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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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光錫
1918년 7월 5일 ~ 2017년 2월 2일 (향년 98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관련 문서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1].

2. 생애[편집]


1918년 7월 5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에서 아버지 한원교(韓元敎)와 어머니 단양 우씨 우원자(禹元子)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후쿠오카중학교와 해군공창교관학교(海軍工廠敎官學校)를 졸업했다.

8.15 광복 후 충청남도 재산관리처 조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육군호국사관학교에 입학하여 3기로 졸업한 후 보병102연대 제11중대장을 맡았다. 이후 예편,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우익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여 1950년 9월 대한청년단 부여군단장에 선출되었고 1954년 2월 자유당 부여군 갑구당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국민회 부여군지부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 밖에 대한화물주식회사(大韓貨物株式會社)·남선물화주식회사의 사장 및 이사를 겸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석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6년 자유당 충청남도당 총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민주당 이석기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복역하다가 1963년 특별사면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의 매수에 의해 중도 사퇴하였다[2]#.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부여군-보령군-서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종익 후보와 신민당 김옥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헌정회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1995년 회장이던 김원만의 사망으로 회장 권한대행을 지냈다.

2017년 2월 2일,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제8선거구)


6,249표 (19.51%)
낙선 (4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제9선거구)
20,479표 (57.65%)
당선 (1위)
초선[3]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참의원 충청남도 제2부)
108,908 (10.95%)
당선 (6위)
재선[4]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제5지역구)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후보 사퇴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제5선거구)

[[무소속|
무소속
]]

6,766표 (3.93%)
낙선 (4위)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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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안공파 30세 석(錫) 현(鉉) 호(鎬) 항렬.#[2] 당시 민주공화당 후보는 다름아닌 김종필이었다. 한편, 당시 한광석 외에 자유당 김재련, 대중당 김창삼, 한국독립당 한창희, 자민당 이석전 등 4명의 후보가 있었는데, 모두 중도 사퇴하지 않고 완주하였다.[3] 1960년 6월 30일 의원직 사퇴(참의원 선거 출마)[4] 1961년 2월 21일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한 의원 자격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