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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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청동기 시대
3. 고조선 멸망 무렵 ~ 원삼국시대
4. 삼국시대
4.1. 각국의 갑옷 비교
4.2. 갑옷 양식
4.2.1. 판갑
4.2.1.1. 종장판갑(수신판단갑)
4.2.1.2. 방형판갑
4.2.1.3. 장방판갑
4.2.1.4. 삼각판갑(삼각판단갑)
4.2.1.5. 횡장판갑(횡신판단갑)
4.2.2. 찰갑(괘갑)
4.3. 투구(주)
4.3.1. 종장판투구(몽고발형주)
4.3.2. 비늘투구(소찰주)
4.3.3. 차양투구(미비부주)
4.3.4. 충각부주
4.3.5. 이형주
4.3.6. 원주투구
4.3.7. 농오리산성투구
4.3.8. 금동장투구
4.4. 부속갑옷
4.4.1. 어깨가리개(상박갑)
4.4.2. 치마갑옷(갑상)
4.4.3. 목가리개(경갑)
4.4.4. 팔보호대(비갑)
4.4.5. 허벅지보호대(대퇴갑)
4.4.6. 정강이보호대(경갑.脛甲)
5. 통일 신라시대
6. 고려시대
6.1. 몽골 침략 전
6.1.1. 일본 측의 묘사
6.1.2. 고려시대 예술 속의 묘사
6.1.3. 고려도경 속 묘사
6.1.4. 기타
6.2. 몽골 침략 후
6.2.1. 갑옷 양식
6.2.2. 투구
7. 조선 시대
7.1. 초중기
7.2. 후기
8. 여담


1. 개요[편집]


한국에서 사용된 갑옷을 총칭한다.

한국에서 출토된 갑옷은 대부분 찰갑이나 판갑 같은 금속제 갑옷이다. 목갑(나무)과 골갑() 그리고 피갑(가죽) 등의 경우 사막과 같이 건조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는 이상 썩기 쉽다. 거기다 한국의 산성토양 문제로 인해 출토된 예가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목갑, 가죽갑옷 등은 대체로 중국 또는 일본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삼국시대의 갑옷이 처음 알려진 것은 고구려 벽화를 통해서였으며, 고분 발굴로 한국 갑옷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연구 초창기에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예가 적었고, 한반도의 갑옷 양식이 일본에서 만든 갑옷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일본 갑옷이 한반도로 수입되었다는 견해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러나 점차 국내에서 발굴되는 갑옷의 양이 많아지면서, 그런 견해에 대해 거꾸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갑옷 제작 기술이 전래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고, 그것은 2010년대에 들어서 일반적으로 고고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판갑(단갑)의 경우 시대별 발전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일본에서 더 많이 발굴되는 관계로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국 학계에서는 제철기술의 전파 경로를 들어 이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고대 일본에서는 철의 수입을 전적으로 백제가야에 의존하고 있었다. 고구려(북방)계 찰갑(괘갑)의 경우 모든 학계에서 확실하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종장판이나 횡장판갑 등의 판갑(단갑)이, 고구려 등 북방 지역에서는 찰갑(괘갑)이 주류를 이루었고, 고구려의 남하 이후 판갑이 찰갑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 신라, 가야 영역의 3세기~4세기 초 유적들에서 수결법이 적용된 찰갑 유물들이 여럿 출토되면서 인식이 바뀐다.

고구려군의 신라 파견 이전부터 찰갑이 판갑과 함께 널리 쓰이다가 고구려의 신라구원군 파견 이후 종장판갑은 잘 쓰이지 않게 된다. 고구려군의 영향을 받은 4~6세기형 찰갑이 중장기병전술과 함께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 찰갑은 보통 괘갑, 동환식찰갑으로 알려져 있는 허리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가고, 요찰과 목부분을 강조하는 경갑 등 부위별로 다양한 부속갑이 특징인 찰갑양식이다.

수결법으로 상하 갑찰을 연결하는 형식의 갑옷들은은 6~7세기를 지나며 부속갑과 갑찰이 간소화된 구조로 변경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된다. 고려시대 이후로는 찰갑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갑편을 의복에 고정하는 의-두정형 갑옷을 입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갑옷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2. 청동기 시대[편집]


가장 오래된 만주-한반도 지역 갑옷은 청동기 시대인 청동기시대 문화층이며, 이 층의 연대는 약 기원전 10세기 전후(기원전 2000년기 후반에서 1000년기 전반)에 드는 것으로 보인다. 함경북도 무산 호곡유적에서 출토된 뼈찰갑편이 이 시대의 유물에 속한다. 청동기 시대인 2기층 40호 집자리에서 발견되었는데, 부서진 흔적이 있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2003년 길림성 쌍요(솽랴오)시의 후태평 유적에서도 뼈찰갑편이 발굴되기도 한다.#

이 갑옷편들은 시베리아 청동기 시대 문화인 세이마-뚜르비노(seyma-turbine) 문화의 찰갑편들과 유사하며, 또한 오늘날에도 제작법이 전해지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원주민들(축치인, 틀링깃 등)의 갑옷과도 매우 유사하여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해당 갑옷양식에서 중요한 점은, 이 갑옷 양식에 쓰인 혁철법이 후대 판갑들과의 일종의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일본열도 판갑들의 조상에 해당하는 양식이 아닌가 싶다. 또한, 이 갑옷양식은 초기철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철제나 혁제로 만들어 지기도 한다.

투구로는 기원전 8~7세기로 추정되는 만주 오금당 돌곽무덤에서 출토된 투구편 일부가 있는데, 비록 1/4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남은 조각의 모습이 몽골연나라 지역에서 발견된 투구와 유사한 점을 감안하였을 때 북방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타 부속갑으로는 기원전 1000년 전반기에 해당하는 함경남도 북청군 토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통토시가 있다(비갑으로 추정됨).#


3. 고조선 멸망 무렵 ~ 원삼국시대[편집]


한나라고조선 간의 교역, 혹은 한사군 설치 이후 유입된 한나라 계통의 갑옷이 발굴되기도 했다. 기원전 2~기윈전 1세기 낙랑무덤인 평양 정백동 219호에서는 가죽찰갑편이, 평양 정백동 1호 무덤에서는 현존 국내유물 중 최고로 오래된 철제 찰갑편이 발굴되었다.(출처: 북한문화재 자료관.)

기원전후의 갑주 유물로는, 부여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의 M56, M67, M97 무덤에서 출토된 종장판주 3점과 한나라계찰갑으로 추정되는 찰갑이 있고, 한성백제로 추정되는 인천공항 옆 운북동 레져단지 건설 도중에 발굴된 운북동 유적에서 출토된 찰갑편이 있다.#

한편 한성백제 유적인 경기도 가평 대성리 유적인 40호 집자리, 44호, 46호, 49호 수혈주거지에서는 한나라계 찰갑으로 추정되는 찰갑편이 출토되었다.(출처: 군사연구 131권 수록 논문 "百濟甲胄의 形成과 그 背景(백제갑주의 형성과 그 배경)/이현주/ 부산임시수도박물관장.)

다호리유적에서 2호분에서 발굴된 옻칠한 가죽찰갑편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있다. 온전한1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우그러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갑편의 네 모서리에만 투공된 장방형 갑찰인데, 비슷한 유물이 평지 알타이지역에서 발굴됐다.

