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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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북아일랜드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에 대한 내용은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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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발단
2.1. 주바톱시나
2.2. 게오르기 가폰의 등장
2.3. 주바토프와 가폰의 만남
2.4. 러일전쟁으로 인한 국내 상황의 변화
3. 성당 대신 황궁으로
4.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
5. 차르 체제의 일면
6. 기타



1. 개요[편집]


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월 22일 러시아 제국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제국군이 시위대를 진압해 발생한 유혈사태다.

빈곤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평화로운 시위대를 군대가 학살했다는 편견과는 달리 무력봉기와 차르 살해 계획도 존재했으며 일본 정부, 러시아 정부 및 경찰기관은 물론이고 자유주의자 지주귀족, 자본가에서부터 사회주의 혁명세력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결국 선악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는 여러 계급, 이념, 정치세력들의 이해관계와 파워게임이 얽힌 굉장히 복잡한 사건이다. 때문에 이에 대한 증언이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고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으니 이 점을 감안해서 해당 항목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2. 발단[편집]



2.1. 주바톱시나[편집]


피의 일요일 사건의 기원은 세르게이 주바토프(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로 인해 시작된다. 그는 본디 어린 시절부터 유독 특이하고 이중적인 면모가 강한 사람이었다. 학창시절에는 김나지움을 다니며 드미트리 피사레프 등의 금지된 책들을 읽으며 니힐리즘에 심취하였다. 또한 니힐리스트들의 서클을 만들어 선생들과 논쟁을 벌였고 학생들을 선동하다가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의 요청으로 퇴학 당했을 정도였다. 그 뒤 도서관과 전산국에 일하면서 직장에서 접하게 되는 혁명가, 사상가들에게 금지된 책과 저서들을 기꺼이 제공해주는 등 그들과 교류했으나 그렇다고 직접 혁명 활동에 나서는 등 전면적으로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886년 여름 어느날 그는 어떠한 혐의를 받고 경찰에게 소환된다. 경찰은 그가 일하던 도서관이 반동불자, 불순분자들의 음모의 아지트로서 이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주바토프는 도서관이 자신도 모르게 이용되고 있다는 것에 격분하였고 이런 유해한 범주의 인간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실제로 주바토프가 저 '배신'을 계기로 전향하여 비밀경찰의 일원이 되었는지 아니면 정말 저 '불순분자'들의 일원이었으나 살아남기 위해서 동지들을 팔아 넘겼는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실제로 주바토프가 그 이전부터 비밀경찰의 일원이거나 협력관계였다는 내용의 사료도 존재한다.[1]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러시아 제국의 사상경찰로서 일했고 그 일에 대해서 굉장히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여 주바토프는 반혁명 운동에 투신하였고 경찰국 특수과(Особый отдел)에 들어갈 수 있었다. 특수과는 러시아 제국의 지지기반을 위협하는 이들을 수색및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방첩, 사상범 등 위험인물 색출, 출판물에 대한 사상검증 등 정치와 관련된 넓은 분야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경찰국장에게 직통으로 보고할 수 있던 경찰조직으로 그 중요성과 큰 권한으로 인하여 관련 인물들 내에서 '경찰청의 뇌', 혹은 '경찰청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이들의 주요 임무는 명러시아 내의 혁명 세력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특수과에선 1886년 가을부터 주바토프를 '프락치'로 보내 그가 비밀 정치 단체나 혁명 조직에 접근해 그들의 신뢰를 쌓으며 내부 정보를 유출시키도록 지시했다. 실제로 그는 언변이 뛰어나 혁명사상에 동조하던 여러 인물들을 여럿 전향시켰으며 또한 그가 유출한 정보를 토대로 모스크바 보안과(Охранное отделение)는 많은 사상범, 정치범, 반동분자들을 체포했고 그들의 단체를 해산시키는데 성공했다. 공을 인정 받은 주바토프는 1896년 보안국의 총책임자까지 승진했으며 후로도 정치범, 사상범 수사 시스템을 개혁하거나 1900년에 민스크에서 러시아 정치자유노동당의 리더들의 체포, 그 다음해에는 사회주의혁명가 북부동맹을 와해시키고 그 리더인 안드레이 아르구노프(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ргунов)를 체포하는 등 여러 공적을 연달아 세운다.

그런데 주바토프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을 알아채게 된다. 체포자들이 자신의 행의의 이념적, 정치적 의미를 이해 여부가 그들의 계급과 명확히 일치했다는 것이다. 지식인-혁명가들은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나 정작 대부분의 노동자[2]들은 요구하는 정치적 개혁은 커녕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의 사상에 대해 이해도 관심도 없었다.

이에 의문을 품은 주바토프는 개인적으로 혁명, 반체제 사상들을 연구했다. 이에 따르면 엘리트층인 혁명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적 교리와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결합시키고 노동자들이 폭력 혁명을 따라야만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동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둘을 분리시키고 정부가 노동자의 편에서 그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만 혁명세력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으로 경찰의 통제 하에 있는 온건한 노동 운동을 위한 노동자 조직들을 창설하겠다고 계획했고 이를 주바톱시나(Зубатовщина)라고 한다. 주바토프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1. 혁명적 교리를 진화적 교리로 대체하고 혁명가들과는 달리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한다.

