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민

최근 편집일시 :


현영민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현영민의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박기욱
2015~2021

현영민
2022~

현역








ULSAN HYUNDAI

파일:FC아나콘다_현영민.png

이름
현영민
玄泳民|Hyun Young-Min
출생
1979년 12월 25일[1] (44세)
전라남도 구례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연주 현씨 (延州 玄氏)[2]
신체
179cm[3], 73 kg
주발
오른발 (양발) [4]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5], 미드필더[6] / 은퇴)
축구 감독
축구해설가
등번호
13번, 2번
학력
광희초등학교 (졸업)
경희중학교 (졸업)
경희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지리학 98 / 학사)
소속
선수
울산 현대 호랑이 (2002~2005)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2006)
울산 현대 (2007~2009)
FC 서울 (2010~2013)
성남 일화 천마 (2013)
전남 드래곤즈 (2014~2017)
해설
SPOTV (2018)
MBC(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JTBC/JTBC GOLF&SPORTS (2019~2021)[7]
SBS(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감독
현대고등학교 축구부 (2022~)
국가대표
3경기 (대한민국 U-23 / 2002)
15경기 (대한민국 / 2001~2004)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현영민서명.png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해설위원 시절
6. 지도자 경력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前 JTBC 축구 해설위원이자 現 현대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이다.

최후의 2002 한일 월드컵 멤버다.[8]


2. 클럽 경력[편집]



2.1. 울산 현대 호랑이 1기[편집]


건국대학교에서 정종덕, 김철 감독을 거치며 지도 아래 2년 선배 이영표와 함께 대학 무대에서 활약했다.

건국대를 졸업하고 월드컵을 다녀온 후 2002년 7월 울산 현대에 입단하며 프로로 데뷔했다. 입단 첫 해부터 주전급 선수로 뛰며 팀이 리그 준우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 리그 15경기 1골 4도움.

2년차인 2003년에도 무리 없이 주전으로 뛰며 팀의 상승세에 기여했지만, 성남 일화라는 막강한 팀 때문에 또 준우승에 머물렀다. 리그에서만 32경기 1골 2도움.

2004년 팀의 통합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4강 플레이오프 동해안 더비에서 패하며 또 우승에 실패했다. 리그 23경기 1골 1도움, 리그컵 4경기 출전.

2005 시즌을 앞두고 팀의 주장으로 선임됐다. 시즌 전 치러진 K리그 리그컵에선 12경기 전경기에 출전해 1도움을 기록했으나, 팀과 함께 또 준우승에 머물렀다. 팀이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4위에 그쳤지만, 통합 리그 3위에 오르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4강에서 성남을, 챔피언 결정전에선 인천을 꺾으며, 주장으로서 K-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본인 프로 커리어 첫 우승이자 팀의 9년 만에 리그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우승을 주장으로서 함께 했다는 의미있는 기록을 쓰게 됐다.

시즌이 끝나고 해외 진출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구단은 수뇌부의 편지와 선물 공세로 현영민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이적했다.


2.2.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편집]


2006 시즌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가 개막하기 전에,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과 3년 계약을 맺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러시안 프리미어리거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2005-06 UEFA컵 본선 무대에 진출하여 로젠버그BK와의 32강전 2차전에서 데뷔하였다. 세비야 FC와의 8강전 2차전에서 팀의 유일한 득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6 시즌 개막전 선발 출전하는 등, 기대를 받았지만 이내 경쟁에서 밀려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던 와중에, 월드컵 휴식기 이후 자신을 스카웃해온 블라스티밀 페트르옐라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새로 부임했다. 부임과 동시에 한국인 후배인 김동진이호를 데려왔는데, 김동진은 자신과 완전히 포지션이 겹치는 데다, 현영민을 국가대표에서 멀어지게 한 감독이 바로 아드보카트였다. 결국 꾸준히 명단에는 들었으나 리그 10경기, UEFA컵 3경기, 러시안컵 3경기 출전에 그치고 만다.


