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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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홍국영(洪國榮)

덕로(德老)
본관
풍산 홍씨(豊山 洪氏)
출생
1748년(영조 24)
조선 한성부
사망
1781년(정조 5) 4월 28일[1] (향년 33세)
조선 강원도 강릉시
부모
부친 - 홍낙춘(洪樂春)[2]
모친 - 우봉 이씨 이유(李維)의 딸
형제자매
여동생 - 원빈 홍씨(元嬪 洪氏, 1766 ~ 1779)
부인
덕수 이씨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영조, 정조 시대의 정치가. 최초의 세도정치로 유명하다. 자는 덕로(德老). 본관은 풍산 홍씨.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는 10촌 사이다.


2. 생애[편집]


1772년 과거에 급제한 후[3],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 1774년 3월 동궁시강원의 설서(說書)[4]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측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772년 정조와 처음 대면해 빠르게 친해진[5] 홍국영은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73년 영조 곁에서 한림 역할[7]을 했다. 정조 즉위 이후 급작스러운 출세라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영조 또한 매력적인 홍국영을 좋아했고, 흔히 말하는 세도정치는 이미 영조 말부터 시작되었다. 1776년 정조의 즉위 직후 정후겸, 홍인한숙청할 때 사유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았다."와 "세손의 오른 날개(홍국영)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정조는 그를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1776년 3월 13일 동부승지(同副承旨)[8][9]가 되었으며 1776년 4월 13일 좌승지[10]에 앉았다는 기록이 있고 1776년 7월 6일 도승지(都承旨)[11]가 되었다.[12] 그렇게 5년을 도승지로 재임하면서 도승지=홍국영을 의미하는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훈련대장도 역임하면서 구선복을 비롯하여 당시 군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던 구씨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3] 그야말로 임금의 최측근으로서 이외의 여러 중요 관직[14]을 도맡았으며 규장각 설립 이후 첫 직제학으로서 초창기 일을 도맡았다고 하니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노론 벽파의 수장 김종수는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까지 말했을 정도.[15]

