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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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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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암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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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1. 개요
2. 전투의 배경
3. 오마치 고개
4. 현리로 몰려든 한국군
5. 한국군의 와해
5.2. 유재흥 장군은 정말로 도망갔는가?
6. 군단의 패주
7. 하진부리에서의 수습과 또 패주
8. 결과
8.1. 미군 지휘권 구도의 확립
9. 미군의 책임론
10. 의의
11. 뒷이야기
12. 기타
1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현리 전투6.25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2일까지 강원도 인제군 현리지구 근방[1]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중국 인민지원군 제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후술하겠지만 군단 자체가 해체될 정도였기에 대한민국 국군에서 6.25 전쟁기 가장 참담한 패전 중 하나로 꼽는 전투이다.


2. 전투의 배경[편집]


지평리 전투 이후 2달동안 북으로 축차후퇴를 진행했던 중공군[2]은 1951년 4월 22일, 신규병력을 충원하여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전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4월 공세, 혹은 춘계 1차 공세로 불리는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무제한 화력 투입과 방어로 중공군의 서부전선 대공세를 4월 29일 서울 북방에서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3] 결국 펑더화이는 미군이 더 이상 예전같이 당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4월 공세에서 일찍 손을 떼 전력을 온존, 동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특히 약한 국군을 제대로 박살내기로 맘먹는다.[4]

2차 춘계공세, 혹은 5월 공세라 불리는 이 작전에서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9사단을 앞세운 한국 육군 제3군단과 미 10군단의 지휘를 받는 한국 육군 5사단, 7사단이었다. 중공군의 계획은 중공군 9병단 예하 지상군 12, 20, 27군단이 미 10군단 휘하 5사단과 7사단을 돌파해 깊숙이 파고들고 동해안 쪽에선 인민군 육군 2군단, 5군단이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 한국군 네 개 사단을 삼중으로 싸먹어 완전히 결단을 내고 동부전선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파일:attachment/195105.jpg
중공군의 공세 계획. 계획대로 되었다면 동부전선은 완전히 작살이 났겠지만.
하지만 중공군의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3군단의 왼쪽을 맡은 중공군 9병단은 한국군 사단 하나당 6개 사단을 투입, 5사단과 7사단 방어선을 가볍게 뚫어제껴 버렸으나, 옆 미 2사단이 한국군의 패주로 동쪽이 휑하니 비어버린 상황에서도 벙커고지에서 화력과 우주방어로 돌파가 확대되는 걸 저지하면서 애초 의도대로 돌파구를 열지 못했다. 이 덕에 5사단과 7사단은 밀려나고 연대가 통째 날아감은 물론 붕괴 직전까지 몰렸지만 물러서는 데 성공한다. 한편 3군단의 오른쪽을 파고들었어야 했을 인민군 2군단, 5군단마저도 돌파조차 성공하지 못하면서 이들의 계획은 엉켜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중공군의 선두 부대는 산을 타고 내달려 오마치(=오미재) 고개에 도달했다.


3. 오마치 고개[편집]


당시 국군 3군단은 오마치라는 단 하나의 고개후방과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고개가 미 10군단 휘하 한국 육군 7사단의 관할구역이었던 것.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3군단에서 오마치 고개에 수비 병력을 두려고 했는데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무슨 깡으로 남의 구역 침범 하냐고 난리를 쳐서, 결국 오마치는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다. 이 실책이 후술할 참상의 원인 중 하나가 됐기에,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육군보병학교에서 전투지경선(각 부대의 담당구역을 가르는 선)을 가르칠 때 이 사례를 들어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한다.

중공군 역시 오마치 고개를 잡으면 국군 3군단의 목줄을 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공세 개시 후 5월 16일 국군 7사단을 뚫어버리자마자 60사 178연대 2대대 병력들을 고개 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으나 산속에서 길을 잃었고, 이 와중에도 선두 5중대는 한밤중에 산을 타고 30km를 돌파한 끝에 5월 17일 새벽에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 7사단은 두들겨 맞으며 밀려나는 와중에 오마치가 점령당한 걸 알았지만 한국 육군 3사단이나 9사단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전하지도 않고 후퇴해 버렸고, 결국 3군단 쪽에서 오마치가 점령당했단 사실을 안 건 17일 새벽에 부대 차량들을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철수시키다 오마치에서 총알 세례를 받은 다음이었다.

한편 옆 동네 7사단의 방어선이 뻥 뚫리고 오마치 고개도 차단당한 사실을 안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사단에 대한 전면 공격은 없었지만 포위를 우려해 휘하 부대들에게 후퇴 지시를 내렸고, 9사단도 후퇴하자 3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후퇴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해서 3사단과 9사단은 전력을 온존히 보존한 채 현리로 모여들게 되었다.

다만 이 때 오마치까지 도달한 중공군 병력이 얼마인가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 5월 17일 새벽에는 선두 5중대만 도달했고 17일 오후에는 대대 병력이 전부 도착한 것까지는 분명한데, 그 다음 연대나 사단 병력까지 전부 도달했는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기 때문.


