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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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칼리파국
الخلافة الفاطمي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Fatimid_flag.svg.png
국기[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Fatimids_Empire_909_-_1171_%28AD%29.png

파티마 왕조의 최대 강역
909 ~ 1171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아바스 왕조
[[아글라브 왕조|

아글라브 왕조
]]
[[이드리스 왕조|

이드리스 왕조
]]
[[이흐시드 왕조|

이흐시드 왕조
]]
아이유브 왕조
위치
북아프리카,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수도
라카다 (909 ~ 921년)
마흐디야 (921년 ~ 948년)
알 만수리야(948년 ~ 973년)
알 까헤라 (카이로) (973년 ~ 1171년)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칼리파
주요 군주
압둘라 알 마흐디
면적
4,100,000km2(추정치)
인구
6,200,000명~7,000,000명(추정치)
민족
아랍인
베르베르인
유대인
언어
베르베르어
아랍어
콥트어
종교
이슬람교(시아파 이스마일파)
통화
디나르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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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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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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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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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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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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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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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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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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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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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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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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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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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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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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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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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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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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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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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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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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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1. 개요
2. 역사
2.1. 형성과 확장
2.2. 전성기
2.3. 쇠퇴
2.4. 무신정권과 잠깐의 중흥
2.5. 멸망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시아파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이슬람 왕조. 파티마 왕조(الدولة الفاطمية)나 파티마 칼리파(الخلافة الفاطمية)로도 불린다.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혈통을 이어받은 시아파의 제6대 이맘인 자파르 알-사디크(جعفر الصادق)의 아들, 이스마일 빈 자파르(إسماعيل بن جعفر)를 시아파의 제7대 이맘으로 간주하는 분파가 이스마일파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라도 수니파 아바스 칼리파조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슬람 세계를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 왕조,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로 3분했다. 이후 오우즈 튀르크계 수니파 셀주크 제국과 유럽 십자군에게 연이어 패배하고 국력이 쇠락하면서 12세기에 쿠르드계 수니파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2. 역사[편집]


파일:Carte_Califat_fatimide.jpg}}}

2.1. 형성과 확장[편집]


창시자인 이스마일파압둘라 알 마흐디는 이스마일파의 근거지인 시리아에서 모로코까지 이동해 세력을 넓히다가 909년에 북아프리카를 차지하고 있었던 아글라브 왕조를 전복시키고, 튀니지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알 마흐디의 영향력은 곧 리비아 서부에서 모로코에 이르는 마그레브 전체로 확대되었다. 초기 수도는 튀니지 동해안의 신도시 '알 마흐디아'였는데, '마흐디의 도시'라는 뜻이다. 921년에는 모로코의 시아파 이드리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튀니지에 건국한 당시부터 '마흐디'인 동시에 칼리파라고 칭하여 동쪽의 아바스 왕조, 서쪽의 후우마이야 왕조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따라서 파티마 왕조는 아바스 왕조의 영토를 계속 공격했으며, 특히 풍부한 재원을 보유한 이집트 지역을 얻고자 수차례의 원정을 시도했다. 파티마 왕조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제4대 칼리파인 알 무이즈 집권기에 이집트에 극심한 기근이 들어 군사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이집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아바스 왕조에 충성하며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이흐시드 왕조는 파티마 왕조의 가우하르 장군이 이끄는 정예군 100,000명을 이겨내지 못하고 969년 수도 푸스타트를 내놓게 되었다.

한편 936년 이븐 라이크가 집권한 이래로 혼란을 겪고 있었던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는 결국 945년 말엽 쉬아 계열 12이맘파 국가인 부와이 왕조가 아바스 칼리파의 이름으로 입성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파티마 왕조는 마크라드의 반란과 마주하고 있었던 터라 아바스 왕조 정권 교체기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카임 문서 참고. 파티마 왕조는 종말론적인 마흐디 사상으로 세워졌지만 곧 이를 멀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더 중점적으로 두며 세속 제국으로 변모했다. 그러면서 수니파 학자들(특히 한발리)도 포용했고, 동시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파티마 혈통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2.2. 전성기[편집]


파일:이슬람 아즈하르.jpg}}}
알 아즈하르 모스크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여 카이로를 건설하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카이로의 초창기 인구는 약 18,000명이었으나, 도시가 점차 북쪽으로 확장되면서 급격히 팽창해 약 20~3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이슬람 세계 도시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또한 잔즈 반란을 거친 후 쇠퇴하기 시작한 이라크 지역은 10세기 중반 부와이 왕조의 침공으로 더욱 쇠락했고 인도양을 통해 이어진 해상 실크로드는 페르시아만 대신 홍해를 통하게 되어 이집트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7세기 초 동로마-사산 전쟁으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히자즈 지역이 혜택을 본 것처럼 파티마 왕조 역시 반사 이익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인도 아대륙에서 목화나 사탕수수 등의 상품 작물을 들여오면서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다. 서기 1000년 경 카이로는 카이펑(개봉), 콘스탄티노플 등과 함께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파티마 왕조는 지중해와 인도양 양쪽에서 광범위한 무역망을 주도했고, 이집트의 농업을 발전시켜 이집트는 고대 이후 역사상 최대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중흥기를 맞아 시리아를 수복하고 예루살렘까지 위협했지만, 파티마 왕조는 다마스쿠스를 탈환하고 시리아 남부를 점령하여, 동로마 제국의 남진을 저지했다. 이렇게 로마-파티마를 축으로 해서 함단 왕조, 마르완 왕조 등의 소국들이 공존했던 레반트 및 동지중해에서의 세력 균형이 튀르크계 수니파 셀주크 제국이 진출하는 11세기 중반까지 1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이 시기 파티마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메소포타미아~이란 고원을 제외한 이슬람권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면서 수니파 무슬림의 충성도 받아냈다.

