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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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경위
2.1. 7일 저녁: 해병대의 시비로 인한 사건 발단
2.2. 7일 저녁: 공군의 추격과 1차 반격
2.3. 8일 새벽: 보복을 위한 비행학교 새벽 기습
2.4. 8일 아침: 공군의 2차 반격
2.5. 8일 아침: 해병대의 도주
3. 피해
4. 결말
5. 과거세탁으로 사건의 진상을 덮기 위한 왜곡/조작
6. 기타
7. 관련 기사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66년 8월 8일 월요일 새벽, 대한민국 해병대장교대한민국 공군의 옛 공군비행학교[1]를 기습했다가 반격을 당해서 오히려 해병대가 당했던 실제 사건이다. 군대에서 카더라 풍문으로 나도는 근거 없는 허구썰들이나 괴담들과는 달리, 실제로 존재한 역사적 사실이며 해병대 측에서 사망자까지 나온 큰 사건이다.

사건명이 군사시설 난입을 가리키지 않았다면, 언뜻 보면 공군 vs 해병대의 자존심을 건 한판대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건명에서 이미 알게 되듯이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희대의 병림픽이자, 해병대가 새벽에 자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공군에게 비겁한 기습을 하고도 오히려 반격을 받고 도주하는 굴욕을 당한 데다가, 심지어 해병대 측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한 사건이다. 알량한 해병부심을 부리려다가 오히려 공군 비전투병들에게 참교육만 당하고 해병대의 개판인 군기 상태만 들통난, 대한민국 해병대흑역사이다. 아니, 대한민국 국군과 당시 정권 및 후대 정권들까지 대응을 제정신 아니었다고, 포기한 덕에 포괄된 대한민국 현대사의 수치스런 흑역사 중 하나를 만들어 해병대의 흑역사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술에 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공군 장교 3명을 집단폭행했다가 그 상황을 알고 달려온 공군 장교 16명에게 해병 장교들이 얻어 터지고 돌아오자, 이에 보복하려고 해병대 장교 129명이 집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여 공군비행학교를 새벽에 기습하였다가 공군장병 300명에게 역으로 반격 당하고 도망간다.

여기까지만 봐도 현역 군인의 집단 근무지 이탈에, 집단 패싸움 유발에, 아군 비행학교를 새벽에 무단 침입한 작지 않은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더 가관인 건,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등 전군에서 가장 신사적이고 부드럽다는 공군[2]의 '비전투병'인 비행학교 장병들[3][* 단, 공군 조종 교육생 신분인 장교들도 일부 있었는데, 이들의 경우 해병대보다 훈련이 훨씬 더 빡세다. 그야 비행기를 타기 위한 훈련 과정이 힘들다 보니 체력과 정신력이 무척 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당시보다 더 많은 21세기에도 절반 이상이 빨간 마후라를 못 달고 평범한 장교로 남아 장기복무하거나 중간에 전역하여 공/군무원 임용, 민간기업 취업 등의 새로운 길을 찾는다. 당시에는 비행기도 귀했으니 생존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라기에는 실미도 사건 참조.]이 반격하자, 명색이 전투요원이라는 해병대 장교들이 얻어 터지고 뿔뿔이 흩어져 오합지졸처럼 무질서하게 우왕좌왕 도망치는 와중에 익사하는 해병장교까지 생겼던 것. 한마디로 군무이탈+대민물의+하극상+무단침입+기물파손죄+무임승차+집단범죄에다, 사망까지 발생된 희대의 해병대 군기문란 사건이다.

2. 사건 경위[편집]



2.1. 7일 저녁: 해병대의 시비로 인한 사건 발단[편집]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되었다.

1966년 8월 7일 일요일 오후 7시 20분쯤, 부산발 진해행 버스 막차인 경남 영228호가 지금의 부산 김해국제공항 근처인 공군비행학교 후문 입구 근처인 '덕두 정유소' 정류장에 정차하자 공군 장교 3명이 뒷문으로 승차하려고 했다. 그런데 버스에 타고 있던 술 취한 해병 장교 8명이 공군 장교들이 승차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이 해병 장교들은 임관한 뒤 해병학교 35기 기초군사반 과정에서 보수교육을 받던 중 1박 2일 외박을 나와 있던 해병 소위들이었고, 공군 장교들은 비행학교에서 조종교육을 받고 있던 피교육 학생 신분의 공군 소위들이었다.[4]

이에 다시 공군 장교들은 앞문으로 타서 차 안에 들어왔으나, 해병 장교들은 차 안에서 시비를 걸었고, 공군 장교들이 이들을 묵묵부답으로 상대하지 않자 해병 장교들은 발끈하여 한 공군 장교의 작업모를 빼앗아 서로 던지며 희롱했다. 이에 참지 못한 공군 장교가 해병 장교의 몸을 밀쳐 자신의 작업모를 되찾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졌지만, 공군 장교들이 수적 열세로 집단 폭행을 당한 후에 차 밖으로 쫓겨났다.

2.2. 7일 저녁: 공군의 추격과 1차 반격[편집]


이 광경을 본 허도창 공군 상병이 해당 사건을 비행학교에 바로 알렸다. 이에 분개한 조종 피교육생 정성규 소위 등 공군 동료 장교 16명이 동교 309호 트럭을 타고 앞서간 해병대가 탄 버스를 추격했다. 결국 이들은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동부 지역인 웅천에서 버스를 따라잡아서 해병 장교들을 붙잡아 집단구타하고 되돌아 왔다.


