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회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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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회
許明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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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1년 8월 5일 (89세)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1]
학력
초월초등학교
서울농림고등학교[2]
신흥대학 (현재의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중퇴) [3]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세명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가족
아들 허상준
별명
허배차
1. 개요
2. 생애
2.1. 경기여객 시절
2.3. 경기여객 - 대원여객 사장
2.4. 인수 목록
3. 분할 및 설립
3.1. 지금의 KD 운송그룹
3.2. 계열사 (2018년 현재)
3.3. 교육
3.4. 현재
4. 여담
5. 수상
6. 관련 자료


1. 개요


오포읍민의 적
KD 운송그룹의 회장으로, 국내의 버스 동호인들의 우상같은 존재다.

2. 생애


1931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평범한 농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어릴 적에는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성격이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고 장난 좋아하는 굉장히 활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서울농림고등학교에 재학 중 한국전쟁의 발발로 입대하여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참전했다.
제대 후 1956년 결혼해 신흥대학 정치외교학과 (현재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4학년까지 재학하다가 갑자기 "돈을 버는데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다"라는 생각에 자퇴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후 주한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1961년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화서울특별시의 인구가 증가하고 서울특별시 시내버스가 그에 맞는 중요한 역할을 하자 1961년, 경기여객 (지금의 경기고속)에 임시직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을지로 영업소에 배차로 배치되었다.[4]

2.1. 경기여객 시절


당시 허명회는 자신의 일에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며 조수에게 정비 등의 여러가지 일들을 배웠고, 결국 윗선의 눈에 띄어 1961년 6개월 만에 계장으로 진급되었다. 또 1962년 과장으로 진급하여 1962년에는 종로구 숭인동 영업소장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발령받은 뒤에도 배차 일부터 버스 청소와 정비 등의 버스 관리 등의 무엇이든지 나서서 배웠다.
그런데, 1962년 어느 날 당시 1960년대의 영동 지역으로 가는 도로는 전부 비포장도로여서 특히 서울화천군, 철원군 등의 오지로 가는 버스 노선은 항상 대형 사고가 많았고, 게다가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해 버스 회사에서 제대로 된 정비도 하지 않고 운행을 시켜 자칫 사망사고까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명회는 모두가 안 하려고 하는 사고 수습에도 직접 나섰고, 어느 날 강원도 화천군의 자회사 직원의 사망으로 사후 협상을 위해 조문했다가 상주들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허명회는 "당시 그렇게 맞고 나니까 오히려 사고 수습 협상이 잘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몸을 아끼지 않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1965년 동대문구 신설동 영업소장으로 인사 이동되어 1967년 이사회의 눈 안에 들어 차주로 진급하였고, 점점 담당 버스가 1968년 2대, 1969년 5대, 1970년 5대가 추가 되어 차주 진급 3년 만에 자신이 담당하는 버스가 13대로 증가되었다. 1969년 영업 상무로 승진하였다. 임시직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 지 8년 만에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상무로 초고속 진급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1970년, 13번(구 12번 급행) 단 한 개의 노선을 운행하던 한진버스로부터 종로구의정부시를 잇는 시내버스 30대를 운 인수하지 않겠느냐라고 뜻 밖의 인수를 제의받게 되어 당시 허명회는 일주일 간 13번 버스를 타보았다. 당시에는 등산 열풍이 불어서 항상 도봉산이나 수락산에 등산하는 등산객들이 많아서 황금 노선으로 불리웠는데 버스 회사의 정비 불량과 차량의 노후로 항상 미아리 고개만 올라가면 엔진이 파손되기 일쑤였고, 그만큼 고객들의 불만은 엄청났다.
13번 버스는 2004년 대개편때까지 13번 번호로 잘 다니다가 서울 버스 106이 되었다.

