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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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내전
Suomen sisällissota[1]
Finska inbördeskriget[2]
러시아 내전의 일부

파일:Punaisten_ruumiita_Kalevankankaan_hautausmaalla_Tampereen_taistelun_jälkeen_(26365985413).jpg

기간
1918년 1월 27일 ~ 5월 15일
장소
핀란드 전역
원인
독립 이후 핀란드의 좌우 이념 갈등
결과
우익 세력의 승리
영향
1차 대전 기간 중 독일 제국의 핀란드 종주권 확약,確約,
교전 세력
적군
백군
파일:적기.svg 인민위병(적위대)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소비에트 러시아
파일:핀란드 국기(1918).svg 시민위병(백위대)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파일:스웨덴 여단 깃발.svg 스웨덴 의용군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에스토니아 의용군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의용군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백군
지휘관
파일:적기.svg 쿨레르보 만네르
파일:적기.svg 알리 알토넨
파일:적기.svg 에로 하팔라이넨
파일:적기.svg 에이노 라흐야
파일:적기.svg 후고 살멜라
파일:적기.svg 베르네르 레흐티매키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미하일 스베츠니코프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게오르기 불라첼
파일:Flag_of_Finland_1918_(state).svg.png 만네르헤임 남작
파일:Flag_of_Finland_1918_(state).svg.png 에른스트 린데르
파일:Flag_of_Finland_1918_(state).svg.png 에른스트 리프스트룀
파일:Flag_of_Finland_1918_(state).svg.png 마르틴 베처
파일:Flag_of_Finland_1918_(state).svg.png 카를 프레드리크 빌카마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뤼디거 폰 데어 골츠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후고 모이러
파일:스웨덴 국기.svg 햘마르 프리셀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한스 칼름
파일:러시아 국기.svg 니콜라이 루치아노비치 포드구르스키
전력
적군
백군
파일:적기.svg 90,000여 명
(여군 2,000여 명)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10,000여 명
파일:Flag_of_Finland_1918_(state).svg.png 90,000여 명
(엽병 1,450여명)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14,000여 명
파일:스웨덴 국기.svg 1,000여 명
파일:폴란드 국기.svg 1,737명
파일:러시아 국기.svg 4,000여명
피해규모
적군
백군
파일:적기.svg
전사 5,700여 명
학살 10,000여 명
실종 1,150여 명
수용소 사망 12,500여 명
석방 직후 사망 700여 명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전사 900여 명
학살 1,600여 명
파일:Flag_of_Finland_1918_(state).svg.png
전사 3,500여 명
학살 1,650여 명
실종 46명
수용소 사망 4명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전사 500여 명
파일:스웨덴 국기.svg
전사 55명
총계 38,000여 명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적백결렬
3.2. 러시아의 개입과 초기 전황
3.3. 스웨덴의 개입과 탐페레 전투
3.4. 독일의 개입과 헬싱키 전투
3.5. 적위대의 종말과 종전
4. 전후 처리
4.1. 학살과 포로수용소
4.2. 독일의 패망과 핀란드의 재독립
4.3. 국체 논쟁과 공화국 핀란드의 건국
5. 기타
6.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1918년 1월 27일부터 5월 15일까지 핀란드에서 벌어진 내전.

러시아 제국동군연합이었던 핀란드 대공국이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인해 독립하면서 신생 핀란드의 국가주도권을 누가 잡느냐를 두고 좌우익이 벌인 내전이다. 독립 후 혼란기와 좌우익 대립,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이념 학살 등 20세기 내내 좌우익 내전에서 보이는 잔혹 행위가 모두 나타난 전쟁이었다.

3개월간의 내전 끝에 우파가 승리하여 핀란드 왕국이 성립되면서 종결되었다. 전사, 학살을 막론하고 3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이것은 당시 핀란드 인구의 1.2%에 해당했다. 전투로 죽은 사람보다 학살당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아사, 병사한 사람이 더 많다. 헬싱키 중앙역 앞에 위치한 핀란드 국립 미술관(Ateneum)의 정문과 그 너머 유리문에는 이 전쟁으로 생긴 탄흔이 아직도 남아 있다.


