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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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폐비
폐비 윤씨 | 廢妃 尹氏


파일:회묘.jpg

회묘 전경
출생
1455년 7월 24일(음력 6월 1일)
조선 한성부 윤기견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익선동)
사망
1482년 9월 7일(음력 8월 16일)
(향년 27세)
조선 한성부 윤기견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익선동)
능묘
회묘(懷墓)
재위기간
조선 숙의
1473년 4월 24일 ~ 1476년 9월 5일
조선 왕비
1476년 9월 5일 ~ 1479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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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안 윤씨[1]
부모
부친 함안부원군 윤기견
(咸安府院君 尹起畎)
모친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
(長興府夫人 高靈 申氏, ? ~ 1504)[2]
형제자매
4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성종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연산군(燕山君, 1476 ~ 1506)
차남 - 대군(大君, 요절)

봉작
숙의(淑儀) → 왕비(王妃) → 수빈(壽嬪)[3] → 왕비(王妃) → 폐비(廢妃)
시호
제헌왕후(齊獻王后)

1. 개요
2. 생애
2.1. 중전이 되다
2.2. 폐위 위기를 넘기다
2.3. 폐위
2.4. 최후
2.5. 무덤
3. 평가
4. 가계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 참고 문서



1. 개요[편집]


조선 제9대 국왕 성종계비이자, 제10대 왕 연산군의 친모이며 아들 연산군이 즉위 후에 올린 시호는 '제헌왕후(齊獻王后)'였으나 중종반정 이후 추탈되었다. 능호는 '회묘(懷墓)'이다.[1]

판봉상시사 윤기견[2]과 부부인 고령 신씨의 딸이다.

고려시대 장군 윤관의 후손이다. 윤관 장남의 후손이며, 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 등은 윤관의 4남 후손들이다. 외가 쪽으로는 친정 어머니의 사촌 오빠가 신숙주였다.


2. 생애[편집]



2.1. 중전이 되다[편집]


성종의 중전이었던 공혜왕후 한씨가 몸이 약하고, 혼인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첫 후궁으로 간택돼 입궁하여 숙의로 책봉되었다.

1년 후 중전이 승하하고, 그로부터 공혜왕후의 3년상이 끝난 2년 후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책봉하였다. 당시 숙의 신분이었던 윤씨를 포함해서 소용 신분이었던 숙용 정씨숙의 엄씨 등 총 4명의 후궁들이 있었는데 결국 왕에게 제일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고 유일하게 임신 중이었던 윤씨가 왕비로 책봉된 것이다.[3] 또한 어렵게 자라 소박한 차림과 성격에다 친정 세력도 죽고 없고[4], 무엇보다 태아가 아들이라면 중전의 몸에서 원자로 출생하게 하려는 의도가 겹쳐 면접에서 높은 점수도 얻었다.

윤씨(尹氏)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儉少)한 것을 숭상(崇商)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대사(大事)를 위촉할 만하다. 윤씨(尹氏)가 나의 이러한 의사를 알고서 사양하기를, “저는 본디 덕(德)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사전에서 선택하신 뜻을 저버리고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고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를 현숙하게 여겼다.

성종실록 69권, 성종 7년(1476) 7월 11일 임자 2번째기사


그대 윤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이 깊고 고요하여, 계명[5]

의 경계는 진실로 제나라 왕비의 현명함보다 뛰어나고, 갈담의 근검[6] 하고은 멀리 주나라 태사의 덕을 따르는도다.

성종실록 70권, 성종 7년(1476) 8월 9일 기묘 2번째기사

이렇게 왕의 계비가 된 윤씨는 마침내 왕실이 고대하던 아들을 낳는데, 그 아이가 바로 왕의 적장자이자 훗날의 연산군이다. 전술했듯 연산군은 왕의 적장자였으므로 자연스레 원자 칭호를 받게 되었다.[7]


2.2. 폐위 위기를 넘기다[편집]


하지만 중전이 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윤씨는 남편과의 불화가 발생했다. 1477년(성종 8)에는 왕이 중전의 방에 갔다가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비상이 묻은 곶감을 발견하면서 부부관계가 파탄이 난다.

격분한 왕은 중전을 폐위하고자 했지만, 신하들의 간곡한 반대와 부탁으로 철회하였다. 원자가 있는데 그 친모인 중전의 폐위는 안 된다는 것이 대다수 신하들의 의견이었다.

결국 왕은 방양서비상을 반입한 나인 삼월과 사비에게만 죄를 물어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8], 사비를 장형 100대를 때린 후 변방의 관비로 보내는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의외로 중전은 이로부터 2년 뒤인 1479년(성종 10)에 두번째 적자를 낳았다. 이를 보면 부부 관계가 파탄난 상황에서도 남편과 할 건 다 했던 듯.(...)


2.3. 폐위[편집]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도 남편과의 불화는 갈수록 심해지다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왕은 중전을 폐위시켜 궁궐에서 아예 쫓아내기로 완전히 결심을 굳힌다. 결국 1479년, 왕은 대부분 신하들의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전을 끝내 폐위하였다. 역시 이번에도 국모이자 원자의 생모를 어떻게 함부로 폐위하냐는 원칙론에 입각하여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이미 왕의 결심이 확고한데다가 자성대왕대비 윤씨부터 인수왕대비 한씨까지 윤씨의 폐위에 찬성한터라 소용이 없었다.

