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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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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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Helen Keller


파일:Helen_KellerA.jpg

본명
헬렌 애덤스 켈러
Helen Adams Keller
출생
1880년 6월 27일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
사망
1968년 6월 1일 (향년 87세)
미국 코네티컷 주 이스턴 아칸릿지
묘소
워싱턴 국립 대성당
신체
170cm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작가, 교육가, 사회운동가
학력
래드클리프 여자대학교 (학사)
정당


종교
개신교[1]
서명
파일:헬렌 켈러 서명.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llen_Keller_holding_doll_with_Ann_Sullivan_1888.jpg

은사로 알려진 앤 설리번 선생과 헬렌
8세 때 찍은 사진.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앤 설리번과의 만남
2.3. 서리 임금님 사건
2.4. 사회운동가로서의 활동
2.5. 노년기
3. 대중매체에서
4. 여담
5. 명언
6. 참고자료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2]

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3]

-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The Story of My Life. Helen Keller. 1905[4]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


미국의 사회 운동가.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었으나 이 삼중고의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인 인권 운동가, 사회주의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인물.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파일:external/www.perkins.org/keller-profile220.jpg

10대에 찍은 사진

1880년 6월 27일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5] 태어나 자랐다. 아주 어릴 때는 비장애인이었으나 생후 19개월 때 앓은 뇌척수막염으로 하루아침에 시력과 청력을 한꺼번에 모두 잃고 시청각장애인[6]이 되어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안고 살게 되었다.[7]

당연히 정상적인 교육이 될 리 없었고 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도 물건을 던지거나 사람을 할퀴거나 때리는 정도로밖에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다. 6살이 되던 무렵에 부모는 볼티모어에 사는 유명한 안과 의사 줄리안 차이소름 박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헬렌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해서 데려갔다. 그러나 이미 시신경이 손상되어 실명이 된 상태라 치료는 불가능했고,[8] 대신 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박사[9]를 소개받는다.

그를 만난 부모는 "퍼킨스 맹인 학교"를 추천받았고 그 학교에 의뢰하여 가정교사를 부탁했는데 이때 온 사람이 유명한 앤 설리번이다. 설리번은 고아였고 어린 남동생이 있었지만 일찍 병으로 여의었고 그녀도 지독하게 눈이 나빠 엄청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원래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퍼킨스 맹인 학교를 다녔고 이후 눈 수술을 받아 시력을 다시 얻었다.


2.2. 앤 설리번과의 만남[편집]



파일:iTiuy1Z.jpg

헬렌 켈러, 앤 설리번, 마크 트웨인.

앤 설리번은 헬렌에게 극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치려 했다. 물 펌프에서 처음으로 'water'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에피소드는 매우 유명하다.[10] 이후 8살 때 퍼킨스 맹인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교육도 받게 되었다. 6년 후에는 뉴욕으로 가서 라이트 휴먼스 농아학교를 다녔고 이후에는 호렌스만 농아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의 선생인 새라 풀러가 목의 진동과 입의 모양을 만지고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헬렌에게 말하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면서 이 방법으로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여동생인 밀드레드[11]와 함께 케임브리지 여학교에 다닌 뒤[12]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여대[13]에 입학했고 1904년 졸업할 무렵에는 5개 국어를 습득했다. 이후에는 활발한 사회, 봉사활동(특히 장애인 인권 운동)을 했다.


2.3. 서리 임금님 사건[편집]


오늘날에는 우연의 일치로 치부되지만 동화 표절설이 있다.

1891년에 헬렌이 쓴 단편 동화인 <서리 임금님>[14]은 마거릿 캔비가 쓴 <서리의 여신>과 유사해서 표절 의혹을 받았다. <서리 임금님>은 낙엽을 울긋불긋 칠한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이 똑같았다는 이유였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고의적인 표절이 아니라 1888년 무렵에 보스턴에 갔을 때 소피아 홉킨스에게 들은 내용을 헬렌이 무의식적으로 쓴 게 아니냐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캔비는 고의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넘어갔지만 학교에서는 '서리의 여신'을 표절한 것 아니냐며 다그쳤다고 한다.[15] 이게 헬렌에게는 어지간히 상처가 되었는지 헬렌 켈러의 후반부 생애를 다루는 전기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꼭 언급된다.


