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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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아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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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연도
2016년
이름
태진아
분야
가수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옥관.jpg
연도
2002년
이름
태진아
분야
가수
옥관문화훈장(4등급)


조성모
송대관
For Your Soul
네 박자

(1999년)

조성모
태진아
아시나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
(2000년)


god
태진아

잘났어 정말

(2001년)
조성모
태진아
아시나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

(2000년)

god
태진아

잘났어 정말
(2001년)


장나라
Sweet Dream
(2002년)

파일:seoulmusicawards2.png
서울가요대상 대상
변진섭
<어떤 이별>
(1990년)

태진아
<거울도 안 보는 여자>
(1991년)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태진아
太珍兒 | Taejin-ah


파일:태진아.jpg

본명
조방헌 (曺芳憲)
출생
1953년 2월 16일 (음력 1월 3일)[1] (71세)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창녕 조씨 (昌寧 曺氏)[3]
신체
174~175cm[4], 68kg, B형
가족
아버지 조금복[5], 누나 조남순[6], 남동생 조방원[7][8]
배우자 이옥형[9]
장남 조유명[10]
차남 조성현[11]
학력
관기국민학교 (졸업)[12]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 / 학사)
종교
불교개신교(예장통합)[13]
소속사
진아엔터테인먼트
데뷔
1973년 '내 마음 급행 열차'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이박사와의 악연?
6. 광고
7. 수상 경력
8. 히트곡



1. 개요[편집]


대한민국트로트 가수.

예명인 '태진아'는 배우 태현실의 태, 가수 남진의 진, 가수 나훈아의 아를 따와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14] 태진아가 90년대에 현대의 SNL처럼 코미디 꽁트가 코너로 포함된 KBS 오락프로그램에 특별출연해서 짧은 꽁트를 했을때 이 예명 소재로 꽁트를 한 적이 있는데, 다른 내용이었다. 어릴적 동네에서 잘생겼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아서 잘 놀았고 노래도 잘하던 노는 형님 이름이 "진아"라서 그걸 따서 지었다는 것. 꽁트 내용은 조방헌이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하여 동네 어귀에서 혼자 예명을 생각하다가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게 되어 남녀노소가 이거저거 추천해주는데 죄다 우스꽝스러운 것만 추천해서 태진아가 모두 마음에 안 들어하던 중, 10대 시절을 회상하여, 회상장면이 시작되면서 개그맨 한명이 그 진아형님 역할로 나와 평소 노래를 좋아하던 태진아에게 기타치며 노래를 가르쳐주고 놀면서 살다가 어느날 말없이 동네를 떠나는 걸로 회상장면 연기를 끝내는데, 현실 시점에 돌아와 동네 아저씨 역할의 개그맨[15]이 태진아에게 "방헌아, 예전에 우리 동네에서 진아가 노래도 잘하고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았으니까, 너도 가수돼서 노래도 잘하고 인기 끌라고 니 예명도 진아로 하는게 어떠냐?"라고 하고, 태진아가 어색한 톤으로 발연기를 하면서 "진아형님 이름은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제가 조씬데 조진아가 뭐에유 조진아가ㅠ"라고 울상연기를 하니까, "그래. 조진아가 될 수는 없으니, 성은 큰 사람 되라고 클 태 자로 하자. 태진아."라며 예명 추천을 하는 내용이었고, 마무리는 태진아가 마음에 든다고 예명을 정한 뒤 매니저가 동네에 찾아와 "방헌아 드디어 섭외가 왔다"고 말하며 방송 섭외가 왔다고 알려주자, 같이 있던 동네 사람들이 "태진아 만세"[16]라고 외치며 다같이 좋아하다가, 회상장면까지 꽁트에 출연한 개그맨들까지 전부 다같이 나와서 태진아와 함께 그의 히트곡을 부르면서 끝나는 간단한 꽁트코너였다. 꽁트 끝나고 사회자와 대화하는 토크 시간에 실제로 어릴때 동네에 노래 잘하시던 진아 형님이 있었다고 본인이 말하기까지 했다. 무명 시절 지방 공연을 갔다가 그의 본명을 들은 작곡가 서승일이 조방헌은 너무 평범하고 촌스러우니 예명을 지으라고 해서 지금의 예명이 탄생했다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은 후 옥경이, 거울도 안보는 여자, 미안 미안해가 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한국에서 인기있는 트로트 가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대표곡으로는 '옥경이', '바보', '노란 손수건', '미안 미안해', '거울도 안 보는 여자', '선희의 가방', '장미와 우산', '사모곡',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동반자', '잘 살거야', '사랑은 돈보다 좋다', '일 나겠네', '진진자라', '아줌마' 등이 있다.


