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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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시 정권
平氏政権(へいしせいけん

헤이케
平家(へいけ

파일:타이라씨 가몬.svg
가몬
1167년 ~ 1185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인세이
가마쿠라 막부
위치
혼슈, 규슈, 시코쿠
수도
헤이안쿄(平安京)[1]
정치체제
무가정권
국가원수
천황
정부 수반
태정대신 → 내대신
주요 실권자
타이라노 키요모리
타이라노 무네모리
언어
중세 일본어
문자
한자, 가나 문자
종교
대승 불교, 신토
화폐
송전(宋錢)[2]
주요사건
1167년 타이라노 기요모리태정대신 임명으로 수립
1180년 겐페이 전쟁 발발
1185년 단노우라 전투 패배로 몰락
1. 개요
2. 역사
3. 역대 수장
4. 여담



1. 개요[편집]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의 정권. 가마쿠라 막부로 넘어가기 직전의 과도기적 무가 정권[3][4]이다. 존속기간은 1167년부터 1185년까지 총 18년.[5]

타이라노 키요모리1156년호겐의 난(保元の乱)과 1159년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을 통해 집권하며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일족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져 왔으며, 그로부터 30년 뒤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키요모리의 삼남이자 후계자인 타이라노 무네모리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패배할 때까지 정권이 이어졌다.

본거지인 키요모리의 저택이 교토(당시에는 헤이안쿄)의 로쿠하라(六波羅)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로쿠하라 정권이라고도 불린다.


2. 역사[편집]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타이라노 사다모리의 넷째 아들 고레히라가 이세에 자리를 잡은 것을 집안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이세 헤이시(이세 평씨)}. 고레히라의 증손자인 마사모리(正盛)의 대에 와서 시라카와 덴노의 인세이 아래 중용되었고, 특히 미나모토노 요시치카[6]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면서 무사 가문으로써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이러한 이세 헤이시의 대두 과정 자체가 당시 무사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와 카와치 겐지 가문을[7] 견제하기 위한 시라카와 덴노의 계략이었다는 해석이 정설.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승리를 거두고, 키요모리는 그 지위를 높혀 전국의 500여 개의 장원을 차지하고 각종 공경 벼슬을 친족들에게 부여하여 헤이시 정권을 형성한다.

헤이케는 해상 세력이기도 했는데,[8] 대 송나라 무역을 독점하고 세토내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현재의 고베에 무역을 위한 인공섬 쿄가시마(経が島)[9]를 건설했으며, 역시 고베에 후쿠하라쿄(福原京)의 건설과 천도를 시도하기도 했다.[10]

타이라노 키요모리 본인은 상당한 능력자였지만, 헤이케 안에는 키요모리를 능가 혹은 그에 비길 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없어[11] 키요모리 사후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 세력에 밀리고 패배하며 멸망했다.[12]

당초 후계자는 장남 시게모리였고, 그는 키요모리급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정권을 지킬 능력 정도는 됐지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키요모리 사후 삼남 무네모리가 정권을 세습했는데, 문제는 무네모리가 정권을 유지할 깜냥도 안 되는, 인성도 능력도 안 되는 인물이었다는 점. 결국 무네모리는 키요모리가 죽은 지 4년 후인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집안을 몰락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단노우라 전투 이후 헤이케의 장원과 영지는 몰수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따르는 무사들에게 재분배되었다. 요리토모는 헤이케 잔당들에 대해 철저한 보복을 가했는데, 이 때문에 각지에서 "헤이케의 도망자 전설"이 만들어지게 된다. 다만 이세 헤이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닌데 키요모리의 동생으로 요리토모에게 귀순한 요리모리[13]에 의해 가문 자체는 유지될 수 있었다.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平家にあらずんば人にあらず)"라는 유명한 고사가 바로 헤이시 정권 시기 때 나온 말이다. 키요모리의 처남인 토키타다가 한 말인데 불새/난세 편에서는 대놓고 키요모리 본인이 토키타다에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왜 하냐"고 깐다.[14] 교만의 상징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키요모리 본인은 낮은 사람들한테도 잘 대해 주는 것으로 신망이 높았다.