2. 배경[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에서 졸전을 거듭하던 러시아 제국이 1917년 2월 혁명으로 붕괴하면서 동유럽 일대에 거대한 권력공백이 발생했다. 옛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신생국들에서는 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는데[3] 핀란드 내전 역시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핀란드에서는 19세기부터 정치적 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자각운동을 이끈 것은 당연히 상류계급이었고 이들은 대개 스웨덴계 핀란드인이었다. 러시아가 핀란드를 차지하기 전에 핀란드는 수백 년 간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4] 러시아 제국도 핀란드 사회를 무리하게 뜯어고치려고 하진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이 무너질 때도 핀란드의 상류층은 여전히 스웨덴계가 많았다. 이들은 핀란드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는 페노마니아(fennomania)[5]스웨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는 스베코마니아(svecomania)[6]로 나뉘었는데 페노마니아 쪽이 수적으로 우세했다. 페노마니아는 러시아 제국에 협조해서 자치권을 찾자는 보수주의적인 타협파와 스웨덴 지배 시절 입헌된 헌법을 러시아 황제도 지켜야 한다는 호헌파로 나뉘었다. 호헌파는 스베코마니아와 함작하여 러시아 제국에 대한 준법투쟁을 이끌었다. 한편 핀란드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수입되기 시작했고 1899년 핀란드 노동당이 창당되었는데 이것이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전신이다.

알렉산드르 1세 이래 러시아 차르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핀란드를 달래기 위해 상당히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해 주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범슬라브주의의 맹주가 되면서 알렉산드르 3세부터는 더 이상 그런 민족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러시아 제국은 불균질한 다민족 제국을 단일한 "러시아인"의 국민국가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고 특히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저항이 심했다. 핀란드에서는 호헌파와 좌파가 저항의 중심이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제1혁명이 발생하고 러시아에 의회가 설치된 것에 발맞추어 핀란드에서도 신분제 의회를 철폐하고 단원제 의회로 대체됨과 동시에 동시에 보통선거권을 부여하는 의회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때 핀란드는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하여 1907년 초대 의회선거에서 정원의 10%인 19명의 여성 의원을 배출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때 사회민주당이 국민의 절반 정도의 지지를 얻었음이 확인되었고 그동안 러시아 전제정에 함께 저항했던 호헌파와 좌파의 합작이 깨지기 시작했다.

혁명이 끝나고 한숨 돌린 러시아 제국은 1908년부터 다시 핀란드 민족주의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의회 다수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노동자들을 위한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번번히 의회를 해산시켰고 우파 의원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와 아무런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기업가들은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대표할 권리를 부정했다.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기 10년도 전부터 이미 핀란드 사회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급은 이런 상황이 불만스러웠지만 사회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합법적으로 세를 넓혀가는 것에 고무되어 언젠가 자신들의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한편 우파들은 러시아에 저항하기 위해 비밀리에 독일 제국과 접촉하여 독일에 장병들을 파견해 독일의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했다(엽병운동). 이때 핀란드의 주요 정당은 다음과 같았다.

  • 핀란드당(SP) - 우파. 보수주의. 핀란드어파. 타협파.[7]
  • 청년 핀란드당(NSP) - 중도우파. 자유주의/보수주의. 핀란드어파. 호헌파.[8]
  • 스웨덴인당(RKP) - 우파. 보수주의. 스웨덴어파. 호헌파.[9][10]
  • 농업동맹(ML) - 중도~중도우파. 농본주의. 핀란드어파. 호헌파.[11]
  • 사회민주당(SDP) - 좌파. 사회주의.[12]


3. 전개[편집]



3.1. 적백결렬[편집]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이로써 그해 3월부터 핀란드는 그동안 러시아의 방해로 유명무실화되었던 선진적인 의회제도를 제대로 굴려 볼 기회를 얻었다. 1916년 의회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단독으로 200석 중 103석을 확보해 절대다수석을 획득했고 사민당의 오스카리 토코이원로원장(정부수반)으로 취임했다. 토코이 원로원은 러시아로부터 핀란드의 군사권과 외교권을 제외한 모든 행정권력을 회수하는, 즉 러시아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추진하는 "권력법"을 발의했다. 권력법은 사민당이 절대다수인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하지만 우파들은 여기에 반발했는데 권력법에서는 국가의 최고권력기관을 원로원(행정부)이 아니라 의회로 삼는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사민당이 국민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던 상황에서 의회의 정부에 대한 우위가 확실해지면 좌파적 정책에 의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될 것이 자명했다.

