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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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1]
洪景來ㅡ 亂


파일:홍경래의 난.png

시기
1812년 1월 31일 ~ 5월 29일[2]
장소
조선 평안도
결과
관군의 승리, 반란 진압
교전 세력
조선
홍경래군
지휘관
순조
이요헌
박기풍[3]
유효원
정시†
이영식[4]
유정양
김익순➝
허항[5]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홍총각
김창시†
이제초†
김사용†

1. 개요
2. 원인
3. 경과
3.1. 전개
3.2. 후기
4. 의의 및 한계
4.1. 난의 성격
4.2. 전술적 한계
5. 영향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8.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캡션




캡션



조선 순조 11년(1811)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 지역에서 일으킨 반란.


2. 원인[편집]


역사학계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2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 모순이고 또 하나는 한때 지역감정으로 남아 있던 서북 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징이다.

서북 지방은 조선이 건국되기 전인 고려시대 때부터 여요전쟁 등의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서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해 왔다. 게다가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 등 반란도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중앙 정부가 보낸 군대에게 진압당했다. 결정적으로 후기에는 몽골의 침략에 아예 직통으로 갈리고 동녕총관부라는 이름으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원나라 말기엔 홍건적도 침략해왔다. 이렇듯이 전쟁이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기에 서북 지방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고전적 양반이라는 계층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당시는 청야 전술이 주된 전술이었기 때문에 농사도 좀 짓고 해서 경제력이 상승하려 하면 전쟁 터져서 다시 갈리고의 무한 반복이었다.

심지어 북방 출신인 태조태종 대에도 이 지역은 무시당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는 '서북 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평안도, 함경도 두 도에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라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 자신이 서북보다 더 차별받은 동북 지방 출신이므로 그런 명령을 정말로 내렸을 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서 후에 태조 이름을 팔아서 서북 차별에 정당화한 것이라는 주장[6]이 있다.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시행된 사민 정책이 시간이 지나 중종 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죄인의 가족을 서북 지방으로 보내 버리는 형태로 변질되면서 서북 지방은 완전히 유배지로 낙인찍혔다. 특히 함경도는 열악한 기후에다 원래 여진족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이라는 점과 더불어서 당시 조선 사람이 서북 지방을 보는 시각은 과거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보는 시각, 혹은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본 시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설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고...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한성 사람은 서북 지방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고,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

이중환택리지 중에서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시대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성리학의 전파가 늦어져서 "서북 지방에서는 양반들도 소학을 읽지 않는다"는 장계가 올라올 정도에 이른 것이다.[8] 결국 서북 지방은 양반 세계에서 완벽하게 왕따당한다.

일반적인 인식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서북 지방 출신은 승진의 길이나 마찬가지인 청요직에 임명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당상관 후보자의 명부인 도당록(都堂錄)에 서북 지방 출신민으로 이름을 올린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관의 경우는 상황이 좀 나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북 지역 차별은 여기에도 존재하여, 서북 지역인들은 문과의 숭문원에 해당하는 선전관의 직책에 임명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문과 합격자는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고 임명될 수 있고, 무과 합격자는 선전관, 부장, 수문장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았는데, 승진 한계와 승진 속도가 정확하게 이 순서에 비례했다. 따라서 서북 지역인들은 하급 무관만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정확하게 속대전 기준으로 서얼들이 받던 대접이다.

평안도 지역 사람들의 과거 합격률 자체가 낮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안도민들의 과거 합격률 자체는 8도에서 높은 편에 속했다. 홍경래의 난의 원인을 언급할 때 평안도에 대한 차별을 떠올리기 때문에 과거 합격률도 낮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2015년 기상직 7급 공무원 시험에서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노린 문제가 출제됐다. 그런데 역으로 말하자면, 과거 합격률이 차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좋은 증거이다. 이는 상민의 과거 합격률 문제와도 비슷한데 저 사람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미관 말직을 전전하다가 끝났다.

문제는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고위직이 아니더라도 관직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생원시를 봐서 생원 직위를 따거나 진사시를 봐서 진사 직위를 따도 '양반' 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기는 했다. 경주 최씨의 가훈이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인 이유도 양반 커트라인이 소과인 생원시, 진사시를 통과해서 4대까지였기 때문이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대대로 소과만 봐도 양반 지위가 유지는 된다.

그러나 표면적인 양반 타이틀은 소과 합격을 통하여 어떻게 얻을 수는 있더라도 실질적인 명예 및 품위 유지를 위해서는 관직을 얻어야 했는데,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든든한 빽을 만드는 것으로, 정계 유망주에게 경제적으로 막대한 후원을 해주는 이른바 엽관 활동을 벌여야 했다. 이러다가 몰락한 인물이 홍경래군에서 가장 전형적 양반에 가까운 김창시이다. 김창시는 부호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까지 했지만, 엽관 활동에 실패해서 집안을 말아먹었다. 그 정도의 재력이 없다면 과거(대과)에 합격하여 본인의 순수한 능력으로 인정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이미 과거합격자 임용이 만성적으로 심각하게 적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빽없는 서북인이 등용될 수 있는 확률은 더욱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 코스를 밟지 못한 이들은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몰락해서 잘해야 훈장이나 묏자리 잡는 지관, 의사가 되었고, 자칫하면 농민이나 상공업자로 전락해서 군역 걱정을 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이 홍경래의 난과 그 이후에 정감록과 정진인설이 뻔질나게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애초에 홍경래부터가 과거에 실패하고 풍수장이로 묘자리 보면서 전국을 떠돈 케이스이고, 주력 참모인 우군칙 역시 풍수 경력이 있다. 난 당시에 부원수를 칭한 김사용은 향반 출신이지만 가난해서 결혼도 못한 경우이다. 이게 현대여도 할 말이 없을 판인데 대를 잇는 개념이 강했던 조선시대 양반의 기준이면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서북 지방에서 사족이 완전히 사라진 결과, 다른 지역과는 달리 향임이 향권(鄕權)을 장악하였다. 잉류 지역으로서 부세를 중앙에 운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서북 지방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부세 행정에서 향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이 지역에도 수령과 결탁한 신향과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고, 서북 지방 수령들은 다른 지방 수령에 견주어 더욱 긴밀하게 세도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수탈이 매우 심해졌다.

