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핌 리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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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핌 리센코
Трофим Лысенко | Trofim Lysenko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Trofim_Lysenko_portrait.jpg

이름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1]
직업
유전학자, 생물학자, 정치가
국적
러시아 제국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러시아 공화국 파일:러시아 국기.svg
소련 파일:소련 국기.svg
출생
1898년 9월 29일
러시아 제국 폴타바현 콘스탄티노그라드군 카를롭카[2]
사망
1976년 11월 20일(향년 78세)
소련 모스크바
정당

[[소련 공산당|
]]

1. 개요
2. 생애
2.1. 소련의 떠오르는 과학자
2.2. 소련의 농업을 망친 과학자
2.3. 어용학자, 소련 과학계의 정점에 서다
2.4. 바빌로프를 숙청하다
2.5. 스탈린 사후
3. 영향
4. 그 외



1. 개요[편집]


소련의 과학자.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소련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으나 잘못된 이론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소련의 유전학과 농업을 수십년 후퇴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성유전학이 발전하면서 재평가 움직임도 약간은 있다.


2. 생애[편집]



2.1. 소련의 떠오르는 과학자[편집]


러시아 제국 폴타바현의 카를롭카에서 우크라이나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달리 눈에 띄는 행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이후 키예프 농업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농업 연구에 관심을 가졌고 1928년 육종학자 이반 미추린(Иван Мичурин, 1855–1935)의 연구를 계승하여 춘화처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 훗날 라이벌이 되는 니콜라이 바빌로프도 리셴코의 춘화 연구는 높게 평가했을 정도다.

'춘화처리'(春化處理)[3]는 보리, 밀처럼 겨울철 휴면을 거쳐야만 하는 종자들을 인위적으로 저온 처리하여 휴면 없이도 정상적인 발아가 이루어지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농업 외에도 원예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튤립과 같은 화훼의 경우 전 해에 꽃이 피고 진 구근이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겨울을 겪지 않으면 피라는 꽃은 안 피고 잎만 무성하게 나거나 괴이한 형태의 상품 가치가 없는 기형 꽃이 피게 된다.[4] 이런 저온처리의 가장 극적인 예는 바나나의 종자를 영하 60도에서 장기간 처리해 온대지방인 일본에서 바나나를 재배할 수 있게 한 몬게 바나나이다.

본래 춘화처리는 리센코의 고향인 우크라이나의 농부들이 경험상으로 알게 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겨울밀(가을에 심어 여름에 거두는 밀)을 억지로 봄에 심으면 이삭이 패지 않고 잎만 무성하게 자라나는 영양생장만 하는데 춘화처리를 거치면 겨울밀을 봄에 심어도 정상적으로 이삭이 패므로 수확이 가능하다.


2.2. 소련의 농업을 망친 과학자[편집]


그런데 리센코는 용불용설을 지지했다.[5] 그는 한 세대의 종자에 춘화처리를 해 놓으면 그 다음 세대부터는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냥 심어도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사실 그가 이런 학설을 주장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6] 한두해의 연구로 대충 학설에 끼워맞춰 내놓은 결과를 그대로 농업 프로젝트에 적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다.

유전학 및 종자학 등 종자관련 연구가 최소 5~10년 단위로 이어지는 길고 지루한 연구이고 중간중간에 돌연변이나 다른 유전자의 침입, 병충해나 농약사용에 통한 내성변화, 우성 및 열성유전자에 의한 종자변화 등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연구해야 하며 그 사이에서 돌연변이와 정상개체를 구분하고 분류하여 근삿값에 가까운 값을 구해야 하지만 하지 않고 자신의 용불용설에 맞게 대충 뜯어고친 내용만으로 진실인 것마냥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런데 소련 지도부는 이런 연구결과를 검증도 하지 않고 바로 적용해 버렸다. 현대의 GMO 작물을 개발해 상용화하기까지는 평균 13~14년의 시간이 걸리며 한국에서 냉해로 인해 없어진 통일벼도 시험재배로 최소 6년을 재배한 걸 생각해 볼 때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당연히 이런 연구 결과가 소련 농업 발전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거기다 당시 소련은 집단농장 체제로 전환되면서 소련 농업이 개판 5분 전이었을 때 리센코의 이론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1933)이 진행되면서 소련 농업부는 바빌로프의 유전학보다는 단기적으로 생산량을 높일 방법을 찾았고 리센코의 이론은 거기에 딱 적임자였다. 농업체제 전환의 부작용과 리센코의 엉터리 이론이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소련 농업은 1980년대까지도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최대 적성국인 미국에게서 식량을 사 오는 굴욕적인 처지에 놓였다.

