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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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노스 왕조 5대 국왕
필리포스 5세
Φίλιππος | Philip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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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
Φίλιππος
출생
기원전 238년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사망
기원전 179년
마케도니아 왕국 암피폴리스
재위 기간
마케도니아 왕국
바실레우스
기원전 221년 ~ 기원전 179년




1. 개요[편집]


안티고노스 왕조 제6대 왕. 기원전 221년부터 179년까지 40여 년 동안 마케도니아를 통치한 인물. 에게해를 망라하는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알렉산드로스 3세와 비견되었으며,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별명을 얻었다.[1] 마케도니아판 안티오코스 3세라 평가할 수 있다.[2]

2. 생애[편집]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와 크리세이스의 아들로 기원전 229년에 아버지인 데메트리오스가 죽었을 당시 필리포스의 나이는 9살이었다. 때문에 그의 사촌인 안티고노스 3세 도손이 데메트리오스의 왕위를 계승하고 필리포스의 섭정으로 마케도니아를 통치하다가 도손이 죽은 기원전 221년에 필리포스 5세는 17세의 나이로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필리포스가 즉위할 당시 그리스는 아이톨리아 동맹아카이아 동맹이 대립하고 일리리아인들이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를 공격하거나 다르다니아인들이 마케도니아를 침공하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를 침공한 다르다니아인들을 격퇴하고 아카이아 연맹의 지도자 아라투스를 지원하고자 그리스 동맹군을 코린토스에 집결시킨 뒤, 아이톨리아 연맹, 스파르타, 엘리스와 전쟁을 벌였다. (아이톨리아 전쟁)


2.1.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편집]


이 무렵, 카르타고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와 전쟁을 벌이자 제2차 일리리아 전쟁에서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패퇴한 데메트리우스가 필리포스 5세에게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3] 이에 아이톨리아 연맹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필리포스는 100척의 갤리선을 건조하고 바다를 통해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를 공격한다. 필리포스는 오리쿰을 함락시키고 아폴로니아를 포위하였지만 오리쿰을 탈환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의 기습으로 큰 손실을 입고 철수한다.

로마는 아이톨리아 연맹, 페르가몬, 스파르타를 동맹으로 끌어들였으나 필리포스는 아폴로니아, 디말레, 코르키라를 탈환하였고 필리포스의 동맹인 아카이아 연맹이 아이톨리아 연맹과 스파르타를 격퇴하였다. 아이톨리아 연맹과 강화를 맺은 필리포스는 그가 한니발을 지원하는 것을 저지하는 목적을 달성한 로마의 강화 제안을 받아들여 마케도니아가 일리리아의 지배권을 얻는 조건으로 포이니케 평화 조약을 맺고 로도스와 전쟁을 벌인다.


2.2. 에게 해 전쟁[편집]


필리포스가 로도스를 공격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다만, 헤라클레이데스가 로도스에서 파괴 공작을 벌였고 비슷한 시기에 마케도니아의 5명의 중신들이 필리포스에게 숙청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필리포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 에게 해 방면으로 세력확장을 꾀한 듯 하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동맹 관계에 있었고 안티고노스 2세 때부터 시리아 전쟁에 함대를 지원하는 등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 안티고노스 2세가 코스 해전에서 이집트 해군에게 패배한 후 동지중해의 제해권은 이집트가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필리포스가 마케도니아의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면 이집트가 약해지고 본국의 후방이 안전된 상황에서 이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어쨋든 전쟁을 결심한 필리포스는 아이톨리아 연맹에 속한 칼케돈과 리시마케이아를 연맹에서 탈퇴시킨 뒤, 그 두 도시를 점령하였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키오스에서 한 파벌이 비티니아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비티니아의 왕 프루시아스 1세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키오스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필리포스와 아이톨리아 연맹의 평화 조약을 위반한 행위였고 마케도니아에 종속된 그리스인들은 필리포스에게 깊은 적개심을 품게 된다. 특히 선왕 안티고노스 도손이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온건한 외교 관계를 구축한 것과 달리 필리포스의 행동은 명백한 침략 행위였기 때문에 로도스와 페르가몬은 키오스의 주민들이 노예로 전락하자 65척의 함선을 건조하여 필리포스와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기원전 201년 5월, 필리포스는 원래 이집트령이었던 사모스를 점령하고 키오스 섬 근처에서 로도스, 페르가몬의 연합 함대와 조우하였다. 키오스 섬에서 공성전을 벌이고 있던 마케도니아군은 포위된 형국이었고 이에 필리포스는 사모스로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연합 함대에게 발각되면서 전투가 불가피해진다.

