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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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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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
Thomas Edison


파일:토머스 에디슨.jpg

본명
토머스 앨바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출생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주 밀란
사망
1931년 10월 18일 (향년 84세)
미국 뉴저지주 웨스트 오렌지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직업
발명가, 기술자, 사업가
활동
1877년 ~ 1930년
신체
178cm
부모
아버지 사무엘 오그던 에디슨 주니어 (1804~1896)
어머니 낸시 매튜스 엘리엇 (1810~1871)
배우자
메리 스틸웰 (1871년 ~ 1884년, 사별)[1]
미나 밀러 (1886년 결혼)[2]
자녀
4남 2녀
수상
마테우치 메달 (1887)
존 스콧 메달 (1889)
에드워드 롱스트레스 메달 (1899)
존 브리츠 메달 (1908)
프랭클린 메달 (1915)
해군 공로훈장 (1920)
의회 명예황금훈장 (1928)
종교
무종교[3]
서명
파일:Thomas_Alva_Edison_Signature.svg.png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
2. 오해와 진실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사업가로서
3.2.1. 전구 상용화
3.2.2. 테슬라와의 미운정 고운정
3.2.3. 그래도 인정받는 업적
3.3. 말년
4. 가족관계
5. 어록
6. 기타
7. 창작물



1. 개요[편집]


니콜라 테슬라와 함께 2차 산업혁명인 전기 문명시대를 이끌어낸 인물.


미국의 발명가이자 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의 전신인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의 설립자다.[4] 그리고 자수성가로 가장 성공한 근성가[5] 중 한 명이다. 별명인 발명왕으로 유명하다. 본인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중음악, 영화(상업영화예술영화) 등 대중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발명 외적으로, 자신의 사업체를 끌어들여 도시에 전기 인프라를 확립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여, 현대 전기문명시대의 신호탄을 쏜 사람이기도 하다. 오히려 발명보다 훨씬 더 크게 평가받아야 할 업적이다.

2. 오해와 진실[편집]


산업과 상업에서 누구나 남의 것을 훔치기 마련이다. 나 자신도 많은 것을 훔치면서 살았다. 하지만 난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 그 방법을 알고 있지만 남들은 그 방법을 몰랐다.

-

- 토머스 에디슨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에디슨을 "발명가"라고는 부를 순 있어도, "과학자", "기술자" 라고 부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에디슨은 분명한 사업가이며, 사업적인 발명가와 연구공학자는 분명 다르다.[6] 간혹 에디슨을 어렸을 때 보여준 실험 일화와 전구를 발명해낸 일화를 합쳐 심지어는 아이작 뉴턴, 마리 퀴리, 아인슈타인 등과 묶어서 훌륭한 과학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묘사인 셈이다. 전술한 세 명은 정말 과학자이고 에디슨은 행적만 보자면 전대의 제임스 와트[7], 후대의 스티브 잡스[8]와 꽤 유사한 사람이다.

물론 과학자와는 거리가 멀지만 발명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근대사회에 관련된 물품으로 한정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제품을 개발해 내놓았으며 정확한 개수 조차 가늠이 안될 정도로 많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에디슨의 발명품은 적게는 1,093개에서 2,332개까지 다양하다. 참고로 세계 최다 발명 기록은 현재는 야마자키 슌페이[9]라는 일본 발명가가 3,245개로 경신했으나 # 그럼에도 에디슨의 발명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세계사와 발전에 실질적으로 실생활에 큰 변화을 가져다 주었기에 종합적인 업적을 기려서 보통 발명왕 에디슨이라 불린다.

에디슨의 대표적인 발명품은 전기와 관계된 것들이다. 예컨대 전구라든가. 그래서인지 전기, 특히 직류전기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니콜라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해 제작한 사형집행용 전기의자는 그의 일생일대의 오점으로 남으며 현재에 와서도 에디슨의 오점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화두가 되었다. 그 외에도 흔히 읽는, 에디슨을 그저 뛰어난 창의력, 불굴의 의지와 착한 심성만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는 에디슨 전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어둡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들이 속속 드러났다. 하지만 비록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어도, 그가 역사에서 이룩한 업적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 에디슨이 직접 뭔가를 최초로 발명해낸 것은 없는건 아니지만, 그다지 실용성이 없고, 가짓수도 많지 않다. 다만 에디슨은 최초의 물건은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했거나 불편한 점이 많았던 여러 발명품들을 모두가 쓸 수 있도록 실용화·상용화시킨 사업가로 볼 수 있다.[10] 혁신과 개량은 에디슨을 빛나게 해 준 능력인데, 개량이라는 건 기존 제품을 베이스로 에디슨 본인만의 기술적 시스템알고리즘을 수정, 추가 개발하는 것이고, 에디슨은 실용화에 문제가 많았던 기존의 시판품을 뜯어 고쳐 모두가 널리 쓰도록 실용화했으니 발명왕이라고 불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스마트폰의 최초 발명자는 아니지만 스마트폰에서 잡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면 편하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 에디슨이 최초로 만든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표발명품인 전구 또한 기존에 개발된 전구를 '개량'했지, 전구라는 물건을 발명하지는 않았다. 에디슨의 '발명품'의 절반 이상은 따지고 보면 남의 발명품을 상용화한 개량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발명왕'이라고 칭송받는 이유는 이론상으로만 존재했거나, 이미 상품화되어 출시되기는 했지만 특이한 기능이 있는 신기한 물건 정도로만 여겨지거나, 원시적이고 조잡해 실용성이 없어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했던 것들을 개량해서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 점이 크다.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주 밀란(Milan)에서 태어났으나 1854년에 가족들이 미시간주의 포트 휴런(Port Huron)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집에서 알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키려 하는 등 이런저런 기행을 많이 했으며[11] 학교에서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데다 호기심이 왕성하여 주변 어른들이 귀찮아할 정도로 매일같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버릇이 있었던 탓에, 담임은 이러한 에디슨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 퇴학시켰다(3개월 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2][13] 이후로 에디슨이 공식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일은 뉴욕쿠퍼 유니언에서 청강을 한 것밖에 없다.

그 대신 에디슨의 어머니가 스스로 선생님이 되어 에디슨에게 여러 지식들을 가르쳤다.[14] 위에서 설명한 대로 에디슨의 성격은 어린 시절부터 무엇인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른들이 귀찮아할 정도로 끈질기게 질문하고 알아내기 위한 시도를 하고 다니는 성격이었으며, 이러한 에디슨의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훗날 에디슨을 세계 최고의 발명왕 위치에 도달하게 해 주었다. 특히 결론을 얻을 때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는 에디슨 특유의 집념은 높이 살 만하며 이러한 점에서 에디슨의 근성가의 기질은 이때부터 이미 싹수를 보였다고 봐야 할 듯하다.

위인전에서는 에디슨의 어린 시절을 매일같이 심하게 얻어맞는 샌드백, 걸핏하면 실험하다 말아먹어서 참교육을 당하는 사고뭉치로 묘사하곤 한다. 실제로 초등학교를 자퇴하기 전에는 교사에게 맞았고, 한 번은 에디슨의 친구가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고 하자 에디슨이 '공중에 뜨게 해주겠다'라며 친구를 상대로 인체실험까지 했다가 부모에게 들통나서 엄청난 꾸중과 매타작을 당한 것은 물론 벌로 저녁까지 굶게 되었고, 더불어 가지고 있던 약통들도 모두 압수당할 뻔하기도 했다.[15] 이처럼 탐구심이 왕성하고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그 당시 부모와 선생님과 주변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악동이었다.