현대의 러시아우크라이나가 주요 농업수출국 중 하나로 세계의 식량창고 역할을 하는것을 생각하면 그 좋은 땅이 많아도 잘못된 유사과학과 잘못된 정책으로 농업을 어디까지 말아먹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2.3. 어용학자, 소련 과학계의 정점에 서다[편집]


과학 탐구 - 생리학, 물리학 그리고 특히 생물학 - 관련하여 스탈린은 "올바른" 당 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결국 생물학 분야에서 유전학[7]

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의미였다.

트리스트럼 헌트


그의 연구 결과가 이렇게 엄청난 해악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련 정부의 입맛에 딱 맞는 과학자였다. 왜냐면 리센코는 당시 소련 과학계에서 이만큼 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인물도 드물었던 데다 출신 성분도 '부르주아'의 아들인 바빌로프와 달리 일반 농민의 아들로 우수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센코이즘의 사상적 베이스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인데 용불용설에 따르면 부모의 후천적 유전형질이 자식에게 유전된다고 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변증법에 의거하여 이에 따라 새로이 공산주의적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리센코이즘은 어찌 보면 공산주의자연과학적으로도 일견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8][9]결과적으로 그는 과학자로서 실수를 잔뜩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소련 생물학계의 정점으로 올라섰다.[10] 그리고 그의 큰 권력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왔다.


2.4. 바빌로프를 숙청하다[편집]


당시 소련에서는 유전학이 큰 화제를 불러왔는데 그 연구의 선도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진화생물학의 종주국인 영국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전학을 전공하고 이를 재배식물에 적용하여 많은 성과를 낸 인물이었으며 종자 연구에도 관심이 많아 전세계 많은 종자들을 모아 파블롭스크 실험국에 보관하여 연구하고 종과 변종의 기원중심설을 만드는 등 현대 유전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바빌로프는 한때 소련 농업과학아카데미의 총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리센코는 바빌로프의 유전학을 지지하지 않았다. 리센코는 유전학 이론을 연구 결과로 반박하기보다는 선천적인 유전자를 중시하는 유전학이 반 마르크스주의적 학문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며 바빌로프를 비롯한 유전학자들을 부르주아나 파시스트로 매도하는 데 치중했고 스탈린 역시 극도의 소련 국가주의자였던 터라 외국 학문이었던 유전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빌로프는 대숙청의 피바람에 휘말려 감옥에 갇힌 뒤 1943년에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와 동시에 멘델 등의 생물학자들의 이론이나 소련의 유전학도 '부르주아 유사과학'이라는 낙인과 함께 발전이 정체되었다.

바빌로프의 숙청을 본보기로 리센코는 스탈린과 정부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과학계의 독재자가 되었다. 이미 과학보다는 유사과학에 가까웠던 그의 이론에[11][12] 반대하면 반동분자나 파시스트로 몰려 큰일을 당했으므로 소련의 과학자들은 그의 이론에 감히 반대하는 연구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련의 생물학 연구 자체가 크게 위축되었으며, 소련의 농업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그나마 바빌로프가 숙청되기 전에 남겨 놓은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종자들을 동료과학자들이 전쟁의 화마 속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 보전된 게 이 정도였으니 만에 하나 실험국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하기라도 했다면 소련의 파멸은 실제보다 훨씬 더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바빌로프는 소련의 주류학설을 거부하는 이레귤러였다는 점을 알아야 그의 숙청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용불용설이 주류 학설이었기 때문이다. 노벨생리학상 수상자인 이반 파블로프도 당시 이미 세상 무서운 것은 하나도 모르는 용불용설을 지지했다. 그러다 보니 리센코가 아니라 바빌로프가 튀었기 때문에 숙청당한 것에 가까웠다.


2.5. 스탈린 사후[편집]


바빌로프의 숙청을 초래한 그의 권력 자체는 스탈린이 죽으면서 그 위세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흐루쇼프도 생물학에는 무지했던지라 그의 이론은 1950년대 말까지 쓰였다. 대체적으로 생물학에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않았던 소련과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그의 엉터리 이론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몰랐으므로 이걸 농업에 접목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결국 흐루쇼프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시베리아-카자흐스탄 지역의 처녀지 개간 운동이 처참하게 실패한 뒤에야 리센코와 그의 이론은 맹렬한 비판을 받으면서 소련 과학계에서 퇴출되었고 유전학이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소련 농업에 남긴 상처는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으며 이는 현재의 러시아농업에도 상당한 악재로 남고 말았다. 어찌 보면 현재진행형이다.

여튼 1957년에는 소련을 방문한 북한 과학자 계응상이 리센코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1962년과 1963년도에 처녀지에서 일어난 가뭄으로 입지가 급속히 축소되었다. 1964년부터 러시아 과학계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그를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서 맹비난하였다. 결국 1965년에 모스크바 유전학 연구소장직을 사임하면서 반 강제로 과학계를 떠나게 되었다. 1976년에 모스크바에서 7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는데 소련 정부는 이틀 뒤에 사망 사실을 발표했다.[13] 사후 모스크바에 있는 쿤데보 공동묘지에 뭍혔다.