2.3. 울산 현대 2기[편집]


2006년 말 러시아 시즌이 끝나고 12월 초에 결혼식을 위해 귀국했을 때, 김정남 감독과 대화를 통해 울산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제니트는 1년 더 남아주길 바랐는데, 러시아로 출국해 구단과 협상 후, 사비로 이적료를 내고 제니트와 계약을 해지하고 울산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2007 시즌 개막 전, 친정 팀 울산 현대로 복귀했다. 울산에서 본격적인 전성기 기량을 맞이했다. 팀에 복귀하자 마자 삼성 하우젠컵 2007 우승에 기여했고, 팀의 정규리그 3위에 기여했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 동해안 더비에서 패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리그 25경기 3도움, 리그컵 10경기 1도움, FA컵 3경기 1도움.

2008년에는 팀의 리그 4위에 기여했다. 주장단으로 팀을 이끌었다. 주장 완장을 달고 나섰던 9월 20일 성남과의 리그 경기 이후 부상을 당해 약 2달 동안 결장했다.플레이오프에서 FC 서울에게 패하며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지 못했다. 리그 20경기 5도움, 리그컵 10경기 1도움, FA컵 2경기 1도움.

김호곤이 새롭게 감독으로 부임한 2009 시즌을 앞두고 J리그 팀의 오퍼가 았었지만, 팀과 3년 재계약을 맺었다. 팀은 리그 8위로 부진하며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FA컵 32강, 리그컵 4강, ACL 조별 탈락 등 김호곤 1년 차에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도 본인 커리어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만개한 기량을 보였다. 리그 26경기 9도움, 리그컵 4경기 1골 1도움, FA컵 1경기 1도움, ACL 5경기 1도움.

2009 시즌이 끝나기 마지막 날, 김호곤 감독과 개인 면담을 통해 팀이 센터백을 구하는데, 그 트레이드 카드가 자신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원클럽맨을 목표로 하던 선수에게 말 그대로 청천벽력같은 소리. 결국 약 7년 간 헌신한 울산과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됐다.


2.4. FC 서울[편집]


2010 시즌 개막 전 김치곤과 트레이드되어 FC 서울로 적을 옮겼다. 참고로 이 트레이드는 양쪽 팀 주장을 맞바꾼 전무후무한 딜이었다. 당연히 양 쪽 프런트는 신나게 까였다.[9] 이로서 서울은 현영민-김진규-아디(박용호)-최효진이라는 리그 최고 수준의 포백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기복없이 꾸준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넬루 빙가다 감독의 신임을 얻었고 풍부한 경험으로 서울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010 시즌 기록은 리그 27경기 1골 4도움, 리그컵 6경기 1도움, FA컵 2경기 1골.

2011 시즌 황보관최용수 감독으로 바뀌는 상황 속에서 김치우의 공백을 잘 메꾸며 팀의 반등을 이끌었다. 시즌 기록은 리그 26경기 1골 4도움, 리그컵 1경기, FA컵 2경기, ACL 7경기.

2012 시즌 들어, 왼쪽에는 풀백으로 복귀한 아디, 오른쪽에는 포텐이 터진 고요한고광민에게 밀리며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리게 됐다. 리그 18경기 1골, FA컵 1경기. 2012 시즌을 마치고 성남과 전남에서 각각 현금, 선수 트레이드를 제시했으나, ACL을 나가는 서울이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2013 시즌 개막 직후 리그와 ACL에서 3경기 연속 출전하지 못하며 힘든 시간이 예상됐다. 그러나, 김진규가 부상을 당해 리그와 ACL에서 2경기 연속 출전했지만, 갑작스럽게 이적이 추진됐다. 결국, 3월 A매치 기간 이적시장 직전에 서울에서 수석코치를 했던 안익수 감독이 있는 성남으로 이적하게 됐다.

2.5. 성남 일화 천마[편집]


홍철이 떠나 왼쪽 풀백이 공석이 된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했다. 당시 성남은 서울에서 현영민과 잠시 사제지간이었던 안익수 감독 부임 후 젊은 선수들로 재편된 상태였고, 경험이 풍부한 현영민의 가세는 경험이 없다는 성남 수비진의 약점을 보완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심지어 시즌 중반, 박진포를 대신해 주장을 맡으며 팀의 하위 스플릿 1위에 기여했다. 시즌 한해 30경기에 출장해 1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자 통일교가 성남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고, 팀이 성남시에 인수돼 시민 구단으로 거듭나는 와중에, 안익수 감독이 떠나자, 현영민도 팀을 떠나게 됐다.


