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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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화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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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4.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5.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7.svg파일:Twins_champion_v2.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4


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05
2006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0 KBO 리그 타격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89, 1990 KBO 리그 출루율왕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86 KBO 리그 승리타점왕












한대화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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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5번}}}
결번

한대화
(1983~1985)


박창언
(1986)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8번}}}
김종윤
(1982~1985)

한대화
(1986~1993)


박재용
(1994~1999.4.15.)
LG 트윈스 등번호 9번
김상훈
(1984~1993)

한대화
(1994~1996)


이병규
(1997~2006)
{{{#000000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8번}}}
정기창
(1996)

한대화
(1997)


윤재국
(1998~199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6번
박정환
(1994~2000)

한대화
(2004~2009)


김한수
(2010~2019)
한화 이글스 등번호 80번
결번

한대화
(2010~2012)


전대영
(2013~2014)
KIA 타이거즈 등번호 89번
미나미타니
(2012)

한대화
(2013~2014)


유동훈
(2015~2018)




파일:한대화.jpg

한대화
韓大化 | Han Dae-hwa

출생
1960년 8월 29일[1] (63세)
충청남도 대전시 신흥동
(現 대전광역시 동구 신흥동)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신흥초등학교 (졸업)
한밭중학교 (졸업)
대전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체육교육학 79 / 학사)
포지션
3루수, 유격수[2], 지명타자[3]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1차 지명 (OB)
소속팀
OB 베어스 (1983~1985)
해태 타이거즈 (1986~1993)
LG 트윈스 (1994~1996)
쌍방울 레이더스 (1997)
지도자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1998~2003)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4)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05~2009)
한화 이글스 감독 (2010~2012)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4] (2013)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14)
경력
KBO 경기운영위원 (2015~2020)
KBO 규칙위원 (2016~2018)
병역
예술체육요원[5]
본관
청주 한씨[6]
가족
아내 윤향수
장남 한충일, 차남 한권일
종교
무종교[7]

1. 개요
4. 경기감독관
5. 김성근과의 악연
6. 여담
7. 연도별 주요 성적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야구인.

현직은 KBO 경기운영위원회 위원.

현역 시절인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이자 3루수로 평가받았고, 선동열, 김성한 등과 함께 해태의 최전성기를 이끈 주역이었다.

선수 시절의 등번호는 5번(OB)-8번(해태)-9번(LG)-8번(쌍방울)이다.


2. 선수 경력[편집]


한대화의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대화/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경기감독관[편집]


파일:0000264073_001_20170512174734797.jpg

2015년부터 KBO의 경기 운영위원으로 선임되어 행정가로 나서고 있다. 겉보기엔 별일 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러 모로 신경쓸 일이 많고 심판들에 대한 평가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고 한다.

상당히 보람을 느낀다고 하며, 감독을 다시 하거나 해설을 맡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이상한 팬들은 한대화가 인터뷰에서 다시 한화 감독이 된다면 감독의 색을 입히기보다 팀컬러를 살려 공격적인 야구를 하겠다고 밝힌 것을 거론하면서 다시 감독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감독으로서 온갖 고난을 겪은 한대화가 감독직을 다시 맡을 의향은 거의 없어 보인다.


5. 김성근과의 악연[편집]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대화의 입장에서 김성근은 스승이 아니라 원수다.

일반적으로 SK 팬이나 OB(현 두산) 팬들은 김성근이 감독을 하는 동안 그 밑에서 활동했기에 다른 여느 감독들(조범현, 김경문, 박종훈 등)과 같은 김성근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썩 달가운 소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8]

일단 OB 시절 한대화가 훈련 중 A형 간염으로 쓰러져 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자 훈련광인 김성근 눈 밖에 나면서 구단과의 사이도 틀어지게 되었다.[9] 이후 선수 말년에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은퇴할 때도 구단 측에서는 '그래도 3루수 레전드니 은퇴식은 챙겨줄게' 하는 마당에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잉여에게 무슨 은퇴식?' 이라고 김성근이 은퇴식을 못하게 압력과 디스를 넣은 통에 더 사이가 틀어졌다. 지금도 표면적으로 디스는 걸지 않지만 아마 속은 상당히 곪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류현진 등판으로 김성근과 한대화 사이에 설전이 오갔을 때의 분위기에 의하면 여전히 좋지 않은 관계로 보인다.

