 자치정부의 깃발을 밟거나 불태우고 아랍계 이라크인들이 쿠르드계 이라크인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가하기도 했다.[21] 시리아나 이라크는 내전의 폐해가 너무 커서 쿠르드까지 완벽히 제압할 여건이 못 되고, 탄압을 가장 심하게 할 나라는 튀르키예가 유력하다. 다만 시리아와 이라크도 현재 내전의 폐해를 수습하면 튀르키예만큼은 아니어도 쿠르드족을 강경하게 탄압할 가능성도 있다.[22] 여기서 에르도안은 스웨덴 정부가 '테러범' 73명의 신병을 튀르키예에 인도하고, PKK의 자금조달·인력수급 활동을 단속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23] 영상에서 볼 수 있지만 굉장히 격렬한 동작을 요구하는 춤으로, 튀르키예 남동부지방의 전통 춤 할라이(Halay)의 한 종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