2.6. 전남 드래곤즈[편집]


2014 시즌을 앞두고 하석주 감독이 있는 전남 드래곤즈와 2년 계약을 맺었다. 사실, 하석주 감독은 현영민이 FC 서울에 있을 때부터 원했고, 결국 팀으로 데려왔다. 구례북초등학교 출신인 현영민 입장에서 고향 팀으로 돌아온 것이다.

김병지와 함께 팀의 고참 멤버인 만큼, 팀의 수비를 잘 이끌었고, 도움을 무려 7개를 기록하며 리그 도움 순위 6위에 오르는 등, 고참의 품격을 보이며 팀의 하위 스플릿 1위에 기여했다. 맹활약 속에 2014 시즌 K리그 클래식 베스트 11 레프트백 부문에서 홍철, 이주용과 함께 후보에 오르며 여전한 기량을 과시했다.

2015 시즌이 끝나고 전남과 2년 재계약을 맺었다. 2016 시즌에는 팀이 처음으로 상위 스플릿에 오르는데 기여했다.

2017 시즌에도 팀의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전남이 강등 경쟁에서 겨우 살아남는 등, 부진했다. 여담으로, 2017년 말 현역 K리그 선수 출신으로는 드물게 3급 심판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 시즌이 끝나고 노상래 감독이 사임하고 유상철 감독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세대 교체를 바라는 팀과 유상철 감독의 의견에 따라 계약 연장을 하지 않기로 했고, 결국 2017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018년 3월 11일, 전남 드래곤즈K리그1 광양 홈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가졌다.기사

전남에서 4년 동안 리그에서만 121경기에 나와 1골에 11도움을 기록했다. 30대 후반의 나이의 풀백이 매 시즌 리그 30경기를 뛰는 괴력을 보이며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6677aa; font-size: 0.8em"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파일:kp1_2020515k0460.jpg

경희중,고부터 건국대까지 연령별 대표에도 포함되지 못하다가 건국대 4학년부터 동아시아대회 대표팀과 베이징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선발됐고 이후 올림픽 대표 상비군을 거쳐 거스 히딩크 감독 눈에 들어 A 대표팀까지 발탁됐다.

2001년 11월 8일 세네갈과의 친선 경기를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고,[10] 이후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대표로 선발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족적이 없다. 아무래도 같은 포지션에 부동의 주전 이영표가 버티고 있었고, 백업으로도 김동진, 김치우 등 경쟁자들이 많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2016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이천수김남일이 은퇴했고, 김병지는 무적 신분이 되었다가 16년 7월 19일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최후의 2002 월드컵 멤버가 되었다. 최후의 1998 월드컵 멤버가 된 이동국과 더불어 한국 축구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시 2017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면서 2002 월드컵 멤버들의 현역 시절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풀백 치곤 주력이 빠른 편이 아니었고 터치도 투박했지만 뛰어난 체력과 활동량, 과감한 돌파력으로 이를 보완한다. 2009 시즌 염기훈이 부상당하자 전담 키커로 거의 모든 세트피스를 도맡았을 만큼 패스와 슈팅의 정확도도 상당하다. 또한 K리그의 로리 델랍이라 불릴 정도로 긴 비거리와 정확도를 자랑하는 롱 스로인이 매우 유명하다. 선수 시절 후반기에는 배구에서의 원포인트 서버처럼 스로인, 세트피스를 위한 자원으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JTBC 해설위원이자 팟캐스트 히든풋볼 진행자 김환의 말에 따르면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키퍼와 수비진 사이 처리하기 애매한 공간으로 보내는 킥을 즐겨 사용한다고 한다.


