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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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보르본 왕조 제1•3대 국왕
펠리페 5세
Felipe V


파일:펠리페 5세.jpg

이름
스페인어
펠리페 데 보르본 이 바비에라
(Felipe de Borbón y Baviera)
프랑스어
필리프 드 프랑스
(Philippe de France)[1]
출생
1683년 12월 19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746년 7월 9일 (향년 62세)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재위
스페인 국왕
1차
1700년 11월 1일 ~ 1724년 1월 15일
2차
1724년 9월 6일 ~ 1746년 7월 9일
배우자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 (1701년 결혼 / 1714년 사망)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1714년 결혼)
자녀
루이스 1세, 펠리페 페드로, 페르난도 6세, 카를로스 3세, 마리아나 빅토리아, 펠리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루이스,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
어머니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형제
루이, 샤를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펠리페 5세 서명.svg

1. 개요
2.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가 되다
3. 스페인 왕위 계승
5. 결혼과 결혼생활
5.1. 첫 아내, 마리아 루이사
5.2. 두 번째 왕비, 이사벨 파르네제
6. 우울증과 발작, 퇴위와 복위
7. 생활과 죽음
8. 기타



1. 개요[편집]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초대 왕. 1683.12.19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앙주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스 왕세자인 그랑 도팽 루이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딸인 마리아 안나 폰 비텔스바흐[2] 사이의 차남으로, 루이 15세의 숙부다. 왕실에 천연두로 인해 아버지와 형이 모두 죽는 참극이 있었을 때 루이 14세적손 중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과 함께 그 참극을 피한 인물이기도 하다.[3]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였던 마리아 테레사 왕비의 손자였다.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로부터 부르봉 왕가의 만족할 줄 모르는 성욕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대대로 나타난 우울증을 물려받았다. 불과 7살 때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가 사망했는데 부친인 그랑 도팽 루이는 아들들을 보살피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로 인해 형제들과 함께 종조모인 오를레앙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보살핌을 받았다.

후에 대주교가 되는 프랑수아 페넬롱(François Fénelon)이 그의 가정교사였는데, 페넬롱은 엄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탈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엄격한 교육으로 인하여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2.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가 되다[편집]


파일:펠리페 5세/1701년.jpg
스페인 궁정의 복장을 입은 1701년의 펠리페 5세. 이아생트 리고 작

카를로스 2세프랑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바이에른의 비밀협약에 분노해 17살 난 앙주 공 필리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4] 프랑스 왕실 회의에서 필리프를 차기 스페인 국왕으로 결정했다는 카를로스 2세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후, 스페인 대사는 부름을 받고 새 국왕을 소개받았다. 루이 14세는 앙주 공작 필리프를 소개시키면서 차기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가 될 자라고 말하였다. 대사는 필리프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 전까지 필리프는 스페인어를 배운 적이 없었고, 이 날에서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한 상태였다.[5]

또 다른 유력한 후계자 후보인 오스트리아카를 대공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필리프의 할머니가 혼인 계약서에서 자기 후손들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포기하는 조건을 넣었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에 대한 포기가 지참금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 지참금을 아직 받은 적이 없다면서 오스트리아의 주장을 반박했다.

참고로 필리프가 스페인으로 떠날 때,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는 이렇게 회상했다.

'루이 14세는 손자가 스페인으로 떠날 적에 많이 울었다. 나 또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손자와 소(Sceaux)까지 동행하였다. 객실에선 눈물과 비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왕세자 역시 깊이 감동하였다.'[6]



3. 스페인 왕위 계승[편집]