2.3. 8일 새벽: 보복을 위한 비행학교 새벽 기습[편집]


그리고 사건은 말도 안 되게 커지기 시작했다.

공군 장교들에게 폭행당한 해병 장교들은 해병학교에 돌아가자 곧 이 사실을 동료 해병들에게 알렸다. 이번엔 해병 장교들이 분개하여,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우고 8일 새벽 당직 교육생 몇 명을 제외한 장교 129명이 각기 통근열차편으로 진영역에 집결했다. 대체 맞았던 놈들이 뭔 소리를 했길래 맞을 짓 했는데 화를 낸 건지 상상도 안 간다. 이들은 외박 등 출타자로 위장하기 위해 복장을 전투복이 아닌 정모와 하근무복을 착용했다.

게다가 이때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무임승차를 했다. 건장한 남자, 그것도 해병대 근무복 차림의 장교 129명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힘 없는 역무원이 당장 돈부터 달라고 하기에는 힘들었고[5] 결국 무임승차를 했다. 무임승차 금액은 1인당 75원으로 총 10,125원. 이 돈은 45년 뒤인 2011년 8월 해병학교 35기 동기회가 코레일에 당시 가격을 지금으로 환산하여 1백만 원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기사

그렇게 무임승차로 민간인 트럭과 버스에 나눠 타고 김해 공군비행학교 입구인 평강마을에 도착했다. 129명의 해병 장교는 전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논밭을 포복으로 이동하여, 마치 잠복전투훈련이라도 하듯이 비행학교 정문을 기습했다. 보초근무를 서고 있던 헌병(현 군사경찰) 김용만 공군 병장을 납치하여 권총을 빼앗고, 조종학생 내무반으로 안내하라고 위협했다. 실제로 초병을 폭행하거나 무기를 빼앗으려고 하는 행위에 대한 대응은 즉각 발포로 규정되어있어서 이때 김용만 병장이 이들을 사살했다고 해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 소위들도 월남전 직전이라는 상황만 아니었더라도 곱게 넘어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김 병장의 안내로 새벽 5시 50분 쯤에 조종학생 내무반에 도착했고, 해병 장교 129명은 4개 내무반에 분산 침입, 아령 등 운동기구와 , 주먹 등으로 새벽에 잠들어 있던 조종학생들을 난타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잠이 깬 조종학생들이 내무반 밖으로 도망치자 돌을 던지면서 추격했다.

이같은 난투극이 한창일 때 해병대 일부 병력은 주번사령실에 침입하여, 근무사병을 추방하거나 감금한 다음 주번사령 당직자인 공군비행학교 작전과장 최석만 중령에게 학교장과 전날 사고자를 불러 공개 사과하도록 강요했다.


2.4. 8일 아침: 공군의 2차 반격[편집]


그러나 공군비행학교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전 6시 20분 비상소집을 걸었다. 이에 비행학교 장병 약 300여 명이 뛰어나와 연병장에서 해병 장교 129명에게 덤벼들었다.

해병 장교들은 연병장에 집결하기 전에, 잠자던 조종교육생 10여 명을 폭행하여 이미 무력화했고, 3개소 내무반의 유리창 31장 등 기물을 마구 부쉈다.

쌍방 400여명이 얽힌 패싸움은 10여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전세가 불리해져서 공군 장병들에게 밀리다가 결국 쫓기게 된 해병 장교들은 도망치다가 공군 장병들에게 더 추격해오면 비행기를 부숴버리겠다고 위협하고, 그래도 쫓아오자 실제로 돌을 마구 던져 T-6G형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 복좌 훈련기 TA-858호 좌측 날개 전면 3개소, 우측 프랙 1개소와 날개 끝을 깨뜨리는가 하면, TA-886호의 엔진 하우징 좌측 전면 1개소 및 프로펠러의 베어링 등을 부쉈다.[6]

즉, 명색이 해병대 장교라는 사람들이 공군 장병들에게 좀 덜 맞으려고, 국가의 재산이자 소중한 국방전력인 항공자산[7][8]을 고의로 파손시킨 것이다. 자기를 헌신해서 국가의 중요재산을 지키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중요한 국방 자산을 담보로 자기들의 안전을 꾀하는 일은 참군인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이는 당시의 해병대가 얼마나 군기가 빠져 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2.5. 8일 아침: 해병대의 도주[편집]


공군 장병들에게 얻어맞고 도망가던 해병 장교들은 오전 7시쯤 철조망 밖으로 빠져나가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황급히 달아나던 중 이의일 해병 소위가 철조망 밖 에 빠졌다.[9] 늪에서 건져낸 뒤 비행학교 내의 의무 중대로 후송되었으나 그를 검안한 군의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되었다.


3. 피해[편집]


이 사건으로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 2기가 파손되었고, 사망 1명, 부상 39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사망한 해병대 이의일 소위는 1966년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였으며, 홀어머니 우경학 씨의 아들 3형제 중 막내라고 한다. 부검 결과 익사로 판정되었다.