2. 생애[편집]


1953년 2월 16일에 충북 보은군에서 4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 가난한 집안 형편[17] 때문에 국민학교[18]만 겨우 졸업하고[19] 13살이던 1966년에 상경하여 수많은 직업들을 전전하며 살다가 작곡가 서승일에게 발탁되어 1972년에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노래 '추억의 푸른언덕'이 흥하면서 신인상을 휩쓸었지만, 2년 뒤인 1975년불륜 사건으로 구속된 흑역사가 발생했다. 불륜 대상은 23살 연상이던 현대건설 조성근 사장[20]의 아내 김보환[21]으로, 태진아와 만날 때마다 용돈조로 몇백만 원씩 주며 만남을 이어오다 결국 조성근 사장이 형사들을 대동하고 여관에 쳐들어가 현행범으로 검거되었으며, 조성근 사장은 태진아를 고소했다가 이후 합의이혼을 하며 고소를 취하하여 구속에서 풀려났다. 김보환씨와 태진아 어머니랑 나이가 비슷했다고 한다.[22][23]

불륜으로 인해 한동안 연예협회 가수분과에서 제명되어 낙향한 뒤 '이쁜이들'이라는 여성 듀엣의 음반에 기획자로 나섰다. 이 시기 중 어느 한 시기에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쳤다.

그 후인 1980년, 다시 가수 복귀를 꿈꿨지만, 과거 불륜 사건 때문에 방송 출연 금지가 되어, 미국으로 가서 먼저 정착해 있던 선배 가수 송대관의 도움으로 교포 사회의 밤무대 활동 등을 하며 가정을 꾸렸다. 1984년 1월, 방송 출연 금지가 해제되자 한국에서 음반을 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를 반복하던 중, 1989년 '옥경이'가 히트를 친 다음 1990년에 '거울도 안보는 여자'가 가요톱텐에서 골든컵을 수상한 다음 후속곡인 90년 '미안 미안해' 역시 여러 번 1위를 할 정도로 히트하면서 송대관, 설운도, 현철과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이 되었다.

2010년에는 송대관 후임으로 제5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으로 취임했고,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을 적극적으로 나서 중재를 해서 사태를 안정시켰다. 덕분에 카라의 팬덤 카밀리아에서는 태진아를 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감사하고 있다. '진아기획'이라는 음반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의붓아들 조유명이 설립한 자회사 'YMC엔터테인먼트'라는 매니지먼트 회사가 존재하며, 양쪽 소속 가수가 동일하다. 현재는 YMC엔터테인먼트는 해산되었다.


3. 여담[편집]


  •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해 물로 배를 채우고, 초등학교[24]를 졸업할 때까지 도시락 없이 등교하는 건 물론이요 명절 때 고기 한 번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25]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66년에 무작정 서울특별시로 상경해 중식당 배달부[26]를 했는데,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배달을 하려 들고 가던 군만두[27]를 몰래 몇 개 먹었다가 어떻게든 수를 써서 돌려막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들통나서 중식당 사장에게 된통 꾸중을 들었다.

  • 송대관과는 방송에서 라이벌 겸 앙숙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절친한 사이다.[28] 티격태격하는 것은 그저 기믹이고, 실제로는 서로 자가용도 빌려줄 정도로 깊은 우정을 자랑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송대관과 태진아처럼 겉으로는 서로 티격태격 하지만 실제로는 친한 사이인 사람들에게 'X진아 - X대관'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한다. 알다시피 둘 다 미국에서 함께 고생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


  • 이호연 DSP미디어 대표이사와는 그가 살아생전에 친분이 깊었다. 애초에 이호연이 연예계에 발을 들여서 제일 처음 했던 것이 태진아의 매니저였으며 이게 인연이 되어 각자 가는 길을 달랐지만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호연이 운영하는 DSP미디어에서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가 발생하자 태진아가 중재했다.

  • 1981년 여배우 최정민과 약혼식을 올렸고 곧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는 발표까지 했으나 수 개월 후 파혼한 적이 있다. 이후 현재의 부인과 결혼했다.

  • 부인의 이름이 '이옥형'인데 왜 태진아 노래의 제목은 '옥경이'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태진아도 실제로 아내의 이름을 '이옥경'으로 잘못 알고 있었으며, 혼인신고를 하면서 제대로 된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29] # 그런데 이것 때문에 부부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부인인 이옥형 씨도 마찬가지로 태진아에게 '조방헌'이란 본명이 따로 있다는 것을 혼인신고를 하면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둘 다 서로의 본명도 모르고 연애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 2023년 6월 1일, 태진아 아내 이옥형의 치매 투병 중인 사실이 아들 이루의 음주운전 재판 과정에서 알려졌다. # 태진아의 인스타그램에는 최근까지도 아내 이옥형과 함께한 사진들이 가득하다고...

  • 신혼 초 미국에 살 때 장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당시 장모의 집은 원룸이었다고 한다. 태진아는 방 한쪽에 커텐을 쳐놓고 살았는데, 이때 이루가 생겼다고 한다.