한편 그해 봄부터는 농촌 지역에서 농업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혹한 기후와 스웨덴 지배의 여파로 핀란드에는 농노제는 없었지만 대부분의 토지를 대지주들이 소유하고 농업노동자, 즉 머슴들이 거기서 농사를 짓곤 했다. 머슴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지만 지주들은 이것을 거부했다. 이때 지주들이 자위용 민병대를 모집한 것이 핀란드 백위대의 시작이다. 농업노동자들의 파업의 결과 도시 지역에서는 식량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도시 노동자들은 이것이 지주들, 우파들의 탐욕의 증거라고 여겼다. 이런 갈등에 쐐기를 박은 것은 핀란드 우파들이 좌파를 무력화하기 위해 러시아 공화국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핀란드 의회를 해산시켜 줄 것을 사주한 것이다. 케렌스키는 핀란드에 병력을 파견했고 의회 해산 이후 새로 치러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92석을 확보하면서 절대다수를 상실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합법노선, 의회정치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여기고 총파업을 일으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처럼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할 것을 사회민주당에 요구했다.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의 분노를 달랠 수 없었고 기호지세로 끌려가게 되었다. 한편 1917년 12월 핀란드 우파들의 아이돌이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귀국했다. 새 원로원장이 된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는 1918년 1월 15일 우파 민병대가 핀란드 국군이며 만네르헤임이 그 총사령관이라고 선언했다. 뒤이어 25일에는 좌파 민병대, 즉 적위대에 대한 교전명령이 내려졌다. 좌파 민병대, 적위대는 앉아서 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바로 다음날인 26일 헬싱키 노동자회관 첨탑에 붉은 등을 내걸고 혁명을 선언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3.2. 러시아의 개입과 초기 전황[편집]


파일:FinnishCivilWarMapBegin.svg.png

내전 시작 당시의 판도. 빨간색이 적군, 하얀색이 백군이다.

적군(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이 지배하던 영토는 작았지만 그 지배 영토가 핀란드의 공업지대가 몰려 있던 남부해안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딱히 불리할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수도인 헬싱키가 적군의 수중에 있었다. 백군은 대지주 출신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지배 영토는 적군의 3~4배에 달했지만 중부와 북부에 분포하고 있었으므로 경제적으로는 딱히 유리할 것이 없었다. 즉 러시아 내전의 적군-백군의 상황과 매우 비슷했다.

병력은 적백 모두 8만~9만으로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적군은 대부분이 지원자로 구성되었고 백군은 1만 5천명 정도가 지원자였다. 나머지는 징병으로 동원된 군사였다. 적군의 가장 큰 지원 동기는 경제적 요인이었다. 돈도 없고 식량도 없으니 밥이라도 먹게 군대 가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2천명은 여자였다.

적군-백군 모두 14~17세의 소년병을 썼다. 나중에 핀란드의 대통령이 되는 우르호 칼레바 케코넨도 백군 소속 소년병으로 내전에 참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시기에 소년병은 그리 드물지 않았고 오히려 100% 성인으로만 구성된 군대가 더 드물었다. 그러나 핀란드의 경우 소년병은 거의 지원병이었고 이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 자원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사병들의 무장은 적군이 더 나았고 장교들의 수준은 백군이 더 나았다. 병력이 비슷하다는 걸 고려하면 똑같다고 봐도 되었다.

적군은 수도인 헬싱키를 장악하고 먼저 공세를 펼쳐서 전쟁의 초기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장교의 질이 떨어지던 적군은 추가 공세를 실시하지 않고 이렇게 확보한 주도권을 살리지 못했다. 그나마 그 장교도 투표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적정 수준이 보장되지도 않았고 병사들에 대한 장악력도 좋지 않았다. 사병들도 제대로 된 군사훈련은 받지 못했고 규율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초반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를 제외한 적군의 승리 대부분은 러시아 적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종합적으로 적군은 8~9만의 핀란드군, 7천~1만의 러시아 적군으로 이뤄져 있었다.