3세기로 추정되는 대구 달성토성 성벽에서 목제 갑편이 출토되었는데, 비슷한 구조의 골제 갑편이 시베리아 여러 지역의 초기철기 시대 유적들에서출토되는데,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볼쉐레첸스카야 문화(러시아어 Большереченская культура, 영어 Bolsherechensky Culture.), 톰스크-나르임 근처 옵강유역에 위치한 꿀라이스카야 문화의 우스띠보읜유적, 아무르강 유역 뽈체유적에서도 출토됐다. 이 갑옷은 매우 짧은 시기 쓰인 양식으로, 직물이나 가죽 바탕에 갑찰을 부착한 스케일아머이나, 다른 스케일아머들과 다르게 상하 중첩이 외중식, 즉 아래쪽 갑찰이 앞으로 나오는 상하중첩방식으로 추정된다.

3세기로 추정되는 한성백제 시기 유적인 하남시 미사리유적 주거지에서 출토된 찰갑편들은 갑편의 투공 배치가 무산 호곡유적 출토품과 동일하여, 청동기시대 골제찰갑들이 철제화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 유물들이 기원전후 아무르강~연해주 북부 뽈체 문화의 유적들에서도 출토 된다. 물론, 같은 양식 골제 찰갑도 계속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4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많은 철제 갑주유물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고분 부장품과 함께 부장되기 시작했다.


4. 삼국시대[편집]



4.1. 각국의 갑옷 비교[편집]



파일:eXBZpyj.jpg

복원도(?). 왼쪽부터 백제황칠갑, 신라의 갑옷, 가야의 판갑, 고구려찰갑이다. 국내의 막장고증 드라마들(주몽이나 광개토태왕 등)에 비하면 월등히 우수한 고증이지만 일부 오류나 상상이 존재한다.
황칠갑의 경우 투구가 미비부주일 가능성은 적고, 백제가 대금계 판갑을 주력으로 입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가야, 신라 갑옷의 경우 흉갑이 종장판갑인데 가슴 부분에 붙어있는 두개의 뿔 모양 철판은 어깨 위에 세우는 것이며 종장판갑의 상박갑이 발견된 예는 없고 다만 상체의 방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증에 추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이 가미된 디자인이다.

삼국시대 갑옷의 경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각각 차이를 보인다.

  • 고구려 - 고구려의 경우 벽화에 그려진 것을 통해 갑옷의 형태 등을 유추해낼 수 있는데 대표적인 벽화가 바로 통구12호분(마조총)과 안악 3호분이다. 특히 안악 3호분은 병사들의 행렬도가 그려져 있기 때문에 고구려 군사의 체계, 무기까지 알 수 있는 상당히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벽화와는 달리 실물자료로 확인된 것은 매우 드물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지역에서는 연천 무등리 2보루에서 고구려 갑옷이 출토된 바 있다.

  • 백제 - 백제는 고구려처럼 벽화자료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실물자료가 어느정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뼈갑옷인데 뼈를 가지고 찰갑(札甲)의 형태로 갑옷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2010년대 들어 경기도와 충청, 전라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증가하면서 백제 갑옷에 대한 실물자료가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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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몽촌토성 85-4호 저장공 출토 뼈갑옷.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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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산 수청동 67호 주구부목관묘 출토 찰갑.jpg
몽촌토성 85-4호 저장공에서 확인된 뼈갑옷
(출처: 서울대학교박물관)
경기도 오산시 수청동 고분군 67호 주구부목관묘 출토 찰갑의 보존처리 후 상태
(출처: 경기문화재연구원)
한편 공주시공산성 성안마을 저수지 바닥에서 정관19년(貞觀十九年)이라는 글자가 적힌 갑옷이 확인되어 주목을 받았다. 정관 19년은 645년으로 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645년 제작한 백제갑옷 이를 통해 보았을 때 백제는 신라보다 일찍 판갑(板甲)에서 찰갑(札甲)으로 넘어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신라 - 신라 역시 벽화자료는 없지만 실물자료가 많이 확인된 바 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판갑이 다수 확인된다.

  • 가야 - 가야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실물자료가 많이 확인되었다. 가야 역시 판갑이 다수를 이룬다.



4.2. 갑옷 양식[편집]


파일:attachment/f0006957_4c2b609821848.jpg

사진에 나온 갑옷양식 이외에도 혁철법으로 엮은 찰갑이나, 누비갑옷(패딩아머) 등이 쓰였을 것이다.


4.2.1. 판갑[편집]


찰갑이 퍼지기 전까지 삼국시대 초기에 사용된 양식. 판갑은 결합 방식에 따라 혁철판갑(가죽끈으로 결합)과 정결판갑(리벳못으로 결합)으로 나뉜다. 발굴 빈도로 볼 때 정결판갑이 좀 더 높은 빈도로 나오고 있는 편.

한반도 남부에서 자체적으로 개발된 것이 종장판갑이며, 이에서 더 발전한 횡장판갑 계열 갑옷.. 이른바 대금계 갑주에 대해서는 한일 양측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가거나 한반도의 제철 기술을 습득한 현지 기술자들이 개발한 일본계 갑옷으로 분류하고 있다.

파일:attachment/한국 갑옷/고대_동아시아_갑주계보.jpg

이 대금계 갑주의 경우 종장판갑의 완전한 직계 후손은 아니고, 고대 중국계 갑옷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백제의 방형판갑이 종장판갑과 함께 그 형태, 제작기법의 혼재가 이루어져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조).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연구사는 "당시 제철/갑주 제작기술은 가야에 있었지만 실제 제작은 일본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고 이야기했다.

일각에서는 이 갑옷이야말로 고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의미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당연히 헛소리고, 고대의 백제, 가야, 왜 사이의 긴밀한 동맹관계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결론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백제, 가야 지방 고위 계층의 무덤에서 대금계 판갑이 발굴되는 이유에 대해 일본과의 교류와 군사적인 동맹관계를 상징하는 위세품(군사적인 과시에 의한)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출처: PDF논문 - <한반도 출토 왜계 갑주(倭係 甲冑)의 분포와 의미/김혁중>)

일본과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갑주들을 그래픽으로 복원해 다루는 사이트(참조) 에서는 전문가의 대금계 판갑의 기원에 대한 발언을 인용하고 있다.

前期中葉以降(4世紀後半)に現れる竪矧板革綴短甲と方形板革綴短甲は韓半島南部の縦長板釘結板甲の影響 を受けて、日本内で作られたものと考え、古墳時代の中期中葉(5世紀後半)に現れる鋲留技法の板甲、札甲(掛甲)、眉庇付冑などは韓半島の工人が日本列島に渡り、新しい体制によって生産し始めたものだ と説いた

"전기 중엽 이후(4세기 후반)에 나타난 방형판갑과 장방판갑옷은 한반도 남부의 종장판갑의 영향을 받고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분 시대 중기 중엽(5세기 후반)에 나타난 리벳기법의 판갑과 찰갑(괘갑), 미비부주 등은 한반도의 공인이 일본 열도에 걸친 새로운 체제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2007년 고흥에서 5세기로 추정되는 대금계 판갑과 투구가 나와서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언론 보도에서는 해당 판갑이 횡장판갑이라고 했지만, <百濟甲胄의 形成과 그 背景(백제갑주의 형성과 그 배경)/이현주/ 부산임시수도박물관장> 논문에 따르면 해당 갑옷의 철판의 형태를 볼 때 대금계 판갑의 초기형에 해당하는 장방판혁철판갑이다.

