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리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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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롤링 스톤스 심볼.svg

믹 재거
키스 리처즈
찰리 와츠
로니 우드


{{{#808080
[ 전 멤버 ]
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 UK Albums ]
[ US Albums ]
[ Live Albums ]
[ Compil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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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20px-Stone_Age_Rolling_Stone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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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Hits (High Tide and Green Grass)
1966.03.28
Flowers
1967.06.26
Through the Past, Darkly (Big Hits Vol. 2)
1969.09.12
Stone Age
1971.03.06
Gimme Shelter
197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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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모어핫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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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12.20

1972.02.18

1972.10.13

1972.12.11

1973.10.05

파일:Metamorphosis75.jpg


파일:220px-Made_in_shade_album_cove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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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wfno1971-1977.jpg


1975.06.06

1972.06.13

1975.11.05

1977.10.20

197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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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20px-Sucking_in_the_Seventies70.jpg


파일:220px-Story_of_The_Stones_cover.jpg


파일:220px-Rewind84.jpg


1980.10.10

1981.01.01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8em"
Sucking in the Seventies
1981.04.14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928;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FFf, #FFf, #FFf); font-size: .8em"
Story of The Stones
1982.12.01

1984.06.19
}}}



키스 리처즈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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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ongwriters-hall-of-fame-logo_770_441_90_s.jpg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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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키스 리처즈
Keith Richard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3년 #











키스 리처즈
Keith Richards


파일:키스 리처즈.jpg

이명
키스 리처드
Keith Richard[1]
출생
1943년 12월 18일 (80세)
영국 잉글랜드 켄트 다트포드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배우, 프로듀서
소속
롤링 스톤스 (1962 - 현재)
서명
파일:키스 리처즈 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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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다트포드 공업 학교
시드컵 미술 대학교
신체
174cm, 68kg
재산
약 $500,000,000[1]
종교
무종교 (불가지론)
배우자
패티 핸슨 (1983년 결혼~현재)
파트너
아니타 팔렌베르크 (1967년~1980년)
자녀
아들 말론 리처즈(1969년생)[A]
딸 안젤라 리처즈(1972년생)[A][2]
아들 타라 리처즈(1976년 출생~1976년 사망[A][3]
딸 테오도라 리처즈(1985년생)[B]
딸 알렉산드라 리처즈(1986년생)[B]
활동 기간
1960년 – 현재
사용 악기
기타, 보컬, 베이스 기타
장르
, 하드 록, 로큰롤, 블루스, 블루스 록,
레이블
EMI 레코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생애
4. 평가
4.1. 기타리스트로서
4.2. 작곡가로서
5. 사용 악기
6. 이미지
7. 여담



1. 개요[편집]



파일:키스 리처드.jpg

영국의 음악가.


2. 상세[편집]


Some musicians I know are incredible fathers. Like Keith Richards. A fantastic dad.

제가 알고 있는 몇몇 음악가들은 놀랄만큼 훌륭한 "아버지"들이에요. 키스 리처즈처럼요. 그는 환상적인 아버지에요.

잭 브루스[2]

키스 리처즈는 록 역사상 최고의 리듬 기타리스트를 꼽을 때 절대로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이다. 동시에 록 음악 기타리스트라는 포지션을 대표하는 인물들 중 하나. 기타 리프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역사상 최고라 평가받으며, 동시에 최초로 하드 록 기타 리프를 시도한 인물들 중 하나이자 리프 중심의 록 음악 시대를 연 기념비적인 인물이다.[3] 그가 연주한 전설적인 리프 연주와 리프들은 이후 록의 모든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음악적 업적 외로는 록 스타 특유의 거친 이미지를 구축한 것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2020년대 이후로는 간지나는 도사 할아버지 이미지이지만 1970년대에는 반항아 밴드인 롤링 스톤스를 넘어서 록 음악계를 대표하는[4] 엄청난 일탈과 성깔[5]로 유명했다. 특히나 일탈 행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70년대에는 갖가지 마약들을 건강에 무리가 갈 정도로 많이 했었다.[6] 이로 인해서 여러 대중매체에서 요절할 것 같은 록스타 순위에서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종종 1위로 꼽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순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 별 건강 문제 없이 정정한 생존왕이시다.[7] 1981년에 무대에 난입한 관중을 기타로 두들겨 팬 일이 있는데 그의 빡센 성격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장면일 것이다. 영상 이때 왜 두들겨 팼는 지에 대해 나중에 인터뷰한 내용은 그 관객이 드럼 키트를 부술까봐 그걸 막기 위해서였다고.[8][9]

