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토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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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스
Πόντος (그리스어)
Pontus (영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PonticKingdom.png
폰토스 왕국의 최대 판도[1]
존속기간
기원전 281년 ~ 서기 62년
지위
독립국
(기원전 281년 ~ 기원전 63년)
로마 공화국의 속국
(기원전 63년 ~ 기원전 27년)
로마 제국의 속국
(기원전 27년 ~ 서기 62년)
위치
서아시아
수도
아마시아
시노페 (기원전 182년 이후)
언어
코이네 그리스어 (공식)
고대 페르시아어 (왕족)
고대 아나톨리아 언어들
성립 이전
아케메네스 왕조
헬레니즘 제국
멸망 이후
로마 제국

1. 개요
2. 역사
2.1. 건국과 초기
2.2. 발전
2.3. 카파도키아-페르가몬 전쟁
2.4. 최전성기와 몰락
3. 기타
4. 대중 매체에서
5. 역대 왕
6. 틀



1. 개요[편집]


폰토스 왕국은 고대 아나톨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로마 공화국에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한 헬레니즘 계열 왕국으로, 미트리다테스 6세 치세인 기원전 91년 ~ 기원전 63년까지 그리스 세계의 맹주를 자처하며 로마군을 물리치고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평정했으나 술라루쿨루스, 폼페이우스에게 잇달아 격파당한 후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 뒤 파르나케스 2세 대에 다시 한 번 전쟁을 치렀으나 젤라 전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진압되어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가 이후 흡수되었다.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화를 모방한 주화를 발행하며, 로마와 싸울 때는 그리스 세계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헬레니즘 왕국이었으나 왕족은 페르시아인들이었다. 역대 왕들 모두 페르시아식 이름을 쓰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손을 자처했다. 아마시아 출신의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본(Στράβων, 기원전 63 ~ 서기 24)이 살던 시대까지도 아마시아에 페르시아 문화가 상당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2. 역사[편집]



2.1. 건국과 초기[편집]


폰토스의 기원은, 오늘날 부르사라고 불리는 프루사에서 시작한다. 프루사는 당시에는 키오스라고 불렸는데, 후에 세워지는 비티니아 왕국의 왕인 프루시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프루사라고 개칭되었다. 키오스에는 원래 페르시아의 태수령이 위치했는데, 당시 사트라프아리오바르자네스 1세였다. 그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1세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적인 위치를 손에 넣었으며, 페르시아는 그를 인정하고 새로이 페르시아에 예속된 참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곳에는 새로운 독자적인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고, 미트리다테스 1세는 참주좌를 아들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에게 넘겼다.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가 훌륭한 통치끝에 사망하자 키오스의 통치권은 그의 아들 미트리다테스 2세에게 넘어갔다.

미트리다테스 2세의 치하에서 키오스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이었다. 이때 미트리다테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 3세와 공순 서약을 했다. 그의 가족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이후에도 키오스의 참주 가문으로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대왕의 사후 새로이 왕을 칭한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는 그들을 내버려둘 생각이 별로 없었다. 미트리다테스 2세는 BCE 302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가 키오스의 참주좌를 이어받았다. 당시 미트리다테스는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친분을 두텁게 쌓았기 때문에 그로부터 가족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트리다테스는 안티고노스 1세의 추적을 피해 파플라고니아의 도시 아마시아로 도망쳤다.

아마시아에 의탁한 미트리다테스는 아직 힘이 부족함을 깨닫고, 여러 술책을 통해 이 도시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이때 갑자기 안티고노스 1세가 BCE 301년 셀레우코스 1세의 공격을 받고 입소스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1세는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으나 그는 리시마코스가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안티고노스 1세가 사라진 이후 다른 디아도코이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 대항하여 동맹을 맺기 시작했고, 마침내 BCE 281년,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 1세와 벌인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하자 폰토스 일대는 리시마코스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때를 틈타, 그해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을 폰토스 왕국의 왕으로 선포했다. 미트리다테스 1세 크티스테스(BCE 281~BCE 266)는 분노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흑해 남안의 도시국가들과 동맹체를 결성했다. 헤라클레아 폰티카가 이런 동맹국들 중 가장 든든한 세력이었다. 다행히도 셀레우코스 제국은 분노에 떨면서도 소아시아의 행정 시스템 건설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폰토스 왕국은 요람에서 안심하고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미트리다테스 1세는 마침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쑥밭으로 만들고 소아시아로 내려온 켈트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켈트족은 셀레우코스 제국과 페르가몬 왕국에 맞서서 자신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폰토스 왕국을 적극적으로 돕고 나섰고, 이로 인해 왕국의 튼튼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여기에 이 지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세력을 소탕하자 왕국이 드디어 안정을 찾게 되었다.