2.3. 쇠퇴[편집]


하지만 파티마 왕조는 내부의 반대파와 동로마 제국, 그리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진하는 셀주크 제국에게 연이어 패배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대외적 어려움에 영향을 받은 파티마 왕조 내부도 당연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군대의 세력은 갈수록 커져갔고 베르베르인, 튀르크인, 수단인, 누비아인 부대 간에 내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군대 내 세력 간의 불화는 1020년대에 들어와 본격화되었다. 이후 이집트는 분파 간의 싸움으로 무정부와 폭정의 악순환에 빠졌으며, 기근과 전염병이 계속되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048년에 북아프리카의 지리 왕조가 파티마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2] 왕조의 발상지를 뺏겼고, 동쪽과 서쪽 지역은 새로 나타난 침략자들에게 빼앗겼다. 1060년까지 이집트는 계속된 가뭄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자원의 감소로 인한 파티마 왕조 내부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1090년대 파티마 왕조는 유럽 십자군의 대규모 침공으로 레반트와 시리아를 상실했고,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지배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11세기 말에 이르면 파티마 왕조의 영역은 이집트만이 남게 되었다.

2.4. 무신정권과 잠깐의 중흥[편집]


1072년, 칼리파는 파티마 왕조를 구하기 위해 바드르 알 자밀리를 카이로로 초청했다. 1073년 바드르 알 자밀리가 칼리파의 초청을 받아들여 카이로로 들어와 정권을 잡았다. 하룻밤 사이에 그의 휘하 장교들은 주요 장군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죽였다. 알 자밀리는 군총사령관, 포교단의 단장, 와지르의 직함을 모두 차지했다. 이는 그가 권력을 모두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파티마 왕조의 질서를 회복하고 잠시나마 왕조에 번영을 가져왔다. 이집트는 군 총사령관을 수반으로 하고, 그의 군대에게 지배받게 되었다. 바드르 알 자밀리의 권력은 세습되었고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이, 그의 아이들이 죽은 뒤에는 군부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바드르와 그의 후임자들은 거의 1세기 가까이 파티마 왕조를 몰락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바드르는 셀주크 튀르크의 패권 도전에 대응했으며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 등지에서 종교와 무력을 사용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나갔다. 바드르와 그의 후임자 덕분에 파티마 왕조는 몰락의 위기에서 구원받았지만, 계속되는 반란으로 국력은 쇠퇴했고, 시리아에서는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패배를 거듭했으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지지세력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1091년에는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시칠리아 섬에 대한 영향력도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제국의 외곽지역은 사실상 그 지역의 장군들이 다스리게 되었다.

2.5. 멸망[편집]


1094년 칼리파인 알 무스탄시르가 붕어한 뒤 새로운 칼리파를 선택한 인물은 바로 알 아프달이었다. 이전에 알 무스탄시르는 자신의 맏아들로서 이스마일파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니자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아직 어린 니자르의 동생 아흐마드는 지지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후원자가 나타날 경우, 그에게 전적으로 매달려야 할 상황이었으며, 알 아프달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점을 염두에 두고 자기 누이동생과 아흐마드를 결혼시킨 후 알 무스탄시르가 붕어하자 아흐마드를 '알 무스탈리'(1094~1101 재위)라는 왕호를 가진 새 칼리파로 선포했다. 알 아프달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이스마일파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페르시아, 이라크,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하산 에 사바흐의 이스마일파 포교단들은 새 칼리파를 인정하지 않고, 카이로에 있는 파티마 왕조 본국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 뒤 하산 에 사바흐는 새로운 이스마일파 세력을 일으켰는데, 시리아 지파의 이름을 따서 '아사신'이라 불렀다. 이들은 니자르와 그 후손들을 정당한 '이맘'이라고 선포하고 카이로의 칼리파들에 대해서는 찬탈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파티마 왕조의 세력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으며, 심지어 이집트에서마저도 새로운 칼리파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고 있었다.

알 무스탈리를 인정했던 예멘의 이스마일파 교도들도 1130년 알 무스탈리의 아들인 알 아미르가 아사신파에게 암살당한 뒤 그의 사촌인 알 하피즈가 칼리파의 자리에 오르자 칼리파와의 관계를 끊고 떨어져 나갔다. 예멘인들은 알 아미르가 남긴 어린 아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이맘'이라고 주장하며 카이로의 알 하피즈와 그의 계승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1171년 마지막 칼리파가 죽은 뒤 명목상의 와지르인 살라딘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고, 이미 권력을 상실한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직위는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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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마이야 왕조가 백색, 아바스 왕조가 검은색이었던 것과 대조되게 파티마 왕조는 온통 초록색 국기였다. 중국인들은 '녹의대식'이라고 불렀다.그리고 여담으로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와 국기가 비슷하다.[2] 이집트를 점령하고 중심지를 옮긴 969년에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972년에 세워졌다. 즉 단일 정권이 동•서로 긴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한꺼번에 통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