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노 카즈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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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와 시대 ]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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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모리야스 토시아키(2)
(森安敏明)
사쿠라이 켄
(桜井憲)
타카하시 요시마사
(高橋善正)
요시다 마코토
(吉田誠)
오오하시 유타카
(大橋穣)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카타오카 켄
(片岡建)
스기타 히사오
(杉田久雄)
요코야마 하루히사
(横山晴久)
니이미 사토시
(新美敏)
우카이 카츠오
(鵜飼克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스가노 미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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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히데키
(福島秀喜)
쿠로다 신지(6)
(黒田真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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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井邦彦)
타카시로 노부히로(1)
(高代延博)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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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田勇)
타카야마 이쿠오(1)(6)
(高山郁夫)
타나카 유키오
(田中幸雄)
타나카 토미오(2)
(田中富生)
시라이 카즈유키(1)
(白井一幸)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코노 히로후미(1)
(河野博文)
히로세 테츠로(1)
(広瀬哲朗)
니시자키 유키히로(1)
(西崎幸広)
타케다 카즈히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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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테루시(2)
(中島輝士)


[ 헤이세이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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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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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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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井光次郎)
스미요시 요시노리(1)
(住吉義則)
우에다 요시노리(1)
(上田佳範)
야마하라 카즈토시
(山原和敏)
세키네 히로유키(3)
(関根裕之)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카네무라 사토루
(金村曉)
나카무라 유타카(1)(3)
(中村豊)
야노 사토시
(矢野諭)
시즈미 아키오(3)
(清水章夫)
사네마츠 카즈나리(1)
(實松一成)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쇼다 이츠키
(正田樹)
이바 토모카즈(3)
(井場友和)
에지리 신타로(3)
(江尻慎太郎)
오자키 마사야
(尾崎匡哉)
이토이 요시오(3)
(糸井嘉男)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다르빗슈 유
(ダルビッシュ有)
양다이강(2)(4)
(陽岱鋼)
요시카와 미츠오(1)(4)
(吉川光夫)
나카타 쇼(2)(4)
(中田翔)
오노 쇼타
(大野奨太)
야기 토모야(5)
(八木智哉)
미야모토 켄(3)(5)
(宮本賢)
타다노 카즈히토(1)(5)
(多田野数人)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나카무라 마사루(1)
(中村勝)
사이토 유키(2)
(斎藤佑樹)
스가노 토모유키(2)(6)
(菅野智之)
오타니 쇼헤이
(大谷翔平)
와타나베 료(1)
(渡邉諒)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아리하라 코헤이(2)
(有原航平)
우에하라 켄타(1)
(上原健太)
호리 미즈키(1)
(堀瑞輝)
키요미야 코타로(2)
(清宮幸太郎)
요시다 코세이(1)
(吉田輝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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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카와노 류세이(1)
(河野竜生)
이토 히로미
(伊藤大海)
타츠 코타
(達孝太)
야자와 코타
(矢澤宏太)
호소노 하루키(1)(2)
(細野晴希)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추첨 성공.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SC08183_Kazuhito_Tadano.jpg

타다노 카즈히토
多田野数人

생년월일
1980년 4월 25일 (43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도쿄도 스미다구
학력
릿쿄대학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3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자유계약(MLB)
2007년 대학생ㆍ사회인 드래프트 1라운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NPB)[1]
소속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04~2005)
도쿠시마 인디고 삭스 (2006)[2]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08~2014)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 (2015~2018)
지도자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 투수코치 (2015~2018)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군 투수코치 (2022)
프런트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스카우터 (2018~2022)

1. 개요
2. 선수 생활
3. 플레이스타일
4.1. 시작
4.2. 의혹
4.2.1. 금전적 목적
4.2.2. 성적 취향
5.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의 전직 프로 야구 선수. 선수 생활보다는 후술할 게이 포르노 스캔들과 그로 인한 합성물 소스로 더 유명하다.