폐비 윤씨 하면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왕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냈다는 설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이 없으며 야사로만 전해진 소문이라 진위 여부를 알 수 없고 정황상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만약 정말로 용안(얼굴)에 흠집을 냈다면 왕의 신체를 옥체라 부르고 부위마다 '용(龍)'이나 '옥(玉)' 등의 고귀한 표현을 붙여가며, 신성하게 취급하는 조선시대의 관념에서 보면 중전이 왕의 얼굴에 상처를 낸 일은 가히 역모에 버금갈 일이다. 왕 역시 왕비의 방에서 뭐가 발견됐고 이런 저런 말과 행동을 했다고 구구절절 중전의 폐위 이유를 나열하며 주장하는 대신, 자신의 얼굴 상처 한번 보여주는 걸로 단박에 신하들의 수긍을 받아냈을텐데 그런 정황도 없다. 대비들 역시 중전의 악행에 대한 온갖 예시를 드는 와중에 그런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으며, 당시 모든 신하들이 윤씨의 처벌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왕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이 밝힌 폐위 이유이다.[9]
  • 지난 정유년에 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건시비상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 혹 무자(자식을 낳지 못하게)하게 하는 일이나, 혹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일, 그리고 무릇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일이 발각된 후 대비께서 이를 취하여 지금까지도 있다.
  • 엄씨 집과 정씨 집이 서로 통하여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의 집에 투입시켰는데, 이는 대개 일이 발각되면 엄씨정씨에게 해가 미치게 하고자 한 것이다.
  • 항상 나를 볼 때, 일찍이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혹은 나의 발자취를 찾아서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였다. 비록 초부(初夫)의 아내라 하더라도 감히 그 지아비에게 저항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비가 임금에게 있어서이겠는가?
  • 위서(가짜 문서)를 만들어서 본가에 통하여 이르기를, "주상이 나의 뺨을 때리니, 장차 두 아들을 데리고 집에 나가서 내 여생을 편안하게 살겠다."고 하였는데, 내가 우연히 그 글을 얻어보고 일러 말하기를, "허물을 고치기를 기다려 서로 보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더니, 윤씨가 허물을 뉘우치고 말하기를, "나를 거제요동이나 강계에 처하게 하더라도 달게 받겠으며, 남방기에서 발원한 대로 사람의 허물을 무량수불 앞에서 연비[10]하여 이를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내가 이를 믿었더니, 이제 도리어 이와 같으므로, 전일의 말은 거짓 속이는 말이었다.
  • 상참으로 조회를 받는 날에는 비가 나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야 마땅할 것인데도, 조회를 받고 안으로 돌아온 뒤에 일어나니, 그것이 부도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항상 궁중에 있을 때에 대신들의 가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내가 어찌 믿고 듣겠는가?
  • 내가 살아 있을 때에야 어찌 변을 만들겠는가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난을 만들어낼 것이니, 경들 중에 반드시 오래 살아서 목격할 자가 있을 것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왕대비가 밝힌 폐위 이유이다.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 6월 5일 경인 4번째기사
  • 주상이 혹 때로 편치 않을 때가 있어도 마음에 개의치 않고 꽃 핀 뜰에서 놀고 새를 잡아 희롱하다가도, 만약 제 몸이 편치 않으면 갑자기 기도하여 이르기를,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니 보여 주기를 원하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평소의 말이 늘 이와 같으니 우리들은 항상 두려워하였다.[11]
  • 만약 주상이 편치않을 때를 만나면 독을 어선(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에 넣을까 두려워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비하면서 중궁이 지나가는 곳에는 어선을 두지 않도록 금하였다. 우리들이 비록 이름을 국모라고 하나 본래는 평인인 것이요, 한 나라에서 높임을 받는 분은 주상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런데도 매양 경멸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음식을 들 때가 없게 하였고, 제 스스로 그전에 대죄가 있다고 여기는데도 오히려 요동시킬 수 없으니, 지금에 와서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 비록 자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보전하고자 할 것인데, 하물며 원자가 있었음에랴?[12] 그 악이 날로 커져서 꺼리는 바가 없었으나, 주상은 도량이 너그럽고 인자하므로 매양 비호하면서 허물을 고치게 하려고 한 것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비록 부덕하더라도 옛 현비의 일(인종)을 인용하여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였어도 일찍이 들으려고 생각지 아니하였다. 지금에 와서 이와 같이 결단한 것은 다시 허물을 고칠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 평소에 시비에게 죄과가 있으면, 반드시 이르기를, "지금은 비록 너에게 죄줄 수가 없더라도, 장차는 너를 족멸시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마음으로써 원자를 가르친다고 하면 옳겠는가?
  • 지난 해에는 중궁이 주상을 용렬한 무리라고까지 하였고, 또 그 자취도 아울러 깎고자 하므로 주상이 부득이 정승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이제 원자에게는 가련한 일이나, 주상의 근심과 괴로움은 곧 제거될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도 놓여질 것이다.
  • 무릇 불의한 일을 행했을 때에 우리들이 보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주상이 가르친 것입니다."하고, 주상이 이를 보고 꾸짖으면, "대비가 가르친 것입니다."라고 하여, 그 거짓된 짓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우리와 주상은 제사 음식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공경하는데, 중궁은 차례도 무시하고 이를 사사로이 쓰고 다닌다.
  • 지난 정유년 3월 20일에 엄 숙의(嚴淑儀)가 정 숙용(鄭淑容)과 더불어 중궁 및 원자를 모해(謀害)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砒礵) 약간(若干)과 압승책(壓勝冊) 한 권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백저포(白苧布) 보자기로 싸서, 권 감찰(權監察)의 집 사람이라 일컫고 권 숙의(權淑儀)의 집에 던졌는데, 권 숙의의 집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와서 숙의에게 바쳤다. 봉보부인(奉保夫人)[13]이 일찍이 어침(御寢)에 나아갔더니, 중궁이 신다울루목(神荼鬱壘木)[14]을 가지고 말뚝을 박는 소리가 있었는데,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그친 일이 있으며, 임금의 침방(寢房) 옆에 쥐구멍이 있어 쥐가 항상 드나들었는데, 중궁이 책(冊)을 가위질하고 남은 종이로 그 쥐구멍을 막았었으며, 작은 상자를 끄집어 내는 데에 미쳐서는 상자 가운데의 서책(書冊)이 모두 다 숙배(肅拜)하는 단자(單子) 종이였다. 어느 날 봉보 부인이 또 중궁의 침실에 나아갔다가 쥐구멍에서 먼저의 종이를 끄집어내어 취하여 보고는 마음에 의심스러워서 대비전(大妃殿)에 바쳤는데 그것도 숙배 단자의 종이였고, 그전에 드러난 압승서(壓勝書)와 빛깔이 같았으며 그 가위질하여 들쭉날쭉한 곳도 같았다. 이에 삼전(三殿)[15]은 전일(前日)에 말뚝박는 소리를 내었던 것이 반드시 책을 만들 때였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중궁은 한가지 감추는 것이 있어서 항상 친히 자신만 열고 닫았으며 다른 사람이 엿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또 작은 상자가 있는데 그것을 감추듯이 숨기므로 주상이 자못 이를 의심하여 중궁이 세수하는 틈을 타서 취하여 보니, 가운데 한 개의 작은 주머니가 있고 주머니 안에는 비상(砒礵) 가루가 있었으며, 상자 안에 비상을 바른 건시(乾柿) 두 개가 있었으므로, 그리고 나서 중궁의 소위(所爲)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윤씨가 사사된 후 대왕대비가 말한 윤씨의 일화이다.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1482) 8월 16일 임자 2번째기사
  • 비단 독약을 가지고 을 죽이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 임금을 내세워 뜻을 이루어서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자 기하였으니,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일이 있다."고 하고, 또한 스스로 상복을 입는다고도 하였으며,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이라." 하고[16]
  • 주상에게 말하기를, "그 눈을 빼고,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들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 비상 가루를 옷 속에 차고 다니며, 주상께서 편치 못할 때에는 더욱 이를 기뻐하였고, 어선이 있는 곳을 아무 때나 출입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일을 막고 막았는데, 주상이 어찌 다 알겠습니까?
  • 우리들은 주상이 계신 곳이 좁기 때문에 수강궁으로 옮겨갔는데, 그 때 우리들은, "우리들이 비록 있어도 어떻게 구하겠는가? 그런데도 그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매우 상심하며 눈물을 흘리고 떠났습니다. 종묘 사직에 복이 있어서 주상이 그의 독해를 당하지 아니하였으니, 다행입니다.