파일:Felipe_V_a_caballo.jpg
펠리페 5세 기마 초상화. 장 랑크(Jean Ranc) 작, 1723년

그랑 도팽 루이가 자신의 아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벌어진 기나긴 회의 끝에, [필리프가 스페인 왕위에 오를 것이나 필리프와 그 후손들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영원히 포기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동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1700년, 루이 14세는 비어있는 스페인 왕위에 둘째 손자를 펠리페 5세로 즉위시켰다. 결과적으로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두고 오스트리아카를 대공을 지지하던 국가들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1703년 안달루시아는 이제 영국군의 처분에 달린 듯이 보였고, 이 지방이 봉기한 것은 앤 여왕의 종교적 열광 때문이었다. 카탈루냐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카를 대공은 1705년 마드리드에 입성했으나 1707년 펠리페 5세는 아라곤 왕국을 탈환하였다. 펠리페 5세는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카스티야인들을 고무시킨 그 힘 덕분에 힘찬 왕(아니모소)이란 칭호를 얻었다.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 요제프 1세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고 뒤이어 카를 대공카를 6세로 즉위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 네덜란드 등은 카를 5세의 제국이 부활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어 펠리페 5세는 스페인 국왕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스페인의 합병은 금지되었고, 저지대와 이탈리아의 영토를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후 펠리페 5세는 1715년, 카스티야 왕국을 비롯한 이베리아 반도의 영토를 하나로 통합하여 스페인 왕국을 세웠다.[7] 이는 펠리페 5세가 할아버지인 루이 14세를 본받아 프랑스식 중앙집권화을 추구했기 때문으로 이로 인해 펠리페 5세의 치세 초기 13년간 스페인 궁정에선 펠리페 5세를 보좌하여 스페인의 중앙집권화를 돕는 프랑스인 귀족들과 압스부르고 왕조 시기의 지방분권에 적응되어 있던 스페인인 귀족들 사이에 수많은 내분이 있었다.[8]

이 대가 끊기자 를 수입했다[9]아래 보면 나오지만 사실 턱도 그대로다.[10]


4. 사국 동맹 전쟁[편집]


한편 자신의 조부 루이 14세가 1715년 죽고 조카 루이 15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자 펠리페 5세는 다시금 프랑스 왕위에 욕심을 내게 되었고, 이에 1717년 1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동맹을 맺고 여기에 대항하였다.

1717년 8월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령이 된 사르데냐를 침공하면서 전쟁을 개시하게 된다. 1718년 오스트리아가 삼국 동맹에 들어가게 되면서 사국 동맹이 되었고, 본격적인 사국 동맹 전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펠리페 5세는 시칠리아도 공격하면서 전쟁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해나가게 되었다.

1719년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 양상은 변화하였다. 무엇보다도 본국이 침략당하는 상황이 되었고, 스페인 본국의 군대는 상당히 취약해진 상황이었다. 지속적인 전쟁 패배에 자코바이트까지 개입하면서 영국군도 진입하게 되었고, 결국 1720년 헤이그 조약에 체결되면서 전쟁은 스페인의 완패로 마무리 되었다.

이후 프랑스가 다시금 스페인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게 되고, 1733년 발발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완전히 회복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아들 돈 카를로스가 다스리던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오스트리아에게 내어주는 대신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되찾아 돈 카를로스를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으로 삼았다.


5. 결혼과 결혼생활[편집]


파일:La_familia_de_Felipe_V.jpg
펠리페 5세의 가족.
왼쪽부터 페르난도 6세, 펠리페 5세, 루이스 1세,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엘리사베타 파르네제, 마리아나 빅토리아, 카를로스 3세.
장 랑크 작, 1723년

성욕이 대단했던 펠리페 5세는 한 여성에게만 충실하기 힘든 편이었지만, 아울러 자신의 아내에 대한 철저한 양심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고해를 받아주는 신부의 사실에서 급하게 말을 몰아 아내의 침실로 달려가곤 했다. 펠리페 5세는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는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마리아 루이사,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사벨 파르네제 모두 아내 앞에서 꼼짝을 못하는 왕의 천성을 이용해 그를 계속 자신 곁에 두었다.


5.1. 첫 아내, 마리아 루이사[편집]


펠리페 5세는 사보이아 공작이자 사르데냐 왕국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셋째 딸인 마리아 루이사와 1701년 11월 3일에 결혼했다. 공교롭게도 첫 아내 마리아 루이사[11]는 형수 마리아 아델라이데의 여동생이었다. 즉, 겹사돈인 셈. 어쨋든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인 그에게 자신과 익숙해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이틀밤 동안 계속 기다리게 만들었다.[12] 그리고 마리아 루이사는 '숨바꼭질'이나 '뻐꾸기 게임'같은 놀이를 하도록 제안하여 남편이 딱딱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기분 전환을 하게 해줬다.