2.4. 사회운동가로서의 활동[편집]



장애의 극복 사례 및 장애인 인권운동가로만 알려진 것과는 좀 다르게[16] 헬렌은 29세였던 1909년부터 사회당에 가입한 사회주의자로 허버트 조지 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에서도 혁명적 좌파에 속했고 1912년 사회당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품고 전투적인 산업별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하는데 뛰어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헬렌 켈러는 인종차별을 극도로 혐오하는 개념인이었으나 웰즈는 백인 우월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설리번은 스스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지만 1905년 사회주의자인 존 메이시와 결혼했다.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를 접한 것도 존 메이시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1914년에 이혼했고 슬하에 자녀는 없다.

그 외 작가로서의 저술 활동도 활발했고 여성 참정권, 인종차별 반대, 장애인 복지, 노동자 보호 운동 등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허나 그녀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은 당시 매카시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대한민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과 자료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성년기 이후 헬렌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전쟁의 고통은 항상 노동자 대중이 짊어집니다. 그리고 대중은 지배자들이 결코 틀릴 수 없다고 교육받습니다. 그에 따라 지배자들이 시키는 대로 전쟁터로 끌려 나가 죽음을 당하는 것은 수많은 노동자 대중 그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보상은 무엇입니까? 만약 용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을 때, 대중들이 마주하게 될 것은 무거운 세금과 곱절로 늘어난 가난의 짐일 뿐입니다. 어느 시대고 대중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박탈당해 왔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애국심에 대한 정당한 보상 역시 강탈당해 왔습니다. 전쟁에도 미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건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결국 자신이 사기꾼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도 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전쟁은 현재의 지배체제가 아무런 도덕성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를 위해 노력할 생각도 없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전쟁 중에는 가정의 신성함뿐만 아니라 사적 소유까지도 파괴됩니다. " 미친 사회주의자들" 이 정권을 잡으면 시작할 것이 라던 일들을 정부가 솔선해서 벌입니다. 전쟁의 무익함에 대한 그 많은 역사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저 대륙의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기 위해 10 억 달러의 전비와 백만의 병사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조국 방위의 열렬한 선동가들 뒤에는 J. P. Morgan & Co.[17]

와 다른 자본가들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저들은 누군가를 죽이고 그 신체를 산산이 부서뜨릴 수 있을 무기 공장과 그 밖의 군수산업에 두자한 자들입니다. 저들은 조국 방위를, 무장을, 그리고 바로 전쟁을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 자본가들에게는 이 소름끼치는 거래가 곧 새로운 시장 개척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노동자의 연합을 건설하자 제게는 세계 전체가 저의 조국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전쟁도 제게는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같은 민중끼리 서로를 죽이는 동족상잔의 공포로 다가옵니다. 저는 인류의 형제애와 만인이 만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싸움은 세계가 자유와 정의, 그리고 만인의 풍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싸움입니다. 이 나라가 정말로 전쟁이 아닌 평화와 행복을 준비하려면 국가가 산업과 보건, 교육의 모든 영역을 관리하여 국민들의 정신과 육체 모두에서 건강과 효율을 지켜야 합니다. 그때서야 이 나라는 독재자의 명령에 따라 - 단지 노예 상태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 뻔한 데도 -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바로 타국의 적대감을 약하게 하고 친교를 맺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전쟁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전쟁을 통해 온갖 비극과 참상을 겪을 때, 지배자들은 그 보상을 가로쳅니다. 전 쟁을 핑계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은 억제되거나 줄기 십상이고, 노동 강도 역시 더 세지기 마련입니다. 그에 따라 가정생활도 그 평안함을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이 끌려가는 군대는 국민을 지키는 데뿐만 아니라 파업을 탄압하는 데도 쓰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민주국가들이 전쟁 대비에 실패해서 '세계 제국'이 등장하게 된다 할지라도 노동자들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보다 더 잔악하게 임금을 삭감 하고 억압할 수 있는 정복지는 없습니다. 노동자는 사슬 밖에는 잃을 게 없으며, 얻을 것은 세상입니다. 노동자는 세계 제국을 단숨에 무녀 뜨리고 그들의 세상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세계 제국 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충분히 준비된 전투적 국제 노동조합 ( 혹은 ' 연합', union ) 을 건설해야 합니다. 전쟁이 아니라 반란을 시작할 때 지배자들이 여러분의 땀의 결실을 따먹을 때, 여러분은 뼈 빠지게 일하지 않고서는 비참한 삶조차 연명할 수 없다면, 이 위대한 공화국이란 고작 자유의 모사품일 뿐 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조국의 독립? 이건 지배자 자신들만의 독립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더 나은 생활조건을 요구할 때 여러분을 감옥에 처넣는 그 법을 위해? 아니면 국기(國旗)? 그 깃발이 여러분이 충분히 자유를 누리며 가정을 꾸리는 그런 나라의 깃발입니까? 혹시 그 깃발이 여러분이 임금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파업투쟁을 할 때 주먹질을 퍼붓는 그런 나라의 상징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살인 명령을 받았을 때조차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지배자들의 종교를 위해 싸우고 싶은 겁니까? 자, 이제 인간을 야수로, 신을 괴물로 전락하게 하는 지배자들의 종교, 저들의 문명, 저들의 왕과 관습을 쓰레기 더미로 만듭시다. 자유를 위한 나팔 소리가 울리게 합시다. 노동자들이 하나의 거대한 전 세계적 노동조합 아래 뭉칠 수 있도록 그것을 건설합시다.노동자들이 참된 자유와 행복을 쟁취할 수 있도록 이제 전 세계적인 반란을 시작합시다. - 1915년 12월 19일 뉴욕에서