4. 결말[편집]


장지량 공군참모총장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이 현지에 달려갔고, 국방부[10]에서는 합동수사반을 구성하여 현지조사에 나서게 하였으며, 해병 20명과 공군 14명을 연행하여 조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잊히고 ....정말 그럴것 같나? 해병대 출신의 회고글 혹은 해병대의 각종 야사 썰들을 모아 놓은 해병대 출신들의 블로그 등에서나 언급되는 정도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주요 일간지에 관련 기사가 도배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정부와 군 상층부에선 처음에 관련자 전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고도 했으나, 당시에는 베트남 전쟁 상황이라 장교들이 많이 필요한데 관련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핵심 주동자들만 군사 재판에 회부하고 나머지는 처벌을 면하게 된다는 정신 나간 일을 저지른다. 왜 정신 나갔다 하냐면 실미도 사건참조. 전도봉을 비롯한 주동자급 해병 장교 10여명은 6개월 간 진해 해군 헌병대(현 군사경찰대) 영창에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았는데, 결국 제일 핵심주동자였던 전도봉 소위만 현역부적합 조기전역을 당했고 나머지는 현역 장교로 복귀하게 된다.[11]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뒤 전도봉에게 현역 대한민국 육군 병 입영통지서가 발부되었고[12] 이에 전도봉은 장교로 군복무했던 사람이 뭔 현역병이냐고 반발하여 병 입대 대신 해병대 장교로 재입대하였고 결국 해병대 간부후보생(해간) 38기 소위로 다시 임관하게 된다. 즉 두 번이나 임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첫 임관 때의 동기들(해간 35기)보다 후배(해간 38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도봉에겐 두 개의 해간 기수가 있는 셈인데 그 중에서 38기가 정식 기수이다[13]. 그러나 언론 공개 이력 등엔 첫 번째 기수인 해간 35기만을 내세우고 있다.[14]

5. 과거세탁으로 사건의 진상을 덮기 위한 왜곡/조작[편집]


사건 자체만으로만 보아도 일단 명백하게 해병대 소속 여러 장교들이 군법적으로 심각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인 데다가, 수적으로 열세였다 하나 해병대가 자고 있던 공군에게 비겁한 기습을 했음에도 결국 공군에게 쳐발린, 해병대로서는 참으로 치욕적인 흑역사 수준의 사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황당한 사실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건을 정반대로 역사 왜곡하여 마치 해병대가 이긴 무용담인 것처럼 날조하고 아군에 대한 비겁한 야간 기습공격을 정당화시키고 미화까지 한 여러 버전의 구라 소설들이 일부 예비역 해병들의 블로그 등을 통해서 퍼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 왜곡 소재 대부분이 당사자인 전도봉 사령관의 일대기에서 나왔으니 당연하다. 인터뷰를 보면 자신이 소시적에 조폭을 때려잡았다고 주장하거나 월남에서 있었던 황당한 일 등, 해병대 시절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허풍스러운 무용담 일대기 중 한 일화로 끼워서 말하였다. 이런 구전 이빨에서 흔히 나오기 마련인 허풍, 왜곡과 변명을 토대로 후대의 해병들이 거기에다 더 보태고 조작하여 쓴 해병대의 정신승리성 소설들인 것이다.

예를 들면, 아래과 같이 왜곡시키는 식인데 인원 숫자 조작하기 등 사실 조작과 역사 왜곡은 기본이요, 군범죄 정당화, 상급 지휘관에 대한 하극상, 전우의 죽음에 대한 박대까지 어우러져서 헛웃음이 나오는 훌륭한 블랙 유머가 되어 버렸다. 자신들은 자랑이라고 이빨까고 있는데, 읽는 입장에서는 너무 빈틈이 많아 오히려 웃기는 글이다. 즉 아래에 나오는 일부 해병들 주장은 온통 구라와 팩트 왜곡 투성이라서 신뢰도가 완전 엉터리 수준이다.

