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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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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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대 국왕
태조 | 太祖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32304247a010a011.jpg
현릉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 청동상
출생
877년 1월 31일
신라 패강진 송악군 사찬 용건의 사저
(現 경기도 개성시 수창동)
즉위
918년 7월 25일
태봉 철원성 포정전
(現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사망
943년 7월 4일 (향년 66세)
고려 개경 개주 정궁 신덕전
(現 경기도 개성시 수챵동)
능묘
현릉(顯陵)
재위기간
고려 초대 국왕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 (24년 35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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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건(建)
부모
부왕 세조
모후 위숙왕후
형제자매
외아들
왕후
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왕후
신정왕후, 신성왕후, 정덕왕후
자녀
25남 10녀[1]
종교
불교
신체
84.7cm(앉은 키)[2]

약천(若天)
묘호
태조(太祖)
별호
성조(聖祖) / 열조(烈祖) / 용조(龍祖) / 황조(皇祖)
태왕(太王) / 조왕(祖王)[3]
시호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용열인용장효대정광열원명신성대왕
(勇烈仁勇章孝大定光烈元明神聖大王)[4]
연호
천수(天授, 918년 ~ 933년)



파일:고려 태조 친필.jpg

태조의 추정 친필 글씨[1]
1. 개요
3. 묘호 및 시호
4. 어진
5. 업적
5.1. 능력
5.2. 외교 정책
8. 기타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태조 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요하(遼河)와 패수(浿水)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환영]를 통일하셨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짐도 역시 단지 평범한 데서 시작하여 착오가 있었는 지 추대를 받아,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근심으로 몸을 애태운 지 19년[2]

만에 삼한을 통일했다. 외람되게도 큰 보물을 차지한 지 25년이 되니 몸은 이미 늙었도다. 다만 후손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릴까 두렵구나. 이에 「훈요」를 지어 후대에 전하노니 아침에 펼쳐서 저녁까지 두루 보아 길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훈요 10조> 머리말


고려를 건국한 고려왕조창업군주이며 수많은 호족들이 난립하던 신라 말의 난세를 평정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한 고려의 초대 대왕이자 해동천자이다.

고구려 유민 출신[3]으로, 준수한 용병술[4]과 뛰어난 용인술을 바탕으로 좌우 신하들과 사방의 세력가들을 노련하게 휘어잡은 성군이며 숙명의 라이벌이자 당대의 명장으로 이름났던 견훤[5]을 제압하고 삼한일통을 이룩한 최후의 승자다. 한국사 군주들 중 손에 꼽을만한 너그러운 임금이었다.[6]

신라 제30대 문무왕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사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지도자이다.[7] 일각에서는 신라 통일의 불완전성을 문제 삼아 고려가 한반도의 첫 통일 왕조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고려 역시 신라가 놓쳤던 당시 발해의 전 영역을 완전하게 통합하지는 못하였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신라가 통일한 영역 안에서 나뉘었던 땅을 재통일한 후 북방의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삼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통일의 개념을 '한반도'의 통일로 상정한다면 신라의 통일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서는 신라와 고려 양국의 통일 의식이 그 통합의 대상을 두고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부터 확실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8]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남당서 권18, 고려》

고구려 유민 계열(패서 호족)이 주축이 되어 삼한은 물론 발해 및 여진과 탐라까지 적극적으로 포용했던 고려와 달리, 신라는 백제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조차 완전히 녹여내지는 못했으므로 지리적 통일은 성공했을지라도 민족적 융화에 실패했다. 따라서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은 발해 지배 계층과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여진·탐라 등 다양한 종족을 흡수하여 개방적인 세계관을 지향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후손이란 집단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던 초기 고려인들은 북진 정책을 활발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대제국 거란과의 26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까지 감수하는가 하면, 대규모의 원정군을 일으켜 여진이 부분적으로 점유하던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실질적 노력을 상당히 기울였다.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고려의 고토 회복 시도는 이어졌다. 따라서 고구려 시대와 달리 중세시대에 들어 유례없이 강대해진 북방 민족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밀어붙일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9] 고려가 신라와 같이 한반도 남부에 국한된 삼한통일을 꾀했다는 식의 해석은 오류이다. 고려의 삼한통일은 신라의 삼한통일과 달리 고구려 시절의 판도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확고했음에도 여건 상 한계에 봉착한 것에 가깝다.[10]