게다가 김성근의 휘하에서 활동한 시간보다는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이후 김응용야구를 한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선수 시절만 해도 김응용과 더 오래 있었으며, 코치직도 김응용과 같이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엔 김응용삼성 라이온즈 사장이었다. 지금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이 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애초에 김성근의 빠돌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느 선수와 함께 했었으니 가르침을 받았다며 원포인트 레슨받은 박찬호김병현이고 다 김성근 제자라는 주장을 하니 김성근 제자 타령은 걸러 들어야 한다.[10]

6. 여담[편집]


  • 대전 출신으로 대학 빼고 초중고 모두 대전에서만 다닌 대전광역시 토박이지만, 광주광역시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전성기도 해태 시절이었기 때문에 올드 해태 팬들 중에는 그를 호남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11] 그러다 보니 OB 시절 트레이드 대상 명단에 올랐을 때도 자신은 새로 창단될 대전 연고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가기를 매우 희망했지만, 구단은 그 말을 무시하고 해태로 트레이드해 버렸다.[12] 이후 해태에서 중심 타선을 맡으며 전성기를 보냈을 때도 언젠가는 고향 팀 빙그레에서 한 번 뛰어보고 싶다는 의견을 몇 번 보이기도 했고, 1993년 말 해태에서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될 때도 고향 팀 한화 이글스에서[13] 뛰어보고 싶다며 한화로 트레이드를 요구하기도 했다. 정작 은퇴는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하면서 은퇴할 때까지 선수로는 한 번도 고향 팀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어보지는 못했다. 다만 한대화가 한국시리즈에서 고향팀 빙그레 상대로 홈런도 치고 적시타도 때리는 등 해태의 승리에 일조해 빙그레를 응원하던 충청권 야구팬들에게 더 미움을 받았다. 때문에 한동안 대전 원정경기를 갈 때 야구장에 "배신자 한대화"라는 현수막이 걸렸을 때 상당히 억울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훗날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선수로써 입어보지 못한 고향 팀의 유니폼을 감독으로써 입어보게 되어 감회롭다고 하였고, 디씨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이름이 마킹된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조공받았을 때도 뭔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 성격이 상당히 순하고 유들유들한 편이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심판들에게 항의할 때 한대화 감독이 만만해 보이는지 심판들이 막 뻗대는 경향이 있다.

  • 1986년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어 그 해 타율 0.298, 14홈런, 66타점으로 맹활약한 한대화는 이듬해인 1987년 시즌 타율이 0.236로 급전직하 했는데 이유는 원래 시력이 안 좋아서 콘택트렌즈를 착용했지만 렌즈가 자주 말라서 경기 도중 화장실에서 몇 번이고 안약을 넣는 불편함 때문에 아예 맨눈으로 시합에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다못한 한 기자가 "렌즈가 그렇게 불편하면 안경을 쓰는게 좋지 않느냐" 라고 묻자 순둥이였던 한대화는 "그러면 (김응용)감독님이 건방지다고 하실 것 같다"[14]며 주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기자가 대신 김응용 감독에게 "한대화 선수가 경기할 때 콘택트렌즈가 불편하다고 하는데 안경을 써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봤는데 김응용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답하길,
허허허, 아니 야구만 잘한다면 안경 아니라 쌍안경을 쓰고 나와도 누가 말린대?[15]
그렇게 허락을 받은 한대화는 안경을 쓰기 시작했고, 1988년 시즌 타율 0.320, 18홈런,[16] 57타점 이란 준수한 성적으로 보답했다.

  • 한대화의 안경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 더. 1990년 8월 1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사직 원정경기 도중 1루에서 2루로 진루하던 한대화는 상대 야수가 잘못 던진 공에 얼굴을 맞아 안경이 깨지고 오른쪽 뺨을 여섯 바늘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이후 정신을 차린 한대화는 구단 측에 "안경도 신체의 일부이니 경기 도중 깨진 안경값도 보상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해태의 이상국 운영부장은 "그럼 경기 도중에 금이빨이 빠져도 물어줘야 하냐?" 라고 되받아치며 그냥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한대화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상국 부장은 판사이던 친구에게 유권해석을 구했고, 판사는 "안경도 신체의 일부라고 간주하는 것이 맞다"는 답을 내놓았다. 결국 이상국 부장이 "안경 렌즈는 가격이 천차만별이니 알아서 하라. 구단은 안경테 값만 주겠다"며 통보하자 한대화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안경테 값 66,000원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1990년도의 66,000원은 오늘날의 20만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 2011년에 모 언론사에서 야구감독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을 뽑으라고 했을 때 유일하게 답변하지 않았다.# 노무현을 고른 이만수이명박을 고른 박종훈의 답변이 상당한 논란이 된 것을 보면 꽤 현명한 대답이었다.[17]

  • 아버지 한상준(韓相俊, 1924. 2. 25 ~ ?)은 천도교 대전 교구장을 역임했다. 한대화도 그래서 천도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무종교로 밝혀졌다.