35기 소위들의 김해공군기지 습격사건

66년 8월 8일에 발생했던 이른바 해병학교 사관 35기 기초반 장교들의 김해 공군기지 습격사건의 진상을 공개한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즉 주말인 8월 6일 부산에서 외박을 한 전도봉(全道奉) 소위를 비롯한 7명의 해병학교(35기) 기초반 소위들[15]이 승차한 부산발 진해행 시외버스가 구포다리 건너 첫 번째 정류장에 정차했을 때 승객이 많아 버스의 앞문으로 승차하기가 어렵게 된 빨간 마후라를 두른 10여 명의 공군소위들[16]이 주먹으로 버스의 후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는데, 그때 그 후문 쪽 좌석에 윗저고리를 벗은채 앉아 있던[17] 35기 소위 하나가 앞문으로 타 하고 소리치자 공군소위들 중의 하나가 이 새끼들…하며 앞문으로 갔고, 또 차안에서 누군가가 저 새끼가…하며 뒷문을 열어 제치고 뛰쳐 나간 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그 10여 명의 공군소위들[18]은 윗저고리를 벗고 앉아 있던 7인의 해병소위들에 의해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공군소위들을 길바닥에 뉘여 놓고 버스에 올라타고 졸면서 가고 있던 그 7인의 소위들은 한참을 달리고 있던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는 순간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버스를 앞뒤에서 가로막은 2대의 공군 닷지차에서 뛰어 내린[19] 수 십 명의 공군장교들[20]이 손에 든 몽둥이로[21] 소위들이 앉아 있는 뒤쪽 창문을 박살을 내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35기 소위 2명은 머리를 다쳤고, 승객들 중 진해여고 학생 1명과 해군소위 1명도 부상을 입었다.[22]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해병소위들은 운전기사로 하여금 군용트럭 옆을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가게 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공군장교들도 그 이상의 보복은 하지 않았다.
한편 귀교후 머리에 중상을 입은 1명의 동료장교를 진해병원으로 실어 보낸 35기 기초반 장교학생회에서는 취침시간을 이용하여 중대장학생 김도삼 소위와 부중대장학생 김무일 소위, 군기부장 전도봉 소위 등 3인의 간부와 각 근무자들과 소대장 등 13인이 참석한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자존심에[23] 관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행동계획으로 그 다음날 이른 아침 김해 공군기지를 습격하되 일절 무장은 하지 않고 복장은 정모와 카키 근무복을 착용키로 결정했다.
즉 전체인원 142명 중 입원환자와 당직자 등 13명을 제외한 129명이 8일(월) 새벽 2시에 기상하여 은밀히 철조망을 타넘고 경화역에 집결, 04시에 출발하는 열차에 승차하여[24] 진영역에서 하차, 역전 도로변에서 3개 제대로 나누어 시계나 돈을 주고 화물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공군기지 정문 앞에 집결하기로 했는데, 결국 화물트럭을 타고 6시 10분 전에 공군기지 정문앞에 도착했던 1.2제대는 서둘러 제대별로 대오[25]를 정비하여 정문으로 진입을 했으나 낌새를 챈 2명의 공군 헌병이 당직실 보고 운운하며 제지를 하는 바람에 지체할 겨를이 없었던 한 장교가 이 새끼 말이 많아하며 아구창을 일격을 가한 다음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그들을 앞세우고[26] 비행학교 조종반 중대의 막사가 있는 곳[27]까지 기상나팔 소리를 들어가며 질서정연하게 구보를 해 갔다.[28]
그리하여 6시에 기상하여 막사(퀸셑3동) 안팎에서 내무정돈과 세수를 하고 있는[29] 약 50명의 조종반 장교들[30]을 닥치는 대로 주먹과 내무실에 있는 운동기구 등으로 가격하여 일방적인 완승을 거두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31], 그 현장에 버스를 타고 왔던 약 40명의 3제대 장교들이 도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갑자기 터진 연막탄을 신호로 전 기지의 장사병은 즉시 상의를 벗고 중앙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방송이 사방에서 들리자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기초반장교들은 몇몇 간부장교들의 의견에 따라 즉시 비행학교 당직실이 있는 학교본부로가서 정열을 했다.
그런 다음 당직실로 들어간 간부장교들이 당직사관 이양호 대위에게 양측 학교장[32]에게 사태 수습을 건의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자 이양호 대위[33]는 학교장이 7시에 출근하니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기에 기초반 장교들은 당직실밖에 정열하여 왼쪽 손을 왼쪽 허리춤에 갖다대고 오른손을 흔들며 '나가자 해병대'가와 '청룡은 간다'등의 군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어느 새 구름떼처럼 연병장에 모인 갈고리와 쇠스랑 같은 소방기구와 돌멩이를 손에 쥔 약 2000명[34][35]의 병력이 일제히 돌멩이를 던지며 접근해 오는 바람에 누군가의 제의로 격납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연습기의 날개 밑에 피신을 했으나 새까맣게 날아온 돌멩이가 격납고 속으로도 날아드는 바람에[36] 어쩔 수 없이 철수를 단행, 활주로 끝에있는 철조망 지대까지 공군들의 추격을 받는 가운데 약 2키로를 구보하여 견고하게 가설돼 있는 철조망을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타 넘었으나 철조망 바깥쪽에 있는 70~80 야드[37] 너비의 수초가 우거진 천연늪을 헤엄을 쳐서 건너는 과정에서 이 소위가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맨 뒤쪽에 쳐져 맥없이 껍북거리고 있는 이 소위를 발견하여 늪 밖으로 끌어낸 사람은 김무일 소위와 이무수 소위였고, 이강오 소위를 비롯한 3~4명이 그를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입과 항문이 열려 있는 그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공군기지 내의 의무중대로 운반이 된 이 소위는 7시 50분 그를 검안한 군의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되었는데, 그때 그 의무중대 병실에는 부상을 당한 20여 명의 비행종대 피교육 장교들과 12~13명의 해병학교 기초반 장교들이 앰뷸런스에 실려 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이 사건이 남긴 사법적인 처리문제와 관련된 비화이다. 