일부 학자들은 해당 발굴을 근거로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대금계 판갑과 차양주 등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다만 시대를 특정지을 수 있는 토기 등이 발굴되지 않은 유적이기 때문에 해당 고분의 시대 배경은 5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수십년 간격으로 매우 유동적으로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시대상을 명확히 특정지을 수 있는 유적이 좀 더 나오기 전까지는 단언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링크에서 언급하듯이 반대로 해당 유적이 5세기 중엽으로 보고 부장자를 일본계라고 추측하더라도 그것이 임나일본부 설을 강화하는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고, 백제와 일본간의 깊은 관계를 증명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참조 포스팅, 참조 포스팅) 그러니 해당 유적을 5세기 초로 보느냐 중엽으로 보느냐와는 관계 없이 양자 모두 일단 판갑 계보에 대한 하나의 학설이 제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대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앞서 더 방어력이나 활동성에서 유리한 찰갑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사용했던 후기형 판갑에 해당하는 갑옷들은 일본에서 제작한 것을 수입해 사용했거나, 한반도 내에서 해당 디자인으로 제작하여 사용했다는 것이 한/일 학계의 통설이다. 찰갑의 경우 제작, 보수가 어려운 점을 볼 때 찰갑이 보급된 이후에도 일반 보병용 방어구는 필요할 경우 판갑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한국, 일본의 판갑의 경우 모두 입고 벗기 편하도록 문짝처럼 열리는 형식으로 만들어 오른쪽 옆구리 부분에 가죽띠나 경첩(돌쩌귀) 형태의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다. 전자는 종장판갑에서, 후자는 삼각·횡장판갑에서 사용된다. 참고로 찰갑은 자체적으로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따로 개폐보조장치를 달지는 않았다.


4.2.1.1. 종장판갑(수신판단갑)[편집]


파일:hGNrEXT.jpg


파일:2Im0dmD.jpg

김해 퇴래리 종장판갑
종장판갑 복원품
9개~15개의 세로로 긴 철판을 연결해서 제작된 것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목갑/피갑 바로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판갑 중에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며, 국내 출토 빈도도 가장 높게 나온다. 제작에 사용된 철판이 갑옷마다 다소 들쭉날쭉한 편인데, 당시의 제작 환경이나 제조기술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들어 몇몇 일본 학자들은 고대 한국의 제철기술 수준이 조악하다는 주장으로 연결하기도 하는데, 제철기술의 전파 경로를 따져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 종장판갑이 생산될 당시 일본은 쇠를 거의 다루지 못했다. 종장판갑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양식으로써, 3세기부터 5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 고르게 분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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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나 고구려 지역,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는 사실상 거의 출토되지 않고 낙동강 하류 지역인 김해와 부산, 그리고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만 출토되고 있어, 가야와 신라만의 독자적인 갑옷으로 분류된다.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으며, 고사리 모양 철판을 덧대거나 갑옷 테두리에 깃털로 장식하는 등 장식성이 많이 가미된 갑옷이다. 또한 세부적인 용어를 한복에서 차용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과거 가슴 부분에 반달 모양 장식을 붙이기도 했는데, 사실 그것은 어깨에 세우는 측경판이다.


4.2.1.2. 방형판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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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 지판의 투공을 서로 겹치지 않고 가죽끈을 이용해 유동성없이 단단하게 엮는 혁철법으로 만든 판갑이다.

종장판갑과는 달리 후술할 소찰주(비늘투구)와 함께 중국에서 그 형태와 양식을 들여와 4세기 백제에서 만든 갑옷이라는 의견과, 기원전 10세기 무산호곡유적이나 고대 시베리아에서 쓰였던, 혁철법으로 엮어서 만드는 갑옷양식에서 약간 변화를 준 양식일 수도 있다. 두 갑옷양식 모두 가죽끈으로 투공을 겹치지 않고 단단하게 엮는 혁철법이란 제작기법을 공유하므로 같은 제작계통-지판혁철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송파구청에 재현된 갑옷 소품(일러스트)이 있는데, 방형판갑을 모티브로 만든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 고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으니 주의하는 것이 좋다.


4.2.1.3. 장방판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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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 7단으로 구성되고 직사각형의 지판 여러장을 가로로 긴 테두리에 고정시킨 형태이다. 각 지판은 가죽끈으로 결합했으며, 방형판갑과 종장판갑의 제작기법이 혼재되어 생겨난 판갑으로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사용된 왜계 판갑인 이른바 대금계 판갑의 가장 초창기 형태에 해당한다.


4.2.1.4. 삼각판갑(삼각판단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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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복원품 / 右 유물
삼각형의 지판을 이어붙여 만들었다. 부산·김해지역과 고령·합천 지역에서 출토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상당수 출토되고 있어서 고대에 이루어졌던 한일 간의 교류를 반증하는 귀한 자료이다. 국내에서 출토되는 대금계 판갑 중에서는 가장 출토빈도가 높다.


4.2.1.5. 횡장판갑(횡신판단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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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판갑과 동일한 형태로, 이 역시 가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여 만들어졌다. 고령과 합천 그리고 망이산성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더하여 일본에서도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의 갑옷으로 재현되었다.


4.2.2. 찰갑(괘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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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샘지구 고분에서 발굴된 신라 찰갑의 복원품[1]
복원된 가야의 찰갑

미늘갑옷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여러개의 철판들을 연결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된 갑옷 형태로써, 고구려에서 한반도 남부와 나아가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신라, 가야는 고구려의 것을 쫒아 찰갑으로 완전히 개량하였다. 이를 일본에서는 괘갑(挂甲)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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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찰이 앞으로 나오는 방향이 위쪽이냐 아래쪽이냐에 따라 외중식과 내중식으로 나뉘는데, 외중식은 아래쪽 갑찰이 앞으로 나오고, 내중식은 위쪽 갑찰이 앞으로 나온다.(참조) 기마병이 찰갑을 사용할 때에는 외중식 찰갑을 입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아래쪽에서 창칼 등이 찔러들어올 경우 내중식은 날이 그대로 파고들어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에서 사용된 찰갑은 모두 외중식이다.

고구려(북방)계 찰갑은 부품수가 많고 관리가 힘들었지만, 다층구조에 의한 충격완화효과로 화살에 대한 방어력이 남부식 판갑에 비해 높았다. 판갑의 경우 금속판 하나로 화살을 방어해내야 했지만 찰갑의 경우 몇겹으로 겹쳐진 철편, 그리고 가죽으로 충격을 분산흡수한다. (참조 영상) 영상을 보면 판갑은 뚫렸지만, 찰갑은 화살을 일정 수준 방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정갑도 유사한 이유로 단갑보다 방어력이 높은데, 영상에서 화살이 철판 한장은 뚫었지만 같은 철판으로 만든 두정갑은 뚫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찰갑이 화살을 막아냈을 때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충격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타박상이나 골절 문제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판단하는 것이 좋다.

제철 규모가 현대에 비해 극히 작고 기술력이 떨어져 그 품질 균일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4~5세기경의 철판과 철편으로 만든 판갑과 찰갑이라면 더욱 심한 차이가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찰갑의 방호력에 대한 실험이 아래 글이 지적하듯 실제 전투 상황의 장거리 사격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지의 여부를 반영하지 못한 것은 옥에 티. 화살의 운동에너지는 강궁이라도 약 180J 정도이다. 현대 무기와 비교하자면 보통 권총에 쓰이는 파라벨럼 탄이 약 500J 정도이고 소총탄은 4자릿수로 그보다 훨씬 높다.