2.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정부형태로서의 전제정이 계급에 상관없이 중재적 성격을 띄고 있으며 폭력에 적대적이며 공정하다는 점을 이해시킨다.

3. 사회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혁명적 노동 운동과 자본주의 구조에 기초한 직업운동의 차이점과 전자는 사회 전계층의 개혁뿐이지만 후자는 즉각적인 이익이라는 것을 이해시킨다.

4. 개인의 권리가 공권력의 경계를 넘는 것은 용납할 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공권력으로 향하거나 그것을 통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킨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1898년 주바토프는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고 당시 모스크바의 경찰청장(обер-полицеймейстер)였던 드미트리 트레포프(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와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모스크바의 총독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주바토프의 임무는 노동자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친분을 얻으며 현 정권 내에서 그들의 이익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은 다르다는 점을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를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원조와 사상, 정치 교육를 제공함으로써 성취하려고 했다.

1901년 5월 한 노동자 그룹에 모스크바 총독부에 상호지원 공동체를 설립을 요청했다. 트레포프는 이를 승인했고 기계 생산 노동자들의 상호협력 협회(Общество взаимопомощи рабочих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가 창설되었다. 창립멤버 중 몇몇은 과거의 사회민주당원이었다. 정부의 주도 하에 노동자들에게 비스마르크의 노동법, 시드니 웨브 , 비어트리스 웨프(Beatrice Webb) ,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 하인리히 헤르크너(Heinrich Herkner) 등의 온건 사회주의, 노동 문제에 대한 서적들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러한 어려운 책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주바토프는 노동자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온건한 노동운동 이데올로기 내용이 담긴 소책자의 집필을 레프 티호미로프(Л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ихомиров)[3]에게 요청하였다.

이는 모스크바 대학교와 과학 아카데미 교수, 학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냈다. 대표적으로 이반 오제로프(Иван Христофорович Озеров)은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4]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강연을 했고 노동자 협회 헌장 초안을 작성했다. 조직은 일요일에는 역사 박물관에서, 평일에서 여러 찻집에서 회의가 열릴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참여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사회주의 계열 혁명세력들이 이들이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고 노동자들을 친정부적으로 선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극심한 사회적 비판을 받은 오제로프 교수는 '우리는 우리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비방, 더러운 비방만이 돌아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결국 교수, 학자들은 활동을 포기했다. 주바톱시나는 성직자들의 교리 및 도덕 강의로 만족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압력에 맞서면서까지 마지막까지 노동자들을 도운 학자는 지식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던 모스크바 검열위원회 책임자였던 블라디미르 나자렙스키(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Назаревский)였다.

1901년 9월 기계 생산 노동자 소비에트(Совет рабочих механическ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가 창설되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주바토프였고 경찰의 비밀요원들이 간부직에 앉음으로서 주바토프는 조직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근로자들의 민원을 접수하고 공장주들로부터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 주정부 역시 소비에트의 편에 서서 공장주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1902년 2월 협회는 비단 제조소 노동자들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냄으로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주바톱시나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전파는 완전히 중지되었고 훗날 소련의 역사가들마저도 주바톱시나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인정했다.

주바톱시나가 막은 또다른 혁명 조직은 유대계 노동자 조직이었다. 1898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전유대인 노동자 연합(Всеобщий еврейский рабочий союз в Литве, Польше и России)', 통칭 분드(Бунд ; בונד)라고 불리는 유대계 사회주의 조직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해당 조직원들을 심문한 주바토프는 이 조직의 체계성과 규모에 경악했다. 이후 주바토프는 분드 조직 색출에 집중하였다. 그는 체포된 분드 조직원들에게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의 차이를 설명하고 전자의 장점과 후자의 해악을 증명하여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체포된 이들은 석방되었고 이들은 분드 내에서 분열을 야기하였다. 기존 분드 지도부는 이들을 강력히 비난하였고 결국 이들은 분드를 떠라 자신들만의 새로운 조직 창설을 발표했다. 1901년 7월 민스크에서 유대인 독립 노동자당(Еврейская независим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이 창설되었다. 경찰은 이쪽 지도부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놓고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진심으로 정부와 싸우는 것보다는 협력하는 것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데 더 유용하다고 믿었다.

주바톱시나 조직들은 모스크바, 민스크, 오데사 등 여러 대도시로 퍼져나갔으며 노동자들은 황제를 찬양하며 친정부 시위를 벌였다. 1902년 2월 19일 농노 해방령이 발표 기념일에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5만 여명이 크렘린 근처나 알렉산드르 2세 기념비로 가서 러시아 제국의 국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를 불렀다.