마케도니아 함대는 50여 척, 페르가몬과 로도스 함대는 80여 척으로 수적으로는 열세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선두에서 마케도니아 기함을 격파한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가 패주하는 마케도니아 함대를 너무 멀리 추격하다가 전선을 이탈했고 마케도니아군은 연합 함대에 도선하여 선상 백병전을 벌였다. 결국 로도스 제독 테오필리스코스가 부상을 당하고 아탈루스의 기함이 나포되자 필리포스는 혼란에 빠진 연합 함대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퇴각한다.

6월 무렵, 필리포스는 키오스 해역을 빠져나가 페르가몬을 침공하였다. 아탈루스는 청야전술로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을 버텼고 필리포스는 페르가몬 근처에 있던 니케포로스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괴한 뒤, 당시 소아시아의 총독으로 주재하고 있던 셀레우코스의 제욱시스에게 보급을 지원받는다.

기원전 200년, 사로니코스 섬에 정박한 페르가몬과 로도스 연합 함대는 로마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사절단이 피라이우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는다. 아탈루스 왕은 직접 아티카로 건너가 레피두스와 만났고 아탈루스를 위시한 연합 사절단과 로마 사절단은 아테네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로마는 마케도니아에게 그 어떤 그리스 도시국가와 전쟁을 하지 말 것과 페르가몬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면 로마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필리포스는 필로클레스가 이끄는 2천의 보병과 기병 200명을 보내 아티카를 공격하는 것으로 답한 뒤, 자신에 대한 공격 거점이 될 수 있는 이집트령 트라키아 남부를 확보하고 엘라이우스, 칼리폴리스 등의 항복을 받아낸다. 하지만 로마의 참전이 기정 사실화되자 마케도니아의 우방국인 아카이아 연맹은 필리포스와 로도스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아직 로도스에 머무르고 있던 로마 사절단은 아카이아 연맹에 의한 중재 시도를 물리쳤고 이로써 마케도니아의 전성기에 종지부를 찍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한다.


2.3.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편집]


필리포스가 아카르나니아인들의 개전을 승인하면서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필리포스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아티카를 약탈하였다. 로마는 여러 동맹국과 함께 마케도니아를 사방에서 공격하는 전략을 취했으나 다르다니아인들과 아이톨리아 연맹을 격퇴한 필리포스는 아오이 스테나에서 연합의 주력군인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로마군에게 승부수를 던진다. 아오이 스테나의 계곡으로 통하는 정면은 좁고 측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싸우기에 최적화된 지형이었다. 하지만 에페이로스 연맹이 로마에게 마케도니아의 후방으로 통하는 길목을 알려주면서 아오이 스테나 전투에서 패배한 뒤 테살리아로 퇴각한 필리포스는 동맹국인 아카이아 연맹의 배반 사실을 듣고 로마에 강화를 요청한다. 그러나 니카이아 인근에서 열린 로크리아 회담이 결렬되면서 필리포스는 기원전 197년에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템페 회담에서 연합의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주면서 로마에 종속되었다.


2.4. 최후[편집]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필리포스는 둘째 아들인 데메트리우스를 로마에 볼모로 보내고 더 이상 로마에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전력을 기억하고 있던 로마는 필리포스를 불신하며 그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친 로마 성향을 가지게 된 데메트리우스를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자 반로마 성향을 가진 장남인 페르세우스가 신하들과 함께 강력히 반발하였고 친로마 성향의 데메트리우스와 크게 대립하는데 나중에 가면 심해져 형제관계가 원수처럼 변해버렸다. 필리포스는 아들들을 말리며 자식들간의 우애를 회복하려 했지만 이미 형제관계는 크게 악화된터라 소용없었다. 그러다 왕위를 동생한테 빼앗길까봐 두려워한 페르세우스가 일부러 자신이 위조한 편지를 근거로 들며 동생 데메트리우스를 로마의 사주를 받아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모함하며 동생을 죽이라고 신하들과 함께 아버지에게 압력을 넣는다. 필리포스 5세는 강력히 반대했으나 페르세우스와 신하들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데메트리우스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말았고 데메트리우스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아들을 처형한 충격과 데메트리우스의 죽음으로 로마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필리포스 5세는 기원전 179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안티고노스 왕조는 그의 뒤를 이은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대한 사대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포하자 이를 빌미로 쳐들어온 로마에게 패하고 페르세우스는 폐위당하면서 패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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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리비오스는 그의 자비로운 성향 덕분에 이러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설명한다.[2] 둘다 전쟁에 능하였기에 로마만 없었어도 전성기를 이어나갔을 것이다..[3] 마케도니아는 안티고노스 도손 때부터 일리리아를 점령한 로마를 견제하기 위해 일리리아와 동맹 관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