1702년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동안 처음으로 아내와 떨어져 지낸 일은 펠리페 5세의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 모두에 심한 부담을 주었지만, 의지가 있던 그는 정부를 취하는 걸 거부했다. 펠리페 5세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서 서둘러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왕은 두 사람의 신체 기능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할 정도로 낮이나 밤이나 계속 아내를 자기 곁에 두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펠리페 5세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바라는 건 뭐든지 왕이 하도록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이 신사는 아내를 굉장히 좋아했고, 왕비는 이런 사랑을 십분 활용했다. 왕비는 자기 방에 바퀴가 달린 작은 침대를 두고 있었는데, 그녀는 왕이 자기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바로 이 침대에서 자게 했다. 왕비를 흡족하게 하면 왕은 왕비의 침대에서 잘 수 있었고, 그건 왕에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펠리페 5세와 마리아 루이사는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스페인에 시녀장으로 보내진 위르생 공비[13]에게 크게 의지했는데, 위르생 공비는 마리아 루이사와 펠리페 5세가 프랑스의 영향을 받게 했다. 특히 마리아 루이사는 위르생과 매우 친했고 그녀를 자신의 대리 어머니로 생각한 듯하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내내, 펠리페 5세와 마리아 루이사는 위르생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하게 단결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정치적으로 기민했고 남편에게 있어 커다란 강점이었다.

하지만, 임신과 전쟁 기간 동안의 긴장, 잠 못 자는 밤들과 쌀쌀한 방은 마리아 루이사에게 버거운 것이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결핵에 결려 목에 종기가 나기 시작했고, 의사들은 죽어가는 왕비를 멀리서 진찰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의 예법상 의사가 왕비를 직접 만지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펠리페 5세는 가장 애정이 깊은 남편인 동시에 가장 신중치 못한 남편이었다. 왕은 죄를 짓지 않는 한 오랫 동안 경험하지 못할 그 기쁨을 마지막 순간까지 즐기고 싶어했고, 결국 죽어가던 왕비의 침대에서 억지로 떼어내졌다.

성적으로, 정치적으로 지친 마리아 루이사는 1714년 2월, 언니이자 동서인 부르고뉴 공작부인처럼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펠리페 5세는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는데 신하들이 걱정하여 달래주어야 했을 정도다. 홀아비가 된 펠리페 5세는 메디나 코엘리 궁전에 틀어박혔다. 펠리페 5세는 울면서 마리아 루이사를 대신할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렸는데, 양심이 정부를 두는 걸 허용하려 할 만큼 그의 건강이 금욕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펠리페 5세의 성적이고 심리적인 기벽은 외교계에서 잘 알려져 있었고 마리아 루이사가 사망하자 마자 신하들과 유럽의 대사관들은 스페인의 새 왕비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 일곱 달 후 펠리페는 31세의 나이로 파르마 공국의 공녀인 이사벨 파르네제와 재혼했고 이 거만한 여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펠리페 5세와 마리아 루이사 사이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5.2. 두 번째 왕비, 이사벨 파르네제[편집]


파일:Felipe_V_e_Isabel_de_Farnesio.jpg
펠리페 5세와 이사벨 파르네제. 루이 미셸 반 루(Louis-Michel van Loo) 작, 1743년[14]

