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 브루넬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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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파일:브루넬레스키.jpg

본명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출생
1377년 ?월 ?일
피렌체
사망
1446년 4월 15일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직업
건축가, 조각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의 예술가이자, 르네상스 건축의 선구자다. 대표 작품에는 두오모 돔, 오스페달레 델리 이노첸티, 성 로렌초 성당, 성 스피리토 성당이 있다.


2. 생애[편집]


그의 유년 시절의 기록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증인인 아버지와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브루넬레스키는 어려서부터 철저히 교육을 받았으나, 그는 예술 분야에 더 흥미를 가져했다. 그는 금 세공사로 직업을 시작했다.

1401년, 피렌체에서 산 조반니 세례당을 짓기로 했고, 그곳의 낡은 문을 청동문으로 교체하기 위해 청동문을 제작하는 공모전이 열렸다. 브루넬레스키는 이것에 참여해 결국 로렌초 기베르티와 함께 결승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기베르티의 작품을 그의 작품보다 높게 평가하여 기베르티의 작품을 당선시키고[1] 그에게는 공동 작업자를 맡아줄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공동 작업자도 상당한 양의 금액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 작업자를 거부했고, 조각가임을 포기하고 로마로 가 중세 시대 때 파괴당했던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도나텔로와 함께 몇 년 동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유적을 파헤치면서 도나텔로에게 많은 조언을 주었는데, 도나텔로가 자신이 예수의 모습을 조각한 것을 보여주는데, 브루넬레스키는 이를 농부 같다며 혹평한다. 도나텔로는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예수상을 감상하며 그저 인체의 모습보다는 내면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고, 청동 <다비드 상>을 만들었다.

16년 뒤 건축학에 대해 자세히 공부한 그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거대 돔 건축에 도전했다. 쿠폴라[2]의 건설은 피렌체의 자부심으로 추진되었지만 100년이 넘도록 짓지 못해 모든 시민의 자괴감이 되어버렸다. 그는 당시 기술로는 쌓을 수 없었던 지름이 45m인 돔[3]을 건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브루넬레스키는 설계도를 제출하지 않고 오직 말로만 자신의 건축법을 설명했다. 날달걀을 대리석에 내리쳐 세워 돔 건축의 성공을 장담했다. 심사위원들은 다른 제안들은 현실성이 없었기에 그의 제안을 선택했다.

그는 고대 로마 유적을 연구하며 판테온에 대해 특별히 자세하게 연구했는데, 두오모 성당 건설은 이 건축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도움을 받아 건설을 하려 할 때, 심사위원들은 당시 최고의 예술가였던 기베르티와 공동 작업을 하여 견제와 감독을 하도록 했다. 기베르티는 조각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건축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는 것을 안 브루넬레스키는 꾀병을 부려 기베르티에게 건설을 맡겨 문제가 생기게 한 후 기베르티를 공사에서 배제했다. 16년 후, 브루넬레스키는 그 돔을 지었다. 돔의 구조는 이중 돔 형식이고, 벽돌을 헤링본 패턴으로 쌓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게 했다.

1446년 브루넬레스키가 죽은 후, 그는 두오모 성당의 자신이 만든 쿠폴라 정중앙의 아래 바닥에 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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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베르티가 제작한 이 청동문은 처음엔 동쪽 문에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북쪽 문에도 추가로 제작하였는데, 훗날 미켈란젤로가 이것을 보고 "천국의 문"이라고 격찬한 것이 나중엔 정식 명칭처럼 굳어지게 된다.[2] 둥근 돔의 이탈리아어[3] 작업 발판만 나무 700그루 필요, 벽돌은 약 2만 5000톤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