4. 현리로 몰려든 한국군[편집]


오마치 고개가 점령당한 걸 안 9사단은 5월 17일 오전 급거 후퇴를 위해 현리에 모여들었으나, 9사단은 오마치 고개를 돌파할 작전을 실시하기는커녕 거기에 모여서 시간만 보내기 시작했다. 상술했듯 5월 17일 오전에는 아무리 많아도 오마치 고개에 있는 중공군 병력은 중대 규모밖에 없었다.

여기에 3사단 병력까지 모여들고 5월 17일 정오 무렵엔 3군단 대부분이 현리에 모였다. 거기다 옆동네 7사단의 일부 패잔병까지 이곳으로 오면서 현리 일대엔 대혼잡이 벌어졌고, 좁은 지역에 부대가 왕창 모이는 바람에 무전기 전파도 서로 간섭을 일으켜 지휘망까지 더 엉망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유선통신망조차 매설을 깊게 하지 않아 전투개시전 중공군의 그야말로 모든 탄을 쏟아부은 공격준비사격에 거의 끊어져 버렸다.

비록 지휘망이 엉망이 되었다지만 당시 이들이 (정찰이나 고개 돌파 같은 시도조차 않고) 왜 꾸물대기만 했는지는 미스테리다. 특히 3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은 개전 초 춘천-홍천 전투에서의 명장과 같은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뒤늦게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연락기를 타고 현리로 와서 9사단장 최석 장군과 3사단장 김종오 장군을 불러모아 작전회의를 열었고, 여기서 각 사단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 오마치를 돌파한다는 작전이 세워졌다. 군단 병력이 멀쩡해서 오마치 돌파는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한 유재흥 장군은 연락기를 타고 다시 군단 본부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 현리에 모여든 부대원들 사이에선 이렇다 할 작전도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 7사단이 밀려났고, 그들이 담당하던 오마치도 차단당했다는 입소문까지 돌자 불안감이 높아졌다. 게다가 상술한 전파 장애로 인한 지휘망 혼란이 이런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거기다 유재흥 장군이 연락기를 타고 군단 본부로 돌아가자 이를 본 장병들 사이엔 3군단장이 도망쳤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9사단 30연대와 3사단 18연대로 오마치 돌파 작전이 시작된 건 5월 17일 밤 9시. 7사단의 오마치가 점령된 걸 안 때부터 치면 거의 하루가 지나다시피 한 후였고, 9사단이 후퇴를 시작한 시간부터 치면 12시간 하고도 몇 시간 더한 후였으며, 현리에 3군단이 모인 후부터 쳐도 10시간은 지났고, 작전 회의를 마친 후부터 치면 7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현리에 모여든 병력은 딱히 큰 공격 받은 일 없이 멀쩡했다.


5. 한국군의 와해[편집]


오마치 고개를 탈환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부대는 18연대와 30연대였는데, 대강 관련자들의 증언을 추려보면,

  • 18연대 장병들의 말 -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30연대 병력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현리에 있던 병력이 전부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그 상태론 공격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 30연대 장병들의 말 - 우리는 애초에 오마치 고개를 공격하란 명령을 받은 일 없다. 사단 후퇴를 엄호하란 명령을 받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연대 본부와 연락이 안 되어서 찾아가 보니 연대 본부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 30연대장의 말 - 사단장으로부터 오마치 공격 명령을 받아 휘하 대대에 작전 명령을 내렸는데, 무선 불통이 일어나고 대대에 연락을 하려고 해도 연락이 안 되었다. 사단 본부를 찾으니 사단 본부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퇴했다.

  • 9사단장 최석 장군의 말 - 9사단에 돌파임무를 준 것에 대하여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돌파하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뭔가 증언들이 전부 '나 말고 다른 놈들이 전부 먼저 후퇴해서 나도 후퇴했다' 라는 내용이라 서로 책임 회피하는 것 같지만,[5] 어찌되었든 한두 사람이 슬슬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현리에 있던 전 인원이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처음 대규모로 도망친 부대가 어디인가에 대해선 증언마다 말이 엇갈린다. 그런데 이 5월 17일 밤에 9사단장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는 말들은 여기저기서 보이는 편. 혼란 속에 자의적으로 차량과 중장비를 파기하는 장교들도 있었으며 이런 상황은 혼란에 부채질을 하면서 전병력을 공황 상태로 몰아갔다. 3사단장 김종오는 그나마 수습을 시도해보았으나 부대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장비 파기 명령을 내리고 동쪽의 험준한 방태산을 우회해 남쪽으로 향한다.

앞서 적었지만 바로 전 상황까지 3군단은 병력부터 장비까지 멀쩡했으며, 오마치에 대한 제대로 된 돌파 시도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고,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현리에 있는 병력에게 제대로 공격을 가한 일도 없었다. 하지만 후방의 퇴로가 막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현리에 있던 한국 육군 전 병력은 병사부터 장군까지 한순간에 부대 체계고 뭐고 없는 채로 방태산 속으로 도망치면서 수만 명의 낙오병으로 전락했다.