이 시기 대표적인 수탈 방법으로 매향(賣鄕)과 민고(民庫)가 있다. 매향은 수령이 돈 많은 상인들에게 향임을 강제로 떠넘기는 것이다. 가장 천시받던 이들을 향임으로 올려주는 것이니 일종의 승격이지만, 이 과정이 강제적이고 워낙에 돈을 많이 뜯으면서 동시에 광범위해서 문제가 되었다.[9] 이중 가장 압권은 이미 매향이 문제가 되었던 상황이던 정조 14년 정주 목사 오대익이 총 46,849냥을 받고 무려 400여 명을 향임에 올린 것이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 엽기적 사건의 배경이자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 중 하나가 민고였다. 청나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연행의 경비와 각 읍의 경비를 서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충당하게 한 창고가 바로 민고였다. 조선 초에는 잦은 연행 자체로 인한 부담 자체가 엄청났고, 조선 후기 연행이 감소할 무렵에는 민고가 수령의 사금고화 되어서 뇌물 창고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뇌물 문제로 텅 빈 민고의 부족분을 향인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매향으로 한 번 걷고, 그 매향으로 생긴 향임들에게 부족분을 메울 책임을 전가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수탈 방법은 서북민에 대한 차별이라는 피해의식과 결합하기 딱 좋았다. 이대로라면 서북민인 향임과 중앙 출신인 수령이라는 대립 구조가 형성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대 서북 지방에선 이 정도 지위에 오를 양반 자체가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이는 당연하게도 중앙 정부에 대한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기에, 이런 상황 때문에 서북 지방의 봉기는 곤궁으로 자연 발생한 남부의 농민 봉기와는 다르게 향임들 주도로 일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함경도 북청부단천의 농민 봉기(1808년)의 주도층도 향임이었고, 홍경래의 난 얼마 전에 황해도 곡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 역시 향임들이 주도한 수령에 대한 반관 투쟁이었다. 그래서 홍경래의 난 당시 향임들은 적극적으로 홍경래 군에 내응했고, 홍경래군은 세력을 확장할 땐 거의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파죽지세를 이어갔다. 다만 그런만큼 이탈도 빨라서 홍경래 군의 몰락은 이 향임들의 배반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홍경래 군의 몰락 과정에서 향임층은 내응을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관군에 협력하여 의병까지 조직하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였다.

홍경래의 난에 상인들을 연결짓는 시각도 있다. 당시 서북 지방은 농업 생산력이 타지에 비해 비교적 높고 자원이 풍부하여 수공업과 광업이 활성화되었으며, 특히 청나라와의 교역 과정에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공무역 외에도 사무역이 대규모로 진행되면서 평양, 개성, 의주, 안주, 정주 등이 중심지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잠채를 통한 광산업 역시 극도로 발달하였는데, 이 역시 상인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송상과 만상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은 독자적인 연결망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북민 차별 철폐를 기치에 둔 홍경래의 반란의 이면에 있어서 송상과 만상이라는 서북 지방 상인들과 한양의 경강 상인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특권 상인들간의 대결 구도로 파악하는 견해도 늘고 있다. 이런 상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평안도의 거부였던 이희저로 초기 농민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선금으로 1냥 ~ 3냥을 지불하였는데 그 돈 역시 이 거상들에게서 나왔다.

다만 이들은 난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홍경래 군에서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아무런 직책도 없었고 가장 주요한 인물인 이희저[10]마저도 후방에서 군량이나 대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만다. 뒤에서 무슨 협약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희저가 홍경래와 우군칙에게 이용당했다'라는 소문이 도는 지경에 이른다. 정사에서도 이희저가 정감록 때문에 홍경래에게 낚였다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상인층 역시 향임층만큼이나 머리가 좋아서인지 이탈이 빨랐고 반란 진압 후에도 상당수가 원상 복권되었다. 이는 뇌물을 주고 뒷수습을 잘한 영향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조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16세기에는 직전법이 폐지되어 전주 전객제가 소멸하고 지주 전호제가 확산되었고 17세기에는 신분 질서의 동요와 유통경제의 성장으로 인하여 지주 전호제가 경제적 지주 전호제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토지 소유에 있어서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농민층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재정 부족에 시달리던 조선 왕조는 부세 징수에만 급급하여 농민들의 체제 이탈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무토불농층(無土不農層)이라 불리는 이들은 숙종 31년 경상 감사의 장계에서 5만여, 충청 감사의 장계에서 10만여가 언급된다. 기민(飢民)[11]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땅 없이 떠돌면서 사회 불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유난히도 빈발했던 각종 자연재해들은 사회 불만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1809년 발생한 기록적인 흉년[12]으로 대대적인 기민이.발생했다. 흉년 때마다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이들을 돕기 위해 곡식을 무상제공하는 진급제도가 마련될 정도.

1810년 순조 실록에는 기민이 840만 1,209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숫자가 언급된다. 진휼을 마친 이후인 <순조 실록> 순조 10년 5월 27(경진), 47 집 658 면의 기록에 따르면 ‘수원이 14만 1천1백45구口, 내하전 별순 2만 7백 87구, 광주가 4만 5천 3백 12구, 경기도여주 등 28읍에서 38만 7천 8백 89구, 호서의 평특 등 50 읍진과 역에서 1백 31만 1천 9백 59구, 호남 전주 등 90 읍진이 4백 76만 4천 4백 57구, 영남의 경주 등 71읍진과 기민이 1백 72만 9천 6백 60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모두 840만 1천 2백 9명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황당하게도 그 해 말에 기록된 8부 5도의 총 인구 758만 3,036명 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 <순조 실록> 순조 10년 12월 30(경술)에 기록된 한성부에서 올린 인구 조사 기록을 보면

‘경조(京兆)에서 민수(民數)를 바쳤다. 5부(五部) 및 8도(八道)의 총 원호(元戶)는 176만 1,887호였는데, 남자는 375만 4,890구(口)이였고, 여자는 382만 8,156구(口)였다.’ 남녀를 더한 총 인구수가 758만 3,036명이다.'


기민과의 차이는 무려 81만 8,163명이나 된다. 이런 이들은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떠나서 서북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서북 지방의 광산붐에 편승해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몰락한 농민들의 상업적 잠채로 연결되는 모습이 영국인클로저 운동 이후 몰락 농민이 일거리를 찾아 임노동자로 변하는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은 잠채가 산업발전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민고의 폐단에 고리대로 농민층의 몰락이 극심했던 기민들까지 몰려드니 서북 지방은 그야말로 거지 소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가장 많이 몰린 것이 잠채, 그중에서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금광이었다. 그래서 홍경래 군이 금광이 난다는 소문을 터뜨리고 농민들을 모집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돈에 고용된 광산 노동자(거상들에 의해서 1냥 ~ 3냥 정도의 선금을 받은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또는 향임에 의해서 동원된 부대로서, 그리고 될 대로 되라거나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홍경래 군에 가담하여 홍경래 군의 세를 늘려줬다.


3. 경과[편집]


홍경래의 난은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난의 주동 세력이 크게 변화되는 데다가, 성격도 크게 바뀌기 때문이다.


3.1. 전개[편집]




MBC 드라마 상도 중에서

홍경래의 난은 1812년 1월 31일(18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까지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홍경래 난의 지도층에는 총지휘관인 대원수를 맡은 홍경래, 부원수로 불린 김사용, 광산을 경영하며 농민군 조직을 담당한 우군칙, 이념 지도를 담당한 김창시, 대상인으로서 물자 조달을 맡은 이희저 등이 있었다. 우군칙은 서자 출신으로 풍수와 점에 능했으며 학식도 높았고, 이희저는 역졸이었으나 상인이 되어 가재를 불린 가산에서 이름난 대부호였으며, 김창시는 사회 비판적 시각을 지닌 진사 출신의 문장가이자 재예가였다.