2.2. 대원여객 출범


그리고 오르지 않는 시내버스 요금으로 어느 버스 회사든지 시내버스에 투자를 하지 않았고, 13번 단 한 개의 노선을 운행하는 한진버스를 인수할 생각이라는 허명회의 말에 "뭐하러 그걸 힘들게 하느냐"라는 주변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13번 버스 30대를 인수하여 새롭게 <대원여객>이라는 이름으로 1971년 12월 24일 공식 출범하였다.[5]
출범하자마자 당시 노선의 최대 난제였던 미아리 고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례로 노후 차량을 신차로 교체하였고, 자신이 직접 말단 사원 시절부터 배워 온 정비를 하면서 당시 심각했던 정비 납품 직원들의 비리를 막았다.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요금 빼돌리기로 버스 회사들이 버스 안내양들의 주머니 검사와 소지품 검사로 사회 문제가 되었는데, 허명회는 다른 방법을 택해 종사원들과의 대화와 교육을 자주 실시하고, 회사 내에 예배당을 개설해 목사님들을 초청해 예배를 드림으로 종사원들이 양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했다. 또한 종사원들의 대우를 개선해 영업소 내에 무료 식당을 개설하고 회사 곳곳마다 돌아다니며 꼼꼼히 점검하고 확인했다. [6]

그 후 1972년 4월 드디어 35원이던 시내버스 요금이 40원으로 인상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사에게서 요금통을 받다가 요금통이 허명회의 발등에 떨어져 발등이 부어올라 병원에 갔지만 그가 일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 치료를 미루고 업무에만 집중하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병원을 찾았을때 의사는 칼로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하고 5~6일 정도 병원에서 입원해야 한다고 했는데, 허명회는 날마다 처리할 업무도 촉박한데 자신이 다친 것 때문에 회사에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된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 "마취없이 수술을 하면 혹시라도 좀 더 빨리낫지 않겠느냐"라는 풍문에 도는 말을 의사에게 했다. 의사는 근거없는 얘기라고 했지만 허명회는 빨리나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의사에게 그냥 마취없이 바로 수술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으로 허명회는 마취없이 수술을 받았으며 그가 세상에서 최고로 고통스러운 아픔을 겪는 순간이였다고 한다. 당시 허명회는 처음 칼이 수술부위에 닿을 때는 멀쩡했지만 칼이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특히 다친 부분에 칼이 깊이 파고들어 뒤집어내는 순간이 정말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아파 수술하는 내내 연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1976년 조양관광 소속 버스 17대를 인수해 "대원관광"으로 새롭게 출범시키며 관광버스 사업을 시작하였고, 1978년에 대원여객 52대, 대원관광 47대로 총 99대의 차량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과 1980년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 점점 버스업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7] 1978년 경기여객을 인수하게 된다. 당시 경기여객은 인력 부족과 차량 노후, 임금 체불 등으로 위기에 몰려 도산 위기에 몰려있었는데 허명회는 1978년 9월 12일 비상총회를 소집하고 현직 사장 및 모든 임원들의 사표 제출을 요구하였으나 임원들은 "니가 무슨 주제로 우리보고 사표를 제출하라고 하느냐" 라며 허명회에게 집단 구타를 했다.[8] 결국 당시 사장 및 전임원들은 줄줄이 회사를 떠나고, 이듬해 10월 (주) 경기여객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2.3. 경기여객 - 대원여객 사장