  • 아들 이루도 가수로 데뷔했으며,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대박을 쳤다. 대신 장르는 다르다. 그리고 아들은 현재는 가수 활동보다는 배우 활동이 더 많다.

  • 선술하였듯이 카라 팬클럽인 카밀리아에서는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당시 대한가수협회 회장으로서 전속 계약 문제로 난리가 난 카라 해체를 막는 데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덕분이다.

  • 1996년 말에는 배우 김자옥을 위해서 공주는 외로워[30]라는 곡을 제작한 적이 있다. #

  • 1997년, 본인의 소속사에서 발굴한 보이그룹 에이알티를 데뷔시켰으며, 데뷔곡 '슬픈 얼굴'이 가요톱텐 차트에서 5위까지 올라가면서 선전했고, 그 뒤로도 많은 곡들을 남겼다.[31] 또한 이 해에 연기에도 도전한 적이 있는데, KBS2의 일일 시트콤 마주보며 사랑하며가 유일하다.

  • 동반자로 동방신기 팬을 낚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태진아가 당시의 상황을 방송에서 이야기 했는데, 이천 도자기 축제에서 의도적으로 낚시를 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보통 행사 레퍼토리는 동반자를 제일 처음에 불렀는데 이 날 동방신기 팬들이 쫙 깔린 것을 보고 의도적으로 순서를 제일 마지막으로 돌려 3번째에 배치시켰다고 한다. 게다가 '반'의 발음도 일부로 뭉개서 '방'과 헷갈리게 발음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낚인 것을 알고 다같이 웃는 모습이 나온다.

  • La song과 태진아 본인의 동반자를 매시업 한 영상들이 인기를 끌면서[32] 두 명이 한 무대에 같이 선 적이 있다. 비진아 인기가요 버전. 당시 비는 연예병사 논란으로 이미지가 몹시 나빴고, 'La song' 곡 자체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곡의 후렴구가 어딘가 태진아의 창법과 유사해서 이를 이용한 패러디 영상이 인기를 끌자, 비가 아예 태진아와 듀엣 공연을 한 것이다. 이 병맛 공연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대성공했으며, 이후 실제로 리메이크 버전이 태진아의 앨범에 수록되었다.




  • 2010년 가을, 작사가 최희진[33]이 허위글을 올려 태진아 본인과 아들 이루 모두 한동안 마음고생을 한 적도 있다. 기사. 이후 최희진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기사. 하지만 이 사태 때문에 태진아도 이루도 이후로 모두 이미지들이 조금 안 좋아졌다.

  • 2015년에는 억대의 도박을 했다는 잘못된 설로 또 한동안 곤욕을 치렀고, 이에 대해 본인이 결정적 증거를 보이면서 직접 해명했다. 본의 아니게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이 사진들이 주로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사.


  • 김혁규경상남도지사를 양아버지처럼 여긴다. # 미국에 건너가서 한창 고생하고 있을 때 뉴욕한인경제연합회장이자 사업가였던 김혁규가 그를 물심양면껏 지원해 줬기 때문에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태진아의 의붓아들 조유명의 결혼식 때도 김혁규 전 지사가 주례를 서줬다. 태진아 역시 김혁규가 경남지사 선거에 나갈 때마다 지원 유세를 해줬고,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을 역임하던 시절에는 태진아가 김혁규 후원회장을 맡았던 바 있다.

  • 보은군·옥천군·영동군·괴산군을 지역구로 하는 미래통합당(後 국민의힘) 대한민국 국회의원박덕흠과는 친분이 있다. 본인의 고향이 박덕흠 의원의 現 지역구 중 하나이기도 하다[34].

  • 무대 의상은 항상 두 벌을 제작한다고 한다. 강남1대 100에 출연했을 때 밝히길, 장지기장 활동 당시 강남과 옷 사이즈는 물론 신발 사이즈까지 맞아서 활동 내내 강남은 태진아의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고 한다.

  •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해 우유콜라라면이라는 괴악한 라면 조리법을 소개해 큰 이슈가 되었다. 방송에서 먹어본 이들과 일부 따라해 본 시청자들은 얼큰하면서 달달하다며 호평했지만, 그 외의 대부분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이를 직접 따라해 본 사람들 혹은 스트리머들은 토할 것 같다는 후기였다. 아마도 방송만으로 정확한 레시피를 알 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 건물주 연예인 중 한 명이다. 2013년 여름에 아들과 함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에 위치한 5층 건물을 구입하였다. 1년 사이 7억원의 시세차익을 얻었으며, 부동산 전문가에 따르면 태진아 명의 건물은 도로가에 위치해 있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시세가 약 50억원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현재 이 건물의 1층에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으며, 1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은 태진아가 사장으로 있는 진아기획, 태진아의 장남 겸 의붓아들인 조유명이 사장으로 있는 스윙엔터테인먼트 및 이루기획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 상술한 카페 겸 레스토랑에는 각종 화환과 태진아 본인을 포함한 소속사 가수들의 사진들이 즐비하며, 종종 나타나 손님들을 접대하기도 한다. 사진이나 사인을 요청하면 흔쾌히 응하는데, 푹푹 찌는 한여름에도 긴팔에 롱코트 차림을 고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 태진아는 강남에게 이상화결혼을 할 경우 3,000평 땅을 준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 실제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해 화제를 모은 바도 있다.