2.4. 최후[편집]


의정부(議政府)에 전지(傳旨)하기를,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흉악하고 위험하여서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지난날 궁중에 있을 적에 포악(暴惡)함이 날로 심해져서 이미 삼전(三殿)에 공순하지 못하였고, 또한 과인(寡人)에게 흉악한 짓을 함부로 하였다. 그래서 과인을 경멸(輕蔑)하여 노예와 같이 대우하여,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였으나, 이러한 것은 다만 자질구레한 일들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일찍이 역대(歷代)의 모후(母后)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스스로 기뻐하고, 항상 독약을 스스로 가지고 다니면서 혹은 가슴 속에 품거나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비단 그가 사람을 제거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장차 과인에게도 해로운 것이다.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부도(不道)한 죄로서 종묘와 사직에까지 관계되는 것이지만, 오히려 대의(大義)로써 차마 단죄(斷罪)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제 외부(外部)의 사람들이 원자(元子)가 점차 성장하는 것을 보고는 앞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사건을 말하는 이가 많다. 이는 비록 지금은 그리 깊이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마는, 후일 있을 화(禍)를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느냐? 그가 만일 흉악하고 위험한 성격으로 임금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元子)가 현명하더라도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하지를 못하여서, 발호(跋扈)하는 뜻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다. 그리하여 한 여후(漢呂后)와 당 무후(唐武后)의 화(禍)를 열망하여 기다리게 될 것이니, 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참으로 한심하다. 이제 만일 우유 부단(優游不斷)하여 큰 계책을 일찍이 정하지 아니하면, 나라의 일이 구제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러 후회(後悔)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내가 참으로 종묘와 사직의 죄인이 될 것이다. 옛날 구익 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었지만 한 무제(漢武帝)가 오히려 만세(萬世)의 계책을 위하여 〈그를 죽였는데〉, 하물며 이 흉악하고 위험한 사람 또한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음에랴? 이에 금년 8월 16일에 그 집에서 사사(賜死)한다. 이는 종묘와 사직을 위하는 큰 계책으로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서울과 지방에 포고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 8월 16일 임자 3번째기사


폐위 전날 왕은 아직은 중전이던 윤씨에게 하례를 금지하는 어명을 내렸다.[17] 이 무렵 둘째 아들을 낳은 중전은 왕에게 싸대기를 맞았다며 아들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고, 왕은 이 편지를 받고는 분노하여 자신은 중전을 때린 적도 없는데 왜 멋대로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냐고 항변하면서[18] 두 아들을 두고 궁에서 쫓겨나 친정살이를 하고 있던 중전은 그 날로 폐위되었고, 궁에 두고 온 젖먹이 차남까지 백일도 안 되어 갑자기 사망했다.

왕뿐만 아니라 대비들까지 나서서 폐위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던 이유는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왕이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19] 그 다음에는 폐비의 아들인 원자가 왕위에 오를 텐데, 그 원자의 어머니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사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니 신하들은 한뜻으로 그냥 왕이 끝까지 참고 살길 바랐다.

그리고 후계 문제도 있다. 죄를 저질러야 폐위당하는 만큼 폐비가 되었다는 것은 죄인이라는건데 죄인이라는 꼬리표가 자식에게도 영향이 간다는게 문제. 즉 이후에 왕으로 즉위하는 왕세자에게도 분명한 약점이 된다. 그나마 왕이 이 문제를 잘 수습했기 망정이지 혹시라도 문제를 잘 수습하는데 실패했다면 폐비 소생의 세자와 제2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 소생의 진성대군(중종)의 대립구도로 갈 수도 있다. 멀리갈것 없이 중종 말기 대윤+세자(인종) VS 소윤+경원대군(명종) 구도가 딱 비슷한데 세자는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생전에 저지른 잘못이 없었지만 자신을 낳고 죽어버려 생모가 없다는 문제점에 기껏 새로 들어온 문정왕후는 아들을 낳기 전에는 조용했지만 아들을 낳자마자 돌변해버렸고 여기다가 왕도 대윤 수장인 윤임이 아니라 소윤 핵심인 윤원로, 윤원형 형제를 총애하며 심지어 세자의 지위를 흔들뻔한 명령을 내리기도 해서 인종의 입지가 약해지기도 했으니 아주 허황된 얘기는 아니다. 당시 인종과 경원대군의 나이차는 연산군과 중종의 나이차보다 많이 나고 서로간의 사이는 좋았는데도 이정도다. 즉 웬만하면 한번 맞이한 왕비와 백년해로 해야 후계구도가 꼬일 여지가 줄어든다.