이들은 가산군 동북면 다복동(현 박천군 청룡면 인덕리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아 광산 노동자 모집을 구실로 군사를 모아 훈련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힘을 잘 쓰는 역사(力士)들인 홍총각[13], 양시위, 김운용, 이제초 등도 가담하였다. [14]

조선시대에 완전히 하급 무관 양성소 취급을 했던 서북 출신답게 홍경래, 김사용 등 지도부는 상당히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모사로 취급받는 우군칙마저 칼을 빼드는 모습이 기록에 남아있다. 지도부에서 완전한 문관은 진사 출신인 김창시 정도. 여기에 더해서 역사 출신들은 농민층과의 연결고리로서도 그리고 일선 지휘관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야말로 서북 지방민들은 전투민족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래는 홍경래의 난 당시의 격문으로 내신, 수능을 불문하고 홍경래의 난을 문제로 낼 때 단골로 발췌 및 요약되어 나오는 사료 중 하나이다. 그만큼 이들의 봉기 의도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 한계도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다. 평안도 지역 차별만 내세워 스스로를 지역 고립시켜 지역에 국한된 반란에 불과했다는 것 등등. 이것은 홍경래가 이 격문을 평안도 전역에만 보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용골 산성에서 분전했던 의병장)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15]

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의 재주가 또한 이곳 서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토의 글을 빌었으니 400년 동안 서토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김모, 박모(박종경)의 무리[16]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17]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세상을 구제할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의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 신령함이 있었고 5살 때에 신승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성장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여연에 머무르기 5년에 황명(皇明)의 세신 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병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18]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에 소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주, 군, 현의 고을원들에게 보내니 절대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19]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위 격문을 안주병사, 우후목사와 숙천부사, 순안현령, 평안감사, 중군, 서윤과 강서현령, 용강현령, 삼화부사, 함종부사, 증산현령, 영유현령에게 내리노라. 대원수


그렇게 추종자들을 모으며 10년에 걸쳐 들키지 않고 거점과 물자, 병력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들은 마침내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불과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 정주, 태천, 곽산, 선천, 철산, 남창, 용천 등을 장악하였다. 이는 홍경래의 난이 보통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농민 봉기와는 계획적인 반란이어서 크게 다르다는 점을 잘 보여주며, 치밀한 계획하에 정부 전복의 목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워낙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기습이었던 데다 부정부패로 만연하던 지방정부엔 난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홍경래 측에게 금전으로 포섭되거나 역성혁명에 찬동하여 곳곳에 내통한 아전들이 있었다. 내통한 아전들에 의해 반란군이 오자마자 관아 문이 활짝 열리고 반란군이 들이닥쳤기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붙잡혔고, 살기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반란군에 참여한 군수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선천부사 김익순이 있다. 다만 가산군수 정시만은 아전들의 내통으로 문이 열려 저항하다 붙잡힌 뒤 죽기 싫으면 병부를 내놓으라는 반군의 위협에도 거부했다. 그 결과 반군에게 참수당했고 정시의 아버지도 아들의 시체훼손을 막기 위해 몸으로 막다가 흥분한 반군에 의해 같이 죽었다. 정시 부자의 시신은 정시를 수청들던 관기 최연홍(崔蓮紅, 1785~1846)이 반군 몰래 빼돌려 장례를 치렀다.

좀 어처구니없는 사실이지만 정시 이 한 명만이 반군에 맞선 유일한 수령이었는데, 당시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시기였던지라 수령의 자질이 부족한 부패한 인물들이 수령 자리에 대거 앉아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점령된 8고을 중 5고을의 수령은 냅다 튀고 2고을의 수령은 자발적으로 항복했다. 그 때문에 정시는 반란 진압후 그 충직함을 높게 사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반란군에 항복했을 뿐만 아니라 합류까지 한 김익순은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주모자들이 처형되자 태세전환하여 반군 수령의 잘린 목을 얻어서 자기가 목을 베었다고 상부에 거짓말까지 했음에도, 본인의 목만 달아나는 선에서 끝났다. 이는 조정에서도 자기 실책들이 있어서 그런지 당시 현장에서 책임을 지지 못한 수령들의 처벌에 관대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수령들도 반란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거나 진압군에 합류해 공을 세우는 식으로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난의 파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홍경래가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목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부 방면을 공략하였으며, 우군칙이 총참모, 김창시가 참모,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000명 정도의 봉기군 중 대다수인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 없는 농민이나 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선봉대를 맡은 홍총각은 단숨에 가산·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평안도 서북지역의 중심지인 의주부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그래서 홍경래 군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한때는 진짜로 격문에 나온 5,000여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반란이 진행된 이유는, 향임들과 상인 등 여러 세력들이 조정의 북방지방에 대한 무관심과 차별 때문에 홍경래의 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성문을 내부에서 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관군이 다수 주둔한 의주안주 같은 주요 지역은 점령하지 못했는데, 안주는 전략젹으로 중요한 국방상 요충지로 원래부터 이런 곳은 일반 고을처럼 허술하게 관리되는 지역이 아닌지라,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내응했다고 해서 성이 넘어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반란군이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내다보거나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임상옥을 비롯한 거상들이 막대한 후원금을 기부하여 정부 편인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양서순무사 이요헌, 감진사 정만석 등이 이끄는 관군이 북상한다.

게다가 봉기군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봉기군 간 의견 대립으로 내분이 일어나 홍경래를 살해하려는 세력들이 발각되어 처형된 것이다. 당시 평안도의 주요 고을인 안주영변 중 어디를 먼저 공격할 것인지 향후 공격 방향을 논하고 있었는데 안주 병영의 집사였던 김대린은 (자기가 잘 아는 곳이라 그런지) 일단 안주부터 재빨리 쳐들어가자고 주장했지만, 홍경래는 모사인 우군칙의 조언에 따라 김대린의 의견을 묵살하고 우선 영변을 공격한 후 그 다음에 안주를 칠 것을 결정했다. 자기 의견이 무시되자 김대린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고 이인배와 모의하여 배신하고는 홍경래를 암습했다. 물론 암습은 이들을 수상하게 여긴 우군칙의 대응으로 김대린이 현장에서 살해되고 이인배가 자살하면서 실패했지만, 이 암습으로 인해 지도자인 홍경래가 칼에 맞아 부상당한 결과 봉기군은 전 군이 멈춰버렸다.

때문에 봉기군은 다시 군사를 정비하느라 영변이나 안주 중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졌고 시간을 지체했다. 이런 틈을 관군이 그냥 넘길 리 없었고, 전열을 정비하는 통에 제대로 된 편제를 갖추지 못한 채 관군과 격돌한 홍경래 군은 12월 29일 안주성 공격을 앞두고 박천, 송림 전투에서 관군에게 참패하여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부원수 김사용이 지휘하는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 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데다 송림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한 소식마저 날아들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또한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해 온 함종부사 윤욱렬의 관군에 의해 북진군 선봉장 이제초가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과 함께 참수됐다[20]. 이리하여 그전까지 승전으로 병력이 2천~3천 명에 이르던 북진군은 사실상 궤멸되고 말았다. 결국 봉기군의 주요 인물들은 남은 병력을 해산하고 정주성으로 들어갔다.