즉 한반도 남부의 해양무역 루트 지배에 주력하던 신라 왕조의 성향과 달리 만주와 요동을 고토로 여기는 성향은 고려의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왕건과 고려 건국세력의 직계 조상이었던 고구려가, 최초로 삼한을 통일했던 신라와 대등한 수준의 메인 스트림으로 한국사에 자리잡는데 있어 고려 왕조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백제 지못미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조(고려)/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77년 송악군[11]에서 고구려 계통의 패서 호족 가운데 하나로서 예성강 유역의 해상 무역 활동으로 성장했던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다.[12] 896년에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했을 때 함께 들어오고 후고구려태봉을 세운 궁예의 장수로서 후백제의 해상 요충지였던 나주를 점령하고 나주 호족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후백제는 이후 전략적으로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고, 태봉의 영토는 대폭 넓어졌으며, 왕건은 수많은 전장에서 눈부신 공로를 세웠다. 궁예와 호형호제를 허락받았으며 913년, 37세의 나이에 2인자로서 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등 궁예의 총애를 받았으나 918년 궁예가 폭정으로 인심을 잃자,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이 왕건을 임금으로 추대한다. 역성혁명으로 궁예를 축출하여 태봉을 멸망시키고 제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 고려(高麗)를 건국하게 되며, 연호를 천수(天授)로 정한다. 이듬해 철원에서 가문의 텃밭이었던 송악(개경)으로 천도했다. 조세율을 감면하고 흑창을 설치하거나 신라에 우호적 제스처를 취하는 등 취민유도(取民有度), 중폐비사(重幣卑辭)라는 키워드로 일컬어지는 유화 정책으로 민심을 얻으려 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자웅을 계속 겨뤘고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시키자 직접 신라를 지원하려 하다 공산 전투에서 대패, 신숭겸의 희생으로 구사일생하기도 했으나, 고창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뒤 장남 견신검의 반란으로 쫓겨난 견훤이 고려로 귀순하고 신라에서는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통일 대업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936년 견훤과 함께 후삼국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해 후백제를 병탄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한다. 같은 해 예절에 대해 저술한 <정계> 1권과 백관을 대상으로 한 교훈서 <계백료서> 8편을 반포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신라는 경주 중심의 골품제를 유지하며 고구려백제의 지배층을 동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왕건은 신라의 골품제를 혁파하고 이들을 결속했다.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기에 발해 멸망 후 내려온 발해유민들도 받아준다. 재위기간 불교유교, 풍수지리 등을 국시로 고루 숭상했고 지방 호족을 포섭하거나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폈으며 수도는 개경이었으나 고구려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고 서쪽으로 안주에서 동쪽으로 영흥까지 약간의 북진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통일을 이룩한 지 7년 만인 943년 재위 25년 만에 훈요 10조를 남기고 신덕전에서 66세로 붕어했다.


3. 묘호 및 시호[편집]


공식 묘호태조(太祖)[13]이며 존경의 의미로 '성조'(聖祖), '열조'(烈祖)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14] 이외에도 고종 재위 42년에 몽골을 막아달라고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태조 왕건을 '용조'(龍祖)라 칭했으며 공민왕 재위 20년에 성균관의 학도들이 송가를 바쳤는데 여기선 태조를 '황조'(皇祖)라 했다.

시호는:

  •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 <태조 세가> -총서-는 시호를 추가로 올린 것이 누구인지는 안 나와 있다.

  • 《고려사》 <태조 세가> 마지막 조:
    • 용열인용장효대정광열원명신성대왕(勇烈仁勇章孝大定光烈元明神聖大王)
: 《고려사》 <태조 세가> 마지막 조엔 태자(정윤) 혜종이 '신성'(神聖)을, 증손자 목종이 '원명'(元明)을, 손자 현종이 '광렬'(光烈), '대정'(大定)을, 증손자 문종이 '장효'(章孝)를, 6대손 인종이 '인용'(仁勇)을, 8대손 고종이 '용렬'(勇烈)을 올렸다고 한다.

보다시피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와 마지막 조에 차이가 있다. 고려 역대 군주들은 시호의 기록이 <세가> -총서-와 <세가> 마지막 조가 조금씩 다르다. 단 시호에서 가장 중요한 건 후계자가 처음 올릴 때 쓴 두 글자라서 나중에 추가된 뒤 글자들이 조금씩 달라도 큰 영향은 없다.

그래서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땐 태조 신성대왕(太祖 神聖大王), 줄여서 태조 신성왕(太祖 神聖王)이라 부른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은 승려 도선이 태어나기 전 태조를 '성자'(聖子)라고 부르고 '미래통합삼한지주 대원군자(未來統合三韓之主 大原君子) 족하(足下)'라 칭했다. 태조는 천자를 자처하여 연호를 '천수'(天授: '하늘에게서 천명을 받다'란 뜻.)라 했으며 고려시대 저서인 《보한집》 <권상>에는 경순왕이 태조 왕건을 '천자'(天子)로 표현하고 있다. 태조의 자는 '약천'(若天)으로 '하늘과 같다.'란 뜻이며 그가 태자(정윤) 왕무에게 지어준 자도 '승건'(承乾), 즉 '하늘을 잇다.'란 뜻이다. 태조가 지은 만월대의 정전 이름도 '하늘의 덕'이란 뜻의 '천덕전'(天德殿)이다. 발굴된 태조의 청동상도 천자가 쓰는 금색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15] 태조가 일리천 전투에서 조직한 부대 이름 또한 지천군(支天軍), 천무군(天武軍), 우천군(佑天軍), 간천군(杆天軍), 보천군(補天軍)이다.


4. 어진[편집]



태조의 어진


파일:external/www.minjog21.com/3341_9670_418.jpg

개성의 왕건 능인 현릉에 있는 어진. 현대의 상상이다.

파일:왕건 어진.png

연천 숭의전지(사적 제233호)에 봉안된 어진. 조선 시대에 그려진 것을 20세기에 모사한 것으로, 태조의 모습을 그린 근대 이전의 어진 중에는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고려 태조의 상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다만 원본이 소실되었고 당시 복식과도 좀 안 맞는 부분이 있어 학계에서도 실제 모습인지는 긴가민가한 모양.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395292eHp8cW6wnz5KLp32R6nQthDlD.jpg

《왕씨 족보》에 그려진 왕건. 숭의전지의 영정 및 대한제국 시대 《초등대한역사》 교과서의 모습과 많이 닮아 실제 모습일 가능성도 있으나, 문제는 이 족보 자체가 북한 주민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로동당 위원회에 "우리 (왕씨) 가문의 하늘이신 김일성 주석께 바친다" 운운하며 제출하여, 북한 측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할 목적으로 공개한 유물이라 실제로 검증하기 전까지는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혹은 상술한 숭의전지 또는 교과서의 어진을 그대로 모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394936Fk52pNzzGdsCU5Ig2eVV81m4N3KXiR.jpg

왕건 청동상. 북한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재. 951년(광종 2)경에 제작되어 봉은사(奉恩寺) 진전(眞殿)의 어좌(御座)에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왕건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일한 유물이다.