소년 시절에 불의의 사고로 청각장애를 얻어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는, 자신이 일하던 기차에서 실험을 하다 폭발 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화가 난 차장에게 귀를 마구 얻어맞아 청력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 이야기가 전설처럼 퍼졌으며 지금도 위인전에 때때로 등장한다. 그러나 에디슨 본인이 설명하기로는, 기차역에서 신문을 팔다가 자신이 타야 할 기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다급하게 뛰어올랐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차장이 다급하게 에디슨을 기차 위로 끌어올려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때 차장이 하필 귀를 잡고 에디슨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귀의 근육이 크게 파손되었고[16] 이후로 그 귀로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차장은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에디슨에게 친절했으며 에디슨이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차장과는 종종 서로 방문하며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소년 시절에 자신의 인쇄기로 신문을 만들어 판 이야기도 유명하다. 또한 모스 부호를 사용하는 전신기 덕후였다.


3.2. 사업가로서[편집]


그의 발명품들은 현대적인 것에 대한 의미를 재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창조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래를 약속했습니다.

His inventions not only reshaped modernity but also promised a future bounded only by creativity.

타임지, 1999년 송별호에 실은 각 세기의 인물 중 19세기 인물로 토머스 에디슨을 선정하며. 기사 원문

청년시절 그가 특허를 내려 했던 의회용 전기식 투표장치는 소모적인 의회의 투표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지만 원래 모든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의회는 시급한 사안이 아니라면 빠른 의사결정보다는 소수당의 의사표시 같은 타협의 과정을 더 우선시하는 터라[17] 그 기계는 환영받지 못했다. 또한 조작 논란이 터진 시기라 조작의 가능성이 있어 반려당한 경우도 많다.[18]

자신의 순수 아이디어로 만든 기계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안 에디슨은 그 이후 세상에 필요한 발명을 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게 된다. 에디슨은 본인이 신제품을 만드는 발명이 아니라 사업자로서 기존 남이 개발한 발명품을 쓸만하게 개선하여 상용화하고 보급하는 데 중점을 둔다.

대표적인 발명품으로는 축음기(전축),[19] 영사기(영화), 실용적 장거리 전화, 전구,[20] 전기 냉장고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세계 최초로 말하는 인형인 에디슨의 축음기 인형, 에디슨 본인에게 최초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해준 티커테이프[21] 등이 존재한다.

이 때 조선과도 첫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1884년 9월 4일 조선 조정은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에 첫 발전설비를 주문하여 1887년 3월 6일에 경복궁 내 건청궁에 전국 최초로 전등불이 켜졌다. 이때 냉각수를 궐내 연못에서 끌어다 쓰는 바람에 연못의 수온이 올라가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한 웃픈 해프닝도 있었다.

1892년 에디슨은 촬영장치인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와 그것을 볼 수 있는 장치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22]해서 활동사진을 볼 수 있게 하지만 최초의 영화의 타이틀은 촬영기와 영사기를 이용한 뤼미에르 형제에게 돌아갔다.

에디슨도 여러 사람이 모여 화면을 볼 수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영화 사업을 하면서 1908년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던 10여개 영화사를 묶어 영화특허회사(MPPC)를 만들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 독점력을 무기로 영화 길이도 자기 마음대로 길어지지 않게 제재하는 등 횡포를 부리자 여기에 반발한 영화인들은 에디슨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서부의 한 깡촌에 자리잡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깡촌의 지명이 바로 할리우드.

그 공로로 1960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했다. 자신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만. 다만 다른 의견도 있다. 당시 에디슨이 투자하던 것은 짧은 단막극 형식, 니켈로디언에 올리는 간단하고 짧은 영화였지만 당시 영화의 주류는 유럽이었고 유럽으로부터 서사가 있는 장편의 영화들이 미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미국 내에서도 서사가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서부극이 인기가 있었다. 할리우드도 서부극을 촬영할 로케이션을 위해 찾았다가 아예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할리우드를 건립할 쯤에는 MPPC의 영향력이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MPPC는 훗날 미국 법원으로부터 해산 판결을 받게 된다.

다만 씁쓸한 점이라면 에디슨은 최초로 영화 불법 공유발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 《달 세계 여행》의 필름을 유럽에서 빼돌려 미국에서 복사 후 전국에서 상영해 큰 돈을 벌었던 것. 에디슨은 라이선스 따위는 무시하고는 자기가 멜리에스의 필름을 쓱싹하고선 입씻어버려서 멜리에스는 미국에 영화를 팔지 못해 큰 피해를 보아야 했다. 당시엔 발명품들이야 특허로 저작권을 인정하는 세상이었으나 영화 같은 미디어물에는 저작권이 미비하던 시절이었고 이 때문에 영화 제작의 선구자들은 제대로 된 이익을 얻기 힘들었다. 《달 세계 여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요소들[23]이 처음으로 시도된 대작[24]으로 상업적으로는 오늘날 블록버스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조가 최초의 영화 복돌이를 탄생시킨 것이다.


3.2.1. 전구 상용화[편집]


에디슨을 유명하게 만든 물건으로 에디슨 전구가 있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백열전구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바로 스코틀랜드 발명가, 천문학자, 철학자인 제임스 보우먼 린지(James Bowman Lindsay,1799~1862)가 1835년 발명했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개량했지만 수명이 너무 짧고 열이 엄청 심하다든지 여러 단점으로 끝내 상품화하지 못했고 1860년에 영국 화학자인 조지프 윌슨 스완 경(Sir Joseph Wilson Swan, 1828 ~ 1914)이 더 발전된 걸 개발했다. 1875년 여러 번에 걸쳐 개량한 백열등을 만든 스완은 특허를 신청했다.

에디슨은 바로 이 스완의 아이디어를 슬쩍하여 전구를 만든 것이다. 그래놓고 에디슨은 오히려 스완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고소했다가 도리어 패소까지 했다. 출처[25] 그러나 최초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만한 전구를 발명한 것은 사실이다. 밝기도 적당하고 수명도 오래 가는 전구를 개발한 것은 에디슨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판에서 패소한 후에 에디슨은 스완이 관련 특허까지 신청한 사실을 알게 되자 스완에게 거금을 주고는 합작회사를 차려 특허권 문제를 제거했다.

그래서 에디슨은 스완과 반 억지로 화해한 후 합작으로 수익을 나누며 Edison & Swan United Electric Light Company, 줄여서 ‘Ediswan’이란 업체를 만들어 백열 전구를 팔았다. 그래놓고 에디슨은 몇 년 후 '저항력이 강한 탄소 필라멘트'는 자신이 발명한 것이라 주장하며 소송을 다시 내 승리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스완이 이미 개발한 것을 약간 개선한 것에 불과했다. 오늘날에는 에디슨이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실험일지의 해당 부분을 찢어버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고 무수한 반복실험을 해서 성공했는데, 이건 에디슨만 한 게 아니다. 린제이만 해도 10년 동안 150번 넘게 여러 재료를 쓰며 필라멘트를 새롭게 개량하며 실험했으나 그렇게 실패한 거였고 스완 또한 15년 동안 수백여번 실험을 했듯이 반복실험은 에디슨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둘의 엄청난 실험과 실패 경험이 에디슨에게 더 좋은 경험(그 재료가 안 좋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이 되게한 셈임에도 마치 에디슨만 전구를 발명하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여하튼 에디슨이 전구를 개량할 때는 적합한 필라멘트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실험해보았고 심지어는 발명팀 크루에슬리의 구레나룻과 매켄지의 붉은 수염까지 뽑아서 실험해보았다 한다. 매켄지의 수염은 상당히 오래 갔다고 한다. 불빛이 너무 흐려서 상용화하진 못했지만 태워서 탄화된 무명실이란 말도 있다. 사실 양산형 소재의 최초는 무명실이고 그 후 널리 알려졌듯이 대나무를 이용하여 실험에 도전했다.[26]