반란군이 승리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붕괴된 이유는 여러 목적을 가진 다양한 집단이 명확한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결집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잘 되면 승승장구하지만, 뭔가 일이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서로 발을 빼려 하기 때문에 한 방에 붕괴되기 딱 좋다. 실제로 전세가 관군한테 기울기 시작하자 향임층과 상인층이 먼저 발을 뺐고, 나중에는 의병까지 조직하여 되려 관군에 가담해 홍경래 군을 공격했다.


3.2. 후기[편집]



진압군의 공세로 농민군은 연전연패하였다. 이때 진압군이 초토화 전술로 밀어붙이면서 참여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군이 장악한 지역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살육을 저지르자 정주와 주변 지역인 박천, 가산 지역의 많은 농민들이 정주성으로 들어와 100여일 동안 홍경래 군의 지도층과 함께 진압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이 농성 과정에서 봉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초기 주도 세력이던 향임층과 상인층이 이탈한 반면, 자발적인 농민층이 주도 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지지 세력층이 단일화하면서, 난을 주동한 지휘부도 반란을 이어나가기 위해 내부에서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식량을 고루 배급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홍경래의 난을 농민 전쟁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반란 자체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농성 준비에 필요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의외로 정주성의 농성은 길게 이어졌다. 이는 진압군의 초토화 전술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격분한 많은 백성들이 농성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관군은 홍경래의 난 전기 때처럼 내부에서 내통자가 발생하기를 바랐으나, 이미 민심을 잃은 관군을 적으로 생각하며 일치단결된 상황에서 그런 내통자가 나오면 미처 내응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거나 혼자서만 간신히 도망치기 일쑤니 관군 입장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보급로도 끊기고 점령지도 전부 정규군에게 해방되 외부 원군도 없어 사실상 완전 포위된 상황에서 점점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므로 결국 정주성은 농성을 시작한 지 3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농성이 엄청나게 치열했으므로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관군 쪽에서 대포와 공성탑을 동원하여 공세를 퍼부었으나 오히려 많은 사상자를 남기면서 공성전이 길어졌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당시 사령관이던 박기풍을 경질하고 류효원[21][22]으로 교체하면서 빨리 진압하라고 닦달했다. 이에 관군 사령부에서는 정주성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고 1,700근이 넘는 폭약을 묻은 뒤 이를 이용해 성벽을 통째로 폭파시키고 나서야 가까스로 정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23]

홍경래는 1812년 4월 19일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끝까지 저항하다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참수된 뒤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처리되었다. 이 때문에 연좌 처벌 강도도 더욱 높아짐에 따라 홍경래의 아내 최씨는 성이 함락된 이후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진 뒤 거리에 목이 내걸렸다.

다른 지도자들 역시 모두 사로잡혀 처형됐다. 김사용은 저항하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고, 이희저 역시 저항 중에 관군의 의병 함의형한테 살해되었으며, 양시위는 저항하다가 붙잡혀 바로 참수되었다. 우군칙과 홍총각은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뒤 참수되었으며, 김창시는 도주했다가 조문명에게 살해되었고, 박성간 & 박성신 형제는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박성신의 아들인 인초 & 인복과 함께 한양에서 참수됐다. 반군에 가담한 농민들에 대한 처벌도 상당히 잔혹했다. 정주성에서 체포된 이들은 총 2,983명이었는데, 이 중 10세 이하의 남아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1,917명은 4월 23일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처형당했다. 살아남은 아이와 여인들도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당시 조선에서 공노비는 몇 년 전에 혁파되었으니 공신들의 사노비로 분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케이스다.[24] 유교 이념에 충실했던 조선은 반란이나 민란이 발생하면 주동자와 핵심 가담자는 일벌백계로 죽이지만 단순 가담자인 지역민에게는 선처를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본업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는 고종 시기의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할 때까지 지켜진 대응 메뉴얼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원칙이 정작 홍경래의 난 때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평안도의 지방 속오군 다수가 반군에 가담했는지라 남은 관군의 사졸들은 훈련도가 너무 낮아서 훈련도감이 주축이 된 순무영이 전적으로 도맡았는데, 이들의 숙련도와 감투정신은 조선 최고였지만 민사작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한양에서 긴급 파병된 중앙군이 평안도 칼바람 아래 탈영이 상습인 지방병들의 목을 매달아가며 토벌을 진행하니 그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반군은 완전히 악에 받혀버렸다. 특히 정주성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관군의 민간인들에 대한 잔혹행위가 심했다. 관군 병사들이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것을 관군 지휘부에서 통제하지 않다보니 병사들의 약탈과 학살이 심각했다. 이로 인해 관군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지게 된 주민들이 반군과 함께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되면서 공성전이 예상 외로 석달이나 진행됨에 따라 관군의 피해가 커지게 되었다. 야지에서 격파 후 와해된 것이 아니라 성 안에 들어가 포위당하고 있어서 피할 길도 없었고, 결국 조선조 유래없는 잔혹한 결말을 맞았다.


4. 의의 및 한계[편집]



4.1. 난의 성격[편집]


홍경래의 난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가 존재한다. 1524~1525년의 독일 농민전쟁과 같이 각 지의 농민들이 주도한 반봉건적 민란, 즉 또 다른 '농민전쟁'이라는 시각과 '농민전쟁'이 아닌 하나의 민란이었다는 시각이다.

전자는 농민층의 주도적인 참여와 반봉건적 성격, 계급투쟁론적 시각을 담고 있다. 후자는 난의 주도세력과 농민층의 연대가 부족하였다는 점, 농민층은 난이 시작된 이후에야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계급투쟁론을 조선 후기 사회에 도입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이라는 점 등을 들어 전자를 비판한다. 물론, 농민층의 주도적인 참여를 인정하면서도 홍경래의 난을 농민 전쟁으로 보지 않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그러므로 칼같이 분류하기는 불가능하다.

홍경래의 난은 체제 갈등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즉 단순한 계급적 저항이 아니라 계급 의식을 기초하여 일어난 최초의 봉기이다.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저항 행위의 정당성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일종의 감결 사상으로서 홍경래 불사설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동안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농민들이 정주성 농성 단계에서 능동성을 표출하면서 백성이 형성되는 초보적인 단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신분제에 대한 의식의 성장을 통해 농민 항쟁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 체제가 아니라 기층 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 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때문에 정주성 항쟁 시기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를 '평안도 농민 항쟁', '평안도 농민 전쟁', 심지어는 '홍경래의 혁명'이라고까지 칭하기도 한다.