반대로 러시아에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몇몇 해외 자본가들은 모스크바 경찰이 파업을 장려하고 있다고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에게 불만을 호소할 정도였다. 또한 사회민주노동당을 필두로 사회주의 계열 혁명조직들은 주바톱시나가 그저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기 위한 경찰의 함정이며, 여기에 가담한 일부 노동자들, 교수 및 학자들이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고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언론을 통해 퍼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바톱시나는 러시아 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다만 이는 순수하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 내무장관 드미트리 시퍄긴과 후임인 뱌체슬랴프 플레베 등은 주바톱시나를 고평가했고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잠재적인 위험이 크다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쨌든 최소한 1903년 이전에는 장관급에서는 대체로 지원해준 편이다.

특히 회고록 등을 보면 내용이 일관성 없고 오락가락한데 주바톱시나가 유혈사태의 원인이 된 후에 그것을 지원한 자신들의 책임을 축소하기 위해 왜곡했다는 평이 있다.

주바토프와 제가 구축한 이 제도는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우리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첫 번째는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방어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노동자들에게 경제 문제에 대해 가르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유용한 간행물들을 발행해 노동자 계급의 자주성과 지적 수준의 향상을 돕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공했습니다. 주바토프 제도 도입 전의 모스크바는 불만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현재 노동자들은 정부에 우호적이며 기업의 횡포에 맞서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전의 모스크바가 불만의 온상이었다면 이제는 평화, 번영, 만족만이 있습니다.

영국 언론인 Review of Reviews와의 드미트리 트레포프의 인터뷰 中


주바톱시나의 아이디어는 순진한만큼 단순하다. 노동자들은 혁명가들, 즉 온갖 종류의 사회주의 및 아나키스트 조직의 손에 넘어간다. 왜냐하면 혁명가들이 그들의 편에 서서 온갖 혜택을 약속하는 이론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매우 간단하다. 우리는 혁명가들이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즉 우리는 온갖 종류의 경찰-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거나 모든 종류의 사회, 모임, 강연, 설교, 기금회 등을 조직해야 한다.

세르게이 비테, 회고록 中


2.2. 게오르기 가폰의 등장[편집]


해당 항목의 대부분은 가폰이 남긴 글에 기초해서 작성되었으므로 편향되거나 왜곡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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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가폰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Георгий Аполлонович Гапон)[5]은 당대인들에서든 현대 학자들에게서든 굉장히 상반되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지지자들은 그를 진정한 노동자들의 성자라 칭송했고 후의 볼셰비키들은 그를 차르의 비밀경찰의 일원이라 주장했으며 반대로 차르의 장관들에게는 도발자라 비방되었다.

그는 1870년 러시아 제국의 폴타바 현에서 태어났다. 본인의 자서전에 따르면 가폰은 악마의 등에 타고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했다는 노브고르트의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린 그는 자신도 요한처럼 '악마를 붙잡을 기회'[6]를 꿈꾸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부터 성직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가 자신의 땅과 농장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그를 말렸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고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마을 교회의 사제와 상의 끝에 그를 신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폴타바 신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 나갔지만 그는 그곳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자신의 주장을 가감없이 이야기했으며 이 때문에 학교측과 적잖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어느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했고 아내 역시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남편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일라리온 주교에게 자신의 포부와 바램을 말했고 일라리온 주교는 젊은이를 자신의 부제로 지명하였다. 그는 이윽고 한 교구의 신부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설교는 인기가 있었다. 그는 평신도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그들의 신학적 의문, 질문에 답해주었고 때로는 일상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와 고민까지 들어주었으며 가난한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젊은 신부의 인기가 높아지고 그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이를 질투한 이웃 교구의 사제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게오르기는 '다른 목자의 양 떼를 빼앗은 도둑'이었다. 또한 그들은 게오르기가 성직자의 위엄 없이 저급하고 천박하게 신도들을 대하고 있으며, 성직자는 결코 평신도와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상위의 존재이며 그들의 종교적, 신학적 이외의 사항과 문제에 대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록 일라리온 주교가 그를 강력히 두둔하고 나섰으나 세간의 소문을 막지는 못하였다. 같은 동료 사제들 역시 뒤에서 그를 욕하기에 바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젊은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그의 결혼생활은 4년만에 끝이 났다. 이 때부터 그는 신학과 성직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낙심한 그는 두 아이를 맡기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일라리온 주교의 추천장과 친분 관계에 있던 고위 성직자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러나 신학 아카데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에서의 배움은 그의 의문에 답을 내려주지 않는 '죽어버린 스콜라주의'일 뿐이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크게 낙심하고 지친 그는 미련 없이 휴학 신청을 하고 크림반도로의 여행을 결정했다. 친우들에게는 이것이 그저 요양을 위한 휴식이라고만 말했다. 그는 크림반도의 역사 깊은 수도원들을 방문했고 수도사들의 삶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으며 세상을 위해 봉사하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낙심하고 있던 차에 그는 두 친구 변호사 그리고리와 화가 바실리를 만났다. 성직자, 변호사, 화가는 흔히 있는 조합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렸다. 게오르기 가폰은 친구들의 충고로 인민과 인민의 안녕을 위해 봉사하기로 맹세한다.

