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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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ederik_1-detail.jpg

출생
1471년 10월 7일
덴마크 하데르슬레우
사망
1533년 4월 10일 (향년 61세)
슐레스비히 고토르프 성
재위기간
덴마크 국왕
1523년 ~ 1533년 4월 10일
노르웨이 국왕
1524년 ~ 1533년 4월 10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1490년 ~ 1533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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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올덴부르크 가문
아버지
크리스티안 1세
어머니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
형제자매
한스, 마르그레테
배우자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1514년 사망)
포메른의 조피
자녀
크리스티안 3세, 도로테아, 한스, 엘리자베트, 아돌프, 안나, 도로테아, 프레데리크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덴마크노르웨이이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2. 생애[편집]


1481년 부왕 크리스티안 1세의 사망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분봉받았다. 1513년 이 승하하고 조카가 왕위에 오른 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으로 남았으나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에서의 학살으로 민심을 잃어 독립전쟁이 일어나 스웨덴에서 폐위당하고, 상공업 진흥 정책으로 평소 마찰을 빚었던 덴마크인 귀족들에 의해 폐위당하자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어린시절부터 독일에서 살았던 터라 덴마크어를 잘 하지 못했으며 슐레스비히의 고토르프 성에서 머무르면서 통치는 덴마크 귀족들에게 일임하였다. 그의 치세동안 프로테스탄트가 덴마크로 유입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을 방조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덴마크는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3세가 즉위하면서 완전한 루터교회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크리스티안 2세가 노르웨이 왕위에서 폐위당한 이후 노르웨이 국왕으로도 즉위했지만, 코펜하겐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던 본국 덴마크와 달리 평생 노르웨이에 발조차 내딛지 않았고 노르웨이 왕위 대관식도 당연히 안했다.


3. 기타[편집]


이 사람 때부터 51대 국왕 프레데리크 9세까지 덴마크의 왕은 전부 '크리스티안(Christian)' 아니면 '프레데리크(Frederik)'로, 두 이름이 번갈아가며 사용되었다. 400여 년 동안 두 이름만 사용한 것.[1] 52대 국왕은 여왕이어서 규칙이 끊어졌다. 게다가 프레데리크-크리스티안의 전통도 마르그레테 여왕이 아들의 이름을 프레데리크로 지으며 끝났다.

삼남 아돌프는 뒷날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황가로 이어지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시조이고, 장남 크리스티안 3세의 삼남인 한스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 왕조의 시조로 현재 올덴부르크 가문의 구성원들은 모두 프레데리크 1세의 자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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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에 크리스티안 2세도 있지만 크리스티안 2세의 아버지 한스 왕과 프레데리크 1세 모두 자신들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1세의 이름을 따 맏아들의 이름을 크리스티안으로 지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프레데리크 1세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한다. 크리스티안 2세는 자신의 맏아들 이름을 한스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