백군에겐 적군이 절대 가질 수 없는 두 가지 이점이 있었는데 바로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과 스웨덴에서 지원해 준 84명의 장교로부터 나오는 리더십과 1450명에 이르는 엽병부대였다. 앞서 핀란드 우파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비밀리에 독일에 지원자를 파견해 군사훈련을 받은 엽병운동의 성과가 바로 이 부대였다. 핀란드 엽병들은 1915~17년에 독일에서 훈련받았고 동부전선에서 경험을 쌓을대로 쌓은 병사들이었다. 이 병사들은 2월 25일 핀란드에 지원군으로 도착했다. 엽병들은 싸우기도 잘 싸웠지만 다른 병사들을 장악할 수 있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능력이 있었다. 사실 백군이나 적군이나 훈련 수준은 비슷했고 규율도 좋지 않았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선 경험 많은 베테랑 병사가 필수였고 이 부대는 이런 역할을 해줄 수 있었다.

백군의 약점은 병사들의 사기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중부-북부에 농토를 갖고 있었던 대지주 휘하 머슴들을 징집한 것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총을 뒤로 돌리지 않을까 내내 노심초사해야만 했다. 물론 이는 엽병부대의 통제력으로 완화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위험이 사라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백군은 적군을 상대로한 흑색선전에 모든 여력을 기울였다. 원래 문서에는 백군이 적군을 러시아 적군의 괴뢰라 주장한게 근거없는 빨갱이 몰이라고 매도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핀란드 적군은 러시아 적군과 밀접한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고 적지 않은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전 러시아와 핀란드의 관계와 이후 소련이 주변국들, 특히 핀란드에 보인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침략 행보를 볼때 핀란드 적군이 외세의 침략을 끌어들이는 민족 반역자라는 프레임을 허구로 치부하긴 어려운 것.

물론 핀란드라는 국가에 원래 정통성이나 민족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두 핀란드 극우가 독립을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개념일 뿐이고 원래 핀란드는 러시아의 일부였을 뿐이라 여기는 세력들에겐 이는 단순히 '빨갱이 몰이'일 뿐이다.

3.3. 스웨덴의 개입과 탐페레 전투[편집]


1918년 백군 사령관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카렐리아 지역의 주요 도시인 비푸리와 내륙 피르칸마 지역의 핵심 공업지대인 탐페레에 대한 공세를 검토했다. 비푸리 공격의 경우 점령 시 가질 수 있는 전략점 이점은 매우 컸지만 백군의 전술적 열세와 적군의 방어-반격을 생각할 때 너무 위험했다. 결국 만네르헤임은 탐페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3월 16일 탐페레에서 북서쪽으로 65km 떨어진 지역에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백군 전체가 모든 전선에서 전진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적군은 당황하여 패닉에 빠졌다. 오직 몇 개 부대만 방어에 총력을 다해서 백군의 진격을 조금 늦출 뿐이었다. 백군은 3월 24일 적군의 연결을 탐페레 남쪽에서 차단하고 25일 탐페레를 포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가전을 통해서 도시를 점령하는 것뿐이었다.

탐페레에서 16000명의 백군과 14000명의 적군이 전투에 참가했다. 핀란드에서 벌어진 첫번째 시가전이었고 이후 헬싱키와 비푸리에서도 시가전이 벌어쟜다. 본격적인 전투는 3월 28일부터 벌어졌다. 시가전이다보니 전투는 길어졌고 백군의 일부는 50%가 넘는 손실을 보기도 했다. 이에 백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4월 3일부터 총력 공세를 펼쳤다. 백군은 집 하나하나, 도로 하나 하나를 점거해 가면서 전투를 치렀다. 적군은 마을의 서쪽 절반을 4월 5일까지 잃었다. 마지막으로 적군이 점거하던 거점은 탐페레 시청이었고 이것이 함락되자 4월 6일 퓌니키(Pyynikki)와 피스팔라(Pispala)지역의 적군이 모두 항복했다.

