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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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공화국
Repubblica Fiorentina
Repubblica di Firen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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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피렌체 공화국 국장 (1251년 이전).svg
국기(~1251)
문장(~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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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1251~)
문장(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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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공화국의 최대 판도
1115년 ~ 1569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토스카나 변경백국
토스카나 대공국
피사 공화국
위치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수도
피렌체
정치체제
귀족공화제(1115~1494, 1498~1532)
신권 정치(1494~1498)
국가원수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주요 군주
코시모 일 베키오
로렌초 일 마니피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언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민족
이탈리아인
종교
로마 가톨릭
주요사건
1115년 건국
1494년 메디치가 축출
1512년 메디치가 복귀
1532년 공국으로 전환
통화
피오리노[1]

언어별 명칭
이탈리아어
Repubblica Fiorentina
Repubblica di Firenze
라틴어
Respublica Florentina
독일어
Republik Florenz
스페인어
República de Florencia
영어
Republic of Florence

1. 개요
2. 역사
3. 정치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REGNA CADUNT LUXU SURGUNT VIRTUTIBUS URBES

사치는 국가를 몰락시키며 선행이 도시를 번영시킨다[2]

메디치 궁 안뜰에 세워져 있었던 도나텔로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에 새겨져 있는 문구.[3]


중근세 시기 이탈리아 중부 내륙에 존재했었던 국가.


2. 역사[편집]


피렌체라는 도시 자체는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웠을 정도로 오래된 도시다. 하지만 독립된 피렌체 공화국의 설립은 카노사의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피렌체는 토스카나 후작령을 관할하던 마틸다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을 지지하고 있었다. 1081년 롬바르디아에 당도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탈리아도시들에게 자유를 줄 것을 약속했고, 이에 피렌체를 뺀 토스카나의 모든 도시들이 황제파로 돌아섰다. 피렌체의 귀족들은 마틸데 후작과 함께 하인리히 4세와 싸워 피렌체를 지키는 데 성공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은 상인 귀족들이 대거 성장하였다.

1115년 마틸다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피렌체는 자연스럽게 공화국이 되었다. 마틸데의 후계자를 자처한 라보도가 피렌체를 복속시키려 시도했지만 1119년 피렌체와의 전쟁에서 되려 살해당하며 피렌체는 거의 완전한 독립을 찾게 된 것이다. 마틸다의 유일한 영지였던 피렌체신성 로마 제국의 봉건 지배에서 벗어나 코뮌 체제를 설립했고, 독립국 수준의 자치권을 확보하는데까지 성공했다.[4] 독립한 피렌체는 아르노 강을 중심으로 양모 무역, 제강, 무기 생산 등 상업에 두각을 드러냈고, 이탈리아 각지에서 상인들과 노동자들의 이주를 받아 급속히 팽창했다. 1050년경 1만 5천명이었던 도시의 인구는 1200년경 3만 명까지 늘어났고, 1172년 성벽을 중축해서 도심지의 면적을 확대시켰다. 중간에 1185년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바람에 크게 타격을 받고 신성로마제국에 굴복하지만 하인리히 6세가 죽은 뒤 다시 독립을 되찾는다.

피렌체의 최초 권력자들은 기사 작위를 보유하고 있었던 토착 귀족이었고,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100년간 피렌체의 정계를 장악했다. 그러나 인구 증가와 함께 등장한 신흥 세력이 커져갔고, 토착 귀족 세력과 신흥 세력의 대결은 13세기 구엘프와 기벨린의 대립으로 번졌다. 여기서 토착 귀족층은 기벨리니파(황제파)가 되었고, 도시 시민 계층과 노동자, 농민들은 구엘프(교황파)에 가담했다.