100대 이상의 대형 운수업체가 된 (주) 경기여객 - 대원여객의 사장이 되자 [9] 회사 내의 대대적으로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1. 인수 직후 단행한 구조 조정으로 복잡하고 수 많은 단계를 거쳐야했던 모든 결재 과정을 담당 - 부장 - 사장 3단계로 대폭 축소
2. 업주와 승객에게 골칫덩어리였던 조수 폐지 [10]
그리고 사원 복지를 우선으로 여겼는데 당시 가장이 월급을 타오면 오는 길에 술 마시느라 월급을 탕진하는 일이 항상 있는 일처럼 되었는데 이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허명회는 사원 부인들을 모아놓고 "이런 악습이 기사들의 안전 운행을 방해합니다. 이제부터는 월급날이면 부인들이 직접 회사에 오셔서 월급을 수령해 가십시오"라고 말해 부인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또한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월급과 상여금 만은 약속한 날짜에서 단 하루도 늦추지 않았고, 최대의 복지 시설로 직원들의 사기를 올려주었다. 그런데 그에 맞는 조건이 있었는데 식사 시간에 무조건 밥이나 반찬을 남기면 안되고 남겼다가는 큰일난다고 한다. 항상 식당에 허 회장이 지키고 서있다고 한다. 이 규칙은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11]
1984년 남일여객을 합병하여 대원운수를 출범하였다. 당시 경기여객남일여객은 노선이 겹치는 것도 많아 양사 간의 경쟁이 치열하여 같은 도로에서 서로 경주같이 버스를 몰고 달리다가 갑자기 버스를 세우고 화가 난 양 기사들 간의 주먹다짐이 많았고, 승객의 불편과 과다한 경쟁으로 이 이상 이익이 없을 것이라 판단한 허 회장은 남일여객을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각 노선을 직접 타봤다고 한다. 그리고 경쟁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고장이 자주 나던 차량들의 원인을 파악해보니 타이어가 문제가 많아 한국타이어에서 1,000개의 타이어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12] 그 결과 더 고장 횟수가 대폭 줄어들고 승차감도 안정이 되어 승객들에게 인기를 얻을 무렵 남일여객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경기여객을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1984년 1월 29일, 오후 6시부터 서울신라호텔에서 남일여객 차문규 대표이사와 경기여객의 허명회 사장이 직접 인수 협상에 들어갔고, 9시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결국 1월 30일 오전 3시에 남일여객의 제의로 3억에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남일여객 166대 차량을 인수하였고, 인수한 차들과 기존에 있던 차량들을 합쳐 대원여객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당시 소유 버스는 총 579대였다.
그로 인해 남일여객이 운영하고 있던 서울 동마장터미널충주, 점촌, 괴산, 상주 등의 중부 지역을 잇는 황금 노선이 경기여객의 손에 들어갔다.
1986년 배기가스에 노출되어 녹내장을 앓았는데 녹내장 수술 당시 열흘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3일만에 근무하러 나갔다가 실명할 위기를 맞았던 적이 있어 현재까지도 보안경을 쓰고 다닌다.
1996년 운행 기록과 차량 관리를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마을버스부터 공항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량에 운행 기록기를 설치하였다.
2000년에는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 출연하여 자신의 성공 비결과 경영 철학, 생활 모습을 소개했다.

2.4. 인수 목록


인수연월
사명
차량대수
1982년 4월
서울버스공사[A]
11대
1982년 6월
서울버스공사[A]
21대
1984년 1월
남일여객
166대
1986년 10월
영주여객
4대
1988년 3월
동신운수
3대
1988년 3월
신일여객
18대
1989년 9월
영남여객
5대
1990년 1월
삼안여객
27대
1991년 2월
온양교통
24대
1994년 6월
승원여객
41대[13]
1995년 12월
삼성여객
24대
1996년 1월
금성교통
79대
1997년 7월
명진여객
43대[14]
1997년 8월
경남여객
6대
1997년 11월
경남여객
36대
1998년 3월
경남여객
31대
1998년 9월
대신여객
20대
1999년 1월
삼성여객
32대
1999년 5월
명진운수
36대[15]
1999년 5월
남양여객
32대[16]
2005년
평안운수, 세진버스
[17]
2006년
용일여객
[18]
2008년
연천교통
[19]
2008년
명진여객, 진명여객

2008년
센트럴시티,공항고속
[20]
2009년 12월
선진상운, 유성운수
[21]
2009년 12월
선진여객, 하남시내버스
[22]
2010년
선진고속
[23]
2010년
동부고속
[B]
2012년
삼화고속
[B]
2018년 5월
삼흥고속
90대[24]
2018년 12월
경북고속, 진안고속, 대성고속, 동부고속, 선진고속
[B]
본격 버스계의 진공청소기

3. 분할 및 설립


1999년 : 대원고속과 경기고속, 그리고 1999년에 인수한 명진운수의 남양주권 노선을 모아서 대원운수로 분할했다.
2003년 : 인수한 경기교통 노선에 대원고속, 경기고속의 성남권 노선 일부를 모아서 대원버스로 분할했다.
2008년 : 경기고속과 대원운수의 구리시, 도농동 노선들을 경기여객으로 분할했다. 또한 공항버스 사업에 진출해서 대원공항을 설립했지만, 계열사 중 유일하게 2012년 8월 1일 해체되었다.
거기에다 경기도 화성시수원시를 주로 다니는 화성여객은 원래 화성운수에 인수 제의를 했으나 가격을 너무 높게 부르고 협상도 안돼서 차라리 회사를 하나 세우는게 낫겠다 싶어 화성여객을 설립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3.1. 지금의 KD 운송그룹