남아 있던 적군은 수세에 몰렸지만 상당히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만네르헤임은 비푸리 공략에 쓰려고 남겨 두었던 사냥꾼 연대를 전투에 투입했다. 3월엔 러시아군도 이곳에 투입되었고 독일군 본대도 여기에서 전투를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탐페레 전투는 핀란드 내전의 가장 격렬한 전투가 됐다. 백군은 엽병 50명을 비롯해 7~900명의 사망자를 냈고 이는 핀란드 내전 동안 가장 많은 엽병이 죽은 전투였다. 적군은 1000~1500명의 군사를 잃었고 포로로 11000~12000명이 잡혔다. 71명의 민간인들이 오폭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도시의 동쪽에 위치한 건물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탐페레 전투 이후 백군은 비푸리로 진격했다. 비푸리 전투에 백군은 15000명의 적군을 상대로 185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전투결과 5~800명의 적군이 사망했고 12000~1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3.4. 독일의 개입과 헬싱키 전투[편집]


핀란드 민족주의자들은 1917년 핀란드가 러시아와 대립할 때 독일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진행 중이던 강화조약에 방해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독일 제국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1918년 2월 10일 레프 트로츠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을 파토낸 후[13] 독일의 태도는 급변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려고 한 독일은 "도움 요청"을 승낙하고 2월 13일 핀란드 백군을 위한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독일은 2월 18일 러시아를 공격하기 시작해서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폴란드발트 3국 등 동유럽 국가들 전체를 독일 영토로 공인한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핀란드에 대한 군사 계획을 변경하지 않고 백군을 계속 지원했다.

독일의 군대는 3월 5일 도착했다. 1만이 넘는 독일군은 4월 3일부터 헬싱키를 서쪽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중 3천이 다른 도시인 퀴멘락소 지역의 로비사(Loviisa)를 공격했다. 독일군 주력은 4월 12~13일 경에 헬싱키 서부에 진입했다. 3천의 병력은 4월 19일 라흐티를 공격하고 점령해서 적군의 동쪽과 서쪽으로 양단하는 데 성공했다. 1만 주력군은 4월 21~22일에 헬싱키를 완전 점령하고 리히매키(Riihimäki)와 해멘린나를 정복했다. 이 전쟁에서 독일군소련군과 견주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예도와 사기를 자랑했다.

4월 11일 독일군과 적군 사이에 강화 논의가 오고간 후 핀란드의 수도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안개가 깔려 있던 새벽 5시 2~3천명의 독일군이 북서쪽에서 공세를 시도했다. 적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던 독일군은 도시의 서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때 8~9천명의 적군이 도시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적군 중에서도 최정예였다. 하지만 대다수는 주전선이 형성된 북쪽에서 방어선을 형성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주요 방어거점은 노동자 광장, 철도역과 사령부가 위치해 있던 스몰리나(러시아 정부가 사용하던 공관)였다. 4월 12일 밤엔 독일군이 서부의 모든 도로와 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내전 동안 헬싱키에 숨어 있었던 백군 몇몇이 집에서 나와 독일군과 전투를 함께했다.

4월 13일엔 독일군이 스몰리나와 시장 광장을 점령했다. 전투 후반부에 독일쪽에 늑대 여단이 가세했는데 이 부대는 북쪽에서 헬싱키 동부로 밀고 들어가는 공세를 시도했다. 독일 포병의 포격으로 노동자 광장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와 함께 공산당이 꿈꾸던 혁명은 사라졌다. 헬싱키 동부는 4월 13일 정오즈음에 독일군이 점령했고 칼리오 교회에 백군 깃발이 꽂혔다.

이 시점에서 실질적인 전투는 종결되었지만 남아 있던 몇몇 적군의 항전은 계속됐다. 이 전투에서 1~200명의 독일군과 20명의 백군이 죽었고, 300명의 적군이 사망했다. 약 8000명의 적군이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은 4월 14일 거리에서 승리 행진을 벌였다.


