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코모

덤프버전 :

페리 코모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페리 코모
Perry Como


파일:Perry_Como_1944.jfif.jpg

본명
피에리노 라널드 코모
Pierino Ronald Como
출생
1912년 5월 1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캐넌즈버그
사망
2001년 5월 12일 (향년 88세)
미국 플로리다주 주피터 인렛 칼러니
직업
가수, 배우
장르
보컬 팝, 이지 리스닝
활동
1932년 ~ 1997년
신장
168cm
배우자
로젤 벌린 (1933년 ~ 1998년, 사별)
자녀
라니 코모
테리 코모
데이비드 코모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Perry_Como_signature.svg.png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미국의 가수 겸 배우.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1940~50년대 당시의 많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수 중에서도 제일 많은 인기를,[1] 아니 미국 음악계 자체에서 제일 인기있는 가수 중 하나였다.

2001년 5월 12일 89세 생일을 6일을 앞두고 사망하였다.


2. 상세[편집]


1950년대 초반 당시 미국 인기 가수의 순위를 보자면 빙 크로스비 > 에디 피셔 > 냇 킹 콜 > 페리 코모 > 프랭크 시나트러로 시나트러가 잠시 밀려 있고 크로스비는 절대적 상징으로 1위를 거머쥐었으며 에디 피셔는 나무위키 문서는 없지만 1928년생, 즉 20대 초반에 빌보트 차트 1위곡을 무려 3개[2]나 배출하여 시나트러가 갖고 있던 여성들의 인기를 상당수 가져왔다.[3] 그리고 냇 킹 콜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흑인에게는 백인과 동등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인종차별이 연방법으로도 용인되던 40년대 말 갑자기 신드롬적인 인기로, 프랭크 시나트러 류의 틴 아이돌적인 인기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로 백인 기성세대를 매료해 버린 아주 특출난 케이스로 초대박을 거두었고[4] 페리 코모는 그 다음 순위였다. 무슨 말이냐면 크로스비는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 지미 헨드릭스 같은 상징적 1위[5]였고 냇 킹 콜은 1950년 Mona Lisa로 빌보드 연말 차트 2위[6], 1951년 Too Young으로 빌보드 연말 차트 1위[7]로 명실공히 상업적으로 제일 승승장구하던 가수였다. 코모는 그 다음으로, 크로스비와 콜의 아성은 넘지 못했으나 싱글 차트 1위, 히트곡들을 계속 내놓은 가수였다. 실제로 코모는 40년대 중후반에도 시나트러보다 더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가수이다.[8]

페리 코모의 또 다른 점은, 크로스비나 콜, 시나트러 류의 크루닝 창법 기반 트레디셔널 팝 가수가 아니라, Novelty Song[9]을 주로 불러 장르에 구애받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55년 발표된 Ko Ko Mo (I Love You So)는 로큰롤/리듬 앤 블루스 곡으로 코모는 빌 헤일리류의 로큰롤이 히트를 치자 마자 이러한 곡을 내놓아 빌보드 차트 5위에 오르며 성공했고 1956년 발표된 Hot Diggity[10]는 그냥 즐겁고 유쾌한 팝 트랙이다. 참고로 이때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온 해였고 프레슬리가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나 코모의 인기는 떨어지지 않았고[11] 1957년 Round and Round로, 1958년 Catch A Falling Star로 각각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다만 이때는 빌보드 핫 100이 아니라 전체 차트를 판매량 차트, 주크박스 차트, 레이디오 디제이 차트로 나눠 했기에 좀 달랐다만 1955년에 개설된 핫 100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탑 100도 있었다. Round and Round는 세 차트 모두 1위를 기록하고 탑 100에서도 1위했지만 Catch A Falling Star는 세 차트 중 두 차트에서 1위 했으나 아쉽게도 탑 100에서는 2위를 했다. 핫 100은 1958년 여름에 개설된다.

1957~58년은 로큰롤이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대였지만 페리 코모는 아직 탑에 있었다. 코모가 원래부터 예술적이라기 보다는 상업적이고 친근한 노래[12]를 부르고 또 성격도 좋았기 때문에 계속 선방한 것이다. 이는 콜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코모도 1959년부터 한동안 침체기였다.

페리 코모 쇼라는 인기 쇼를 1956년부터 진행해서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가수로선 한동안 침체기였다. 1962년 발매한 싱글이 핫 100에서 23위를 기록하긴 하지만 코모의 가수 경력을 정점으로 올리는 수준은 아니었던데다 1964년엔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음악계가 또한번 크게 바뀌며 음악계에서 코모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히피 문화가 빠르게 죽은 69년 말 이후 이지 리스닝 열풍으로 코모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3 20:28:40에 나무위키 페리 코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같은 이탈리아계인 프랭크 시나트러와 맞먹는 수준이었다.[2] "Wish You Were Here"(1952), "I'm Walking Behind You"(1953), "I Need You Now"(1954)[3] 하지만 현재는 많이 잊혀졌는데 그 이유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불륜 때문이며, 불륜 그 자체보단 피셔의 수법이 팬들의 공분을 샀기 때문이다. 불륜 당시의 아내인 <사랑은 비를 타고>의 여주인공 데비 레널즈, 딸인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 역 캐리 피셔 항목 참조. 2010년 사망했으며 1960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4] 냇 킹 콜 전엔 루이 암스트롱이 있었다. 암스트롱 역시 백인들 사이에서 제일 인기 많은, 즉 미국에서 제일 인기 많은 가수 및 엔터테이너 중 하나였다. 대신 당대 미국 흑인들은 암스트롱을 위선자라고 비판하며 싫어했다. 자신들은 매일같이 차별받고 린치당하는데 최고급 스타의 위치에 올랐으니. 그러나 암스트롱이 미국 흑인에 대한 인식을 전보다 개선한 것은 확실하다. 콜도 그랬었고. 이 두 흑인 스타가 없었으면 백인들이 흑인들을 1910년대 • 20년대처럼 막 약탈하고 죽이고 린치하지 않았겠는가? 실제로 이 두 분이 흑인 인권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5] 50년대 들어 히트곡이 크게 줄었으니. 크로스비의 인기가 떨어졌다기보다도, 크로스비가 1950년대에는 활동을 전 시대에 해 널널하게 했다. 이미 히트곡이 백 개도 넘고 돈도 많고, 나이도 50인데 예전처럼 열심히 할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6] 1950년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게 히트한 곡.[7] 1951년 최고의 히트곡.[8] 코모는 40년대 중후반부터 빌보드 차트 1위 곡을 많이 배출했다.[9] 진지한 노래가 아니고, 고전 미국 쇼의 영향을 받아 코믹하고 즐겁고 유쾌한 가사가 특징인 장르이다.[10] Fall Guys 런칭 예고편에 쓰였다.[11] 크로스비, 시나트러와 달리 코모는 전연령층에 팬들이 있었다. 콜 역시 전연령대에 팬이 있었기에 죽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12] 위에서 말했던 Novelty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