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치오 람보르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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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todayifoundout.com/ferruccio_lamborghini.jpg

페루치오 람보르기니[1][2]
Ferruccio Lamborghini
출생
1916년 4월 28일, 이탈리아 왕국 에밀리아 로마냐}}}
사망
1993년 2월 20일 (항년 76세) 이탈리아 움브리아 페루지아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직업
공학자, 기업인
서명
파일:Ferruccio_Lamborghini_autograph.jpg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트랙터 사업
2.2. 굴욕을 당하다
2.3. 슈퍼카 산업에 뛰어들다
2.4. 회사의 파산
2.5. 여생과 사망
3. 기타


1. 개요[편집]


폭스바겐 그룹 아우디 산하의 트랙터 회사이자 슈퍼카 회사인 람보르기니의 설립자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과 트랙터 사업[편집]


1916년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에서 포도농장주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러 기술자들이 그랬듯이 어렸을 때부터 농업보다는 농기구와 기계들에 관심을 보였는데 페루치오의 부모는 아들을 볼로냐의 기계학교로 보내 기계를 배우게 했고,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 이탈리아 공군에 징집되어 로도스 섬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차량 정비병으로 복무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군 포로로 1년간 억류되었다가 1946년에 귀국하면서 자동차 정비소를 차렸고, 1947년에 페루치오에게 부를 안겨다 줬던 트랙터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마셜 플랜으로 인해 농업쪽에도 막대한 돈이 들어왔고 2차 대전 이후 농업의 자동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 트랙터의 수요가 엄청났다.[3] 그리고 1950년대 후반까지 경작용 트랙터를 생산하는 일을 하며 산업 왕국을 세웠다.


2.2. 굴욕을 당하다[편집]


본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페루치오는 트랙터로 번 돈으로 고급차를 여러 대 구입해 몰고 다녔고, 이 중 페라리의 250 GT가 있었다. 차 자체는 괜찮았으나 너무 시끄럽고 거칠어 트랙이 아닌 일반 도로나 비포장도로에서는 운행이 거의 불가능하고 클러치가 계속 오작동한다.[4] 페루치오는 원인을 알아내고자 차를 분해하여 람보르기니에서 생산하던 트랙터와 페라리에 사용한 클러치가 같은 제품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페루치오는 엔초 페라리를 직접 만나 자신이 발견한 클러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페라리 본사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엔초를 만난 페루치오지만 당시 모터스포츠에서 연승을 거두어 자만하던 엔초는 웬 촌티나는 시골 사업가가 자기 차의 결함을 지적하기 위해 온 것을 보고는 그의 면전에 대고 비아냥댄다.

You know how to drive tractors. But you'll never learn how to drive a real Ferrari.

트랙터는 잘 모는 모양이군. 근데 진짜 페라리는 평생 걸려도 제대로 몰지도 못할 걸세.


자신이 가장 동경하는 자동차 제조사의 회장에게 대놓고 운전도 못하는 촌놈 취급을 받자 페루치오는 격분하여 제대로 된 스포츠카를 보여주겠다고 응수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현대 람보르기니의 창업 비화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정설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설에서는 250 GT를 분해해 본 람보르기니가 고성능 스포츠카의 명성과 가격에 비해 그 구조는 자신이 만들던 트랙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이 정도면 자신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스포츠카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엔초에게 모욕당한 이야기는 사업 수완이 좋았던 페루치오가 당시 최고의 스포츠카 제조사인 페라리와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면 더 많은 인기를 끌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5] 하지만 당시 엔초의 콧대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었고 페라리 측에서도 엔초가 페루치오를 모욕한 일화를 특별히 부정하지도 않는 데다가 엔초도 생전에 상당히 고집이 센 성격이었던 것으로 유명해서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여진다.[6]


2.3. 슈퍼카 산업에 뛰어들다[편집]


이후 이탈리아 자동차 업계에서 난다긴다 하는 엔지니어[7]들을 스카우트한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스포츠카 공장을 신설하고 1963년 2인승 V12 쿠페형태의 첫 람보르기니 차량 350 GTV를 생산한다.

1966년 람보르기니는 세계 최초의 슈퍼카라 불리는 미우라를 발표했다. 이 차는 리어 미드십 엔진을 장착한 최초의 자동차였다. 본디 빠르기만 하고 실용적이지 않은 차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그였지만,[8] 이 차는 곧 세계를 경악시키게 되었고 람보르기니라는 회사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2.4. 회사의 파산[편집]


미우라의 성공으로 마음이 바뀌었는지 페루치오는 미우라의 뒤를 이을 강력한 신차를 계획했다. 1971년도, 제네바 모터쇼에서 쿤타치 컨셉트를 선보인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 트랙터 사업의 재정난과 석유파동으로 람보르기니는 휘청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영에 흥미를 잃은 페루치오는 회사를 스위스 사업가인 조르주 앙리 로세티에게 매각했고, 이후 람보르기니는 1978년 결국 파산하여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후 1980년에는 프랑스인 형제인 장 클로드 미므란과 파트릭 미므란의 손에, 1984년에는 미국의 크라이슬러 그룹에 매각된다.


2.5. 여생과 사망[편집]


페루치오는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 포도 농사를 지으며 자기 이름이 들어간 포도주를 내놓기도 하면서 노후를 보내다가 이후 1993년 방송 녹화 도중 뇌경색으로 쓰러져 향년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람보르기니에서 손을 뗀 후에도 자신이 세운 회사에 대한 애정이 있었는지 말년까지 계속 쿤타치를 자가용으로 타고 다녔다.


3. 기타[편집]


  • 2022년 라이온스게이트가 제작한 람보르기니의 전기영화에서는 프랭크 그릴로가 그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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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루초 람보르기니라고도 불린다.[2] 사진에서 페루초 람보르기니가 기대어 앉아있는 차는 람보르기니 하라마이다.[3] 당시 포르쉐도 트랙터를 12만 대나 만들어서 재미를 보던 시절이었다.[4] 당시 250 GT의 클러치는 고속에서 슬립이 지나치게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5] 실제로 산타가타볼로녜세의 람보르기니 박물관에서 도슨트 투어에 참여하면, 도슨트가 정설과 더불어 이러한 견해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6] 엔초의 성격으로 인해 생겨난 또 다른 전설적인 자동차는 포드의 GT40이 있다. 포드에게 피아트의 페라리 인수가만 높여준 꼴이 되어버렸던 페라리 인수실패, 페라리의 레이싱 집념, 국가적 자존심 등이 겹쳐 개발되었으며, 르망에 출전하여 페라리를 누르고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다.[7] 대표적으로 페라리의 수석 엔지니어인 지오토 비짜리니(Giotto Bizzarini)나 나중에 레이싱카 컨스트럭터 달라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는 지안 파올로 달라라(Gian Paolo Dallara) 등이 이 시기 람보르기니에 스카우트된다. 특히 비짜리니가 350 GT를 위해 처음 만든 람보르기니 V12 DOHC 엔진은 배기량을 키우고 연료분사 방식을 카뷰레터에서 전자식으로 바꾸는 등 오만가지 개량을 거쳐 47년의 시간이 지난 2010년까지 무르시엘라고에 쓰이는 등 장수만세했다.[8] 미우라는 원래 페루치오 몰래 람보르기니의 젊은 엔지니어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하던 프로젝트였고, 페루치오가 미우라 생산을 승인한 건 단지 자사의 인지도에 도움이 되려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