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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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다른 뜻1, other1=스위스의 축구 선수, rd1=하인리히 뮐러(축구선수), other2=이름이 비슷한
슈츠슈타펠의 인물, rd2=하인리히 힘러)]



파일:슈츠슈타펠 문장.svg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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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나치 독일)/국가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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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국가지도자
Reichsführer-SS
]]
일반
친위대

율리우스 쉬렉 | 에어하르트 하이덴 | 하인리히 힘러 | 카를 항케
[[친위대(나치 독일)/최상급집단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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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상급대장
Oberstgruppenführer
]]
일반
친위대

쿠르트 달루게질서경찰 총수 | 프란츠 슈바르츠
무장
친위대

파울 하우서 | 요제프 디트리히기갑
[[친위대(나치 독일)/상급집단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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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대장
Obergruppenführer
]]
일반
친위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P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루돌프 헤스 | 오토 디트리히 | 발터 부흐 |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P | 리하르트 발터 다레 | 마르틴 보어만 | 막스 아만 | 구스타프 아돌프 셸P | 에른스트 빌헬름 볼레 |아르투어 그라이저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 | 알베르트 포르스터 | 울리히 그라이펠트P | 율리우스 샤우브 | 빌헬름 슈투카르트 | 빌헬름 케플러 | 프리츠 자우켈 | 필리프 보울러 | 카를 피흘러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한스 라머스 | 헤르베르트 바케
무장
친위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P | 고틀로프 베르거 | 아르투어 플렙스 |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P | 커르트 폰 고트베르크P | 마티아스 클라인하이스터캄프 | 베르너 로렌츠P | 막시밀리안 폰 헤르프 | 발터 슈미트 | 발터 크뤼거 | 프리드리히 크뤼거P | 아우구스트 프랑크P | 아우구스트 하이스마이어P | 알프레트 뷔넨베르크질서경찰 총수 | 에르빈 뢰제너P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에른스트 하인리히 슈마우저P |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P | 오스발트 폴 | 리하르트 힐데브란트P | 테오도어 아이케 | 파울 샤르페 |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 | 루스커이 예뇌 | 펠릭스 슈타이너 | 프리드리히 예켈른P | 빌헬름 레디스P | 빌헬름 비트리히 | 빌헬름 코페P | 카를 구텐베르거P
카를 볼프 | 카를 오베르크P | 카를 폰 에버슈타인P | 카를 헤르만 프랑크P | 한스 라우터P | 한스-아돌프 프뤼츠만P | 한스 위트너 | 헤르베르트 오토 길레
특수
작전집단

우도 폰 보이르슈P
[[슈츠슈타펠/계급#집단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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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중장
Gruppenführer
]]
일반
친위대

하인리히 뮐러P |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P | 야코프 슈폴렌베르크P | 오딜로 글로보츠닉P | 요한 라텐후버P | 빌헬름 그림P | 카를 클라우베르크
무장
친위대

그러시 요제프 | 게오르크 뢰르너 | 루돌프스 방게르스키스 | 헤르만 페겔라인 | 헤르만 프리스 | 카를 겐츠켄 | 카를 게프하르트 | 카를 브란트 | 카를 프리드리히 그라프 폰 퓌클러-부르크하우스P |리하르트 글뤽스 | 베르너 오스텐도르프 | 위르겐 슈트로프P | 하인츠 라인파르트P | 하인츠 레머딩 | 헬무트 폰 판비츠
특수
작전집단

아르투어 네베P | 오토 올렌도르프P
[[슈츠슈타펠/계급#여단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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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소장
Brigadeführer
]]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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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 | 율리우스 쉬렉 | 발터 셸렌베르크P | 울리히 그라프 | 프란츠 요제프 후버P | 페르디난트 폰 잠메른 프랑케네크P | 카를 마리아 빌리구트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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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롬바르트 | 레옹 드그렐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 실베스터 슈타들러 | 오토 쿰 | 이반 코노노프 | 쿠르트 마이어 | 빌헬름 몽케 | 프리츠 비트 | 하인츠 하르멜
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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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P : 질서경찰 계급 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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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게슈타포 3대 국장
하인리히 뮐러
Heinrich Müller


파일:Heinrich_Müller.jpg

별명
게슈타포의 밀러
Gestapo Müller
출생
1900년 4월 28일
독일 제국 뮌헨
실종
1945년 5월 1일? (향년 45세)[1]
나치 독일 베를린 퓌러붕커
복무
슈츠슈타펠 (1934~1945)
신장
160cm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중장 (집단지도자)
질서경찰 중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전후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파일:Müller_Heinrich.jpg
하인리히 뮐러 (Heinrich Müller)

Geheime Staatspolizei ist jeder Platz.