공산권 내부에서 리센코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단단히 찍혔고 그 스탈린 빠질에 미친 북한조차도 스탈린은 옹호해도 리센코는 조선대백과사전에서 반동 과학자라고 가루가 되도록 깔 정도다.[14]


3. 영향[편집]


리센코식 용불용설은 타국에까지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 트로핌 리셴코가 어용학자로서는 물론, 스탈린 시대 소련 농업계의 1인자로서 활동했고 소련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쳤으나 그의 구시대에 머무르는 농업 지식들이 제대로 신세대의 지식으로 대체되지 않아 공산국가들의 농업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물론 소련에도 유능하고 훌륭한 과학자는 많았고 이후 리센코식 테크노크라트가 큰 영향을 끼쳐 업적을 제대로 남긴 학자들도 많았다. 슬라브 신화를 다시 되살린 20세기 초중반의 인문학자들이나 스푸트니크 시리즈로 상징되는 공학적 기술 발달이 그 예시. 다행스럽게도 베트남이나 쿠바는 아열대라 폴 포트 정도의 뻘짓만 아니면 대응 가능한 수준이다.

이 사람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일단의 경향을 리센코주의(Lysenkoism)라고 한다. 굳이 유전학 등이 아니라도 사이버네틱스 공학이나 비교언어학 등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스탈린 시대에 들어 '부르주아 유사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탄압을 받았다. 주목받지 못하거나 탄압받던 여러 학문들이 재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기 개혁의 일환이었다.

중국에서도 첸쉐썬이 농업 분야에서 비슷한 일을 벌이긴 했다. 이 사람은 생물학자도 아니었으면서 리센코의 이론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였다. 그래도 첸쉐썬은 자기 본업인 로켓 공학에선 천재이기라도 했지 리센코는 자기 본업인데도 말아먹었다.[15] 그런데 정작 리센코는 자기 자신의 이론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냉소했다. 사실 그럴 만했던 것이 해당 시점에서 자기 이론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처녀지 개간운동이 이 당시까지는 대박을 쳤었기 때문이었다.[16] 다만 자기가 날아갈 것을 자기도 몰랐기 때문에 후세에 웃음거리가 된 것이었다.

이렇게 나락에 빠질 뻔 했던 중국의 농업을 수렁에서 건져낸 인물은 위안룽핑이라는 인물로, 그는 중국공산당이 좋아했던 미추린 및 트로핌의 이론 대신 몰래 공부한 멘델과 모건의 이론을 통해 잡종강세를 이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쌀을 개발해냈다. 이 하이브리드 쌀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도입되어 기근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대한민국에서도 통일미의 개발에 영향을 끼쳤다.. 이 인물 덕분에 중국의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은 상위권에 속한다. 그 쌀이 맛이 좋은 것은 아니라 불만이긴 하지만.

4. 그 외[편집]


진화론의 발전을 게임북 형식으로 놓은 <진화론 300년 탐험>이라는 책에서는 리센코를 고집스레 쫒아가는 선택지를 고르면 바로 게임 오버가 된다. 그렇다고 발을 들여놨다가 탈출하고자 하면 바빌로프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되면서 역시나 게임 오버다.

러시아 애호가로 유명한 일본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가 리센코를 소재로 한 노래 "어째서! 루이선생님"(どうして!ルイ先生)[17]를 발매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의 농업정책 실패가 소련에서 일반인들에게도 별장(다차)이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18] 물론 1가구 1별장 정책은 흐루쇼프가 소련의 이미지를 대외에 선전하면서도 일반인들에게 부자나 특권층의 상징인 별장을 배급해야 되겠다는 의미로 시행한 것이만 그 이면은 신선채소류의 수급이 지속적으로 원활하지 못해 일반인들에게 주말시간이나 휴가를 이용해서 경작을 해서 식량수급 문제를 일정 부분 해결하는 방안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소극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옳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 '상식적으로 소련 같이 거대한 국가의 기반사업을 한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게 말이 되냐?'는 것. 즉 트로핌 리센코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건 소련 공산당 지도부 전체가 져야하는 실책인데 리센코 개인을 총알받이로 삼아 자신들은 빠져나갔다는 식이다. 어찌본다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 대한 재평가와도 비슷하다. 또 후성유전학이 발달하면서 생긴 이론적 재평가도 약간은 있다. 다만 후성유전학은 유전학의 주류라기보다는 이런 경우도 있다는 식의 약간의 변칙적인 예외이기 때문에 이론적 재평가는 말 그대로 얻어 걸려서 일부 주장은 맞다는 수준이다.