한편 홍경래의 난은 봉건적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봉건 권력의 교체를 우선적인 목표로 두었다. 즉 역성혁명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토지 개혁, 신분 개혁, 삼정 개혁 등 반정부 및 반봉건을 위한 개혁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또한 봉건적 사회 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차별만으로 여겨 삼남 지방의 농민 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였다. 물론 난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후기에는 농민 항쟁과 비슷하게 성격이 바뀌면서 지휘부의 생각도 달라졌지만, 이땐 이미 반군의 세력이 붕괴된터라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를 드러내는 사례가 정주성이 함락된 뒤의 모습인데, 정주성을 함락한 관군은 성 내의 향교, 사당, 관아 등이 거의 멀쩡하게 보존된 것을 발견했다. 이는 봉기군이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기존의 유교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항쟁 말기에는 만주의 청나라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위험성도 노출시켰다. 다만 정말로 청에 병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의 실질적 행동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란 지도층은 호병이 올 것이라는 말을 난 초기부터 했지만, 이 호병은 사실 현실적인 청나라 군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으니까 청나라도 정통성이 있는 자신들을 지원할 것이라는 명분상 표현이었다. 정주성 농성기에는 호병 표현이 더 자주 쓰이는데, 이는 고립무원인 처지에서 농성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러나 만약 청에 특사를 보내는데 성공했다 해도 조선 왕조가 청의 질서에 이미 순응한 상황에서 반란군을 지원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미 당시의 조선은 청나라와 나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청나라 입장에서도 말을 잘 듣는 기존의 조선 조정을 버리고 말을 잘 들을지 안 들을지도 모르면서 세력도 훨씬 미약한 반란군 세력을 도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최항기의 소설 <홍경래의 난>에서는 이 호병이 청나라 병사들이 아니라 만주의 마적단을 의미하는 걸로 나오는데, 홍경래가 특사를 보내 이들을 고용하려 했으나 선금으로 들고간 5천냥을 날로 먹은 뒤 10만냥을 선금으로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기에 결국 고용은 무산된다.

4.2. 전술적 한계[편집]


전술적으로도 홍경래의 난은 문제점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난을 일으킬 때 병력이 1000명이었고 정주성에서 농성할때 5000명일 정도로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너무 적었다는 것인데, 이 적은 병력을 잘게 쪼개기까지 해서 기습으로 인한 초반의 우세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홍경래의 난은 1812년 1월 31일(양력)시작 당시 약 1천여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이후 여러 고을을 함락하면서 떠돌아다니던 유민과 노비, 천민들이 합세하고, 병부를 통해 양민들을 징발하면서 병력의 규모가 5천여명까지 늘었으나, 처음의 병력 1천여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군사 훈련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머릿수 채우기에 불과했다.

거병 당시 홍경래는 본대를 맡아 안주로 진군하고, 김창시·우군칙·이제초는 북진군을 맡아 서북쪽으로 진군, 김사용은 부원수군을 맡아 의주를, 홍총각은 남진군을 맡아 박천으로 진군했다. 즉 홍경래의 본대와 홍총각의 남진군은 둘로 나뉘어 남쪽으로 진군. 김창시의 북진군과 김사용의 북원수군은 둘로 나뉘어 북쪽으로 진군한 것이다. 이 전략은 초반에는 주효하여 본대는 2월 2일에 가산, 박천, 태천을 큰 저항없이 점령했고, 북진군 역시 곽산, 정주를 단기간에 점령하고 1812년 2월 15일에는 용천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점점 점령하는 고을이 늘어나고, 그 고을마다 최소한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했기에 반군의 수는 전과가 오를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반군이 점령한 대읍[25]만 해도 11개인데, 이런 대읍마다 최소 50명만 남겨둔다면 이미 절반 이상인 550명이다. 여기에 대읍보다 작은 규모의 마을은 훨씬 더 많을 것이기에 반군의 병력. 특히, 오랫동안 홍경래가 직접 조련했던 정예병은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반군 입장에서 이러한 고을들을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것이 이들은 단순히 약탈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반드시 점령한 고을은 통치해야만 했다[26].

이러한 사실은 평서지방 최대의 병력 집결지이자 의주에 버금가는 안주성[27]으로 진격할 수록 전력이라고는 정예 1천 + 오합지졸 4천명 징병군으로 구성된 반군의 패배와 퇴각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1월 31일 거병 이후 2월 7일까지 반군은 한 차례의 패배도 없이 파죽지세로 고을을 함락시켰으나 본대와 남진군은 남쪽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반대로 부원수군과 북진군은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병력이 점점 분산되면서 전력이 약해지더니 2월 8일 경에는 안주성을 목전에 두고 영변에서 관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여기서 반군의 지휘부는 흔들리게 되는데, 진격에 차질이 생기게 되자 홍경래의 본대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장수 김대린과 안주성 및 인근 읍락의 포섭된 하급 군관과 아전들은 한양과 평양의 지원군이 안주에 도달하기 전에 당장 안주성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반대로 참모들은 안주성은 방비가 매우 튼튼하니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외곽의 영변, 태천과 같은 지역부터 함락시킨 다음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경래는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안주를 공격하지 않고 주변 지역부터 공격하게 했는데,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 선택이 패배를 이끌었다. 2월 8일 경의 안주성은 병력이 부족하고 반군의 기세와 힘이 과장되어 전해진 탓에 사기도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군이 안주성을 공격하지 않고 외곽을 공격하면서 재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게다가 홍경래의 결정에 반발한 김대린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홍경래가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반군의 지휘체계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1월 31일 반란군의 거병 사실이 2월 2일에 평양까지 전달되자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는 소식을 한양으로 알리는 한편, 그 즉시 평양과 순안의 거의 모든 갑사와 병사들을 안주로 급파시키면서 동시에 주변의 읍락들에게도 파발을 보내 추가로 지원할 병사 동원령을 내렸다. 또한 지역의 유생과 양반들에게 의병을 조직하게 하여 이 의병들로 하여금 정규군 대다수가 파견되어 공백이 생긴 평양 인근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이처럼 이만수의 긴급한 조치와 반군이 안주성 공략을 주저한 탓에 안주성은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28]. 또한 곽산군수 이영식 등 초반에 점령당한 고을의 문무관들과 군관들, 병사들이 안주성으로 합류하면서 안주성의 방비는 더욱 튼튼해졌다.

한편 홍경래의 본대는 영변과 태천을 공략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지금이라도 안주성을 공격해야한다는 의견으로 안주성 인근 송림리에 진을 쳤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평안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2월 11일, 1천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서 송림리의 반군을 공격했다. 병력수는 홍경래군이 더 많았으나, 의외의 기습을 당한데다가 앞서 말한대로 정예병의 수가 계속 줄어든 홍경래군의 뒷심 부족으로 점차 밀리게 되었고 이후 곽산 군수 이영식이 원군을 이끌고 도착하자 결국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퇴각하고 만다.