사실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연간의 미국 사회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에서 반드시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이다. 사회주의자로서의 헬렌 켈러를 다룬 레디앙의 기사 1912년의 대선에서 유진 뎁스가 패배하자 이후 사회당의 소위 개량주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전투적 노동자 단체인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에 가입했고 이후에도 죽기 전까지 사회주의 관련 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 때문인지 한동안은 FBI에게 감시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프러제트이기도 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다. "고통을 감수하며 싸우지 않는 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말년에는 이것과 더불어 사회주의 등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링크 1, 링크 2

대학을 졸업한 헬렌은 작가가 되어 자서전을 포함한 여러 책을 쓰면서 보스턴 근처인 랜섬에 정착했다. 한편 언어를 깨친 후에도 그녀의 성장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애니와 (그 후임인) 폴리 톰슨이라는 보조자가 붙어 손바닥에 모든 정보를 전달해 주어야 했다. 그것을 수십년 동안 계속해온 탓에 톰슨의 오른손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또 애니는 가방끈이 짧았던 탓에 헬렌의 수업을 청강할 때 따라잡기 힘들어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밥벌이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금전 감각이 부한 데다 완벽주의적인 성격 탓에 후원자들과 마찰도 자주 빚었고 헬렌이 책을 써서 번 저작료와 강연비 등으로 생계를 잇는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헬렌의 아버지인 아서[18]가 사업에 실패하며 가세가 기울게 되자 헬렌의 부모가 딸의 후원금을 착복했다는 의혹도 있다.

다행히 헬렌이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됐으니 애니 입장에선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실제로 앤 설리번의 한 친구가 앤을 칭찬하기 위해서 "당신이 없으면 헬렌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애니는 "그럼 내가 헛되이 산 게로군요."라고 답했다고 한다.[19]

한편 1915년에는 비서였던 피터 페이건(Peter Fagan)[20]에게 청혼을 받았으나 헬렌의 가족들이 반대해서 헤어졌다.


2.5. 노년기[편집]


헬렌은 장수했으나 그만큼 주변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먼저 애니가 1936년에 세상을 떴고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코네티컷에 있던 집에 불이 나서 그동안 쓴 원고가 대부분 소실됐다. 당시 애니의 전기를 쓰던 헬렌은 이 화재 때문에 원고를 다시 써야 했고 1958년에 출간했다. 폴슨이 1960년에 사망한 뒤에는 은퇴했고 헬렌은 노환으로 은퇴한 뒤 후임 도우미인 에블린 시드(Evelyn Sid)와 집에 머물다가 1968년에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88번째 생일을 불과 26일 앞둔 때였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네이버 웹툰 어글리후드의 등장인물 헬렌 카펜터의 모티브다.[21] 카펜터의 선배 휴 설리반의 모티브는 당연히 앤 설리번. 여기서 카펜터는 여자인데 설리반은 남자로 나온다.


  •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의 일화를 그린 유명한 영화로 연극 원작의 <미라클 워커(Miracle Worker)>(1962)가 있다. 아서 펜이 연출했다. 이 영화로 헬렌 켈러 역을 맡은 패티 듀크[22]는 16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설리반 선생 역을 맡은 앤 밴크로프트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무려 10분간 대사 없이 몸싸움 만으로 이루어진 장면은 굉장히 유명하다.


앤 설리번과 헬렌 켈러의 몸싸움 씬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물 펌프를 통해 처음으로 ‘Water’를 깨닫게 만드는 그 유명한 장면도 등장한다. 순정만화 유리가면에서도 이 영화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2000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 인도 영화 블랙(2005)가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의 이야기를 각색한 내용이다.