진해교육기지사령부에서는 전도봉 소위를 비롯한 6명의 주동자를 구속하는 한편 35기 기초반 중대의 중대장 송모 대위와 구대장 3명도 구속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런데 그러한 조치와는 달리 약 한 달 전[38]에 제7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해병대사령관 장기천 장군은 엄벌에 처할 경우 특히 35기 장교들과 그 후배 장교들의 사기에 미칠 영향이 클 것으로 판단하여 사고를 낸 35기 장교들과 비행학교 피교육 장교들 간에 자매결연을 맺게 하는 방안을 구상하여 공군참모총장이던 장지량 장군의 동의를 얻은 다음 그러한 수습방안을 장 총장과 함께 김성은 국방부 장관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시하여 쾌히 승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강기천 사령관은 장지량 총장과 함께 김해 공군기지와 진해 해병교육기지사령부를 차례로 방문하여 유감표명을 했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쌍방 간의 자매 결연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군법회의에 회부된 그 10명의 장교들[39]에 대해서는 강기천 장군이 군법회의의 설치권자인 교육기지사령관 박성철[40] 준장에게 선고유예를 하도록 지시를 했으나 박성철 장군은 자신이 임명한 재판장[41]에게 2년을 선고해주면[42] 자기도 생색을 좀 내고 강기천 장군도 감형을 할것이라고 했으나 처음부터 형을 선고할 생각을 갖지 않고 있던 강복구 대령은 군법회의의 사회자가 "재판장의 선고가 있겠습니다!"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회전의자를 뒤로 돌려 면벽(面壁)을 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바람에 여러 차례의 선고공판이 유회되는 별 희한한 해프닝이 벌어지곤 했다.[43]
일이 그렇게 되자 해병대사령부 법무감 이양우 해군 법무대령[44]은 사건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직접 진해로 내려가 핵심 주동자로 지목되고 있던 전도봉 소위에게 병역을 필하게 해 주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을 것을 권고하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권고를 받은 전도봉 소위는 함께 기소된 자기 이외의 모든 장교들을 석방시켜 준다면 기꺼이 군복을 벗겠다고 말함으로써 6개월 간 진해 해군군사경찰대 영창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아왔던 10명의 장교들은 전원 풀려나게 되었고, 그들 중 모든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었던 전도봉 前 소위만은 민간인의 신분이 되어 실의 낙향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일 후 전도봉은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라는 병무청의 입영통지서를 받고 깜짝 놀랐으나 그 입영통지서를 들고 해병대사령부 법무감을 찾아갔던 그는, 잘못 처리된 것을 사과한 이양우 제독의 권고로 국방부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장을 낸 것이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전기(轉機)가 되어 월남전선으로 가는 조건 부로 소위의 계급을 되찾는 충격적인 홍복을 누렸다.[45]
그리고 그런 운을 타고 났던 전도봉 소위는 그로부터 30년 후[46] 제 22대 해병대사령관이되어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왕년의 김해비행학교 당직사관 이양호 대위와 숙명적인 재회를 했다. 전해지고 있는 바에 따르면 구속 기소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던 이양호 대위도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고 하니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써 남긴 '必死卽生'이란 글귀를 새삼 되씹어 보게 한다.
한편 그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게 된 김해공군기지 당직사령 최 모 중령은 그 후 대한항공에 취업했으나 1969년 12월 11일, 그가 조종한 강릉발 서울행 KAL기가 승객 47명 및 승무원 4명을 태운 채로 납북되는 바람에 그를 악운을 타고난 사람으로 기억되게 했다.[47]
차라리 공군이 전투기 몰고 기습했는데 해병들이 전투기를 맨손으로 격추했다고 하는 게 더 나을 지경이다⋯. 사실 해병대의 중범죄행위에 대한 정당한 재판을 방해한 당시 강복구 대령의 행태를 보면, 그가 강병육성과 모국의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는 평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저 자기 소속군의 편을 들기 위해서 국가의 엄정한 법집행을 방해한 인간이 대체 어떻게 강병을 육성하고 모국의 발전에 기여한단 말인가? 해병대 장교들이 '해병대 자체'가 아니라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라는 의식이 눈꼽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자국 군 비행학교를 습격해서 주요 군사장비인 항공기를 파손한 행위를 비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래 골수 해병대 출신들은 자기 모군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나머지, 이런 식으로 해병대를 되도록 높고 강하게 보이기 위한 각종 사실왜곡, 거짓말, 허풍치기 등에 치중한다. 게다가 야간에 자고 있는 아군을 상대로 기습했다는 건 제대로 상식이 박힌 사람[48]이라면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비겁한 범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멀쩡한 진실까지 왜곡하여 해병대 특유의 이빨까기용 소설로 승화시켜서 후대의 해병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전파하려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엔 공군 공군기본군사훈련단이라던지 특기학교에서 몇몇 나이 든 간부들로부터 ’해병대 놈들이 감히 값비싼 파일럿 훈련학생들에게 덤비다가 두들겨 맞고 그거 복수하려고 새벽에 비행장에 쳐들어왔다가 몰려나온 공군사병들에게 또다시 두들겨 맞고 쫒겨났던 적이 있었다.’라는 짤막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공군에서는 어쨌든 국군끼리 패싸움을 벌인 국군의 흑역사인 이 사건에 대해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말할 뿐이지 그걸 굳이 자랑스러워 하거나 많이 언급하진 않는다. 왜냐면 공군은 입대하는 장병들의 대부분이 학력도 높은 편이고 개념이 박혀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른 군과의 주먹다짐 그런 싸움 이야기 쪽엔 아예 관심이 없다. 더구나 21세기에 입대한 장병들이나 간부들의 경우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아예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하긴 수십년 전 사건이니 시간이 갈수록 잊혀져서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요즘엔 해병대 출신이 공군 조종장교로 재입대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면서, "조국수호를 위한 일전불퇴의 정신은 공군과 해병대 모두 똑같다", "해병대의 빨간명찰과 공군의 빨간 마후라 정신은 같다"고 주장하는 등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기사