전구로 에디슨은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국 국내 최초의 전기는 고종경복궁에 설치한 전구인데 이것은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구입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에디슨을 의대손(宜代孫)[27]이라 적었다고 한다. 에디슨 본인은 동양의 궁궐에 자신의 전구가 달린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뻐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1886년 당시는 에디슨 회사가 전기 사업을 시작한지 만 7년째였을 뿐이었고 조선에서는 전기 시설 설비와 운영 권한에 전권을 준 상태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 전기는 동아시아 최초의 전기라는 점도 한몫 했다. [28]

하지만 전구에 들어가는 전기를 생산한 발전기의 냉각수를 궁궐 연못에서 끌어다 써서 죄 없는 물고기들만 떼죽음당해 조선 민심이 흉흉해졌고, 에디슨이 직접 선발해 파견한 책임자 윌리엄 맥케이(조선명 : 맥계, 麥溪)가 불의의 사고[29]로 사망하면서 이 전등소 사업은 단발성에 그쳤다. 조선에 다시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조선 정부가 나중에 영국인 퍼비가 포사이스를 새로 고용한 뒤의 일이았다.#[30]

에디슨 전등의 매력에 빠진 존 피어폰트 모건[31]이 전등의 경제적 가치를 감지하고 에디슨에게 투자를 해서 미국에 전등과 발전소가 퍼지게 된다. 그 이전에는 JP모건과 밴더빌트 등의 극소수 최상류층만 전등을 사용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전등의 확산은 당시 등유로 부를 축적한 록펠러에게 위기감을 줬다. 에디슨의 정말로 대단한 업적은 에디슨 전광회사를 세워 미국 가정에 전기를 연결한 것이기도 하다. 전구를 개발해봤자 집에 전기가 없으면 말짱 헛것이니까. 그러다가 전기사업에서 희대의 숙적이 등장한다. 동시대의 또다른 거물 사업가인 헨리 포드와는 제법 친하게 지낸 사이로, 포드는 에디슨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가솔린을 이용한 차를 만들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에디슨은 포드를 격려했고 이 일을 계기로 포드 자동차를 세우고 포드 모델T를 출시한다. 하지만 정작 단초를 제공한 에디슨은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에디슨은 전기가 최고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전기자동차 개발에 치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초창기엔 전기자동차가 대세였다.[32] 에디슨은 전기자동차의 동력원으로 쓰기 위해 니켈-철 전지(에디슨 전지)를 개발하고 이 전지를 쓰는 자동차도 개발했는데, 에디슨 전지는 당시의 납축전지보다 에너지 밀도가 훨씬 더 높고 충전 시간도 절반밖에 되지 않았으나 비싸고 낮은 온도에서는 작동이 잘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때문에 에디슨의 전기자동차는 생산된 지 몇 년 만에 단종되었다.


3.2.2. 테슬라와의 미운정 고운정[편집]


잘 알려져 있듯이 니콜라 테슬라와는 라이벌 사이였다. 테슬라가 에디슨과 여러 모로 대립한 것도 사실이고, 이로 인해 에디슨이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해 전기의자를 제작하는 등 진흙탕 싸움이 어느 정도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둘의 갈등에는 과대하게 부풀려진 면도 적지 않다.

에디슨과 테슬라 이 둘은 동시대의 발명가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전시킨 직류(DC)를 최고라 생각했지만 테슬라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교류(AC)를 발전시켰고 이 때문에 에디슨은 AC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서 교류 전기를 이용하여 사람을 사형시키는 기계인 전기의자를 제작해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코끼리 한 마리를 교류 방식을 이용해 공개 처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상당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의 주장과 다르게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의자는 몇 번씩 전기를 흘려도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고통만 줬기에 지켜보던 간수조차 차라리 화형을 시키자고 했다.[33] 이후 테슬라와 그가 세운 회사가 자신의 직류전원에 대항하는 교류전원을 발명하자 그와 그 회사를 비즈니스로 묻어버리려 했으나 에디슨의 라이벌이었던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테슬라를 받아들인 덕에 실패했다. "뒷공작으로 테슬라를 몰락시키기 위해 마피아들과 결탁했고 테슬라의 회사를 망하게 할 악의적인 물건을 발명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전기의자를 만들기 위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동물들을 싹쓸이했다"는 말도 나돌았을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러나,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정작 몇몇 갈등 이후 에디슨과 테슬라는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연락하고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 AC(교류전기)와 DC(직류전기)간의 전류전쟁은 에디슨과 테슬라간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에디슨과 나중에 테슬라로부터 AC 송전의 특허를 사들인 조지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대립에 가깝다.

1890년대에는 X선에 대해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에디슨이 사용한 표현을 보면 절대로 숙적한테 보낸 편지가 아니다.

"My dear Tesla, Many thanks for your letter. I hope you are progressing and will give us something that will beat Roentgen."

"친애하는 테슬라, 자네의 편지는 잘 받았네. 나는 자네의 발명이 잘 진행되어 우리에게 뢴트겐업적을 이길만한 것을 주었으면 하네."

또한 1896년 Electrical Review 5월호에 올라온 비평에 에디슨은 테슬라를 인정하는 답변까지 남겼다.

나에 대해 뭐라하든 상관없으나 테슬라는 신경질적 기질이니 이런 기사는 그를 비통하게 만들고 일을 방해할 것이다. 테슬라가 불가능해 보이는 낙관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그가 최고의 실험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시간만 주면 테슬라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테슬라 측에서 에디슨을 그나마 비판한 건 에디슨의 실험 방식이 반복실험과 시행착오가 지나치게 많은 등 "한 결과를 내기까지 삽질이 잦았다"는 것이다. 전류전쟁으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테슬라의 어그로를 가장 많이 끈 건 조지 웨스팅하우스와 진정한 승리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이었을 것이다. 즉, 에디슨과 테슬라의 라이벌 관계가 갈등과 악연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정도는 흥미를 위해 과장된 면이 많으며 어느 정도는 걸러 듣는 것이 좋다.

오늘날은 교류가 전력을 수송하는데 우수하기 때문에 장거리 송전에 주로 사용되고, 직류는 전기철도, 전지(장치)나 알루미늄 생산같은 전기화학 공정, 태양광 발전에 쓰인다. 그 외 컴퓨터나 TV를 포함한 대부분의 가정용 전자기기도 내부의 반도체 소자들은 직류만 받으므로 교류를 직류로 먼저 전환해야 사용이 가능하다. 테슬라가 전기 시대의 아버지라면 에디슨은 전자(電子) 시대의 아버지인 셈이다.

에디슨이 구상한 직류를 통한 송전은 초고압직류송전(HVDC)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아 주로 600km 이상의 초장거리 송전 혹은 주파수의 상이 일치하지 않는 대규모 송전망간의 연결에 사용되고 있다. 에디슨이 살던 시대에는 대용량의 직류 전력을 효율적으로 변환할 방법이 없었으나[34], 20세기 중반에는 수은 아크 정류기가, 20세기 후반부터는 반도체 소자의 발달로 인해 HVDC 송전이 가능해졌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에 의하여 수립 및 확정이 된 9차 송변전설비계획에 따른 사업으로서 2035년도까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계되는 송전선로가 HVDC 즉 고전압의 직류로 신설되며, 국내의 HVDC사업으로는 총 89km 길이의 전남 완도 ~ 동제주간 "제3 HVDC 건설" 이 있다. 매우 긴 송전선 혹은 해저 송전선의 경우 전선과 대지 사이의 커패시턴스로 인해 교류손실이 심하기에 직류가 사용된다.