2. 선수 생활[편집]


릿쿄대학 시절에는 와세다대학와다 츠요시와 더불어 대학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던 선수였다. 하지만 부상 전력과 더불어 후술할 스캔들이 문제가 되면서 드래프트에서 당초 입단이 유력시되었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를 비롯해 어느 구단의 지명도 받지 못했다.[3] 그나마 그 재능을 안타까워했던 당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오 사다하루 감독이 지명을 고려했지만 윗선의 반대가 심해 결국 지명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타다노는 선수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단하고, 200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50.1이닝을 던지면서 1승 1패 평균자책점 4.65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1승이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리그 1승이었고 2005년 이후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트레이드 되지만 다시 메이저리그 진입에는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드래프트 1라운드로 입단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뛰게 된다.[4][5]

201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 경기에서 오심으로 퇴장당했다. 정확히는 타자인 카토 켄[6]의 헐리우드 액션.[7] 이 오심의 도움으로 요미우리가 다소 석연치 않게 일본시리즈를 우승했는데, 이 이후 센트럴리그 팀이 도대체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하고 있다.

2014년 10월 1일부로 닛폰햄에서 나오게 되었고, 2015년부터 독립리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의 플레잉 코치로 뛰게 된다. 프로 입단이나 재기를 노리는 독립리그 선수들을 상대로 인생의 실패를 논하면서 자신도 큰 실패를 겪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동영상이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러모로 강한 멘탈의 소유자.

그의 구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4M나 될 정도로 높이 던지는 이퓨스볼. 39km를 찍기도 했다. 스피드건에도 찍히지 않는 초 슬로우볼이라고 악명이 높다. 2014년에도 엄청난 높이의 이퓨스를 선보이며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2018년 3월 1일 이시카와를 퇴단하며 공식으로 은퇴식을 가졌고, 친정 닛폰햄에 전력분석원으로 합류해 프런트로 일하고 있다. 2022년부터는 2군 투수코치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2023년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3. 플레이스타일[편집]


위의 이퓨스볼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 변칙파로 똘똘 뭉친 선수.

대학 재학 시절까지만 해도 150km씩 나오는 정통파 강속구 투수였으나, 프로에 입단하며 플레이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다. 특히 마이너리그 시절 미국에서 디셉션을 제대로 배워서 왔는데 상반신 중에서도 거의 어깨만을 이용하는 듯한, 투구라기보단 야수가 송구하는 듯한 돌팔매스러운 투구폼을 지녔다. 이는 딱딱해서 주로 상체 위주로 던지게 되는 미국 마운드 환경의 특성에 적응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몸이 먼저 돌고 한번 딱 굳은 뒤 나중에 팔이 돌아서 공이 릴리즈되기 직전까지 손이 보이지 않는 매우 좋은 디셉션. 이렇게 되면 정말 구종을 뭘 던질지 읽을 수가 없는데 심지어 던질 줄 아는 구종도 많다.

거기에 일본투수들은 주로 패스트볼 - 포크볼의 낙차 로케이션 이지선다를 거는 편인데, 타다노는 슬라이더와 더불어 서클 체인지업을 통한 구속 이지선다를 주 무기로 삼았다. 그렇다고 포크볼도 못 던지는것도 아니어서 포크볼도 그의 주 무기 중 하나였다.

보통 일본야구는 공 끝이 깨끗하지만 존 구석구석으로 송곳같이 컨트롤되는 패스트볼을 이상으로 여기는데, 미국은 반대로 무빙이 있는 공을 좋아한다. 일본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면 교정을 받았을 테지만 미국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덕에 공 끝이 지저분한 편이었고 이로 인해 삼진보다는 무브먼트가 좋은 패스트볼과 서클 체인지업을 통한 맞춰잡기가 그의 특기였다.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강속구 투수였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입은 손목 부상, 또 독립리그와 백수로 놀면서 공의 위력을 많이 잃었고 구속을 10km이나 잃어 일본 복귀 후에는 140㎞까지 구속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이런 느린 볼로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공 끝이 지저분하며 다양한 변화구와 변칙적인 투구폼으로 승부하는 꾀돌이형 투수였기 때문.

위력적이지 않은 볼을 던지지만 투구폼을 통한 구종 이지선다와 또 이어지는 구속 이지선다를 통한 야바위로 타자를 잡아내는, 배팅은 타이밍이고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라는 격언에 충실했던 투수.

181/80의 체격은 투수로서는 언더사이즈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파워 피칭이 힘든 체격이라, 대학 시절의 기억을 살려 정통파로 육성되었다면 대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스캔들 때문에 미국에 간 것이 허송세월도 하며 그를 큰 투수가 되지 못하게 했지만, 반대로 미국 스타일의 철저한 변칙파 투구를 익혀 가늘지만 오래 살아남는 투수는 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아이러니한 부분.