3. 생애[편집]


1943년 12월 18일 영국 켄트 주 다트포드에서 태어났다. 친구이자 음악적 파트너인 믹 재거가 순탄한 성장기를 보낸 것에 비해 그의 성장기는 꽤나 암울했는데, 태생부터가 노동자 계급이였으며,[10] 그 시절 사람들이 다 그렇듯 공장을 다니던 키스의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완전히 녹초가 되어 돌아와 아들과 제대로 된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키스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친했지만 다행히 외가 쪽 식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가족관계 면에선 아버지와 약간의 갈등을 겪는 것을 제외하면 별 문제가 없었다.[11]

다만 태어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그 역시 전쟁의 화마에서 자유롭지 못해 신생아 시절엔 살던 동네가 독일군의 공습으로 쑥대밭이 되었고,[12] 유치원에 다닐 무렵 훗날 그와 평생을 함께 할 음악적 파트너인 믹 재거를 만나게 되지만 성장하면서 키스는 원래 살던 곳보다 가난한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 키스는 또래보다 작은 키와 커다란 귀때문에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고,[13] 불량배들에게 매일 구타를 당해 얼굴과 무릎에 멍을 달고 살았을 정도로 괴롭힘에 시달렸다. 학교가 끝나면 불량배들의 괴롭힘을 피해 자전거 페달을 필사적으로 밟았다고.[14] 교우 관계도 최악이였지만 진로도 불안했는데, 뭐라도 배울 수 있을까 싶어 테크니컬 스쿨에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공부를 놓아버렸고, 결국 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한다.[15] 그나마 그림에 소질이 있어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그가 다니던 예술 고등학교는 동네에 하나쯤은 있는 그저 그런 학교였다. 그야말로 가난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침울한 성장기를 보낸 것. 그러나 될 놈은 어떻게든 된다고, 18살이 되던 해인 1961년 다트포드 역 등굣길에서 어릴 적 친구였던 믹과 재회하게 된다. 그때 키스는 기타를 들고 있었고, 믹은 머디 워터스의 앨범을 들고 있었는데, 키스는 믹의 두꺼운 입술을 보고, 믹은 키스의 커다란 귀를 보고 서로를 알아봤다고 한다.

이후 키스는 브라이언 존스의 공고를 보고, 믹과 함께 롤링 스톤스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의 행적은 롤링 스톤스 문서 참고.


4. 평가[편집]



4.1. 기타리스트로서[편집]


그가 만든 리프와 리듬 연주는 록 기타에 전반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그가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불리는 이유는 대부분 솔로 파트가 아닌 리듬, 리프 연주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테크니션과는 거리가 멀며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지만 리듬 기타리스트 중에서 순위를 꼽으라고 하면 항상 최상단에 위치하는 기타리스트이다. 'Satisfaction' 등의 교과서격 리프들도 그에게서 나왔다.

무대에서의 기타 솔로는 단조롭고 여백을 즐기는 한량같다. 연주를 하다가 갑자기 왼손을 놔버리기도 하고 옆에 로니 우드에게 손짓으로 넘겨버리기도 한다. 나이가 들고 마약에 찌든 경력이 있어 예전만큼의 연주 실력은 나오지 않는다는게 대중의 주된 평가인데 2015년 라이브를 보면 이 할배가 빡집중하면 이렇게 기타를 칠 수 있구나라고 느껴진다.

키스는 현존하는 기타리스트 중 척 베리(Chuck Berry)식의 더블스탑 연주를 가장 맛깔스럽게 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기타 솔로도 가래떡 끊듯이 상당히 거칠어서 다른 기타리스트들과 오히려 이질감을 느낄 정도지만, 롤링 스톤스의 와일드한 무대에 찰떡궁합인걸 보면 그의 연주가 롤링 스톤스 그 자체를 상징한다 느껴진다.[16]