파일:external/www.daejonilbo.com/20140409010004922000000102.jpg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

파일:external/sunday.joins.com/20225216.jpg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려 태조 어진. 표준영정 66호로 지정되었다. 이길범 화백의 작품이다. 다만 어진의 복식이 신하가 쓰던 복두건이며 같은 작가의 작품인 조선 정조 표준영정의 외모와 너무 닮았다는 비판이 있다.


5. 업적[편집]



5.1. 능력[편집]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로서 당시 대당무역의 거점이었던 예성강 주변(패서)이 가문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장보고가 죽고 청해진이 폐쇄된 지 40여 년이 지나 농업 위주의 영지가 되어버린 백제 지역[16]이나 지정학적으로 외국과 직접 교역이 불가능한 영동/영남 지역의 호족들에 비해 상업적인 능력과 국제 정세 이해, 중국 문물 수용 및 정보력에 있어 우위에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궁예가 직접 한찬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게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 년 동안 시달렸는데 궁예 휘하에서 젊은 나이에 시중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공들 덕이었다. 반면 육전 지휘력은 다소 애매한데 초반에는 궁예 휘하의 무장으로서 한주, 충청, 패서 일대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사화진에서 후백제 군대를 격파하고, 호족 세력을 포섭하는 다수의 전공들을 세웠다. 그러나 대규모 육군을 지휘할 때는 가끔씩 약한 모습을 보인다.

쿠데타 직후 반기를 든 세력들이 많았다고는 하나 태봉 시절 확보했던 운주, 청주의 호족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결국 해당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17] 그리고 고려군 병력이 우세했던 925년 상주 조물성 전투에서는 두 왕들이 맞붙었다가 견훤이 친히 지휘하던 후백제군에 3부대 중 2부대가 털렸는데, 그 사이 청주 전선의 유금필이 연산진과 임존성에서 승리한 틈을 타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는데 그쳤다. 왕건이 친정에 나섰던 928년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통일 전까지 삼년산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공산 전투에서는 신속한 기동으로 서라벌을 함락해버린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다 매복에 걸리는 바람에 신숭겸, 김락 등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뻔했다. 다만, '고창 전투'와 그 이후의 결정적인 육전들에서는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명철한 결단력과 빠른 행동력, 상인 가문 특유의 외교력과 궁극의 화친 능력을 들 수 있다. 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관심법을 썼다며 역모를 자백하라 억지 부리는 궁예 앞에서 쿨하게 꾸미지도 않았던 반란을 모의했노라고 인정하는 모습, 말년의 궁예가 폭정을 휘두르자 부하들에 의해 역성혁명의 주역으로 추대되어 실행에 옮기는 모습, 태봉을 멸하고 고려를 세운 후 항거하던 궁예의 봉신들을 화전양면책으로 재빨리 수습한 데서 그 능력을 엿볼 수 있다.[18] 후삼국 내의 호족들 외에 발해대광현발해유민들, 그리고 일생일대의 라이벌이었던 후백제견훤까지 포용하는 포용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협상가로서 호족들을 포섭하는 외교력과 친화력도 탁월하다. 쿠데타 직후 친 궁예 세력과의 싸움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획득했고, 궁예를 따르다가 왕건의 쿠데타 직후 독립을 선언했던 명주의 신라 왕족 김순식도 4년 뒤 왕건에게 복속했다. 또한 견훤이 서라벌 정벌 후 직접 옹립한 경순왕 김부도 고려에 귀순시켜 영동/영남 지방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획득한다. 공산 전투 패배 이후 후백제보다 군사적, 정치적 입지가 불리해졌던 상황에서도 '삼태사'라 불리운 토착 호족 세력(김선평, 권행, 장길)을 끌어들여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켜 고창 전투에서 대승했다. 놀라운 수준의 포용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아 외교적으로 후백제의 호족 세력들을 동요시켜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런 결과는 생전에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서초패왕 항우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물론 사료에서는 승리자를 예찬하고자 왕건의 이런 능력이 '천명', '인덕' 같은 단어로 포장되었으나 이러한 단어들만으로는 전란의 시대, 배반과 이합집산을 밥 먹듯이 하며 신라 왕실의 권위에도 반항하던 수많은 호족 세력들이 왜 왕건에게 포섭되었는가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때문에 상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왕건은 서로 간의 이권이 첨예하게 얽혀있던 지역 호족들의 각기 다른 목적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는 현실적인 대안(부/명예/권력)을 제시할 수 있는 정보력과 외교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강원도 일대에서 잘 나가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고작 양길 휘하 일개 무장이던 궁예에게서 야심을 읽고 본거지인 송악을 통째로 바쳐 송악을 태봉의 첫 수도로 만들어 낸 왕륭이나 그렇게 얻어낸 궁예의 무력을 이용하여 이전에는 압도하지 못했던 패서 일대 호족을 단번에 태봉으로 복속시킨 왕건의 행동을 보면 당시 송악 왕씨 가문의 정보력과 교섭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궁예 휘하에서 자기 세력을 확보해나가는 왕건의 행보와 쿠데타 이후, 전국구 네임드 호족에 대한 포섭 과정을 보면 왕건 스스로도 대세를 읽고 상대가 원하는 바를 제시할 수 있는 상인 가문의 기질을 상당 부분 섭렵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정훈이 만화: 《왕건, 통일의 기술》


