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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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비서국 비서
허정숙
許政淑 | Ho Jong Suk


출생
1908년 7월 16일
한성부 종로방 관철동
사망
1991년 6월 5일 (향년 82세)
평양시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1948 ~ 1991)
학력
배화학당 (졸업)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군사경력
복무
국민혁명군 팔로군 육군
1938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좌
참전
제2차 세계대전

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론자. 동아일보 언론인, 중국 팔로군 정치지도원 등을 지냈다.

광복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정치인이기도 하며 전 최고재판소장을 맡았다.

조선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로 불리곤 한다.


2. 생애[편집]


1908년 7월 16일 서울 종로방 관철동에서 허헌의 둘째 딸[1]로 태어났다. 본명은 허정자(許政子), 아호는 수가이.

1913~1917년 배화여고보를 졸업하고 1918년 평양여자고등학교에 다녔다. 1918~1919년 즈음 이화여전을 다니다가 일본 간사이로 유학을 갔다왔다.

1922년 상하이 유학 시절 박헌영, 주세죽, 임원근 등과 만나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이 중 임원근과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1922년 임원근과 박헌영이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국내로 잠입하다 검거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1년 반을 복역하고 1924년 1월 출소하였는데, 이때 주세죽과 함께 흰옷을 지어 형무소 밖에서 이들을 마중했다.

1924년 여름 부모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원근과 결혼을 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노발대발했지만 정작 부모인 허헌과 정보영은 오히려 감싸주었다.

1925년 아버지 허헌이 사장 대리로 있었던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최은희 기자에 이어 조선에서 손꼽는 초창기 여성 기자이자 동아일보 첫 여성기자라 할 수 있다. 동아일보에서 학예부와 부녀부, 사회부를 동시에 맡았지만 모두 훌륭히 소화해냈고, 남자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산악과 교통편이 불편한 농촌 현장의 취재에도 직접 뛰어다녔다. 물론 남편 임원근도 동아일보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사내커플이다.

한편 이때 주세죽, 박정덕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조직하여 활동기도 하였다. 전 세계 무산자 부녀들의 기념일인 국제 무산 부인 기념일 행사에 김조이, 박희자, 주세죽, 박원희, 김희자 등과 함께 연사로 참석하고, '국제 부인 데이의 의의와 여성 운동'이란 주제로 강연한 뒤, 동아일보에 '국제부인(國際婦人) 데이에 – 3월 8일은 무산 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인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 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라는 칼럼을 기고하였다.

3월 8일은 무산 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인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 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오래인 성상(星霜)동안에 여러가지로 미명(美名)의 마수제(魔睡劑)를 가지고 횡포와 우월권을 마음껏 행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굴종을 인종(忍從)하며 살아오던 부녀의 무리가 전제 정치와 자본 계급에 반항하여 맹연히 분기한 날이다. 이리하야 부녀들은 규율있는 조직 하에서 자아의 진용을 정제하고 여성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며 일반 부녀들에게 계급적 각성과 해방적 의식을 갖게 하야써 인간으로서의 부인의 지위와 인권을 찾게 하는 날이다.” — 동아일보 1925년 3월 9일자


그러나 1925년 5월 "철필 구락부 임금 인상 투쟁"에 가담한 후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퇴사하게 되었다. 여기자로 활동한 지 몇 달도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1925년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 사건 때에는 남편 임원근이 구속되었다. 그렇게 남편이 구속되고 아버지 허헌이 사위의 변론에 힘쓰고 있을 때,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녔다. 그러다 북풍회의 송봉우와 동거를 시작하여 경성을 뒤흔든 대형 스캔들을 일으켰다. 남편에게 찾아가 이혼장을 내밀며 이혼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붉은 연애' 행각에 대해서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입방아를 찧었는데, 허정숙은 이에 대해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조는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느냐.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첩으로 두고 술집 여자와도 놀아나면서 왜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느냐."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 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행위다."


1926년 5월에는 아버지와 함께 세계 일주에 나섰다.[2] 그러나 바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 1년 머무르면서 공부를 하였다.

1927년에는 귀국하여 근우회에서 일하다가 1930년 서울 여학생 운동 지원 사건(근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체포 당시 임신 중이었고, 감옥에서 송봉우의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출산 후유증을 이유로 하여 보석으로 나왔다가 1931년 다시 재수감되었다.

그러다가 송봉우가 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어 전향하자 송봉우를 걷어차 버렸다. 그 뒤에는 의사이면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신일룡과 사귀어 셋째 아들을 낳았다.

1936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연안의 조선독립동맹에 소속되어 공산주의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이때 조선의용군의 최창익과 다시 결혼하였고 두 아이를 낳았다.

1940년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과를 졸업했고, 1941년 팔로군 제120사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42년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 및 독립동맹 집행위원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남북을 오가며 활동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 최창익은 다른 여성과 바람이 났는데, 1946년 최창익이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허정숙에게 이혼을 요구하자, 쿨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최창익의 결혼식에 가서 축사까지 낭독하였다.