그 외에도 에디슨의 발명은 태반이 산업스파이에 의한 것이고 창작은 거의 전무하다는 소문도 존재하며 그 외에도 악명은 매우 많다. 스스로도 "다른 발명가의 아이디어를 참고하는 것이 발명의 첩경이다" 라는 자조적인 말을 남을 정도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7~80년대 위인전에서 에디슨을 많이 띄워주다 보니 엄청나게 대인배같이 표현하고 좋은 사람으로 표현했는데, 실제로 당시 몇몇 위인전이나 과학만화에서는 토머스 에디슨을 그저 순수하고 착한 발명왕으로, 반면으로 니콜라 테슬라에 대해선 에디슨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온갖 더러운 중상모략을 꾸민 비열한 악역이자 희대의 찌질이로 왜곡하여 표현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좀 부정적인 면이 누그러진 위인전에서도 테슬라는 에디슨의 라이벌이지만 에디슨보단 못하거나 열폭하고 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에디슨을 노력의 천재이자 발명의 신으로, 테슬라는 그런 에디슨을 시기한 인간쓰레기로 표현했고 한동안 그런 사실로 그 시대 학생들에게 각인된 셈이다.[35] 에디슨과의 대립 이후 특허 관련으로 엄청난 불이익과 피해를 본건 테슬라 측이 컸다. 그래도 그 시절에도 가끔은 에디슨이 이중적인 면도 있다고 까는 게 위인전으로 나오곤 했다. 1980년 초반에 나온 삼성당 서적의 만화 위인전에서는 에디슨은 "형편없는 대우를 하고도 조수들을 억지로 붙잡아 실험을 돕게하여 조수들에게 교도소장이라는 비난적인 별명으로 불리었다."라는 서술이 나왔다. 이것은 실제로 에디슨이 벌인 짓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테슬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테슬라도 파란만장한 삶을 가진 천재 과학자로 위인전에서 그려진다. 그리고 최근 들어선 에디슨도 긍정적인 업적과 지금까지 알려진 발명 업적은 있는 그대로 설명하되, 재평가되는 여러 단점 또한 위인전이나 과학책 등에 실리기도 한다. 또 재평가 유행이 일어나면서 그동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던 에디슨이 오히려 나쁜놈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아졌다. 결론적으로 요즘은 위인전이나 과학 매체에서 에디슨이야말로 될 때까지 노력하는 근성가이의 모습과 더불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잔인한 측면도 지닌 양면적인 천재로 표현된다. 또한 추구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포기하지 않고 실험을 거듭한 에디슨의 근성넘치는 면모는, 해박한 지식으로 불필요한 실험을 줄이고 필요한 실험과 개발과정만을 거쳐 깔끔히 발명을 한 테슬라와는 안티테제인 부분이기도 하기에 더더욱 회자되고 있다.


3.2.3. 그래도 인정받는 업적[편집]


재평가 유행에 따라 에디슨이 많이 까이고 있고, 비판할 점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과 공학에 대한 오해와 현대시점의 렌즈를 사용한 평가로 인해 과장이 심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에디슨의 나쁜 업적을 과장하면서 희대의 인간말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에디슨을 절대 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었다. 다만, 이미 90년대에도 한국에서 여러 서적으로 에디슨이 인간말종이라고 서술된 역사 다시 돌아보기 책자들이 여럿 나왔었다.

에디슨이 최초의 전구를 발명하지 않은 건 사실이나, 에디슨이 최초의 '상용화된' 전구를 개발한 것에 대해서까지 평가절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도 조지프 스완을 포함해 전구 개발에 힘쓴 많은 발명가들은 에디슨의 기발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S] 자신들이 개발해 왔지만 뭔가 시원치 않던 전구를 더욱 밝고 오래 켜지도록 개량하고 실용화시킨 업적 덕분이다. 괜히 그에게 "먼로 파크의 마법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즉, 에디슨이 전구 개발사에 업적을 남긴 것은 전구의 발명이 아니라, 전구를 모두가 쓸 수 있도록 개량하고 상용화를 가능하게 하는 회사와 유통 시스템까지 정립했다는 점이다.

전구만 발전시킨게 아니라 개량된 발전기배전반, 송전선, 변압기, 소켓, 스위치, 안전퓨즈, 적산전력계(계량기) 등 전기사용과 관련되는 주변기기까지도 같이 창조해냄으로써 전기문명 시대를 연 것이다. 발전기든지 전동기든지 하는 것들을 달랑 하나나 둘 정도만 만들고 끝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즉, 종합하자면 세계 최초의 기업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기업에서 연구하는 방법을 만들어서 현대 기업의 연구개발 과정의 기틀을 닦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모든 기계나 물건은 절대로 한 사람의 머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타인이나 전 세대가 발달시킨 이론이나 아이디어, 기존의 발명품에 자신의 지식과 노력을 접목시키는 과정이 거듭되어 탄생하는 것이다. 니콜라 테슬라AC마이클 패러데이가 이론을 발전시켰고 이폴리트 픽시는 실제로 교류 발전기를 만들었다. 테슬라가 AC를 더욱 실용적으로 발전시킨 건 사실이지만, 상용화시킨건 웨스팅하우스다. 혁신이란 것은 결국 사회적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과정이다. 그러니 테슬라든 에디슨이든 최초가 아니고 타인의 업적을 참고했다는 이유만으로는 비판할 수 없다.

에디슨이 자신의 직원들이 이룬 것에 자신의 이름만 걸고 특허를 냈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 많은데, 에디슨이라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동안 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분명하게 연구의 방향을 제시했고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니 절대로 날로 먹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뺏겼던' 직원들도 에디슨 사후에까지 그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으니, 에디슨을 단순히 냉혈한 사업가라고 일축하기는 힘들다. 그 이미지에 반하는 또 하나의 예시를 들자면 에디슨이 X선을 가지고 실험을 했을 때, 당시 방사능에 대한 무지로 인해 X선 실험을 담당하고 있었던 클라렌스 달리와 함께 엄청난 피폭을 당했다. 달리는 결국 방사능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에디슨은 불구가 된 달리에게 필요한 돈을 모두 지불했고, 과부가 된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개인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해줬다. 이게 20세기 초반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노동자 배상금 따위는 없었던 당시 책임이 없다며 달리를 길로 내쫓았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이 실험 덕분에 X선을 사용하는 형광투시경이 상용화되었지만, 에디슨은 이 일을 계기로 더 이상의 X선 연구를 포기했고 X선의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을 말로 남겼다.

알쓸신잡에서 에디슨빠를 자처한 정재승이 이 점에 대해 옹호했는데, 당시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나 보상이 희박했으며, 특허권에 대한 대기업들의 침해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개인 개발자나 중소업체의 특허를 맘대로 침해하고 복제품을 내놓고는 소송이 걸리면 자본을 앞세워 시간을 장기간 끌어가며 결국 원 특허권자가 재산만 날리고 특허는 포기하게 만드는 일도 흔했다.[36] 이런 상황 속에서 에디슨은 직원들의 특허를 회사의 이름으로 낸 뒤 직원에게는 해당 특허개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하고, 해당 특허를 다른 기업이 침해할 경우 회사 차원에서 상대하는 식으로 특허를 보호한 거라고 했는데, 이는 현재의 대기업들도 애용하는 방식이다.[37]


3.3. 말년[편집]


전기 산업이 날로 경쟁이 심해지면서 그의 회사는 재정적으로 곤경에 빠졌는데, 때문에 존 피어폰트 모건에 의해 그의 회사와 에디슨의 경쟁사 중 하나였던 톰슨 휴스턴이 합병해 새로운 회사가 탄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에디슨은 회사에 대한 권한을 잃으면서 사실상 전기 산업에서 손을 뗐다.