거리가 늘어나거나 곡사할 경우 더 떨어지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판갑으로 화살을 막았을 때와 찰갑으로 화살을 막았을 때 어느 수준의 방호가 가능한가의 여부는 불명확한 만큼 찰갑이 모든 상황에서 우월하다거나 판갑이 아예 못쓸 물건이라고 보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디펜스 코리아[2] 신재호(김병륜)의 기고문에서는 해당 실험이 지닌 한계에 대해 지적했다. 아래는 그 일부.

아래 사진은 KBS 역사 스페셜에서 2000년 1월22일 방송한 실험 장면으로 복원한 고구려 화살촉이 가야 판갑(板甲, 일명 단갑)을 관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용한 화살촉은 뾰족한 화살촉이다. 서울 구의동에서 출토된 고구려 화살촉의 강도(탄소량 평균 0.51%)를 참조하여, 이에 준하는 초강을 사용하여 화살촉을 제조했다. 판갑은 가야 갑옷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에서만 사용한 갑옷은 아니며 이른 시기의 신라나 백제에서도 사용한 갑옷이다. 또한, 백제나 가야의 원군, 용병, 혹은 동맹군 자격으로 한반도상에 출전했을지도 모르는 왜군들도 이러한 판갑을 주된 갑옷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아래 사진에 보이는 실험 결과는 삼국시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상대했을 이름모를 판갑 전사(板甲 戰士)의 죽음을 재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실험은 개인은 추진하기가 어렵고, 언론사나 공영 연구기관 정도는 되어야 실험이 가능한데, 공영방송인 KBS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기병사격을 재연하기 위해 먼거리에서 사격하지 못하고, 가까운 거리 (5m 이내)에서 사격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원거리에서 국궁 기병사격을 잘하는 인물이 없다) 실전적인 의미가 있는 거리 (50~70m 이상)에서도 관통할 수 있는지, 근거리라면 넓적한 화살촉도 판갑을 관통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드라마 근초고왕, 대왕의 꿈, 칼과 꽃에서 고구려의 갑옷으로 사용했다. MBC 사극 계백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찰갑을 모티브로 한 갑옷이 등장하는데, 의외로 조각들을 엇갈리게 엮는 수결법에 있어 단순히 갑찰을 나란히 붙여놓은 KBS 사극에 등장한 찰갑옷보다 더 실제 찰갑에 근접한 형태를 하고 있다. 물론, 기본적인 색감이나 실루엣 자체가 판타지라 의미는 없다.


4.3. 투구(주)[편집]



4.3.1. 종장판투구(몽고발형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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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인 형태가 특징으로, 원형의 복발(투구의 꼭대기부분에 있는 일종의 뚜껑)의 형태가 지닌 북방계 투구와의 유사성으로 몽고발형주라고도 불린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도 있다.

독일에서 발굴된 아바르족의 투구가 종장판주와 거의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목민족들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발굴 빈도를 보이고 있으며, 한반도를 대표하는 투구 형식이다. 삼국시대 모든 국가가 종장판주를 주력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보다 적지만 일본에서도 출토된 예가 있다. 크게 철판이 일반적인 돔을 형성하는 종장판주와 철판이 S자로 휘어있는 만곡종장판주로 나뉜다. 그리고 볼가리개와 수미가리개(뒤통수 가리개)가 달려있으며, 이들 가리개는 초창기에는 2~3매의 철판을 연결하거나 투구와 같은 종장판으로 만들다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갑과 같은 소찰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소찰 형식은 철판과는 달리 유동성이 있어 활동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고구려군의 투구로 사용했다.

본래 종장지판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들지만 합천 옥전 고분군 28호 출토품은 유일하게 원두정으로 고정된 형태이다(리벳팅).


4.3.2. 비늘투구(소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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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판을 이어붙여 만든 투구. 종장판투구에 비하면 출토 예가 드문 편이며, 중국에서도 소찰주가 출토된 예가 있으므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관모 형태의 복발이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출토된 유물 자체가 적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 투구로 사용했다. 드라마 계백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관모가 달린 투구를 사용하는데, 잘 쓰지도 않을뿐더러 일단 참고는 한 것 같지만 비늘투구라고 보긴 좀 이상하다.


4.3.3. 차양투구(미비부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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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판주처럼 세로로 철판을 이어붙인 뒤, 이에 차양을 단 형태이다. 고대의 투구 중 가장 화려한 편에 속한다. 이 투구는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양식으로써, 한반도 남부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는 백제, 마한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나, 그 예가 적어서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에서 만든 것을 수입했거나, 왜의 군사 활동의 흔적으로 보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대체로 그런 학설을 따르고 있다.

상술했듯이 고대 한·일의 관계나 갑옷을 비롯한 복식사적(한복, 기모노 등) 발달 양상 등을 볼 때 이 투구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견해가 있으나, 유물의 부족 등의 문제로 아직은 일부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견이다. 2007년 고흥에서 발굴한 유적은 시대를 명확하게 특정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해 여러 학설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현지에서는 종장판주와 미비부주가 혼합된 몽고발형 미비부주(종장판 차양투구)라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투구도 소수 발굴되고 있어서 현지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일단 한일 교류 과정에서 만들어진 투구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각간 위홍의 집에서 보초를 서는 견훤의 부하들이 쓰는 투구로, 드라마 근초고왕과 계백, 광개토대왕에서 백제 병사 및 장군의 투구로 사용되었다.


4.3.4. 충각부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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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적인 부품인 이마에서 정수리에 이르는 세로로 긴 철판을 중심으로 횡장판 또는 삼각판을 이어붙여 만든 투구이다. 역시 고대 일본을 대표하는 투구 형식이며, 한반도 남부에서 사용하였지만, 차양투구처럼 출토 예가 적다. 가야 무사를 재현한 자료에서 종종 보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신라 병사의 투구로, 광개토태왕에서 백제 병사의 투구로 사용.


4.3.5. 이형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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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신라의 무덤인 경주 사라리 5호에서 출토된 신라투구이다. 장방형 철판을 가로로 휘어 배치한 뒤, 원두정으로 고정한 투구인데, 비슷한 투구를 찾을 수 없어 이형주라고 한다. 코가리개나 볼가리개 부분등이 유사하여, 종장판주와 크게 다른 형태는 아니다.


4.3.6. 원주투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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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 5세기 초로 추정되는 고구려 사찰 정릉사지의 우물퇴적층에서 발견된 투구이다. 부식이 심하지만 투구 정개부에 리벳팅한 흔적과 고리를 철사로 고정한 장식부분은 구분이 될 정도이다.


4.3.7. 농오리산성투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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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평안북도 태천군 농오리산성 출토품이다. 철판의 형태(화염문철판)와 리벳팅 기법 등이 후대 투구(발해-조선중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3.8. 금동장투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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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후기로 추정되는 경상남도 합천군 옥전고분군 M3호 고분에서 출토된 투구이다. 부식전에는 금동으로 장식되어 화려했을 것이다.

