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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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국왕
태종 | 太宗


파일:태종 이방원어진.jpg

태종 상상 어진[1]
출생
1367년 6월 21일[2]
(음력 공민왕 16년 5월 16일)
동북면 함주목 귀주동 이성계 사저
(現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본궁)
즉위
1400년 12월 7일[A] (33세)
(음력 정종 2년 11월 13일)[3]
개성부 수창궁 정전
(現 개성시 남안동)
사망
1422년 6월 8일[B] (향년 54세)
(음력 세종 4년 5월 10일)[4]
한성부 수강궁 천달방(泉達坊) 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헌릉(獻陵)
(現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00년 3월 8일[5] ~ 12월 7일[A]
(음력 정종 2년 2월 4일 ~ 11월 13일)
조선 제3대 국왕
1400년 12월 7일[A] ~ 1418년 9월 18일[C]
(음력 태종 즉위년 11월 13일 ~ 태종 18년 8월 10일)
조선 상왕 | 조선 국왕 섭정[6]
1418년 9월 18일[C] ~ 1421년 10월 17일[D]
(음력 세종 즉위년 8월 10일 ~ 세종 3년 9월 12일)
조선 태상왕[7] | 조선 국왕 섭정
1421년 10월 17일[D] ~ 1422년 6월 8일[B]
(음력 세종 3년 9월 12일 ~ 세종 4년 5월 10일)
서명
파일:태종 이방원 수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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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방원(芳遠)[1]
부모
생부 태조(태조 고황제)
생모 신의왕후(신의고황후)
양부 정종
양모 정안왕후[2]
형제자매
8남 5녀 중 5남
왕비
원경왕후
후궁
1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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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빈 김씨, 의빈 권씨, 효빈 김씨, 신빈 신씨, 선빈 안씨, 소빈 노씨, 정빈 고씨, 숙의 최씨, 숙의 이씨, 숙공궁주 김씨, 의정궁주 조씨, 혜순궁주 이씨, 신순궁주 이씨, 덕숙옹주 이씨, 혜선옹주 홍씨, 순혜옹주 장씨, 서경옹주, 후궁 김씨, 이씨

자녀
12남 17녀 (18남 19녀)[3]
종교
유교 (성리학)

유덕(遺德)
봉호
정안군(靖安君) → 정안공(靖安公)[4]
전호
광효전(廣孝殿)
묘호
태종(太宗)
별호
성종(聖宗)
존호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5]
시호
조선: 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6]

: 공정(恭定)

1. 개요
2. 묘호와 시호
3. 이름과 작위
7. 직접 쓴 글과 시
8. 기타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中


오늘 부터 충녕에게 왕의 즉위를 넘기겠노라!

세종에게 왕위를 넘기며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태종(太宗),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는 방원(芳遠),[8] 자는 유덕(遺德).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를 대낮에 살해하면서 아버지에게 큰 노여움을 샀고, 조선 건국 뒤에는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을 뿐, 정도전,[9] 심효생, 남은과도 갈등하며 왕세자로 책봉되지는 못 했다.[10]

이에 1398년(태조 6년)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을 일으켜 계모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이방석의 친형인 이방번[11],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남은, 심효생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어 태조가 둘째 아들 이방과[12]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남에 따라 사실상 차기 왕의 자리를 공고히 하였으며, 1400년(정종 2년)에 태조의 4남이자 동복형인 이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마저 완전히 진압하고 그의 일파를 숙청하였다. 같은 해 형인 정종에 의해 세자[13]로 책봉되었으며, 곧 정종양위를 받아 마침내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적 뿐 아니라,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공신들과 외척들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냉정하게 숙청하였으며, 이는 자신의 후계자인 삼남 세종의 훌륭한 치세의 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혼란스럽던 건국 초기의 상황을 잘 수습하고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사실상의 2대 군주로서 그 책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태종이라는 묘호에 참 잘 어울리는 업적을 쌓았다.