그는 수도로 돌아오고 학업을 병행하면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돕는 일을 시작한다. 1899년 그는 수도의 '자비의 성모 교회(Церковь Милующей Божией Матери)'의 설교자로 일하게 된다. 가폰의 봉사와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았고 그 수는 이천 명에 달하였다. 가렐나야 항구는 수도 부랑자들과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설교와 선교, 봉사활동을 계속해 나가면서 점차 가폰은 노동이야 말로 삶의 근원이자 진리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부랑자들, 난민들, 빈민들과 마주하면서 가폰은 이들을 진정으로 돕고 구원할 방법에 고민하게 된다.

1900년 가폰은 성 올가 고아원과 청십자 대피소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설들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상류층들의 기부, 자선과 후원으로 운용되던 단체였으며 가폰은 러시아의 상류층 인사들과 정교회 고위 사제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와 함께 일했던 성직자 중에서는 미래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세르기도 있었다. 가폰은 수도의 노동자와 빈민들을 위해 일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그런 이들을 보호할 만한 수단과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시대 러시아 제국의 하층민들이 겪는 수많은 불의와 불합리함, 어려움을 보았으며 그 와중에서 인해 권력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1902년에 실업자들과 부랑자들의 회생을 위한 새로운 지원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이는 황후에게까지 전해지고 시장인 니콜라이 클로이겐스에 의해 승인되었지만 실질적인 이행은 되지 않았다. 결국 그해 가폰은 후원자들과의 의견 충돌로 있해 청십자 대피소의 원장 자리에서 해임된다. 그리고 그때 빈민들이 부유층의 저택에 돌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과거의 후원자 중 한명이었던 니콜라이 아니츠코프는 이를 자신의 해임 결정에 분노한 가폰이 빈민들을 선동해서 일으킨 일이라 생각하고 경찰에 그를 고발한다. 가폰은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2.3. 주바토프와 가폰의 만남[편집]


해당 항목은 가폰이 남긴 글에 기초해서 작성되었으므로 편향되거나 왜곡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날 미하일로프가 아카데미에 있는 내게 찾아와 어떤 사람이 나는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하면서 즉시 가자고 요청했다. 나는 동의했고 그는 나를 폰탄카에 있는 한 건물로 데려갔다. 그 건물에는 짧지만 많은 의미가 있는 «경찰국»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작은 검은 상자들로 채워져 있는 일련의 큰 방들을 통과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방에는 제국 전역에서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개인의 전기와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이 컬렉션은 러시아에서 «운명의 책»으로 알려져 있다.

— 이제 당신은 주바토프를 뵙게 될 것입니다, — 라고 미하일로프가 말했다. 그 당시 나는 경찰국도, 이 전능한 정치 기관의 수장인 주바토프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호기심이 일었다. 우리는 웅장한 접견실에 들어섰고, 나는 40세 정도, 건장한 체격, 밤색 머리와 매력적인 눈, 솔직한 태도를 가진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를 소개 받았다.

— 제 동료인 미하일로프가, — 주바토프는 친근하게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 당신에 대해 좋은 말들을 하더군요. 그는 당신이 노동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당신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노동자 계급을 돕는 것을 제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신은 아마 제가 처음에 혁명 진영에서 이 일을 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게 곧 잘못된 방식이었음을 확신했습니다. 저는 모스크바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조직은 탄탄합니다. 그들은 자체 도서관, 강의, 상호 지원 기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노동자들을 조직했다는데 성공했다는 증거는 2월 19일에 5만 명의 노동자들이 알렉산드르 2세 기념비에 화한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도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 동시에 그는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다음 날 자신에게 오라고 초대했다.

화환에 대한 언급은 나는 노동자 자신들로부터 그것이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의 코미디일 뿐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불쾌했다. 노동자들은 해방 개혁의 불충분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바토프가 다음에 무엇을 말할지 듣고 싶어서 그에게 오겠다고 약속했다.

게오르기 가폰, 회고록 中

전술했듯 사회주의 혁명세력들[7]의 비방과 협박으로 인해 주바토프는 학자, 교수들을 가담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직자들로 눈을 돌렸다. 또한 가장 큰 문제는 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더 이상 제대로 된 수뇌부를 만들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성직자면서 수도 노동계에서 인망이 있었던 게오르기 가폰 신부는 최적의 인물이었고 1902년 그를 만나 포섭하려고 설득했다. 그러나 가폰은 이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보였고[8]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그곳의 주바톱시나 조직 간부들과 만났다. 또한 과거에 주바토프의 감독 하에 노동자 강의를 했으나 떠난 한 기자를 만났고 그에게서 이 조직이 '노동자 계급과 인텔리겐치아를 분리시켜 정치 운동을 죽이기 위해 경찰이 조직한 함정'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주바톱시나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범죄적'이며 '자칭 인민의 보호자들이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가축처럼 대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주바토프에게 이 정책이 노동 운동 참여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으며, 노동 조건을 진정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영국처럼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창설하는 것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또한 관구장주교 안토니[9]에게도 같은 내용과 여기에 성직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신용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보고서를 보냈다. 안토니는 가폰을 지지했고 이후 성직자들의 주바톱시나 참여를 막았다. 또한 수도 시장인 니콜라이 클레이겔스에게도 같은 내용을 보냈고 시장은 가폰을 지지했다. 이는 주바톱시나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폰은 주바토프에게 동참하는 척하면서 이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일단 여기에 가담하기로 한다.