1946년 2월에 북조선공산당 선전부 부부장에 임명, 1946년 11월 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된 조선로동당 제1차 당대회에서 간부부장에 선출되었으며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국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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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허정숙.

결국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에 북측의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한에 정착했다. 1948년 9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었고, 38선 이북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내각 문화선전상[3]에 선출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6월 28일 서울로 내려와 리승엽 등과 서울에 체류하며 KBS 방송국을 점령하고 선전, 홍보, 문화 활동과 각종 홍보물 인쇄, 방송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인민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북한 북쪽으로 황급히 도주했다. 그해 10월 12일에 평안남도 덕천을 거쳐,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가는 일이 생겼으나, 12월 6일에 인민군이 평양을 탈환하면서 다시 내려왔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전 남편인 최창익김일성에게 맞섰으나, 전 남편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4] 결국 숙청된 최창익과 달리 본인은 계속 중용되었고, 1957년 8월 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문화선전상에서 해임, 사법상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사법상에 재선되었다. 1957년 1월,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1960년 12월까지 겸임하였다. 1958년 6월 30일,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9년 8월 3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사법성이 폐지됨에 따라 사법상에 물러났다. 1959년 10월, 최고인민회의 2기 6차 회의에서 김하운의 뒤를 이어 중앙재판소장에 선출되었으며 1960년 11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익선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72년 7월,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장에 임명,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75년 3월, 여맹 중앙위원회 비서장에 임명되어 1978년 12월까지 재임하였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으며 1978년 8월, 조국전선 의장에 임명하여 죽을 때까지 재임했다.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년 11월, 비서국 비서에 임명되었으며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장 및 조평통 부위원장이 되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직을 사퇴하였고, 2월 28일 제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제7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4년 부총리직을 사퇴하였다.

198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2일 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이 되었다. 또한 조선민주여성동맹 대표단장에도 선출되었다.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9년 조평통 부위원장 및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에서 해임되었다.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 1차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1년 6월 5일 오후 3시 30분에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허정숙동지는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끝없이 충실한 혁명전사이며 조국의 통일독립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 싸운 녀성활동가이다. (...) 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자주적인 조국통일방침을 높이 받들고 북과 남의 모든 애국적력량을 굳게 단합시키며 분렬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아주 좋게 말해주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허정숙을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 4명의 남편(임원근, 송봉우, 신일룡, 최창익)에게서 서로 성이 다른 자녀들을 여러 명 두었다. 장건상에 의하면 남편만 7명이라 한다. 사랑 없는 성관계도 가능하다고 주장해서 화제가 됐다. 아들 중 하나인 허묵은, 이한영의 증언에 따르면 연락부 과장으로 일했는데 백건우, 윤정희 납치 공작에도 동원되었으나, 공작원 할머니가 "왔어요."라고 하면 숨어있던 공작원들이 튀어나와 끌고가기로 한 것을 "다들 어디 갔나."라고 다른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공작원들이 눈치만 살피면서 나오지 못하고, 허묵 혼자서 나왔다가 괜히 북한 사람인걸 티내는 바람에 경악한 윤정희가 그대로 미국 영사관으로 달아나버리면서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 1921년에는 한국 여성 최초로 단발 머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머리를 자르면 죽는 줄 아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외치는 유교 문화가 생생하게 있는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단발머리=공산주의자라는 인식도 생겨서 군벌혼전 중에서는 단발머리 여자만 보이면 참수하기도 했다.

  •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북측 대표로 참석했는데, 평양을 방문한 동아일보 송건호 주필이 소개를 받고 "나는 동아일보 송건호라고 하는데 선생님 동생을 잘 알고 친합니다."라고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허정숙은 “그래요”라고 한 마디하더니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녀의 여동생인 허근욱은 북한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1.4 후퇴 당시 남편과 함께 월남했기 때문이었다.

  • 최후까지 김씨 정권에 충성하며 살아남은 행적에서는 느껴지지 않지만, 정상진 등의 인사들은 허정숙의 인품 등을 꽤나 높게 평가했다. 독재정권에 부역하며 그 유지와 연장에 도움을 주면서도 자기 자신은 온건파로써 남으려 한 김재익저우언라이같은 이들과 비슷한 길을 걸은 셈이다. 다만 허정숙은 그 정도로 넓은 영향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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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째 딸은 일찍 죽었으니 사실상 맏딸이다.[2] 세간의 여론을 피해 허헌이 딸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는 말도 있다. #[3] 문화선전상으로 재임하던 시절 최승희와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최승희를 없애 버리는데 성공했다. 물론 최승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최승희는 허정숙뿐만 아니라 다른 당 간부들, 심지어 김일성하고도 툭하면 싸워댔고, 많은 사람의 공적이 되었기 때문에 최승희의 숙청이 허정숙의 공로만은 아니다.[4] 본인 역시 연안파였음에도 그러했다. 전 남편과 사이가 안 좋긴 했지만,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보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게, 이후에도 쭉 김일성에게 충성해서 연안파임에도 숙청되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추측의 범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는 한데, 독립운동가 변호사로 유명했던 허헌을 굉장히 존경한 김일성이 그 딸에게 예우를 해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