전술적 한계의 두번째는 첫번째와 이어지는 것으로 홍경래가 기습초반의 승승장구를 통해 정규군인 조선군의 수준을 오합지졸이라고 너무 얕본 것이다. 순조 때의 조선이 수렴청정과 세도정치로 인해 병에 든 것은 맞지만, 그래도 국가 체계는 유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명군으로 평가받는 정조가 바로 전대의 국왕이었다. 또한 아무리 나라가 막장이 되어도 기득권층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최후의 방패인 군사력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29] 근대사에서 조선군이 프랑스군이나 일본군에 속절 없이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기에 무시하기 쉬우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규군들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고, 내부적인 반란을 진압하는 것과는 아예 결이 다른 소리다. [30]

시기에 따라서 다르지만 수도인 한양에만 해도 훈련도감이 약 6천여명, 금위영 2천여명, 어영청 2천여명, 호위청 1천여명 등 1만 여명의 병력이 존재했고, 경기도 방어를 담당하는 총융청, 한양 인근의 주요 도시인 광주·수원·강화·개성에는 각각 수어청, 총리영, 진무영, 관리영이라는 방어 부대가 따로 있었다. 물론 이때쯤 되면 방군수포라 하여 군적에는 이름만 올려놓고 군포만 납부하는, 군사훈련 한 번도 안 받아본 민간인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아무리 깎아 들어도 한양과 수도권 인근에만 최소 1만 여명의 직업 군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다 수도권 병력보다 질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숫자는 오히려 더 많은 삼남 지방의 병력들. 난리가 나면 지방의 향림과 사림 등 양반층이 주도해서 모집하는 의병들까지 고려하면 홍경래의 반군과 그들이 상대해야 할 관군과의 격차는 거의 1대 100 이상으로 벌어진다. 더군다나 유교적 질서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당시에 홍경래의 반군은 앞선 인조반정이나 중종반정처럼 군주를 바꾸자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 왕조를 무너뜨리고 나라 자체를 갈아치워버리자는 역성혁명이었기에 여기에 동조해줄 기득권 세력은 전무했다. 처음 궐기한 서북 지방에서도 동조해줄 기득권은 이전부터 중앙정부의 차별과 무관심으로 인해 불만이 있던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홍경래의 반군이 한양은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안주성조차 넘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송림리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단 한 번도 공세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며 남군은 정주성으로 쫓겨 들어갔고, 북군은 북군대로 의주성 함락에 실패하면서 군이 와해됐다. 이후 관군은 고사하고 허항의 의병군에게 쫓기면서 김창시 등 핵심 수뇌부까지 전사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적 실패들을 한 밑바탕으로는 홍경래와 그 수뇌부들의 태생적 한계가 많이 거론된다. 홍경래를 포함하여 우군칙, 김사용, 홍총각, 이희저, 김창시 등 수뇌부들 중에선 군사를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록 홍경래의 카리스마가 대단하고, 홍총각과 김사용의 무예가 대단하다고 해도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것이지 군사를 잘 지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수많은 병서를 읽어 온갖 병법에 통달하였다고 하지만 중요한 실전 경험이 없이 병서만 많이 읽은 이들은 전투에서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31]

실제로 다복동에서 거병 이후 각 고을을 점령하면서 고을에 있던 무관들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 부각됐다. 상단에 서술된 김대린이 이러한 무관 출신인데, 무관들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지금 공격을 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음에도 우군칙이나 김사용 같이 글로만 병서를 배운 이들이 반발하니 갈등이 심해졌고, 결국 내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5. 영향[편집]


홍경래의 난은 비록 규모면에서는 40여개의 성이 모두 호응해 3년동안 지속된 조위총의 난이나 내전으로까지 보이는 김헌창의 난보다 작았지만, 사회적인 영향력은 꽤나 대단했다.

진압된 이후에도 홍경래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홍경래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 봉기를 선동하였다. 그리고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언서 정감록을 전면에 내걸고 나선 최초의 농민 봉기였다. 그래서 난 이후 홍경래와 함께 수도 없이 돈 것이 정진인설로 대표되는 정감록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서북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1813년에 제주도 목사로 김수기가 부임했는데 이 인물은 제주 특산품인 전복을 뇌물로 한양의 대신들에게 바치기 위해 해녀들한테 전복을 잡아오라고 닥달하며 해녀들을 발로 차서 물속에 빠뜨리는 등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이게 얼마나 나쁜 행위였냐면 전임자였던 기건은 해녀들이 전복을 힘들게 캐는 것을 보고 전복을 바치지 말라고 했는데, 김수기는 풍랑이 심해서 전복을 잡지 못하고 있는 해녀들에게 당장 잡아올것을 강요했고 해녀들이 무리라고 거부하자 해녀를 발로 차서 물속에 빠뜨린 것이다.

이에 분노한 제주 백성들이 홍경래의 난 소식을 듣고는 존경받는 토착 호족인 양제해[32]를 목사로 앉히기 위해 양제해의 주도 하에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 감영의 병력이 소수였기에 수백명이나 되는 제주 백성들을 당해낼수가 없었고 김수기는 백성들한테 끌려나왔다.

양제해는 끌려나와서 겁에 질려있는 김수기에게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자 백성들을 해산시키고 물러났다. 하지만 김수기는 약속을 어기고 즉시 양제해를 체포하였고 조정에서 처벌해달라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례적으로 김수기의 보고를 무시하며 양제해를 딱히 처벌하지 않고 풀어줬다. 이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양제해를 처벌할 경우 제주도에서 폭동이 다시 일어날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817년에는 김맹억의 집에 안유겸, 채수영, 김계호, 박충준, 신성문이 모여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고 보부상으로 위장하여 각지에 '홍경래 대원수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충청도와 전라도부터 공격하기로 거사를 정했는데 박충준이 갑자기 변절해서 고변하는 바람에 난은 실패로 끝나고 공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조정에서는 충청도를 '공충도'로, 충주목을 충주현으로 당분간 깎아부르도록 했다.

심지어 가짜 홍경래 사건도 있었다. 평안도 선천에 학승이라는 땡중이 살고 있었는데 이 인물은 검학산을 중심으로 홍경래가 살아있다는 헛소문을 조금씩 퍼뜨렸다. 또한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고 알려졌던 홍경래이며 사실은 죽은게 아니라 산에 숨어 도술을 닦았다는 소문도 함께 퍼뜨렸다.

그렇게 여론이 술렁이자 일단 몸을 숨겨 완급을 조절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회산의 부자인 김진서를 속임수로 현혹시켜 수하로 삼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붙잡힌 학승은 돈을 모으기 위해 홍경래를 사칭했음이 드러나 참수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고, 김진서는 선처를 받아 귀양가는 정도로 그쳤다. 가짜이긴 했지만 조정에서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부임하는 수령들에게 회산 지방을 잘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다.


6. 기타[편집]


  • 임상옥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홍경래가 가장 우선적으로 포섭하려 했던 인물이 당시 조선 제일의 거상으로서 상권의 주도를 잡고 있던 임상옥이었고 실제로 수행자 겸 일꾼으로 위장취업하여 임상옥의 호감을 얻는 회유책을 쓰려 했지만 홍경래를 꿰뚫어 본 임상옥의 통찰안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자 홍경래를 막고자 관군을 지원하는 입장에 섰다. 만일 홍경래의 난이 성공하면 조선 팔도의 백성들이 난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의 여파의 피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막아선 것으로 보인다.