2.4. 러일전쟁으로 인한 국내 상황의 변화[편집]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 정부는 러시아 안팎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해 거금을 지원해주면서 러시아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확장코자 했다. 이를 위해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긴 주러 일본공사관을 거점으로 하여 '러시아 내란 공작'을 실행, 국내외의 여러 거물 혁명가, 좌익 운동가, 불평분자등과 접촉해 그들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해주었다.[10] 일본의 지원을 시작으로 세력을 일군 이들은 정치적으로든 아니면 개인적인 대의를 품어서든 일본의 목적대로 러시아 내에서 공화주의와 노동자를 위시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

또한 주목할 점은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성향을 막론하고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은 대게 1861년의 농노제 폐지로 타격을 입은 몰락귀족, 하급귀족들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한 숫자의 노동자들도 있었다.[11]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귀족, 인텔리겐치아, 학생,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정치 세력이 부상하면서 러일전쟁에서의 열세로 권위가 떨어지고 있는 차르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1904년 8월 자유주의적 성향의 표트르 스뱌토폴크미르스키에게 내무장관직을 주고 귀족들에게 약간의 양보를 할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인텔리겐치아 집단인 해방 연합(Союз освобождения)의 주도로 11월 젬스트보 활동가 총회가 소집되어 선출식 대의제의 도입을 차르에게 요구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한 이와 연계해서 34개 도시에서 좀 더 작은 규모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같은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비슷한 내 같은 달 말에 모스크바 귀족원에서도 선출 대의제를 요구하라는 내용의 비슷한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정치 공세에 맞닥뜨린 니콜라이 2세는 모스크바 귀족원장 표트르 트루베츠코이 공작에게 "농민은 헌법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차르의 손이 묶였다는 것은 이해할 겁니다"고 전제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혁명의 위험을 증대시킨다고 경고했다. 또한 러시아 육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팟킨도 트루베츠코이 공작에게 "만약 모스크바인들이 적을 빠르게 무찌르기 위해 자신들의 훌륭한 아들들을 보내기를 원치 않는다면, 최소한 우리가 만주 들판에서 승리의 끝까지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항의했다.


3. 성당 대신 황궁으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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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22일[12] 노동자들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급료를 올려 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러시아 제국의 국가를 부르면서 눈길을 걸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 궁전으로 향했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30만 명[13]을 넘어섰는데 행렬 앞에서 이콘과 황제의 초상을 들고 나갔다. 사람들은 노동자 마르세예즈와 같은 민중가요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리고 이 행렬을 최선두에서 이끌었던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게오르기 가폰 신부였다.

훗날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공안감찰국, 즉 비밀경찰스파이였다. 분노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덜 위협적인 상태로 돌려 놓는 것이 그의 임무였는데 가폰 스스로도 과격한 혁명보다는 이런 완화된 움직임이 노동자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믿고 첩자가 되었다. 노동자의 진정한 이익과 당국의 선한 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사제라는 직위와 고결한 이상을 내세워서 노동자들의 민심을 얻어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폭동을 시위로 바꿔놓았으니 그가 임무를 완전히 저버린 것도 아닌 셈.

그러던 중 푸틸로프 기관차 공장에서 노동자 4명이 노조 회원이라는 이유로 부당해고를 당했다. 이에 대해 가폰 신부가 설립한 노동자 단체는 회사 측과 정부에 노동자들을 즉각 복직시키고 해고를 명령한 관리자를 해고하라고 요구했지만 회사 측은 노동자 단체의 요구를 무시했다. 1905년 1월 15일 노동자 600명이 푸틸로프 공장 앞에 모여 8시간 노동[14]과 최저임금 보장, 노동자 조직 인정과 더불어 자신들을 협상 대상으로 받아들일 것 등을 요구했지만 사측에서는 이마저도 무시했다.

이튿날인 1월 16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총파업을 위한 파업대책위가 구성되었고 푸틸로프사의 노동자 1만 2천 명이 파업에 나섰다. 17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였고 20일과 21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역에서 총파업이 실행되었다. 노동자 15만 명이 총파업에 동참하여 교통, 우편, 신문 등이 모두 멈추자 도시 전체가 마비되었다.[15] 노동자들의 분노가 끓어올라 폭동이 일어날 듯하자 가폰 신부는 이들을 다독여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도록 이끌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그가 행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요구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 비밀투표가 보장되는 평등한 선거권과 이를 통한 제헌의회의 설립
  • 1일 8시간 노동의 준수.
  • 하루 최저임금 1루블 지급.
  • 의료혜택 제공.