1244년 토착 귀족들의 권력 독점이 완화되어 구엘프파가 세력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1250년 중산층과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켜 기벨리니 세력을 축출하였고, 공직을 장악한다. 구엘프의 집권은 주변국과의 외교적 긴장을 불러왔는데 기벨리니파가 집권하고 있었던 시에나 공화국[5]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6] 피렌체는 다른 구엘프 도시[7]들을 소집하여 1260년 시에나로 진격했고, 시에나는 신성 로마 제국과 다른 기벨리니 도시들을 끌어들여 맞섰다. 결국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시에나와 기벨리니 군대가 승리하였고, 피렌체에서 쫒겨난 토착 귀족들은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피렌체에서 시민 계급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1282년 교황의 지지를 받은 구엘프파는 '정의의 법률' 을 제정하여 토착 귀족 가문들을 몰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토착 귀족 가문 72개 중 55개의 가문이 시민권을 빼앗기고 축출당했고, 이들은 피렌체에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기벨리니를 몰아낸 구엘프는 흑당과 백당[8]으로 또 다시 분열했고, 흑당은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야심을 빌여 백당을 몰아냈다.[9] 흑당은 1310년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무너진다.

1348년 흑사병이 창궐하여 도시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였다. 여기에 잉글랜드 왕실에 200만 플로린을 대출해주었다가 파산해 버려서[10] 바르디[11], 페루치, 브란카치 등 많은 상인 가문들이 몰락하였다. 바르디 가문은 손해를 만회하려고 반란을 획책하다가 역으로 추방되었으며 피렌체는 정치적인 공백이 발생했다. 여기에 교황의 세력이 발전해서 피렌체를 위협할 정도가 되자 피렌체 시민들에 반교회적 감정이 커져 갔고, 특히 신흥 상인층은 전통적으로 교회와 결속되어 있는 구지배층을 공격하고자 고의적으로 반교회 선전을 전개했다. 이에 1375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냐에서부터 피렌체를 침공했다. 피렌체군이 이를 격파했고, 교황은 교회군을 상대로 반격을 했다는 이유로 피렌체 시 전부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대교황청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피렌체가 그레고리오 11세의 선종을 기해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파문에서 풀림으로써 끝났다.

1378년 7월 14세기 후반의 흑사병의 여파 속에서 모직물 공업 종사자들인 소모공(치옴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미켈레 디 란도를 지도자로 세우고, 베키오 궁전을 점거하여 체제를 전복시켰다. 미켈레 디 란도는 수공업자들과 치옴피를 포함한 정부를 만들어 내각을 꾸리려고 하였으나, 1382년 상층 시민 측의 반격을 받아 정권은 무너졌다. 이후 알비치, 스트로치, 토르나부오니, 알베르티 등 상인 귀족 가문들이 정계를 장악했다.

14세기 말 흑사병의 공포가 가시면서 피렌체는 다시 호황을 맞았다. 피렌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흑사병 이전의 인구를 회복하였고, 유럽의 상업 중심지마다 진출하여 세를 넓혔다. 이때 피렌체의 금융업은 경쟁 상대가 거의 없었으며[12], 직물 산업은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비스콘티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던 밀라노 공국은 15세기경 포 강 일대의 비옥한 평야를 장악하고 북이탈리아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다.[13] 롬바르디아를 얻은 갈레아초 비스콘티 공작은 1397년 피렌체를 공격했다. 밀라노 공작은 피사와 루카, 볼로냐, 시에나 등의 이탈리아 중부 도시들을 점령하고, 피렌체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나 1402년 사망하였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은 피렌체는 콘도티에리를 활용해 피사와 리보르노를 탈환해서 토스카나의 패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아레초에서 리보르노까지 세력을 넓힌 피렌체는 명실상부한 토스카나 지방의 패자가 되었으며, 자유를 상징하는 자치 도시들의 상징이 되었다.

이 무렵 무젤로에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이주했다. 이들의 가장이었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부동산금융업 등의 상업 활동으로 부를 늘렸고, 1410년 피렌체에서 3번째 부자 가문으로까지 성장하였다. 바르디 가문이나 알베르티, 루첼라이, 포르티나리 등 유력가와의 관계까지 구축한 메디치 가문은 여러 가지 기회를 틈타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가문이 되었고,[14] 그 아들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동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 간의 정상 회담을 중재하는 등의 치적을 쌓고 권력 투쟁 끝에 알비치, 스트로치 등의 유력 가문까지 몰락시키고 '국가의 아버지' 칭호를 받아 사실상의 통치자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1478년 4월 26일 파치 가문의 음모를 기회로 잡은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파치 가문을 몰락시키고 절대 권력을 잡았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과의 외교를 이용해 이탈리아를 평화 상태로 만들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예술가, 문학인들을 지원,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죽음과 함께 메디치가의 몰락도 시작되었다.(다만 로렌초 시대부터 돈을 워낙 많이 써서 이미 재정난의 기미가 보였다) 로렌초 메디치의 아들인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는 1494년 샤를 8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렌체에 쳐들어오자 바로 항복하고 말았다. 메디치가의 무능에 실망한 피렌체 시민들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내세워 메디치 가문을 축출했다. 사보나롤라는 엄격한 신정 정치를 폈고, 허영의 불꽃이라는 의식을 거행, 많은 예술품들을 파괴하였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피렌체 시민들은 그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대립하자 사보나롤라를 체포하여,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했다.