요약하자면 조선 창업의 일등공신 중 하나이며,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외척 숙청[14] 등의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에 오르고 그 자리를 지켰지만, 권력 다툼 중에 고관의 피는 흘릴지언정 백성을 해하는 경우는 없었고, 본격적인 조선의 태평성대를 여는 기반을 닦은 명군이자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2. 묘호와 시호[편집]


"고애자(孤哀子) 사왕(嗣王) 신(臣) 【휘(諱).】[15]

는 삼가 재배(再拜) 돈수(頓首)하고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큰 덕(德)과 높은 공(功)은 전고(前古)에 뛰어나니 큰 이름을 시책(謚冊)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휘호(徽號)를 올립니다. 공손(恭遜)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께서는 총명(聰明)하고 신성(神聖)하며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다한 때를 당하여 천심(天心)의 돌아가는 바를 알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비로소 개척(開拓)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고황제(高皇帝) 를 뵈올 때 세 번이나 접견(接見)하는 총영(寵榮)을 받았습니다. 일이 기미(幾微)[16]

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적에 환하게 알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길이 평안(平安)하게 하였습니다. 천부(天賦)의 사랑이 오직 어버이에게 깊어 승안(承顔)[17]의 효(孝)에 지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우애(優愛)하여 이에 양덕(讓德) 의 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무위(武威)는 바람과 우레보다 엄숙(嚴肅)하고 문치(文治)는 해와 달보다 밝았습니다. 교린(交隣)하는 데 도(道)가 있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精誠)으로 하니, 덕화(德化)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흡족하여 은혜가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외람되게 큰 왕통(大王統)을 이어받은 것을 생각하여 나이가 오래되시도록 영화롭게 봉양(奉量)하리라 기약하였더니, 어찌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이에 말명(末命)[18]

을 남기십니까?

울부짖고 통곡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이에 현양(顯揚, 이름과 지위를 세상 높이 드높이는 일)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謚)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령(靈)이 충감(沖鑑)을 굽어 내리어, 길이 다복(多福)을 주시어 자손(子孫)을 무궁한 앞날에 보호하시고, 국가의 계책(計策)을 그윽이 도와주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구원(久遠)하게 하소서.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11월 8일 (갑인) 4번째기사.[19]


我馬帶矢 于廐猝來 願陪聖宗 九泉同歸

말이 화살을 맞아 마구에 들어오거늘, 성종[20]

을 모셔 구천에 가려 하시니.

- 《용비어천가》 10권, 제109장 中.[21]


  • 묘호 : 태종(太宗)
  • 시호 :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태종(太宗)이란 묘호 자체가 조선건국태조의 공에 버금갈 임금에게 바치는 최고 영예의 묘호이다. 사후에 업적을 인정받아 묘호태종으로 정해졌고 신하들의 절대적 찬사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22]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종을 달리 불러 성종(聖宗)[23]이라 칭하였다.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별호는 '성조(聖祖)'였었다.


3. 이름과 작위[편집]


파일:태종 이방원 수결.svg
태종의 수결(手決, 서명)

개국 전에 태어나 원래 왕족이 아니어서 피휘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짓지 않은 왕족이 되면 피휘 문제 때문에 개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종은 승하할 때까지 개명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芳)멀 원(遠)자를 로 계속해서 사용했다.[24]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모친 안징재의 예를 들면서, 피휘할 이름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두 글자 이름도 실질적인 피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위 규칙을 따라 개명피휘를 모두 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사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인데, 그가 죽은 뒤 낱글자 피휘 금지가 후손에 의해 뒤집히면서 책 한 권에 100번은 나올, 방원보다 더 흔해빠진 한자들인 세(世)와 민(民)이 따로 쓰이는 경우까지 모두 피휘되고 말았다.[25] 그 바람에 이 두 글자의 형태가 변형되거나 아예 뜻이나 모양이 비슷한 다른 한자로 대체되는 바람에 복잡한 한자로 된 문서들이 당나라 때 잔뜩 생겨났다. 이런 사례를 의식해서인지 아버지 이성계이 되고 '이단'(李旦)으로 개명했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李曔)으로 이름을 바꾸었음에도, 정작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전부 외자로 지어놓고도 본인만은 원래 이름을 고집한 이방원이 정말 독특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는 아버지 이성계처럼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위의 수결(手決, 서명)도 이름자인 '방원'을 갈겨 쓴 것이다.