펠리페 5세는 마리아 루이사와 사별하고 이사벨 파르네제와 1714년 12월 24일에 재혼했다. 이사벨이 펠리페의 새 왕비로 간택된 데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했다. 이사벨은 명장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의 직계 후손이자 파르마 공국의 상속녀였다. 펠리페가 이사벨과 결혼하여 얻은 자식에게 파르마를 물려주는 것이 스페인의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스페인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사벨은 선왕의 후처의 이종조카였고, 이모처럼 국민들에게 평판이 나빴다. 스페인에 도착한 이사벨은 곧바로 위르생 공비를 해임시키면서 자신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드러냈다. 새 왕비는 펠리페 5세를 완전히 독차지했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사벨은 그의 성적인 요구들을 일종의 통제 수단이자 거래 수단으로 이용해 왕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사벨의 거부는 펠리페 5세의 분노를 자극했다. 펠리페 5세는 소리 지르고 위협했으며 때로는 이보다 더 심했다. 이사벨은 끝까지 입장을 고수하고, 울고, 간혹 자신을 변호했다. 그렇게 해서 이사벨은 펠리페 5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벨 파르네제는 옷을 차려 입는데 걸리는 20분 외에는 왕이 눈 앞에서 멀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도권을 확실히 했다. 펠리페 5세는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사벨은 심지어 펠리페 5세가 사냥을 나갈 때도 남자 옷을 입고 동행했으며, 1719년의 군사 원정[15]때도 함께 했다. 이사벨은 백성들한테는 전혀 인기가 없었지만 남편에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이후 이사벨은 펠리페 5세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의 실질적(De Facto) 통치자로 군림했다.

상냥한 마리아 루이사가 매우 사랑받은 것과는 달리, 이사벨은 권력욕이 강하고 사치스러운 성격인터라 사랑스럽지 않은 여성이었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왕비였다. 이사벨이 스페인으로 와서 처음 마드리드에 들어왔을 무렵, 혹자는 자신의 글에서 그녀가 "22살 된 착한 여성으로 상당히 못생기고 시시하며 버터랑 파르마 치즈를 엄청 많이 먹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 스페인 신하들과 백성들은 이사벨이 상냥했던 마리아 루이사 왕비 소생의 왕자들에게 아주 못된 새어머니라고 단언하게 되었다.[16]

이사벨 소생의 아들들은 스페인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전 왕비 소생의 아들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한 아들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이탈리아 영토를 전부 잃은 상태였고, 이사벨 파르네제의 목표는 자기 소생의 아이들을 위해 그 땅들을 되찾는 것[17]이었다. 이사벨은 자기 아들들을 위해 작지만 독립되어 있는 나라들을 요구하였고, 오래지 않아 이사벨 왕비는 자신의 장남인 카를로스 3세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18]을, 차남에겐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을[19] 얻어주었고 삼남은 장차 톨레도 대주교[20]가 될 것이었다. 이사벨은 총신들의 규칙대로 지배했는데 그중 제일은 이탈리아인인 줄리오 알베로니로, 그는 이사벨을 왕에게 추천했었던 사람이다.

이사벨 파르네제와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만 나이 기준)

포르투갈 국왕 주제 1세의 왕비이다. 원래는 사촌인 루이 15세의 약혼자로서,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보내져서 베르사유에서 생활하였으나 파혼당했다. 이후에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오빠인 페르난도 6세가 포르투갈의 공주인 바르바라와 결혼하고,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바르바라의 동생인 주제 1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부르봉-파르마 가의 시조이다.

프랑스 왕태자 루이 페르디낭의 첫번째 아내이다. 루이 15세와 언니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혼담이 파혼으로 끝나자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간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에 부르봉 왕가의 단결을 위해 새로운 혼담이 필요했는데, 루이 15세의 맏딸 엘리자베트와 마리아 테레사의 오빠인 파르마 공작 펠리페가 결혼하고, 루이 15세의 후계자인 루이 페르디낭과 마리아 테레사가 혼인하게 되어 부르봉 가문의 동맹이 재확인되었다. 딸인 마리 테레즈를 낳고 산후욕으로 사망했다.