4. 게이 포르노 스캔들[편집]



4.1. 시작[편집]


파일:TDN 잡지 01.jpg
파일:TDN 잡지 02.jpg

이번 가을 드래프트 1위로 뽑혔던 그 대학생 에이스가 '호모 비디오'에 출연.

슈칸겐다이(週刊現代) 2002년 11월 9일 발행본


2002년 여름 경에 2ch에서 타다노와 매우 닮은 사람이 등장하는 COAT사의 게이 포르노한여름 밤의 음몽이 있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고, 곧 타다노 본인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드래프트 지명이 불가능하게 될 만큼 큰 스캔들로 발전하였다.[8] 정확히는 코트 사와 비디오 소매점인 루미에르 사이의 분쟁인 코트-루미에르 전쟁(COATルミエール戦争)으로 여러 출연자들의 신상 및 출연 사실이 까발려졌는데 일본의 슈칸겐다이(週刊現代) 잡지가 이걸 물고 타다노의 모교인 릿쿄대학의 야구부 감독에게 물어본 것. 그리고 이 감독이 타다노, DB, HTN의 실명 및 출연 사실을 친절히 인증함에 따라 그간 명예훼손으로 역공을 당할까봐 두려워한 찌라시들도 이 사실을 포착하게 돼서 공론화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2ch나 니코니코 동화에서는 TDN으로 불리면서 놀림감이 되고 있다. 한여름 밤의 음몽TDN을 참고.[9]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면서 이 사건이 미국에도 알려지게 되는데, 미국에서 현역 스포츠 선수의 동성애는 꽤나 민감한 문제였던지라 제법 이슈가 되었다. 당시 타다노는 현지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게이가 아니며, 해당 비디오를 찍은 것은 단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이에 대해서 매우 후회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이때 했던 해명인 "그 때는 젊었고 돈이 필요했다" (当時は若くお金が必要でした)가 명언이 되어[10] 빈번히 사용되는 중이다.

당시 인터뷰로 해명한 내용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大学時代に(そのような)ビデオに出たことがあり、今はとても後悔しています。当時は若くお金が必要でした。たった一度の過ちであり二度と同じ間違いはしません。僕はゲイではありません。これだけははっきりと真実を伝えたかった。

대학 시절에 (그런) 비디오에 나온 적이 있었고, 지금은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당시엔 젊었고, 돈이 필요했습니다. 단 한 번의 과오였고,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진 않을 것입니다. 저는 게이가 아닙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진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젊은 시절 돈 부분이나 이것만은 진실~ 부분은 특히 드립으로 곧잘 쓰이는 편이다.

4.2. 의혹[편집]



4.2.1. 금전적 목적[편집]


다만, 저 돈이 부족했다는 해명에 대해서는 말이 오가는데, 당시의 일본 프로야구계에서는 드래프트 유망주를 스카우트가 관리하면서 영양관리비라는 명목으로 뒷돈을 찔러주던게 일상다반사였고[11], 비록 부상이 있었다지만 프로 구단 지명도 확실했던 타다노도 그런 명목으로 돈을 받았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본인이 굉장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돈이 부족할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타다노는 릿쿄대학 시절 와세다대학와다 츠요시의 라이벌이자 드래프트 때 와다와 함께 투톱이라 영양관리비나 탬퍼링을 못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당시에는 역지명 제도가 있어서 구단들이 유망주 확보에 열을 올리던터라 뒷돈은 거의 일상다반사인 시절이라 절대 돈이 부족할 수는 없었다.

또한 타다노는 부모가 도쿄에서 큰 부동산 업체를 운영하는 등, 딱히 금전적으로 부족하지는 않을테니 정말로 게이 포르노 비디오에 출연해야 할 처지였는지는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게이 포르노 출연이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력훈련 때문에 아르바이트에 할애할 시간이 부족한 체대생들이 암암리에 몰래 했었던 아르바이트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신빙성이 아예 없었던 해명은 아니다. 프로 구단으로부터 입단을 약속받는 뒷돈을 받았어도 정말로 갖고 싶은게 많아서 씀씀이가 컸거나 아니면 집안일같은 다른 이유로 돈이 더 필요했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돈이 들어가는 일은 많으니까 말이다. 결국 진실은 타다노 본인만이 알 것이다.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타다노가 한여름 밤의 음몽을 촬영한 후 받은 출연료가 20만엔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럼 30분에 5만이니까 2시간 촬영한 것이다?