자기 이름에 대한 애착이 있긴 했었겠으나, 피휘왕의 권위에 훨씬 더 중요한 예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비와 양민들 불편하지 말라고 피휘 관리를 과감히 포기한 걸 보면 시원한 인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6]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권위에 자신감이 넘쳐 후대가 감히 자신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과시적 행위일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시기 이전 왕조들에 비해 강력한 군주권으로 유명했던 명나라 황제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역시 흔한 한자로 된 이름을 가진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을 시작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자가 들어간 두 글자 이름을 여러 세대에 걸쳐 잘만 썼고, 이에 따른 낱글자 피휘 금지도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비교적 흔하지 않은 부수를 사용한 외자로 지음으로써 본인의 사례를 관행으로 만들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방원이 독보적인 사례가 되었다.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27]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대에는 고려 말기의 왕자 봉작제를 따랐다. 따라서 태조 대의 이방원의 호칭은 정안군이었다. 이후 1398년(태조 7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왕친의 봉작이 개정되어 임금의 친왕자의 호칭이 공(公)이 되었다. 이에 《정종실록》에는 이방원의 호칭이 정안공으로 기록된다. 이후 태종 본인이 임금으로 즉위한 직후 1401년(태종 원년) 1월 공(公)이라는 호칭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개정했고, 이후 다시 대군(大君)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최초로 대군이 된 사람들은 이방원의 친형제들이었다. 태종의 아들들인 효령대군, 충녕대군은 관례를 마친 후인 1412년(태종 12년)에 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414년(태종 14년) 태종은 여덟살의 아들을 성녕대군으로 봉하며 아들로서 적비 소생은 대군(大君), 소생은 군(君)으로 호칭을 완전히 법제 확정하였다.[28] 따라서 이방원은 '정안군', '정안공'이었던 적은 있으나 '정안대군'이었던 적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의 친형인 이방의이방간1401년(태종 원년), 태종의 호칭 개정에 따라 각각 익안대군, 회안대군이 되었다. 그들도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태조 시절에는 익안군, 회안군이었고,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익안공, 회안공이었다.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쓰며,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예전 사극이나 소설 등[29]에서도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안대군이 틀린 표현이라며 이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후에 확립된 표기를 따라 관례적으로 대군이라 칭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이성계왕자들은 조선시대야사집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옛날 일을 말할 일이 생기면 대군이라 호칭되었을 것이다.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을 대군이라고 하는 것이 후대에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이성계의 직계 선조들이 싸그리 임금으로 추존되는 판에 나머지 왕자들을 대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이미 왕이 된 정종과 태종을 대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딱히 없었다. 이는 이미 더욱 높은 자리인 왕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일반적으로 아무개 임금이라고 하지 아무개 왕자라고 하지 않는 데다, 어쩌다 왕자 시절의 호칭을 언급하더라도 대군 호칭 사용 이전의 과거 발언이나 표현을 인용하는 과정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작중 인물의 대사로 나오면 고증 오류.


4.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일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일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직접 쓴 글과 시[편집]


명나라 영락 황제에게 바치는 시

자줏빛 봉황 편지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먼 지방의 기쁜 기분 노래로 감응하네

오랫동안 숨어 있던 용과 범은 소리로 응대하고

죽지 않은 고래들은 기세 오히려 씩씩하네

만 리 강산에 정통성이 돌아왔고

백 년 인생이 맑은 조정을 보네

노안에 황제의 명령으로 새로운 변화 보게 되니

백발에 너그럽지 않음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열성어제[30]


마니산 제단

외진 지역 인적 드문 곳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밤낮 재계한다

국화꽃은 우물물을 내려다보고

흰 이슬은 섬돌 이끼에 스며든다

장수 기원함이 얼마나 절실한가

샛별 응당 자연히 배열하리라

봄가을 제사 기일 어기지 않아

임금의 덕 또한 생각나는구나

열성어제[31]

마니산 제단

왕명 받들고 이 재궁에 다다르니

눈에 가득한 가을 산 비단에 붉은 수놓았다

소나무 창가 꿇어앉아 하는 일 하나 없는데

휘영청 달빛 성 동쪽에 빠져있구나

열성어제[32]

1390년(공양왕2)에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쓴 시 두 편이다.

회안대군 방간에게 내려준 글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백형 부자가 순천으로 옮기던 날에 말을 달려서 피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경진년(1400년, 정종 2년) 봄[33]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형을 보전하려고 하는 마음이 날로 두터웠습니다. 근래에 김여생과 중 묘봉 등이 망령되게 "백형이 난을 꾸몄다."라고 일컬었으므로 이미 조사하여 밝혀서 반좌율[34]에 처하였고, 또 일전에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군대를 일으키자 백관들이 대궐에 나아와 백형을 제주로 내치자고 청하였는데, 내가 제주는 바다를 사이로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백형께서는 의혹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성어제[35]

1402년 음력 12월 2일 형인 회안대군 방간에게 보낸 글이다. 이방간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인물로 태종 이방원과 마찰이 있었다. 글을 보면 태종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부터 이방간을 잘 보호하려고 했다고 한다.


8. 기타[편집]


  •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36] 메뚜기를 삼켜버렸고 깜짝 놀란 신하들이 혼비백산하며 빨리 의원을 불러오라고 명을 내렸는데 태종 본인은 멀쩡했으며 이후 메뚜기떼는 사라졌다고 한다.[37] 중국 당태종[38]에게도 같은 일화가 있는데 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둘 다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현륭원)과 관련한 비슷한 일화[39]가 있다.