3.5. 적위대의 종말과 종전[편집]


헬싱키 전투에서 패배한 적군 수뇌부 인민대표단은 병사들을 나몰라라 하며 4월 25일 전장에서 탈출했다. 병사들 중 일부는 그들을 따라 페트로그라드로 갔지만 대부분은 끝까지 백군에 맞서 싸우다 궤멸되었다. 최후의 적위대 수천 명과 적군에 동조한 민간인 2만 여명이 4월 말에서 5월 초에 거쳐 러시아 방향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4월 28일 해메 남부 쉬랜타카에서 적위대는 일시적으로 독일군을 패퇴시켰다. 독일군의 전열을 뚫은 예봉에는 놀랍게도 여성 적위대원들이 서 있었다. 독일 사단장 폰 데어 골츠 백작은 "이 핀란드 여자들만큼 맹렬하게 공격해오는 프랑스 남자를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핀란드 여자들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 프랑스 남자를 까는 거 같지만 일단 넘어가자

하지만 결국 그들은 5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밤에 라흐티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되었고 3만 명 안팎이 포로로 잡혔다. 5월 9일, 핀란드 백군은 적법한 재판도 없이 이들 중 500명을 숲속으로 끌고가 기관총을 난사해 즉결처형했다. 적위대 초대 총사령 알리 알토넨도 여기서 살해되었다. 처형된 사람 중 200여명은 여성 적위대원이었는데 남자들은 소대장 이상 간부급만 총살당했지만 여자들은 간부급이 아닌 단순참여자라도 전투원으로 판단되면 모두 살해되었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백군은 그 기준을 바지를 입었는지, 머리카락을 숏컷을 했는지 여부로 판단했다. 그 자리에서 살해되지 않은 사람들도 포로수용소에서 학대를 당한 끝에 만 명 이상이 죽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여성들은 일단 모두 강간당했고 이후에도 굶어죽지 않기 위해 포로수용소 위병들에게 성상납을 해야 했다. 핀란드 백군의 이런 잔혹행위에는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을 비정상으로 이해하고 사회를 위해 그 비정상적인 존재들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우생학적 관념이 개입되어 있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던 독일군은 핀란드 백군의 살육을 제지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강간은 독일군도 똑같이 저질렀다.(...)

한편 남서쪽에서는 에로 하팔라이넨[14] 등 극소수 지도부가 핀란드 동부의 중심지 비푸리에서 병사들과 함께 극렬히 저항했지만 그 비푸리마저 4월 29일 떨어지면서 적군의 대형 거점은 모두 함락되었다. 하팔라이넨도 5월 1일 모터보트를 타고 러시아로 도피했다. 적군의 수중에 있던 핀란드 남서부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코우볼라(Kouvola)와 코트카(Kotka)는 5월 5일 항복했다. 카리알라 지협의 러시아 해안포대를 백군이 5월 15일 점령하면서 적군과의 평화협상 뭐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적군 궤멸로 내전이 종료되었다. 만네르헤임과 백군은 5월 16일 헬싱키에서 군대 행진을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4. 전후 처리[편집]



4.1. 학살과 포로수용소[편집]


내전기에 백군과 적군은 서로가 '적색테러'와 '백색테러'라고 불리는 테러의 가해자였다.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부터 핀란드인들의 러시아 경찰에 대한 테러는 시작됐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3월엔 러시아 경찰이 6~7명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 경찰은 27명의 핀란드인을 죽였다.

러시아 제국의 권력이 무력화된 이후부터는 1918년의 전쟁 동안 두 가지 종류의 테러가 존재했다. 군사적으로 철저히 계산된 것과 개인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복수가 그것이다. 양측 모두에서 테러를 계획하고 이를 주문했다. 입증된 것만 따져봐도 적색테러의 3분의 1, 백색테러의 대부분이 중앙에서 주도한 것이었다. 내전 시작 시기에 백군 정부와 적군 정부 모두 공식적으로는 테러에 반대했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이 테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테러의 주된 목표는 상대의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다른 효과는 상대측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충격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양쪽 모두 군대의 정예도가 떨어지다 보니 이런 공포에 강하지 않았고 테러는 이런 병사들의 사기를 와해시키는 데 아주 적절했다. 적군과 백군 모두 상대의 테러 행위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프로파간다를 사용했다.

핀란드 국가기록원 자료를 따르면 핀란드 내전기 사망자 통계는 다음과 같다.