4.2.2. 성적 취향[편집]


한편 정말로 타다노가 게이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있다. 해당 폭로 기사에서는 타다노가 후배 야구부원들을 성추행했다는 내용도 있었고, 2ch 스레에

そのうちプロになるであろう立教の多田野、高校時代彼氏がいたらしい。

조만간 프로가 될 릿쿄의 타다노,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친구가 있었대.


라는 글이 남겨지는 등 의혹이 있었다는 점. 또한, 릿쿄대 야구부 감독이 영상의 출연 인물이 타다노가 맞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스승으로써 감싸기 보다는 타다노임을 인증하며 동시에 DB, HTN의 이름을 묻지 않았는데 친절히 인정하여 더욱 의혹에 불을 붙였다. 또한 타다노가 2023년 기준 43세가 될 때까지 여자 관련한 스캔들 혹은 열애설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정황도 이런 의심을 더했다.

결정적으로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야쿠자 협박! 체육부원들의 역습(極道脅迫!体育部員たちの逆襲)편에서 등 떠밀려 돈을 위해 출연하는 모습과 달리 OUT STAFF 19 Stilish BODY 元祖羞聡心編에서는 연기라기엔 그 웃는 얼굴과 태도가 너무나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아서 저런 연기를 배우도 아닌 논케가 할 수 있는가 하는 점 등이 아직까지 의혹으로 남은 것. 이것 역시 진실은 본인의 영역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라고 한 것과 달리 실제론 또 한 편을 찍은 것이 알려져 허위임이 드러났다. 물론 당시 게이 비디오 활동을 하던 당시를 뭉뚱그려 한 번이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고, 단순히 한번 입금으로 2편을 찍기로 계약서를 작성했을 수도 있다.

5. 여담[편집]


저 스캔들로 인해서 화제가 상당했던 선수였고, 선수로서 메이저리그를 밟아보기도 했고 나름 닛폰햄에서도 몇 년 정도는 주전으로 뛰었기에 일본에서도 인지도가 상당한 선수라 타다노가 진짜 게이인지 아닌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아 타다노의 결혼 여부에 관심을 가지는 팬들이 많다. 연관검색어에 타다노 카즈히토 결혼이 뜰 정도. 심지어 아직까지도 인터넷에 가장 먼저 뜨는 연관검색어가 TDN, 한여름 밤의 음몽, 호모 비디오(...)였다.

2023년 기준 나이 43세인데 타다노가 아직도 독신이고 여자 관련 스캔들이 난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진짜 게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뭐... 저런 비디오가 전국에 퍼진 사람이니 아무리 부자라도 어지간히 이해심이 넓은 여자가 아니면 만나기 힘들긴 하겠지만... 여자 AV배우들도 어떻게든 결혼은 하는 거 보면 결혼을 미치도록 하고 싶은데 못하는건 아닐 것으로 보인다[12] 여담으로 野球選手 ホモビデオ(야구선수 호모비디오)라고 구글에서 검색하면 그냥 대놓고 타다노 카즈히토의 사진과 프로필이(...) 나온다.

이후 타다노처럼 오피셜로 드러난 것은 아니긴 하나 테라시마 칸다이(前 롯데), 아즈마 카츠키, 사노 케이타(요코하마) 등 게이 비디오 출연 의혹을 받는 선수들이 몇 명 더 생겨나기도 했다. 본인이 입을 다무는 한 증거도 없고, 사실일지라도 성인이 성인 비디오에 출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생활인데다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쉬쉬하는 편이다.[13] 타다노는 나름 유명한 운동선수가 그때 그 시절 일반인들은 저런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정말 음지의 문화였던 게이 비디오에 출연했던 것이 밝혀진 사례가 최초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 후로 10년~20년 정도가 지난 지금은 성 소수자라는 것이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알려져서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인식은 하게 되었고, 시민 의식의 발달로 성인 비디오 출연이 쪽팔리는 아르바이트이긴 해도 어쨌든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개인의 사생활으로 여기게 되어 대놓고 밝힐 수는 없더라도 그냥 쉬쉬하면서 지나가게 되었다. 어찌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선수다.