  • 쑥갓을 싫어했었다.

  • 코끼리를 처음으로 길들여본 이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전체는 이 처음 보는 짐승에 놀라 서둘러 구경을 오고 난리법석이었다.[40] 그런데 문제는 전직 공조판서인 이우(李禹)가 코끼리를 보고 추하게 생겼다며 대놓고 놀려댄 데다가 침까지 뱉는 바람에 화난 코끼리가 그를 밟아 죽였다는 거다. 이에 놀란 태종은 처음에는 코끼리를 살처분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선물해준 것이라 외교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결국 전라도 순천도호부 장도(獐島)[41]코끼리귀양보냈다. 그러나 코끼리가 섬에 귀양간 뒤부터 미역 등의 모든 먹이를 거부하고 슬프게 울기만 하여 가죽만 남을 정도로 말라버려서 이를 불쌍하게 여긴 태종이 결국 1년 만에 귀양을 풀어주라고 했으나 먹이를 워낙 많이 먹어대는 터라 결국에 전국에 돌아가며 사육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후 세종의 집권기에서야 관찰사상소로 다시 섬 가운데의 목장 지역으로 가게 되고 이후에 실록 내에서 코끼리의 기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보면 코끼리조선 입장에서는 식량만 축내는 큰 애물단지였다.[42][43]

  • 고려원나라에 그랬듯 조선 역시 명나라에게 공녀를 바쳤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얼굴에 침이나 뜸을 들이고 을 붙이는 등의 방법을 쓰는 자들에게는 왕명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엄벌에 처하며 가산까지 전부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300명의 공녀 후보자를 44명으로 압축했다가 5명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태종은 환궁한 후 대신들에게 대상자들로 선정된 여자들에 대해 "누구는 얼굴이 관음보살같아 애교가 없네. 누구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네. 그게 무슨 인물이냐?"라고 불평했다. 공녀 차출에 대해 원통함을 느끼며 혹시나 자살 시도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중종과는 정반대.

  • 임금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여 '실록(實錄)'으로 만드는 사관들을 매우 싫어했다. 에서 낙마한 뒤 사관들에게 비밀로 하라 했지만 당연히 사관들은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심지어 낙마한 것을 사관에게 비밀로 하라고 말한 그 사실까지 전부 기록했다. 민인생이란 사관은 "내가 쉬는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 하는데도 기어들어왔다가 걸려 잡혔을 정도였다. 다만 그렇다고 사관들을 몰살하거나 제도를 없애는 일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당시 사관들이 워낙 극성맞은 면이 컸을 뿐이다. 특히 민인생은 그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로, 왕의 사적공간(사생활 공간)까지 침입한 정신나간 인물이라 당대 사관을 통틀어서도 매우 괴팍한 편에 속했다.


  • 여말선초 시대에 왕실의 많은 인물은 초상화가 남거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태종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 총서에 아버지인 태조의 용모와 태종의 용모가 서로 닮았다는 간략한 기록 밖에 없을 정도로 상당히 적은 편. 태종에 대한 외모 묘사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 몇 가지가 있는데 《태조실록》에서 태조명나라 사신을 보낼 때 아들 이방원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병약해서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기록을 보아 무인 집안의 아들치고는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추측된다.[44] 성균관 생활을 하며 수도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니 형들처럼 우락부락한 체형보다는 마른 체형의 타입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종은 명나라 사신 업무도 무난히 해냈고 장수까지는 아니라도 당대 군주치고는 살만큼 산 나이이며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그가 딱히 병에 시달렸다는 설명은 없다. 태종은 1422년 5월, 승하했는데 3월과 4월에 연달아 사냥을 나갈 정도로 건강했다가 갑자기 에 걸려 죽은 것이다. 아버지 태조나 형 정종 수준이 아니었을뿐 태종 역시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강인한 신체를 지녔을 확률이 높다. 특히 취미가 사냥이었던 인물인만큼 진짜로 신체 능력이 빈약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45] 또한 태종 본인의 피셜로는 효령대군이 자신의 닮은 꼴이라고 언급한 적이있다. 또한 효령대군 초상화 기록에 의하면 양녕대군, 세종과 닮았다고 전해진다.