  • 현진영에 따르면 임재범, 전인권과 함께 1990년대 가요계 군기반장 3대장에 속했다고 한다. 해당 영상. 정확히는 항상 웃는데 속을 알 수 없어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정도가 똥군기 정도까지는 아니였던 모양인지 인성에 대한 논란은 없었기에 신상필벌이 확실한 선배인 모양이다.

  • 영화 마강호텔에 본인 역으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04년 9월 11일 오후 7시에 공연 스케줄로 인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전라북도 고창군으로 이동하던 중 부안톨게이트 부근에서 사망할 뻔 했던 대형 교통사고가 났는데, 그날따라 비도 많이 오는데다가 공연도 무려 4곳이나 잡혀있는 등 스케줄이 매우 빡빡할 뿐 아니라[35] 이 상태에서 속도를 높이면 수막현상이 발생해 사고가 날 수 있어서 당시 매니저인 김모(당시 39세)[36]씨가 당시 상황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가속을 할 수밖에 없어 빗길에 가속을 했지만 이때 빗물에 타이어가 떠버리는 수막 현상으로 차가 미끄러져 도로를 탈선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3바퀴 이상을 돌아 언덕 밑 낭떠러지로 추락했고, 그 밑으로 심어져 있던 나무의 가지 사이에 차가 걸렸는데, 사고의 충격으로 차는 폐차 수준으로 완파되었지만 타박상 정도에 불과한 상처만 입었다.[37]

  • YMC엔터테인먼트 설립자의 아버지라 인스타그램에 워너원 멤버들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게시물도 올렸었다. 해체 후에도 마찬가지로 워너원이 그립다는 게시물을 올리고 있다.

  • 현재랑 마찬가지로 아이돌에 관심이 많아서 나오는 팀들마다 전부 응원하고 홍보를 많이 하였다.

  • 오래전과 달리 지금은 노래를 부를 때 목소리가 너무 썩었다면서 이 점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보다 7살 연상인 송대관은 여전히 맑고 청아한 목소리인데, 태진아는 목소리가 많이 안 좋아졌다.

  • 2008년 만원의 행복 촬영 당시 애니콜 네온 폰(SCH-W390)을 사용하던 것이 확인되었다.



4. 이박사와의 악연?[편집]


  • 이박사의 팬들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다.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광대라고 폄하한 것 때문에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실제로도 이박사와 그의 주요 장르인 뽕짝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일례로 2014년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여한 Mnet 트로트 엑스에서 이박사가 참가자 자격으로 무대를 펼치자, 방송중임에도 표정관리 없이 진심으로 짜증 가득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장르에 대한 존중 따윈 결여되어 있는, 아티스트로서 그다지 좋게 볼 수는 없는 태도다. # 얼마나 대놓고 짜증을 냈는지 옆에 있던 설운도가 이박사를 좋게 봐 주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주저할 정도. 이 때 이박사 또한 태진아를 향해 삿대질을 날렸고, '디스코를 잘 추며 잘 노네' 부분에서 급발진 버럭을 외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실 이는 태진아 VS 이박사 간의 가요계 내 신경전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다. 그러나 이 때를 제외하면 이박사 쪽에서 특별히 태진아를 비난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상 태진아의 일방적인 혐오라고 보는 것이 옳다. [38]