폐위 후 왕은 이세좌를 보내 사약을 내렸고 윤씨는 폐위된지 3년만에 사사(賜死)된다. 폐비의 죽음에 대비와 후궁들이 관여했다는 건 야사드라마 각색으로 널리 퍼진 오해로 실제로 중전을 폐위하고 처형하는데 가장 앞장서고 밀어붙인 사람은 왕이었고 대신들은 반대 분위기가 역력했다.

당시 신하들 사이에서는 폐비에 대한 동정론이 우세했고 왕을 욕할 순 없으니, 많은 야사에서 불쌍한 폐비가 악독한 시어머니와 왕의 후궁들에게 시달리다가 사사당했다고 묘사된다.

폐비가 죽을 때 피를 토했고 자신의 피 묻은 적삼을 어머니에게 주며 후에 이것을 훗날 자신의 아들에게 전해달라 말을 남기고, 친어머니의 존재를 모른 채 장성하여 즉위한 연산군이 이를 계기로 폭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정사처럼 여겨져 왔으나, 이 또한 실록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야사에 나온 기록이기에 진위가 확인되지 않는다. 연산군을 다룬 각종 드라마 등에서 극적인 표현을 위해 반드시 쓰는 필수장면이 되는 바람에 인식이 박혔다.

아들인 연산군 때 '제헌왕후(齊獻王后)'로 다시 복위되고 능도 보수하여 '회릉(懷陵)'이라고 불렀지만, 중종반정 이후 호칭을 되돌렸다. 대신 묘를 부수진 않았다.

2.5. 무덤[편집]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에 있는 회묘(懷墓).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왕비의 자격을 다시 박탈당하였으나, 반정 세력들이 무덤에는 손을 대지 않아서 연산군에 의하여 왕비의 예로 단장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공개 능역이라[20] 들어가 볼 수 없지만,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안내자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으니, 이때 시간 맞춰서 고양 서삼릉에 가면 답사해 볼 수 있다.

본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21] 경희대학교 안에 있었으나, 1969년에 서삼릉 내의 후궁들 묘역인 현재 자리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3. 평가[편집]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역사인물들 중 한 명. 제 명을 재촉한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첫 번째 평, 그리고 과거의 부조리와 왕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라는 두 번째 평으로 나뉜다. 하지만 후자는 야사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불화가 있는 남편과 시댁이 일제히 모함을 한 것이라 쳐도 폐비가 저지른 죄에 대한 서술이 담긴 《성종실록》은 비록 사림 출신 사관들의 입김이 강하긴 했지만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 때 쓰였다.

성종실록에는 중전이 독살을 하기 위해 독이 든 곶감을 은닉했다는 등의 왕의 주장이 있고 더 유명한 것으로는 중전이 손톱으로 성종의 얼굴, 즉 용안(龍顔)에 상처를 냈다는 야사도 있는데 위에 적혀있지만 이게 사실이면 왕은 얼굴에 난 상처만 보여줘도 폐비 반대론을 순식간에 잠재우는 동시에 중전은 그날로 작살났겠지만 실록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이 그냥 구구절절하게 온갖 핑계로 폐비를 밀어붙였을 뿐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폐비에 대한 설들을 종합해 보면 조현병 증세를 떠올릴 수 있다.

왕은 중전을 내치고자 하는 이유로 카더라 통신이 아닌 "비상을 가지고 다니더라니까? 사람 해치는 법 책을 가지고 있었다니까? 내 발자취를 없애버리겠다고 욕했다니까? 도저히 못 살겠다!" 등 자신이 직접 당했다는 일들을 읊었다. 폐위에 동조하게 된 시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이것도 왕이 순화해서 말한 것이고 실제는 "그 눈을 빼고, 그 발자취를 없애버리고, 그 팔을 잘라버리고 싶다!"라는 폭언이었다고 한다.링크. 대신들이 왕 길들이기 급으로 잔소리를 퍼부어도 잘 참던 왕도 중전 문제에서만큼은 온갖 이유를 들고 파업 수준으로 말리는 대신들과 대판 싸우면서까지 폐위를 관철시켰다. 나중에 성종은 폐비 사사 문제로 게거품을 물며 반대하는 대신들 앞에서 의미심장하게 "원자가 저렇게 어린데 벌써부터 이렇게 눈치를 보니 쟤가 자라면 어떻게 되겠냐?!"라는 말까지 한다. 그러자 급 태세전환한 대신들은 구익부인의 예를 들며 "후세를 생각해 하시는 것일 테니 알아서 하시죠."라며 한발 물러서고 폐비에게는 마침내 사약이 내려졌다.

야사후궁들이 폐비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근거가 있지 않다. 허나 연산군이 이 이유를 들어 정 숙용엄 숙의를 죽이고 시신을 찢어 젓갈로 담가버렸다. 정사에 의하면 폐비가 정 숙용엄 숙의가 자신을 쫒아내려 한다는 언문 투서를 만들었다가 성종에게 딱 걸리는 바람에 조사 결과 자작극으로 밝혀진 내용이 나온다.

애초에 후궁이 아들까지 낳은 정실 왕비에게 개긴 일은 조선 역사상 단 한번도 없다.[23] 조선 왕조에서 왕이 그 외의 모든 사람들 위에 있는 절대적인 존재인 것처럼 왕비내명부 내에서 지위가 절대적이라 이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임금 뿐이다. 반가에서도 남편의 첩을 부인이 죽어라 패든 어쩌든 남편은 부인을 소박놓거나 투기(질투)가 심하다고 까고 다닐 망정 안채 일에 함부로 관여하면 안 되는 것이 법도였던 것과 비슷한 류로 보면 된다.