화염문철판 여럿을 원두정으로 이어붙이고, 유사한 미간부를 근거로, 농오리산성 출토품같은 고구려 투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4.4. 부속갑옷[편집]



4.4.1. 어깨가리개(상박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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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서 팔꿈치까지(상완부) 보호하는 부속이다. 판갑, 찰갑과 세트로 사용되며, 판갑에는 긴 철판을 휘어 겹쳐서. 찰갑에는 쇠비늘들을 일렬로 늘어놓아 만들었다.

단, 국내에서 판갑용 상박갑이 발굴된 예는 극히 드물다. 종장판갑과 세트로 이루어진 상박갑은 현재까지 출토된 예가 없으며, 횡장판갑용 상박갑만이 일부 발굴되었을 뿐이다. 구정동 고분 출토 종장판갑에서 어깨끈 형태의 철제 부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깨와 쇄골, 상박을 전체적으로 가리는 모양은 아니다.

일부 복원 자료에서는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상완부분 방어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인지 종장판갑에도 상박갑을 적용시킨 경우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검증된 고증은 아니고, 추측의 영역에 가깝다. 제작이나 착용의 편의성을 위해 일부 부품을 가죽으로 만드는 경우는 흔한 만큼 종장판갑에는 가죽으로 만든 상박갑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내기도 했다. 가죽재질이라 부장자의 의복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 삭아 없어졌을 것이라는 이야기. 아니면 아예 상박갑을 부장품에 넣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상박갑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추측들 중 어느 쪽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에 정확한 사실은 아직 불명이다.


4.4.2. 치마갑옷(갑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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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판갑 아래에 보이는 치마 형태의 갑옷. 허리 아랫부분을 보호하는 부속이다. 실제로 상갑이 짧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고분 벽화를 참조하여 만드는 찰갑 고증 중 비교적 예전 고증에서 흔히 보이는 바지 형태의 다리를 전부 감싸는 갑옷 부속의 경우 실제로 제작하여 입게 될 경우 상식적으로 말에 올라타는 것은 고사하고 걸어다닐 때에도 활동성이 매우 떨어질 것이 뻔하고, 허벅지 안쪽까지 전부 감쌀 경우 말에 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찰갑과 유사한 포형 갑옷인 티벳 찰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 옆으로 트임이 있는 갑상이거나 실제 유물로도 여러 차례 발굴됐으며 중국(영상 7분 10~20초의 대퇴갑 착장법 참조. 해당 일러스트를 그린 작가는 해당 부품을 퇴군(腿裙)이라고 부른다.), 일본 갑옷에서도 사용하는 ㅠ자 모양 대퇴갑일 가능성이 높다.


4.4.3. 목가리개(경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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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목을 보호하는 데에 쓰이는 부분. 목가리개는 삼국시대 갑옷의 특징적인 부품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장판갑에 사용된 목가리래는 못을 사용해 완전히 갑옷에 붙어있지만, 찰갑에 사용된 목가리개는 가죽끈을 사용해 갑옷과 엮어서 연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찰갑용 목가리개 연결에 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각 지판을 연결할 때는 가죽끈을 엮어서 사용하거나 원두정(리벳)을 사용하였는데, 초창기에는 가죽끈을 사용하가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원두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두정을 사용한 목가리개는 판갑처럼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는데, 철제 고리경첩 혹은 가죽끈 경첩이 사용되었다. 가죽끈으로 만든 경첩이 제작의 편의성이 있어서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드라마 연개소문과 근초고왕, 계백(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재현됐다.

목가리개는 조선 중기까지 찰갑경번갑 등에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가리켜 호항(護項)이라고 불렀다.


4.4.4. 팔보호대(비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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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시 형태로 팔목을 감싸서 보호하는 갑옷. 발굴 당시에는 다리에 착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팔에 착용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기에 들어서 찰갑 형식의 비갑도 나온다.


4.4.5. 허벅지보호대(대퇴갑)[편집]


허벅지 부분을 따로 보호할 수 있도록 착용하는 부품.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북방계 찰갑의 영향을 받은 중국 갑옷의 대퇴갑(상술), 일본갑옷의 대퇴갑인 하이다테(佩楯)처럼 입는다는 학설이 우세하다. 상단의 마네킹이 입은 가야 찰갑 복원품의 허벅지에 있는 것이 대퇴갑.


4.4.6. 정강이보호대(경갑.脛甲)[편집]


정강이에 둘러 정강이, 종아리를 보호하는 부품. 비갑 형태의 유물 중 경갑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있는데, 판갑처럼 경첩으로 여닫을 수 있다. 신라, 가야 지역에서 발굴되는 찰갑에는 찰갑 형식의 경갑이 있다. 상단 가야 찰갑 복원품의 정강이에 있는 것이 경갑.


5. 통일 신라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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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신라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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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의 생가에서 발견된 미늘갑찰 (左 - 앞면 / 右 - 뒷면)
통일신라의 경우 무덤 양식이 도굴에 약한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하고 불교의 확산으로 부장품 자체도 줄어든데다 삼국시대만큼 전쟁이 자주 벌어지지 않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였으므로 이전 시대인 삼국시대에 비해서도 출토된 갑주 실물 유물이 부족하다. 무덤 묘제나 부장품 축소는 후술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라 상황이 비슷하다.


6. 고려시대[편집]



6.1. 몽골 침략 전[편집]



작가 우용곡이 그린 고려전기 갑옷출처
앞 시대인 삼국시대-통일신라, 뒷 시대인 조선시대와 달리 실존하는 이 시대 갑주 유물이 유달리 거의 없어 갑옷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유물로 고증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이다. 다만 몇 안 남은 기록이나 유물 등을 종합해보면, 고려 고유의 포형 찰갑송나라식 투구와 장신구를 갖췄을 가능성이 높다.

기록은 고려도경 등을 통해 추정만 가능하며, 유물의 경우,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유목민 왕조, 중원왕조)과 유사하다.

고려의 궁궐이었던 개성시 만월대 유적, 평안북도 동창군 학성리 병실터(11세기 추정), 익산 미륵사지 유적 등에서 출토된 찰갑 유물이 몇점 있다. 다만, 시기 구별은 잘 안되기는 하지만 7~20세기 찰갑들은 구조가 거의 동일한 경우가 많아 구분이 어려워 주변 유물들을 통해 비교해 봐야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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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동창군 학성리 병실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마름쇠 찰갑. 전체적으로 아래 사진에 나오는 다른 시대의 유물과 비슷한 점이 많다.
비록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투공 형태 자체만 놓고 보면 위 사진에 나오는 조선시대의 유성룡의 찰갑, 동래읍성 출토 찰갑, 창녕화왕산성 연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찰갑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는데 투공방식으로 보아 연결방식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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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 유물은 평안북도 구성시(그 유명한 귀주성이 있다)에서 출토된 원주투구 유물이 전해지나, 어느시기 유물인지 알 수 없다.


6.1.1. 일본 측의 묘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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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의 모습을 일본 측에서 기록한 삽화인 몽고습래회사. 당시 몽골군과 고려군의 복식이 묘사되어있으며 검정 군화를 신은 세 병사를 고려군으로 보고 있다.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이 사진에서 투구에 깃털이 북슬북슬하게 난 날개(?) 같은 게 달려 있는 게 고려군이라고 한다.