  • 김시진과 무척 친하다. 고교부터 대학. 프로시절, 코치시절에도 같이 있었던 적이 없는데 사이가 가깝다. 한화 이글스 감독 당시 넥센전이면 넥센 덕아웃으로 찾아가 김시진에게 "꼴뚜기 형님"이라 별명을 부르며 아이스크림을 먹여주는 정도로 친하다. 이런 관계로 한때 둘의 관계를 소재로 한 혀갤문학이나, 칰갤문학이 판치기도 했다.

  • 이종범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 중에 한명이었다고 한다. 이종범은 신인시절 한대화의 실력도 뛰어나지만 인품이 훌륭해서 반했다고 한다. 첫 한달간 엄청 못한건 아니지만 2할대 초반이라 힘들어했는데 5월초에 한대화가 따로 불러서 부드러운 말투로 "종범아 너는 앞으로 우리팀 최고의 선수가 될테니 눈치보지 말고 마음 놓고 니가 하고 싶은대로만 야구를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다. 걱정말고 니가 하던대로만 열심히 해라."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이 너무 기뻤던 이종범은 그때부터 마음이 갑자기 편해지더니 방망이가 잘 맞기 시작해서 5월 타율이 눈에 띄게 올라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한대화의 그날 조언이 30년동안 잊혀지지 않았고 그의 인품을 지금도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실제로 한대화는 사생활에서 부드러운 선배였고, 후배들을 갈구거나 하는 선배가 아니었다고 한다.[18] 김성한 역시 이종범이 1993 한국시리즈 4차전까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자, "너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야구해라"는 조언에 힘입어 이종범은 5,6,7차전을 맹활약으로 해태를 우승시킨 점을 감안하면 이종범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더 야구를 잘하는 선수라는 걸 입증하는 에피소드이다.

  • 헤비 스모커다. 실제로 경기 중에도 담배를 피운다고 인터뷰에서도 직접 밝힌 적이 있고, 한화 감독 시절에도 경기 도중 작전이 실패했다거나 팀의 대량실점 등 경기가 제대로 안 풀리면 수시로 덕아웃 뒷문으로 나가는 모습이 심심찮게 비춰졌다. 여기에 2012년에는 한대화 감독을 비출 때 "한 대 피우고 싶으시죠?" 라는 문구와 함께 니코스탑 광고가 깨알같이 뜨기도 했다.

  • 동국대학교 3년 선배인 강석우와 친한 편인지라, 그 영향으로 강석우가 한화의 잠실 원정 경기 직관을 오기도 했다.

  • 현역 시절 1993년 KBS 코미디대상에서 뜬금없이 심사위원으로 나온 적이 있다. 사실 당시 KBS 코미디대상 심사위원들 대부분은 KBS 예능국장 등 높으신 분들과 선배 코미디언들이 주를 이루고 일부 셀럽들에게도 심사위원 자격으로 초빙하기도 했었다. 만화가 강철수배금택도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한대화도 바로 그 연장선에서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았다. 당시 해태의 V7 주역이기도 하고 개인 통산 7번째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이기도 했으니. 여담으로 이 해 미스코리아 진에 오른 궁선영 또한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연했었다.


  • 결혼을 상당히 일찍 했으며, 또한 50대 초반이라는 매우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다.

7.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OB
88
313
.272
85
17
5
(2위)
5
44
39
4
19
.406
.313
1984
74
189
.238
45
8
1
1
16
22
5
29
.307
.339
1985
38
53
.226
12
1
0
2
7
5
0
1
.358
.241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해태
103
342
.298
(5위)
102
24
(2위)
2
14
(5위)
66
(2위)
50
(10위)
8
42
.503
(2위)
.372
(5위)
1987
94
301
.236
71
16
0
13
(5위)
36
39
5
52
.419
.347
1988
101
356
.320
(7위)
114
(5위)
18
(8위)
1
18
(3위)
57
(6위)
51
6
51
.528
(3위)
.403
(7위)
1989
106
358
.279
100
14
2
13
(5위)
63
(6위)
52
15
81
.439
(7위)
.409
(1위)
1990
119
418
.335
(1위)
140
(2위)
20
(7위)
3
15
(5위)
86
(2위)
73
(2위)
10
76
.505
(5위)
.432
(1위)
1991
92
336
.301
101
17
3
22
(4위)
73
(8위)
62
8
55
.565
(3위)
.392
(7위)
1992
110
362
.268
97
16
1
20
(9위)
74
(9위)
69
8
67
.483
.379
1993
107
335
.266
89
13
1
13
(8위)
46
46
4
53
.427
(9위)
.364
(10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LG
106
357
.297