2.2. 발전[편집]


미트리다테스 1세가 사망하게 되자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BCE 266~BCE 250)가 폰토스 왕국의 제2대 왕이 되었다. 켈트족의 지지를 얻어, 다시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군대를 쫓아내고, 무역상의 거점이자 요새로서의 기능도 할 수 있는 아마스트리스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폰토스 왕국을 번듯한 국가로 세워놓은 뒤에,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자 제3대 왕으로 미트리다테스 2세(BCE 250~BCE 220)가 즉위했다. 이를 틈타 침공한 켈트족을 무난하게 물리친 후에, 그는 완연한 성년이 되자 셀레우코스 제국의 국왕인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의 딸과 결혼하여 왕국의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그리고 마침내 왕국의 국경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셀레우코스 2세에 대항하여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미트리다테스 2세는 이 반란에 편승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침공했으며, 셀레우코스 2세가 직접 지휘하는 20,000명의 병력에 대승을 거두어 셀레우코스 2세가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도망가는 전과를 올렸다. 그는 여기서 더 이상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드리지 않기로 하고, 딸을 새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유망주로 떠오른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그동안 독립을 누려오던 도시국가 시노페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요새도시로서도 이름 높던 시노페의 방어는 철통같아 미트리다테스 2세는 눈물을 머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220년 병으로 쇠약해져 사망했다.


2.3. 카파도키아-페르가몬 전쟁[편집]


그의 아들이 제4대 미트리다테스 3세(BCE 220~BCE 185)가 되었다. 그의 치세는 불분명한 점이 많은데, 역사적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티오코스 3세가 이끄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침공을 받아 다시 약소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름이나 재위기간도 후대의 미트리다테스와 비교하여 겨우 알아낸 것이다. 미트리다테스 3세의 시대를 지나 제5대로 파르나케스 1세(BCE 185~BCE 170)가 즉위했다. 파르나케스 1세는 그동안 폰토스 왕국이 계속 노려왔던 대도시 시노페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폰토스 왕국이 흑해의 무역로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로도스는 이런 사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어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폰토스 왕국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로마는 이런 문제에 대해 개입하길 거부했다. 그러자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와 동시에 로마에 자신의 입지를 변호하는 사절을 보냈다. 사절이 돌아오자마자, 파르나케스 1세는 곧바로 에우메네스 2세와 카파도키아 왕국령인 갈라티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페르가몬 왕국의 초청으로 양측의 분쟁을 조정하러 온 로마 특사 때문에 전쟁을 중단해야 했는데, 파르나케스 1세의 제안이 거절당하자 다시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 동안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은 페르가몬, 카파도키아 양 국가와 맞서 싸우는 것은 폰토스 왕국 혼자만의 힘으로는 버거운 일이라, 갈라티아와 파플라고니아를 할양하기로 하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그 후에도 왕국을 유지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두 지역을 잃은 손실은 대단히 컸다.

그의 동생이 미트리다테스 4세 필로파토르 필라델포스(BCE 155~BCE 150)로 즉위했고, 누이 라오디케와 근친혼해 공동 군주로 삼았다.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찬탈로 즉위했다는 의심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의 통치기간 역시 불확실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확실한 사실 하나는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2세가 비티니아 왕국의 프루시아스 2세와 전쟁을 벌일 때 페르가몬 왕국에 지원군을 보내 주었다는 사실이다. 미트리다테스 4세 필로파토르 필라델포스는 또 로마와의 관계 개선에 크게 성공하여 "로마의 친구"로 불리우며 국제적 지위를 공인받았다. 짧은 치세 이후 파르나케스 1세의 아들이었던 미트리다테스 5세 에우에르게테스(BCE 150~BCE 120)가 제7대 왕으로 즉위했다. 폰토스 왕국의 특징 중 하나가 왕위 계승 시기가 불분명하다는 것인데, 그의 즉위 시기 역시 알 수 없다. 그는 숙부의 외교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로마와의 동맹정책을 유지했다.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아리스토니코스의 반란에 로마군의 측면을 원조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하여 로마로부터 그 보상으로 지난날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였던 프리기아의 일부분을 얻어낼 수 있었다. 비록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이 증여는 무효라는 선언을 받았지만, 로마는 이 지역을 그대로 미트리다테스 5세 에우에르게테스가 통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카파도키아 왕국과의 혼인 동맹을 이끌어낸 것은 무엇보다도 값진 성과였다. 이는 지난날 파르나케스 1세의 실책으로 줄어든 국력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아테네와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 기부금을 많이 내 관대한 독지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그리스인들과 우호관계를 획득하기도 했다. 그는 시노페를 시찰하던 중 암살당했는데, 아무래도 왕위를 노리고 있던 자와 왕비 그리고 시종이 공모하여 벌인 일 같다.