4. 여담[편집]


  • 199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25센트짜리 동전 50개주 시리즈의 앨라배마 판의 모델이다.


  • 일본과도 상당히 인연이 있는데 1937년에 일본을 방문했고 아키타현에 가서 아키타견 하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키타견 1마리를 얻어가지고 와서 길렀다. 그 아키타견의 이름이 카미카제였는데 털이 부들부들했는지 헬렌 켈러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23] 일본 방문 당시 헬렌은 지갑을 도둑맞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이 '일본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며 그녀 앞으로 돈과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 해 일본은 난징 대학살을 저질렀다.

  • 중국도 방문하고 싶다고 본인이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으나 당시 중국의 상황이 군벌들간의 내전, 중일전쟁, 국공내전 등등으로 난장판이라 성사되지는 않았다.


  • 대화를 나눌 때는 상대방과 손을 직접 마주 대고 상대방의 수신호를 촉감으로 느끼는 방식을 이용했다.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수년간 훈련을 계속해 자신의 입으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평생 사람의 말을 들어본 적도, 말을 할 때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본적도 거의 없기 때문에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

  •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만큼 촉각이 아주 섬세하게 발달해서 자신의 방에 누가 들어오면 그 진동만으로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영어의 슬랭 가운데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선생이 연인이었다는 속설을 반영한 'Pulling a Helen Keller'라는 표현도 있다.

  • 헬렌 켈러의 성 Keller는 독일 쪽의 성으로 keller는 독일어로 "저장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 단어 cellar와 같다. 헬렌 켈러의 조상은 독일이 아니라 스위스에서 왔다고 한다. 스위스의 국어 중 하나가 독일어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26]

  • 다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장애인임에도 장애인을 열등하게 표현하는 우생학을 지지했고 이에 대해 찬동한 적[27]이 있다. 21세기에 보면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당시의 분위기와 지식인들의 풍조가 그러했으며 그녀가 살아 있을 때는 아직 장애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28] 이러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그녀와 인연이 있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역시 우생학에 찬동했기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29] 관련 기사

  • 그녀와 같은 이들을 '시청각장애인'이라고 하는데 2022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도 1만여 명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수화와 점자밖에 없는데 인프라 및 지원이 매우 부족하여 사회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찰리 채플린의 1919년작 <양지 바른 쪽(Sunnyside)> 촬영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였던지라 이후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닥쳤을 때 이 만남은 찰리 채플린에 대한 공격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에게 시청각 장애 관련 교육을 한 사람은 로라 브리지먼인데 로라에게 시청각 장애 교육을 한 사람이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이다. 그리고 하우에게 처음 시청각 장애 교육을 한 사람이 줄리아 브레이스다. 즉, 줄리아 브레이스에서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 하우에서 로라 브리지먼, 로라 브리지먼에서 앤 설리번, 앤 설리번에서 헬렌 켈러로 시청각장애 교육 사제계보가 이어지는 것이다.#

5. 명언[편집]


01.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02.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


03.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똑바로 정면으로 바라보십시오.


04.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05.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0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07. 인간의 성격은 편안한 생활 속에서는 발전할 수 없다.

시련과 고생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은 단련되고

또한 어떤 일을 똑똑히 판단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며

더욱 큰 야망을 품고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08. 희망은 인간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신앙이다.

희망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09.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져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10. 비관론자치고 별의 비밀을 발견하고 미지의 땅을 항해하고

인간 정신의 새 지평을 연 사람은 없었다


11.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을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12.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작습니다.

함께 할 때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13. 세상이 비록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힘도 가득합니다.


14.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 만족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삶의 목적을 위해 충실하게 행동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15. 사흘 동안만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저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이 보고 싶구나!

서산에 지는 낙조가 보고 싶구나!

어머니 품에 안긴 채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구나!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의 눈동자가 보고 싶구나.


16. 모든 사람들이 며칠 간만이라도 눈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축복할 것이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하고 침묵은 소리를 듣는

기쁨을 가르쳐 줄 것이다.


17. 눈을 사용하라!

내일은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일 살아간다면 평소에는 당연시했거나 보지 못했던

세상의 경이로움을 새삼 발견하게 될 것이다.


18. 나는 폭풍이 두렵지 않다. 나의 배로 항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까.



6. 참고자료[편집]


  • 자서전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박에스더 및 이창식 역 (2008년)
    •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 박창익 역(2001년)
    • 자서전

  • 기타 저서
    • <나의 스승 설리번>(1955년). 한국판 2004년에 번역됨.