원래는 톨레도 대주교가 되기로 결정되었어서 성직자의 길을 걸었으나, 성직자가 적성에 맞지 않아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카를로스 3세는 동생이 성직자로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길 원했으나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다니 못마땅했는데, 그 와중에 루이스는 귀천상혼을 하려했다. 카를로스 3세는 루이스를 설득도 하고 협박도 했으나 루이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루이스를 호적에서 파버렸다. 카를로스 3세는 모든 문서에서 루이스를 언급할 때 부르봉의 성을 빼라고 명령했으며, 다시는 궁정에 발을 들여서는 안되며,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부르봉의 성을 쓸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루이스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카를로스 3세는 루이스가 죽자 후일의 곤란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두 딸들을 수도원에 수녀로 만들었다.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고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와 총리대신 고도이 간에 불륜이 시작되었고, 이 불륜을 감추기 위해 고도이를 수녀원에 있던 루이스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시켰다.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왕비이다. 총 12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그 중 3 사르데냐 국왕으로 즉위했다.


6. 우울증과 발작, 퇴위와 복위[편집]


파일:Felipe_V_de_España,_Rey_de.jpg
갑옷을 입은 펠리페 5세. 루이 미셸 반 루(Louis-Michel van Loo) 작, 1739년

한편 펠리페 5세는 점점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고 여기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최초의 심각한 발작은 1717년에 일어났고, 알베로니는 광기에 가까운 히스테리 증상에 관해 기록하였다. 왕은 마치 내부의 사나운 불길이 자신을 삼켜버리는 것 같고 자기 몸의 정중앙에다 태양이 날카로운 광선을 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호소하였다. 그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위로가 될 왕비만을 곁에 두었는데, 왕비라도 만약 그의 일시적인 생각이나, 특히 성적인 요구를 거부하면 쫓겨날 수도 있었다. 오직 고해신부만이 환영받았는데, 이는 펠리페 5세가 용서받지 못할 죄 가운데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왕의 건강염려증으로 인한 망상과 '불행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결점에 대해 하늘이 내린 징벌'이란 믿음은 조울병에 따른 증상이었다.

1718년 펠리페 5세는 공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회복되었지만, 갑자기 늙어서는 몸이 오그라들고 등도 구부정해졌다. 그래서 1722년 프랑스의 생시몽 공작은 펠리페 5세를 만나고나서 이런 글을 남겼다.

그분은 아주 구부정하고 주름이 졌으며 아랫턱이 가슴보다 앞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발을 똑바로 하고 꽤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무릎은 한 걸음 이상 떨어져 있었다. 연설은 매우 딱딱했으며 말은 아주 느리고 표현은 공허하여 난 상당히 무기력해졌다.


1724년 1월 펠리페 5세는 장남인 아스투리아스 공 루이스에게 양위하겠다는 결심을 발표하여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펠리페 5세의 우울증과 낮은 자아존중감, 종교적인 양심의 가책은 자신이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영세를 준비하기 위해 은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양위는 다른 한편에서는 루이 15세가 사망할 경우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수 있기 위한 책략으로 여겨졌다.

펠리페 5세가 루이스에게 양위했을 때, 왕세자는 17세였다. 루이스가 아주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스페인 백성들은 루이스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8월에 천연두로 갑자기 요절했다. 펠리페 5세의 차남 페르난도는 자기 형 루이스를 사랑했고 형이 죽자 매우 슬퍼했다. 이사벨 파르네제는 다시 왕위를 차지하도록 펠리페 5세를 설득했고, 그는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후 펠리페 5세가 사망했을 때 차남인 페르난도 6세가 즉위했다.

그후 펠리페 5세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재정복하여 자신의 부르봉 왕가 친척들이 영토를 얻는 걸 도와주었다. 또한, 펠리페 5세의 치세 말에 스페인군은 '젠킨스의 귀 전쟁'에서 영국의 침공으로부터 아메리카 내 영토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펠리페 5세가 나라를 통치할 동안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혼기 동안 겪은 침체에서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7. 생활과 죽음[편집]