5.2. 외교 정책[편집]


거란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표명했는데, 우선 태조 이전의 궁예는 거란과 친교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사》 <이외국기> -고려-편에 보면 915년 10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보검을 진상한 기록이 있으며, 918년에도 2차례나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는 궁예의 집권 시기였다. 후삼국 통일 7년 후인 942년 10월 거란의 태종북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사신과 선물을 보내 통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왕건은 거란이 동맹국인 발해를 통수친 것도 모자라 멸망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보내고, 선물로 왔던 낙타 56마리를 개성에 있는 만부교 다리 밑에 묶은 뒤 굶겨 죽였는데 이 사건이 만부교 사건이다. 태조가 이러한 반(反) 거란 정책을 철저히 펼친 이유는 발해의 멸망과도 관련이 깊은데 과거 거란이 발해와 친하게 지내다가 부족을 통합하고 결국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발해의 대씨 왕족과 지배층을 포함한 많은 유민들이 고려 내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정치적인 면에서라도 거란을 적대시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컸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했고, 이에 발해유민들은 태조와 고려에게 있어 중요한 존재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발해 역시 고려와 같이 고구려를 이었다는 동류 의식 또한 태조의 거란 강경책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발해유민 수십만 명보다는 후에 북송과 대결하는 거란을 적대시한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시 고려는 후백제와의 전쟁 때문에 발해를 도와주러 갈 수도 없었으며, 막 삼한을 통일하고 분열을 수습한 시점에도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과 국가를 되살리고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제도들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시점에서 당대 동아시아의 최강으로 떠오른 거란과 적대하는 것은 당장의 이익만 따지면 그야말로 미친 정책이었다고 평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태조는 절대 당장의 이익만을 가장 우선시하는 속물적인 정치인이 절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펼친 북방 관련 정책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재건해 서경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당연히 고구려 계승 의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동시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의 기상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훗날 이성계와 함께 고려 왕조의 문을 직접 닫은 정도전조차 태조 왕건의 북진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으로 칭송했을 정도였다. 고려가 결국 474년 사직 동안 한반도 바깥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는 못했지만[19] 태조 시절에는 요동을 비롯한 고구려의의 고토 수복이라는 원대한 이상에 대해 진지하게 임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근대에 평양을 수도로 삼으려면 요동의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洲, 현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고려사》 934년 7월 기사 中


발해 태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태조에게 투항한 시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데 《고려사》는 934년 7월,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 《동국통감》은 926년 1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공식적인 발해 멸망은 926년 1월로 이에 따라서 대다수의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광현이 수만 명 혹은 수만 가구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고려로 투항한 년도는 926년 1월 이후로 보고 있어 《동국통감》의 기록이 가장 사실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조가 발해를 나의 나라로 친근하게 대하면서 발해를 침공해 멸망시킨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그는 후백제와의 수많은 전쟁 도중에도 늘 틈틈히 서경을 순행해 북진의 의지를 굳게 다졌고,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짓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염두에 두고, 개성과 평양 두 곳에 탑을 쌓아 통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고려 국민들의 사기 진작에도 힘썼는데 이때 개성에는 7층탑, 서경에는 9층탑을 지었다.[20] 태조는 개경보다 서경을 더 중시했고 장래 수도로 삼을 계획을 내비쳤는데 932년 5월에는 공개적으로 장래에 서경으로 천도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경 천도는 태조 본인 대에는 시행되지 않았고 제3대 정종이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하나 이 역시 무산되어 없던 일이 되었고 끝내는 고려 사직 내내 서경 천도는 성공하지 못하는데 점차 개경 기득권이 된 문벌귀족들 및 왕씨 왕실의 보수화, 거란+여진+몽골로 이어지는 북방 민족들의 안보 위협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 말기 최고의 대유학자였던 익제 이제현은 고려 태조의 일생에 대한 논평에서 북진 정책 부분에 대해 결과적으로는 거란을 적대시함으로써 길고 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태조의 선택을 비판하고, 이에 반해 금나라에 사대정책을 취한 인종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단, 이는 성리학적 사관이 팽배한 조선 후기의 의견이라는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거란을 적대한 것과는 달리 중원 왕조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933년 후당으로부터 책봉받은 후 줄곧 사용하던 연호 천수를 폐지하고 그들의 연호를 썼을 정도였으며, 후당의 뒤를 이은 후진과도 사신을 주고 받는 등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부터 계속 중원 왕조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태조는 오대십국시대 후진의 초대 황제 석경당에게 거란을 협공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어떤 대척없이 무조건 주장한건 아니고 중국과의 협공 등을 활용해 거란 공격의 성공 가능성을 최대한 높여보려고 한 듯하다. 다만 태조가 삼국통일하고 강대해졌다는 중국의 기술을 보면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는 태조의 야심을 보고 경계심을 가졌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고구려와 중국의 역사적인 갈등을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이름을 자칭하는 태조의 세력이 강해지는건 중국 입장에서 마냥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거란이 쳐들어오자 석경당은 요 태종 야율덕광에게 연운 16주를 넘겨준다. 딱히 거란에게 위협을 받거나 강요를 당한 것도 아니고 내란에서 거란 도움 받겠답시고 중원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연운 16주를 요구받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나서서 넙죽 갖다 바쳤다. 심지어 신하의 극렬한 반대를 씹고 말이다.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거란에 넘겨줘서 수백 년 동안 중국을 고생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걸 생각하면 진짜 별 생각없이 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후에 중원 왕조를 두고두고 고생시키는 거란에게 중원의 입구를 거리낌없이 바친 사람이 고려가 요동을 합병해 성장하는 것을 견제할 안목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스자쿠 덴노 시기인 조헤이 7년(937)과 텐교 2년(939) 때 고려 측에서 사절을 보내 조공하겠다고 두 차례 요청했으나 일본이 거절했다.