  • 태진아가 이박사뽕짝을 대놓고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기에 태진아는 뽕짝 앨범을 내지 않았을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오히려 태진아도 뽕짝 앨범을 세 장이나 낸 적이 있다. 뽕짝은 사실 트로트 메들리로 부르는 게 맞으며, 트로트 메들리를 흔히 '뽕짝 메들리', '관광버스 메들리'라고도 한다. 트로트 메들리를 좀 정겹게 이름 붙인 게 뽕짝인데, 무명 트로트 가수들은 메들리 음반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며, 지금은 유명한 유명 트로트 가수들 중에도 이러한 메들리 음반을 내는 경우가 있다. 태진아도 '끝내주는 디스코 메들리'라는 이름으로 음반 석 장을 냈었다. 현재 한국에서는 1960년대의 정통 트로트에서 갈려진 '블루스 트로트[39]', '발라드 트로트[40]', '락 트로트[41]'가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고, 2000년대 이후 댄스 트로트[42], 세미 트로트[43] 등도 연달아 등장하여 젊은 층의 인기를 얻게 되자 인기=정통이라는 인식으로 자신들을 이른바 '정통 트롯'이라며 자화자찬하며 다른 트로트 장르들인 올드 트로트, 엘레지 트로트, 국악 트로트, 뽕짝, 품바, 각설이 등을 오래되고 수준낮은 트로트 장르라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뽕짝이 태진아를 위시한 현 트로트 업계에서 대놓고 무시당하게 된 이유는 무시당하던 다른 트로트 장르들은 점차 인기가 줄어들어 사실상 사장되었다면 뽕짝은 흥이나는 창법이 관광업의 성장과 맞물려 함께 성장하여 살아남았고 뽕짝으로 유명한 이박사가 일본에 진출하여 대박을 거두며 일본에서도 현지 교민 외에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매니아 층이 생기며 하나의 장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 또한 뽕짝을 좋아하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상당수 존재하기에 한국의 현 트로트 업계에서 뽕짝을 무시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의견도 많고, 현재 인기 트로트 가수들 중에서도 뽕짝 메들리로 유명한 가수들로는 김용임, 진성, 박구윤 등이 있다. 뽕짝이 한국에서 인기가 없는 트로트 장르라면 뽕짝은 진작에 취급하는 가수들이 없이 사장되어 명맥을 유지 못 했을 것이지만, 뽕짝은 이박사의 전유물이 아닌 유명한 트로트 가수들도 취급한 장르로 발전하는 중인데도 태진아를 위시한 트로트 가수들이 뽕짝을 무시하는 이유는 현 트롯 업계에서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정작 일본에 진출하였을 때 엔카의 굳건한 인기 속에 맥을 못춘 것과 달리 뽕짝은 일본에서도 성공했으며 그 외에 중국, 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평소 한국에서 자신들이 관광음악이라고 무시하던 뽕짝이 다른 국가에 진출하여 발전하며 한 장르로 자리잡자 그에 대한 반감으로 '뽕짝'을 더욱 홀대하며 아예 트로트가 아니라는 식으로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해졌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 뽕짝을 대놓고 무시하는 태진아도 정작 뽕짝으로 음악을 시작했으면서 인기를 얻게 되자 다른 트로트 장르로 갈아타고는 뽕짝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다며 한국의 몇몇 트로트 가수들과 같이 뽕짝을 이박사가 일본에 선보여 성공한 것에 시기하여 무시하는 것이라는 의견 또는 자신이 신인 시절 뽕짝 메들리 앨범을 여러 장 낸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자신이 앞장서서 뽕짝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의견이 있다. 한국에서 자신이 트로트 가수 신인 시절 뽕짝으로 활동하다가 다른 트로트 장르로 바꿔서 활동하면서 뽕짝을 대놓고 무시했는데, 이박사는 뽕짝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일본에 진출하여 인기 장르로 자리잡았기에 질투심, 수치심과 모멸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라는것이 의견에 대한 근거라고 보고 있다. 태진아가 무시하던 이박사는 일본에 진출하여 후지테레비의 HEY!HEY!HEY!에 2번째로 출연한 외국인 가수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 니코니코 동화에 올라오는 이박사의 영상에는 한국인에게 흔히 붙는 비하나 욕이 전혀 달리지 않으며 애초에 영상에 붙는 태그가 '한국을 싫어하는 나도 인정하는 한류 슈퍼스타'일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일본에서 뽕짝이 한국 트로트의 한 장르로 자리잡자, 일본에서는 한국의 다른 트로트 장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박사가 다른 한국 트로트 장르 가수들의 일본 진출을 도운 셈이다. 이박사를 염두에 둔 듯 태진아는 정통 한국 트로트를 일본에 보여주겠다며 호언장담하며 일본에 진출했지만, 한국에서는 태진아가 인기 트로트 가수이나, 일본에서는 별로 인지도가 없는 듣보잡이다. 일본에서 자신의 곡들을 선보였지만, 폭망했다. 태진아, 日서 굴욕?… "관객 2명 앞에서 노래" 눈물 펑펑이라는 기사 헤드라인처럼 트로트 한류를 만들겠다며 호언장담하고 일본에 진출했지만 실패한 흑역사가 있는데, 이박사는 일본에 진출한 직후부터 자신만의 뽕짝 스타일의 흥겨움으로 승부를 걸어서 성공했다.

  • 그리고, 이박사는 '한국의 트로트가 일본 엔카의 아류 취급' 을 받았던 시절에도, 당당하게 한국의 민요를 기반으로 소리를 했던 가수였고 자신만의 한국식 뽕짝 트로트를 세계에 알린 사람이다. 대표적으로 새타령, 강원도 아리랑, 뱃노래, 옹헤야, 신고산 타령 등 수많은 한국의 민요를 부르기도 했고, 아예 민요 메들리를 앨범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트로트에 관심이 없는 젊은 세대에서도 이박사는 충분히 태진아에 비견될 정도로 인지도와 명성이 매우 높은 편이다. 게다가, 이박사는 국내무대라면 몰라도 해외 무대에서만큼은 이박사가 태진아보다 훨씬 유명하다.