5.1. 전화위복[편집]


옛 한국전사 연구는 오마치 고개 돌파 실패로 3군단이 조직적으로 철수할 수 있던 기회가 사라져 군단 와해라는 최악의 결과가 닥쳤다고 보았다. 당시 한국군 전력으로 오마치를 돌파하는 게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3군단에 대한 3중 포위망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중공군 81사단이 현리-오마치와 하진부리를 잇는 유일한 철수로에서 오마치 남쪽 5km에 자리한 침교를 17일 오후 탈취, 이중포위망을 완성했다는 자료를 공개하면서 이 시각은 급격히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당시 한국군 3군단의 전력으로는 오마치에 이어 침교를 돌파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침교 방향 돌파가 가능할 정도의 전력이었으면 당시 3사단장 김종오 준장이 거부한 사주방어도 가능했고 결과도 더 나았으리라는 것이 중평이다.

3군단의 돌파 시도가 예정대로 실시되었다면 오마치 고개의 중공군은 한국군에 적당한 피해를 입히고 돌파당해주는 척 하다가 침교에서 한국군을 돈좌시킨 뒤 다시 오마치를 차단, 3군단을 포위섬멸했을 것이라는 게 최근의 정설이다. 중공군 종군기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침교를 차단한 시점에서 중공군은 3군단 예하 3, 9사단을 모두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돌파가 실패하고 그 뒤 3군단이 방태산 방면으로 분산, 궤주한 탓에 전과가 추정 살상 및 포로 도합 5,000명 안팎에 그치자 "상상 밖의 일" 이었다고 회상하며 허탈함을 드러냈다.[6]

정리하자면 중공군은 한국군을 포위하여 전멸시키려는 작전을 준비했는데, 생각 외로 한국군이 몽땅 빠르게 뿔뿔히 흩어져서 도망가는 바람에 포위섬멸에 실패한 것이다. 한국군이 열심히 잘 싸웠다면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6군처럼 전멸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는데, 3군단의 부족한 훈련과 무질서한 와해가 전멸이라는 대참사에서 구해낸 것. 엉망진창의 실수들이 겹친 덕분에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었던 셈.


5.2. 유재흥 장군은 정말로 도망갔는가?[편집]


당시 생존자들 사이에서 유재흥 장군이 도망쳤다는 소문이 돈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3군단 본부 및 전술지휘소는 당시 포위망 바깥인 하진부리에 있었으나, 유재흥 장군이 예하 사단장들과 오마치 고개 돌파 작전회의를 마친 후 군단전술지휘소로 복귀하는 게 포위망 내의 장병들에게는 군단장이 도망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이후 군단전체가 붕괴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일단 한국 인터넷상에서는 유재흥 장군이 도망간 게 정설인 것처럼 널리 퍼졌다.

아직도 남아있는 도주설 유포 글들을 보면 현리 전투를 '전작권을 넘겨 주게 된 계기'로 표현하며, 유재흥 장군을 '전작권을 넘겨 주는 빌미가 되었는데 도리어 전작권 환수를 반대하는 똥별'로 표현하는 등 전작권 이양에 대해 지나친 사실왜곡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7]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에 대해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실왜곡으로 점철된 글들이 양산된 것.

그 밖에도 '백선엽 장군의 저서에 유재흥이 도망쳤다고 적혀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와는 다르다.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의 136페이지를 참조하면 백선엽 장군이 유재흥 장군이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한 것은 21일, 유재흥 장군이 현리에 (비행기를 통해) 들려 지시를 내리고 다시 사령부로 돌아간 시점은 17일이다. 도망설의 근거는 당시 참전자들의 인터뷰와 소문 등으로 적전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백선엽 장군의 저서에는 군단장이 21일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지 '도망쳤다'고 한 건 아니다.

유재흥 장군이 작전회의를 주재하려고 현리에 갔다가 복귀했다/21일에 작전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두 가지 기록을 억지로 시점을 동치시켜 날조한 글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바람에 도주설은 큰 설득력을 얻었는데, 유재흥 장군이 사령부로 돌아간 시점은 17일이며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날짜는 21일이라 도주설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이다.

여담이지만 당연한 이야기로 당시 북한의 기록이나 선전물들을 보면 국군 장교의 대부분이 "친일 반역모리배" 내지는 "어떤 어떤 전투에서 꼬리를 내리고 도주했다"라고 적고 있는데 위의 인터넷 글들은 당시 소문과 이걸 참고했는지도 모른다.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은 인터뷰에서 "상부가 비행기를 타고 도망갔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은 6.25 전쟁 발발 후 8월에 부산에서 이등병으로 자원입대했으며, 현리 전투 당시에는 상병이었다.[8] 따라서 당시 군단 배치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었던 그의 증언은 "군단장이 비행기 타고 적전도주했다."는 '소문의 신뢰성을 확고히 해줄 수 없으나, 아무튼 각종 증언을 볼 때 저런 '소문이 돈 것'만은 명백하다고 추정된다.

휘하부대 통제에 실패했으며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것이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란 말도 있으며, 이 부분은 일리가 있지만 감안할 부분도 있다. 7사단 방어선이 붕괴되고 오마치 고개가 적에게 점령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국군 7사단과 미 10군단은 상황 전파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유재흥이 제대로 전황 파악을 못한 건 저런 점들도 있기 때문. 무전기가 있는 시대에 부대 장악에 실패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지만, 앞서 적었듯이 현리 지역은 좁은 곳에 다수 병력이 몰려들면서 주파수 간섭으로 각 제대 간의 무선에 혼란이 오는 상황이었다.