사보나롤라가 죽은 이후 피에로 소데리니가 이끄는 공화정 정권이 출범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정권에 참여한 것도 이때다. 소데리니 정권은 베네치아의 안정된 정치 체제를 모방, 정치 개혁을 시도해 이상적인 공화주의를 실현하려고 애썼지만 너무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 때문에 고배를 맛보아야 했다. 피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출병시켜 진압하려고 했지만 문제가 많았던 용병제 등의 이유로 실패했고, 메디치 가문 숙청에 너무 소극적이었던 나머지 1512년 메디치 가문이 복귀하자 소데리니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복귀한 메디치 가문은 실정을 거듭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카를 5세의 막대해진 세력에 당황한 메디치 가문은 카를 5세를 견제하고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에 증원해준 군대가 카를 5세에게 전멸당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사코 디 로마로 로마가 불타자 자유를 갈망하고 있던 피렌체 시민들은 한 번 더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공화국 정부의 재건을 시도했다. 마침내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피렌체를 포위했을 때 피렌체는 영웅적으로 적의 포위 공격을 저지하려고 준비를 갖추었고, 도시는 황제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성문을 폐쇄하면서 요새 구축의 지휘관으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고용했다.[15] 하지만 전투 끝에 피렌체는 항복을 했고,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인 알렉산드로 메디치카를 5세에 의해 피렌체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피렌체의 공화정은 종말을 맞았고, 알렉산드로 메디치 공작은 피렌체 공국을 세운다.[16] 그리고 이 피렌체 공국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에 의해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바뀌었다.


3. 정치[편집]




도시의 유력 길드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국가였다. 상공업 길드를 아르테라고 불렀는데 금융업, 직물업, 상업, 의약업, 법률업자들로 구성된 대 아르테와 정육, 주점, 목공, 석공 등 나머지 14개 길드로 구성된 소 아르테로 나뉘었다. 토착 귀족 대다수는 이 아르테의 가입이 불가능했고, 시 정부가 토스카나 각지의 지방 호족 명단을 발표해 정치 참여를 금지했다. 고대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30세 이상의 남성에게만 정치 참여를 허락했다. 결과적으로 50만 명에 달하는 영토에서 정치 참여가 가능한 사람은 3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피렌체 공화국의 의회였던 인민 평의회와 행정 기관이었던 총무회는 대 아르테 조합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국가 원수인 '정의의 곤팔로니에레'는 항상 대 아르테 조합원이 선출되었다.

이러한 과두 공화정 체제는 자유를 표방하는 피렌체인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고, 권력을 쥐고 있는 귀족 가문들끼리도 엄청난 견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렌체 사회는 이런 갈등을 조정할 만한 정치적 역량이 부재한 상태였다고 여겨진다. 피렌체는 군사력을 전적으로 용병에 의존했는데 전시에만 고용했고, 경찰력은 없다시피 했다. 여기에 국가원수 임기는 2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길드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도 자체적인 군사력을 가지려 노력했고, 피렌체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스위스 군제를 도입하고 독일인 군사자문을 고용하는 등, 시민군과 용병을 혼용해 장창병, 석궁병, 총병, 기병 등을 육성해 피사를 점령하는 등 성과를 거뒀지만, 결국 프랑스군의 물량공세에 파괴되었다.

명목상 공화국이었으나 후대에 가서는 정치체제가 상당히 자주 바뀌었다. 다음은 이탈리아 위키백과에서 퍼온 자료다.