그밖에도 탄광업 및 시멘트 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죄다 말아먹었다.

말년에는 자기 나름대로 영혼과 영계에 심취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발명품들을 몇 가지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지만 실제로 남아있지는 않다. 이때 발명했다고 하는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영계통신기다. 하지만 사실은 이마저도 에디슨이 만우절을 맞이해서 어수룩한 대중잡지 기자한테 구라를 깐 거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서 코난 도일을 비롯해서 당시의 유명인사 중에서 오컬트에 심취하는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았고 그 중에 상당수가 사회고위층 내지는 과학자이기도 했으니 에디슨이 오컬트에 빠졌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에디슨은 죽기 전에 친구에게 10개의 단어를 몰래 남겼다고 한다. 친구는 에디슨이 죽은 후 영매들에게 죽은 에디슨을 불러 내는 사람에게 당시 돈으로 1만 달러를 상금으로 걸었다. 하지만 이후 40년간 누구도 에디슨이 남긴 10개의 단어 중 1개도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걸 보면 에디슨 본인이 사후 세계와 영매를 믿었던 것 같지는 않다.[38]

숨을 거두기 직전의 마지막 날숨을 친구였던 헨리 포드가 유리관에 담아놓았고,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가정에서는 동부 시간으로 밤 열 시에 1분 동안 전깃불을 끄는 것으로 그를 추모했다. 이는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


4. 가족관계[편집]


에디슨은 한평생 발명/사업에 힘썼지만,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홀했다. 첫번째 배우자를 쓸 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구박했고, 대학 교육에 대한 콤플렉스 탓에 자식들을 모조리 공과대학으로만 보냈다.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이 사망했을 때, 일이 바쁘다며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한동안 적적하게 지내다 2번째 부인이 된 미나 밀러에게 모스 부호로 프러포즈했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고로 두 번째 부인은 첫 부인보다 성격이 더 드셌는데, 에디슨이 발명한답시고 연구실에만 붙어 있자 밥을 싸들고 찾아가서 다 먹기 전까지는 발명이고 뭐고 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가족에 소홀했던 탓인지 자식들의 삶도 좋지 못했다. 첫 부인 소생 2남 1녀 중 둘째인 장남 토머스 "대시" 에디슨 주니어(1876 ~ 1935)[39]는 '전기 활력 회복기'(Magno-Electric Vitalizer)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이었다. 게다가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아버지인 에디슨 본인이 직접 고발을 했는데, 더 이상 아버지 이름으로 사기를 못 치도록 명예훼손을 이유로 개명을 요구했고, 법원에서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 이름을 바꾸어 주면 월 35달러의 용돈을 주겠다는 딜을 수락하여 토머스 에디슨 주니어는 토머스 윌러드(Thomas Willard)로 개명한다. 에디슨은 여기에 정신 좀 차리고 살라며 버섯 농장까지 지어 주었는데, 수익이 신통치 않아 결국엔 용돈을 월 50달러까지 올려주게 된다. 그러나 에디슨 주니어는 변함없는 막장 생활을 유지하고, 이에 분노한 에디슨은 결국 에디슨 주니어를 아예 무시하며 외면하게 된다. 이후 월러드는 아버지가 돈을 주지 않는다며 고소하는 추태를 부렸다가 패소하였고 다른 사기 피해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등 엉망으로 살다가 아버지 장례식에 와서는 유산 분배에만 관심을 기울였는데,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손절당했는지 남에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무시당했다. 결국 에디슨이 죽고 4년 뒤인 1935년,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죽는다.

차남 윌리엄(첫 부인 소생으로 막내)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주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윌리엄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은 여자라서 주 40달러 가지고 어찌 사냐고 시도때도 없이 편지를 보내 시아버지 에디슨을 닦달했다는 것. 이게 뭐가 문제냐면, 당시 물가로 40달러는 현재 화폐가치로 9,000달러[40] 가까이 되는 돈이다. 즉 어지간한 회사 임원이 버는 수준의 수입원. 이러니 에디슨도 편지만 받으면 찢어버리고 무시했으며, 답장으로 더 이상 그러면 10달러도 안 줄테니 닥치라고 분노했다. 기묘하게도 윌리엄도 1937년, 59세를 채우지 못하고 형과 같은 나이로 사망했으며, 며느리도 에디슨 사후에 고생하다가 1948년에 사망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0px-Charles_Edison.jpg

둘째 부인 소생 2남 1녀 중 둘째인 3남 찰스 에디슨(1890 ~ 1969)은 정계로 진출해 훗날 해군부 장관, 뉴저지 주의 주지사를 역임했다[41].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막내 시어도어 밀러 에디슨(1898 ~ 1992)은 발명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200가지가 넘는 발명품을 만들어내고 100여가지 특허를 냈으며, 사업가로서 운영도 잘 했다. 1987년 에디슨 탄생 140주년 행사 때 인터뷰도 했는데, 그도 아버지에 대해선 그리 추억이 없다고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늦게 태어난 3남과 막내는 꽤 성공한 인생을 살았으나, 차남은 너무 무능하여 에디슨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았고, 가장 먼저 태어난 장남은 최악의 인생을 살다가 비명횡사 했다.


5. 어록[편집]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이 말은 1929년 한 기자회견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으며 1932년 하퍼스 매거진에 원래 올라온 이 문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None of my inventions came by accident. I see a worthwhile need to be met and I make trial after trial until it comes. What it boils down to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내 발명 중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애쓸 가치가 있는 요구를 발견하고, 이뤄질 때까지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 땀이다.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언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노력만 찬양하는 말은 아니었고 그에 대해서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다. 실제 inspiration의 뜻은 영감이지만 문맥상 에디슨은 해당 단어를 영감과 일맥상통하는 동기, 계기의 뜻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에디슨이 말하고자 했던 결론은 "가치가 있는 일에, 즉 정확한 동기나 목표, 지향점에 큰 노력을 기울여라"는 뜻. 결론은 노력과 영감 둘 다 중요하다는 소리다. 물론 다른 이들이 아는 바와 같이 영감이 없으면 노력도 필요없다는 식의 곡해를 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으니 정정해주도록 하자. 다만 에디슨이 동기, 목적없이는 구체적인 목표도 없이 무작정 노력만 하면 그게 바로 희대의 뻘짓이 된다라고 생각하여 영감에 높은 점수를 쳐준건 사실이다.# 물론 다른인터뷰에서 자신이 자타공인 천재여도 그걸 갈고닦을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논조의 이야기를 여러번 한적도 있으니 노력을 폄훼하는것도 아니다.

어린이 대상으로 한 위인전에서도 위 말이 나왔는데 영감이라는 말의 어감이 어려운지, '1%의 영감'이 아니라 '1%의 재능'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재능이라고 하면 타고난 기질을 너무 강조하는 상황이니, 위와 비교해서 너무 동떨어진 번역이다. 이렇게 알고 있는 자녀나 조카들에게 정정해주도록 하자.


