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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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인조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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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허적
許積


파일:허적.jpg

출생
1610년(광해군 2)
사망
1680년(숙종 6)
본관
양천 허씨

여차(車)

묵재(), 휴옹(休)
부모
부친 - 허한(許僩, 1574 ~ 1642)
모친 - 김제갑(金悌甲)의 딸 안동 김씨
부인
정부인 이서의 딸 광주 이씨
계부인 민지익(閔之釴)의 딸 여흥 민씨
자녀
장남(서자) - 허견(許堅, 1646 ~ 1680)
차남(서자) - 허후(許厚, 1648 ~ ?)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관, 학자, 정치인. 허견의 아버지.


2. 생애[편집]


인조~숙종 시기에 활동한 남인파의 중진. 주로 관료적인 입장에서 남인의 온건파인 탁남파를 이끌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재야에 있다가 올라와서 청류를 자처한 남인 청남파의 허목, 윤휴, 윤선도하고는 같은 남인인데도 갈등하였다.[1]

1671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당시 주류 세력이던 서인 송시열의 배척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1674년 2번째 예송인 갑인예송에서 1년간 상복을 입는 기년설을 주장했는데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하였다. 이 때 남인은 서인에 대해 강건한 입장의 청남과 온건한 입장의 탁남으로 갈라졌는데 허적은 탁남의 영수로 활동했다. 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킨 것도 허적.

남인의 종주로서 중량감이 있어 서인을 견제하려는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2] 숙종은 커져가는 남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경신환국을 일으키면서 허적은 실각한다. 거기다 아들 허견이 복선군역모를 꾸미던 것이 들통나 죽고 그로 인해 허적도 사약을 받는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신원되었다. 그 후 갑술환국으로 또 추탈되었으나 1795년(정조 19년) 10월 정조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3]


3. 가족 관계[편집]


  • 조부 : 허잠(許潛)
  • 조모 : 민연향(閔蓮香) - 민희열[5](閔希說)의 딸
    • 백부 : 허경(許儆, 1566 ~ 1617?[4])
    • 고모 : 허순영(許順英)
    • 고모부 : 연원부원군 이광정(延原府院君 李光庭)
      • 사촌 : 연안 이씨(延安 李氏)
      • 사촌 매부 : 민광훈(閔光勳)
    • 아버지 : 허한(許僩, 1574 ~ 1642)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贈 貞敬夫人 安東 金氏)
      • 누나 : 신항구(申恒耉)의 처
      • 형님 : 허치(許穉, 1604 ~ 1636)
      • 형수 : 신응망(辛應望)의 딸
      • 동생 : 허진(許稹)
      • 동생 : 허질(許秩)
      • 동생 : 허제(許穧)

  • 정부인 : 증 정경부인 광주 이씨(贈 貞敬夫人 廣州李氏) - 이서(李𥳕)의 딸
  • 계부인 : 정경부인 여흥 민씨(貞敬夫人 驪興閔氏) - 민지익(閔之釴)의 딸
  • 첩부인 : 성씨 미상
    • 서장남 : 허견(許堅, 1646년 ~ 1680년)
    • 며느리 : 예영 -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첩의 여동생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허견의 첩, 허견의 옥사 이후 김익훈의 첩이 되었다.
    • 서차남 : 허후(許厚, 1648 ~ ?)


4.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6 08:23:20에 나무위키 허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허적은 서인의 거두인 송준길과 인척 관계이기도 했고 경신환국으로 실각했을 때도 서인인 김수항, 민정중 등이 허적을 구명하려고 할 정도였다.[2] 경신대기근 중에 14번의 사직서를 거절했고, 자신이 죽기 전에도 허적을 데려와 고명을 받들게 했다.[3] 아이러니하게도 허적의 복관 명령이 떨어지자 같은 남인인 채제공은 허목이 그를 반대한 점을 들어 허적의 신원에 반대하였다. 같은 남인이라도 채제공은 허목, 윤휴의 계열인 청남 계열에 속했고 허적은 탁남의 영수였던 게 컸다. 채제공은 청남과 탁남이 달랐음에도 탁남으로 인해 모두 다 남인으로 싸잡아서 죄를 물었다며 청남의 억울함을 정조 앞에서 어필한 적도 있었다.[4] 광해군일기 중초본 122권, 광해 9년 12월 15일 병오 7번째기사[5] 경숙옹주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