다만, 출연한 두 번째 비디오인 OUT STAFF 19 Stilish BODY 元祖羞聡心編에서 DB, HTN과 함께 미식축구를 한다고 거짓말한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일본 미식축구계에서 발끈하기도 했다. 다만 이유는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성인 비디오를 찍었다면 직장내에서 평판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보통 일반인도 몸을 팔 때 본래 직장에는 알려지지 않도록 가짜 프로필을 사용한다. 하물며 야구는 타다노의 본업이고, 심지어 신문에 이름까지 실린 유망주였기 때문에 실제로 이 일이 알려지고 드래프트 미지명으로 반강제로 마이너리그 진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해가 안 가는 거짓말도 아니다. 굳이 미식축구였던 이유는 미식축구나 럭비 같은 풋볼류 스포츠는 특히 게이들이 선망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일반인 남자들이 간호사나 패션모델이나 스튜어디스 여성에 환상이 있는 것처럼, 게이들은 미식축구나 레슬링 같은 근육질 거한들이 격렬히 몸싸움을 하는 마초적인 스포츠 선수에게 환상이 있다. 괜히 가치무치 팬티 레슬링(붕탁)같은 영상 장르가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것보다는 그냥 대본에 미식축구라고 써놓아서 그렇게 읽었을 확률이 높겠지만..

그리고, 타다노는 야구선수로서도 상당히 재능이 있었던 선수였다. 마이너리그를 1년만에 졸업했는데, 일반적인 미국 드래프티보다 2살 많았던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꽤 빠르게 졸업한 것이다. 이후 1년이나마 MLB에서 그럭저럭한 패전조 정도의 성적을 내고 풀 시즌을 보낸 적도 있다.

이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했을 때는 마이너 퇴단 이후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고, 긴 실전공백과 이미 적지 않은 나이, 1라운드 지명에 거액의 연봉까지 줬음에도[14] 부상 등으로 인해 결국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지 못하면서 닛폰햄 측에서는 그를 코어 자원으로 분류하지 않고 선발과 불펜을 와리가리시키며 소모품으로 사용했었지만[15] 결국 선수 생활 말년에는 활약이 미미한 선수로 남고 말았다. 그럼에도 평균 정도는 되는 성적을 보여주었고 불명예 은퇴도 없이 나름대로 야구선수로서 커리어를 완주했고 제대로 된 은퇴 경기까지 가졌으니 대단하기는 하지만...

위의 스캔들이 없었더라면 일본프로야구에 정상적으로 입단해 훨씬 더 대성할 수도 있었던 선수였다. 한창 선발 수업을 받으면서 성장했어야 할 때에 메이저리그에서 불펜 패전조로 도는 바람에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하지 못했고, 미국 퇴단 후에는 최전성기 2년을 독립리그에서 1년, 그냥 백수로 1년을 보내는 허송세월을 하면서 기대만큼 큰 선수가 되지 못했다. 당장 동기생이자 비슷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던 와다 츠요시가 일본프로야구에서 레전드급 대선수가 된 것을 생각한다면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사람의 인생을 크게 망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만 하다.

밈으로 자리잡은 후에는 2015년 니코동 생방송에 출연해 음몽 드립에 사용되는 것이 불쾌하지 않냐는 질문에 대범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2017년 트레이닝 조언 영상에선 코치로서 선수들에게 "실수(실패)가 나오는 건 당연한 것" 이라는 조언으로 운을 떼더니 "이 중 제일 큰 실수한 건 날테니까" 라는 자학드립까지 치기도 하는 등 일종의 해탈한 상태를 보여져서 여론이 좋아졌다. 사실 음몽이 너무 흥했고 널리 퍼진데다가 이제와서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마음을 놔 버린 듯 하다.[16] 이미지와 커리어를 망쳤다는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쨌든 대중들 앞에서 사죄와 입장표명을 끝내면서 홀가분해진데다가 스포츠 스타 출신인 만큼 사는데 크게 걸림돌이 되진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개인의 사생활이 지저분한 선수도 아니었다.