왕손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 숙종의 유일한 원자를 낳았던 희빈 장씨조차 겉으로는 정실부인인 인현왕후에게 고분고분하게 굴었는데, 원자의 친모인 중전 윤씨를 후궁들이 참소했다면 뒷날 연산군이 나설 것도 없이 바로 그 시점에서 성종이나 윤씨 중 한 명이 먼저 나서서 그 후궁들을 끝장냈을 것이다. 대비들 역시 중궁을 폐위하기에 앞서 내명부(內命婦) 전체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는 무개념 후궁들을 먼저 박살내려 들었을 테고.

이렇듯 조선에서 왕비후궁의 차이는 컸다. 왕비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후궁을 매질하며 혼쭐을 내도[24] 기강을 다잡았다는 호평으로 남는 반면, 안빈 이씨친자식에게 '너'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왕인 효종이 노발대발한 것을 인선왕후가 중재한 일이 있었을 정도다.

사실 이러한 이후의 악평과는 다르게 원래 윤씨는 연산군을 낳기 전까지, 선량하고 예의 바르며 검소한 성품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왕에게 총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웃어른들을 매우 공경하고 깍듯하게 대하여 에게도 총애를 받았고 후궁들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윤씨는 평소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매사에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고, 자신이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말을 듣자 “저는 본디 덕이 없고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녀를 현숙하게 여긴다.

성종실록, 성종 7년(1476, 병신) 음력 7월


돌아보건대 숙의 윤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도 깊고 고와서, 효성은 를 움직이고, 공손하고 검소한 몸가짐은 을 보필하는 자리에 진실로 으뜸으로서 마땅하다고 여겼다.

윤씨가 중전이 되던 날, 반포했던 글에서

이토록 평가가 좋고 임금은 물론 대비들에게 총애를 듬뿍 받으며 때 맞게 원자를 임신한 운까지 더해지면서 후궁 숙의에서 왕비가 되었으니 폐비는 만약 '가만히만 있었더라면', 속편한 날 없는 궁궐생활이지만 자신의 아들이 장차 왕위에 오르고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대접 받으며 편안하게 호강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왕비가 된 직후부터 무슨 이유에선지 도를 넘은 패악질을 부려 남편어른의 학을 떼게 만들어 결국 명을 재촉했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

윤씨는 야사에 의하면 마치 선녀와도 같고,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서늘해질 만큼의 대단한 미녀였다고 한다. 연산군은 키가 크고 말랐었는데 키는 아버지를, 전체적인 외모는 어머니ㆍ를 닮았을 수 있다. 야사에 왕이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했을때, 한 신하가 그러면 거울을 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중전이 연산군을 낳은 후 급격하게 성격이 변한 원인이 산후 우울증이 아닐까라는 주장이 나왔다. 실제 기록에서도 중전이 되기 전의 윤씨는 몸가짐이 바르고 예의가 넘쳤으며 왕실 가족들과의 사이도 괜찮았다. 하지만 중전에 책봉되어 원자를 출산한 후부터 행동이 달라지더니 겸손이나 예의는 어디에도 없고 언행까지 극단적으로 변해버렸다.

정신질환이 맞다면 그 중에서도 경계선 성격장애가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충동적인 면, 사람을 해치겠다는 말을 달고 살며 왕에게 무도한 말을 퍼붓고, 사람을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왕의 처소에 무례하게 무단침입하는 등의 상대를 안 가리는 극단적 언행에 따른 인간 관계 파탄, 심한 집착은 전부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모습들이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청소년기와 성년기 초기 때 잘 나타나며, 중전이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22살 경이다. 또한 왕에게 내뱉었다는 폭언의 수위를 감안한다면 독살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며, 애초에 왕궁에 독약을 가지고 온다는 것 자체가 역모에 준하는 중죄이기 때문에 성종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폐비에 대한 왕의 처우가 부당했다고 볼 수 없다.

위에 서술된 폐비가 저지른 반역에 준하는 패악들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부모를 처벌하지 않고, 당사자인 폐비의 사형만으로 사건을 마무리한 왕이 오히려 아량을 베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사 직후 군관을 보내 장례를 도왔으며 7년쯤 후 폐비의 무덤을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부르며 해당 고을 수령에게 절기마다 제사를 올리고, 제사에 쓰이는 용품은 왕비의 예에 준하게 마련하도록 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것을 보면 대놓고 왕을 죽이겠다고 떠들던 사람에게치고는 진짜 국왕으로서 아량을 베푼 셈이다. 죄책감이 아니라면 아마도 아들인 연산군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배려한 모양인데, 정작 명령은 제대로 안 지켜졌는지 후에 연산군이 내시를 보내 묘의 상태를 보았더니 관리 꼴이 엉망이었다고(…).[25]

폐서인이 된 이후 슬슬 폐비에 대한 동정론이 나오고 폐위 후 3년 동안 매우 조용히 근신 중인 것, 원자의 생모이니 그만 용서해주자는 의견이 고개를 들자 폐비와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던 폐비에 의해서 결국 그녀의 사사가 집행되고 만다. 왕으로서는 폐비가 자신이 죽고 원자가 즉위한 후까지 살아남아 존버에 성공하면 그 성격에 무슨 짓을 할지 후환이 두려웠을 것이다.