[1] 우크라이나어 표기는 트로힘 데니소비치 리센코(Трохи́м Дени́сович Лисе́нко).[2]우크라이나 폴타바주 폴타바구 카를리우카(Карлівка).[3] 러시아어로 야로비자치야(яровизация)라 한다. 식물학에서 춘화처리는 영어로 vernalization이라고 하며 성장한 식물이나 구근을 저온에 두어서 꽃눈의 형성을 촉진시키는 과정에 한정한 용어이고 씨앗의 발아를 돕기 위한 저온 처리는 층화처리(stratification)라고 따로 해서 구분한다.[4] 꽃이 안 피고 잎만 무성하게 나는 현상을 좌지현상이라고 한다.[5] 엄밀히 말하면 그가 주장한 것은 '획득 형질 유전설'로 용불용설과는 조금 다르며 이론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귀납적으로는 확인된 현상이다. 이는 나중에 1990년대에 후성유전적 유전이라 불리게 된다. 획득 형질 유전설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서 유래했으며, 소련을 비롯한 변증법적 유물론 학계에서는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6] 사실 용불용설을 끝장낸 바이스만의 연구의 반례가 되는 사례가 보고되기 시작했고 리센코 자신도 완전히 검증은 못 했지만 귀납적으로는 확인되었다.[7] 나치의 우생학과 유사한 부르주아지의 발명품으로 판단되었다.[8] 사실 이러한 설은 엥겔스 생전에도 자연과학에 변증법을 적용하려는 등의 형식으로 존재했다.[9] 인간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보다 사회적 학습이 중요하며 원래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선전과 학습으로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사회주의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 자본주의에 오염된 이기적인 인간도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살게 되면 마치 춘화처리된 밀처럼 되어서 자식들은 이타적인 사회주의자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10] 이렇게 공산주의나 좌익 사상을 일종의 생물학적 형질로 취급해서 좌익을 아예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보려는 시도는 이 시기 극좌나 극우나 같이 공유했다. 소련 당국의 경우 새로운 형태의 소비에트 인간(homo sovieticus)을 문화적, 사회적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대대적 선전 작업을 통해 이를 퍼뜨리려고 했고 반대쪽에서 나치를 비롯한 파시스트들도 좌익 사상에 물드는 건 유전학적 결함에서 비롯된 정신병으로 취급하여 탄생한 게 스페인에서 일어난 프랑코 정권의 대규모 고아 납치 프로젝트였다.[11] 위에 언급한 용불용설이나 반유전학 이론 뿐 아니라 작물을 빽빽하게 심으면 농사가 잘 된다는 밀식 농법도 그의 작품이다. 밀식제배를 할 경우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습해 및 병해가 심해지고 작물이 가깝기 때문에 해충이 숨을 공간이 많아져서 해충 피해도 커진다. 거기다 심어놓은 작물들도 땅이 좁으면 햇빛이나 양분 등을 두고 서로 경쟁하며 생식생장을 하지 않고 영양생장만 하기 때문에 필요한 농산물은 안 달리고 식물의 키와 잎만 크다가 결국 줄기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죽는다. 즉 이론적으론 완벽해 보이지만 실제로 적용하면 큰일나는 재배법.[12] 비록 후성유전학의 발견으로 그가 옮았다고 하더라도 그 이론을 농업에도 적용할 때는 또 지난한 검증 과정을 거쳤어야 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바로 적용한 것이 최대의 패착이었다.[13] 원래 소련권에서는 고위급 인사나 전직 고위급 인사가 사망하면 바로바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며칠 뜸들여서 발표하는 것이 관례이기는 하다.[14] 리센코를 비판한 계응상은 당시 용불용설에 빠져 있었던 소련의 배후 지시를 받은 북한 농업 당국에서 축출했지만 김일성의 비호로 다시 복귀했다. 당연하지만 계응상은 김일성을 뒷배로 두고 더욱더 가열차게 리센코를 비판할 수 있었다. 이후 계응상은 조선로동당에도 가입하는 등 잘먹고 잘살다 갔으며 현재는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즉 북한에서는 계응상을 인정하고 있고 당연히 그가 맞섰던 리센코는 폄하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하고문제는 김일성이라고 농업을 잘한건 아니라는거다.[15] 물론 이론분야와 권력욕에선 부정할 수 없는 바보였지만 그 기반이 된 농사 기술과 실무적 지식은 어느 정도는 있었는데 공산당의 비호로 1인자가 된 것. 소련 농업판 원균이 따로 없는 것이다.[16] 1954년에 소련 곡물생산량이 8500만톤이었던 것이 1960년에는 1억 2500만톤까지 불어났다. 단순 산술적으로 절반가량 늘어났으니 중국을 비웃은것은 당연했다.[17] 일본어 표기로는 '루이센코'(ルイセンコ)이다.[18] 물론 소련의 별장은 고위층들이나 유명인들에게 배급되는 별장을 빼면 주말농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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