6. 기타[편집]


  • 말년에 자기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오하이오 주 밀란의 옛 집을 찾았는데 그 집이 아직도 전등 없이 가스등을 켜고 있는 걸 보자 뒷목 잡고 쓰러졌다는 얘기가 있다.
  • 정치적 성향을 이야기하면 평생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지만[42] 1912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당을 지지했고[43] 1차대전 무렵에는 우드로 윌슨민주당을 지지한 것으로 보아 정치 성향은 진보에 가까웠던 듯하다.
  • 그를 존경했던 한 브라질인은 그가 사망한지 10년 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 이드송[44]으로 지었는데, 이 아기가 바로 훗날 축구황제로 이름을 떨치게 될 펠레(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다.
  • '세계 최대의 에디슨 박물관'은 의외로 대한민국에 있다.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참소리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이 그곳인데, 축음기와 악기 박물관이 명목이나 실상은 주 전시 품목인 축음기의 발명가인 에디슨과 그의 발명품이 많은 양을 차지했다. 에디슨 전기자동차도 있다! 모아 둔 유물이 너무 많아 창고에 있는 것을 돌려가며 전시한다고 한다. 전시 에디슨 유물들 중에는 친필 편지 등 미국에도 없는 것이 꽤 된다. 내용물이 잘 구성되어 있는 편이고, 일정 기간엔 체험 교육도 운영하고 있어 아이들과 함께 가볼 만하다. 직접 관장이 나와서 설명을 해 주기도 하고, 관람객과 같이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한다. 구내 기념품 매점에서는 꽤 두툼하고 내용이 좋은 박물관 도록을 팔고 있는데, 부탁하면 관장이 사인도 해 준다. 다만 위의 전해지는 순탄치 않은 가정사, 사업가로서 비열하고 냉혹하던 면모나 애증관계였던 테슬라 등 여러 이야기에 있어선 함구하거나 노 코멘트하고 에디슨을 상당히 미화하고 있다는 건 에디슨 인 관장의 취향이므로 우선 업적과 부풀려진 면을 구분하여 걸러가며 관람할 필요가 있다.
  • 1896년 최초로 키스신을 영상으로 담았다. 아래 영상의 55초 부분에 영상이 담겼다.

  • 그가 사망한 뉴저지(New Jersey) 주에 에디슨(Edison)이란 인구 약 10만 명의 소도시가 있다.
  • 필라델피아의 한 휴게소 이름이 토머스 에디슨이다.
  • 대한민국의 모 버스 제조 회사의 어원이 되었다.
  • 에디슨의 회사 GE(제너럴 일렉트릭)의 홍보 부서가 제작한 TV 단막극 시리즈[45] General Electric Theater로널드 레이건의 배우 시절 대표작 중 하나이며, 거쳐간 할리우드 스타들 면면이 어마어마하다. 리 마빈, 제임스 딘, 베티 데이비스, 조운 폰테인, 낸시 레이건, 주디 갈런드 등등. 모든 출연진 목록
  • 에디슨이 세운 영화 특허권 회사 'The Edison Trust'는 세실 B. 드밀과 로열티 문제로 지저분하게 싸우다 총격전까지 간 적이 있다.(...)##
  • 정치적으론 비폭력주의자였다. 그래서 그가 개발한 특허 발명 중 살상 무기는 단 하나도 없다. 1차 대전 당시 정부에게 해군의 고문으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에디슨은 '방어용 장비만 연구하겠다'라고 조건을 달았다. 단, 무기는 만들지 않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장비는 딱 하나 개발한 적이 있다. 위에도 언급한 전기의자(...).

7. 창작물[편집]





  • 시간탐험대에서는 배터리 방전으로 뻗어버린 돈데크만을 분해하고는 그 원인을 알아내어 램프의 바바를 시켜 번갯불에 쳐넣어 회생시킨 적이 있다. 여기서 꽤 미화되었는데 그 시대상으로 너무나도 최첨단인 돈데크만이나 여러 장비에 대한 것을 싹 잊어주고(심저어 돈데크만에 대한 설계도까지 직접 분해하고 고치며 만든 천재로 나온다.) 그 설계도를 스스로 다 찢어버리고 시대에 너무 앞서는 기술이라고 위험하다며 잊는 개념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 지옥선생 누베에서는 영계통신기를 이용한 떡밥으로 등장했다. 거기에 따르면 저승에서도 다양한 물건을 발명중이라고 한다.


  • 미국 드라마 타임머신(Voyagers!)에서 미래에서 온 주인공 보그와 존스와 만나고 그들이 가진 타임머신 회중시계를 몰래 분해해버린다. 연구조사 때문이었지만 당연히 꼼짝없이 이 시대에서 영원히 살아야할 보그와 존스는 화내면서 책임지라고 한다. 결국 에디슨이 겨우 고쳐서 다른 시대로 떠나는데 에디슨은 가기 전에 자신이 개량 연구 중인 전구 재료에 대하여 질문하고 보그가 필라멘트를 이렇게 써보라는 말을 해주고 가버린다.

  • 2011년에 연재된 이말년씨리즈의 잠은행 下下편에서는 막 과장이 되자 잠든 금봉수가 이자가 너무 세다고 그냥 나가려고 하자 러시앤쿨쿨 직원이 에디슨이 잠 시간을 안 빌렸으면 그 많은 특허를 도둑질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46][S]

  • 2013년에 방영된 시몬스의 광고 자료화면으로 등장했다. '잠은 3시간만 자도 된다'라면서 숙면을 취한다는 전제에서 그렇다고 언급. 그런데 목소리가 여성스러워서 놀랐다는 반응이 꽤 있다. 그런데 에디슨의 잠에 대한 얘기는 사실 거짓이다. 실제로 에디슨의 잠에 대한 기록으로는 5시간 미만으로 잤다고 되어있으나, 그와 함께 일했던 주위 사람들의 말로는 상당히 많은 수면시간을 취했으나 기록물처럼 그 스스로 잠을 많이 자는 것을 인정하지를 않았다고 했다. 물론 밤을 새며 일하는 날이 많았으나, 실제로는 주간수면을 취하면서 수면시간을 채웠던 것.[47] 가장 유명한 사진이 낮잠 자는 에디슨이다. 허지만 에디슨이 이 사진으로 기자들에게 자신은 낮잠을 1시간으로 보충한다고 말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또 낚았다. 이랬듯이 잠이 별로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설명하는 위키나 사전에서도 해당 내용이 빠져 있다.

  • 일본에서도 산토리발포주 라쿠젠(楽膳) 광고에서 나왔는데, 여기서는 코믹 콘셉트로 성우가 더빙을 해서 "아↘ 쇼-크"와 "마시고 싶구나 라쿠젠"이라는 명대사를 남겨 과 함께 MAD 소재가 되었다.

  • 프랑스의 상징주의 작가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라당의 SF소설 '미래의 이브'의 주요 등장인물이자 '안드레이드' 아달리(Miss Hadaly)의 제작자로 등장한다.



  • 요괴워치에서 불가사의족의 요괴로 나온다. 설정은 그가 죽은 영혼이 요괴가 되었다는 것이다.[48] 얼굴은 전구이며 몸은 축음기. 이래도 사실은 레전드 요괴다.


  • 패밀리가이에서도 잠깐 나왔다. 직원들이 전구와 축음기를 가지고 일하는 걸 보고 이게 뭐냐고 물어보고 이름을 말하자마자 "전구! 난 이게 뭔지 알아! 내가 발명했으니까."라고 말한다.[49] 그리고 전기를 독점해서 혼자서만 전기와 전구를 쓰는등[50], 긍정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 한국 대체역사물이나 구한말을 다룬 작품에서는 고종 황제와의 친분도 있고해서 한국에 우호적인 인물로 등장하는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 니콜라 테슬라와의 연결을 위한 가교 역할로 버려진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소양강댐에 수력 발전 시설 설치를 위해 선정되었는데, 선정 과정에서 카네기가 적극 밀던 회사를 밀치고 선정된지라 카네기와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 여흥 민씨 집안 여식에게 집적거렸다가 걸려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본인은 본인이 이긴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해하는데 폭종의 진짜 목적이 니콜라 테슬라의 영입이었기에 테슬라가 한국에 오면 버려질 듯하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조선의 요청을 받아 전구와 관련 설비 사업 확장의 기회로 여기지만 하필 비슷한 타이밍에 자체적으로 전구 생산에 성공한 안인수와 충돌한다. 이에 정정당당히 안인수와 협상하려한 맥심과 달리 특허 침해라며 배상을 지급하라는, 조선 정부를 압박하는 방향으로 가게되고 이후 조선이 중재안을 제시하자 이를 무시했지만 그 무시한 내용이 공장을 세워주면 특허를 인정해주겠다는 것인지라 기회를 맥심에게 빼앗겨 버린다. 이후 비서를 해고하고 본격적으로 맥심과의 조선에서의 특허권 전쟁을 벌이게 된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인종차별을 하는 다른 인물과 달리 사업가적 감각으로 주인공에게 호의를 보이며 접근한다.주인공이 10년간 조선의 전기사업을 맡는 대신 10년간 조선인 기술자들을 양성해줄것과 니콜라 테슬라[51]를 넘겨줄것을 받아들이고 율리시스 S. 그랜트존 피어폰트 모건과의 회담을 잡아준다.