2.4. 최전성기와 몰락[편집]


미트리다테스 5세가 암살당하자 제8대 왕으로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 디오니소스(혹은 미트리다테스 6세 메가스 ; BCE 120~BCE 63)가 즉위했다. 로마의 루쿨루스, 폼페이우스와 호각을 이루며 전쟁을 이끌었던 저 유명한 미트리다테스가 바로 이 인물이다. 미트리다테스 5세의 왕비였던 라오디케 6세 게스파에피리스, 그러니까 그의 어머니는 미트리다테스 5세가 암살당하자마자 최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 디오니소스는 아버지가 부당하게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찬탈한 것에 대해 몹시도 분개했다. 그는 처음에는 소수파로 시작했고 어머니의 권위 아래 굴복해야 했으나, 대권을 손에 넣자마자 어머니를 폐하고 투옥시켰다. 그리고 옥좌를 견고히 하기 위해 그의 누이 라오디케와 결혼했으며, 형제들을 남김없이 모두 살해했다. 그가 누이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곧 로마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정복 정책을 펼쳐 콜키스(오늘날의 조지아)와 그 북쪽으로 이어진 흑해 연안의 해안지대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곧 스키타이의 왕이자 북방 스텝 지역의 지배자였던 팔라쿠스와 부딪혀야 했다. 여기서 미트리다테스 6세는 스키타이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창하여 크림 반도보스포루스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팔라쿠스는 격퇴되었고 이후 스키타이는 지리멸렬해졌다.

이리하여 자신의 실력을 입증한 미트리다테스 6세비티니아 왕국니코메데스 3세와 손을 잡고 파플라고니아와 갈라티아에 침공하여 그곳을 분할했다. 비티니아 왕국은 그 직후 반(反) 폰토스 동맹을 결성했는데, 이에 분개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 왕국을 침공했다. 비티니아 왕국과 카파도키아 왕국은 갈라티아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상실했는데 그 사이 니코메데스 3세는 사망하고 니코메데스 4세가 왕위를 이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신속히 비티니아군을 괴멸시키고 프로폰티스 해협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유도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수도를 그리스 도시국가였던 시노페로 옮기고 모든 왕족에게 그리스어를 쓰며, 그리스식 풍속을 익히게 하는 한편, 자신들의 혈통을 아케메네스 왕가에서 찾도록 명령했다. 곧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를 적으로 선포하고 자신을 "키루스 대제의 적법한 후계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메가스의 화신"으로 선전했다.

그의 군대는 에게 해를 건너 아테네 시민들의 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입성했으며, 그의 해군은 로마 해군을 로도스 섬에 가둬두는 데 성공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북부 아나톨리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를 독점하는 강력한 왕국을 구축하게 되었다. 폰토스 왕국의 이런 비약적인 확장을 보자 아르메니아 왕국의 대왕 티그라네스 2세 메가스(재위 BCE 95~BCE 55)는 그와 혼인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그와 함께 운명 공동체를 결성했다. 그 직후인 BCE 90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영내의 로마인을 모두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E 90~BCE 85)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폰토스의 장군 아르켈라오스가 지휘하는 폰토스-그리스 연합군은 로마군에게 처참하게 무너졌고, 결국 로마의 장군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BCE 83년, 로마는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다시 한번 전쟁(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선포했다. 집정관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전쟁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듬해에 로마군이 싱겁게 격퇴당하고 휴전 협정을 맺었다. 세르토리우스가 마리우스파의 잔당을 이끌며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미트리다테스 6세 역시 행동을 개시했다. BCE 75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이로써 개막했다. 처음에 로마군은 별 힘을 쓰지 못했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 반란이 일단락되자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소아시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티그라네스 2세까지 가담한 폰토스-아르메니아 연합군은 루쿨루스의 뛰어난 전술에 휘말려 대패했다. BCE 69년, 티그라네스 2세가 새로 건설한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가 로마군에 함락당하자 전쟁은 로마군의 완벽한 승리로 기울었다.