오마치 고개 돌파작전에 있어 지휘 체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비판받을 부분. 허나 두 개 사단이 멀쩡히 있는데 설마 고개 하나를 돌파 못 하랴 생각했을 부분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회고록에서 유재흥 장군 자신은 포위망 내에서의 사주방어도 생각해 보았으나 휘하 사단장들을 믿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3사단장 김종오 장군이 미 고문관에게서 사주방어를 제안받았지만 숙련되지 않은 국군 병력이 이미 통제력을 상실하는 징후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야간에는 더더욱 지휘통제가 제한되고 방태산은 지형이 생소하여 단시간 내 부대 배치가 어려운 등 여러 이유로 이를 기각했는데 이를 이른 말인듯.

6. 군단의 패주[편집]


낙오병인지 패잔병인지 하여간 3군단 병력은 차량과 중장비를 버리고 현리의 남쪽 방태산을 오르며 남쪽으로 도망쳐 갔고, 방태산은 수만 명의 인파에 뒤덮일 지경이었다. 작전도 없고 지휘도 없는 발걸음이었으며, 그러니 보급도 없고 밥도 없었다. 그나마 다수가 결집해 도망갈 경우에는 적의 추격을 막거나 차단막을 강행돌파하는 게 가능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그리고 운 나쁘게 산을 헤메다가 체력이 바닥난 뒤 숨는 데 실패할 경우에는 중국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산속에서 헤매는 병력들에게 제대로 된 보급을 할 병력도 계획도 안 되는 상황에서 군단 본부에 있던 인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산속 곳곳에 쌓아 두는 게 그나마 가능했고, 이런 주먹밥을 얻은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고 하염없이 남쪽으로 내려갔다.

3군단이 버리고 간 막대한 장비는 중공군이 그대로 이용할 상황이었고, 이걸 막고자 탄약소대가 최후까지 남아 TNT로 탄약들을 폭파하거나 미 공군이 현리 일대에서 3군단 장비를 폭격하는 어이 없는 일을 계속해야 했다. 조창호 육군 포병소위(귀환 후 중위 진급 및 퇴역)가 이때 포로가 된 케이스이다.

3군단 본부에선 어떻게 창촌에서 병력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패주 행렬이 창촌에 왔을 때는 소수 중공군 부대가 이미 길막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창촌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사기가 떨어진 한국군 병력은 다시 후퇴했고, 결국 산을 넘고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하진부리에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이렇게 3군단이 나흘 만에 70km를 도망치면서 동부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일보직전의 사태가 벌어졌다.


7. 하진부리에서의 수습과 또 패주[편집]


하진부리에서 5월 20일까지 제3군단은 제3사단 3,621명(34%), 제9사단 4,582명(40%) 등 37%의 병력 수습에 성공했다. 다만 다들 겨우 소화기만 휴대하거나 맨몸으로 빠져나오다 보니 대포 등 중장비는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대위기 상황에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육군대장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야전군 예비대인 미군 제3보병사단을 급파하고, 동해안 쪽에 건재하게 버티고 있던 백선엽의 국군 제1군단 병력을 동원해 돌파구를 틀어막아 겨우 전선 유지에 성공했다. 특히 제1군단은 어려운 전황에도 병력을 쪼개 군단 예비대인 제11사단 제20연대를 대관령으로 급파, 중공군 선견대가 대관령을 장악하기 전에 이를 확보했다. 만약 대관령까지 탈취당했으면 현재의 영동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영동-영서간 교통로가 완전히 막혀, 제1군단 전체가 위기에 빠지고 강릉비행장에 전개된 미 공군 항공전력도 제 기능을 못할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8군에서는 반격 태세를 갖출 때까지 국군 제3군단에 더 이상 밀려나지 말고 현 방어선을 지켜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에 따라 제3군단은 하진부리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들이 또 다시 밀려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1일이 되자 제3군단 병력은 또 다시 패주하게 되었다.

이때 상황은 현리처럼 군단 지휘부가 병력과 동떨어져 있던 상황도 아니었던지라, 이때가 유재흥이 제대로 지휘력을 발휘했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장비는 없고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태라지만, 부대 수습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9] 하지만 이 시기에 유재흥 장군은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수습하기에 상황이 너무 나빴다고 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위기를 수습하는 능력이 결국에 명장과 범장을 가른다는 차원에서 유재흥의 능력 한계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로 인해 돌파구 서쪽 속사 방면에서 막 반격에 돌입한 미군 제3보병사단의 우측면이 노출되면서 일시적으로 반격이 중단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밴 플리트 장군은 결국 국군 제3군단의 해체를 명령하게 되었다. 현리에서의 패배가 제3군단 해체의 원인이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현리에서의 패배로 인해 바로 군단이 해체된 건 아니다. 하진부리 일대에서 또 다시 어이 없이 붕괴되는 제3군단의 상황을 목도하고 밴 플리트 장군이 해체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유재흥밴 플리트의 다음 대화가 지금도 회자된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을 모두 해체하겠소.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 p.339-340 참조