기타리스트로만 본다면,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조지 해리슨, 제프 벡,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미 헨드릭스 등 당대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많았기에 그냥 위대한 기타리스트 반열에 드는 정도이지만, 나머지들은 모두 기타 솔로를 위시로 한 리드 기타리스트들이었기 때문에, 리프를 위주로 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듬 기타리스트 순위에서는 자주 1위로 등극한다.(그 뒤로는 말콤 영, 에디 반 헤일런) 물론 솔로도 굉장한 실력을 뽐낸다. Gimme Shelter 등의 곡에서 키스 리처즈의 기타 솔로를 들어본다면 왜 키스 리처즈가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항상 꼽히는지 알 수 있다.80줄을 앞둔 그의 기타 솔로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꼽는 리스트에서도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 등과 함께 꼭 들어간다. 일렉 기타 연주법의 창시자나 다름 없는 지미 헨드릭스가 1위를 하는 것이 거의 관례가 되어있기 때문에 사실상 록 음악 최고의 기타리스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를 반영하듯이, 깁슨에서 꼽은 세계 50대 기타리스트에서 3위 자리를 차지했으며[17] 롤링 스톤이 선정한 100대 기타리스트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흔히 한국에서 거론하는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 제프 벡이 자주 들어가지만, 정작 매체나 기타리스트들의 투표 사이에서는 키스 리처즈가 제프 벡보다 더 높은 순위를 받는다.[18]


4.2. 작곡가로서[편집]


작곡가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재거-리처즈가 협업 체제이지만 가사 비중은 믹 재거가 더 높은 것처럼 작곡 비중은 본인이 더 높다. Exile on Main St.의 곡들은 믹 재거의 부재기간이 길어 대부분 그가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


5. 사용 악기[편집]


  • 하모니 메테오(Harmony Meteor, 1962 - 1964) : 키스 리처즈가 롤링 스톤즈 초기에 사용하던 기타로 1964년경 Les Paul을 구매하면서 버려진다.
  • 1959년형 깁슨 레스폴 스탠더드 (1964 - 1966) : 1966년 믹 테일러에게 줬다가, 1971년 7월에 프랑스에서 도둑이 훔쳐갔다.
  • 1961년형 에피폰 카지노(Epiphone Casino, 1964 - 1966) : 1966년까지 레스폴 스탠더드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다.
  • 1965년형 깁슨 파이어버드 VII(1960년대 중반) : 레스폴 스탠더드 다음으로 사용한 기타이다.
  • 1957년형 깁슨 레스폴 커스텀(1966 - 1971) : 레스폴 스탠더드 다음으로 사용한 기타로 사이키델릭한 디자인으로 도색했다. 1971년 말까지 곡을 녹음할때 사용되었지만 1971년 7월 1959년형 깁슨 레스폴 스탠더드와 함께 분실되었다.
  • 깁슨 ES-355s(1969) : 1969년 투어에서 사용되었다.
  • 깁슨 레스폴 주니어(1973 - )
  • 1953년형 펜더 텔레캐스터(1971 - ) : 레스폴을 버리고 텔레캐스터로 갈아탔으며 현재까지 사용한다.
  • 1954년형 펜더 텔레캐스터(1971 - )
  • 1967년형 펜더 텔레캐스터(1971 - ) : 투어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 1958년형 펜더 스트라토캐스터(1982 - ) : 투어에서 몇번 사용되었다.
  • 1975년형 펜더 텔레캐스터 커스텀( - 1986, 2005) : 1986년까지 무대에서 자주 사용되었다가, 2005년 다시 사용하였다.


6. 이미지[편집]



파일:키스 리차드 1964.jpg


파일:키스 리차드 1974.jpg

1964년의 모습
1974년의 모습

파일:키스 리차드 최근.jpg

최근의 모습
록스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다.[19] 젊은 시절에는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튼과 함께 음악계의 대표적인 약쟁이로 꼽혔는데, 당장 상기되어 있는 1964년과 1974년의 사진을 보면 시드 바렛[20]은 아니더라도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외모가 역변했다. 즉 마약이 10년만에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마약은 다른 록스타들처럼 나이를 먹어가며 끊었지만 아직도 담배는 무대 위에서도 엄청 피워댄다. 그런데 2020년 들어 금연에 성공한 듯. 2019년 10월 달부터 금연을 시도했는데, 그의 말로는 마약보다도 끊기 어려웠다고 한다. 현재는 젊은 시절에 엄청나게 했던 마약 때문에 주름이 많이 져서 자신보다 10살 가까이 많은 빌 와이먼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음악적 파트너이자 절친인 믹 재거가 팔순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세련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과는 대비되게 본인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도 있긴 하다.