  • 자신이 직접 목숨을 빼앗은 정도전은 그 과정과 결과를 감안할 때 의외로 사후 처분은 관대하게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정치 숙청을 단행할 때는 역모 혐의를 적용해서 가문명예를 박살내고 다시는 복권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매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태종은 정도전 본인에게만 '종친 모해죄'라는 다소 어정쩡한 죄목을 붙이고 명예를 추탈했을 뿐 부인 및 자녀들은 잠시 노비로 전락했다가 몇 년 뒤에 복권시켜서 정도전 가문이 정상적으로 벼슬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도전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당시 두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죽었고 한 아들은 집에서 자살했다.[46] 이후에도 정도전후손들은 별다른 연좌제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으며 연산군 대에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정승이 되기도 했다. 사림이 정문형의 정승 취임을 반대할 때에도 정도전의 증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공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했다. 물론, 정도전 본인은 국적이어서 선조기축옥사에 휘말린 진주의 선비 최영경은 "그대가 혹 길삼봉이냐?"라는 물음에 "역적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峰)인데 어떻게 삼봉이라는 이름을 쓰겠느냐"고 답했다. 광해군허균을 고발한 기자헌의 아들은 그 사유 중 하나로 정도전을 현인(賢人,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라 칭했다는 것을 들었다.

  • 역대 조선 왕들 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임금이다. 카리스마있는 철혈군주 성격을 가진 임금의 대표격으로 여겨진다. 부왕 못지 않게 드라마같은 인생을 살았다. 조선의 왕 중 즉위 후 행적을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왕이다. 실록이 편찬된 것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일이었고 뒤이어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은 시간이 흐르며 무엇을 적을지, 무엇을 적지 않을지 기준이 만들어졌는데 《태종실록》을 만들 때에는 고려 중기 이후로 최초로 독립적으로 편찬된 실록이다 보니 그냥 이 한 말과 행동을 있는대로 다 적었다.

  • 왕자의 난(1,2차)과 숙청으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그가 죽인 인물은 의외로 그렇게 많지는 않다. 태종은 왕권 안정을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핵심인물만 핀포인트로 제거했으며 연좌제가 당연시되던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이나 주변 인물은 거의 건들지 않았다. 잠재적인 권신이 될 수 있는 외척 세력만 철저히 숙청했을 뿐 왕권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우는 충분한 명분이 있음에도 오히려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애당초 먼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측근이었던 세력이라든지 자신의 공신들은 권력에서 밀어냈을 뿐 어지간 해서는 죽이지 않았다. 친형 이방간은 물론이고 불온한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러 신하들도 내버려 두었다.[47][48]

  • 어찌 보면 강강약약에 해당하는 군주. 이방원이 맞선 상대를 보면 대부분 이방원 본인보다 높은 체급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본인이 권좌에 있던 시절,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되는 본인 치세의 권세가들[49]을 상대로도 강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였으며, 사관들로부터 끊임없이 스토킹을 당하며 분노한 와중에서도 사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였다. 자신의 침전에 실수로 들어온 사람도 별다른 처벌 없이 넘어가고[50] 심지어 말년에는(상왕 시절) 자신을 폭행한 장미라는 궁녀는 단순히 출궁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짓는 등 약자에게만큼은 굉장히 관대하였던 태종 이방원의 모습이 실록에 여지없이 잘 나타나 있다.[51]

  • 어찌보면 건국자이자 아버지인 이성계보다도 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준 인물인데 화통하고 진솔하며 리더십, 포용력과 카리스마를 갖췄지만 무인 출신이다보니 정치적 감각과 역량에 한계가 있던 아버지와 달리 무인 집안 출신임에도 과거합격할 만큼 뛰어난 학식과[52][53] 훗날의 정치 역량까지 그야말로 의 그릇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용재총화》의 저자 성현(成俔)은 태종을 "문관(文官)으로 패업(覇業)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고, 조선 말엽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태종을 영국청교도 혁명을 이끈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했다. 다만 크롬웰과는 사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다른데, 철저한 금욕주의자인 크롬웰과 달리 태종은 사냥이며 여색이며 놀고 싶은 건 칼같이 챙겨서 놀았다.


9. 가족관계[편집]


총 12남 17녀 (9명 조졸)
원경왕후
신빈 신씨
의빈 권씨
장녀 정순공주
차녀 경정공주
아들(조졸)
아들(조졸)
아들(조졸)
3녀 경안공주
장남 양녕대군
차남 효령대군
3남 충녕대군
4녀 정선공주
6남 성녕대군
왕자(조졸)
5남 함녕군
6녀 정신옹주
7남 온녕군
7녀 정정옹주
8녀 숙정옹주
9녀 숙녕옹주
11녀 소신옹주
13녀 소숙옹주
16녀 숙경옹주
왕자(조졸)