4. 가계[편집]


  • 친정(함안 윤씨)
    • 아버지: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 윤기견(尹起畎)[26]
    • 어머니: 부부인 신씨(府夫人 申氏)
      • 오빠: 병조참판(兵曹參判) 윤구(尹遘)
      • 올케: 부인 권씨


  • 배우자 / 자녀
    • 남편: 성종(成宗)
      • 장남: 연산군(燕山君)
        • 며느리: 거창군부인(폐비) 신씨(廢妃 / 居昌郡夫人 愼氏)
          • 손녀: 휘신공주(徽愼公主)
          • 손녀: 공주 - 요절
          • 손자: 원손 - 요절
          • 손녀: 공주 - 요절
          • 손자: 폐세자(廢世子) 이황(李𩔇)
          • 손자: 폐 창녕대군(廢 昌寧大君) 이성(李誠)
          • 손자: 대군 - 요절
          • 손자: 대군 - 요절
      • 차남: 대군 - 요절[27]
      • 이효신(추정): 연산군이 태어나기 전 왕자 이효신이 태어났는데 일각에서는 많이들 폐비 윤씨의 소생으로 추측하고 있다.


5. 기타[편집]


  • 야사에 의하면 어느 날 대비가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가 반성을 뉘우치고 있는 중인지 내관을 보내 몰래 살펴보라고 명하여 내관이 폐비를 살펴보았는데 반성할 기미는 전혀 안보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곱게 단장을 하면서 재입궁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 폐비의 사사와 관련된 야사가 하나 있다. 성종 때의 유명한 재상허종과 허침 형제가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고 궁궐로 가려던 도중에 누나의 집에 들렀는데 누나가 "만약 어느 양반집 주인이 종들과 상의하여 부인을 내쫓았는데, 훗날 그의 아들이 주인이 된다면 그 종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라고 말했다. 허종과 허침 형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는 누나[28]의 집을 나와서 계속 궁궐 쪽으로 을 몰고 가다가 어느 다리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졌는데 낙상(落傷)을 핑계삼아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훗날 연산군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당시 어전회의에 참석해 폐비의 사사에 동의했던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할 때 당시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허종과 허침 형제는 숙청을 피해갔고 허종과 허침 형제가 일부러 굴러 떨어졌던 다리는 '종침교'라 불리게 되었다.[29][30] 실제로 허침이 윤씨의 폐비를 반대했음은 사실이며 허침은 왕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는데 세자가 공부를 게을리 해도 자상하게 타이르고 칭찬해 세자가 매우 좋아했다. 반대로 다른 스승 조지서는 늘 꾸짖고 "왕에게 일러바치겠다고 협박해 연산군이 싫어했다. 연산군이 벽에다 조지서는 소인배이고 허침은 군자라고 썼고 이 낙서를 조지서가 보고 불 같이 화를 냈다. 장난이라고 말했지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조지서는 세자를 심하게 나무랐고 이에 앙심을 품고 훗날 허침에게는 큰 상을 내렸지만 조지서는 트집을 잡아 죽였다.[31] 아무튼 훗날 갑자사화에서 허종과 허침 형제가 모두 숙청을 피해갔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허침과는 달리 허종은 갑자사화가 벌어지기 전인 1494년(성종 25년)에 이미 사망했다.(허침은 1505년에 사망) 그래도 죽은 뒤에도 허종이 부관참시 등의 처벌을 받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폐비를 결정한 어전회의 때 두 형제가 불참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사유는 두 형제의 할머니 장례 때문이었다. 즉, 운 좋게 화를 면한 유형에 각색이 더해진 것.[32]

  • 어우동의 죽음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끼쳤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는데, 왕이 한참 중전에게 시달리는 와중에 어우동이 갑톡튀하여 왕이 육성하고 있던 정치 유망주들과 간통 사건을 일으켜버리자 왕이 간통죄로 다스리라는 신하들의 청도 씹고 유배를 보내고 1년이 지나자 강상죄로 처벌하여 교수형에 처하는 등 굉장히 지독하게 처벌을 내린 것이 스트레스로 인한 분풀이 의도도 섞여있는 거 아니냐는 내용이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워낙 다이나믹한 요소가 많은 인물이어서 드라마영화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였다. 특히나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한 인물인지라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이 맡는다는 것도 특징이며 다들 예쁘다.[33] 다만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정사와 달리 중전의 폐출 계기가 성종에게 손톱 자국을 낸 것으로 그린다. 또 폐비가 사약을 마실 때 흰 적삼에 피를 토하고 이를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건네며 훗날 아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야사를 차용한다.





  • 1988년 개봉한 영화 <연산일기>에서는 배우 김영애[34]가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배우 장서희[35]가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폐비 사사 장면(94회)에서 윤씨의 아비가 윤기견인지 윤기무인지 불분명한 것에 대해 윤씨 족보를 참고하여 해설을 덧붙였는데 윤기무는 윤기견의 동생인 것이 분명하므로 윤기견의 딸이 맞다고 나온다. 인수대비는 배우 김영란, 성종은 배우 박진성이 연기했다.[36]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1회 오프닝에서 연산군을 낳고 갓 태어난 연산군을 지켜보고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김성령이 연기했다. 여기서 윤씨는 상당히 표독스럽지만 원자와 성종(이진우)에 대한 그리움을 잘 나타냈다. 다만 중궁이 되자마자 내/외명부 부인들을 불러놓고 왕비 행세를 톡톡히 하는데 이 시점에서 이미 시어머니 인수대비(채시라)의 눈 밖에 나버린다. 또 걸핏하면 인수대비는 윤씨를 두고 "천한 피가 흐르고 있음이야." 운운하며 천대한다. 그 밖에 윤씨가 대궐에서 울부짖는 장면이나 시어머니 채시라와 며느리 김성령의 실감나고 소름 끼치는 고부갈등은 지금 봐도 정말 간담이 서늘해진다.[37] 윤씨의 친정어머니 신씨 역할로 배우 여운계가 열연을 펼쳤는데 피가 말라붙은 적삼을 외손자 연산군(안재모)에게 건네며 딸의 최후를 설명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절규였다.