기간
정치체제
비고
1115년 ~ 1434년
사실상 과두제 공화정
1115년 피렌체 공화정 수립
1434년 ~ 1494년
명목상 공화정, 사실상 군주제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시작
메디치 가문의 통치
1494년 ~ 1512년
사실상 과두제 공화정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통치
피에로 소데리니의 통치
1512년 ~ 1527년
명목상 공화정, 사실상 군주제
추기경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의 통치[17]
메디치 가문의 복귀
1527년 ~ 1530년
사실상 과두제 공화정
1527년 피렌체 민중 봉기, 사코 디 로마
메디치 가문의 망명
1530년 ~ 1532년
명목상 공화정, 사실상 군주제
1530년 피렌체 공성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통치
메디치 가문의 복귀
1532년~ (피렌체 공국)
군주제
알레산드로, 피렌체 공작에 임명
이후 1569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토스카나 대공국으로 국호 변경

정부 조직에 대해서 더 자세한 내용을 참고하고 싶다면 해당 링크로 보면 된다.


4. 기타[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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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iorino. 그런데 영어의 영향을 받았는지 한국에서는 플로린(Florin)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2] 자치도시국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문구이다. 과연 사치를 많이하더니 나라가 망하긴 망했다이 당시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구성국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다양한 자치도시국들이 이탈리아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훗날 나폴레옹이 쳐들어와서 이탈리아 대부분이 프랑스 제1제국 치하에 놓이긴 하지만.[3] 1457년경에 세워졌던 이 동상은 이후 1495년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가 축출되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통치하게 되면서 시뇨리아 광장에 위치한 베키오 궁전 정문 옆으로 옮겨졌다. 유디트가 자신의 나라를 망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모습이 피렌체의 독재자였던 메디치 가문을 퇴출시킨 것과 상통해서 그런 듯하다. 이후 여기저기 옮겨지다가 1988년 복제품이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졌고, 진품은 현재까지 베키오 궁 내부에 보관되고 있다.[4] 자유로운 자치 도시공화국으로서의 피렌체가 언급된 기록은 1138년에 처음 등장한다.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오만공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토스카나의 도시들이 서로 연합을 형성했는데 거기서 처음 언급된다고 한다.[5] 시에나 공화국은 1125년 황제와 동맹을 맺고, 마틸데 후작과의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건국된 공화국이다.[6] 애초에 해상 무역과 모직 산업, 금융업 등 분야에서 피렌체와 경쟁하고 있었던 시에나는 언젠가 피렌체와 전쟁을 할 여지가 컸다.[7] 볼로냐, 만토바, 페루자[8] 흑당은 교황과의 결속 강화를 주장하며 뭉친 친교황파였고, 백당은 자주적 지위 쟁취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9] 이때 백당에 속해있던 단테 알리기에리 역시 추방당했다.[10] 백년전쟁에 영국 왕실이 영국의 모직업을 독점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렸지만 예상 외로 전쟁이 길어지고 워낙 돈이 많이 들었으며 영국도 재정난이 심해져 돈을 갚을수없다고 선언했다.[11] 이 가문의 주력 사업은 은행업이었으나, 1346년에 영국 왕실의 채무 불이행으로 인해 파산해서 망했다.[12]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은 피터지게 전쟁을 하고 있었고, 시에나 공화국은 흑사병의 타격을 회복하지 못했다.[13] 밀라노는 14세기경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의 바람을 운좋게 피했다.[14] 대표적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삽질인 루카 공방전을 들 수 있다.[15] 이때 미켈란젤로는 중압감에 시달려 고뇌하다가 전투가 벌어지기 한 달 전인 9월에 도망쳤다가, 11월 중순에 다시 돌아와 이듬해 8월에 피렌체 시가 항복할 때까지 지휘를 했다. 그러나 전투 뒤에 수립된 토스카나 대공국이 합스부르크의 신하국이었기 때문에 공작의 신망을 받지 못했고, 마침내 신변의 위협까지 느껴 로마로 피신했다.[16] 단, 피렌체 공작의 공식 명칭은 피렌체 공화국의 공작이었고 국호 역시 피렌체 공국으로 바뀌지 않았다.[17] 훗날 교황의 자리에 오르면서 레오 10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