5녀 정혜옹주
정빈 고씨
9남 근녕군
숙의 최씨
10남 희령군
숙의 이씨
11남 후령군
선빈 안씨
소빈 노씨
8남 혜령군
12남 익녕군12녀 경신옹주
14녀 숙안옹주
10녀 숙혜옹주
효빈 김씨
후궁 김씨
4남 경녕군
15녀 숙근옹주
알 수 없음
궁인 이씨
왕자 2명(조졸), 옹주 2명(조졸)
17녀숙신옹주(숙의에게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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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중매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관련 문서[편집]




12. 둘러보기[편집]






진승총(震乘總)
[ 본기(本紀) ]
권1기
,제1대 「태조기(太祖紀)」,
,제2대 「정종기(定宗紀)」,
,제3대 「태종기(太宗紀)」,
,제4대 「세종기(世宗紀)」,
이단
이경
이방원
이도
권2기
,제5대 「문종기(定宗紀)」,
,제6대 「단종기(端宗紀)」,
,제7대 「세조기(世祖紀)」,
,제8대 「예종기(睿宗紀)」,
이향
이홍위
이유
이황
권3기
,제10대 「연산기(燕山紀)」,
,제11대 「중종기(中宗紀)」,
이융
이역
권4기
,제12대 「인종기(仁宗紀)」,
,제13대 「명종기(成宗紀)」,
이호
이환
권5기
권6기
권7기
,제14대 「선조기(宣祖紀)」,
,제14대 수정기,
,제15대(중초본, 정초본) 「광해기(光海紀)」,
이연
이혼
권8~9기
,제16대 「인조기(仁祖紀)」,
이종
권10기
,제17대 「효종기(孝宗紀)」,
,제18대(개수록) 「현종기(顯祖紀)」,
이호
이현
권11~12기
권13기
,제19대(보궐정오) 「숙종기(肅宗紀)」,
,제20대(수정록) 「경종기(景宗紀)」,
이순
이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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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전(評傳) ]
평전
이용 · 김종서 · 황보인
,「부록 사육신(死六臣)」,
,「부록 생육신(生六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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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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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선조