태조에게 나라를 빼앗기거나 나라를 바친 군주로는 궁예, 견훤, 경순왕 김부, 견신검이 있다. 이 중에서 생전에도 사후에도 제대로 왕 대접받은 자는 오로지 경순왕뿐인데 경순왕만이 사후에 왕릉이 만들어지고 시호를 받았으며 궁예, 견훤, 견신검은 그런 거 없다. 심지어 시신을 묻은 장소가 정확히 기록된 것도 경순왕뿐이고 나머지는 시신이 어디 묻혔는지도 모른다. 궁예야 애초에 왕건의 쿠데타 대상이었으니 그렇다쳐도 견훤은 생전에 상보라고 불릴 정도로 대접받았고 견신검은 투항 후 관직을 받았음에도 사후에 비참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6.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조(고려)/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조(고려)/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기타[편집]


고려 태묘 백세불천위
성종 ~ 인종
태조
의종 ~ 공양왕
태조
혜종
현종

고려 경령전 백세불천위
태조 신성대왕

  • 왕건은 사후 종묘[21], 경령전(景靈殿)[22], 성용전(聖容殿)[23], 효사관[24]에서 1순위로 숭배 받는 대상이 되었고, 환구단, 초제[25]에선 배제(配帝)[26]로써 하늘의 신들과 동급의 제사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 <예지> -원구단- 부분엔 임금이 하늘의 상제에게 제사 지낼 때 오방제와 태조를 같이 제사지내는데 이 때 매번 태조의 현릉에 사신을 보내 태조를 환구단에 모시겠다고 알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고 나면 태조의 신위는 제단의 동쪽에 배치돼 청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둔다.

  • 《고려사》 <악지> 중 -속악- 부분이 있다. '속악'은 '향악'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가락과 우리 말로 만들어진 토착 노래를 말한다. 《고려사》는 유명한 고려의 <풍입송>이나 고대 삼국의 노래는 전부 속악으로 분류해놨다. 여하간 이 기록된 속악 중 <장단>(長湍)이란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성조(聖祖, 태조 왕건의 존칭)가 백성을 사랑했던 전례를 따라야 한다고 후대의 임금들을 훈계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정확한 가사는 알 수 없는데 《고려사》의 편찬자들이 우리말로 된 노래는 내용만 적고 실 가사는 빼버렸기 때문. 제목은 고려 장단현, 현 한국 경기도 장단군에서 따왔는데 후대의 군주 중 누군가가 장단현에 갔을 때 그 곳의 악사들이 이 노래를 지어 바쳤다고 제목이 <장단>이다. 또 속악 중 <송산>(松山)이란 노래도 있는데 이 노래의 내용은 태조가 송산에 자리잡아 개경을 도읍하니 국가가 세대를 거쳐 내려옴을 찬양하는 노래다. 송산은 송악산인데 고구려 이름인 부소산 등으로 불려왔다. 나름 건국군주 답게 태조에 관한 노래가 2개나 있다.

  • 경기도 철원향교지는 후삼국 시대 궁예의 태봉국 시절 왕건의 집터로 유력하게 비정되고 있다.

  • '옥경대왕'(玉慶大王)이라는 별칭이 있다. 왕건의 아들 중 왕유(王裕)가 강릉 왕씨로 분적하였는데, 왕유의 손자인 왕총지의 《등과록》<전편>에 증조부의 이름이 옥경대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 고려 왕조의 창업군주에 재위기간도 25년 가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은근히 존재감이 부족한 편이다. 문명 시리즈에서도 두 차례 한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왔지만, 왕건이 좀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일부 네티즌들이 차라리 세종대왕이나 광개토대왕을 등장시키라는 반응을 보였고 결국 잘렸다.(...) 사실 후삼국시대를 통일시켰다는 점에선 왕건 역시 명장인데 말이다. 지못미 그 외 고액권 지폐 인물 선정 등 일종의 인기 투표가 있을 때도 1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2000년 드라마 <태조 왕건>이 대히트해서 위상이 올라간 측면이 있지만[27], 이 드라마 외엔 왕건이 높은 비중으로 등장한 드라마가 거의 없다.[28] 이는 고려 자체가 비교적 조명을 덜 받고 있는 시대라 그런 점도 있고, 매체도 스토리로 쓰려면 뭔가 왁자지껄한게 있어야 좋을텐데 사실 진짜 군주로 재위하던 시절엔 후삼국시대가 끝나고 쿠데타도 딱히 없이 수십명 부인들과 자식들에 당시 기준으론 장수하며 재위도 잘 마치고 죽었기에 뭔가 부러우면 지는거다심심한 느낌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32304247a010a01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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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북한 개성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 일명 '왕건동상'이라고도 불린다. 태조의 동상은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연등회의 첫 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리는 대상이었다. 당시 제작된 태조의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지만, 왕건동상이 가장 신성시되는 대표 상징물이었다. 머리엔 천자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 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동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실제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탓에 사라졌다. 청동상 발굴시 발 쪽에서 비단 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동상에 입힐 비단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된다. 또한 성기가 매우 작게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방식을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고 하며 성인으로서 성욕을 초탈한 모습을 표현한 불교적 양식이다. 의외로 이렇게 성기를 왜소하게 표현한 양식이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 / 중세 미술 곳곳에서 보인다. 고대 그리스 조각상의 남근이 모두 작게 표현된 것도 남성이 남근이 크면 지능이 떨어지고 욕망에 충실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큰 남근을 가진 조각상은 죄다 생식을 관장하는 신, 반인반수 괴물, 늙고 추한 자, 혹은 야만적인 이민족을 나타낸 것이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그리스 남성을 묘사할 때는 절대 큰 성기를 표현하지 않았다. 이 성기 부분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국보 전시회에서는 중요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또한 이렇게 옷을 입힌 나체상을 모시는 형식은 고구려 때부터 내려온 유구한 제례양식으로 왕건동상 외에도 동신사에 모셔진 유화부인의 상이나 성모당(聖母堂)에 모셔진 송악산의 여섯 여신의 상에도 적용된 양식이었다. 고려 왕조가 망하자, 왕건동상은 고려의 태묘와 더불어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워낙 신성시되던 동상이라 그런지 명분상 폐기가 어려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392년 7월 일단 지방으로 옮겨졌고, 1429년 8월 1일에 제례법 개정을 명분으로 나주에서 발견된 태조의 어진과 함께 태조의 능인 현릉 곁에 묻었다고 한다.