가폰은 행진을 계획한 뒤 내무장관에게 청원서 사본을 보내 사흘 뒤에 행진이 있을 것을 예고했다. 그날 차르가 민중 앞에서 요구를 들어주는 척만이라도 해도 러시아 민중들의 불만이 많이 완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동아시아만 해도 민중들의 삶이 많이 힘들어지면 왕이 거친 삼베옷을 입고 반찬가지 수도 줄이고 서양에서도 왕이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일단은 쇼맨쉽으로 달래 주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가폰도 온화한 성격을 가진 니콜라이 2세가 민중들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4.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편집]



파일:Расстрел на Дворцовой площади 9 января 1905 года.jpg

1월 22일[16] 일요일,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경찰관 두 명이 가폰 신부를 경호하며 선도하는 가운데 겨울 궁전 앞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비참한 삶에서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은 황제에게 자신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보이면서 행진하였다. 오히려 러시아 제국의 국가를 부르거나 차르와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기도나 노래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대다수 참가자가 교회에 갈 때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왔고, 어린아이를 포함한 일가족이 다 함께 나온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때 황제 일가는 전날인 토요일에 시외에 있는 차르스코예 셀로 별궁으로 휴가를 떠나 황궁을 비우고 있었고, 시위를 진압할 준비가 갖춰졌다는 보고만 전날 밤에 받았다. 황궁을 비롯한 주요 거점에는 근위연대를 비롯해 급히 배치된 1만에 달하는 군대만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 당국에서는 차르가 황궁에 없다고 발표하면 행진이 취소되리라는 안일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진은 벌어졌고, 시위대가 시내 전역에 흩어져 있고 군경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보니 군경의 대응은 지리멸렬했다. 경찰 다수는 행렬에 참가했고 장교들도 시위대를 그냥 통과시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경고도 없이 발포를 명령하는 이들도 있었다[17]. 군대가 일제사격을 가해도 군중이 바로 흩어지지 않자 카자크 기병들이 채찍과 군도를 휘두르며 사람들 속으로 돌입했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비무장 상태로 황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평화롭게 행진하고 청원하는 군중들을 어떠한 교섭도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다.

발포를 명령한 주체는 니콜라이 2세가 아닌 황제의 숙부이자 치안경찰 책임자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47년 4월 22일 ~ 1909년 2월 17일)이긴 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애초에 이 사태를 심각하게 판단하지 않았다. 가폰이 이미 예고했고 다른 황족들이 제발 황궁에 머물라고 권고했음에도 태연하게 주말이라고 휴가를 떠났고, 학살이 벌어진 그날도 일기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다행히 충직한 군인들이 이들을 물리쳤다. 하느님이시여, 이들을 보우하소서."라고 써놓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후에도 계속 파업과 소요가 발생했는데 별다른 대책 없이 주위의 대신들이 "발포하면 된다"고 하니까 검토도 안 하고 발포했다.

인민들을 범의 아가리로 행진하도록 만든 장본인인 가폰 신부는 표트르 루텐베르크(Пётр Моисеевич Рутенберг, 1879년 2월 5일 ~ 1942년 1월 3일)라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살아서 도망쳤다. 혁명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그 동료와 함께 런던으로 망명하고 사회혁명당에 가입했다.[18] 하지만 니콜라이 2세의 10월 선언 이후 1906년 러시아로 돌아왔는데 자신을 살려 준 동료 루텐베르크에게 스스로가 경찰과 연락하는 프락치임을 스스로 밝혔고 결국 분노한 사회혁명당원들에게 밧줄 교수형으로 암살당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가폰 신부도 사전에 황제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의 노력은 기울였다. 이 편지에서 가폰은 "폐하께서 노동자들을 만나서 청원을 들어 주면 노동자들은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계속 가질 것이며, 폐하의 권위는 불가침으로 남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이 편지를 무시했다.

그러다보니 가폰 신부도 피의 일요일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니콜라이 2세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품었고 그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접었다. 분노한 가폰 신부는 영국 배를 빌려 무기를 러시아에 반입해 차르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지만 배가 가라앉아 실패했고 결국 러시아 경찰과 손을 잡고 같이 피의 일요일 행진에 참여했던 루텐베르크에게 경찰의 첩자가 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고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가폰 신부가 다시 비밀경찰의 프락치가 된 이유는 자신의 어용 노조를 재건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미 러시아 노동자 사회에서 스파이, 어용 노조의 수장임이 드러난 상황에서 귀국해 세력을 회복하려다 발각당해 암살당했다. 가폰 신부의 암살을 주도한 인물인 사회혁명당의 예브노 아제프도 사실은 오흐라나에 포섭된 이중 스파이였다.[19]

그러나 가폰 신부 사후 그를 연구하던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가폰이 오흐라나에 협조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흐라나가 관리하던 요원의 목록과 카드 파일에 등재되지 않았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찰의 특별 비밀 기록 보관소에도 가폰의 비밀 활동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비밀경찰로 활동했던 요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폰이 오흐라나에게 노동자 단체를 유지하는데 후원금을 받았지만 요원이 아닌 설립자이자 선동가로서 협력하도록 초청만 받은 인물이라는 증언도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니콜라이 2세가 이때까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이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


5. 차르 체제의 일면[편집]


러시아 제국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시민의식의 발달이 뒤떨어졌고 사건이 벌어진 당시까지도 "황제는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가폰 신부의 행진도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면 "자비로우신 황제가 민중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실 것이다." 라는 순진한 기대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느님과 같이 섬겨 오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비무장 시위대를 상대로 무차별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으며 차르 숭배 관념은 단숨에 무너졌다.