  • 태진아나 이박사나 모두 일본 진출의 시기는 달라도 진출할 당시에는 인지도가 없었는데, 이박사는 성공리에 안착한 반면 태진아는 실패했으니 태진아의 일본 진출 실패가 더더욱 초라해 보이는 것이다. 태진아가 일본에서 실패한 이후부터 더욱 이박사나 뽕짝을 무시하는 태도의 강도를 높인다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태진아가 뽕짝을 무시하는 태도와 별개로 한국에서는 과거보다 뽕짝을 다루는 트로트 가수들이 늘면서 뽕짝에 대한 편견들도 상당수 사라지면서 과거 지나치게 뽕짝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 나쁘다는 인식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리고, 정작 기본적인 화성학 지식도 아예 없어서 과거의 태진아에게 곡을 써준 한 작곡가에 말에 의하면 도미난트7에서 토닉으로 끝나는 아주 기본적인 종지법도 모른다고 혀를 내둘렀다.[44] 물론, 태진아는 국민학교만 마치고 올라왔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 해서 생긴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이박사는 어머니가 국악인이었고 어려서부터 음악에 심취했기 때문에 민요를 기반으로 노래를 배워서 출발선부터가 다르다. 게다가 작사작곡을 직접 작업하는 이박사의 역량과 비교해도 "고작 태진아 따위가?" 라고 부를만큼 이박사의 능력이나 음악적 성과나 유명세도 태진아보다 월등하게 천지차이로 크다.



  •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이박사"태진아에게 전혀 악감정이 없다." 라고 해명하면서 "대중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 라고 증언을 하였다. 오히려 무명시절에 태진아가 돈을 챙겨주며 격려해준 적이 있기에 지금까지도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많은 논란이 있었던 트로트 엑스 당시에도 오히려 촬영 후에 둘이서 간만에 담소도 나누는 등 분위기가 매우 좋았으며, 상술한 광대 발언도 전혀 폄하하는 뉘앙스가 아니었다고 한다.


5.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편집]








▲ 풍선
▲ 대답 없는 너
▲ 만남
2019년 8월 11일, 8월 18일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108차 경연에서 오늘 가왕으로 데뷔합니다! 픽미 픽미 픽미 업~ 아이돌! 라는 가명으로 참가해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오늘 가왕으로 데뷔합니다! 픽미 픽미 픽미 업~ 아이돌!
EP.
방송 날짜
곡명
원곡자
VS.
득표수
108-1
2019년 8월 11일
풍선
다섯손가락
열 아이돌 부럽지 않다! 나는~ 아이둘!
53
108-2
2019년 8월 18일
대답 없는 너
김종서
내 노래 듣고 키 컸으면~ 키 컸으면~ 복면우유
75
108-3
만남
노사연
우가우가! 나 찍어라! 내 이름은 가왕트랄로피테쿠스
29

6. 광고[편집]


연도
광고
1993년
옥소리(사운드카드)
2004년
오천콜 대리운전 (라디오CF)
2004년 ~ 2010년
명인제약 이가탄
2005년
고창서해안복분자 (전주MBC TV 방영)
2006년
참이슬
2017년
트라이
2003년 ~ 2015년
청원생명쌀
2008년 ~ 2010년
보은대추
2019년
치킨더홈
2020년
첵스 파맛(인터넷)
2020년
라그나로크 오리진
2022년
OK금융그룹


7. 수상 경력[편집]


  • 1998 제13회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 디스크 부문 본상

8. 히트곡[편집]