사망 원인
적군
백군
그외

작전 중 사망
5,199
3,414
790
9,403
학살 또는 피살
7,370
1,424
926
9,720
포로수용소 학대로 사망
11,652
4
1,790
13,446
수용소 석방 이후 후유증으로 사망
607

6
613
실종자
1,767
46
380
2,193
그 외
443
291
531
1,265

27,038
5,179
4,423
36,640

백색테러가 훨씬 더 많은 것에서 보듯 이것은 내전에서 승리한 쪽이 행하는 정치적 인종청소(폴리사이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백색테러로 죽은 적군 사망자 수는 몇 명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 백군에서 포로를 불법적으로 즉결처형하고 "자위적"으로 죽였다고 주장한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특히 적군에 가담한 여성 노동자 2,000여명은 남자 포로들보다 더욱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핀란드 우파의 보수주의자들은 여성이 바지를 입고 총을 들었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고(또는 않았고) 그들을 핀란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지워 버려야 하는 병균 같은 것으로 선전했다. 여성 적위대원들은 거의 무조건 강간당한 뒤 불법적으로 처형되었다. 이것은 남자 포로들은 분대장급 이상이 주로 처형되었지만 여자 포로들은 졸병까지 모조리 처형되었다는 사실로 방증된다.

내전 중 80,000여명의 적군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은 포로수용소에 집단으로 수용되었다. 내전으로 인해 식량사정이 악화된 상황에서 포로들에게 돌아갈 식량은 없었다. 심지어 스페인 독감까지 돌면서 11,000 여명 이상이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좌파 성향으로 내전을 겪은 세대에게 포로수용소는 끔찍한 트라우마가 되었고 이 사람들은 이후 좌파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되었다.

4.2. 독일의 패망과 핀란드의 재독립[편집]


승리한 백군은 재분열되었다. 한쪽은 왕당파였고 다른 한쪽은 공화파였다. 왕당파는 옛 협조파인 핀란드당, 그리고 옛 호헌파인 청년 핀란드당 당내 우파인 제비파, 그리고 스웨덴계로 이루어졌다. 공화파는 청년 핀란드당 당내 좌파인 참새파와 농업동맹으로 이루어졌다.

1918년 5월 독일군의 감시 하에 왕당파 일색의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원로원이 성립되었다. 적군의 봉기에 연루된 사람은 모조리 제명되어 좌파는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독일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핀란드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았다. 만네르헤임 대장은 내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독일은 겨우 매듭지어 놓은 동부전선을 다시 들쑤실 마음이 없었고 독일의 영향을 받던 원로원은 만네르헤임의 제안을 기각했다. 자기 제안이 기각되자 빈정이 상한 만네르헤임은 5월 25일 총사령관직을 내던지고 낙향했다.

10월 9일 의회와 원로원은 독일의 압력에 의해 빌헬름 2세의 매제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카셀 공자를 독일의 보호국핀란드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했다. 겨우 러시아로부터 독립했더니 이번에는 독일에 종속될 위기에 빠진 것이다.[15] 하지만 독일 제국이 11월 11일 패망하면서 핀란드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12월 16일 핀란드에서 철수했고 프리드리히 폰 헤센카셀 공자는 왕위를 포기하며 핀란드는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4.3. 국체 논쟁과 공화국 핀란드의 건국[편집]


비슷한 시기에 스빈후부드가 섭정에서 물러나고 뒤이어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섭정이 되었다. 왕당파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만네르헤임은 이를 거부했다.

또 내전으로 많은 좌파 인사들이 학살당하거나 소련으로 망명하고 남은 적군 가담자들이 총선 참가를 금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919년 총선에서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38%의 득표율을 보이는 등[16] 적지 않은 세력을 보였으며 사회민주당과 같은 좌파들을 비롯한 중도, 리버럴 등 다수 세력(의회 의석의 75% 정도)이 공화국을 원하고 있었다.

결국 핀란드 의회는 1919년에 공화국 체제와 이원집정부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채택했고 오늘날의 핀란드 공화국이 세워졌다.