티그라네스 2세는 동맹을 폰토스에서 로마로 바꾸었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곧 아들 파르나케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는데, 결국 그는 흑해 북안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자결했다. 뒤를 이은 사람이 제9대 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파르나케스 2세(BCE 63~BCE 47)였다. 파르나케스 2세는 재빨리 루쿨루스를 대체한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는 데 성공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폼페이우스의 청을 받아 로마에 반대하는 도시인 파나고리아를 공격했고, 두 사람의 우호관계는 돈독해졌다. BCE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일어나자 그는 당연히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고,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살해당하자 그의 입지가 상당히 위태로워졌다. 결국 파르나케스 2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결국 젤라 전투에서 대패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희생 제물이 되어야만 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그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갔는데, 로마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킨 장수 아산드로스에게 살해당했다.

폰토스는 파르나케스 2세 사후 10년간 로마 공화국이 임명한 아시아 총독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그러다 기원전 39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으로서 지중해 동부 세계를 다스리게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폰토스를 반으로 쪼개서 서부는 로마의 통치를 게속 받게 하고, 파르나케스 2세의 장남 다리우스를 왕으로 세워서 동부를 다스리게 했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37년경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동생 아르사케스가 로마의 동의없이 왕을 칭했다가 반란자로 낙인찍혀 안토니우스의 토벌 명령을 받은 폴레몬 1세에 의해 제압당했다.

기원전 37/36년 폰토스 왕이 된 폴레몬 1세는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가담하여 안토니우스의 부관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와 함께 수송 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가 지휘하는 파르티아 기병대가 수송부대를 기습 공격해 오피우스는 전사하고 수송부대는 몰살당했다. 그는 파르티아군에 생포되었지만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안토니우스가 원정 실패의 원인을 아르타바스데스 2세에게 돌려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을 때 협력했고, 메디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가 파르티아와 동맹을 끊고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는 데 기여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소아르메니아 영토를 넘겨줬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내전을 벌일 때, 그는 파르티아의 침략으로부터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후 차례로 자살하자,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폰토스 왕위를 인정받았다. 기원전 26년 "로마인의 친구"로 공인된 그는 이에 보답하고자 폰토스 왕국내 모든 극장의 앞자리를 차지할 특권을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하사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보스포로스 왕국의 찬탈자 스크리보니우스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리자 즉시 함대를 통솔하여 흑해를 가로질러 항해했다. 보스포로스인은 강대한 로마 제국과 싸우길 원하지 않았기에 스크리보니우스를 살해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보스포로스 왕국의 지배권을 폴레몬에게 넘겨줬다. 이에 주민들이 스키타이계 왕들이 왕위를 이어받던 관례가 무너지고 외부인이 왕으로 등극한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14년 로마 함대를 이끌고 보스포로스로 진군해 반란군을 제압했다. 그는 주민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과거 흑해 연안 일대를 평정하여 명성을 날렸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손녀이자 파르나케스 2세의 딸이며, 스크리보니우스의 아내였던 뒤나미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뒤나미스는 왕권을 포기하길 거부하고 기원전 13년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족들이 있는 크림 반도 내륙으로 도주했다. 이에 폴레몬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외손녀인 피토도리다와 결혼했다.

기원전 8년, 폴레몬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크림 반도 내륙 부족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돈 강 어귀에 있는 타나이스 시를 파괴한 뒤 아스푸르기아노이(Aspurgianoi) 족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여 생포된 뒤 피살당했다. 보스포로스 왕국은 뒤나미스를 거쳐 아스푸르고스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폴레몬 1세의 왕비 피토도리다가 폰토스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녀는 콜키스와 킬리키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지만, 보스포로스 왕국은 끝내 되찾지 못했다. 이후 카파도키아 왕 아르켈라오스와 재혼하여 카파도키아 왕비도 겸했고, 아이들과 함께 카파도키아 궁정에 정착했다. 아르켈라오스와의 사이에선 자식이 없었고, 서기 17년 아르켈라오스가 죽자 자녀들과 같이 폰토스로 다시 돌아왔다.