게슈타포는 어디에나 있다.


파일:하인리히 뮐러2.jpg
아돌프 히틀러와 하인리히 뮐러

나치 독일의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 게슈타포의 3대 국장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핵심 측근들 중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흔히 "게슈타포 뮐러"라고 불리며 게슈타포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이용하여 무려 140만 명이 넘는 인간들을 학살하며 엄청난 악명을 떨친 나치의 핵심 인물로 무자비한 대학살을 저지른 전쟁범죄자다. 또한 반제 회의에 참석했던 참석자이며, 악명 높은 나치의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나치 인사이기도 하다. 1900년 출생이라서 현재까지 살아있다고 가정하면 123세인지라 이미 죽었겠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 생애[편집]


시골 경찰관의 아들로 뮌헨에서 태어난 뮐러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부터 바이에른의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시기 서부전선에서 육군 정찰기 조종사로 활동하며 1급 철십자 훈장과 바이에른 전공십자훈을 받았다. 독일 패전 후에는 바이에른 주 경찰본부에서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데모를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번은 뮌헨의 공산주의자들이 인질극 도중 인질을 쏴죽이는걸 목격한 그는 평생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했다고 한다. 1929년부터 바이에른 경찰서 기관이 된 뮐러는 이후 경찰간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나치당원은 아니었지만 뮌헨경찰의 정치부를 운영하던 관계상, 하인리히 힘러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포함하여 나치당의 많은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다. 뮐러는 평소 정치에는 무관심하며 맡은 일에만 충실했기에 역사학자들은 그가 전형적인 공무원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친위대 보안부장이 된 하이드리히는 소련에 대해 잘 알며, 경찰에서 실력자인 뮐러와 그의 부하들을 포섭하여 1934년에 친위대에 가입시켰다. 친위대 파일에 기록된 뮐러의 성격에 관한 공식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이 보고서에 적었다 "그는 타고난 경관이다. 그는 자신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그 어떤 것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파일:하인리히 뮐러1.jpg
친위대 여단지도자 뮐러
친위대에 들어간 뮐러는 급속하게 지위가 올라갔고 1939년에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1939년 9월에 게슈타포와 다른 경찰조직이 국가보안본부에 통합되자 국가보안본부 제4국 게슈타포의 3대 국장이 된 뮐러는 다른 동명의 지도자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훗날 알려지게 될 악명높은 게슈타포 뮐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게슈타포의 수장이 된 뮐러는 1935년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의 하부조직에 침투하여 조직을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나치정권의 안정화에 큰 공을 세웠고 첩보기관장이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대장과 경합하여 공산주의자 스파이 조직인 붉은 오케스트라에 조직원을 잠입시켜서 거짓 정보를 소련측으로 보내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Bundesarchiv_Bild_183-R98680%2C_Besprechung_Himmler_mit_M%C3%BCller%2C_Heydrich%2C_Nebe%2C_Huber2.jpg
왼쪽부터 프란츠 요제프 후버, 아르투어 네베, 하인리히 힘러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리히 뮐러. 회의를 하고 있다

힘러괴벨스의 담당분야였던 유대인 이주 계획에도 깊이 관여하여 1939년까지 유대인 이주계획 전국본부장으로 일한 뮐러는 유대인의 이주만하다가 유대인 절멸정책 즉, 홀로코스트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뮐러는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조직하여 1941년 단 1년만에 소련 점령지역의 유대인을 무려 140만명이나 학살했고 그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상부에 보냈으며.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결정한 1942년의 반제 회의에도 참석했다. 1942년 5월에 프라하에서 직속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한 사건을 수사하여 암살자 색출에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힘이 커졌다고 생각한 힘러, 보어만에게 방해를 받기도 하면서, 정권에서 점차 권한이 축소되었다.

결국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힘러의 라이벌이던 마르틴 보어만과 손을 잡은 뮐러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반역 음모자 색출과 체포를 담당했다. 이 때 빌헬름 카나리스를 포함해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약 200명이 처형당했다. 전쟁말기였던 때에도 뮐러는 이미 추축국의 패배로 끝난 전쟁에서아직도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여 독일군이 파리를 탈환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소련군이 베를린까지 다다르자 뮐러는 히틀러가 있는 총통지하벙커에서 그를 보좌했다. 그러다가 힘러가 무단으로 서방연합국과 화친을 진행하며 히틀러의 뒷통수를 치자 뮐러는 히틀러에게 힘러의 연락장교였던 헤르만 페겔라인을 체포하고 처형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그를 처형한다.[2]


3. 전후[편집]