조부인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처럼 펠리페 5세의 시대는 질서가 잡혀 있었다. 1730년 초부터 펠리페 5세는 궁정에다 다소 황당한 시간표를 강요했고, 이는 그의 치세 내내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왕은 아침 8시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정오에 일어나 가볍게 식사했다. 1시에는 옷을 차려입고 미사에 갔다가 그 뒤 방문객을 맞았고, 음악회나 연극을 할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창 밖을 보거나, 시계를 갖고 놀거나[21], 독서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넘어 보통 2시쯤 되면 대신들을 불러 오전 5시까지 업무를 처리한 후 창문을 닫은 채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나 펠리페 5세는 주기적으로 조울증에 시달렸다. 1727년 봄이 되었을때는 조울증을 심하게 앓았는데, 가끔은 무기력하고, 가끔은 열정적이고 격해졌으며 더 심하게는 의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난동을 부렸다. 보다못한 이사벨 왕비가 그의 종교적인 헌신을 꾸짖으려 하자 펠리페 5세는 오히려 폭력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스스로를 깨무는 사이, 왕비는 왕에게 맞아 몸에 멍이 들었다. 환청에 시달리던 왕은 자신의 양쪽 발 크기가 서로 달라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머리카락이나 발톱을 자르거나 면도 하는걸 거부하였고 왕비와 신하들이 해라고 권해도 끝까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이와 펜은 펠리페가 잡지 못하도록 치워져 있었는데 이는 왕이 충동적으로 퇴위할까봐 왕비와 대신들이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1728년 펠리페 5세는 펜과 종이를 쥐었고 카스티야 평의회 의장에게 자신의 퇴위를 선언하는 문서를 보냈으나 이사벨 파르네제가 때맞춰 발견하고는 이를 다시 회수하였다.

한동안 펠리페 5세는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고 8개월만에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그러나 1732년 8월 무렵, 펠리페 5세는 일어나 식사하려 하지도 않았고 또 다시 외모에 무관심해졌다. 게다가 왕은 무려 19개월 동안이나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들을 만나거나 문서에 서명하는 것도 거부했다. 1733년 부활절 무렵 정상을 되찾은 듯한 기미가 보였다. 둘째 아들인 왕세자 페르난도 왕세자는 부왕을 알현하여 그가 면도를 하고 옷(리넨)을 갈아입도록 설득해냈다. 그러나 페르난도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이사벨 파르네제는 펠리페 5세를 설득해서 페르난도와 그의 아내인 세자비 바르바라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걸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이때문에 페르난도는 이사벨을 증오하나 어찌할수가 없어 속으로 화를 삭혀야 했다. 이사벨은 이제 자신의 수동적인 남편을 완전히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 다음해부터 왕이 음악이나 우울증을 덜어줄 수 있는 다른 오락에 흥미를 갖도록 하는 동시에 그녀 자신이 알려주고 싶은 정책만 남편이 알도록 했다.[22]

1738년 펠리페 5세의 정신적인 불안정이 재발하였다. 펠리페 5세는 소름끼칠 정도로 울부짖었고 주변 사람들이 그의 정신나간 짓을 목격하고는 이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이 강구되었다. 결국 펠리페 5세는 1746년 7월 9일, 62세의 나이로 마드리드에서 사망한다.


8. 기타[편집]


  • 펠리페 5세의 작은 할머니인 오를레앙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23]는 펠리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스페인 왕은 척추가 꽤 굽었고 다른 점에서도 그다지 균형이 잘 잡혀있진 않다. 하지만 그는 형이나 동생보다 키가 크며 체격이 좋고 얼굴도 잘 생겼다. 그의 머리칼은 매우 밝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눈은 아주 까만색인 게 좀 특이하다. 얼굴색은 맑고, 붉은 빛이 돌면서 하얗다. 또한 오스트리아 인의 특이한 입술을 지녔다. 목소리는 굵고 낮으며, 말이 매우 느리다. 그는 착하고 얌전한 편이지만,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하면 약간 고집이 세다. 그는 무엇보다 아내를 사랑하고 모든 일을 아내에게 맡기며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 왕은 매우 경건하며, 불륜을 저지르면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믿는다.

신앙심이 없었다면 그는 방탕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아내를 아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매우 겸손하게 생각한다. 그는 익숙한 사람이 하는 얘기는 뭐든지 현재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약간 우울하고, 스페인에는 그를 즐겁게 할 만한 것이 없다...'