1778년 당시 정조에게 후사가 없자 이를 걱정한 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가 후궁 간택을 명했는데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그녀는 '원빈'(元嬪)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중전인 효의왕후 김씨가 새파랗게 살아있음에도 '으뜸 원(元)' 자를 썼다. 원빈 홍씨의 가례는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여 치러졌고 생전에 조정의 문안을 받는 등 후궁으로서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원빈 홍씨는 가례를 치른 후 1년만인 1779년 숨을 거두었는데 사후 '효휘궁'(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 죽어서도 그 이례적인 대접은 변치 않았다.[16] 홍국영은 이후에도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게 하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쳤다. 완풍군의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었다. 즉, '조선 조정과 홍국영의 집안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뜻이다. 이 일은 홍국영이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꼽힌다.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서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하고 여동생이 사망한 뒤에 더 이상의 후궁을 들이는 것에 반대한 것은 왕실의 혈통이 번성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고 전례없이 양조카를 들여서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은 정조를 성불구자 취급한 것이며 결정적으로 감히 방계군의 봉호에 본향을 명기한 것은 임금의 권위를 무시한 것으로[17], 이는 홍국영이 자신의 권세를 대놓고 연장하기 위해 정조를 모독한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행위는 도가 지나쳤기에 정조가 괘씸하게 여겼을 뿐더러 정조의 아내인 효의왕후 김씨,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원리원칙을 철저히 하는 정순왕후 김씨 등 왕실 사람들마저 홍국영을 싫어하고 불쾌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1779년 정조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조보(朝報)를 받아본다거나 '조정 일에 관여한다면 천벌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내용의 사직 상소를 올리고 이에 윤허받아 봉조하(奉朝賀)[18]에 제수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32세 밖에 안 된 젊은이가 봉조하에 제수된 기록적인 사건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홍국영은 봉조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임금의 총애와 그의 권세, 좌의정인 그의 백부 홍낙순 등의 존재[19]로 인해 조정이 한동안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 후 홍국영의 추천으로 조정에 오른 송시열후손이자 산림의 영수로 칭송받고 있었던 송덕상[20]을 비롯한 홍국영의 사람들이 "32세에 사직이 웬 말이냐?!"면서 홍국영을 복귀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고 홍국영은 내심 흡족해했다. 그런데 소론으로 정조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중신 서명선이 평소에 홍국영의 전횡을 싫어하였기에 홍국영을 두둔하는 행보를 밟지 않았고, 이에 홍낙순 이하 홍국영의 수하들과 집안 사람들이 그를 맹렬히 탄핵했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홍낙순을 내쫓고 홍국영도 유배보내 버렸다. 가뜩이나 왕족과 신하들의 원한을 많이 받았던 홍국영이 임금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그에 대한 온갖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조가 도성 바로 턱 밑인 제기[21]에 그냥 놓아두며 꾸준히 문안을 요구하는 전언을 내리는 등 몇 번의 왕래를 하였으나 정조가 초본을 작성했다는 김종수의 유배 상소를 시작으로 반대파들의 계속되는 상소를 받으며 도성에 출입할 수 없는 조치와 함께 강원도 강릉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비참하게 몰락한 홍국영은 실의에 빠져 살다가 결국 유배지 강릉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다. 다만 널리 알려진 가난한 이미지의 최후와는 다르게, 죽은 뒤 홍국영의 처분을 논하며 항의하는 신하들의 언사를 보면 죽을 때까지도 정조가 하사한 토지 600결을 가지고 있었고, 몰수해야 할 노비의 수가 100명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지내던 집도 꽤나 좋았던 모양. 홍국영이 죽기 전부터 이것들을 몰수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상소에 꾸준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응하지 않은 정조를 고려하면 사적인 정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로 보여진다. 홍국영이 쫓겨나고 나서 당시 그가 관여했던 기록들은 대부분 삭제되었다고 한다. 홍국영의 사후에 그의 사람이었던 훈련대장 구선복 등의 역모가 적발되었고, 상계군 이담에게도 반역죄가 적용되면서 풍산 홍씨는 그야말로 몰락의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홍국영과 함께 송덕상도 몰락했는데 문제는 이 때문에 정조 초반기, 희한한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송덕상이 삭탈 관직을 당하자 유생들이 통발로 반대 상소를 날리거나, 송덕상을 옹호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고했다가 잡혀서 유배간 신형하, 신형하를 옹호해 유배된 박서집 등 대다수가 유배를 갔다. 심지어 송덕상의 제자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다른 일로 유배갔는데 우연히 같은 유배지였던 박서집에게 계획을 털어놨다가 박서집이 겁먹고 고발해서 잡혔던 문인방 등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3. 여담[편집]