절친이자 영원한 파트너 믹 재거가 여러 여자들과 스캔들을 뿌리는 반면 그는 여자 관계에 있어서는 나름 조용한 편이였다. 1983년에 결혼한 아내와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있다. 물론 그도 팔팔한 젊은 시절에는 그루피들을 끌고 다기는 했다. 본인의 말로는 공연 하는게 너무 힘들어서 그루피들과 관계를 가질 체력이 없다고.


7. 여담[편집]


  • 믹 재거와의 재거-리처즈 콤비는 레논-매카트니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하다.[21]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유치원 동창이었던 둘은 대학생 시절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 친해지게 되었다.

  • 믹 재거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키스 리처즈의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막장이 되었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키스 리처즈는 엄청나게 막장인 삶을 살아왔다. 위에 언급했듯이 1967년 브라이언 존스가 신경쇠약 및 마약 중독으로 병원에 잠시 입원했을 때를 틈타서 브라이언의 약혼녀 아니타 팔렌버그와 몰래 불륜을 저질러서 1968년 아니타를 임신시켰고 70년대에는 마약소지자로 검거되었다가 자선공연을 조건으로 풀려난 적도 있으며 심지어 무허가 총기를 차에 싣고 다니다가 걸린 적도 있다. 각종 마약과 술 담배에 중독된 탓에 예전과 비교하면 얼굴이 정말 많이 망가졌다.

  • 또한, 엄청난 독설가로 유명한데, 이 양반이 당최 좋아하는 후배, 동시대 뮤지션이 있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다른 뮤지션, 장르들에 대해 그야말로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록 음악 최고의 핵이빨을 꼽을때 존 레논, 존 라이든, 노엘 갤러거와 함께 결코 빠지지 않는 인물로 이 때문에 키스를 인간적으로는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키스는 자기네 보컬부터[22] 시작해서 비틀즈, 더 후 등 자신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뮤지션들은 물론,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 오아시스, 프린스, 메탈리카, 블랙 사바스 등 후덜덜한 음악력을 가진 후배 뮤지션들에게도 모조리 독설을 퍼붓는다. 실제로 롤링 스톤즈 멤버 중 키스의 독설을 피한 사람은 드러머 찰리 와츠밖에 없다. [23] 물론 칭찬을 해주는 후배 뮤지션들도 많지는 않지만 있다. 대표적으로 AC/DC.[24] 그리고 척 베리머디 워터스 같은 선배 로큰롤, 블루스 뮤지션들에게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또한 키스 리처즈는 존 레논 같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아닌지 'Wicked As It Seems'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화장을 받으면서 "X에다 백날 광칠해봤자 쓰잘 데 없다"고 자기디스를 하기도 했다.

  • 캐리비안의 해적의 주인공 잭 스패로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으며 3편4편에서 잭 스패로우의 아버지 역할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잭 스패로우의 배우인 조니 뎁과도 친한 사이인데, 처음엔 아들의 소개로 만났지만 뎁이 키스의 팬이였고, 그가 키스의 집에 자주 들락날락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키스는 뎁이 누군지 몰라 처음엔 마약상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뎁이 정확히 뭘 하는 사람인지는 묻지 않았다고. 그리고 2년 뒤에야 그가 가위손에 출연한 배우인걸 알았다고 한다.

  • 한창때는 아버지의 유골과 함께 코카인을 흡입한 적이 있다고 한다...라는 건 루머. 키스 역시 잘 알고 있는 루머이기에 자서전에서 해명했다. 그의 아버지의 장례식은 유골을 오크나무 위에 뿌리는 식으로 치뤄졌는데, 유골함을 열었을때 가루가 바람에 흩날려 테이블 위로 떨어졌고, 차마 아버지의 유골을 먼지 털어내듯 털어낼 수 없으니 손으로 훑어 살짝 들이마셔본 것이 앞서 말한 루머로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링크 이렇듯 활동한지 워낙 오래된 음악인인데다 록 뮤지션에 대한 편견 탓인지 말도 안되는 루머가 많다. 헤로인 중독 치료를 위해 온몸의 피를 새 피로 갈아치웠단 루머도 유명하다.

  •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한 모델이자 배우 아니타 팔렌버그(Anita Pallenberg)[25]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1983년 결혼한 모델 패티 헨슨(Patti Hansen) 사이에서 2녀를 두었다. 아니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번째 아이는 생후 10주만에 사망했는데, 슬프게도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에 부고를 접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무대에 올라야했는데, 어찌보면 매정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 당시에 롤링 스톤즈는 사흘간의 연일 공연 일정이 잡혀있었고, 갑자기 공연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였기에 그가 자리를 뜨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거기다 키스 본인이 훗날 말하길, 당장 무대에 오르지 않으면 총으로 자살해 버릴 것 같이 괴로웠다고.