5. 기타[편집]


  • 핀란드인에게 내전에 관한 대화는 상당한 터부에 해당한다. 불과 2-3 세대 전의 조상들이 둘로 갈라져 싸웠기 때문이다. 할아버지/할머니가 내전 때 적군이었는지 백군이었는지, 직접 싸우지는 않았어도 어느 편이었는지는 그들에게 먼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대화 상대인 핀란드인의 집안 내력이 백군파였는지 적군파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전에 관한 정치적 판단을 이야기했는데[17] 상대의 집안이 자신이 비판한 쪽이었다면 그야말로 갑분싸가 될 수도 있다. 6.25 전쟁이 어떻게든 끝난 한반도를 상상해본다면 바로 납득되는 내용이다.

  • 관련 영화로는 4월의 눈물(käsky)이 있다. 코로나19 이전에 핀에어를 타면 볼 수 있었다.


6.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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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오멘 시샐리소타[2] 핀스카 인뵈르데스크리겟[3] 예컨대 라트비아에스토니아에서는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자 vs. 소련에 합치고 싶어하는 공산주의자 vs. 기존 기득권층이었던 발트 독일인 귀족의 3파전이 벌어졌다.[4] 그냥 핀란드가 스웨덴의 일부였다. 애초에 핀란드는 스웨덴의 내지(landsdelar)로 여겨졌으며 오히려 현재의 스코네, 할란드, 블레킹에, 보후슬랜덴마크로부터 빼앗은 영토가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등과 더불어 외지(Svenska besittningar)로 취급받았다.[5] 스웨덴어로 핀란드어파를 의미한다. 핀란드어로는 수오멘미엘리쉬스(suomenmielisyys).[6] 스웨덴어파. 핀란드어로는 루오찰라이수슬리케(ruotsalaisuusliike).[7] 보수주의가 주류이지만 일부는 자유주의 성향을 보였다. 국민연합당으로 대부분 흡수되며,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국민진보당으로 갔다.[8] 당내 좌파는 자유주의/공화정/친협상국 성향이며 당내 우파는 보수주의/군주정/친중앙국 성향을 보였다. 자유주의 성향 공화파는 국민진보당을 만들었고, 보수주의 성향 왕당파는 국민연합당을 만들었다.[9] 스웨덴계 특권층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편이었다.[10] 스웨덴계 핀란드인들은 핀란드에서 귀족과 지주의 자리를 많이 차지했고, 본국인 스웨덴도 당시에는 보수적이었다. 내전때도 (의회에 적극적으로 간섭해서 입헌군주제를 방해한) 구스타프 5세 하의 스웨덴은 적극적으로 백군을 도왔으며,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이 진보적이 된 것은 독일제국의 붕괴 이후이다. 나중에 이 당은 본국인 스웨덴이 좌경화함에 따라서 자유주의 정당으로 변모한다.[11] 지주와 중소농민들을 지지기반으로 가졌다. 다만 당수 알키오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 당 역시도 백군에 주도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12] 당내 좌파는 후에 적군을 결성하였고, 당내 우파는 중립을 지켰다. 당내 좌파가 공산당을 결성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로 도망친 후에는, 당내 우파가 주도권을 잡아서 현재의 사회민주당이 된다.[13] 그 유명한 "세계혁명이 완수되면 우리는 성명서 몇 개만 발표하고 나서 이따위 곳(외무부)은 폐지해 버릴 것" 드립이 이 때 나왔다.[14] 단체협약 개념을 고안한 사람이다. 소련 도피 이후 핀란드 공산당에 참여했지만 1935년 민족주의자라는 구실로 제명당하고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총살되었다.[15] 오해의 소지가 있어 덧붙이자면 서양에서 신생 중소국들이 국왕을 '수입'해 오는 일은 꽤 흔했던 일이다. 대표적인 예시만 해도 독일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조에서 국왕을 데려온 그리스 왕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이 있다. 이 중 루마니아 왕국은 독일 출신 국왕이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와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국익에 의거하여 동맹국에 선전포고하는 결정을 내려 가문 호적에서 파이기까지 했다. 당시의 핀란드가 독일의 속국이 되었다는 건 독일인을 국왕으로 들여왔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의회와 원로원이 독일의 압력에 굴종했기 때문이다.[16] 좌파라고 하더라도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내전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여전히 사회민주당에 당적을 두고 총선에 참가할 수 있었다.[17] 먼저 탈법을 저지른 우파가 나빴다... 거나 민중들의 모험주의를 통제 못한 좌파가 나빴다... 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