38년 피토도리다가 사망한 뒤 차남 폴레몬 2세가 폰토스 왕위에 올랐고, 콜키스와 킬리키아도 동시에 다스렸다. 키지코스의 비문에 따르면, 그는 칼리굴라 황제의 누이 율리아 드루실라를 기리기 위해 개최된 경기를 주관했다고 한다. 47년에는 콤마게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와 함께 킬리키아에서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를 기리는 경기를 개최했다. 그러던 62년, 네로 황제는 폰토스와 콜키스를 로마의 속주로 삼기로 했다. 폴레몬 2세는 이후로 킬리키아만 다스리다 74년 사망했고, 이후 킬리키아 역시 로마에 병합되었다. 이리하여 폰토스 왕국은 로마 제국령이 되었지만, 다른 속주들과 달리 일종의 자치구로서 잔존했다.


3. 기타[편집]


  • 20세기 초 아나톨리아 반도 북동부에 거주하던 흑해 그리스인들이 폰토스 왕국의 이름을 딴 폰토스 공화국 설립을 시도했으나 취소되었다.


4. 대중 매체에서[편집]




5. 역대 왕[편집]





이하, 폰토스 왕국의 전신인 키오스의 통치자들이다.

이름
재위 기간
가족 관계
비고
미트리다테스 1세 니카토르
기원전 ? - ?

시조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
기원전 ? - ?
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들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아닌 2세인 이유는 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버지가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이기 때문
미트리다테스 2세
기원전 ? - 기원전 30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을 받음. 공순 서약

이하, 독립국으로서의 폰토스 왕들이다.

이름
재위 기간
가족 관계
비고
미트리다테스 1세 크티스테스
기원전 281 - 기원전 265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
폰토스 왕국의 초대 왕.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으로 국가 기반 마련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
기원전 265 - 약 기원전 250
미트리다테스 1세의 아들
무역 거점 아마스트리스 획득, 원인 알수 없는 죽음.
미트리다테스 2세
약 기원전 250 - 약 기원전 220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의 아들
켈트족 격퇴,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 시노페 함락 실패
미트리다테스 3세
약 기원전 220 - 약 기원전 185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
통치 불분명
파르나케스 1세
약 기원전 185 - 약 기원전 170
미트리다테스 3세의 아들
시노페 함락, 흑해 무역로 장악, 갈라티아 침공.
미트리다테스 4세 필리파토르 필라델포스
약 기원전 170 - 약 기원전 150
파르나케스 1세의 남동생
찬탈 의혹, 로마와 관계 개선.
라오디케
약 기원전 162 - 약 기원전 150
파르나케스 1세와 미트리다테스 4세의 누이
미트리다테스 4세와 공동 재위
미트리다테스 5세
약 기원전 150 - 기원전 120
파르나케스 1세의 아들
로마를 도운 대가로 프리기아 획득, 그리스와의 우호 증진, 암살당함.
미트리다테스 6세 메가스
기원전 120 - 기원전 63
선왕의 아들
찬탈한 어머니를 유폐, 그 이후는 본문 참조.
파르나케스 2세
기원전 63 - 기원전 47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
마지막 독립왕, 나라를 살리기 위해 폼페이우스와 의기투합했으나 그가 죽자 몰락.

이하, 로마 속국으로서의 폰토스 왕들이다.

이름
재위 기간
가족 관계
비고
다리우스
기원전 37년
파르나케스 2세의 장남

아르사케스
기원전 37년 ~ 기원전 36년
파르나케스 2세의 차남

폴레몬 1세
기원전 36년 ~ 기원전 8년
파르나케스 2세의 사위
로마에 의해 폰토스 왕에 임명된 뒤에야 뒤나미스[2]와 결혼
피토도리다
기원전 8 ~ 기원후 38
폴레몬 1세의 후처
여왕
폴레몬 2세
기원후 38 ~ 기원후 62
폴레몬 1세와 피토도리다의 아들



6. 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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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짙은 보라색은 미트리다테스 6세 즉위 이전 영역이고(폰토스, 파플라고니아 북부), 중간 보라색은 미트리다테스 6세 재위 초기에 획득한 영역이며(갈라티아, 카파도키아 북부, 소 아르메니아, 보스포로스 왕국), 옅은 보라색은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간에 일시적으로 점령한 영역이다.[2] 파르나케스 2세의 딸이자 보스포로스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