  • 굉장히 빡세고 거칠은 현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어렸을 적엔 여리고 수줍음 많은 성격이였다고 한다. 통학버스를 놓치면 어쩔 줄 몰라하면서 어머니부터 찾았다고.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였던 모양. 다만 위에서 서술했던 험난한 성장기를 거치며 거칠고 냉소적인 성향이 생긴 듯 하다.

  • 염색약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굳게 믿는 듯 하다. 흰 머리를 감추는 용으로 꾸준히 염색을 하는 믹과 로니에게 염색약의 위험성을 열심히 설파한다고. 그런데 본인도 결국 2019년 5월 경 염색을 했다.

  • 치즈를 싫어한다. 치즈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정도로 싫어하는데, 이 인터뷰를 하면서 치즈를 먹은 사람들은 얼굴이 둥글어졌다는 식의 손짓을 하는 것으로 보아 치즈를 비만의 원인 쯤으로 여기고 싫어하는 모양.

  • 자서전에 레시피를 실어놓을 정도로 셰퍼드 파이를 좋아한다. 이와 관련해 1989년 경 멤버들이 자신의 몫을 남기지 않고 셰퍼드 파이를 다 먹었다는 이유로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일화와, 롤링 스톤즈의 서포트 밴드를 했던 스테레오포닉스의 드러머 스튜어트 케이블이 그의 셰퍼드 파이를 먹었다가 키스의 분노를 불러올 뻔했다는 일화가 있다. 후자의 경우 요리사가 파이를 원상복구 시키는 것에 성공해 아무 일 없이 넘어갔지만, 롤링 스톤즈 멤버들과 스테레오포닉스 멤버들이 당구를 치던 날 키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스튜어트에게 "네가 내 파이를 먹었지? 그렇지?" 라고 물었다.


  • 척 베리에게 얼굴을 맞은 적이 있다. 공연전 대기실에서 리처즈가 케이스에 놓인 베리의 기타를 보고 잠깐만 만져보겠다고 부탁했는데 베리가 걸어오더니 '아무도 내 기타에 손 못대' 라면서 냅다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고. 다만 얼굴 맞았던 일을 웃으면서 얘기한걸 보면 이 일로 둘의 사이가 나빠진건 아니고 일종의 해프닝으로 넘긴듯. 사실 이것 외에도 척 베리가 키스를 무대 밖으로 밀치는 등 여러 일화가 존재한다.[26] 하지만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척 베리를 헌액할 때 키스 리처즈가 사회를 봤을 정도로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각별했다.[27] 키스 리처즈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니... 그리고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는 전쟁터에 나가는 무기나 다름없기 때문에 분신과도 같은 기타에 타인이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기도 했다. 반대로 키스의 후배가 본인의 기타를 만져보게 해달라고 했더라도 빌려주거나 하기 어려웠을테니 이해하고 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래 보면 다른 경우이지만 조니 마노엘 갤러거의 사이에 있었던 일화에서 보듯 조니 마가 얼마나 대인배인지 알 수 있다.

  •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이 탈퇴했을때 그의 암살 계획을 짰다고 한다. 물론 농담. 2016년 성탄절에 향초를 보내는 등 여전히 교류하며 잘 지낸다고 한다.