  • 명탐정 코난의 ost hello mr. my yesterday의 2절 도입부에 '만약 반세기라도 더 에디슨이 살아있었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사가 나온다.[52]


  • 키테레츠 대백과 16화에서 강기태 일행이 시간여행기를 써서 1888년의 미국으로 가서 소년기 시절의 에디슨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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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55~1884. 뇌에 울혈이 생겨 사망.[2] 1866~1947. 1935년에 재혼한 바 있고, 두 번째 남편은 1940년에 사망했다.[3] 무신론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Jim Ketchum, "Edison's spirituality is more similar to 'scientific deism'", 「The Times Herald」, 2017.2.10. · "HIS FAMILY DENIES EDISON WAS ATHEIST; Statement Issued After His Death Says No One Could Call Him Unbeliever. FREETHINKER QUOTES HIM Lewis Declares Inventor Said That "Trouble With Most People Is They Are Incurably Religious."", 「뉴욕 타임스」, 1931.10.19.)[4] 에디슨이 그동안 세운 전기 관련 회사들을 전부 합병해 설립된 기업. 회사의 창업주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말하면 그는 직접 회사를 경영한 적은 없었다.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의 초대 사장이자 유일한 사장은 에디슨의 조력자이면서 지멘스도이체방크의 투자를 유치해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의 설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헨리 빌라드라는 이름의 금융가였으며 이후 회사가 경쟁사인 톰슨 휴스턴과 합병하여 제너럴 일렉트릭으로 재탄생했을 때도 에디슨은 두 회사의 합병을 주도했던 존 피어폰트 모건이 지지한 톰슨 휴스턴의 CEO 찰스 코핀에게 밀려 반강제적으로 회사 경영에서 손을 뗐다.[5]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흙수저 재벌로 꼽힌다.(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흙수저로는 마이클 패러데이가 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기준으로 당대 흙수저 출신 자수성가 재벌 중에서는 가히 독보적 1등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사업 시작시에 갖고 있던 빈약한 경제 기반을 고려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엄청난 성공이었다. 에디슨은 미국 내에서도 중산층 근처도 가본 적 없는 가난한 서민 자손이었기에, 에디슨 같은 케이스는 20세기 경제성장의 신화였던 한국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나마 사업 기준으로 한국에서는 정주영 단 한명 정도가 에디슨급 전설로 꼽힌다.[6] 또한 그의 발명품들은 치밀하게 설계된 이론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시행착오로 이루어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론에 입각하여 새로운 제품을 창조한 과학의 영역이 아닌, 기존사항을 개선을 위한 기업차원의 연마에 가깝기 때문. 물론 그 과정중에 '부산물'로 전혀 새로운 (돈이 될만한) 물건을 새롭게 시장에 등장시키는 경우도 있긴 있었다. 이걸 종합해서 잘 쳐주면 R&D 분야 종사자 정도라고는 볼 수있다.[7] 토머스 뉴커먼이 개발했으나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별로 쓰이지 않았던 증기기관을 효율적으로 개량하여 산업 혁명의 촉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8] 실제로 잡스 본인도 남의 기술을 모방했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고, 기술을 발명해서가 아니라 있던 기술을 어떻게 잇고 활용할지를 알았기 때문에 존경받는 사람이다.[9] 퀴즈! 과학상식 세계 최고 최초 편에서는 야마자키 온페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10] 실제로 발명의 개념은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데 국한되지 않고 기존에 있던 발명품을 개선 및 개량하는 것도 포함한다.[11] 의외로 해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로, 국내에서 톡파원 25시를 통해 언급되었다. 사실 해외에서는 에디슨보다 니콜라 테슬라가 인기가 많아서일지도 모른다.[12] 그도 그럴 것이, 수업 시간에 집중도 하지 않고 담임의 말도 전혀 듣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로 그림만 그렸고, 반에서 공부도 가장 못하던 아이가 하루 종일 귀찮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아무리 제정신이 박힌 교사라도 상당히 성가셨을 것이다.[13] 학교에서의 일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도 있는데, 수업 시간에 담임이 1+1이 무엇이냐고 묻자 에디슨이 '정답은 2이지만 1이 되기도 한다'라고 대답하여 담임을 경악시킨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담임이 물어보자, 에디슨은 본인의 어머니까지 교실로 모시고 와서는 찰흙 한 덩어리와 다른 한 덩어리를 붙이면 1개가 되니까 1이라고 대답한 것이라 설명했다. 담임은 그런 에디슨을 보고 도대체 이 녀석은 왜이리 답이 없는 녀석이냐면서 한숨만 푹푹 쉬었지만, 옆에 있던 어머니는 그 말도 옳다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는 일화이다.[14] 어머니 본인도 전직 교사였다.[15] 친구인 마이클이 하늘을 날고 싶다고 하자, 에디슨이 친구에게 비등산(탄산수소 나트륨타르타르산을 물에 녹인 것)이 들어있는 병을 열어 마시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문가도 아닌 일반인이 남에게 함부로 화학약품을 마시게 하는 행위는 단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친구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행위이기에, 아무리 자식에게 오냐오냐하는 부모라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에디슨의 인생에서 최고의 스승님이자 인격자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마저도 이런 일에 있어서는 정말 엄중하게 야단을 쳤다고 한다.[16] 당시 차장이 잡고 있던 에디슨의 귀에 온 몸의 하중이 실렸을 테니, 아마 내부의 고막도 압력으로 손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7] 사실 정치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다수당의 다수의견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도 없으며, 선거를 통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한 정당이라고 해도 모든 정치적 사안에 대해 다수당의 뜻대로 결정되는 것이 일종의 독단적 전횡으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외면적으로는 지루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정치적 투쟁과 타협 과정이야말로 가능한 한 좋은 결론을 내기 위한 노력의 일부라고 보는 경우도 많다.[18] 이와는 별개로 선거용 투표장치는 기계식/전기식 할 것 없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는데, 1889년 특허 신청된 기계가 미국에서 1990년대까지 지방선거에서 줄기차게 사용되었을 정도.[19] 이 물건은 샤를 크로스도 만들었다. 하지만 샤를은 돈이 없어 결국 상용화에 실패한다. 