고려군의 투구는 전형적인 송나라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양쪽 관자놀이 부분에 봉시식(투구 드림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이 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저 문제의 군인 3명을 두고 고려군이 아니라 남송의 원병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1차 원정 당시 한족 군대는 주력이 아니었다는 점[4], 타국군과 함께 전투를 벌일 경우 몽골군은 타국 군대를 최전선에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려군이 선두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개심사지 5층석탑에 새겨진 팔부중상과 몽고습래회사 속 고려군으로 추측되는 병사들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점 등 고려군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근거들이 꽤 있다.

단 몽고습래회사는 이걸 그린 화가가 직접 몽골군과 고려군을 본 적이 있는지가 불분명하며, 주로 고려군이라고 하는 군인 세 명이 그려져 있는 부분이 그림 속 다른 부분들보다 유독 선명하여 후세에 가필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는 등 정확성에 의문이 많이 가는 유물이라 이걸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즉 몽고습래회사 역시 고려군 복식을 고증하는 데에 있어서 한계가 있지만 일단 고려군을 묘사한 회화가 너무 희귀한데다, 얼마나 정확하게 그렸는가와는 별개로 문제의 그 군인 3명이 한반도 왕조의 복식과 유사하거나 고려 관련 기록과 일치하는 묘사가 있어서[5][6] 현재로서는 고려군을 고증하는 데에 있어서 참고할 수밖에 없는 유물인 건 사실이다.


6.1.2. 고려시대 예술 속의 묘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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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경대방광불화엄경에는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고려 갑옷보다는 오히려 송나라 갑옷에 가깝다.[7]
개심사지 5층석탑에 남아있는 암각화.
국조오례의를 바탕으로 그린 조선시대의 찰갑.
첫 번째, 두 번째 그림의 고려시대 갑옷과 세번째의 조선시대 갑옷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투구와 비슷한 봉시식이 달린 투구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여말선초부터는 송나라 양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며, 조선시대에는 몽골의 투구인 몽고발주와 첨주형 투구가 주로 쓰인다.

  2. 고려시대엔 호항이 보이지 않는다.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망토에 가려 안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대신 스카프같은 견건(肩巾)을 목에 둘러 앞에서 묶고 있지만 조선시대엔 견건을 맨 기록이 없고 호항을 목에 두르고 있다.

  3. 고려시대엔 허리에 복대를 두르고 그 복대 위에 오색 찬란한 끈을 묶지만 조선 시대엔 그냥 전대를 묶는 걸로 보인다.[8]

이 세 가지 정도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조선시대 초중기의 찰갑 양식과 거의 판박이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포형 찰갑이 몽골 침략 이후 투구나 일부 장구류가 송나라식에서 몽골식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디자인면에서 큰 차이 없이 계속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참고1
참고2


6.1.3. 고려도경 속 묘사[편집]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 금화고모(金花高帽 금꽃으로 꾸민 높은 모자)는 거의 2자[尺](약 60cm)나 되고, 비단옷과 푸른 도포[錦衣靑袍]에 헐렁하게 맨 띠[帶]는 고(袴 바지)에까지 드리우니, 대개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아서 특별히 높은 모자와 비단옷[錦衣]을 입어 그 모양을 장하게 한 것이다. 이제 그림을 그려서 각각 그 명색(名色)을 뒤에 나열한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3만 명에 달하는 고려의 용호중맹군(龍虎中猛軍)(국왕 친위대)이 모두 갑옷을 착용했다고 하며, 이 갑옷은 위 아래가 붙어 있는, 봉액(逢掖) 형태이고, 어깨를 가려주는 부박(覆膊)이 없다고 했고, 또 다른 장군의 갑옷은 철찰(鐵札)을 검은 가죽으로 덮고 각각의 철찰을 명주실로 꿰매어 서로 붙어 있게 하며, 허리에는 오색 꽃무늬 띠를 드리웠다고 한다. 계급이 높아질수록 띠가 많아졌으며 가장 높은 계급은 띠가 10개가 넘었다고 한다.

여기서 봉액(逢掖)은 겨드랑이가 만났다는 뜻인데, 이 한자가 봉액(縫掖)(겨드랑이를 꿰맸다는 뜻)이나 이 단어(縫腋)[9]를 잘못 쓴 것이라면 고려 시대의 포형 갑옷도 조선 시대의 갑옷과 마찬가지로 옆트임이 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포형갑옷과 똑같은 방식으로 추정된다. 즉, 고려 시대의 갑옷 상의는 조선시대의 것과 거의 똑같은, 중앙에서 여미며 옆트임이 난 포형 갑옷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착장시엔 그냥 등에 걸친 것으로 보인다. 갑옷의 등 부분이나 어깨에 고정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 방탄모보다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투구를 목에 걸면 당연히 목이 졸린다. 그리고 머리에 두건을 쓴 차림이었다고 하는데 시대적 배경으로 보건대 문라건이나 '호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항목 참고.

이 구절 때문에 고려군이 투구를 쓰지 않고 싸웠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서긍은 전투 중인 고려군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중앙군이 줄지어 사열한 모습을 본 것이다. 즉 현대 기준으로 보자면 의장대를 만난 것과 같기 때문에 서긍이 본 고려군이 투구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싸우러 나간 고려군이 투구를 쓰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려도경 원문


6.1.4. 기타[편집]


당연한 얘기지만 사극 같은 데선 고증을 아주 대놓고 무시한다. 애초에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와는 달리 유물도 존재하지 않으니... 무장을 자체 마련했을 지방군이라면 삼국시대 종장판주를 쓰고 나와도 고증이 틀렸다고 할 수가 없는 시대다.


파일:귀주대첩.jpg


파일:동선역전투.jpg

귀주 대첩 일러스트
동선역 전투 일러스트
그나마 조선전쟁 생중계로 유명한 산그림 작가가 가장 잘 고증했다. 사격전을 치르는 궁병들이 투구 대신 머리에 문라건을 쓰고 있거나[10] 여말선초와 흡사한 양식의 포형 찰갑, 목에 두르는 견건, 병사들의 경우 고려도경에 나온 묘사대로 어깨갑옷이 없는 점 등 그나마 가장 기록에 맞게 고증된 편이다.

개차반 수준의 사극 고증과 오스프리의 치명적인 삽화 오류 때문인지 토탈워 센터에선 도대체 고려 갑옷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기서도 위 산그림 작가의 그림이 가장 정확한 듯하다는 평, 송나라 갑옷과 상당히 흡사하단 평 등 어째 한국의 사극 작가들보다 더 정확하게 아는 것 같다.


6.2. 몽골 침략 후[편집]


원나라의 침략 이후로 사회가 원나라의 문화를 급속하게 받아 들이면서 이를 따라 갑주도 비슷하게 변한다. 사실상 고려 후기의 갑주와 조선시대의 두정갑과 그 투구는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

찰갑은 7세기~20세기 내내 큰 변화가 없었다. 즉 삼국시대 말에 3~6세기 찰갑(동환식찰갑)에 비해 간소화 된 이후는 조선시대까지 큰 차이점이 없다. 이는 찰갑이라는 갑옷의 제작 기법상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중국이나 유목민족들 역시 고중세의 찰갑과 근세의 찰갑을 비교해보면 재질이나 수결법 등이 달라지기는 하나 전체적인 구조의 큰 틀은 별 변화가 없다.

관련 유물로는 제주도 항파두리 유적에서 출토된 찰갑편이 있으나, 아직 정확한 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정확한 구조를 알 수는 없다.