106
15
1
10
67
(9위)
49
3
53
.429
.384
(6위)
1995
98
295
.241
71
13
0
8
37
25
1
26
.366
.300
1996
52
138
.232
32
5
0
5
16
12
1
16
.377
.312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쌍방울
43
111
.225
25
2
0
4
24
16
1
20
.351
.344
KBO 리그 통산
(15시즌)
1331
4264
.279
1190
199
20
163
712
610
79
641
.450
.370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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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7월 8일.[2] OB 베어스 시절 및 1987년, 그 외에도 이따금 유격수로 출전하기도 했다.[3] LG 이적 후로 지명타자로서 출전하는 빈도가 높아졌다.[4] 사실상의 2군 감독[5]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6] 문양공파(文襄公派) 37세 화(化) 항렬.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한대화 족보.png[7] #[8] 본인도 김응룡에겐 감사를 표하나, 김성근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9] 재미있는 건 김성근은 쌍방울 김독 재임시절 심성보가 당뇨로 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자 전용 스케줄을 짜 주는 등 철저한 관리와 배려를 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심성보의 경우 자기관리를 게을리 했고 그 결과 실력이 급락해버린다.[10] 참고로 타자 쪽 역시 이승엽, 최정 등 수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정작 이승엽과 최정의 홈런 생산성이 급증한 건 백인천/이만수 덕이라는 평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승엽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한 사람이 백인천이다. 당시 기준 선진 야구였던 일본 야구를 경험한 백인천이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를 초빙해 왕정치(오 사다하루)의 외다리 타법을 접목한 것. 최정은 아예 '다운스윙을 하지 않으면 혼나다가 이만수 감독님 덕에 홈런 타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며 김성근을 간접 디스하고 이만수에게 감사를 표현하기도 했다. 이건 딱히 누구 잘못이라기보단 리그도 인종도 다양하고 계약 관계는 계약 관계일 뿐인 타국과 달리 다리 하나만 건너도 마주칠 정도로 풀이 좁고 감독과 선수 사이가 스승과 제자 관계 취급당하는 KBO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11] 부친 한상준(韓相俊, 1924. 2. 25 ~ ?)의 고향은 평안남도로, 실향민이다. 따라서 한대화는 대전 출신 실향민 2세다. 대구광역시 출신 실향민 2세(부친의 고향이 경기도 개성)인 김재박과 동일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12] 만일 한대화가 빙그레로 갔으면 빙그레는 최소 한 차례는 KBO 한국시리즈를 제패했을 것이고, 해태 타선도 전성기 시절 그 강력함을 100%로는 발휘하지 못 했을 확률이 매우 높지만 야구에 만약이란 없는 법이다.[13] 한대화가 트레이드되던 1993년 시즌 종료 후 시점에서는 구단명이 빙그레에서 한화로 바뀐 상황이었다.[14] 실제로 옛날에는 윗 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을 지식 자랑을 하는 행위로 보아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다.[15] 야구만 잘 하면 사사로운 부분은 신경쓰지 않는 김응용 감독의 야구관이 드러난 부분이다.[16] 타율 7위, 홈런 3위. 이 해 홈런 1위가 김성한, 2위가 장채근이었으니 해태가 홈런 1, 2, 3위를 석권한 셈이다.[17] 참고로 당시 조범현, 김광수, 양승호, 류중일, 김시진박정희를 선택했다. 박정희도 논란이 큰 인물이기는 하나 조사 시점 기준으로도 임기를 마친 지 30년이 넘게 지났고 기성세대가 박정희를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꼽는 일은 드물지 않으므로 화제거리가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18] 그 당시 한대화가 뛰던 팀이 다른 팀도 아니고 그 험악하기 짝이 없던 해태 타이거즈였음을 감안하면 더욱 더 높이 평가받을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