8. 결과[편집]


중공군은 5월 공세 초기 현리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중동부전선에 거대한 돌파구를 형성했다. 그러나 동쪽의 대관령에서 한국군 1군단이 방어에 성공하고, 서측방의 미 2사단이 벙커고지로 유명한 한계 전투에서 사투 끝에 견부진지를 고수해내자 중공군은 더 이상 돌파구를 확장하지 못한 채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중서부전선의 조공 부대는 유엔군 예비대 유인에 성공하기는커녕 용문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기까지 했다. 결국 미 8군 예비대인 미 제3보병사단이 경기도 광주에서 100km를 달려와 속사리에 전개, 돌파구 첨단을 봉쇄하기 시작한 19일경이 되면 중공군 5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5월 23일부터 전 전선에서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되자 그때까지도 쫄쫄 굶어가며 산속을 헤메고 있던 한국군 낙오병들이 대규모로 수습되었고, 그 결과 27일까지는 병력의 약 70%와 장비의 30%를 수습할 수 있었다.[10] 나머지는 전사 혹은 포로[11][12]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 수습은 했으나 전투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여 편제에서 빠진 병력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70퍼센트나 되는 병력이 전투 이후에도 건재했던 건 중공군의 포위 작전이 계획대로 제대로 되지 않은 덕으로,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오마치 고개와 창촌을 차단하면서 3군단의 철수 경로를 어느 정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래 의도했던 촘촘한 포위망을 짜는 데는 실패했고, 그 결과 소수 병력만이 차단과 추격에 나설 수 있었으며 게다가 한국군이 그냥 퇴각한 게 아니라 나름대로 무리를 지어 도망쳤기 때문에[13] 어설프게 차단했다가 다수의 한국군 패잔병들에게 깔려 역으로 전멸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군 패잔병이 산을 타고 후방으로 오는 데 성공한 건 그 때문(중공군이 제대로 포위망을 구성했던 횡성 전투 같은 경우에는 생환하여 추후 전투 투입이 가능한 병력이 고작 30퍼센트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러나 더 참담한 일은 열받은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을 모조리 해체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를 폐쇄했고, 한국 육군 제1군단을 미 제8군의 직접통제로 바꿔버린 일이었다. 3군단의 해체로 인해 육군은 오직 단 하나의 군단급 제대만을 가진 존재로 전락했으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8.1. 미군 지휘권 구도의 확립[편집]


현리전투를 계기로, 미군은 "젊은"[14] 사단장들이 포진한 국군 야전부대에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직접지휘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1950년 7월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유엔군에게 전작권을 양도했으나, 처음에 유엔군과 미군대한민국 국군의 체면을 생각해서 육군본부를 통해 국군을 간접지휘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현리에서의 패전을 계기로, 육군본부는 전투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모두 박탈당했다.

실상은 중공군의 대공세 이후 중공군의 공격패턴이 약한 고리, 즉 한국군만으로 구성된 지역을 노려 집중공격하는 중공군의 패턴을 파악하게 되어, 이후에는 한국군만으로 구성된 군단은 해체하고 UN군 휘하로 편제되도록 한 조치이다.

9. 미군의 책임론[편집]


"어떤 지도에 근거해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3군단의 분계선을 정했는지 아직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 제10군단은 제3군단의 보급로에 있는 상남리 이남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는 미 제8군 측의 실수였다. 중요한 지형과 지물을 분할하면 안 된다는 것은 전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 상식이기 때문이다."

최석 (당시 국군 제9사단장), 1964년


현리 전투의 패전에는 미군의 책임도 크다는 분석이 있다. 특히 군단장 유재흥 이하 현리 전투에 참가했던 한국군 지휘관 대부분은 추후에 미군과 알몬드 장군의 조치가 부적절했음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미군 측은 전투지경선을 변경하면서 오마치 고개의 관할을 3군단에서 10군단의 7사단으로 변경했으며, 유재흥 장군의 항의에 5월 4일에 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가 들어 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며 9사단의 예비대 병력까지 철수시켰다.

알몬드 장군의 과거 전적이 굉장히 화려하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 그가 이탈리아 전선에서 지휘했던 제92보병사단은 전군의 골칫거리로 전락하여 당시 미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조지 마셜 장군이 직접 개입하가며 사단을 재편성/훈련시켜야 했으며, 임무에 실패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책임을 자신의 흑인 장병들에게 돌렸던 졸장이자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제92 보병 사단은 흑인 부대와 일본인 부대의 혼성 사단이었다.) 몇 안 되는 실험적 혼성 부대 지휘에 실패하고 전투까지 패한 알몬드 장군은 예비역은 고사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마셜이나 맥아더 장군 등과 같은 고위 장성들과의 연줄로 살아남아 이후 10군단장에 임명된다

  •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과정에서, 중공군이 진입했다는 첩보를 외면하고 부대를 위험하게 늘어뜨려가며 진격을 명령한[15] 끝에 장진호 전투에서 군단 전투를 전멸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질시하고 경멸하던 제1해병사단장 해병소장 스미스 장군의 훌륭한 판단과 해병대의 분전 덕분에 간신히 연명하여 51년 7월까지 10군단을 지휘하였고 1953년 예편하였다.