6.2.1. 갑옷 양식[편집]


고려 시대의 주된 갑주 양식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찰갑경번갑 그리고 쇄자갑이다. 경번갑은 쇠사슬과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며, 쇄자갑은 서양의 체인메일처럼 쇠사슬을 이어 만든 갑옷이다. 경번갑과 쇄자갑은 여말선초에는 확실히 유물이 출토되나 그 이전에는 사용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데, 고구려의 기록에서도 쇄자갑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중기에도 최소한 쇄자갑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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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정지 장군의 경번갑 유물(左) 및 복원품(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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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에서의 경번갑
드라마 정도전에서의 경번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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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쇄자갑 무장[11]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려시대의 갑옷과 투구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갑주가 보관되어 있다.[12] 단 신사 측에서 쓴 설명과는 달리 전시된 갑옷과 투구의 양식은 한반도보다는 차라리 원나라나 청나라의 그것과 비슷하다.


6.2.2. 투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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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투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중기까지 널리 사용된 첨주형 투구이다. 드라마 용의 눈물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영남과 기타 제장들이 쓰고 나온 투구가 바로 이 투구라고 할 수 있다. 첨주형 투구는 긴 철판 4개가 세로 방향으로 둥글게 배열되고 철띠와 쇠못으로 이를 고정하는 식으로 만들어진다. 이외에도 몽고습래회사나 당대 불화 빛 불탑 부조 등에서 보이는 모습을 보면, 초중기에는 봉시식이 달린 송나라식 투구도 썼을 가능성이 높다.


7. 조선 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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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 총대장에 해당되는 높은 장군급 이상의 무관이면 갑옷 속에 반드시 융복[13]을 껴 입었다. 이는 임금이 갑옷을 입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7.1. 초중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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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조선전쟁 생중계'의 일러스트 중 하나. 국조오례의에 그려진 찰갑을 고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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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부성 해자에서 발굴된 찰갑의 복원품. 국조오례의에 그려진 찰갑은 앞여밈 방식이지만 이 찰갑은 옆구리 여밈 방식이며 목가리개(호항)이 없는 형식으로 고증되었다.

초기에는 찰갑(철제,피제,지제)이 가장 많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다른 갑옷은 고유의 이름을 가졌지만, 찰갑만은 그냥 갑이나 피갑 또는 지갑 그리고 철갑 등 재료만 구분해서 불렸다. 그 외에도 쇠사슬을 엮어 만든 쇄자갑, 쇄자갑에 철판을 달아 방어력을 보강한 경번갑, 의장용 갑옷인 두두미갑과 황화갑, 조끼 형태의 엄심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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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국조오례의에 그려진 두두미갑, 아래는 리조복식도감에 그려진 황동두정갑. 비단으로 겉감을 만들고 사슴가죽 편찰을 사용한 갑옷이다.#

세종실록 오례의 병기조 부분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 당시에 성행했던 갑옷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기존에 두두미갑만 존재하던 의-두정형 갑주(직물에 갑찰을 두정으로 고정한 형태의 갑옷 종류를 통틀어 일컫는 용어)는 이때부터 두정갑과 두두미갑 그리고 황동두정갑으로 세분화 된다.

유물로는 유성룡의 가죽 찰갑 갑옷이 대표적으로서, 이는 조선시대의 가장 오래된 찰갑 유물로써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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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유물로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중에 발견된 수안동 찰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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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병선마당' 조형물에 재현된 조선 수군들의 모습, 맨 우측 장수는 부산 동래성 해자 발굴품을 참조한 첨주 투구에 찰갑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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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에서 재현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 조총부대의 모습. 장수는 장식을 배제한 일체형 두정갑에 복숭아 모양 간주형 투구, 군졸들은 첨주형 투구와 포졸복 위에 흉갑(찰갑, 지갑, 두정갑 등이 뒤섞여 있다)을 입고 조총 탄약이 든 죽관을 두른 모습이 잘 고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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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당시에도 아직까지 호항이 남아 있었다. 이는 훗날 드림의 방호력이 좋아지며 차츰 사라진다.


7.2. 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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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에서 묘사된 두정갑. 투구와 기본 갑옷 이외에도 엄심(사타구니 보호대), 호액(옆구리보호대), 갑상(허벅지보호대)으로 이루어진 부속갑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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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조선시대 양식 투구.

임진왜란 종전 후 전쟁에서 겪은 갑옷과 무기의 장단점을 따져, 기존의 찰갑에 비해 유지와 보수가 수월한 두정갑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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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국립 박물관이 소장 중인 고종 황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정갑과 투구이다. 특이하게 팔을 움직일 때마다 견장 부분[14]의 몸이 꿈틀거리고 입도 벌려졌다 닫히게 세세한 관절 디테일을 묘사했는데, 이는 이 당시 갑옷의 화려함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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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오늘날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두석린갑도 이때 등장하였는데, 이는 두석으로 된 비늘 갑옷을 의미한다. 어린갑 또는 용린갑으로 불리는 갑옷들도 두석린갑과 같은 갑옷이거나, 거의 유사한 갑옷들이다.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전쟁장면이 나올 때 고위급 장수는 두석린갑을, 중간 계급 장수들은 두정갑을, 하위 계급 장수들은 구군복을, 졸병들은 포졸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흔히 묘사된다. 물론, 두석린갑은 고위급 장수가 입었던 것은 맞지만 실제 전투용이라기보단 의장용의 성격이 강했으며 방어력이나 내구성 자체도 두정갑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두정갑 외에 지갑(갑옷)(=엄심갑, 조선 중기부터는 지제찰갑이 쓰이지 않아 지갑으로 부름)과 면갑 그리고 삼승갑 등이 군사들의 갑옷으로 널리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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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제배갑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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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갑 유물

조선 말기에는 면제배갑, 삼승갑주, 흉갑(철엄심갑으로 추정), 면주 그리고 등투구가 만들어졌다.


8. 여담[편집]


  • 한국 사극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갑옷은 고증 수준이 상당히 심각하게 나쁘다.[15] 특히 고려 이전 시기를 다루는 사극에서 고증 문제로 가장 많이 까이는 요소 중 하나이다. 조선 갑옷 또한 제대로 고증 안 돼서 포졸복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 일례로 일본의 자위대 부사관 출신인 밀덕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는 일본 갑옷과 함께 직접 한국 고대 갑옷 자료를 조사하여 3D 모델로 고증하고 있는데, 고구려 갑옷 자료 페이지에서 "한류 영화 등에서 나오는 호화로운 갑옷은 확인하지 못했다"(3번 문단 마지막 줄)고 밝히기도 했다.