  • 정식으로 '스페인 왕국'이 출범한 때가 펠리페 5세 때의 일이다. 물론 이전에도 관념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스페인은 하나의 나라였지만, 법적으로는 카를로스 1세 이후로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으로, 두 개의 나라였고, 당연히 왕위도 두 개였다. 그리고 펠리페는 이걸 하나로 합쳐 법적으로도 하나의 나라로 만들었다.

  •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이 된 이후에도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베르사유 궁전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1719년 세고비아 근교의 땅을 매입해 1721년 궁전을 하나 세웠는데 이 궁전이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Palacio Real Sitio de San Ildefonso)이다. 카를로스 1세 이래 스페인 왕들이 엘 에스코리알에 안장된 반면 펠리페 5세는 이 궁전의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 이후 펠리페라는 이름을 가진 국왕은 오랜 기간 나오지 않다가, 현 스페인 국왕이 펠리페 6세로 즉위하면서 다시 '펠리페'라는 이름을 가진 국왕이 나오게 되었다.
[1] 간혹 필리프 당주 (Philippe d'Anjou)나 필리프 드 부르봉 (Philippe de Bourbon)으로 불리기도 한다.[2] 루이 14세의 고모인 사보이아 공작부인 크리스틴 마리의 외손녀였다. 즉, 6촌 남매끼리 결혼한 셈.[3] 그러나 베리 공작 샤를은 어이없게도 낙마사고로 사망했다.[4] 앙주 공과 베리 공이 사양할 시 카를 대공이 후계자가 된다고 유언장에 명시하였다.[5] 조부 루이 14세스페인어에 능통했다. 모후 안 도트리슈와 왕비 마리아 테레사가 스페인 공주였기 때문. 물론 펠리페 5세가 즉위하기 1년 전인 1699년까지 더 유력한 스페인 왕위 계승 후보인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카를로스 2세의 조카딸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아들) 참고로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고모인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펠리페 5세의 어머니니 서로 사촌/8촌간이기도 하다)이 있는 상황이었고(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었으나 요절), 즉위 한 달 전에야 카를로스 2세가 펠리페 5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그 전까지 펠리페 5세는 굳이 스페인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6] 당시 증언에 따르면 루이 14세는 둘째 손자가 어린 나이에 스페인으로 떠나는 것이 걱정되어서 울었고, 이에 필리프와 주변에 있던 신하들까지 전부 울어대는 바람에 온 궁전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평소 냉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였지만 혈육에 대한 정은 아주 끈끈했는데, 그는 평소 자신에게 대드는 아들 그랑 도팽 루이도 고깝게 보긴 했지만 정작 그가 죽었을 땐 실신 직전까지 갈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7] 이전까지의 스페인 왕국은 여러 왕국의 연합체로서 정식 국호는 스페인 왕국이 아니었다.[8] 이는 당연히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프랑스 귀족들의 세력이 커졌고 당연히 스페인 귀족들의 세력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9] 대대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체적 특징이 주걱턱이라면, 부르봉 왕가는 매우 컸던 로 유명했다.[10] 두 왕가는 그토록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유럽 최고의 명문 왕가이기 때문에 통혼은 빈번하게 했다. 애당초 할머니 마리아 테레사와 증조할머니 안 도트리슈스페인 공주였다.[11] 외조부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이다. 즉, 루이 14세의 종손녀이므로 펠리페 5세와는 6촌간이다.[12] 신부는 첫날밤에는 사보이아 공국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오는 긴 여행의 피로로 지쳐있었고, 둘째밤에는 결혼식 피로연에서 먹은 음식으로 배탈이 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셋째날에야 비로소 의식(?)을 치르게 되었다.[13] 이전에는 공주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오류. 이 사람은 라 트레모이예 공작가문 출신으로 '공비'가 맞다. 위르생(Ursins)은 그녀의 남편이 오르시니 가문 출신이었기에 얻은 칭호인데 그녀가 위르생 여공 칭호를 받을 당시에 당시에 남편은 이미 사망했기에 여공인지 공비인지 구분하기가 애매하다. 