당시 동쪽 변방에서 일본 제국전쟁하던 러시아 정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 되었다. 사실 쓰시마 해전 등의 압승과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당시 일본은 국력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고 화력의 열세를 군인들의 목숨으로 지불하던 상황 때문에 일본보다 훨씬 강대국이었던 러시아가 전쟁을 좀 더 끌었다면 일본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러시아 내부에서 터진 이 사건으로 러시아는 여유가 없어지고 서둘러서 전쟁을 끝내게 된 것이다.

1906년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세르게이 비테헌법제정과 의회인 두마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성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그 정도로는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여겨졌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20] 결국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편 한국 역시 이 사건의 여파가 겹쳐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빠르게 항복해 버리면서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거에 무너지고 일본이 주도권을 쥐면서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5년 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흐름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일본, 한국, 더 나아가서는 세계와 역사의 운명이 흔들린 것이었다.

파일:일본과 러시아에 압사당하는 한국.jpg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그린 정치풍자 그림엽서[21]

결국 이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 중 하나가 되어 '러시아 1차 혁명' 또는 '1905년 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침 이 사건이 일어난 1905년은 러시아 혁명의 시초로 평가받는 포템킨 반란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결국 니콜라이 2세러시아 혁명 이후 가족들과 함께 혁명군에게 처형당했다.[22][23][24]


6. 기타[편집]


  • 사건 자체는 매우 우발적인 상황에 가까웠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영상이나 사진은 없다. 가끔 돌아다니는 사진은 전부 1925년 뱌체슬라프 비스콥스키(Вячеслав Висковский) 감독이 촬영하여 발표한 소련 영화 "1월 9일"(Девятое января)의 스틸컷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 발포를 명령했던 블라디미르 대공은 이로부터 4년도 채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자 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내 마리야[25]와 3남 1녀의 자녀들[26]은 해외로 달아났다.[27] 이후 아내 마리야는 1920년에 6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블라디미르 대공의 둘째아들 키릴 대공(1876~1938)[28]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을 후원했지만 내전은 백군의 패배로 돌아갔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 소식이 알려지자 키릴은 살아남은 로마노프 일족에서 자신의 서열이 가장 높다며 황제를 자칭했다.[29] 하지만 이에 대한 다른 로마노프 황족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황제를 자칭하는 키릴에게 반대하는 황족들도 많았다.[30] 키릴 사후에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31]의 아들 니키타가 키릴의 아들 블라디미르의 황제 주장에 반대했다.