  • 천안시 목천읍에서도, 왕건의 동상으로 추정되는 청동상의 일부(머리부분)가 발굴되었다. 그 모습이 개성의 왕건 상과 매우 유사하고, 고려 초기 양식이라는 점, 익선관에 임금 왕자가 쓰여있다는 점, 왕건과 연관성이 깊은 천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때문에,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사실상 왕건의 동상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통일 이후 왕건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게 다가온 현안은 호족들과 관련한 처우 문제였다. 호족들은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공신이 되었지만 그대로 놔둘 경우 왕씨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거나 반기를 들며 내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왕건부터가 고려의 전신인 태봉의 건국 공신 중에서도 핵심 인물이자 호족 연맹체 국가에 가까웠던 태봉의 대호족 세력 중 1명이었다. 태봉의 신하에서 역성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건국하여 임금 자리에 오른 선례가 자신인만큼 왕건 입장에서는 제2의 왕건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야만 했다. 따라서 왕건은 회유책과 강경책을 같이 써가며 호족들의 충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견제하는 모션을 취하게 된다. 회유책으로는 정략결혼[29], 사성정책[30], 역분전[31] 정책을 들 수 있다. 강경책으로는 기인 제도[32]와 사심관 제도[33]를 사용했으며 통일 이후에 공신들에게 녹읍을 최대한 주지 않아 경제적 기반이 커지는 것 또한 막으려 하였다.

  • 대내적으로 숭불정책을 실시했으며, 이러한 친불교 성향은 신라 하대 지방 호족이라는 출신 성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 왕조를 창업한 왕건으로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삼국 모두의 국교가 불교였던지라, 이미 수백 년 동안 불교가 일상화된 국민들과 충돌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훈요 10조>에서도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불교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불교 행사가 지나치게 화려해진 탓에 불교 행사들이 민중고를 일으켜 성종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몇 십년간 폐지시킨 적은 있다. 하지만 불교만 선호한 게 아니라 토속신앙 행사인 팔관회를 열고 산신령 소문으로 산의 이름을 바꾸는 등 도교와 여러 토속신앙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이를 통틀어 <구실등가>(九室登歌)라고 한다. 또한 <예종 세가>엔 이 <구실등가>를 바치면서 각 방에 서도(西都)에서 찾은 백옥으로 만든 도자기 그릇을 올렸다고 한다. 현 한국엔 성종 대 만든 태조의 방에 넣은 도자기 그릇이 실존하고 있다.
예종 대 태조의 찬가 제목은 <태정>(太定)으로 4글자 운구.
하늘의 영부(靈符)[34]를 받아, 많은 땅을 사랑하고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덕이 삼무(三無)에 맞으시고, 공이 백왕(百王)을 넘으셨습니다.
그 기쁨이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니, 오래 승계되고 누적되었습니다.
그러니 10,000년 동안 삼가, 사사(祀事)[35]를 받들겠습니다.

하늘에 응해 기업(基)[36]을 여시니, 넓은 계획이 극히 창성하였습니다.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위대하며 당당합니다.
흐르는 빛을 이어받아 두텁게하니, 자손이 1,000억(千億)이 넘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사를 치루는 것이, 영원히 끝이 없을 겁니다.
공민왕 12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우리 황태조(皇太祖)[37]께선 경명(景命)[38]을 가슴에 품으셨으니,
삼한(三韓)을 가져 인정(仁政)이 내려지고 얽혔습니다.

허나 후사(後嗣)가 못나서 때때로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부디 음식을 드시고 좋은 일을 당겨오셔서 영원히 계승되게 해주십시오.
공민왕 20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오호라, 황왕(皇王)이시여! 천명을 받아 장수를 부리셨습니다.
그리하여 황량했던 대동(大東)이, 사방(四方)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개국하시어 질서를 세우시니, 다음 황(皇)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니 10,000년 동안 삼가, 복을 내리시고 끝없이 이어주소서.
고종 2년, 태조에게 시호 '용렬'(勇烈)을 추가로 올리면서 태묘에 <옥책>(玉冊)을 같이 올렸다고 한다. <옥책문>은:
한(漢) 조(祖)의 삼척검을 들고,
우리 (태조의) 무예를 펼치셨습니다.