  • 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배우 이주희가 연기했다. 1회에서 사약을 마시고 사사당하는 장면으로 잠깐 등장한다. 서장금(이영애)의 아버지인 군관 서천수(박찬환)가 점을 쳤는데 도사가 "1번째 여인(폐비 윤씨)은 네가 죽이고, 2번째 여인(아내 박명이)은 네가 살리고, 3번째 여인(딸 서장금)은 너를 죽이나 많은 사람들을 살릴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는다. 그 점괘대로 서천수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해 죽게 만들고 죽어가던 박명이(김혜선)를 살려 혼인한다. 박명이와의 사이에서 딸 장금을 낳지만 장금이 실수로 서천수가 군관이라는 사실을 밝혀 서천수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점괘대로 장금은 훗날 의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살린다.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구혜선이 연기했다. 작 중 이름은 '소화'로 성종(고주원)과 같은 1457년생으로 설정하였다. 이 드라마에서는 기존의 표독한 이미지와는 달리 배우의 선하고 단아한 이미지대로 폐비 윤씨가 그려졌으며 구혜선의 안정된 사극톤과 차분한 연기로 드라마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38] 내관 김처선(오만석 분)이 폐비 윤씨를 연모하여 스스로 내관이 되는 스토리가 등장하며 이후 연산군을 곁에서 보필하다 죽음에 이르는 역할이나 이는 드라마적 상상력이다.

  • <왕과 비>의 리메이크작인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어린 시절을 배우 진지희가 연기하고 성인 시절을 배우 전혜빈이 아주 표독스럽지만 남편과 아들을 애타게 그리는 모습으로 연기했다. 특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는 장면(54회)은 이 드라마의 분당 최고 시청률인 5.53%를 기록하였다.[39] 이 작품에서는 같은 정하연 작가의 <장녹수>나 <왕과 비>와 달리 폐비 윤씨를 성종(백성현)보다 12살 많은 '윤송이'라는 이름으로 설정하고 단종궁녀로 들어가 성종시녀 등을 거쳐 후궁이 된 것으로 나온다. 폐비 윤씨는 고려시대 윤관의 장남의 후손인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로 전부 역사왜곡이다. 또한 윤씨는 1455년생이므로 허구의 인물을 재창조 해낸 것이다.


  • 박시백의 서적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처럼 될 야망을 품었기에 신뢰를 잃어 폐위되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인용하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려서 문제였는데 왕비로 오르기 전 기록을 보면 '어른을 공경하고 예절도 바르다.'는 호의적인 내용도 있음을 감안하면 야망을 너무 일찍 품음이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자를 두고 폐비 윤씨가 했던 발언이나 복수를 다짐하는 표현 등이 너무 위험 수위가 높았다고 평가하는 이는 박시백 말고도 많다.[40]

  • <조선공주실록>에서 폐비 윤씨의 이야기를 다룬 외전이 나온다. '윤미래'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한미한 가문 탓에 사랑하는 한건의 정실부인이 될 수 없었고 대신 성종의 부인이 되었다. 그 후에 한건과의 사이에서 아들 연산군을 낳았으며 성종이 연산군이 자신의 친자가 아님을 깨닫자 한건은 외눈이 되었고 본인은 폐비가 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본편의 모든 비극을 불러온 시발점.