다만 타다노는 그렇다 쳐도, 같은 비디오에 출연한 배우들도 평생 인터넷 네타의 조리돌림감이 되었고, 야구나 호모비와는 별 상관 없는 아마추어 성우들까지 엮이는 비극이 발생한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태의 시발점인 타다노는 다 털어냈는데 정작 이들은 호모비디오나 보이스드라마의 주역으로 나온 죄로 일반인 신분으로 음몽민과의 공존 or 영원한 괴롭힘이라는 잔혹한 이지선다에 놓이게 된 것. 그나마 전업으로 한 것도 아니고 이성애자면서 잠시 돈을 벌려고 찍은 배우도 껴 있었던 걸 생각하면, 하필이면 딱 그 시기에 같이 찍은 동업자가 유명 야구선수가 되고 걸리는 바람에 자기들까지 평생 인생이 꼬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타다노 본인도 호모 비디오에 한 번 실수로 출연한 후폭풍이 그렇게까지 커질 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원망스러울 만한 상황이다. 배우들 중에서는 크게 개의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거나 같이 음몽 밈을 사용하며 즐기는 소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리 달가울 리가 없다. 야수선배는 극 중에선 악랄하지만 결국 대본대로 촬영에 임한 배우일 뿐이었다. 타쿠야 씨(KBTIT)는 업소 일을 오래 하며 심신도 피폐해 진듯한데 그런 심경이 묻어나온 괴문서나 가치호모들이 자신을 신랄하게 혹평한 게시글까지 밈으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히데는 학대 아저씨와의 SM에서 무개념한 모습을 많이 보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집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대학생스런 면모도 가지고 있었고, 그대로 묻혔다면 젊은 날의 흑역사 정도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 발굴되는 바람에 끊임없이 영상이 재생되며 욕을 먹고 있다.

