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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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신#武臣이자 목숨을 바쳐 현종과 멸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한 충신으로 진주 하씨 시랑공파(侍郞公派)의 시조이다.
994년(성종 13)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다.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으로서,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목종이 거처하는 궁궐 주변을 숙위하며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이 되었다. 강조의 정변 때는 강조 편에 섰다.
1010년(현종 1)에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난 것도 모자라 그 일로 여진에게 분노하던 동료 유종이 현종기에 화주방어낭중으로 있던 중 고려에 입조하려 가다 화주에 방문한 여진족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여 유종과 더불어 유배당하였다.[2] 그러다 같은 해 요나라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명분으로 고려에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요군의 철수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요성종을 만나 '현종은 이미 남쪽 수천 리[3] 밖으로 피했으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요성종을 속여 거란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인공위성으로 지리 정보를 상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된 현대와는 달리, 옛날에는 타국의 지리 정보가 국가 기밀 사항으로 지정될 정도라 외국의 지리를 알기는 매우 어려웠다. 여요전쟁 종전 후에 송나라의 소동파가 고려 사신들이 멋대로 자국의 지도를 입수해가는 것을 비난한 것도,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에서 일본 측 사신에게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까지의 방문만 허용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하공진이 야율융서를 상대로 대범한 낚시질을 할 수 있었던 것. 하공진이 거란군 선봉과 마주쳤을 때 거란군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불과 10여 리였기 때문에, 하공진이 요성종을 속이지 못했다면 계속 추격을 진행한 거란의 기병이 현종 일행을 발견할 가능성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후 고영기와 함께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요성종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고려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연경(燕京)으로 옮겨졌으며,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저자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귀국을 꾀했는데, 이윽고 탄로나 요성종의 국문을 받게 되었다. 요성종은 온갖 악형과 회유책으로 하공진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라 권유하였으나 하공진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요성종을 크게 격분시켰고, 결국 처형당해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하였다. 한 번 고려로 도망치려 했다가 실패했는데도 강제 결혼으로 감시하는 데 그치고 두 번째에도 거란의 신하가 되라고 회유하려 한 것으로 보아 요성종이 신임할 정도로 능력은 있던 듯 하다.
후일 문종에 의해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되었다.
현종 이후 하공진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1110년(예종 5)에 '하공진 놀이'라는 이름의 잡희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이전 신라에 있던 가무백희(歌舞百戱)를 계승했으며 훗날 조선 후기 '산대도감계통극'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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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고려 전기의 무신#武臣이자 목숨을 바쳐 현종과 멸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한 충신으로 진주 하씨 시랑공파(侍郞公派)의 시조이다.
2. 생애[편집]
994년(성종 13)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다.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으로서,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목종이 거처하는 궁궐 주변을 숙위하며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이 되었다. 강조의 정변 때는 강조 편에 섰다.
1010년(현종 1)에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난 것도 모자라 그 일로 여진에게 분노하던 동료 유종이 현종기에 화주방어낭중으로 있던 중 고려에 입조하려 가다 화주에 방문한 여진족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여 유종과 더불어 유배당하였다.[2] 그러다 같은 해 요나라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명분으로 고려에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요군의 철수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요성종을 만나 '현종은 이미 남쪽 수천 리[3] 밖으로 피했으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요성종을 속여 거란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인공위성으로 지리 정보를 상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된 현대와는 달리, 옛날에는 타국의 지리 정보가 국가 기밀 사항으로 지정될 정도라 외국의 지리를 알기는 매우 어려웠다. 여요전쟁 종전 후에 송나라의 소동파가 고려 사신들이 멋대로 자국의 지도를 입수해가는 것을 비난한 것도,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에서 일본 측 사신에게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일대까지의 방문만 허용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하공진이 야율융서를 상대로 대범한 낚시질을 할 수 있었던 것. 하공진이 거란군 선봉과 마주쳤을 때 거란군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불과 10여 리였기 때문에, 하공진이 요성종을 속이지 못했다면 계속 추격을 진행한 거란의 기병이 현종 일행을 발견할 가능성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후 고영기와 함께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요성종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고려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연경(燕京)으로 옮겨졌으며,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저자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귀국을 꾀했는데, 이윽고 탄로나 요성종의 국문을 받게 되었다. 요성종은 온갖 악형과 회유책으로 하공진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라 권유하였으나 하공진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요성종을 크게 격분시켰고, 결국 처형당해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하였다. 한 번 고려로 도망치려 했다가 실패했는데도 강제 결혼으로 감시하는 데 그치고 두 번째에도 거란의 신하가 되라고 회유하려 한 것으로 보아 요성종이 신임할 정도로 능력은 있던 듯 하다.
후일 문종에 의해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되었다.
3. 기타[편집]
현종 이후 하공진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1110년(예종 5)에 '하공진 놀이'라는 이름의 잡희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이전 신라에 있던 가무백희(歌舞百戱)를 계승했으며 훗날 조선 후기 '산대도감계통극'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4. 대중매체[편집]
- 2009년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이병욱[4] 이 연기했다. 거란에 끌려간 후 최종회에서 유충정과 함께 이현운, 안패를 몰래 독살시키고 그 자리에서 잡혀[5] 사형대에 올라가 거란 병사들의 수많은 화살을 맞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유언은 "고려의 하늘이.. 고려의 땅이.. 보고 싶구나.."
- 2023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이도국이 연기했다. 고려 거란 전쟁/등장인물 문서의 하공진 문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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