  • 그 밖에도 미 10군단은 16일 3군단 전술지휘소에서 문의한 상황추이에 대해 7사단 방어선이 붕괴됐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군단 정면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는 잘못된 상황전파까지 하였다.

밴 플리트 장군의 과도한 서울 고수의지와 미 8군의 판단착오와 조치부실을 국군 3군단 포위의 가장 큰 요인으로 분석하는 견해도 있다. 중공군 5월 공세가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지향해 실시될 것으로 오판하고 전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했다가 중동부전선의 심상찮은 낌새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는 것.

10. 의의[편집]


현리 전투의 결과 군단병력 전체가 몰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전체 인명 손실은 전사자, 실종자[16], 부상자 다 합쳐도 30% 정도로 편제상 전력의 30%를 잃은 데다가 장비의 70%를 상실해 군단급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으므로 군사적으로 전투불능(Combat Ineffective)으로 판정되기는 하나 아예 병력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17]

2009년 육군군사연구소에서 《중공군 공세 의지를 꺾은 현리-한계전투》란 제목의 책을 펴냈다.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뜯어보면 의외로 개념서라고 한다. 이 책은 중공군의 1951년 5월 공세에 대한 중공군의 준비를 서술하는 데에서 시작해서, 5월 공세가 중공군의 역량이 총동원된 공세였다고 지적한다. 이 전투에서 당시 한국군의 실상에 대해서 가감없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밴 플리트와 8군이 방어해냈는지도 잘 서술해내고 있다. 이 문서는 현리 전투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만, 현리-한계전투는 미 2사단의 벙커고지 방어를 거쳐 화천 추격전까지 이어지는, 중공군의 5월 동부전선 공세 전체를 포괄하는 대규모 전투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 의지가 꺾였다는 저 책 제목은 국군을 미화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화천 추격전이 끝나고 중공군 측 발표로만 중공군-북한군이 8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이 5월 공세가 실패로 끝나고,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가 최초로 휴전 회담을 제의했고 이후로 금성 전투 이전까지 이와 같은 수준의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없었다는 이유에서 지어진 것이다. 실제로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의 손실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5월의 학살(May Massacre)"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11. 뒷이야기[편집]


파일:20170606000018479_1.jpg
육군 3군단, 현리전투 위령비 참배
  • 패전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직도 3군단은 현리 오마치고개 위령탑에 참배하고 있으며, 육군 어느 부대든 정신교육 시간에 수시로 교육하는 소재가 되고 말았다.

  • 임진왜란 당시 용인 전투와 비교되는 일이 많은데, 이는 두 전투 다 대병력이 변변한 전투 없이 순식간에 패잔병으로 전락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래도 용인 전투의 경우 최소한 전투는 있었지만, 현리 전투는 제대로 된 국지전 한 번 없이 1개 군단이 통째로 도주 후 전멸하였다.[18]

  • 현리 전투 당시 3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은 6.25 전쟁 초기 춘천-홍천 전투에서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수준의 공적을 이룬 인물이었지만, 현리 전투에선 계급장 뗀 낙오군인 중 하나가 되고 만다. 그러나 나중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명예를 회복한다.

  • 12.12 군사반란 당시의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장군 또한 3사단장이었던 김종오 장군의 휘하에서 대대장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다. 대대장 달자마자 참전했다고 한다. 후퇴 도중 부대원들과 떨어져서 혼자 남았다가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다. 다행히 기회를 엿봐서 탈출했고 한 화전민의 집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후 정승화는 이 화전민에게 보답으로 이런저런 도움을 줬다고.

  • 6.25 전쟁 전반에 걸쳐 그랬지만, 특히 현리 전투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무능은 절정에 달한다. 참조링크 특히 9사단장 최석 장군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최악이라서, 심지어 광인이라는 폭언까지 등장한다. 유재흥 장군조차 애둘러서 최석의 무능력함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애초에 당시 참모총장과 같은 함경도 출신이란 이유로 장군이 되었다는 소리도 있었고, 현리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사단참모장이었던 박정희도 사단장과의 불화로 다른곳으로 전출, 심지어 당시 김재규는 사단장에게 대들다가 맞고 누워있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을만큼 사단장이 부대통솔에 문제가 많았다는 증언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석은 좌천되기는 커녕 이후 제2공화국에서 3군단장으로 있다가 5.16을 맞아 예편당했다.)

  • 당시 3사단 18연대[19]는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란 명령을 받았지만 적의 규모와 위치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다들 도망치자 돌파 시도도 안 하고 패주행렬에 가담했다.

  • 당시 중공군에는 여성 장교도 있었는데, 어떤 한국군 장교는 만주 군관학교를 다닌 경험으로 중국어를 잘 했기 때문에 중공군의 호감을 샀으며, 이윽고 어떤 여성 장교에게는 자기랑 결혼하고 중국으로 귀순하자는 제의까지 받았다. 전쟁에서 아름다운 로맨스 따위는 사치. 결국 한국군 장교는 그들을 모두 죽이고 부리나케 도주하였다.[20]

  • 특히 전투가 격심했던 지역은 인제군 상남면 상남 3리 옆 오미재 고개 근방. 지금도 험악한 길이지만 당시에는 더욱 험악했기 때문에 현리에서 홍천, 원주 방면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오미재를 둘러싸고 격전이 벌어졌다. 정상에는 현리지구전적비와 군 초소 겸 훈련장이 세워져 있는데, 건장한 사람도 이곳에서 근무를 하면 꼭 한번은 귀신을 본다는 흉흉한 소문이 감돌았다. 지금은 폐쇄. 사실 근방 부대에는 근무 중 무언가를 봤다는 흉흉한 소문들이 많이 있다.[21] 이 지역에서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도 있었다.