  • 롤링스톤즈 초기 시절에 키스 리처드의 헤어 스타일이 영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펑크 록의 대모 패티 스미스도 키스 리처드의 헤어 스타일을 따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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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가끔 썼다. 그래서 롤링 스톤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중장년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키스 리처즈보다 "키스 리처드"나 "키스 리차드"라고 자주 불린다.[2]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유명한 에릭 클랩튼같이 밴드 활동을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키스 리처즈가 얼마나 대단한 음악가인지 알 수 있다.[3] 2021년 현재도 록 음악에서 리프가 중시되는 것을 보면, 록 음악에서 아직 그의 영향력은 건재하다고 볼 수 있다.[4] 범대중적으로 막장 이미지는 보컬이자 프론트맨인 믹 재거가 갖고 있다만 믹 재거는 어마어마한 걸 넘어서서 끔찍한 여성 편력으로 인한 비판이 지배적이고, 순수하게 마약과 일탈은 키스보다 더 적게 했다는 말이 많다.[5] 일탈은 멈췄지만, 독설은 멈추지 않으시며 특유의 성깔은 팔순을 바라보는 현재까지도 여전하시다.[6]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루 리드와 함께 영미권 음악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이 네 명은 요절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수준일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마약을 했으며, 특히 키스와 에릭, 지미는 같은 공수업자에게서 마약을 수급받아 셋이서 그루피들을 끼고 파티를 열어 다 같이 마약을 흡입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오히려 그 파티에 끼지 않았던 루 리드가 마약을 끊기 위해 술을 마시다가 간이 박살나서 2013년 결국 간질환으로 먼저 사망했다.[7] 오히려 밴드에서 굉장히 일탈을 덜 하기로 유명했던 찰리 와츠가 2021년 8월 24일 암으로 사망했다. 물론 찰리 와츠도 담배는 키스 못지않게 많이 피긴 했다만, 마약은 키스보다 훨씬 적게 하며 나름 건강관리를 했는데도.[8] 사실 관객이 무대에 난입하는 것은 관객의 잘못도 있지만 그것을 막지 못한 경호팀의 잘못도 크다. 만약 키스가 그 관객을 쫓기 위해 기타로 공격했을때 기타가 망가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9] 후에 자서전에서 '사람을 두들겨 패는 충격에도 끄떡없는 기타(심지어 조율된 상태 그대로)를 제작한 브랜드에 찬사를 보낸다'고 회고했다.[10] 흔히 비틀즈롤링 스톤즈를 대비시키며 비틀즈는 얌전한 척 하는 노동자 계급, 롤링 스톤즈는 양아치인 척 하는 중산층 계급이라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사실 롤링스톤즈에서 중산층 출신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역대 멤버 중 브라이언 존스믹 재거 두 사람밖에 없다. 믹 테일러나 찰리 와츠, 빌 와이먼은 노동자 계급 출신이였고, 로니 우드는 부모 세대부터 영국에 정착한 집시 가정 출신이기 때문에 그 역시도 중산층은 아니였을 것이다.[11] 아버지와는 1982년도에 화해했다고 한다.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를 만나며 긴장을 한 키스는 너무 떨려서 로니 우드를 같이 데려갈 정도였는데, 아버지와 만나자 마자 앙금이 바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같이 세계 투어에 동행하며 여행을 했다고 한다.[12] 이때 키스는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이웃집은 폭탄을 맞았다고한다. 말 그대로 태어남과 동시에 생사를 오간 격. 여담이지만 롤링스톤즈의 대표곡 중 하나인 Jumpin' Jack Flash엔 'I was born in a cross-fire hurricane'(나는 격전지의 폭풍 속에서 태어나-) 라는 가사가 있는데, 키스가 언제 독일군의 폭탄이 떨어질지 모를 상황에서 태어난걸 생각하면 이보다 절묘할 수가 없다.[13] 실제 키스의 키는 약 173cm. 젊은 시절에는 175cm였다는 말도 있다. 연예인들 중에서는 작은 키이고, 현재 영국 남성들의 평균 신장(약 175cm)엔 살짝 못미치지만, 그 당시엔 평범한 영국인 남성 평균 정도 되는 키였다. 현재 대한민국 남성 키 기준 173cm 정도라고 보면 된다. 오히려 동료 브라이언 존스가 168cm로 더 단신이다. 그러나 귀는 실제로도 큰 편.[14] 그가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도서관엔 자길 괴롭히는 불량배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키스의 장래희망은 사서였다.[15] 퇴학 사유는 교내 흡연. 키스는 10대때부터 흡연자였다.[16] 실제로 대부분의 록 밴드들이 보컬과 기타가 드럼의 박자를 따라가는 반면 롤링 스톤스는 리듬기타인 키스 리처드의 연주를 다른 멤버들이 따라간다고 리듬섹션의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이 얘기했다.[17] 이는 에릭 클랩튼보다도 높은 것이다. 다만 에릭 클랩튼이 펜더 스트랫 성애자(...)였던 점은 감안해야한다. 