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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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쟁점
3. 기타



1. 개요[편집]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1951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6.25 전쟁이 소재인 작품으로 추정된다.


2. 쟁점[편집]


문제는 한국에서의 학살이 정확히 어느 진영의 학살을 묘사한 것인지 알려져있지 않아 국내에서 정치 성향에 따라 해석이 갈린다.[1] 흔히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혹은 신천 양민 학살을 주제로 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일보 사설에서 강규형 교수는 피카소의 공산주의 활동과 관련해 공산주의 진영의 허위 선전물이라 주장하였으나, 한겨레에서는 신천 학살과 연관성이 없는 작품이라고 분석하며 위 기사를 주장하였다. 피카소의 반군국주의, 반전주의 성향으로 보아, 그냥 학살 전체를 비판하였던 듯.

하여간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게르니카>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반전 작품 중 하나로, 당시 '미군을 학살자로 묘사했다'는 주장도 생기는 바람에 한국에선 1980년대까지 금지 예술품이기도 했다[2]. 물론 누가 누구에게 했든 학살은 학살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 표지에 이 그림을 쓰고 있다.

3. 기타[편집]


2021년 5월 피카소 작품의 한국 전시 당시 같이 들어와 한국에서 전시되었다. 작품의 구도는 프란시스코 고야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의 구도에서 따온것으로 추측된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국내에서는 민주화 이전인 5공화국 시절까지는 존재를 부정당했던 작품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미군과 국군을 학살자로 묘사했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직접적인 이유는 피카소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는 크레파스 이름에 피카소를 썼다는 이유로 안기부에 잡혀가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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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각에서는 피카소가 공산주의자이고 자본주의 진영을 비판하는 작품을 많이 그렸기 때문에 이 작품이 미군이나 국군, 혹은 서청 등의 극우 테러집단에 의한 학살이 모티브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피카소는 남침을 승인했던 스탈린이나 북한을 대규모로 지원했던 마오쩌둥도 매우 혐오했다.[2] 사실 한국전쟁 중에는 국군과 미군은 물론이고 인민군과 중공군, 심지어는 정치깡패인 서북청년단에 의해 벌어진 학살사건도 부지기수였다. 사실 이 작품이 금지작품이 된건 단순히 미군을 학살자로 묘사해서가 아니라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에서 좌파정부를 지지했던 것도 한 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