  • 어쨌거나 중공군 5월 공세를 저지한 이후 한국군은 본격적으로 대부대 전술훈련에 돌입했다. 창군 이래 6.25 직전까지 숨돌릴 틈도 없이 계속된 38도선에서의 전투와 후방 빨치산 토벌, 비상경계령 대기 등으로 인해서 한국군의 훈련수준은 고작 중-대대급에 불과했고 그 이상의 제대는 편제만 되어 있지 이를 제대로 지휘, 활용할 역량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중공군의 공세 한방에 사단급 부대들이 줄줄이 갈려나가고 미군 연대급 부대가 이를 뒷수습해주는 추태가 반복되는 것이 이 때문.[22] 하지만 1951년 여름부터 한국군 사단들이 교대로 후방에서 사단급 훈련을 완료하면서 한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작전능력은 일취월장하게 되고 공산군은 결국 개성 방위를 위해 휴전회담장을 개성으로 밀어붙이는 꼼수를 써야 했다.

  • 유재흥 장군 사망 당시 한겨레조창호 중위는 탈북 후 유재흥 장군을 면담하고자 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고 보도했다.참조
실제로 조창호 중위가 귀환 1년 뒤인 1995년 쓴 수기 '돌아온 사자 : 조창호의 북한 생활 사십삼년'에는 유재흥 장군이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서운함을 표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두 사람이 국군포로 송환 요구 등의 퇴역군인 활동에서 같이 행동한 경우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사망할 때까지 면담을 거부했다'는 표현은 사실상 허위보도다. 기사 자체에도 문제가 많은데, 현리 전투에서 적전 도주했다는 소문을 아예 사실이라고 서술해놓는 등 인터넷 찌라시들을 정설로 받아들인 기색이 짙다.


  • 금성천 및 화천발전소를 두고 벌어진 425고지 전투의 주역인 김한준 대위도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6월 25일 2명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한 적이 있다.


12. 기타[편집]


  • 수십 년 뒤 이라크 내전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모술에서 3개 사단의 병력이 그냥 증발해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모술은 ISIS 손에 넘어갔다.

  • 이런 참담한 격전지가 현재는 현리 및 상남면 일대에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뚫려 영동 북부지방에서 서울과 수도권으로 가는 중요 루트로 변모했다. 특히 전투가 벌어진 오미재를 상남5터널로 직접 통과한다.