  • 홍국영이 정조의 측근이 된 유래를 설명하는 일화로 아래와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22] 이 야사가 유명해져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인지 홍국영이 낮은 하급 관리였다는 등의 설정이 덧붙여지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이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자치통감강목》(自治通鑑綱目) 중 한문제"짐은 고황제 측실 소생이었다(側室之子)" 발언을 적은 어구를 싫어했다. 어느 날 세손[23]이 영조에게 문안을 갔는데 영조가 손자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물었다. 세손은 별 생각 없이 사실대로 『통감강목』넷째 권을 읽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강목 넷째 권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구절이 있는데도 읽었단 말이냐?" 라고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그 말에 세손은 엉겁결에 "그 대목은 가려놓고 보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내관에게 명하여 동궁에 가서 세손이 읽던 책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세손의 속은 타들어갔는데, 임금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기군망상의 죄[24]가 되어 엄히 다스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관이 동궁에 가서 책을 찾자 홍국영이 책을 찾는 이유를 물었다. 내관의 말을 통하여 사태를 파악한 홍국영은 자신이 책을 찾아주겠다고 말한 뒤 문제의 부분을 종이로 붙여 가린 뒤 책을 내주었다. 이를 받아 본 영조는 흡족히 여겼고 세손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후 홍국영의 임기응변을 알게 된 세손은 이를 재생지은(再生之恩)[25]이라고 고마워하며 홍국영을 최측근으로 삼았다.
사실 영조는 강목이 아니라 《사기》 <노중련전>에 나오는 이모비야ㅊ[26]라는 어구를 싫어했다.[27] 실제 강목에는 저런 대목이 없다. 동시대 인물 채제공의 《번암집》에 위의 야사와 비슷한 기록이 남아있다.
영조가 말년에 항상 홍문관의 한림과 주서를 시켜서 옛 책을 소리내어 읽게 하여 듣고는 했다. 어느 날 승지가 먼저 읽고 다음에 겸춘추가 읽기 시작하였는데 다음 부분이 바로 <노중련전>이었다. 겸춘추가 문제의 "이모비야" 4자를 읽자[28] 잠을 자던 영조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벌떡 일어나 화내어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내 앞에서 그것을 읽는다는 말인가. 읽은 놈이 누구냐?" 겸춘추는 읽기를 멈추고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당시 세손으로 있던 정조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얼른 대답하였다. “신이 내내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그 4자 읽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읽어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정녕코 내가 들었는데 신료들이 듣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여러 신하는 세손의 대답을 따라서 한결같이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조의 안색이 조금 풀려서 다시 침상에 누웠고 신하들도 물러 나왔다.
《번암집》에선 그 직후 채제공이 정조의 아량을 극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드라마《홍국영[29],《옷소매 붉은 끝동》등에서는 이쪽의 기록을 토대로 재현하기도 했다.[30] 사실 이건 단순히 체제공이 쓴 야사만은 아닌게, 승정원일기에도 영조가 "내가 잠결에 정신놓은사이 내 앞에서 노중련전의 '그 대목'을 읽은게 아니느냐"며 의심을 하면서 신하들에게 역정을 내는, 번암집에 나온 일화와 같은 사건을 다룬듯한 기록이 있다. 이때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기 노중련전은 이모비야 해당 문구가 야사에서처럼 검열삭제된 채로 유통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신하들에게는 이게 굉장히 살벌한 얘기인것이 영조 12년에 왕에게 올릴 문서에 노중련전의 이모비야를 인용했다가 왕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당하다 죽은 사람도 있다. 노중련전 자체가 이렇게 영조의 역린에 가까운 책이라 괜히 저기서 체제공이 정조의 아량을 찬탄한게 아니었던 것이다.
  • 정조가 세손 시절에 쓴 존현각 일기에는 홍국영이 어염의 괴소문을 접하고 정조에게 보고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정조가 이를 어찌하면 좋냐고 묻자 더 캐고 올라가면 권귀(權貴)를 건드려 덧낼 수 있으니 포도청에 넘겨 엄히 캐물어 그 맥락을 알아야 한다고 신중히 조언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 맹꽁이 서당》에 의하면 홍국영이 친척인 홍봉한홍인한 형제를 찾아가서 아버지인 홍낙춘의 벼슬을 알아봐 달라고 청탁을 했는데 이 말을 듣고 홍인한이 "네 아비 같은 못난 밥벌레한테 줄 벼슬은 없다. 썩 물러가라."라고 크게 화를 내며 쫓아내자 홍국영은 홍인한에게 큰 원한을 품었다고 묘사된다. 홍낙춘이 왜 친척인 홍인한에게 멸시를 받았느냐 하면 홍낙춘은 술자리에서 배따라기 같은 노래들을 즐겨 불렀는데 조선시대에는 가수 같은 예능인들이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지 못하고 못난 광대라고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홍낙춘도 광대라며 멸시를 받았던 것.[31] 하지만 이후 홍국영의 출세 덕분에 홍낙춘도 덩달아 살아났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풍산 홍씨 가문에서도 홍봉한, 홍인한과 함께 세도를 누릴 수 없는 방계 쪽이었던 듯하다.[32] 홍국영이 홍인한을 죽이는 데 앞장선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인한은 "영안위[33] 자손 중에 저런 못된 인간이 날 줄 어찌 알았으랴! 필시 집안을 망하게 할 자로다."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홍국영이 본격적으로 입신양명하기 전에 굉장히 깔봤기에 홍국영이 그 사실을 알고 오랫동안 분노했었다고 한다.

  • 사도세자의 정실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여동생 원빈 홍씨가 죽자 그 배후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를 의심하여 그녀와 대립했다고 한다.[34]

  •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홍국영이 처음 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의 기록에 의해 정조의 뜻이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

  • 왕비 효의왕후독살하려던게 들통나서 쫓겨났다고 알려졌고 정조가 홍국영을 어쩔 수 없이 쫓아 보냈다고 했지만 유명한 이야기임에도 근거없는 이야기이고, 도리어 홍국영의 세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 구조는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한 것이다. 홍국영의 세도가 강할 시기에도 홍국영은 어디까지나 왕의 제어하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므로 반역자라기에는 사약은 커녕 이름만 있는 관직인 '봉조하'를 받고 허무하게 최후를 맞는다.