[1] 사실 1902년에 주바토프 본인이 가폰에게 자신이 혁명 활동에 투신했다고 인정했다. 반대로 1888년 5월에 모스크바 경찰청장 예브게니 유콥스키는 경찰국장 표트르 두르노보에 편지를 보내 그가 혁명당의 일원이 아니었다고 옹호했다. 이 두 증언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니 진실은 주바토프 본인만이 알 것이다.[2] 주의할 점은 노동자라 하더라도 전문기술자, 중간관리자는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여기서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지식인-노동자들을 제외한다.[3]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시절 인민주의자로서 혁명 운동에 투신했으나 혁명의 폭력과 테러에 환멸을 느끼고 열렬한 군주주의자로 전향한 인물이었다.[4] 붉은 광장에 있는 그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맞다[5] 1870년 2월 17일 ~ 1906년 4월 10일, 위키백과 문서[6] 노브고로드의 요한은 꾀를 부려 악마를 제압하고 종으로 부렸다는 민간전설이 존재한다.[7] 주로 사회민주노동당원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가폰과도 친분이 있었다.[8] 가폰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주바토프가 자신을 체포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도 가졌었다.[9] 안토니는 가폰이 아카데미를 다닐때부터 후원했고, 한편으로 당시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와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일부 음모론적인 설에서는 권력 싸움에서 패배해 실각한 비테가 다시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혼란을 부추겼으며, 가폰의 배후가 비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비테는 러시아 제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물증이 없는 음모론의 영역이지만 당시 비테가 활발한 여론전, 언론전을 펼쳐 정부를 비난하고 또한 온갖 트롤링과 이해하기 힘든 행적을 많이 보여줘서 그때 이미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다.[10] 일본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가폰 신부나 공산주의 사상가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아나키즘 사상가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폴란드(당시 프리비슬린스키) 민족주의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핀란드(당시 핀란드 대공국) 독립운동가 실리아쿠스, 소설가 막심 고리키, 그루지야(조지아)·라트비아·벨로루시 등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의 민족주의 지도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11] 노동자라 해도 고급기술직, 중간관리직은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들이며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다. 즉 애시당초 혁명을 주도하는 건 귀족이었다.[12] 그레고리력 기준.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월 9일이었다.[13] 당시 대열을 이끈 게오르기 가폰 신부의 주장. 실제로는 대략 5만에서 6만 정도로 추정된다.[14] 당시 러시아 제국 노동법상 12 ~15세의 노동만 최대 8시간으로 제한되었다.[15] ##[16] 당시까지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 1월 9일.[17] 최초의 발포는 오전 10시~11시 경에 이미 있었다고 한다.[18] 가폰 신부가 수장으로 있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제분소 노동자 조합은 애초에 비밀경찰 오흐라나에서 지원해 주던 어용 단체의 성격을 가졌다. 식료품의 부족과 높은 인플레이션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 누구나 정부에 불만을 많이 가지게 했고 이들 사이에 사회주의, 자유주의 사상이 조금씩 커가는 시기에 이를 경계한 황제와 오흐라나의 지원과 당시 러시아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던 가폰 신부에게 설립과 관리를 맡긴 것이다.[19] 아제프가 밀고한 사람 중에는 보리스 사빈코프도 있었다.[20] 참고로 이것도 일본보다 한참이나 늦었다. 일본은 이미 1889년 근대적 헌법의회제도를 시작했다. 심지어 일본의 개항이 1854년에, 메이지 유신은 1868년에 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러시아가 얼마나 뒤떨어졌는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만 따지자면 대한제국대한국 국제라든가 홍범 14조보다도 늦다. 하지만 그보다 헌법을 더 빨리 제정했던 폴란드는 결국 러시아에게 분할당했다.[21]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때리는 작은 망치메이지 덴노와 멍한 표정으로 맞는 커다란 모루니콜라이 2세,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옷차림으로 중간에 끼여 고통받는 고종이 그려져 있다.[22] 니콜라이 2세 부부와는 다르게 자녀들은 정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세간의 많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23] 본래 혁명 당시 황실 일가는 영국으로 망명하고자 하였고 실제로 영국의 조지 5세가 니콜라이 2세의 사촌이였기 때문에 망명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영국 시민들에게도 니콜라이 2세는 자국민을 학살한 폭군으로 각인되어 있었으며 섣불리 망명을 받아들였다가 이후 반 국왕 감정이 강해지면 영국 왕실의 안위도 위험했기 때문에 영국도 황실 일가의 망명을 받아들이기를 포기했다. 물론 영국의 계산 속에서 '니콜라이 2세'와 황가는 시민 '니콜라이 로마노프 씨'와 그의 가족들로 지위를 모두 박탈당할 줄만 알았지, 황실 일가가 총 맞고 죽을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니콜라이 2세 가족의 몰살 소식을 들은 조지 5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리스 왕실이 몰락하고 왕족들에게 추방령이 내려지자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 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체없이 그리스 왕족들을 받아들였다. 이때 받아들인 왕족들 중에는 장래 손녀사위가 되는 왕자가 있었으니... [24] 사실 혁명의 당위성을 위해선 소련에게 있어 실패한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는 귀족들과 함께 죽어 마땅했고 만약 총살당하지 않았어도 이후 혁명정부가 재판에서 차르에게 사형이나 추방 등의 형벌을 내렸을 것은 당연했다. 그의 가족까지 죽인 것은 볼셰비키들의 입장에서도 야만적인 행위였으나 당시 명령 체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백군이 예카테린부르크 코 앞까지 도착했단 소식을 듣자 이에 당시 적군 지휘관들은 겁을 먹고 니콜라이 2세는 물론이고 후환이 될 수 있는 황후와 공주들, 황태자와 목격자들인 하인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것으로 결정했다.[25] 본명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여왕, 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 독일 제국의 체첼리에 황태자비의 고모다.[26] 큰아들 알렉산드르는 1877년 폐렴으로 2살에 요절하였다.[27] 블라디미르 대공의 막내이자 외동딸인 옐레나 여대공(1882~1957)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3남 니콜라오스 왕자(1876~1938)와 결혼해서 그리스 왕국으로 시집간 뒤였다. 옐레나의 장녀 올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파블레 대공(페타르 2세의 당숙이자 섭정)과 결혼했고 3녀 마리나켄트 공작 조지 왕자(조지 5세의 4남)와 결혼했다.[28] 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와 결혼해 1남 2녀(블라디미르, 마리야, 키라)를 낳았다.[29] 키릴은 혁명을 지지한 이력에 더해 러시아 제국이 재건된다면 그 제국이 소련의 특징을 일부 받아들이도록 하는 안건을 구상해 '소비에트 차르'로 불렸으며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제정복고 단체 '젊은 러시아인 연합→믈라도로시 연합(Союз Младороссов)'의 지지를 받았다. 참고로 이 단체는 1930년대부터 점점 소련에 의해 좌경화되면서 공산주의와 군주정이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걸 본 키릴은 믈라도로시를 경계하게 되어 그 지도자였던 알렉산드르 카젬베크를 손절했다. 믈라도로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으며 전후 해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30] 키릴 대공은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된 후 가장 먼저 러시아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다른 황족들에게도 큰 비난을 받았고 당시 니콜라이 2세의 모후인 덴마크의 다우마도 멀쩡히 살아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황제위를 주장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로마노프 일족에게 있어 키릴의 황제 주장은 니콜라이 2세가 죽기만을 기다렸다가 황제를 참칭한 것과 진배없었다.[31] 니콜라이 1세의 4남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4남으로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야 여대공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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