하지만 대략 2010년대 이후로 이 사건이 다시 조명받으면서 요즘 세대의 공군에서도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고, 공군 인트라넷 내 병사 게시판에서 군대 악폐습 행위를 비판하는 예로서 이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이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 참고로 이 사건은 게시판이 터지고 새로 생길 때마다 지식게시판에 꾸준히 올라온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정작 대다수의 공군 병사들은 싸움 쪽엔 별 관심이 없다는 거다. 왜냐하면 현재 공군은 마초 문화와는 거리가 먼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1960년대 당시엔 유명했지만, 그 이후 세대들에게는 세부내용이 잘 안 알려지고 잊혀져간 것을 악용해서 일부 해병대 출신들은 꾸준히 이 사건을 마치 해병대가 이기기라도 한 '무용담'처럼 정반대로 왜곡해서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을 이용하여 옛날 당시 기사와 재판기록 등 과거 자료들을 열람하기가 쉬워진 2010년대에는 그간 해병대 출신들의 허풍과 이빨까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네이버 뉴스아카이브 등을 사용하여 그동안 해병들이 일방적으로 주장해오던 구전 무용담 이빨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발굴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의 실제 실체가 드러나면서 해병대의 굴욕 역사이자 엽기 코미디 사건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어버렸다. 일부 해병대 출신들의 사실왜곡과 거짓된 카더라, 허풍이빨이 없었다면 워낙 옛날 사건이라서 차차 잊혀지고 묻혔을 옛날 사건이 이렇게 재조명 받을 리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다.