5. 해설위원 시절[편집]


SPOTV의 해설위원을 시작으로 해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유명 선수 출신의 해설위원들은 K리그 경기만 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영민은 EPL 경기의 중계를 맡기도 했다. 또한 MBC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중계를 안정환, 서형욱 등과 해설을 맡았다. 박찬우와 더불어 상대적으로 중요도나 주목도가 약간 떨어지는 경기의 해설을 맡았다. 안정환처럼 재미와 내용 모두 잡았다는 호평을 받지는 못했으나 최태욱이나 김병지 등 선수 출신 해설자들이 해설 초기 혹평을 들어 왔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좋은 출발이다. 선수를 은퇴한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필드에서 현역으로 뛰는 선수들과의 인연을 해설로 풀어내기도 해서 소소한 재미도 있다. 마지막 소속 팀이었던 전남 드래곤즈의 중계를 맡는 경우가 많은 편인데, 2018년 시즌 전남이 강등당하자 큰 표를 내진 않지만 안타까운 감정을 내비쳤다. 그래도 타팀 팬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는 중립을 유지했다.

히딩크의 축구의 신에 출연하기도 하였고, 2019년 들어서는 JTBC의 축구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선 전남 태생이지만 성장은 서울에서 해 사투리 억양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발성과 발음도 좋은 편이라 전달력이 우수하다. 해설 현영민의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은 무난한 해설이라는 것. 기본적으로 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해설 내용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지만 단독으로 해설할 경우, 플레이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때문에 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보다 쉽게 경기를 이해할 수 있지만, 축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당연한 얘기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노릇. 따라서 현영민은 선수 출신이지만 깊이 있는 내용보다는 넓고 얕은 정보를 전달하는 해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월드컵 같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에서는 보통 캐스터 1 - 해설 2 조합을 방송사들이 선호하기에 MBC 시절에는 박찬우, SBS 시절에는 장지현 해설과 투입되었는데 해외축구 지식이 해박한 비선출 출신 해설과 조합하면 해설 내용의 깊이가 더해진다. 평소 단독 해설이었다면 현영민이 언급해야할 내용들을 비선출 해설들이 대신 해주기 때문에 본인은 선수 시절 경험과 지도자 경험을 녹여 선수 심리와 전술 변화 등 선수 출신의 장점을 살린 내용만을 전달하면 되기에 부담이 덜해져 호평을 받는다.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단점으로 꼽힌다. 송종국의 말버릇이 '~때문에' 였다면 현영민은 '~상황이라', '한차례', '~니까'를 자주 사용한다. 자연히 문장이 늘어지게 되고, 앞뒤 문장 혹은 주어 술어 간의 호응이 맞지 않거나, 이중 표현을 남발하거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어휘 사용 등 다양한 문제점이 튀어나온다. 심지어 어미까지 '~했습니다아~', '~해야겠습니다아~'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어 늘어지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거의 모든 문장을 "~하다 보니까/있다 보니까, ~데, ~때문에 ~습니다"로 말한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동일한 표현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쉽게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현재까지 개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다.

그의 유명한 해설 멘트는 다음과 같다. 'OOO선수가 (상대팀)OO의 골문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서투른 스피칭, 선수 정보 관련 지식 부족[11]이라는 단점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JTBC의 메인 해설가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 부족한 자질을 보여주는 다른 선수 출신 해설위원들처럼 발성이나 발음마저 문제가 있었다면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을 수 있지만, 스포츠 중계에 적합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출신 선수라는 명성까지 있어서 계속해서 해설위원 생활을 이어 나가는 듯 하다.

2021년 12월 8일 승강 플레이오프 대전 하나 시티즌강원 FC 1차전을 끝으로 해설에서 물러났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를 앞두고 SBS에 해설위원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옛 동료 미슬라브 오르시치의 인생경기인 8강전을 중계했다. 이전 JTBC 시절에 비하면 단점들을 많이 보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6.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2022011110351464942_1.jpg
2022년부터 K리그1 울산 현대의 U-18 팀인 현대고등학교 축구부의 감독을 맡는다.#

2022년 7월 28일 K리그 유스 챔피언십 U-17 결승전에서 성남 FC U-17을 2:0으로 이기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부임 첫 해에 감독으로 첫 우승을 기록했다. #


7. 여담[편집]


  • 딸이 겨울왕국을 좋아해서 지도자 공부할 때 겨울왕국 스케치북에 필기를 했다고 한다.
파일:downloadfil영민e-5.jpg

  • 페페 더 프로그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출연하는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도 종종 이 캐릭터를 보여준다.[12]

  • 2002년 월드컵 당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음에도, 경기 후 무작위로 선발해 실시하는 도핑 테스트는 2번이나 받아 팀 내에서 2번째로 많다(1위는 3번 받은 김남일).