이들은 가장 대표적인 3인방이긴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타다노 본인보다도 소재로 훨씬 많이 사용된다. 사실상 그들은 세계적인 인터넷 밈으로 소비되면서 영원히 잊힐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이 평생 넷상의 웃음거리 또는 ‘호모 비디오에 출연한 것 만으로 ~~되는 사나이’는 야수선배의 이명이 되었다. 음몽 자체가 완전히 엄금되거나 니코동이 망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이런 신세는 계속될 것이고,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이미 얼굴이 워낙 알려져서 눈에 띄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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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번째 1라운드 지명.[2] 일본 독립야구리그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소속 구단.[3] 심지어 타다노를 추천한 요코하마의 스카우터는 짤렸다.[4] 말이 1라운드지 대학생, 사회인과 고졸을 따로 뽑던 시기였고, 이 해의 고졸 1라운더는 나카타 쇼였기 때문에 타다노는 최고 코어픽은 아녔다. 거기다가 애초에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에서도 닛폰햄은 처음에 타다노가 아니라 대졸 투수 최대어이자 헤이세이의 철완이라는 별명을 갖고있었던 투수 오바 쇼타를 뽑았고, 오바가 6구단 중복지명이라 소프트뱅크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두번째로는 일본 사회인야구 최고의 좌완투수이자 전국대회 3경기에서 완투승을 거두었으며 도하 참사 당시 일본 야구대표팀 멤버 핫토리 야스타카라는 대졸사회인 좌완투수를 뽑았다. 근데 이 핫토리마저 롯데에게 빼앗기면서 3번째 하즈레로 타다노를 지명한 것. 여담으로 오바는 타다노랑 거의 똑같은 성적을 거두면서 실패, 핫토리는 원포인트로 딱 한 해 밥값하고 다른 해에는 1군에 거의 나오지도 못하면서 셋 중 가장 실패. 결국 셋 다 프로에선 빛을 발하지 못했다.[5] 이 해 대졸사회인 드래프트가 가뭄인것도 있던게 당시 대졸 최대어 3인방이었던 오바 쇼타, 하세베 코헤이, 카토 미키노리 등이 프로에서 싹 다 망했다. 이때 대졸사회인 드래프트 1라운드로 6구단이 오바를, 5구단이 하세베를, 둘 다 안 뽑은 야쿠르트가 카토를 뽑했는데 오바>하세베>카토 순의 성적을 냈다. 이때 오바의 성적이 타다노랑 별 차이가 없었으니 다른 둘은... 그리고 첫 번째 하즈레에서 시노다 쥰페이와 핫토리 야스타카가 각각 3구단 중복지명을 받았는데, 이 둘도 폭망했다. 또 다른 하즈레인 시로니타 히로카즈와 코바야시 후토시, 야마우치 소마도 타다노보다 성적이 안좋았으며 3번째 하즈레였던 무라타 토오루, 히라노 마사미츠, 코바야시 켄지도 제대로 망했다. 신기한 것은 이 12명의 대졸사회인 드래프트 1라운더들이 전부 투수였다는 것. 그리고 닛폰햄에서 뛰고 있는 무라타 토오루를 제외하면 2020년 기준 전부 은퇴했다. 당시 대졸 선수들은 1985년생, 일반적인 테크를 탄 대졸사회인 선수들은 83년생인 것과 이들이 전부 1라운더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늘고 길게 가지도 못한 셈. 그 무라타도 지명된 요미우리에서는 1군 기록 없이 빠르게 방출당했고 6년동안 마이너리그를 떠돌면서 메이저리그에 딱 1경기 출장했다가 3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닛폰햄에 입단하면서 사실상 늦깍이 중고신인으로 복귀한 것이다. 복귀해서도 6선발과 패전처리, 2군을 오가면서 타다노의 테크를 그대로 타고있고. 다만 하위픽에서는 미야니시 나오키, 쿠와바라 켄타로, 이토 요시히로 등의 중간계투들과 도루왕까지 차지했던 외야수 히지리사와 료 등 그럭저럭 성공한 선수들이 있었다.이토랑 히지리사와는 전성기가 빨리 끝났고 쿠와하라는 가늘고 길게 뛰다가 30대 다 지나서 뒤늦게 전성기가 온거라 꾸준히 잘한건 미야니시뿐이다[6]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었던 포수. 17년 동안 프로 생활을 했지만 통산 200경기도 나오지 못한 만년 백업포수였다. 2016년 시즌 이후 은퇴.[7] 동영상이 날아간 관계로 글로 설명하면, 당시 던진 공이 포수 미트에 맞고 튄 것을 타자가 마치 얼굴에 맞은 것처럼 연기하는 바람에 심판이 감쪽같이 속아서 몸에 맞는 공을 선언한 것.[8] 비디오 출연은 타다노가 대학교 2학년인 2000년에 했다.[9] 한국에서도 유명한 반 다크홈도 일본에서 TDN이라고 불리는데 바로 타다노 카즈히토의 TDN에서 따왔다. 복장 때문에 TDN코스기라고 불린다.[10] "I was young, playing baseball, and going to college, and my teammates and I needed money," [11] 이 영양관리비는 2004년 메이지대학의 에이스로 활약하던 이치바 야스히로에게 과다한 뒷돈을 챙겨줫다 걸려 관련자가 사퇴한 이치바 사건으로 공식적으로 금지는 먹었는데 타다노가 일본에 복귀한 2007년에도, 키무라 유타라는 선수가 영양관리비를 받아먹은 것이 걸려서 1년 출전정지를 먹을 정도로 영양관리비의 역사는 유구했다. 애초부터 전후에 정말로 유망주들이 밥을 사먹을 돈이 없었던 시절부터 내려왔던 문화이다보니... 결국 2007년 드래프트 이후 희망입단제도가 폐지되었다.[12] 타다노는 일본프로야구에서 7년간 2억엔 정도를 벌었고, 메이저리그에서는 2년 간 62만 달러 정도를 벌었다. 대충 한화로 30억 가까이 벌었다는 셈이다. 그래서 세금을 다 내도 야구선수로 뛰면서 연간 1~2억원 정도는 손에 넣었을 것이다.[13] 여담으로 사노의 경우는 구단 직원이 대놓고 "저거 사노 아니야?" 할 정도였고, 테라시마의 경우는 게이 비디오 출연과 상관없이 너무 실력이 없어서 빠른 방출을 당한 케이스였다.[14] 드래프트 지명 당시 1년차 신인 선수들의 연봉을 최대 1천 5백만엔까지 주는 것으로 각 구단끼리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음에도 규정상 금지가 아니라면서 그 두 배인 3천만엔을 첫 해 연봉으로 줬었다.[15] 3년차까지는 기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년차 때 부상으로 1시즌을 거의 통째로 날리자 전력외통고까지 했다가 뒤늦게 재계약을 했다. 이때부터 구단에서는 그냥 돌려막기용 선수로 분류한 듯. 선술했듯 이전까지는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돌리면서 나름 기회를 받았다.[16] 1:1로 비교는 무리지만 심영 역을 한 김영인 씨가 심영물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자 칭송하는 분위기가 됐던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