  • 죽기 직전에는 쓰러져 가는 오두막의 지붕 밑에 사는 굼벵이를 잡아먹고 살면서 길가던 행인들에게 걸핏하면 "저 놈을 귀양보내라", "저 놈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등 반쯤 미친 상태의 봉두난발 거지가 따로 없었고 오른쪽 눈 안에는 큰 점이 있어서 마치 눈동자가 3개로 보일 지경이었다고 한다.[35]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꽤 좋은 환경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여지니 해당 야사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편.

  • 미남이었다고 하는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언급이 있고 심낙수의 《은파산고》(恩坡散稿)라는 기록에도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외모가 준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승정원일기》에 시력이 좋지 못했던 노년의 영조가 옆에 있던 사관에게 홍국영의 생김새를 묻자, 사관이 매우 준수했다고 대답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존현각 일기에서도 풍모가 청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다. 흔히 홍국영의 초상화라고 떠돌아다니는 것들은 주로 동시대 정조의 충신 정민시의 것이다.
동궁께서는 (홍국영이) 나이도 비슷하고 얼굴도 어여쁘고 슬기롭고 민첩하다 여기셨으니, 벌써 세상에 난리가 난 때더라. 동궁께서 한 번 보시고 두 번 보시는 동안에 제우가 두터워서 지극히 무간한 사이가 된지라, 처음에는 요놈이 간계를 내어 동궁께 직간하는 체하나 실은 간하는 말이 모두 듣기 좋은 말이라. 강직한 사람인 줄 알으셔서 사귀기를 깊이 하신 후에는 못하는 바가 없더니 세손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 하인 이외에는 만나시는 것이 사부와 빈객과 궁관에 불과할 뿐이니, 그 자들이 강학이나 의논하지 무슨말을 하며, 하물며 조정의 일이나 외간 설화야 어찌 감히 한마디라도 수작하리요. 그래서 동궁께서 안타깝고 답답하여하시다가 국영을 만나자 아니 여쭙는 말이 없고 아니 아뢰는 말이 없으니, 신통하고 귀히 여기셔서 이전에 사랑하시던 궁관은 점점 멀어지고 국영만이 제일로 알게 되셔서 비유하면 사나이가 첩에게 혹한 모양이더라.

《한중록》

  • 심노숭의 《자저실기》를 번역한 《글쓰기 병에 걸린 어느 선비의 일상, 자저실기》에 10대시절 심노숭이 직접 본 홍국영의 외형이 이렇게 언급된다. "그의 키는 보통 사람에 미치지 못했으나 몸은 꽤 비대하였다. 외모는 모나고 뺨은 좁았으며 항상 불그레하였다.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걸을 때면 바로바로 발을 옮겼고, 말을 할 때면 팔을 걷어올렸다. 가까이 있으면 쏘는 듯한 기운이 있어서 잠깐 동안이라도 남들이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지금 떠올려보아도 여전히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든다."[36]

  • 일성록》 정조 즉위년 7월 7일 9번째 기사 중 정조가 "저 승선이 비록 체모(體貌)는 작지만 국량[37]은 크다"라며 홍국영에 대해 평한 기록이 있다. 체모는 '체격'과 동일한 뜻으로 따라서 홍국영의 체격이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정조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홍국영을 대단히 싫어해서 《한중록》에도 홍국영에 대해 실컷 욕했고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결론지었다.[38] 혜경궁 홍씨뿐만 아니라 홍인한[39] 역시 "우리 가문에서 저런 망령된 물건(妄物)이 나올 줄이야. 저 놈이 우리 가문을 망칠 놈이다"라고 한탄했으며 형 홍봉한[40]에게도 홍국영을 두고 "이 미친 놈(狂兒)에게 어찌 벼슬을 주어 등용하라고 하십니까?"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이 내용을 적은 편지가 홍국영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홍국영은 홍인한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홍인한은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고 한 것뿐만 아니라 세손 시절의 정조를 살해하려 한 전력까지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즉위할 경우 그 측근인 홍국영에 의해 제일 먼저 죽을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홍인한은 정조가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국영에 의해 사사되었으며, 그의 형인 홍봉한도 같은 해에 귀양갔지만 정조의 외조부였기 때문인지 사사되지는 않고 풀려났다.