  • 평전
    • 헬렌켈러-A LIFE(2001년): 도로시 허먼 저, 이수영 역
    • 카트야 페렌스. <헬렌 켈러 평전>(2001년)

  • 기타
    • 앤 설리번. 헬렌 켈러는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가: 1887~1891년까지 설리번이 헬렌을 관찰한 기록.


7. 둘러보기[편집]


시청각장애인 사제계보
특수교사-학생 관계
줄리아 브레이스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

로라 브리지먼

앤 설리번

헬렌 켈러
[각주]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사회주의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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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중에서도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계열이며 자서전인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 (Light in my darkness)>에서 언급된다.[2] 그녀의 평생 은사였던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되어 있는 버전도 있다.[3] 이 문구는 베가 No.6의 광고에도 쓰였다.[4] 영어 전문은 여기로[5] 아버지 에버렛 켈러는 군 장교 출신이며 남북전쟁 당시 남군으로 참전했다. 아버지 쪽으로는 헬렌은 셋째이자 첫딸이다. 전처에게서 얻은 두 아들이자 헬렌에게는 이복오빠인 제임스 심슨 켈러와 윌리엄 심슨 켈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헬렌에게는 친여동생 밀드레드 캠벨 켈러와 친남동생 필립 브룩스 켈러가 있었다.[6]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자로 줄여서 농맹인(聾盲人)이라고도 한다.[7] 병으로 말까지 못 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들리지도 않으니 말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눈도 안 보여 글자를 볼 수가 없으니 말을 배울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수없는 노력 끝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8] 이는 21세기의 의학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수준이다.[9] 전화기 특허를 취득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의 어머니가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벨 박사 자신도 장애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10] 이 일화는 헬렌 켈러의 성장기를 모티브로 한 인도 영화 Black에서도 묘사된다.[11] 비장애인이다.[12] 참고로 당시 교장이었던 길멘은 설리번을 싫어해서 기숙사에서 내쫓았지만 항의한 헬렌이 수업을 거부해서 결국 복귀를 허락했다. 헬렌은 따로 방을 구해서 등하교하게 되었다.[13] 1999년 하버드 대학교에 완전히 통합되었다.[14] 가을 나뭇잎이란 제목도 있다.[15] 당시 헬렌이 잘못했는지는 교내 조사위원회에서도 의견이 반반이었다(카트야 베긴스, 헬렌 켈러 평전 145~151페이지 참조).[16]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항상 어린 시절에서 끝난다고 추측할 수 있다.[17] 당시 미국 최대의 금융 독점자본이었다.[18] 남군 장교 출신이다.[19] 출처: 네이버캐스트.[20] 설리번이 결핵 때문에 요양하러 스코틀랜드에 잠시 휴가를 갔을 때 임시로 고용했다.[21] 정말 말 그대로 이름만 모티브고 나머지는 하나도 안 닮았다.[22] 숀 애스틴의 어머니이다. 1946 - 2016.[23] 그 유명한 자살공격 카미카제는 1944년 무렵부터 시작된 것이니 우리가 아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24] 당시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 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25]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모두 카를 5세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이후 스페인은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오스트리아는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다스리게 되었다.[26] 현대 독일의 모태인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에는 스위스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이 포함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은 근대의 내셔널리즘 기준으로 보면 독일과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언어나 종교 등 전근대로부터 내려온 문화적 특성은 많은 부분이 독일과 유사한 것이다. 다만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24]스페인동군연합이 해체됨에 따라[25] 스페인, 더 정확히는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가 되면서 점차 독일어권과 분리되기 시작했으며 룩셈부르크는 근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프랑스어가 독일어보다 더 많이 쓰이게 되면서 현재는 사실상 프랑스계 국가로 여겨지기도 한다.[27] <더 뉴 리퍼블릭>에 기고한 글에서 그녀는 "생명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은 행복·지능·능력의 존재 가능성인데, 열등하고 기형이며 마비되고 사고력이 없는 생명체에는 이러한 것들이 부재하다"고 했으며 "정신적 결함자는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며 우생학적 이유로 장애 유아의 구명 수술을 거부하고 방치한 해리 J. 하이젤든을 지지했다.[28] 지금과 같이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가 '장애인'이라는 큰 범주로 묶이게 된 것은 장애인 인권 운동이 활발했던 1970년대부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장애인이 신체적 장애인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29] 다만 벨은 우상학을 지지하되 그의 우생학 신념은 "장애인을 배척하자!"가 아니라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들자!"였다. 애초에 그의 어머니도 청각장애인이었다. 전화기도 농아들이 원격으로 의사소통하기 위한 도구를 발명하다가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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