참고로 이 가문은 프랑스 궁정에서 로렌-기즈, 사보이아-카리냐노(프랑스어로는 사부아-카리냥) 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14] 이사벨 왕비가 중앙에 더 가깝게 위치해 있으며 펠리페 5세보다 더 크고 당당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그녀가 스페인의 실질적 지배자였음에 기인한다. 다만 이 초상화의 이사벨은 상당히 미화한것인데 이때의 이사벨은 지나친 식탐으로 인해 비만이 심해진 상황이었다.[15] 사국 동맹 전쟁으로 펠리페 5세의 위트레흐트 조약 위반으로 인해 영국-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으로 싸우는데 프랑스는 같은 편인지라 꽤나 소극적이었고 지휘관인 제임스 피츠제임스(알만사의 지휘관이자 프랑스 군 장군이자 부르봉-스페인군 사령관인 그 사람 맞다.) 역시 프랑스 귀족(피츠 제임스 공작)겸 스페인 귀족이고(후손이 알바 공작) 아들이 스페인에 있는지라 마음이 그리 없었다.[16] 실제로도 이사벨은 루이사 소생의 왕자들을 견제하고 박대하여 관계가 나빴다. 왕세자인 페르난도는 이사벨한테 하도 시달려서 펠리페 5세가 죽고 나서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이 싫어하는 계모 이사벨과 그녀의 자식들의 직위와 권한을 박탈하고 궁전에서 추방한 것이다. 특히 이사벨은 신하들을 매수하여 페르난도의 즉위를 방해했고 대놓고 페르난도를 모욕하고 다녔기에 페르난도는 그녀에 대한 원한이 많이 쌓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페르난도는 이사벨을 붙잡아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에 감금시키고는 사실상 감옥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사실 페르난도는 마음 같아선 자신을 핍박한 이사벨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처형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기에 감금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사벨의 인망이 워낙 나쁜 터라 페르난도가 그녀를 핍박하는 것을 스페인에서는 모두가 기뻐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사벨은 12년 동안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에 감금당했는데 그것도 페르난도가 죽고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가 왕으로 즉위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17]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는 로렌 공국을, 스페인 이탈리아 남부를 얻고 파르마를 오스트리아에게 빼앗겼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 수복했다.[18] 이후 스페인 왕이 되면서 7대조 카를로스 1세처럼 자신의 큰아들 카를로스 4세에게는 스페인을, 작은아들 페르난도에게는 이탈리아 남부를 물려주었다. 여기서부터 부르봉-양시칠리아가 시작된다. 참고로 이 지방들은 1860년 리소르지멘토 당시 주세페 가리발디에 의해 사보이아 가문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된다.[19] 펠리페 데 보르본-파르마. 부르봉파르마 계의 시조다.[20] 루이스 데 보르본. 가장 어린 추기경 왕자(cardinal-infante)로 친촌 백작 작위를 받는다. 이후 작은고조할아버지인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처럼 환속이후 페르난도가 장군이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뇌르틀링겐 전투의 승리)귀천상혼을 한다. 루이스의 딸인 마리아 테레사는 고도이의 아내가 되었다. 물론 고도이는 카를로스 4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불륜관계였기 때문에 부부는 쇼윈도 부부였다.[21] 지금에야 시계를 가지고 논 것이 우스울 수 있지만 당시 유럽의 시계는 엄청난 최첨단 과학기술로 지금으로 따지면 3D 프린트를 가지고 물건을 만들어내는 취미를 가진 것과 비슷하다.[22] 여담이지만 여기서 이사벨 파르네제가 펠리페의 왕위 계승 당시 카를 6세편을 들어서 쫓겨난(마리아 안나 이 여자가 워낙에 장애인인 자기 남편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자신의 이모이자 카를로스 2세의 부인인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를 남편의 동의 없이 입국시켰다.[23] 본명은 팔츠 선제후국엘리자베트 샤를로테.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손녀다. 영국 국왕 조지 1세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할머니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와 사촌. 나중에 팔츠지메른계가 단절되고 노이부르크계의 필리프 빌헬름이 팔츠 선제후가 되자 루이 14세가 이 사람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해서 9년 전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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