곡명
발매일
옥경이
1989년
거울도 안보는 여자[45]
1990년 7월
미안 미안해
1990년 7월 30일
사랑은 토요일 밤에, 노란 손수건
1992년 5월
사모곡
1993년 6월
가버린 사랑[46], 그대곁에
1994년 12월
사랑은 아무나 하나[47]
2000년 4월[48]
잘났어 정말
2001년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2002년 5월 9일
바보, 이유가 뭘까
2003년 4월 15일
동반자[49]
2004년 4월 8일
잘 살거야
2005년 2월 18일
아줌마[50]
2006년 2월 16일
자기[51]
2008년
사랑은 돈보다 좋다
2010년 2월 23일
일나겠네, 사랑했나요
2011년 2월 18일
사랑은 눈물이라 말하지
2012년 2월 27일
진진자라
2015년 7월 16일
최고의 사랑
2017년 3월 12일
사랑엔 답이 없네요
2018년 7월 28일
그게 답이야
2018년 8월 10일
자기가 좋아
2019년 4월 9일
김선달
2019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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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3년 5월 17일 (음력 1953년 4월 5일)은 호적상 생일이다. 2015년 원정도박 사건 의혹 당시에 본인이 YTN 뉴스에서의 통화에서 "제가 올해 육십세 살 이잖아요."라고 말했고, 뿐만 아니라 구정 다음다음날이 자신의 생일인 것도 밝힌 바 있다. 게다가 아침마당에서도 이용식보다 한 살 적다고 알려졌으나, 1952년 1월 29일생 설은 20년 가까이 잘못 알려진 정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4월 5일에 생일 축하를 해 주는 경우가 많고, 인스타그램에 4월 5일에 생일 케이크를 받은 장면들이 몇 있다.[2] #[3] 25세손 규(圭) 희(喜) 기(基) 항렬이지만 쓰지 않았다.[4] 2004년 7월 3일 방송된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한지혜와 같이 선 걸 보면 약간 비슷하거나 살짝 크게 보이나, 방송 당시에 한지혜의 발 부분은 계속 가려져 있어서 한지혜가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그날 방송이 진행되었는지 아닌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와 별개로 장지기장을 부를 때 처음에 약 177cm인 강남과 등을 맞대고 서는데, 이 과정에서도 새끼손가락 한 마디 비슷하게 차이나며, 가족오락관 녹화 당시에도 172cm인 허참보다 살짝 크게 포착되었다. 단, 머리숱이 많아 붕 뜬 머리는 예외이며, 한때 다음 프로필 상의 키는 174cm 이었다. 그 세대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장신에 속하는 편.요즘으로 치면 180cm 정도 되는 격이다.[5] 해피투게더에서 밝혀졌으며, 1921년생으로 2005년 12월 27일에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향년 84세로 작고했다.[6] 달콤한 고향 나들이, 달고나에서 밝혀졌다.[7] 1956년 생이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인간극장에서 밝혀졌다.[8] 실제로는 7남매라고 한다.[9] 1952년생으로 태진아보다 1살 연상이라 알려져 있으며, 이미자의 5촌 조카라고 한다. 태진아를 만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해서 현재의 첫째 아들은 전남편의 아들이라고 한다. 단, 첫째 아들이 수십년간 부친 태진아의 매니지먼트를 하는 만큼, 태진아는 친아들로 대하고 그를 길렀다고 한다. 옥경이라는 노래에서처럼 '옥경'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이 많은데, 처음 만났을때 소개해 준 사람과 사귈때 만난 처가식구들조차 아내를 옥경이라고 불러서 태진아도 옥경이로 부르다가 결혼하면서야 겨우 진짜 이름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어감상 옥형이보다도 옥경이가 더 자연스러워서 옥경이로 불렀다고 하여 태진아도 처가식구들처럼 결혼 후에도 그렇게 부른 거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래도 그렇게 작사한 것. 여담으로, 혈액형은 이루가 AB형인 걸로 봐서 정황상 A형 또는 AB형임을 짐작할 수 있다.[10] 의붓아들[11] 친아들[12] 현 관기초등학교[13] 현재의 직분은 집사로, 본인의 히트곡 중 하나인 동반자의 원래 가사는 '주님은 나의 동반자'이지만 이 곡을 만들었던 2004년 당시에는 마음의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있던지라 이루와 상의하던 끝에 아들 이루의 제안으로 주님을 당신으로 수정하는 등 일반 가요로 가사를 일부 수정했고, 훗날 CBS 등의 기독교방송 채널에서 원래의 가사 그대로 부르며 복음을 전파하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또한 2000년 가요대상에서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주님께 감사드리고요."라고 한 적도 있고, 그 외 각종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자주 언급한다. 원래 태진아의 집안은 철저한 불교 집안으로, 태진아 본인도 크리스천인 아내의 권유에도 "교회 다니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제발 잘 먹고 잘 살 궁리나 하자" 라고 넉 달간 다투면서 꿋꿋이 불자 생활을 하였으나, 미국에서 살던 중이던 1981년개종하였다.[14] 일본어로 '테지나(手品(てじな))'는 '마술'이란 뜻이다. 70년대는 일본어를 일상 중에 섞어쓰는 일이 많았던 시기인만큼, 일본어 '테지나'에서 유래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과연 진실은?