거기다 해당 사이트에서는 한국 갑옷을 참고할 수 있는 드라마로 그나마 대조영, 연개소문, 근초고왕을 추천하고 있는데, 주몽 등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하지만 이들도 근초고왕을 제외하면 갑옷이 별로 좋은 고증이 아니라는 점에서 갑옷이 제대로 고증된 사극이 적다는 사실만을 반증하는 꼴이 됐다. (참조 포스팅) 다만 갑옷 고증의 경우 일본이 유독 잘 지키는 것에 가깝지, 중국이나 서양만 해도 대부분 안 지키는 경우가 많아서 한국만 유독 고증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증은 예전에 비해서 발전하고 있는 분야다. 예산이 문제일 뿐이다.[16][17]

  • 대체로 사극의 의상 고증은 복식학자들이 하는데, 일반적으로 한복 고증에 주로 힘을 쏟기 때문에 갑옷은 소품 제작자에게 만들어달라고 대충 의뢰하거나 다른 작품에서 사용한 것을 돌려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 기본적으로 주연급 인물들에게 투구를 안 씌우는 것은 애교수준이고, 주인공과 주연급 인물은 고증과는 전혀 무관한, 마치 판타지 게임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려한 비닐 소재 갑옷을 입는 경우가 태반이다. 점퍼 갑옷에 이글루 투구 해당 짤방에 나오는 태조 왕건은 지금 사극과 비교해보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복장 고증이 뛰어난 편이다. 비록 후대에 들어 만들어진 근초고왕이나 정도전 등에 비하면 갑옷의 세세한 디테일 오류나 재질 같은 부분에서 많이 부족하지만 당시 예산이나 기술력 문제도 감안할 필요가 있고, 최소한 후술할 주몽이나 태왕사신기처럼 대놓고 고증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 한류에 힘입어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등의 많은 국내 사극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 예로 든 해당 두 작품은 발고증 판타지 갑옷의 끝판왕, 종결자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물론, 둘 다 애당초 제작진이 '퓨전'을 지향한다며 고증이란 걸 염두에 두지 않은 작품이긴 하다.

하지만 퓨전사극임에도 오히려 재미와 고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잡은 추노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무리 퓨전사극이라고 고증을 대놓고 무시해도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고대사를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한국 사극을 보는 외국의 시청자들에게 고대 한반도의 갑옷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상황이다

태왕사신기는 주 수출 타겟이었던 일본 반응이 미적지근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으나, 주몽은 이란 시청률 85%, 카자흐스탄 시청률 80%에 육박했는데, 이란과 카자흐스탄 시청자들이 고구려 갑옷을 찰갑이 아닌 드라마에 나온 근본없는 판타지 갑옷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한국의 시청자들도 포함. 일부러 논문이나 자료사진 등을 찾아보는 사람이 아닌 한 드라마에 나오는 모습을 그대로 고증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 드라마 한편 나올 때마다 갑옷고증으로 신나게 욕먹는 게 일상다반사가 되다보니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가 결국 방송사 측에서도 이 문제를 느꼈는지 2010년대 들어서 제작되는 사극은 그나마 고증 자료를 슬쩍 엿보기라도 한 듯한 갑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근초고왕대왕의 꿈은 드라마 본편의 평가와는 별개로 갑옷만은 상당한 수준으로 재현해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후 최근으로 오면 올수록 남한산성(영화)고려 거란 전쟁 등 준수한 갑옷 고증을 자랑하는 작품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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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박갑과 대퇴갑, 경갑까지 모두 갖춘 완전체 상태로 발굴됐지만, 기사가 나온 2013년 기준으로는 사진처럼 흉갑과 목가리개, 갑상만 복원된 상황이다.[2] 디펜스 코리아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원문 출처 링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3] #[4] 몽골의 1차 일본 침공 당시 남송 군대가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군인들이 고려군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정설처럼 돌아다녔는데,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서는 몽한군(몽골인+한족 군대) 25,000명과 고려군 8,000명이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몽한군 중 한족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알 수 없으나 10만의 한족이 출병했던 2차 원정 때에 비하면 최소한 한족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5]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는 고려군의 갑옷을 두고 어깨갑옷이 없으며 상하의가 붙어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몽고습래회사 판본 중에는 이 문제의 군인 3명이 정확히 이 묘사에 부합하는 형태의 찰갑을 입은 판본이 있다. 또한 이들이 입고 있는 옷 역시 두루마기 등 한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에 두정갑의 두정과 유사한 땡땡이 무늬가 있어 저 옷이 두정갑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많았는데 그럴 가능성은 낮다. 애초에 두정갑은 겉이 천일 뿐이지 속에는 철편이 달려 있어서 몽고습래회사 속 묘사처럼 휘날릴 수가 없으며, 소매부터 끝단까지 두루마기와 저 정도로 똑같이 생긴 두정갑은 몽고습래회사 외의 회화나 기록에서 나타난 적이 없고 실제 유물도 발굴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6] 단 몽골 전통 복식 역시 한복과 같은 북방계 양식을 취하고 있기에 유사한 지점이 있고, 어깨갑옷이 없는 갑옷은 고려뿐만 아니라 활쏘기를 중시하는 국가에서는 심심찮게 사용했던 양식이라 이것만으로 고려군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좀 더 올라가는 정도.[7] 불교 예술에 등장하는 갑주는 정말 그 시대의 갑주를 참고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당송풍의 양식적인 형태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 이것만으로 고증을 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8] 다만 조선 역시 악학궤범에서 묘사한 황화갑 등의 의장용 갑옷에서는 복대를 두르기도 한다.[9] # 조선시대의 포형 갑옷이나 대창의처럼 옆트임이 겨드랑이 아래까지 길게 들어가고 소매가 넓은 옷을 의미하며, 일본어로는 호에키(縫腋)라고 부르며 일본에선 아직도 헤이안 시대의 관복을 의미한다.#[10] 단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어서 무장이 부실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린 것이지 고려도경 속 기록을 보고 이렇게 그린 것은 아니다. 본 그림이 등장하는 책 고려전쟁 생중계 속 다른 일러스트들을 보면 정규군들은 전투 도중 칼같이 투구를 쓰고 있다.[11] 출처는 책 '조선전쟁 생중계' 의 일러스트 중 하나. 일러스트 작가의 블로그를 참조해보는 것도 좋다.[12] https://www.joongang.co.kr/article/4768626#home[13] 조선시대의 군사복식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조선 중기까지는 갓(모자)을 쓰고 철릭을 입는 조합만 있었으나, 17세기부터는 전립구군복의 조합도 등장한다. 단, 후기까지도 갓+철릭 조합 역시 계속 사용되었다.[14] 견철이라고 하는 부품인데, 타국의 두정갑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 두정갑만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무관들이 입었던 두정갑에 달린 견철은 그냥 길쭉한 철막대기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이 두정갑은 매우 정교한 장식이 붙어 있다. 괜히 황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아닌 것.[15] 좀 심하게 말하면 판타지 영화인 반지의 제왕에서 나왔던 고중세 서양식 갑옷들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그대로 나오는 꼴이다(...)[16] 서양에도 바이킹 롱패딩이나 적이 쉽게 잡아서 벗겨낼 수 있도록 뿔 달린 투구나 쓰는 고증 말아먹는 영화나 드라마도 2020년에 아직도 얼마든지 나오고 있다. 일반인들은 고증 문제는 신경도 안쓰고 그저 애호가들의 지식자랑 정도로 여긴다. 특히 고질적인 문제는 자꾸 갑옷 더럽게 똥칠하고 다니는 거. 당시 유럽인들은 갑옷에 프라이드를 가졌고 전투상황이 아니라면 갑옷을 귀중하게 다뤘다.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갑옷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가격이었기 때문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중히 다뤄야 했다.[17] 따라서 고증에 신경쓰는 작가들은 평상시에 갑옷을 정비하는 모습까지 꼼꼼히 챙긴다. 대표적으로 덩크와 에그 이야기에서 덩크가 에그를 종자로 받아들일 때 제일 먼저 물었던 질문들 중 하나가 "갑옷을 어떻게 닦는지 알고 있느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