은(殷) 탕(湯)의 아홉 제후를 끌고,
흥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제가 그 위대함을 논하지도 못하며,
어떤 이름도 그 위대함을 담지 못합니다.
  • 파일:고려 태조 친필.jpg
2013년 '영남 유림의 절의와 사림정신'이라는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서 왕건의 친필 추정 글씨가 공개되었다. 다만 학계에서는 '백원첩'에 담긴 이 글씨가 조선 중기에 유행한 광초체로 추정되고 다른 왕건의 친필체가 오늘날 남아있지 않아 비교가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진짜 친필인지는 확정할 수 없고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9. 대중매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조(고려)/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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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 - 제신(諸臣) ]
9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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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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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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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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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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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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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권
1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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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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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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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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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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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宦者)」
「혹리(酷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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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권 「폐행(嬖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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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권 「간신(姦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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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권 「반역(叛逆)」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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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년 학계에 보고된 백원첩에 수록되어 있다. 물론 영상에서도 나오지만 학계에서도 진위 논란이 있다.[2] 이건 햇수이고 918년 7월-936년 9월이므로 18년이 맞다. 아래의 25년은 918년 7월-943년 7월 초이므로 거의 일치.[3] 과거 낙랑군대방군 일대를 아우렀던 고구려 말기의 핵심 배후지이자 수도권이었던 패서 출신의 고구려 유민이다. 고구려의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였던 한성(漢城, 현 황해도 재령군)이 있었으며, 멸망 직후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검모잠안승을 필두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유력한 귀족 성씨였던 왕씨는 고구려미천왕 대에 이르러 통치하게 된 낙랑군대방군을 비롯해 관서해서 일대를 기반으로 두었던 가문이다.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왕건의 선대고구려대족(大族)이었다고 전해진다. 김관의가 저술한 편년통록보다 더 정확하고 합리적이라 추측되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한 이제현에 따르면 왕건의 선대는 이전부터 왕씨 성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4] 해상 호족 출신으로서 수군을 운용함이 능숙하였다. 이는 나주 공방전에서도 빛을 발한다.[5] 고대 그리스피로스 1세, 카르타고한니발과 행적이 비슷한 명장이자 국왕이었다. 대야성 전투를 기점으로 후백제서라벌로 진격함으로써 신라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공산 전투에서 고려의 수뇌부 일동을 다수 전사시킴으로써 상당의 호족들을 회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견훤 본인의 역량 덕분이었다.[6] 후백제 멸망 이후 백제인들에게 일절 해가 없도록 명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로써 견훤을 몰아냈던 신검도 용서했다. 더 나아가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발해유민들을 수용하고 나라를 들고 항복한 경순왕과 신라 지배층을 수용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건국 이후 사후 처리에 있어서 피비린내가 뒤따르던 고대와 중세의 왕조들과는 상반되는 행보를 보여준 덕분에 고려는 발해, 후백제, 신라의 지배층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집단을 수용했으면서도 그들의 지지를 고루 받아 재위기간을 무탈히 보낸 것을 보면 정치력 역시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9번 혼인한 왕으로도 유명하지만, 즉위 당시의 나이가 41세... 그러나 그것은 전부 혼인정책으로 인한 정략혼이며 어쩔 수 없는 결혼이였다. 조선의 태조와 비교하면 전술은 아래지만 정치는 위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게 일종의 동아시아 트렌드인지, 왕건 사후 얼마 안가 중화권을 통일했던 송태조 역시 이런 쪽으로는 대인배로 유명했다. 