제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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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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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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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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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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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
이상
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1] 현재 효령대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실제 어진은 이미 조선시대에 소실되어 전주 이씨 헌릉 봉향회에서 2013년에 새롭게 제작된 상상화 어진 이다. 아버지 이성계나 셋째 형 익안대군, 차남 효령대군, 그리고 손자인 세조의 얼굴을 통해 태종과 세종의 얼굴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의 친형인 익안대군(이방의)의 초상화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아들이나 손자 얼굴의 중간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태종 이방원의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또한 어진에서는 빨간색 곤룡포를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1444년 세종 26년부터 빨간색 곤룡포를 입었고 그 전까지는 청룡포를 입었다.[2] 율리우스력 6월 13일.[A] A B C 율리우스력 11월 28일.[3] 세는나이 34세.[B] A B 율리우스력 5월 30일.[4] 세는나이 56세.[5] 율리우스력 2월 28일.[C] A B 율리우스력 9월 9일.[6] 상왕 및 태상왕 신분으로 4년 동안 병권 등 일부 분야를 섭정하였다.[D] A B 율리우스력 10월 8일.[7] 세종이 즉위한 이후 부왕인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히려 계속해서 시도하였으나 태종이 극구 사양하였고 결국 태종은 마지못해 승하하기 1년 전인 1421년(세종 3년)에서야 성덕신공태상왕(盛德神功太上王)의 존호를 받았다.[8] 조선역대 왕들 중에서 아버지 이성계와 더불어서 묘호보다 본명이 더 유명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왕위에 오르기 전 행적들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군주 중에는 매우 드물게도 피휘를 안 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 후 피휘를 고려하여 개명을 안 하는 대신 피휘 관리(처벌)도 안 하겠다는 관대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9]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의 경우 이방원도 세자가 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태조신덕왕후의 입김과 상황을 고려하여 이방원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역시 신덕왕후 소생 자식들 중 이방석 쪽을 세자로 추천했다.[10] 이방원의 성격이나 정몽주 살해 등 과격한 행태에 아버지 이성계가 반감을 품었다는 추측 이외에 이방석이 형 이방번까지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것에 대해 철원 최씨, 안동 권씨, 황려 민씨 같은 고려 구(舊) 외척 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적은 편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조선왕조실록》에는 단지 이방번의 성격 문제로 막내아들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핑계일 뿐이다. 그 외에도 왕후 역시도 조선 개국에 많은 도움을 준데다 태조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점에서 그 소생인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는 것 역시도 자연스러운 해석이었다.[11] 방번은 원래 세자 문제와 관련 없었기에 왕자의 난에 참가했다면 살려주려 하였으나,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태종의 바로 윗 형인 회안대군이 "역적은 하나라도 살려둘 시 화근이 된다며, 꼭 살려둬선 절대 안된다"고 하면서 성밖을 떠나는 방번을 길거리에서 그대로 죽여버렸고 그 죄를 본인이 받는다.[12] 태종은 형 정종에게 묘호 대신 공정왕(恭定王)이라는 애매모호한 시호만 올렸으며 이로 인해 정종은 오랫동안 그 지위가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는 무려 300년이 지난 숙종대에 다시 올린 것.[13] 세제로 책봉된 것이 아니다.[14] 여흥 민씨 숙청.[15] 세종이 승하한 부왕(태종)에게 올리는 글이므로, 여기에 들어갈 휘는 세종의 본명인 '이도(李祹)'가 된다. 그러므로 비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는 뒤에 오는 조사가 '은'으로 쓰여 있지만, '이도'를 적용하면 뒤에 오는 조사는 '는'이 맞는다.[16] 낌새[17] 즐거운 얼굴로 부모를 뵘.[18] 마지막 유언.[19] #.[20] 聖宗, 이방원을 지칭함[21] #.[22] 또한, 종묘불천위(不遷位)(옮겨지지 않는 위패. 세실은 종묘에 대대로 모셔도 5대의 대수에 포함되지 않는 큰 공덕을 쌓고 평가받은 왕에 한하여 종묘 정전(宗廟 正殿)에 계속 모시는 것을 말한다)로 지정, 존재되어 종묘에서 신주를 별전인 영녕전(英寧殿)으로 내보내더라도 세실로 정함으로써 아버지 태조와 함께 영원히 종묘 정전에 모시는 정말 크나큰 혜택을 누리게 된다.[23] 조선 제9대 왕인 성종(成宗)의 묘호와는 음만 같을 뿐, 한자 뜻이 아예 결이 다르다.[24]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피휘 사례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邦'(나라 방)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이 글자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때까지 '수도' 라는 뜻으로 쓰이던 '' 자가 나라를 뜻하는 글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25] 세(世)는 준7급, 민(民)은 아예 8급 한자이다.[26] 태종이 틀에 박힌 관습에 얽매인 사람이 아닌, 실리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는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조선이 대역죄인에게 형식적으로는 능지형을 내리나, 실제로는 극히 비윤리적인 능지형을 안하고 거열형만을 하게 된 부분(물론 거열형도 끔찍하지만 능지형은 비교도 안되게 죽음의 고통을 너무 길게 가져간다)도 기록상 이방원이 언급하였기에, 이방원의 영향인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왕이 죽으면 그 자식들은 음식을 가려 먹는게 당시 지극히 당연한 법임에도,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아들인 세종고기를 매우 좋아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죽어도 상중고기(육선)를 마음껏 먹으라고 유언을 그렇게 남기고 죽은 인물이기도 하다.