1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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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는 오미재 고개라 불린다. 인제군 기린면에서 상남면으로 넘어가는 부분.[2] 최근에 나온 6.25 전쟁 관련 서적들에 의하면 이 시점의 중공군은 도주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계획된 시간, 작전표대로 하루, 며칠에 몇km 후퇴, 어느 부대는 며칠까지 해당 지점 사수 등으로 유엔군의 북진을 어느 정도 저지하면서 차기 공세를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다. 1951년 1월~5월까지의 유엔군의 북진가능성엔 적군의 이런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중공군이 도주양상에 가깝게 보인 것은 5월공세에서 유엔군의 전면반격에 따른 결과였다. 이때쯤 되면 중공군의 단점을 거의 파악했고 이것을 역이용해서 유엔군은 4월 공세에서 잃었던 땅을 되찾았다.[3] 중공군과는 반대로 유엔군은 낮에 그들의 장기인 화력투사에 최대효율을 발휘했고 밤에는 중공군의 1일 진격거리(최대30km)만큼 뒤로 후퇴해서 새 방어선을 조직해서 다시 상대했다. 또한 인접부대 간 상호 전선을 유지해서 무작정 퇴주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후퇴했고 중공군에게 잠시 포위당했어도 화력으로 돌파해서 탈출했다. 서부전선은 이랬지만 중부전선의 경우 한국군 6사단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추격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장비를 버리고 패주하는 바람에 전선이 수십km뒤로 밀려났고 영연방군이 저지하지 못했다면 남한강까지 밀렸을 것이다. 여담으로 패주 당시에 6사단의 우측에 인접한 미군 해병 1사단은 그들의 구역으로 도망쳐온 한국군들 중에 적과 싸울 의지가 없는 자들은 아군이 아닌 포로로 취급하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이후 6사단은 사창리 패전 후 한달도 되지 않아 용문산 전투로 패주의 굴욕을 만회했다.[4] 당시 시점에서 한국군은 파주 문산부터 화천 저수지까지의 구간에서 불과 2개 사단(제1사단, 제6사단)이 있었고 나머진 죄다 미군 사단들로 이들 부대사이에 낑겨서 활약했다. 반대로 파로호 동쪽 - 동해까지가 나머지 국군 사단들(제8사단 제외 ㅡ 후방공비토벌)이 포진해있었고 미군은 제2사단만 있었다. 그러니까, 전쟁 초기 미군의 참전부터 기동력이 우수하고 장비가 많았던 유엔군은 산악지형이 없던 서,중부 전선에 주로 있었고 한국군은 일부 사단을 제외하면 주력부대는 동부전선에서 활약하고 이런 배치는 51년 하반기까지 유지되는데 이때 쯤엔 밴플리트 장군의 지원으로 한국군의 재편이 어느정도 성과를 이루게 되고 고지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전선의 변동에 큰 영향은 없어서 재편된 한국군 사단을 중/서부 전선에 배치하고 물러난 미군 사단은 예비로 돌려졌다.[5] 30연대 쪽 증언이 전체적으로 교차확인해서 의심스런 부분이 많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증언은 전체적으로 현리 전투 관련해서 나오는 여러 증언들을 몽땅 부정하면서 자신들을 변호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6] 물론 전사 및 포로 도합 5000명 안팎의 피해가 경미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란 것에 유의. 중공군은 군우리 전투나 횡성 전투를 군단급으로 재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것뿐이지 현리 전투만으로도 참패는 참패다.[7] 전작권의 이양 시점은 1950년 7월이다. 현리 전투 이후 밴 플리트가 3군단을 해체하고 지휘권을 박탈한 것은 맞으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전작권이 이미 이양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행동이다.[8] 박한진 대령은 간부후보생(갑종장교) 49기 출신으로, 그의 장교 임관은 1953년 7월 전쟁이 끝나기 직전이다.[9]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직접 돌격을 이끌면서 패주하는 병력을 수습한 것을 생각해보라.[10] 최용호, 김병륜 공저 <그때그날(삼우사, 2003)> 251쪽.[11] 이 경우 중국군이냐 북한군이냐에 따라 처우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중국군의 포로가 된 경우 그래도 포로 대우는 받았던 반면 북한군의 포로가 되면 보통 사살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잔혹한 대우를 받다가 결국 해방전사라는 이름으로 북한군에 입대하여 변절자가 되었다. 실제로 1951년 이후 한국군 방어선이 돌파당하거나 포로가 대규모로 발생한 전투 대부분이 중국군과의 대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12] 나중에 가선 유엔군 포로를 중공군이 관리하고 한국군 포로를 북한군이 관리했다고 한다.[13] 물론 제대로 된 부대 건재조차 유지하지 못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14] 김홍일, 김석원 같은 노련한 숙장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6.25 직전까지 지휘병력없는 보직이나 예비군 신분이었고, 이범석은 진즉에 정치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까마득하게 젊은 채병덕(1915년생)이 육군의 통수권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중 미국 군사고문단의 대위급 자원들이 이들 숙장들과의 의견충돌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일화를 감안하면, 우리 정부나 미군 모두 군 장악 측면에서 불리한 숙장들을 끝까지 포용하려 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 김석원의 경우, 대만 장제스 총통의 추천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관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다른 군 인사들과 충돌해 다시 군문을 나와 전쟁 전까지 재야인사로 남아있었다.[15] 전쟁을 속히 마무리하려던 맥아더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16] 포로 포함. 현리 전투 당시 포로가 된 한국군이 전체 전쟁을 기준으로 해도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17] 보통 70% 병력 수습을 보고 나머지는 다 죽었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실제로는 당장 전투에 재투입이 가능한 수준으로 멀쩡한 상태의 병력이 70%라는 뜻이다. 부상자들도 중상이 아니라 회복한 사람들도 많으므로 실제로는 70%보다 더 많은 병력이 살아남았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물론 중장비를 다 잃긴 했지만 애초에 미군이 철수전략을 구사하면서 국군에게 중장비를 대거 공여하기 전까지 1950년대 초 국군 자체가 사실상 북한군, 중국군과 화력이 비슷한 알보병이나 다름없었던지라 새로 징집만 하면 되므로 그렇게 타격이 큰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도 3군단의 예하 2개 사단은 얼마 가지 않아 재편성을 완료하고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18] 하지만 이는 단순히 동급 취급하기 힘든 것이,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화력이 막강한 미군을 피해서 국군을 상대로 병력을 집중시켜 공격하는 전술을 썼고, 현리 전투에서는 1개 군단급 제대의 전투정면에 1개 병단(우리나라의 야전군 규모)를 투입하였기 때문에 용인 전투와 같은 단순한 병크로 취급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19] 참고로 당시 백골연대로 유명했으며, 이후 휴전이 되자 3사단 명칭이 백골로 바뀌자 원조 백골이라는 의미로 진백골로 바꿨다.[20] 베트남전에서 소대장-중대장으로 맹활약한 서경석 고려대 교수가 정리한 원고에 소개된 익명의 진술이다. 출처[21] 사람이 아무도 없을 터인 KCTC 훈련장의 한 가운데 길에서 새벽에 뛰어다니고 있는 할아버지,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서 자신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수수한 옷을 입은 여자, 지금은 폐쇄된 막사에서 한밤중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22] 반면 북한군은 1950년 초에 이미 군단급 훈련까지 완료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