그리고 저런 식으로 해병들이 사실을 왜곡시키며 거짓 소설을 꾸며내 퍼트리는 것도 문제지만, 엄연히 같은 국가의 군대도 소속군이 다르다고 해서 타군을 그렇게 적대시 하려고 하는 해병들의 근본적인 태도 자체도 문제다. 그런 태도는 옛 일본군의 안 좋은 행동을 계승한 것은 물론이고, 저런 식으로 사실왜곡까지 하면서 정신승리를 하려고 하는 건 심각한 병크 중의 병크이자 역사적 인식 부족이다. 또한 이런 행동은 양아치, 조직폭력배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정신이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군 장교끼리 패싸움을 벌인 정도라면 그나마 자존심 싸움이라고 봐 줄 수 있었겠지만 조종사를 양성시키는 국가안보 기간시설인 비행학교를 공격해서 최중요 군사장비인 항공기를 파괴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장교 포함해서 가담한 전원을 이등병으로 강등시켜버려도 할 말이 없는 매국이적행위급이다. 그만큼 공군 항공기는 국방에 있어 군의 최중요 자산이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것은 후진국 수준 삼류 군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행동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다른 부대에서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공군 조종사가 될 귀한 인적 자원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불행을 언급하며 조롱하고 있으니 정말 답이 없다.

1960년대 해병대들이 "옛날에는~" 어쩌구 하면서 똥군기를 들먹일 때 들이대주면 좋다. 아무리 군기가 빠져도 해병대가 공군비행학교 습격했다가 반격받고 쳐 발렸던 때보다 빠졌겠느냐고⋯.[49] 요즘 해병대가 옛날 해병대보다 군기가 빠졌다는 일부 꼰대 해병들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증명해주는 사건이다.

6. 기타[편집]


  • 해당 사건 덕분에 해병문학에서의 해병들은 다른 부대는 다 털어먹고 다니지만 공군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는 설정이 붙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맥을 못 추는 정도를 넘어서 공군 관련 물품이나 소재들, 예를 들면 '✈'와 같은 단순한 비행기 표지판을 보고도 역돌격을 실시하거나 빨간 마후라를 들으면 공포로 인해 머리가 터진다거나.. 심지어 진짜 참새도 무서워하면서 벌벌 떠는 것으로 묘사되며 해병들의 눈에 비친 공군병력들은 말단인 이등병부터 참모총장, 심지어는 기계장비들까지도 새부리 가면을 쓴 무서운 괴수들로 묘사된다.


7. 관련 기사[편집]