  • 상술한대로 홍경래에게 항복하지 않은 유일한 수령인 가산군수 정시의 시신을 수습한 관기 최연홍은 난이 진압된 후 의기(義妓)로 칭송받고 면천되는 포상을 받았다. 지역 기생들에게 '운낭자'라고 불리며 논개, 계월향처럼 위대한 선배 기생으로 추앙받았으며, 고종 시대 어진화사 채용신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 사후 병조판서에 추서된 정시와 달리 투항한 수령들은 반대 급부로 더욱 큰 벌을 받았다. 특히 상술한 선천부사 김익순은 반군에 제일 먼저 투항했다가 토벌군에 재투항 후 김창시의 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줘서 부탁한 다음 자기의 공으로 돌려 용서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목의 원래 소유주에게 돈을 미리 주지 않는 바람에 들통나서 처형됐다. 이 김익순의 손자가 바로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김병연으로, 그가 평생 삿갓을 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할아버지인 김익순인 셈이다. 김익순은 오랫동안 죄적(범죄자 명부)에 적혀있다가 1907년 11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1908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다. 최종적으로 1908년 4월 30일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회복되었다.

  • 그 외에 태천 현감 유정양도 반군이 오자 튀었다가 난이 대충 멎어들 무렵에 와서는 군사들로 의심나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는데 그 수가 41명 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내려진 처분은 고작 유배형이었다.

  • 북한 조선력사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평안도 농민전쟁'이라 부르며, 임술농민폭동(임술민란)-갑오농민전쟁(동학 농민 혁명) 이전의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홍경래의 아내는 처형당한 것이 맞으나 아들들이 처형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들이 난이 진압된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홍기조가 홍경래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 윤승운 화백의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는 8권에서 다루었다. 홍경래가 어린 시절부터 보인 비범함과, 난을 지휘하며 죽기까지의 과정, 죽은 후에도 끼친 영향까지 모두 다뤘기에 홍경래는 사실상 8권 전반부의 주인공이다. 또한 후반부의 주인공인 '김삿갓' 김병연의 방랑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 홍경래의 난이었고,[33] 그 난의 발상지였던 다복동이 김삿갓의 방랑길에 등장할 정도로 존재감을 8권 내내 드러낸다.
    • 홍경래가 사람들을 모은 과정도 다뤘는데 이희저, 우군칙, 홍총각, 김사용, 김창시 등 각자의 사연이 있는 이들을 언변과 기개로 설득해 지휘부로 영입했다. 평안도 박천군 한 가운데를 흐르는 대정강 일대에 금점판(금광)이 난다는 소문에 많은 유랑민들이 몰려들었는데, 사방 10리길에 걸쳐 엽전과 금싸라기가 널려있었다. 사람들이 이걸 주으면서 유인된 곳이 바로 다복동(多福洞), 여기서 유민들은 의식주(衣食住)를 제공받고 반란에 힘을 보탰다. 이후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인 길을 '금싸라기 길', '엽전 길'이라고 불렀다.
    • 반란에 쓰인 물자와 반란군의 물주인 갑부 이희저의 자금력에 대한 이야기도 짧게 나온다. 관군이 정주성의 반란군을 소탕하는 데 걸린 4개월을 기준으로 - 쓰인 물자가 군량미 56,000섬, 각종 잡곡 5,700섬, 간장 388섬(큰 독), 소금 248섬, 잡아먹은 소 161마리, 그리고 백성들이 거둔 성금 14,500냥에 곡식이 214섬이었는데, 반란군 역시 이와 비슷한 자금을 들였다고 보면 거부 이희저가 댄 돈은 지금 가치로 족히 수백억원은 될 거라고 한다. 게다가 이 물자는 오로지 정주성 소탕전에서 쓰인 물자로, 그 외에 홍경래가 점령했던 나머지 군들의 탈환과 여러 전투에 들인 군비까지는 합산하지 않은 것이다.

  • 소설 및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상도에서 등장했는데 임상옥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바 있다. 임상옥의 재주와 자금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상의 서기로 위장 취업하여 임상옥을 포섭하려 했으나, 임상옥은 이전에 만난 스승의 교훈(과욕을 부리지 말 것) 때문에 가담하는 걸 거절했고 나중에 임상옥은 의주를 홍경래 군대로부터 지키는데 물심양면을 다하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이 일에 연루돼서 사실상 은퇴했다.

  • 1980년대 초반 신동아에서 두령 격인 홍총각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 반역이 연재되었으나 높으신 분들 보기에 제목이 안 좋아서 홍총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1990년대 재발간된 단행본은 이전 제목대로 <반역>이라고 했다. 극화로 만든 장면 설정을 제외하고는 나름 역사 기록에 충실하다.

  • 최항기는 <홍경래의 난>이라는 소설을 썼다. 홍경래가 조선의 현실에 실망하고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서자 출신 우군칙과 합세하여 10년에 걸쳐 난을 준비하고 홍총각, 이희저, 김창시, 김사용을 모아 군사를 꾸리고 가산 군수 정시가 눈치를 채자 봉기하여 한때 승승장구하지만, 역사대로 결국 송림과 사송야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기세가 꺾이고 마침내 정주성에서 갇혀 농성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수십년의 세월을 소설화했다. 역사적 사실을 위주로 한 소설이나 여기선 홍경래와 도모했는지 확실치 않은 박종일의 거사를 박종일과 홍경래가 젊은 시절 인연이 있었다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느 정도 연계가 있는 것으로 처리한다.

  • 홍경래의 난을 다룬 만화도 있다. <바둑 스토리>, <발바리의 추억>으로 유명한 극작가 겸 만화가 강철수 작가가 1970년대 중후반에 <민중 속의 혁명아>라는 제목의 문고판 단행본으로 발표한 작품으로, 작가의 명성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작이다[34]. 주인공 홍경래는 여자 친구인 '달래'를 사또에게 으로 빼앗기고, 과거에도 도전했으나 만연한 부정 행위와 서북인 차별로 불합격된다. 이후 임꺽정 관련 픽션 비슷하게 동료들을 모으는 과정이 길게 나온다. 비장한 결말이 인상적인데 정사와 같이 토벌대가 땅굴을 파서 화약을 묻고 터트리면서 정주성 성벽이 내려앉는다. 그러자 홍경래는 넋을 잃고 관군들이 물 밀듯 들어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 등 뒤에서 홍경래의 처자식들과 홍경래를 찾아 정주성으로 들어온 달래가 관군의 창칼에 찔리고 베여 죽음을 맞이한다. 홍경래는 모두가 죽고 모든 것이 끝난 뒤 관군 조총수들에게 집중 사격을 받아 벌집이 되어 죽는다.

  • 2016년부터 다음에서 연재되는 봉이 김선달에서도 다뤄지고 있다. 김선달의 제자가 홍경래 군에 가담하였고, 김선달의 일가와 임상옥 등이 말려든다.