[15] 이 역할은 개그맨 김정식(코미디언)이었다. 물론 태진아보다 어리지만, 당시 태진아는 이미 40대였기 때문에 같이 출연한 개그맨들이 신인이나 중견급이나 모두 태진아보다 어린 20대와 30대 뿐이라, 그나마 그 중 제일 선배인 김정식이 어른 역할이었다. 그리고 태진아는 20년전 청년이었던 본인 역할을 했다.[16] 매니저 역할 개그맨은 태진아가 누구냐며 당황스러워 한다. 본명 밖에 모르니까.[17] 2008년에 한 방송에서 500mL짜리 물통을 들며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해 물로 배를 채웠다 말하기도 했다.[18] 보은관기초등학교.[19] 가수로 성공한 후 1998년에 중학교 검정고시, 이듬해에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2001학번)에 진학해 2008년에 졸업했다.[20] 1922년생, 육사 2기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당시에도 함께 했다. 예비역 소장으로 전역한 후 여러 기업체를 옮겨다니며 사장을 지냈는데, 대한통운을 거쳐서 온 회사가 현대건설이었다. 이후 1978년을 끝으로 국제그룹으로 옮겨가 대하건설 사장을 지냈다. 2014년에 향년 91세로 사망.[21] 1930년 생으로, 당시 45세.[22]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하여 조성근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임하고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으로 취임하는 나비효과라느니, 김보환의 장녀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가 파혼당해 자살을 했다느니 하는 별별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들이 여럿 퍼져 있고, 또한 이걸 사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 기사 등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기사 내용을 취합한 사이트.[23] 일단 이 사건이 터진 것은 1976년의 일이며, 조성근 사장은 1978년까지 현대건설에서 일하다가 국제그룹 계열사인 대하건설로 이직했다. 이명박 부사장이 사장에 오른 것은 1978년의 일이고, 그룹의 핵심 계열사 부사장이 사장으로 영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조성근 - 김보환 부부의 장녀는 조성근 전 장관 부고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존해있었다.[24] 보은관기초등학교 12회 졸업생이다. 당시 교명은 관기국민학교.[25] 태진아 본인이 방송에서 밝혔다.[26] 1966년 당시에는 배달 가방이 지금처럼 철가방이 아니라 나무가방이었다.[27] 지금이야 군만두는 서브 메뉴로 전락해서 음식을 주문하면 서비스로 주는 수준이지만, 당시만 해도 군만두도 고급 음식이었다.[28] 방송에 출연하거나 공연 무대에 오르면 송대관 까내리기에 바쁘다.[29] 장모님과 친구들이 아내를 '옥형아'라고 불렀는데 그 소리를 '옥경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30] 이정한이 작사하고 이정우가 작곡했다.[31] 하지만 얼마 뒤 멤버 중 한 명인 박성준여자친구를 폭행하는 바람에 팀이 와해되었다는 설이 돌았는데, 박성준 본인이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나중에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3에서 해명했다.[32] 해당 영상 중 하나.[33] 1973년 12월 3일생으로 '정일영 - 기도', '임창정 - 슬픈 혼잣말' 등을 작사한 인물이다.[34] 정확히는 태진아 본인은 보은군 출신이고, 박덕흠은 아랫동네 옥천군 출신이다.[35] 사고 이후 구급대원의 인도 하에 경찰차를 타고 공연을 그대로 진행 후 서울로 돌아가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36] 1965년 생.[37] 이 내용은 대부분 신앙 간증을 할 때에 밝혔다.[38] 사실 실력 차이를 떠나 이박사쪽이 인기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괜히 라이벌 관계 혹은 불화 관계 만들면 이박사쪽이 불리하다. 이박사는 일본에서 상당히 잘 나갔고 100억을 벌어들일 정도였지만, 국내에서는 뽕짝이라는 장르가 마이너하며 태진아는 국내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사대천왕이 되었기 때문.[39] 조용필의 대전 블루스가 대표적이다.[40] 조용필허공이 대표적이다.[41] 윤수일의 황홀한 고백이 대표적이다.[42] 윙크의 부끄부끄가 대표적이다.[43] 김연자아모르 파티가 대표적이다.[44] 세계의 저명한 음악인들 중에 화성학이나 심지어는 악보를 볼 줄 모르고 감으로만 음악을 했던 사람이 있지만 그런 천재성은 흔하지 않다.[45] 가요톱10 5주 연속 1위(골든컵) 수상[46] 원곡자는 남미웅이며, 그 뒤 조경수임주리가 리메이크했다. 참고로 1995년 12월부터 1996년 7월까지 가요톱텐 순위권에 있었다.[47] 트로트임에도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뮤직뱅크 기준으로 26위까지 올라갔다.[48] 바이브에는 2001년 2월 5일로 오 기재되어 있다.[49] 직접 아들과 공동 작곡한 곡을 다시 직접 찬송가로 리메이크 한곡으로 일반 버전이 8집에, 찬송가 버전이 찬양앨범 사랑:을 노래합니다에 수록되었다.[50] 베이스가 쩌는 것으로 유명하다.유튜브 등에서 '아줌마 베이스'를 검색하면 베이스 기타 커버 영상들이 좀 뜬다. 영상[51] 2005년에 이창용여보 라는 곡으로 이 곡의 멜로디가 붙여졌고, 이 멜로디를 재탕해 나온 곡인데, 초기에는 멜로디가 똑같다며 표절설이 불거졌지만, 엄연히 원 작곡자가 사용한 것이기에 절대 표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