2000년 다큐멘터리 방영 당시 (주) 대원관광 등 6개 회사 총 2,000대라고 소개했는데, 17년이 지난 지금 2017년에는 무려 5,100여대의 버스가 운행하고 있으며, 계열사는 총 15개이다. 시내버스부터 시작해 광역버스, 공항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와 관광버스까지 운영하고 있다.
또한 기사들의 보험률이 100%에 달하고, KD투어나 공항버스 같은 곳은 105~155%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회사 자체로 100% 직영 체제를 구축하였는데,
  • 유니폼 제작 (KD 어패럴)
  • 차량 정비소 (KD 정비공장)
  • 유류 보급 (KD 에너지텍)
  • 김치, 콩나물 공장 (KD 푸드피아) - 전국 53개 직영 식당에 공급한다.
이 외에도 타이어, 차량 부품 등을 직접 구입하며 관리 및 감독하고 있다. 아무래도 허명회 회장 본인이 경기여객 말단사원에서 정비원으로 근무한 덕분인 듯. 타이어 조차 재생타이어로 쓰지 않고 한국타이어로 전량 교체하는 결정을 내리니까 한국타이어 직원 분이 이 분은 정말 미쳤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또한 그룹 자체 내에서 상조회도 운영하는 듯 하다. 직원 가족이나 부모님 상을 당한 경우 이쪽에서 직접 지원을 하는 듯 하다. 허명회 회장 부모상과 부인상 당시 이쪽에서 지원을 했다고...
직영 체제를 고집하는 이유는 원가가 절감되고 여러 방면에서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3.2. 계열사 (2018년 현재)


  • (주) 대원여객 - 1971년 창립
  • (주) 대원관광 - 1970년 창립/1976년 인수
  • (주) 경기고속 - 1930년 창립/1978년 인수
  • (주) 대원고속 - 1948년 창립/1984년 인수
  • (주) 대원교통 - 1974년 창립/1996년 인수
  • (주) 대원운수 - 1999년 창립
  • (주) 대원버스 - 2003년 창립
  • (주) 평안운수 - 1968년 창립/2005년 인수
  • (주) 경기여객 - 2008년 창립
  • (합) 명진여객 - 1962년 창립/2008년 인수
  • (주) 진명여객 - 2003년 창립/2008년 인수
  • (주) 경기버스 - 2009년 인수
  • (주) 경기운수 - 2006년 창립[25]/2009년 인수
  • (주) 경기상운 - 1971년 창립/2009년 인수
  • (주) 화성여객 - 2014년 창립
  • (주) 삼흥고속 - 1966년 창립/2018년 인수
  • 안동터미널
  • 영덕터미널

3.3. 교육


창립 당시 동업자였던 전 국회의원 故 권영우 씨가 교육 재단을 담당했다.대원교육재단, 민송학원, 세명학원 크게 3개의 교육 재단이 있다. 세명대학교, 대원대학교, 세명고등학교, 성희여자고등학교, 세명컴퓨터고등학교 총 5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3.4. 현재


2014년에 부인상을 당했다. 2020년 현재도 8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한결같이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탈모가 온 듯 하다. 연세는 못 속인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대원운수, 대원버스 등의 일부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을 아들인 허상준 사장에게 승계하고 있다.