  • 2002년 월드컵 때 폴란드와의 예선전 첫경기 1, 2호골은 당시 건국대 선후배 황선홍유상철이 넣었다. 이때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는데 그들의 뒤에는 정종덕 감독이 있었다. 정종덕이 이끌던 당시에는 대학축구의 정상을 이끌었다. 당시의 주축이 황선홍, 유상철, 이영표, 현영민, 고정운, 유승관, 이상윤, 공문배, 유영록, 권우진, 신병호, 노규영 등이 국가대표였다.

  • 한때 경운기 드리블로 유명했던 적이 있다. 경운기 드리블러라는 별명을 본인은 좋아한다고 한다. 전성기 이영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드리블 능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건대 시절 룸메이트였던 이영표에게 배운 드리블이라고 한다.

  • 히딩크의 자서전에 의하면 월드컵 엔트리에 뽑힌 이유는 스로인 때문이었다고 한다.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는 월드컵에서는 뭔가 한 가지라도 경쟁력있게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투박한 외모와 다르게 목소리는 굉장한 미성이며 달변가이기도 하다. 전남 시절 카페에서 선수들끼리 모이면 선수들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빨려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 조 본프레레가 감독이던 시절 본프레레가 엄청 낡은 축구화를 들고 있길래 농담으로 "you shoes old" 라고 말하니 본프레레가 냉정하게 쳐다 보면서 "you play old" 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국가대표팀에서의 마지막이었다.




8.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6 15:15:10에 나무위키 현영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실제 생일은 12월 5일이나 호적상 등록이 늦었다고 한다.[2] 사간공파(司諫公派) 32세손 영(泳)○ 항렬.[3] 프로필 키는 179cm이나 슛포러브에서는 180.3cm라고 언급했다.[4] 필드 플레이 상황에서는 왼발을 주로 사용하고, 세트피스 상황에서는 오른발로 킥을 한다. 피파온라인에서는 왼발을 오른발에 비해 못쓰는걸로 나와있으나 대표적인 잘못된 주발 표기다.[5] 레프트백[6] 수비형 미드필더[7] 현영민 위원의 이직 첫 해까지는 JTBC3 FOX SPORTS라는 명칭을 사용했다.[8] 최후의 1998년 월드컵 멤버는 2020년에 은퇴한 이동국. 1994년 월드컵 멤버는 2012년에 은퇴한 이운재며, 골키퍼를 제외하면 2007년까지 활동한 서정원이다. 최후의 1990년 월드컵 멤버는 2004년에 은퇴한 홍명보, 최후의 1986년 월드컵 멤버는 1999년에 은퇴한 김주성이다.[9] 현영민은 울산에서 은퇴하고 싶어했고, 인터뷰에서도 빅 크라운의 왼쪽은 영원히 자기 땅일 줄 알았다며 아쉬워했다. 추후 현영민은 원래 포항에 갈 수도 있던 걸 본인이 울산 구단에 "포항은 도저히 못 가겠다. 울산 팬들을 어떻게 보나?"라고 워낙 강하게 얘기해서 서울로 트레이드됐다고 밝혔다.[10] 이 당시 현영민처럼 1경기도 뛰지 못한 선수는 김병지와 최은성, 최성용, 윤정환도 있지만, 이들은 이전 대회에서 주전으로 뛴 바 있었고, 또 대회 이전의 평가전에도 참가한 적이 있어 아예 국가대표팀에 이름만 올린 수준이었던 현영민과는 다르다.[11] 여기서 지식이란 선수 출신으로서의 축구경기적 경험과 지식이 아닌 시청자들이 관심을 갖는 선수에 대한 정보 등을 바탕으로 한 축구 경기 외적 지식이다.[12] 골 때리는 외박에서 현영민 감독을 모셔왔다는 농담으로 페페 인형을 가져오기까지했다. https://youtu.be/pm2I9e3ZK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