[27] 후술되어있는대로 왕의 적자에게 내리는 대군 칭호는 태종 본인 때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28] 효(孝)령, 충(忠)녕, 성(誠)녕의 봉호는 돌림자 '-녕'을 제외하고 의도적으로 유교의 중심 가치인 효와 충성을 의도하여 작명되었고, 이후 왕자들은 원래대로 명목상 봉토로서 땅 이름으로 봉호를 삼았다.[29]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같이 활용한 용의 눈물에선 정안군, 정안공, 정안대군 3가지 호칭을 모두 들을 수 있다.[30] 강진숙 번역본[31] 강인숙 번역본[32] 강진숙 번역본[33] 2차 왕자의 난을 뜻한다.[34] 무고죄를 처벌하는 법 정도 된다.[35] 강진숙 번역본[36]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 곤충이라 곡식 외에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37] 태종의 애민정신을 엿볼수 있는 대표적인 설이다.[38] 이 둘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아버지를 도와 국가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경쟁자였던 형제를 제거했고 후계자를 세울때 문제가 많은 첫째 아들을 폐하고 셋째 아들에게 넘겨주었다.[39] 송충이가 크게 번져 현륭원 근처의 소나무가 모두 고사하여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냅다 씹어 삼켰다. 그러자 하늘에서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내려오더니 그 송충이들을 다 먹어치웠고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의 일화가 백성을 위한다는 애민(愛民)의 면모를 강조한다면 정조의 일화는 효심을 강조하는 전개다.[40]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고 네 다리는 통나무, 코는 누에와 같다고 나온다.[41]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의 장도로, 현대에는 율촌산단을 조성하면서 매립해서 육지가 되었다.[42] 만약 1500여 년 전 로마에서 잡혔다면 코끼리황제 앞에서 글자를 쓰는 등의 재주를 익혀 나름대로 쓸만한 수준이 되었겠지만 조선코끼리 서식지와 멀리떨어져있고 중국 최남단 지방이나 동남아 국가에서 사육사를 데리고 오는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그걸 감안해도 코끼리는 키우는 데만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동물이었다. 오죽 비용이 많이 들면 아시아코끼리가 자생하는 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이 미워하는 신하에게 코끼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를 키우려니 살림이 거덜나고 그렇다고 죽이거나 다른데 넘기려니 이 직접 하사한 놈이라 불충이 되기 때문...[43] 이는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입장인데, 영어권에서 white elephant라는 말은 애물단지를 가리키곤 한다. 특정 문화권에서 흰 코끼리 (알비노)는 신의 축복이란 설이 있었는데, 그래서 흰 코끼리가 태어나면 잘 보살펴야만 했다. 일이나 전쟁 등에 써먹는 것도 당연히 금지였으니, 이 코끼리 하나 맡으면 지방 영주의 재정이 망가지는건 순식간.[44] 실제로 태종은 어려서부터 무예보다는 문재에 뛰어났다. 무력의 관한 기록은 을 잘쏘고 사냥을 활발히 했다고 언급되있다.[45] 태조가 장군시절 전설적인 용장이었고, 정종 역시 무관으로서 고려시대 때부터 활약하며 곰처럼 강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이성계의 후손이라 그런지 조선의 왕 중에는 덩치가 좋았다는 기록이 있는 인물이 많다. 문종도 그렇고 성종이나 그 아들들인 연산군과 중종도 그렇고, 심지어 효종은 언월도와 철퇴 등으로 무예를 연마하는 걸 즐겼기에 죽을 때 어깨가 너무 넓어 미리 짜둔 관이 안 맞을 정도였다. 집안 전체가 이런 떡대들이니 웬만큼 건강한 사람이라도 연약해보였을 것이다.[46] 장남인 정진은 임금을 모시고 있어서 살아서 수군이 되었다가 1407년(태종 7년)에 복직되었고 세종 시기 형조판서까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47] 이방원이 형 이방간을 살려준 것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는데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왕실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마당에 동복형제까지 죽였다가는 아무리 진압의 명분이 정당하다 해도 민심이 매우 흉흉해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으로 본인의 집권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전체의 정통성에도 흠집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임을 박포에게 모두 몰고 형 이방간의 목숨을 살려준 것. 이성계이방과가 동의한 것도 가족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이 부분도 있었다.[48] 세종의 장인 심온의 경우 과민 반응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아들이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모르므로 최대한 아들왕 노릇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내린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결단력과 총명함을 겸비한 명군(성군)이었지만 만약 세종능력은 뛰어나나 정에 약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었고, 심온의 가족들이 권력욕이 있었다면 외척들에게 휘둘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실제로 심온 본인은 몰라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여러모로 자중하지 않고 태종의 심기를 꾸준히 건드렸다. 청송 심씨 가문의 권력 자체도 이미 태종이 숙청한 여흥 민씨에 못지않게 강력해 안 그래도 어그로가 뿜어져나오는 가문이었는데 몸을 사리기는 커녕 대놓고 숙청해달라는 수준으로 깝치고 나대고 다녔으니 태종의 숙청의 레이더에서 끝내 벗어날 수가 없었다.[49] 주로 자신이 세운 공을 믿고 권세를 누리는 공신들이 해당.[50] 실수든 아니든 왕의 침전에 무단출입하는 것은 한낱 국왕 시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일로 엄청난 사건이다.[51] 다만 이 궁녀도 끝은 좋지 않았는데 2년 뒤 태종이 장미를 목을 졸라 죽이든지 물에 던져 죽이든지 해야 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이 2년 사이에 궐에서 벌어진 소동들 때문인데 이것들을 건급하면서 장미도 덤으로 얽혀 재소환된 것.[52] 고려시대 과거는 진입 장벽이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유는 고려시대과거 제도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무과를 치르지 않았고 문과와 잡과만 치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어려운 시험을 불과 17세(현재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응시자 중 나이 기록이 있는 사람 중 거의 최연소)에 해당하는 나이에 붙었으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53] 정도전은 18세, 정몽주는 19세. 당대 여말선초의 제일 석학들과 비교해도 매우 뒤쳐지지 않는다. 특히 고려시대과거 시험은 족벌화가 매우 심해서 감독관의 제자들이 대부분 합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고평가 받을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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