  •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주인공인 홍라온이 홍경래의 여식이란 설정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남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8.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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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서대란이라고도 한다. 양서지역 : 평안도(관서)와 황해도(해서)라는 뜻.[2] 태양력 기준.[3] 정주성 공략이 장기화되자 유효원으로 경질되었다.[4] 곽산군수.[5] 1758~1812. 의주 의병장[6] 서북이라는 표현은 평안도뿐만 아니라 함경도, 황해도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때의 서북은 방위상 서북쪽이 아니라 서+북부.[7] 양반의 명백한 정의는 문반 및 무반 그리고 그들의 3대 자손까지로 오닐날로 치면 공무원과 군인이다. 물론 광의의 의미로는 지배계층이므로 오늘날에는 정치인, 재계 등도 포함되겠지만.[8] 소학은 아동용 혹은 입문자용 유학 교과서로 말하자면 초등학생용 교과서로 볼 수 있다. 즉 오늘날로 치면 "서북 지방에서는 공무원이나 군인들과 그 자식, 손자[7]들이 초등교육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라고 한 셈이다.[9] 웅진출판사의 "만화로 보는 한국의 역사"에서는 이희저가 이 매향에 말려들어서 중앙 정부에 반감을 품은 것으로 묘사했다. 돈만 주면 양반으로 만들어 준다길래 거액을 투자했는데 '천민이 양반이 되려 한다'며 반대가 심했고, 그 와중에 향임 등록비는 돌려줄 수 없다며 푼돈만 돌아온 것이다. 이에 이희저가 홍경래-우군칙에게 하소연하자 홍경래가 '수령 한두놈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왕조가 바뀌면 모를까'라며 포섭한다.[10] 이희저는 본래 역참의 역졸 또는 딸린 노비 출신이었다가 청나라와 사무역으로 치부를 해 벼락부자가 된 인물이다. 상인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체구가 크고 용력이 셌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비를 털어 용병을 사와 난 초기에도 이희저가 육성한 사병들이 주축이 돼 활약을 했다. 관련 매체에는 이희저가 돈을 많이 벌었음에도 무시를 당하는 신분제도에 불만을 품고 홍경래가 벼슬자리 준다는 꾐에 넘어가 재산을 홀랑 써버리고 죽었다는 서술이 많다.[11] 飢民, 굶주린 백성[12] 탐보라 화산 항목을 참조. 1809년에 전세계적인 이상 기후 현상(한랭화 효과)이 발생했는데 화산 폭발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13] 洪總角. 또는 홍봉의(洪鳳儀), 홍이팔(洪二八)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홍총각은 말 그대로 총각의 음차이고, 홍봉의는 나중에 가져다 붙인 이름이 아닐까 추정된다.[14] 이중에서 양반 출신은 몰락 양반으로 추정되는 이제초 1명으로, 나머지는 모두 농민 출신이다.[15]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당대에는 상당히 명성이 높았다. 인조 대에는 성균관 사업(정 4품)에 제수되었고 상당히 후대인 고종 대에 이조 판서로 추증(1883년)되기도 했다.[16] 당시 외척으로 안동 김씨 급은 아니지만 권세가 셌던 반남 박씨들을 말한다.[17] 혜성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807년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관측 기록이 자주 보인다.[18] 정감록 사상을 이용한 것으로, 홍경래는 정시수 또는 정제민이라는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의 명을 받아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정진인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따위는 그냥 밟아버릴 수 있지만, 자비로우신 분이라 대신 대리로 자신(홍경래)이 나섰다. 그리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이용하기 위해 명나라 유민이 함께 한다는 주장도 곁들였다.[19] 당연히 실제 반군의 수와 질을 뻥튀기한 과장이다. 그냥 5,000명도 몰래 양성하기엔 대단한 규모인데, 철기(鐵騎)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20] 패배한 뒤에 붙잡혔다. 사후엔 목이 효수됐다.[21] 영정조 시기 무관 고위직을 역임한 류진항의 아들로 조선 후기 무반 가문을 대표하는 진주 류씨의 일원이다. 난 이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및 삼도수군통제사, 좌/우포도대장을 맡았고, 사후 병조판서 추증 및 시호 무숙(武肅)을 받았다.[22] 상술했듯이 원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오군영에서 병력을 뽑은 순무영의 장으로 양서순무사 이요헌이 발탁되었으나 그는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후방인 한양에 남아 부사령관 박기풍과 류효원에게 일임한 상태였다.[23] 이 공성법은 오스만을 포함한 유럽에선 화학기술이 발전해 화약이 흔했고 실전사례도 있어서 자주 이용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최초의 시도였기에 폭약을 터뜨리기 전에는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사실 조선의 화약 생산량은 18세기 초에야 폭증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이런 전술을 시도도 못했으므로 당연히 효과를 의문시할 수밖에 없었다.[24] 이 처사가 얼마나 이례적이었는지는, 이후 난의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을 논공행상할 때 "반란군 중에는 마지못해 난에 참여한 사람도 있을 텐데 성을 함락시키자마자 무턱대고 2천 명을 모두 처형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며 정주성 전투를 이끈 유효원의 삭직을 비변사가 요청하여 윤허를 받은 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순조실록 1812년 6월 9일 자 기사[25] 大邑, 규모있는 도시[26] 실제로 반군은 각 고을마다 유진장(留陣將)이란 수령을 임명했다.[27] 조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으로 평안병사(平安兵使)의 본영이 있는 곳이다. 오늘날로 치면 군사령부가 있는 곳이라 보면 된다.[28] 하지만 정작 이만수는 이후 송림리 전투에서 패퇴하는 적을 쫓아 섬멸하지 않았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됐다. 이만수 입장에선 매우 억울한 것이 송림리 전투는 안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반군이 모이는 것을 보고 관군이 선제타격한 것으로 공격자인 관군이 병력수에서 더 열세였다. 기습의 이점과 때 맞춰 도착한 관군 지원군 덕에 겨우 이긴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 적을 섬멸하지 않았다하여 탄핵된 것.[29] 근현대사에서 반군이 정부를 무너뜨리고 국가지도 체계를 새로 만든 경우는 있는편이지만 대다수가 미국/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은밀한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며 반군 스스로가 정부를 무너뜨린 경우는 정부와 정부군이 너무 막장이여서 민심을 전부 잃었을때 밖에 없을때이다. 이 경우가 아프리카 일대에서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대개 정부군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유지하고 공격헬기나 전차들을 수입을 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정부군이 반군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게 기본적인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북한과 아프리카 일대의 군벌들이 있다.[30]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전황을 보면 조선군이 취한 전술은 당시 조선이 취할수 있는 최고의 전술이었다. 다만 전술로 극복하기 힘들정도의 화력차가 났을 뿐이다.[31] 일례로 삼국지에도 언급되는 마속이 대표적인 인물로 병서를 통달하고 총명해 공명의 총애를 받은 인재이지만 실전이 부족해 부관 왕평을 무시하고 산에 진을 쳤다가 승승장구 중인 북벌을 망친 케이스처럼 홍경래도 이론만 최강일뿐 실전에는 무능했다.[32] 당시 제주 지방에는 고, 양, 부 라는 세 성씨가 자리잡고 있었다.[33] 좀 더 정확히는 홍경래의 난과 김병연의 방랑 모두가 조선왕조의 하락세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라는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34] 다만 이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출판사가 명의만 갖다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