7. 참고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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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존왕비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성종이 책봉한 정실 왕후였기 때문에 추존이 아니라 복위로 보는 것이 맞다.[2] 집현전(集賢殿) 학자 출신으로, 《세종실록》과 《고려사》,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했다. 딸이 추존되자 부원군(府院君)이 되었으나, 반정으로 전부 삭탈관직되었다.[3] 당시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4]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윤씨는 입궁 전 어머니와 베짜기 등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5] 왕비가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도록 내조하는 것을 뜻한다.[6] 갈담의 근검이란 시경에 나오는 말로 후비가 여자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을 말한다.[7] 원자라는 칭호 자체가 왕의 적장자를 의미한다. 후궁이 아닌 왕비에게서 난 첫아들 자체가 원자이다. 훗날 경종 탄생을 둘러싼 원자정호 문제도 경종이 숙종적장자가 아니기에 벌어진 사건이다. 따라서 연산군에게 원자책봉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8] 저주에 민감한 조선의 풍습상, 왕실에서 저주행각을 할 경우의 처벌은 군기시 앞 대로에서 시행하는 거열형이었다. 다만 이때는 중전이 폐위되지 않고 사건이 마무리되어, 소란이 커질 것을 꺼린 왕의 의도로 교수형으로 조용히 처리된다.[9]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 6월 5일 경인 4번째기사[10] 팔을 불로 지지는 행위[11] 임금이 아플 때는 신경 안 쓰고 탱자탱자 놀다가 자기가 아프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말이다. 또한 그때 살아있어서 나중에 보여줄 것이 있다는 말은 자신의 아들이 훗날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면, 왕의 어머니인 자신이 성종보다 오래 살아 왕대비로서 권력을 쥐고 이를 통해 보복을 하겠다는 걸 의미한다. 조선 왕실에서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비롯해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생각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게 당연했다[12] 자식이 없었어도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할텐데 원자가 있으니 더욱 탐욕을 부렸다는 말이다.[13] 국왕의 유모[14] 악귀를 쫓기 위해 만드는 말뚝. 그러니까 임금과 대비를 무슨 악귀 취급해서 죽었으면 했다는 것이다.[15]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 3명의 대비를 말함.[16] 궁궐에 장막이 쳐진 것을 보고 초상집 같다고 했다는 뜻. 정희왕후의 증언이므로 따로 증거는 없으나 윤씨가 실제로 했다면 심각한 발언이다. 궁에서 초상 치르는 예식을 갖추는 것은 후궁이나 종친, 공주 따위도 안되고 왕가의 정실 직계, 즉, 대비나 왕, 왕비 정도가 죽어야 가능하다. 궁궐 장식을 보고 초상집 같다고 말한 건 대비나 왕, 왕비가 죽었으면 좋겠다거나 죽은 것 같지 않느냐고 한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왕비는 윤씨 본인이니까 결국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와 대비였던 인수대비, 그리고 국왕이였던 성종 뿐이다.[17]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6001_001[18] 멋대로 왕의 자식들(그것도 1순위 계승자인 원자까지)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국왕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며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왕족이 궁 밖을 나가 지내는 건 아프거나 주변에 전염병이 돌아 피접을 나가는 경우가 아니면, 왕의 마음에 안드는 죄인이니 궁에서 거주하지 못하겠다고 어필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왕의 주장처럼 중전이 따귀를 맞았다고 거짓말한 거라면, 왕비가 국왕을 가정폭력범으로 모함한 무고죄강상죄급의 발언이다.[19] 실제로 성종은 폐비가 처형된 지 13년 뒤인 40세도 되지않은 37세에 사망하면서 당시 기준으로도 요절했다.[20] 회묘의 주변에는 농협 젖소개량소, 서삼릉 청소년훈련원이 자리잡고 있다.[21] 회기동(回基洞)의 이름 유래가 회묘(懷墓)에서 비롯된다. 처음에는 회묘동이었으나 후대에 묘(墓)를 모양이 비슷한 기(基)로 바꾸고, 회의 글자도 懷에서 回로 바뀌었다.[22] 의인왕후 대에 인빈 김씨후궁인데도 왕비조차 능가하는 위세를 떨쳤고 귀인 조씨는 계비인 장렬왕후에게도 개겼으며 직접적으로 무시받지는 않았던 정성왕후숙의 문씨가 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대들자 중전 대신 대비 인원왕후가 따끔히 벌을 내렸다.[23] '아들까지 낳은'을 강조한 이유는 의인왕후, 장렬왕후, 정성왕후 같이 딸조차 없고 남편인 왕에게 무시당한 왕비들은 후궁들이 다소 간접적으로나마 왕비를 무시하거나 권위를 뽐내는 일이 존재했기 때문.[22] 다만 이것도 남편한테 홀대 받아서 그렇지, 어쨌든 이런 경우도 후궁들이 직접적으로 왕비한테 대들지는 못했다.[24] 영조의 후궁인 소원 문씨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대들었다가, 영조의 적모(嫡母)인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았다. 그것도 세자가 보는 앞에서. 영화 사도에서도 이 장면이 그대로 묘사된다. 직첩도 더 높을 뿐 아니라 무려 왕세자의 생모인 정1품 빈에게 정4품에 불과한 소원이 직접 대들었으니 기강 단속을 빡세게 해야했던 것이다. 그 장 희빈조차도 권세만 따지면 자신에 비해서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인현왕후에게 매를 맞은 적이 있다.[25] 설령 당시에는 지켜졌다고 해도 고을 수령은 임기가 끝나면 옮겨가는 자리인 만큼 인수인계가 안 되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긴 하다.[26] 윤기견은 딸인 윤씨가 중전으로 발탁되기 전에 죽었고 발탁된 이후 함안부원군으로 봉해졌지만, 폐출 사건으로 삭탈되었다. 그 뒤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관직이 복구되고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중종반정으로 폐출당한 뒤 그의 증직 벼슬과 작위, 시호 역시 모두 추탈되었다.[27]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 6월 12일 (정유) - 폐비 윤씨의 소생인 왕자가 죽다. / 왕자가 졸(卒)하였는데, 폐비 윤씨(廢妃 尹氏)의 소생이었다.[28] 야사에 따르면 이 식견높은 누나는 100세까지 살아 사람들이 '100세 할머니'라고 불렀다 한다.[29] 야사의 판본에 따라서는 허종만 말에서 굴러 떨어져 어전회의에 불참하고 허침은 참석했으며 그 자리에서 다른 신하들은 다 동의했는데 허침 혼자서만 이의를 제기했다가 좌천되었다고도 한다.[30] 현재 종침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표석만 존재한다. 근처에 있는 종교교회가 종침교의 줄임말인 종교에서 따온 것이다.[31] 정확히는 조지서는 갑자사화 국문 당시 비중한 몸이 결박을 당하자 숨이 막혀서 형장 3대를 맞고 죽어버렸는데 왕이 목을 베어서 효수하라고 한 것에 가깝다. 트집의 이유는 연산군 즉위 후 조지서가 올린 글에서 자신이 좀 더 잘 계도했다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인데 이걸 왕이 못 마땅해서 제 스스로 잘난 척하며 왕을 능멸했다고 죄명을 지었다. 어찌되었든 조지서 또한 갑자사화의 희생자여서 중종반정 이후 신원된다.[32]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허침의 졸기를 보면 늘 임금의 음황(淫荒)하고 정사가 문란하되 바로잡아 간하지 못함을 근심하더니 드디어 고질이 되어 병이 위독해졌으되 약을 들지 않고 빨리 죽고 싶을 뿐이라고 하였다는 묘사가 나온다. 사화로 인해 사람들이 대거 죽어나가는데 자신은 무사한 것에 대해 심리적으로 상당히 괴로워하고 사관을 비롯한 당대 사람들도 허침에 대해 동정적으로 바라본 듯 하다.[33] 기록에는 연산군이 키가 크고 왕의 풍채가 없으며 여자 같이 생겼었다고 한다. 이전의 왕들은 대체로 우람한 체격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연산군의 이런 외모는 모계 유전일 가능성이 크다.[34] 김영애는 여기서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1인 2역을 연기했다.[35] 장서희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폐비 윤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기사.[36] 재미있게도 여기서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 이민우와 배우 김영란은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할머니와 손자로 나오는데 김영란의 신덕왕후는 양녕대군이 아기 때 죽었기에 이민우의 양녕대군과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은 없다. 재미있게도 성종 역의 박진성은 황희를 맡는데 양녕대군의 폐세자 결정이 될때 유일하게 반대한 인물이다. 배우개그로 보면 아들의 폐세자를 막은 꼴이 되는셈.[37] 실제 나이는 며느리역의 김성령이 채시라보다 연장자이다.[38] 이 역할로 그 해 신인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상대배우인 고주원과 비교했을 때 잘했다는 것이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39] 당시 종편이 생긴지 6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시청률(당시 기사)이다.[40] 이전에 출간된 임용한의 <조선국왕 이야기>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