4. 여담


자신의 경영 철학으로 사원을 채용하는데 조건이 있다고 한다.
1. 36세 이하는 채용하지 않는다.[26][27]
2. 총각, 처녀, 홀아비, 홀어미는 안된다.[28][29]
3. 월세 사는 사람은 쓰지 않는다.
4. 용모가 험상궂은 사람도 곤란하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사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들의 요양을 위해 사표를 냈다. 몇 년 뒤에 그 사람은 복직신청을 했지만 냉정히 거절당했다. 허 회장은 경기도 광주에 있던 그 사원의 집을 직접 찾아갔고, 아들을 목욕시키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원 부부를 봤다. 안전운전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허 회장은 그를 다시 고용했다고 한다. 위로금도 줬었다고. 대인배
지독한 일 중독으로 유명한데, 50년 넘게 근무하면서 단 16일 밖에 쉬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무마취수술까지 할 정도로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탓인 듯. 1977년에 부친상 당시 5일, 1979년 조모상 3일, 1986년 백내장 수술 3일로 총 16일, 그리고 부인상 3일이다. 거기에다 1986년 백내장 수술 당시 의사가 최소 열흘은 쉬어야 한다는 권고도 무시하고 3일 만에 출근했다가 실명할 위기까지 놓여서 지금도 보안경을 쓰고 다닌다.
어찌 보면 일 중독의 연장 선상이기도 한데, 비행기 조차 한 번 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제주도에 가본 적도 없으며, 해외여행도 가본 적도 없다고 한다. 호화 유흥업소 출입은 물론 골프도 치지 않는다고. 심지어 대기업 회장들 다 가지고 있다는 그 흔한 외제차 하나 없다고 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오래된 차를 타고 다닌다고.[30]모 지방의 버스운송조합 이사장은 전국에 몇 대 없는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걸 생각해 보면...
여행이라곤 아내와 공주 마곡사에 다녀온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러나 저 채용 기준이 여러모로 논란이 되었고 뉴스까지 타는 등 그다지 좋지 못한 인식이 퍼지자 2016년 지금은 기준이 엄청 완화되었고 요새는 인력난으로 인해서 조건부로 미혼자를 채용하기는 한다. (주로 부모님 중 한 분 이상이 돌아가시거나 가정 형편이 어려울 경우엔 미혼자도 받아주는 편이며 정확한 미혼자 채용 여부는 영업소마다 제각각이니 전화문의 할 것. 주로 남양주시 시내버스에서 인력난이 극심하다고 한다.)[31][32] 하지만 지금은 주 52시간제로 인하여 거의 모든 영업소가 인력난이 심해서 기혼자 우대 정책이 많이 희석되었고 마을버스 6개월 경력도 뽑는다고 한다.
허나 싱글족이 많아지고 개성이 존중되는 현재를 생각해보면, 1~4번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 현재는 만 36세 미만의 직원들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타이어에 관란 일화가 있는데, 하루는 경쟁 회사의 버스가 퍼져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경쟁 회사의 버스 기사가 자신의 승객을 태워달라는 요청을 하자, "우리 손님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할순 없다."면서, 쿨하게 씹어버리고 간 적이 있었다(...)
이 경쟁 회사는 다름 아닌 남일여객인데, 이러한 허명회의 판단으로 남일여객의 승객 수가 줄고 반대로 경기여객의 승객 수가 날로 늘게 되자, 80년대 초에 남일여객을 허명회에게 매각하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 인수금액을 형편 없이 높게 부르자, 협상이고 뭐고 다 없던 일로 하자는 패기를 보였다고 한다. 이 때의 남일여객은 동양고속의 계열사였던 걸 생각해 보면, 상당한 패기였던 셈. 결국 허명회의 요구대로 받아 들여지고, 남일여객은 대원고속의 전신이다. 빅픽쳐

5. 수상


  • 1981년 국민포장
  • 1982년 대통령 표창
  • 1987년 새마을 훈장 근면장
  • 2001년 철탑산업 훈장
  • 2005년 대통령 표창
  • 2005년 금탑산업 훈장
  • 2006년 노사문화대상 대통령장
  • 2009년 대통령 표창
  • 2011년 국무총리 표창
  • 2013년 6.25전쟁 정전 60주년 기념 호국영웅장