반대로 고려왕씨들을 탄압한 조선의 경우 당시 옆나라 명나라도 주원장이 미쳐날뛰며 숙청의 바람이 불던 시절이였다.[7] 다만 신라는 직후에 발해가 다시 생겨서 남북국시대가 되긴 한다.[8] "국가 단위에 가장 근접한 집단의식인 삼한일통의식은 13세기 초까지 삼국유민의식의 분립성과 공존하였다. 또한 발해유민이나 탐라의 포함 여부를 놓고, 고려 건국을 주도한 고구려 유민 계열과 신라 유민 계열의 두 갈래 삼한일통의식이 경쟁했다··· 고려의 국가 단위 집단의식에 해당하는 삼한일통(三韓一統) 의식이 적어도 크게 두 가지 계열이 병존하며, 경쟁하고 있었던 것 역시 종래에 알려지지 않은 한국 민족 형성사의 이해에 중요한 역사상이다. 고구려 유민 계열과 신라 유민 계열의 삼한일통 의식은 그 안에 만주의 발해 유민과 남쪽의 탐라국(제주도)을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큰 차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자료들을 통해 검토되고 있다." 〈고려국가와 집단의식·자위공동체·삼국유민·삼한일통·해동천자의 천하>-노명호, 출판사 서평[9] 거란의 경우 발해를 힘으로 만주에서 축출해버릴 정도였다.[10] 고려 후기에도 요동 정벌을 꾀한 바 있으나 항목에도 있듯 보급 문제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불만 등 여러 이유로 좌절된다.[11] 오늘날 개성[12] 실제로 개성이나 평양 등 과거 낙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은 고구려 때도 왕씨가 유력 가문으로 세거하던 곳으로, 왕모중▪︎왕산악▪︎왕사례▪︎왕고덕 등 확인되는 왕씨 성의 유력한 고구려인들이 많다. 이외에도 왕건은 (같은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혈연적 친연성을 근거로 발해를 친척 국가로 인식했으며 실제로 외교적 수사에도 이를 활용하였다. 무엇보다 발해에서 확인되는 귀족 성씨 가운데 대(大), 고(高), 양(楊), 장(張), 이(李) 말고도 왕(王)씨 또한 포함되어 있다.[13] 넷째인 광종이 올림.[14] 조선에서도 건국 군주인 이성계를 '성조'라고 칭한 바 있다.[15] 도금된 흔적이 있다.[16] 장보고의 난 진압 후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의 인력들을 김제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후로 수달, 현춘, 순천 김씨, 순천 박씨, 낭주 최씨, 나주 오씨, 진도 김씨, 압해 정씨 가문 등 백제 지역에 기반한 해상세력은 많이 난립했으나 신라구였던 현춘을 제외하면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대세력이 전무하다. 대체로 지역 수운, 사략질, 국내 사무역에나 종사하는 수준. 게다가 892년 전에 이미 견훤이 속했던 신라 방수군의 지속적인 해적 토벌과 894년 현춘의 규슈 침공 실패로 수달을 제외한 백제 지역 대규모 해상세력은 932년 상귀, 상애의 함대가 나오기까진 사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17] 태봉 시절 궁예는 비뇌성 전투 이후 양길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신훤, 청길을 흡수하며 충주, 청주를 확보했다. 또한 904년 공주장군 홍기가 투항했고, 906년 사화진 전투 기록으로 보아 충주 이남의 상주 일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8] 김순식, 이흔암, 환선길, 임춘길, 공직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이에 저항한 호족 세력들은 적지 않았다. 왕건 가문의 영지인 패서와 자신이 제압한 경기 일대를 제외한 동남쪽 다수의 호족들이 왕건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왕건은 환선길, 이흔암 등의 반란은 무력으로 신속히 제압하고, 김순식의 아버지 허월을 포섭하는 유화적 외교 전략으로 명주를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또한 청주에서 반란의 기미를 포착하고 홍유유금필을 진천에 주둔시켜 청주 호족들을 견제한다. 반면 매곡성(충청북도 보은군)을 통째로 후백제에 갖다 바치며 귀순한 매곡성주 공직은 후백제가 고창전투의 대패로 국력이 크게 위축되자, 932년 다시금 왕건에게 귀순하는데, 왕건은 자신을 배신한 호족에게 얹잖은 티를 내기는커녕 명마, 비단과 함께 백성군(경기도 안성시)을 영지로 하사한다.[19] 다만 공민왕 시기 몽골 제국의 혼란을 틈타 잠시나마 요동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20] 위치는 서경 장락궁 황성 근처에 있던 중흥사.[21] 유일한 불천지주였다. 이후 덕종이 태조, 혜종, 현종 세 명을 불천지주로 정한다.[22] 태조의 영정과 상을 모신 진전. 개경고려궁지에 있었다.[23] 서경 장락궁에 있던 태조 진전.[24] 개경 봉은사에 있던 태조 진전.[25] 하늘에 지내는 도교식 제사.[26] 같이(배配) 제사되는 황제(제帝).[27] 사실 이것조차 진짜 드라마의 재미 요소를 이끈건 궁예견훤이긴 했다.(...) 옴마니반메훔[28] 2010년대 드라마 중에선 조연급으로라도 비중있게 나온건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정도 뿐이었다.[29] 정략결혼은 호족들이 많은지라 왕비 역시 수가 불어난 것이 문제였는데 왕후만 6명에 부인도 23명. 호족이 반란을 일으키면 딸은 폐서인 후 처형되기 때문에 호족들이 딴 생각을 품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보완하고자 마련한 것이 사성정책이었다. 정략결혼은 그의 치세 중에는 지방 성주들과 화합을 도모하며 고려의 기반을 다지기에 필요불가결한 정책이었으나 왕건이 후계자로 지목한 왕무는 나주 오씨 소생으로서 패서 호족이 좌우하던 개경에서 한미한 가문 취급이었고 임종 직전 태자의 보필을 부탁하며 유훈을 맡긴 박술희는 궁예 휘하 일개 무관으로 시작해서 왕건의 최측근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가문의 기반은 미약했다. 통일 후 지방 성주와 호족들을 아우르는데 그쳐서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루지 못하고 왕위 쟁탈전의 불씨를 남기고 떠나게 된 건 결과론적으로 왕건 생전의 명철한 판단력과 기민한 행동력을 생각해 보면 분명 아쉬운 부분.[30] '사성'(賜姓)이란 '성을 주다'라는 뜻으로 공을 세운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그들의 충성을 얻어내는 것이다.[31] 지방 호족들에게 땅을 지급하는 것.[32] 신라의 상수리 제도를 배경으로 만들어졌고 호족의 자제들을 개경에 머물게 하며 사실상 인질로 삼아 반란을 막는 정책이었다. 자식들의 목숨이 왕건 손바닥 안에 있었으니 호족들은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기인 제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호족의 자녀들도 있었다고 한다.[33] 중앙 정부에서 지방마다 지방관을 보내지 않고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만큼 자신의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지방민들에게 가혹한 정치를 펼처서 중앙 정부에까지 그 소식이 들리는 경우에 연대책임을 지도록 했다.[34] 영험한 부적. 천명(天命)의 다른 말이다.[35] 제사에 관한 일. 제삿일.[36] 회사 기업 말고 국가의 기틀을 이른다.[37] '태조황제'(太祖皇帝)란 뜻이다. 고려가 황제를 칭제하였다는 증거이다. 한데 후대 조선 때 기록에선 고려의 황제 칭호 기록에 대해 소극적으로 표현하였다.[38] 커다란 사명. 천명(天命)의 다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