3. 역대 수장[편집]


대수
이름
집권 기간
1대
타이라노 키요모리
1167 ~ 1181
2대
타이라노 무네모리
1181 ~ 1185


4. 여담[편집]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이전의 헤이시 정권을 무가 정권의 선도적인 형태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를 다룬 문학으로 헤이케모노가타리가 있다. 13세기에 성립된 이래 수많은 문학과 회화, 연극 작품 등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도 곧잘 주석본이 나오는 삼국지연의급 고전.

겐페이 전쟁에서 실제 역사와 달리 헤이케가 승리해서 정권이 계속 이어지거나 헤이케가 막부를 창건한다는 가정은 일본의 대체역사물에서 상당히 소재로 많이 활용되어서 로쿠하라 막부나 로쿠하라 시대라는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우라타로가 있다. 이 때문에 창작물에서 가상의 막부가 나올 때는 장갑악귀 무라마사에서처럼 헤이케와 별 관련이 없어도 로쿠하라 막부라는 명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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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80년에 약 5개월간 후쿠하라쿄(福原京, 오늘날의 고베시)를 수도로 삼았으나 곧 헤이안쿄로 복귀했다.[2] 송나라 화폐[3] 단지 집권자만 무사였을 뿐 지배의 양태는 종전 집권세력인 공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무가 정권의 시작은 가마쿠라 막부이다.[4] 사실 기존 정부를 그대로 차지하고 관직을 독점하는 점은 한반도의 무신정권하고 닮아있다.[5] 1156년 호겐의 난을 통해 가마쿠라 막부의 창건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버지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연립정권을 세우며 공동 집권하고, 1159년 헤이지의 난을 통해 단독 집권했지만, 학계에서는 정권의 시작을 1167년(덴노로부터 선지를 받은 해)1179년('지쇼 3년의 정변'이 있던 해.)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6] 겐지의 동량으로 신망이 높았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아들이다.[7] 또한 겐지는 전통적으로 후지와라 셋칸케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셋칸케를 배제하려는 시라카와 덴노로서는 미나모토 가문을 배제하기 위해서도 다른 무사 가문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8] 반면 헤이케의 숙적이었던 겐지는 척박하고 교역에 불리한 간토 지방을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육상전에 능하였다.[9] 키요모리가 이 섬을 만들 때 난항을 겪자 주변에서 "산 사람을 제물로 바다의 신에게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게 잘 이루어질 것"이라며 인신공양을 권했지만 키요모리는 "다 사람 먹고 살자고 하는 공사인데 그럴 수는 없다"며 불경을 적은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덤으로 이 돌로 매립공사까지 했다) 공사 중에 해가 저물려고 하자 해에게 명령해 저물지 말고 다시 뜨라고 했더니 해가 지지 않고 조금 그 자리에 멈춰서 비치고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10] 천도 자체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고베는 키요모리 사후 800년이 지난 2016년 지금도 일본의 국제무역항으로써 번영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키요모리의 안목을 가늠할 수 있다.[11] 그나마 키요모리의 장남, 차남인 타이라노 시게모리와 타이라노 모토모리가 평판과 능력이 뛰어났으나 전부 키요모리보다 먼저 병사하였다.[12] 이 부분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무신정권의 체제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게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한반도 무신정권도 지방세력이었던 조위총의 난으로 위기에 빠졌으나 결국 진압에 성공하여 한반도는 중앙이었던 개경을 중심으로 계속 무신정권의 역사가 진행되는 반면 일본은 지방에 새롭게 막부가 설치되어 교토에서 일본 동부인 가마쿠라로 중심지가 옮겨졌다.[13] 키요모리와는 배가 달랐고, 생모가 죽은 자기 아들 이에모리와 닮았다며 요리토모의 목숨을 구명해 줄 것을 키요모리에게 부탁했던 것도 있어서 요리토모가 우대했다고.[14] 토키타다 이 사람은 헤이케가 서쪽으로 낙향할 때도 동행했지만 단노우라 전투 때 포로로 잡혔고, 삼종신기의 하나인 신경(神鏡) 야타노카가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보호했다는 점을 감안해 처형은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