뮐러는 히틀러가 자살한 이후,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소식이 끊긴 뮐러는 베를린 공방전 중에 자살했다, 남미로 도망쳤다, 미국 정부에 의해 소련 첩보원으로 고용되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일단 미국의 첩보원 등용 소문은 2001년에 미국은 정보자유법의 시행으로 구 CIA의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는데, 이때 뮐러는 전쟁범죄자로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었기에 첩보원 등용의 가능성이 없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에 의해 붙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뮐러가 남미로 달아났다는 주장을 해서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는데, 이에 서독 정부가 조사에 나섰지만 명확한 증거나 사실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국민 돌격대원이었던 발터 뤼더스가 뮐러의 사체를 유대인 공동묘지에 매장했다는 증언이었는데, 이 묘의 장소가 1961년동독 지역에 있었기에 서독 정부는 조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폴란드의 첩보원이 서방으로 망명하면서 뮐러를 모스크바에서 봤다는 증언을 해서 CIA를 자극해 조사에 나서게 했지만 이는 뜬소문으로 결론 났다. 현지에서는 뮐러가 알바니아에서 스파이로 일한다는 소문도 나돌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 소련에 잡혀갔다가 독일로 돌아왔던 많은 병사들에게서는 뮐러를 소련에서 봤다는 증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의혹은 더욱 커져갔다. 실제로 히틀러의 직속 비행사였던 한스 바우어 SS중장은 뮐러가 '나는 소련 쪽에 아는 사람이 많다, 나는 포로는 되지 않는다.'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3]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소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그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그가 행동할 때나 포로들을 심문할 때도 심문 방식이 마치 소련의 KGB[4]에서 사용하는 심문 방식과 많이 닮았으며, 그의 방에서는 은밀한 통신내역들이 있기도 했었는데 이것이 소련으로 중요정보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는 것과, 히틀러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랐던 이유가 나치의 최고위층에 들어가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가 아녔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모스크바의 게슈타포 하인리히 뮐러

1990년 이전까지 CIA는 만약에 뮐러가 살아있다면 소련이나 체코에 있을 것으로 여겼지만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공문서 자료에는 뮐러에 관한 기록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CIA는 뮐러가 베를린에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소련이 그가 이미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마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폐기하고 그가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라는 의혹도 있다. 그런데 2013년 11월 초, 뮐러의 사망신고서를 통해 그가 공군본부 인근에서 사망, 그 해(1945년) 8월에 시신이 발견되어 유대인 공동묘지에 매장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뮐러의 시체나 그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4. 매체에서[편집]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 '검은 학교'에서는 뮐러가 죽지 않고 미국으로 도망쳐 미하일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한 다음 세인트 로사리오 학원을 열어 교장이 된 뒤 나치스 세뇌 교육을 학생들에게 은밀하게 실시한 것으로 나온다. 사인은 자연사. 학교 관계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라 죽은 뒤에도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필립 커의 베를린 누아르 3부작 중 마지막 작품 '독일 장송곡'에서는 흑막으로 등장.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요 간부들을 히틀러 암살 모의사건으로 처형당한 명단에 슬쩍 끼워넣는 식으로 그들의 죽음을 위장했으며[5], 작중 시점(1947년)에서는 생존한 나치 간부들로 구성된 지하 조직의 우두머리로 활동하고 있다. 현실의 친소 성향을 반영한건지 작중에서도 소련을 입이 마르게 칭찬하며 스탈린을 숭상하고 그들이 다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을 떠맡아 미국에게 책잡히는 것이 싫었던 소련의 계략에 휘말려 주요 간부들을 잃었고, 미국에 망명을 시도할 것이 암시된다.

2021년 11월 출시된 콜 오브 듀티: 뱅가드 캠페인에 빌런으로 등장하는 헤르만 프레징거의 모티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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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월 1일, 저녁에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 "RG 263 Detailed Report, Heinrich Mueller", archives.gov[2] 헤르만 페겔라인이 처형당한 날은 1945년 4월 28일인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뮐러의 45번째 생일이었다.[3] 실제 발언과 약간 다르다. 영문위키에 따르면 원문이 "We know the Russian methods exactly. I haven't the faintest intention of being taken prisoner by the Russians" 인데, 이를 해석하면 뮐러는 소련에 아는 사람이 많은 게 아니라 자신이 소련의 심문 방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즉 끔살이 확정이라) 절대 포로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4] 하지만 KGB는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 스탈린이 죽고 베리야가 숙청된 뒤에 생겼고 이때 소련 정보부는 NKVD였다.[5] 철저한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대상 간부들의 이를 모두 뽑고 다른 적당한 시체에게 이를 이식하는 것으로 치아기록을 통한 검식도 회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