하지만 에디슨은 상용화에 성공한다. 구조도 샤를의 것과 별 반 다를 게 없다.[20] 정확히 말하자면 에디슨 전구를 발명한 것이다.[21] 증권시장에서 주가를 알려주던 종이테이프[22] 사실 진짜 발명가는 에디슨 회사의 직원이었던 윌리엄 딕슨(William K. L. Dickson)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용주였던 에디슨의 이름으로 특허가 등록되었다. 그리고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연구를 금했다가 최초의 영화 타이틀을 뺏기자 딕슨은 결국 에디슨과 결별했다.[23] 컷을 나눈다거나, 셋트를 이용한다거나, 현실에는 없는 이야기가 있다거나 등. 소리와 컬러필름을 제외한 어지간한 영화적 요소들은 이 영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24] 그러나 미적 가치가 있을 뿐, 어디까지나 단순한 상황극의 연속을 표현하는 수준이고, 틀을 갖춘 최초의 극영화로는 잘 인정받지 못한다. 또 그 직후 에디슨 회사 소속 감독이었던 '에드윈 포터'의 '대열차 강도'같은 괜찮은 영화도 나왔으나 어디까지나 틀이 갖춰진 극영화는 아니었다. 보통 틀이 갖춰진 최초의 극영화는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으로 간주한다.[25] 이와 비슷한 사례가 하나 더 있는데, 에디슨은 자신이 개발한 직류 발전기가 자주 고장을 일으키자 뛰어난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니콜라 테슬라를 초청하여 직류 발전기의 성능을 개량해 준다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막상 테슬라가 1885년 그 작업을 완수하고 약속한 5만 달러를 달라고 요구하자 "유머 감각도 전혀 없군. 농담도 모르나?"라고 입을 싹 씻었다. 이에 분노한 테슬라는 에디슨의 회사를 나와 자신의 독자적인 회사를 차렸다. 출처: 어메이징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61쪽[26] 거꾸로 말하자면 이론과 공식으로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을 몰라서 필요도 없는 실험을 반복했다는 말도 된다. 이는 과학적 이론과 공식에 능통했던 테슬라와의 커다란 차이점 중 하나다.[27] 의대순(宜代淳)이라고도 한다.[28] 일본과 청은 1889년이 되어서야 전기를 처음 받아들였다.[29] 조선인 수행 비서가 호신용 권총을 만지작거리다 오발사고를 일으키면서 발사된 총알에 맞아 사망했다.[30] 맥케이는 조선인 운전수의 총기 오발로 사망했다. 여기엔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상기한 것처럼 에디슨은 조선 전등소 사업에 대단한 열의를 보였고 원래는 본인이 직접 조선에 방문해 이 프로젝트를 도맡고 관련 노하우를 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약속된 출발일 얼마 전 딸이 심하게 병을 앓았고 결국 맥케이와 그 가족만을 파견했는데 이런 사고를 겪은 것. 만일 에디슨이 직접 조선의 전등소 사업을 맡았다면 호사가들의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됐을 것이다.[31] JP모건 체이스를 세웠다.[32] 시속 100km를 먼저 달성한 것도 전기자동차다. 하지만 전기자동차는 납 전지를 사용했으며, 납 전지의 재활용이나 폐기는 엄청난 공해물질인 유기납을 발생시킨다. 결론은 어떤 걸 사용하던 대기는 오염될 수 밖에 없었다.[33] 후에 웨스팅하우스는 이를 보고 '차라리 도끼로 죽여라' 라며 비난했다.[34] 최초의 고압 직류 송전선에서는 직류 전동기와 교류 발전기의 축을 연결시켜 전력을 변환하는 전동발전기가 이용되었다. 그러나 효율이 떨어지며 모터 브러시 등이 마모되는 문제점이 있다.[35] 지금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과거 위인전에선 한 인물을 편파적으로라도 띄우고 업적을 좋게 표현해야 하다 보니 좋은 점만 크게 표현하고 나쁜 점은 감추는 경우가 많으며, 그 때문에 해당 위인과 라이벌이거나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뻤던 인물들은 별다른 죄를 짓지 않았거나 억울한 면이 있었음에도 인간말종처럼 표현되는 경우도 잦았다.[S] A B 상술했듯, 에디슨은 스완의 아이디어를 훔치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상용화하지 못해서 도용한 아이디어에 자신이 직접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아이디어를 짜서 살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빼앗긴 피해자조차 본인도 못한 상용화를 보란 듯이 성공한 에디슨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6] 현재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최근 미국에서도 선발명주의의 단점과 선출원주의의 확실한 장점을 인지하여 변경되었다. 다만, 미국은 최근에서야 선출원주의로 변경시켰으나, 에디슨이 살고 있는 당시에는 선 발명 우선주의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다. 늦게 출원해도 연구 노트라든지 녹취록, 녹음 등 먼저 발명하였다는 증거가 있으면 인정된다. 선 출원은 꼼짝없지만, 개발 증거는 조작되고 훼손될 수 있다. 상기한 에디슨이 연구 노트를 찢어버린게 그런 짓이다. 비슷한 분야인 디자인 권리 쪽에서도 기업의 횡포는 여전하다.[37] 일부 대기업의 얘기다. 그나마 대부분 충분치 않으며, 작은 회사는 직무발명 보상 같은 게 없거나 있어도 제대로 해 주는 곳이 드물다.[38] 비슷한 일화가 마술사 해리 후디니에게도 있다.[39] 대시(Dash)는 아버지 에디슨이 붙여준 별명으로 모스 부호의 점(도트)과 선(대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참고로 도트는 딸 마리온(Marion)의 별명.[40] 2019년 기준으로 치면 약 1,075만원이다.[41] 좌파 성향인 아버지와는 달리 보수 성향이었다. 토머스 에디슨은 본래 공화당을 지지했으나, 공화당이 갈수록 우클릭을 하자 바로 민주당으로 갈아탔다. 찰스 에디슨은 정반대로 이미 우익 정당이 된 공화당에 처음 몸을 담았다가, 이후에 민주당을 거쳐서 최종적으로는 사회보수주의 성향의 뉴욕 주 지역정당인 뉴욕 보수당에 적을 두었다.[42] 다만 에디슨이 살아있었을 때는 공화당이 오히려 개혁성향 정당이었다. 여기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나올 정도니 말 다한 셈. 개혁성향 정당 자리를 민주당에게 넘겨준 것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때의 일이다.[43] 진보당은 공화당에서 나온 당이다. 루스벨트는 진성 공화당원으로 거기서 대통령까지 지냈다. 진보당도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윌리엄 태프트가 맘에 안들어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나와서 생긴 당이다. 에디슨은 루스벨트의 연설을 레코드로 만들어 직접 판매하기도 했다.[44] 에디슨의 철자는 Edison이나, 출생 신고 당시 i를 빼먹어서 Edson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45] 90년대 인기리에 방영된 테마게임(MBC) 같은 TV프로그램.[46] 下下편 마지막에는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엮였다.[47] 가벼운 식사를 하기 위해 깨어난 다음, 식사 후 다시 취침 시간에 돌아가는 등, 하루종일 잠을 취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48] 말년에 오컬트에 심취한 사실에 영향을 받은 캐릭터로 보인다.[49] 그러면서 나오는 말이 "검색해봐, 에디슨은 재수없었다!"다.[50] 촛불을 켜던 이웃이 환하게 빛나는 에디슨의 집을 보며 "이봐 에디슨! 그놈의 전구 좀 나눠 쓰지?"라고 화를 내자, 에디슨은 "꼬우면 직접 발명하던가!"라고 받아치곤 언쟁을 한다.[51] 그러나 이부분은 에디슨이 마음을 바꿔서 니콜라 테슬라를 한국에 초빙하는데 실패한다. 아직 테슬라랑 본격적으로 다투기는 커녕 테슬라가 막 미국으로 건너온 시점이고 주인공도 조선의 기반환경으로는 테슬라를 받아들여도 쓸모 없을 것라고 생각해 미련 없이 포기한다. 나중에 한국이 강대국이 되어도 너무 괴짜라서 미국에 계속 남아 있었다.[52] 한국판에서는 '에디슨이 반세기 뒤에 만약 다시 태어나게 되면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