  • 당시 기사
  • 또 다른 당시 기사
  • 관련정보 블로그
  • 당시 사건에 참가했던 전도봉 해병대사령관 인터뷰: 저 인터뷰에서 전도봉 전 사령관은 이 사건을 해병대측에 유리하도록 왜곡시키고, 책임도 오히려 공군에게 떠넘기며, 뻔뻔한 자기 미화에 열올리는 등 어이없는 거짓과 아전인수격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후대의 해병들에게 끼친 악영향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전도봉 전직 사령관의 일대기가 후대까지 해병대원들의 군인정신을 왜곡시키는 소재 중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 국가의 전직 지휘관으로서 마땅히 반성하고 진실을 밝혔어야 할 일이다. 게다가, 결국 자기의 객기 때문에 죽은 해병 전우에 대한 언급도 없다. 하지만 전도봉 전 사령관의 이런 뻔뻔한 성깔과 허풍스러운 이빨 성향이 해병들의 코드와 딱 맞기 때문에, 많은 해병대 장성들 중에서도 유독 전도봉 전 사령관이 해병들에게 그토록 인기가 많다는 점이 아이러니⋯ 아니, 해병대가 쓰레기 집단이란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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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 당시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읍, 즉 현재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자리에 해운대구에 있던 부산공항이 이전하여 개항한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한편, 공군의 초창기 조종사 교육기관이었던 이 공군비행학교라는 명칭의 기관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진주시에 위치한 공군교육사령부사천시에 위치한 공군 제3훈련비행단이 그 역사성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2] 그런데, 이 당시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공군이 국군 중 가장 신사적인 편이다. 장병들의 평균 학력도 제일 높아서, 웬만하면 수도권이나 거점국립대급 이상 대학재학/졸업자, 혹은 고졸이라도 기술 등에 있어 상당한 재능과 자격증을 가진 인원들이(이 경우 대부분 기술특기) 공군으로 입대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고졸들의 경우 항공정비사의 꿈을 안고 있는데 적당히 군생활 하고 민간항공으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3] 행정, 기타 관리 등을 맡고 있던 비전투병과 인원들. 지금도 공군 병들은 행정, 관리, 정비 등을 담당하는 기행병과(군사경찰 포함) 병들이 다수이며, 전투특기는 방공포병과 관제병만 존재한다. 그것도 관제병은 전투특기임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업무를 보거나, 아니면 버드 스트라이크 예방을 위해 활주로로 나가서 새 쫓는 일을 한다.[4] 양측 다 마침 소속 부대의 교육과정을 밟고 있던 소위들이었다는 점에서 우연의 일치스러운 공통점이 있다.[5] 그리고 이 권위주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군인이나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21세기와는 달리 단 한 명만 있어도 건드리기 까다로운 존재였다.[6] 그리고 두 기체는 완전히 수리를 마치기까지 3개월 이상 걸렸다. 예산에서 수리비를 추려내고 미국에서 기술자와 부품을 공수해와야했기 때문이다.[7] 더구나 한국이 몹시 가난했던 1960년대 중반은 항공 자산이 정말 귀하고 한 대 새로 사는 것도 어려운 시기였다. 저 기종도 국민 성금을 모아서 힘들게 겨우 사 온, 당시 10대밖에 없는 연습기였다.[8] 1966년이면 박정희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와 군사 원조를 추가로 받아내기 위해 베트남 전쟁 참전을 협상 카드로 삼고 있던 시기였으며 한일기본조약이 1년 전인 1965년에 체결되어 파병을 담보로 군원 이관 문제를 연기하고 추가 차관을 제공해주겠다는 브라운 각서가 이때 작성될 정도로 국가적으로도 돈이 부족하면 부족하지 절대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런 짓을 벌인 것이다.[9] 김해공항 철조망 옆은 수로가 있는데, 이 수로의 물은 농업용수가 아니고 군 공항 침입을 막기 위한 수로인 동시에 해병미네랄워터오수가 이쪽으로 흐르면서 고여버려 늪과 같은 수질을 자랑한다. 근처에 공구 등을 파는 서부산유통단지가 있고, 김해공항 주변으로 중소기업들의 공장이 즐비하며 김해는 전국에서 중소기업이 많은 곳으로, 낙동강으로 흐른다. 이 지역의 농업 용수는 대개 평강천에서 끌어서 쓴다.[10]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해군사관학교 1기로 임관하고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여 해병대사령관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유일한 해병대 출신 국방장관일 정도로 골수 해병대이다.[11]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장교 인원 부족 때문에 편법으로 용서해준 것이고 이걸 핑계로 없는 일 친 것이다. 그럼 실미도 사건은 왜 민간인 신분임에도 죽여 드는가? 김성은 같은 인간이 두둔하니, 그렇게 스리슬쩍 넘어간 것을 생각하기 힘들까?[12] 실제 복무 기간이 짧아서 군역을 필한 것으로 인정할 만큼의 기준을 못채웠기 때문에 병역의무가 여전히 남아있게 된 것이다. 사실상 이걸 반역죄로 취급도 안 했고, 아니라면, 군복무를 처벌로 하는 징병제하는 나라가 나라망하는 소리를 한 것이다.[13] 35기로서의 군생활은 조기에 끝나버렸으므로[14] 35기생들도 전도봉을 동기로 인정하고는 있다. 당초에 전도봉이 35기 중에서도 제일 리더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35기생들은 해병대를 망친 쓰레기 집단 취급할 근거가 되었다.[15] 사건 당시 기사에는 8인.[16] 실제로는 10여명이 아니라 3명. 즉 해병들 숫자는 줄이고 공군 숫자는 몇 배로 늘리는 구라를 쳤다. 이런 식으로 해병대에 유리하도록 치졸하게 조작하는 인원 구라는 이후 내용에도 계속된다.[17] 재미있는 점은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대목은 항상 나온다. 복장불량인 걸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18] 위 전말에서 나오듯 실제로는 3명의 공군을 8명의 해병대원이 다구리친거다.[19] 1대였던 공군 트럭을 2대로 늘리고, 해병들이 구타당한 사실은 스리슬쩍 빼버렸다.[20] 실제로는 16명. 대개 수십명이라는 표현은 최소한 2~30명 이상은 될 때나 쓰는 표현이다. 10~19명일 때는 십 수 명 혹은 십여 명이 맞다.[21] 몽둥이 역시 당시 기사엔 안 나오는 걸 보아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버스 폭행 목격자로부터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뛰어나와 뒤쫓아 그 버스를 바로 따라잡은건데, 그 틈에 몽둥이까지 챙겨 갔다는 건 말이 안 된다.[22] 당시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은 민간인 피해를 공군 소위들에게 덮어씌우는 등, 같은 국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안달이 난 듯. 마찬가지로 해군 장교의 부상 사실도 왜곡이다. 해병대의 구전에 따라서 언급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23] 본인들이 먼저 시비 걸었다가 중상을 입고선 자존심 소리를 하고 있다.[24] 역장에게는 독도법 훈련을 위해 진영역까지 간다고 했고, 차비 대신 손목시계 30개를 맡겨 두었다고 한다.[25] 3열종대.[26] 여기서 권총을 강탈했다. 이런 짓거리는 군사재판이 열리면 최대 사형이고, 현장에서 사살당해도 할 말이 없다.[27] 정문에서 약 2km.[28] 이렇게 갔으면 기습이 이루어질 수가 없으므로 구라다. 실제로는 포복으로 접근하여 초병을 제압했지만, 일부 골수 해병들은 3열 종대로 대오를 정렬한 뒤, 정문으로 쳐들어 가서 초병과 사관을 때려 눕히고, 2km씩 구보를 하며 달렸다는 황당한 구라까지 친다.[29] 실제로는 해병들이 조종교육생 장교 내무반에 도착하여 한창 자고 있던 공군을 폭행하기 시작한 게 새벽 5시 50분이었다. 근데 자고 있는 상대방을 폭행했다는 게 지들도 쪽팔리니까 기상 후에 폭행한 것처럼 날조한 것이다.[30] 실제론 10여명.[31] 자고 있는 무방비의 상대방을 둔기로 때린 비겁한 행위 가지고 완승이라며 자랑하고 있다. 자고 있는 사람을 둔기로 때린다면 일반인이 전성기의 마이크 타이슨한테도 이길 수 있다. 게다가 해병들이 올린 다른 글에서는 당시 해병들이 정정당당하게 맨손만 썼다고 이빨을 까는데, 여기서는 엄연히 무기를 쓰고 있다. 구라조작소설을 단지 한 명의 해병만 쓰는게 아니라 여러 해병들이 지가 원하는대로 막 고치고 보태고 손봐서 블로그, 홈피 등에 올려대니까 자연히 여러 버전의 썰들이 돌아다니게 된거고, 따라서 해병들이 우기는 썰도 버전마다 내용이 다 다른 거다.[32] 비행학교장과 해병학교장.[33] 후일 국방장관 역임.[34] 당시 기사에는 300여명인데 이걸 2,000명이라 했으니 상대방 인원을 7배 가까이나 부풀려 거짓말 한 것.[35] 1960년대 당시에는 전투기와 조종사의 규모가 턱없이 작아서, 육군도 아닌 공군 비행학교에서 2000명이라는 숫자가 나오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한 술 더 떠서 3000명이라고 써놓은 해병 블로그들도 있다. 당시의 언론기사에나 재판기록에나 300명으로 나오는데도 지들 맘대로 수천명이라고 조작을 해버리다니 참 뻔뻔하다.[36] 실제로는 해병대 장교들이 도망가다가 더 쫓아오면 비행기를 부수겠다고 협박한 뒤 그래도 쫓아오자 돌을 던져서 파괴한 것이라고 당시 기사와 재판기록에도 나오고 있다. 이걸 공군학교 장병들이 스스로 부순 거라고 정반대로 날조한 것.[37]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70m 정도(70yd = 64.008m, 80yd = 73.152m).[38] 7월 1일.[39] 35기 교육생 6명, 중대장 1명, 구대장 3명.[40] 훗날 김대중 대통령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 경호실장으로 활동하였다.[41] 훈련소장 강복구 대령. 6.25 참전용사. 훗날 해병대 전우회 중앙회 총재를 역임한다.[42] 검찰관의 구형은 5년형.[43] 군법과 처벌 과정조차도 이빨까기용으로 바꾸어 버렸다. 전후 관계는 밑을 참조. 사실 이런 마초 소설 내용 자체가 인터넷 일진 소설의 해병대 버전 정도다.[44] 최종 계급 준장. 후일 국회 사무총장 서리와 전두환 대통령의 법률고문 역임.[45] 이것도 사실과 전혀 다르다. 소위로 복직된 게 아니라, 재입대해서 해병간부후보생 38기 소위로 재임관한 것이다. 처음 임관한 것은 해병간부후보생 35기였다. 재판처리과정 중간 시점에 불필요한 썰을 드라마틱하게 만드려고 지어낸 낙향·입영통지서·국방부 소청심사위원회 이 삼단콤보는 어느 글이든 빼놓지 않는다.[46] 1996년 6월.[47] 공군 출신 전역자의 불행을, 그것도 지들 때문에 잘린 사람을 실명 옆에 언급하는 식으로 조롱하고 있다. 이거 진짜 같은 나라의 군인 맞나? 심지어 군복무 중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전역 후 민간인이 되어서 적국에 납치된 사건을 조롱하고 있다. 같은 군인을 시기하는 것도 이 정도면 제정신이 아니다. 그나마 이 소설은 대우가 나은 편에 속한다.[48] 심지어 군인.[49] 만약 현재에 저런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다면 저렇게 관련자들이 실형을 받지 않고 군복무까지 무사히 마칠 정도로 어영부영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대한민국 군대가 간부의 만행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지만 저건 그냥 엄연히 소요, 내란 죄에 이적 행위로 주동자는 최소 사형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