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체 보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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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체 보렐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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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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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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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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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31대



펠리체 보렐의 수상 이력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파일:펠리체 보렐.png

이름
펠리체 보렐
Felice Borel
본명
펠리체 플라시도 보렐 2세
Felice Placido Borel Ⅱ
출생
1914년 4월 5일/
프랑스 제3공화국 니스
사망
1993년 1월 21일 (향년 79세)
이탈리아 토리노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신체
179cm[1] | 체중 76kg
직업
축구선수(중앙 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유벤투스 FC (1932~1940)
토리노 FC (1941~1942)
유벤투스 FC (1942~1946)
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 (1946~1948)
SSC 나폴리 (1948~1949)
감독
유벤투스 FC (1942~1946 / 선수 겸 감독)
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 (1946~1948 / 선수 겸 감독)
SSC 나폴리 (1948~1949 / 선수 겸 감독)
토리노 FC (1950~1951)
포사네세 (1954~1956)
카탈루냐 대표팀 (1956~1958)
테르나나 칼초 (1966~1967)
국가대표
3경기 1골 (이탈리아 / 1933~1934)

1. 개요
2. 특징
3. 생애[2]
3.1. 클럽
3.3. 감독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5. 수상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66년부터 1967년까지 테르나나 감독을 맡았다.

역대 세리에 A 최연소 득점왕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2. 특징[편집]


  • 보렐의 집안도 축구 집안이었다. 아버지 에르네스토 보렐도 축구 선수로서 OGC 니스, AS 칸, 유벤투스에서 활약했으며, 형 알도 주세페 보렐도 10 시즌을 세리에 A에서 활약하였다. 피에트로 아르카리의 형제들처럼 형 알도 보렐은 보렐 Ⅰ, 동생 펠리체 보렐은 보렐 Ⅱ로 불렸다.
  • 보렐은 세리에 A 최연소 득점왕 기록과 함께 생후 20세 1개월 만에 50골을 돌파했는데 이는 세리에 A 통산 최연소 50골 기록으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 보렐은 생후 18세 8개월 13일 만에 트리에스티나를 상대로 첫 해트 트릭을 기록했는데 데뷔 후 화려한 2년 간 총 5회의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참고로 세리에 A 최다 해트 트릭 기록 보유자 필리포 인차기가 21시즌 동안 총 10회의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 보렐은 1934년 월드컵 우승 멤버 중 최연소 선수였다.


3. 생애[3][편집]



3.1. 클럽[편집]


보렐은 14살 무렵부터 유벤투스의 유스로 활약하였고, 18살 때 데뷔하였다. 데뷔전 상대는 SSC 나폴리였고, 팀은 1대0으로 패배하였다. 그런데 출전 기회를 잡은 보렐은 28경기에 출전, 29골을 넣으며 데뷔 시즌에 득점왕이라는 대형 사고를 쳤다. 득점왕 확정 당시 19세 2개월 16일로 메아차의 기록을 개월 수로 제쳤고 지금까지도 세리에 A 내에서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그 다음 시즌에도 34경기에 출전 32골을 넣어 다시 한 번 세리에 A 득점왕이 되었고, 이런 스타에게 유벤투스는 물론 이탈리아 전체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부상신이 강림하여 보렐의 기세는 꺾여버리고 말았다. 무릎에 문제가 생겼고 그 이후에는 부상을 달고 사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 1934-35 시즌에는 득점 페이스가 반 정도로 후려쳐지더니[4] 1935년에는 8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이 무렵 형 알도 주세페 보렐이 유벤투스로 이적하여 형제가 한솥밥을 먹게 되었고 심리적 안정이라도 얻은 듯 1936-37 시즌에는 리그 17골을 넣으며 부활하는가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한 자리 수 득점에 그쳐버리고 말았다.

경기는 뛰지만 골은 거의 기대할 수 없게 된 보렐은 1941년 지역 라이벌 토리노 FC로 팀을 옮겼다. 토리노에서 회장 페루초 노보의 지원 아래 1940년대 세리에 A의 맹주로 떠오를 일 그란데 토리노의 기틀을 닦았으며 1년 만에 친정팀 유벤투스로 다시 돌아갔다. 그 이후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유벤투스를 이끌었고, 4시즌 동안 75경기 24골을 넣으며 활약했다.[5] 하지만 정작 유벤투스는 자신이 기틀을 마련한 토리노의 등쌀에 밀려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1949년에 나폴리에서 선수 커리어를 마감했다.


3.2. 국가대표팀[편집]


데뷔할 때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으니 포초의 부름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1933년 10월에 부상으로 잠시 빠진 안젤로 스키아비오를 대신하여 헝가리를 상대로 데뷔하였고, 결승골을 넣어 1대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게 보렐의 처음이자 마지막 A매치 득점이다

월드컵에서는 스페인과의 재경기에서 활약하였다.


3.3. 감독[편집]


유벤투스에서 선수 겸 감독 생활을 할 때에는 토리노에 밀려 우승은 못했지만, 나중에 팀의 명예 회장까지 지내게 되는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를 발굴하기도 했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저널리스트 일을 하기도 했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Farfallino(나비 넥타이)라는 별명으로 유벤투스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스트라이커. 슈팅, 스피드, 볼터치에서 호평을 받았다. 강력한 슈팅보다는 골키퍼가 손을 아예 쓸 수 없는 곳으로 정확히 슈팅하는 것을 즐겼다.

유벤투스에서 총 158골을 넣어 현재 유벤투스 역대 득점 순위 6위에 위치해있으며, 1933-34 시즌에 37골을 넣어, 무려 86년동안 깨지지 않고 있는 유벤투스 단일 시즌 최다 득점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5. 수상[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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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월드풋볼넷, 트랜스퍼마켓. 이탈리아어 위키에서는 165cm, 영어 위키에서는 175cm로 자료의 편차가 크다.[2] 출처: http://storiedicalcio.altervista.org/blog/borel.html, 위키백과[3] 출처: http://storiedicalcio.altervista.org/blog/borel.html, 위키백과[4] 중유럽 컵에서 그나마 많이 넣어서 20골을 유지하기는 했다.[5] 1945-46 시즌의 12골의 비중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