2위인 지미 페이지는 유명한 깁슨 레스폴 성애자고 키스 리처즈는 텔레케스터, 스트라토캐스터, 레스폴 세개를 골고루 사용한다.[18] 이는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는 리스트 자체가 1980년대 일본의 기자가 야드버즈라는 밴드에 훌륭한 기타리스트 3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 억지로 쓴 표현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미 헨드릭스가 안들어가있다는 점(...) 때문에 기타리스트나 록 리스너들은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는 표현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19] 이를 반영하듯 고릴라즈머독 니칼즈의 외형적 모티브는 젊었을 적의 키스 리처즈이다. 머독의 성격 역시 음악계를 휩쓸었던 전설적인 록스타들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데, 키스 역시 그 중 하나.[20] 1975년 시드 바렛이 기습적으로 애비 로드 스튜디오를 방문했으나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은 45분이나 지나서야 이사람이 시드 바렛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것도 어릴때부터 시드와 친했던 로저 워터스가 이목구비를 보고 간신히 알아내서야 다들 알게된 것이라고. 거기다가 대머리에 고도 비만이 되어버린(...) 시드 바렛에 비하면 키스 리처즈는 그나마 곱게 삭았다고 할 수 있다.[21] 다만, 레논-메카트니는 각자가 모두 작곡과 작사를 했지만, 재거-리처즈 콤비는 각 곡마다 역할을 분담해서 믹 재거가 주로 작사를 하고 키스 리차드가 주로 작곡을 하는 형식이었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 참고로 레논-매카트니는 비틀즈 초창기엔 각 곡을 공동작곡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1965년경부터는 각 곡들을 둘 중에 한 명이 작곡하고 크레딧만 레논-매카트니라고 공동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22] 대표적으로 80년대 들어 믹이 솔로 활동을 시작했을때와 기사작위를 받았을 때. 물론 80년대 재거-리처즈의 관계는 1970년대 초반의 레논-매카트니급으로 매우 험악했으니 서로 으르렁대는건 당연했다. 기사작위의 경우 청년기부터 높으신 분들을 싫어하며 공권력과 갈등을 겪었던 키스였기에 같이 갈등을 겪던 믹이 왕실(정작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믹을 싫어했다)이 주는 기사 작위를 받자 배신감이 들었던 모양. 그래놓고는 인터뷰에선 믹을 사랑한다, 밴드 활동을 결혼 생활로 비유하며 자기는 남편이고 믹은 아내이며 우리는 이혼할 수 없단 말도 많이 했다.[23] 그도 그럴게 찰리는 사생활이 문란하지도, 음악적으로 갈등을 겪지도, 성격이 맞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 오히려 개그 코드가 잘 맞는 절친이며 찰리가 후두암에 걸려 투병할 당시 '우리 밴드는 찰리가 드럼을 쳐줄 때 까지 간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존중하는 편이다.[24] AC/DC 같은 경우 고전 블루스와 로큰롤 스타일을 기반으로 하여 음악을 하기 때문에 기성 세대 로큰롤 뮤지션 및 팬들 역시 호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폴 매카트니 역시 AC/DC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롤링 스톤즈 전직 리더 브라이언 존스의 전 여친이다. 브라이언 존스 항목을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원래는 브라이언의 약혼녀였으나 1967년, 키스 리처즈가 NTR했다. 브라이언 존스는 NTR을 당한 충격으로 마약에 깊게 빠진 끝에 결국 1969년에 롤링 스톤즈에서 방출당했고 직후 자택의 풀장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사고사였는지 자살이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 다만 무조건 브라이언 존스를 동정하기도 힘든 것이, 아니타 팔렌버그가 키스 리처즈와 눈이 맞게 된건 브라이언 존스가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온 아니타에게 브라이언이 폭력을 자주 휘둘렀고 키스가 그런 아니타를 도와준데에서 시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1969년에 아니타와 키스의 첫 자녀인 말론이 태어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동거를 시작했지만 키스의 어머니와 아니타가 계속해서 불화를 겪은 끝에 1979년에 키스 리처즈가 아니타 팔렌버그를 차버렸다. 두 사람이 헤어진 사실은 1980년에 발표되었지만 아니타 팔렌버그가 훗날 1979년에 키스 리처즈에게 차였다고 밝혔다.[26] 척 베리로큰롤의 대부격인 인물이기 때문에 생전에 키스 리처즈를 포함한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존경을 받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척 베리가 음악적 영향력만 지대하고 그의 인품이 개차반이었다면 역시 한 성깔하는 성격의 키스 리처즈가 저 당시 에피소드를 언급하면서 기분 나빠했으면 나빠했지 웃으면서 회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