6. 관련 자료


[1]광주시 초월읍[2] 원래 서울시립대의 출발점이 고등보통학교였다.[3] 훗날 경희대학교에서 명예 정치외교학 학사 학위를 수여했다[4] 당시 배차라는 것은 터미널에서 주차 정리와 발차 버스를 외치고 다니던 직책으로, 회사 직원은 물론이고 버스 기사와 조수에게 까지 무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부인조차 다른 직장을 알아보라고 설득까지 했었다.[5] 허 회장에겐 사실상 첫 사업이었다.[6] 지금에야 이 정도는 기본이지만 당시에 직원 복지라는 개념이 희박했다는 걸 명심하자.[7] 일본에 갔다온 지인들을 통해 일본에는 지하철이 속속 개통하면서 버스업계가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고 들었다.[8] 허명회는 대원여객에서 경기여객 버스 60대까지 인수해 지분이 55%였다.[9] 이 당시에 안동 출신의 자본가인 권영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권영우는 경기여객-대원여객의 설립 과정에서 많은 자본금을 내서 회사의 최대주주였으며 대표이사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경영 자체는 허명회가 주도했지만 결과적으로 권영우는 KD 운송그룹의 최대주주가 되었고 회사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면서 국회의원도 하고 운송업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으로 대원대학과 세명대학교를 설립하여 사학까지 운영하게 되었으니 윈윈인 셈.[10] 당시 버스에는 조수가 있었는데 승객이 버스를 타고 내리면 버스 요금을 받는 차장이었다. 그러나 이를 악용해 버스 요금 외에도 승객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욕설도 서슴치 않는 사람이어서 허명회는 정비사로 채용된 최소 인원 몇 명만 빼고 모든 조수를 퇴사시켰다.[11]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예 사내 식당에 잔반통이 없다고 한다.[12] 지금도 KD 운송그룹의 모든 차량은 한국타이어를 사용한다[A] A B 현재 서울고속(충북)[13] 승원여객 의정부 영업소 인수.따라서 이후 12, 13, 712번을 대원여객이 단독 배차 했다.[14] 명진여객의 하남ㆍ광주 노선을 인수해왔다.[15] 이 때 인수받은 36대를 토대로 대원운수가 설립되었다. 이후 2002년 삼용버스가 도산하면서 대원운수는 더욱 성장하게 된다.[16] 720번을 인수해왔다.[17] 마석강동구 길동을 연결하는 1-4번남양주시 진접읍강변역을 운행하는 1, 1-5, 1-8등의 일부 노선 인수[18] 일부 시외버스 노선 인수. 인천광역시 광역버스는 인강여객이 되었다.[19] 서울 진출입 노선 인수[20] 이를 바탕으로 대원공항을 설립했으나 적자만 보고 2012년 해산.[21] 각 경기버스, 경기운수로 사명 변경.[22] 경기상운으로 사명 변경[23] 강원도 철원군 동송터미널, 와수리터미널발 노선 운영[B] A B C 일부 고속/시외노선 인수[24] KD그룹 최초의 비 수도권 회사 인수[25] 공식적으로 세진버스 법인은 2005년에 파산했다. 현 법인은 물적자산만 승계받은 법인이다.[26] 젊은 혈기에 사고를 낼 위험이 있다나...[27] 지금은 kd운송그룹에 30세 이하 승무원 분들도 많다[28] 배우자가 없으면 책임감도 없을거라 판단해서...[29] 지금은 인력난으로 폐지[30] 다만 2000년에 1988년식 그랜저를 타고다녔으니, 지금은 다른 차를 탈 가능성이 크다. 몇년 전 기사에는 초기형 체어맨이라고 했다.[31] 혼인관계증명서 제출, 여전히 기혼자를 우대해 주며 미혼자가 KD 운송그룹 버스기사에 지원할 경우 대기번호가 확 밀려난다고 한다.[32] 논란일 것도 좀 무리가 있는 게 어떤 운송업체든따라잡으라고 하는 버스 회사를 제외하고 경력직을 상당히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금강멘탈 아니고서야, 온갖 진상들 상대하는 서비스 직종에서 멘탈 관리 등으로 베테랑이 되려면 최소 10년은 일해야한다는 철학이 있는 셈. 당장 허명회부터 직원 시절에 사망한 직원의 유족에게 싸대기를 맞았으니... 그만큼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 교육 자체를 상당히 빡시게 한다. 얼마 못 견뎌 퇴사를 하는 유리멘탈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기혼자들을 주로 선발하는 이유는 이직을 방지한다는 이유라고도 한다. 근데 KD 만큼 복지가 괜춘한 회사가 몇 없다. 시간을 못 지킨다고 갈구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