  • 남의 눈치를 읽는 데 능했다. 1773년 영조가 이경양과 이상암의 발언을 의심하며 추궁하자 옆의 영의정 김상복이 열심히 말리는데 홍국영은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영조는 어차피 홍국영이 뭐라 하든 두 사람의 죄를 추궁할 생각이었고 영의정 김상복은 관직을 삭탈당했다. 1769년 홍국영이 정조를 만나기 전 별감 사건이 벌어졌는데 정조가 궁궐에서 튀어나가 관 기생집에 놀러간 사건이었다. 이를 안 혜경궁 홍씨는 정조를 크게 꾸짖었는데 정조는 이를 마음에 오래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국영이 혜경궁 홍씨에게 정조가 당시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있다.

  • 심낙수의 기록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시정잡배들과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시거나 장기를 두었으며 시조와 창을 잘했다고 한다. 당시 한양에 '나비야 나비야 청산 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또한 가자'라는 창을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을 정도였다.

  • 한국사의 이런 저런 가십거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정조에 대한 순애보적인 사랑을 보여 주었다 하여 게이 드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단 정조의 모후인 혜경궁 홍씨부터 말하길 "주상이 홍국영을 가까이 하는 모양새가 꼭 사내계집을 가까이 하는 모양새같다", "간사한 첩에 미혹된 것과 같았다"라고 홍국영에 대해서 '매우 잘생기고 언변이 뛰어나서 미모로 내 아들을 홀렸다'라는 식으로 묘사하며 정조와 홍국영이 각별한 사이임을 언급했다. 홍국영의 정조 사랑은 사직서에서도 나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인 부분은 "신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은 남자의 몸이니 전하를 위하여 뒷날의 도모를 할 수 없으나 신의 누이가 이미 입궁하였으니 다행히 자손이 번창하면 우리 삼전의 기쁨을 돕고 우리 성명(聖明)의 근심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신의 복이 적어서 신의 누이가 또한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라고 쓴 대목이다. 한마디로 '자기가 정조의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남자의 몸이라 그게 불가능하니 여동생을 대신 보냈다'는 소리다. 그러나 진지하게 임하자면 홍국영 역시 부인과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 일성록에 스쳐지나가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41] 물론 전근대시대였던 만큼 동성애자양성애자인 사람이 자신의 성 지향성을 숨기고서 이성과 가정을 꾸리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홍국영을 대상으로 한 게이 드립은 거의 농담에 가깝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의외로 일리가 있는 드립일 수도 있다.[42] 확실히 홍국영은 순전히 권력욕 때문에 상술한 행보를 보였다기엔 정조에게 이상하리만치 집착했고 아무리 여동생 원빈 홍씨건이 겹쳤다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권력이 거의 없었던 효의왕후[43]도 비정상적으로 증오하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모함할려다가 실각했다는 점에서 이상한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 내지는 세도정치를 할 뻔했다는 오명으로 평가는 좋지 않으나 1980년대 이후 재평가되는 분위기이다. 영조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감초처럼 등장한다. 좋게만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여러가지로 각색하기 매력적인 요소를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와 함께 이상을 펼치려 했다가 타락했다는 전개가 자주 등장한다.


4.1. 소설[편집]


  • 1990년대 초반 <조선일보>에 연재된 유현종 원작의 역사 소설 《사설 정감록》[44]정여립 반란 사건과 홍국영의 조상이 얽혀 있고 그 증거인 죽간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 풍수지리설이 조합한 작품인데 심심하면 나오는 나체 고문과 검열삭제 장면으로 파문이 일기도 했다.

  • 황인경 작가의 1992년 역사 소설 《소설 목민심서》 초반부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다. 정약용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지만 초반 1~2권은 정약용을 아끼는 정조의 회상으로 "쟤는 홍국영처럼 안 길러야지"라고 회상하는데 이 분량이 전체 소설의 1/4 가량이다. 황인경의 자료 조사는 실로 엄청난 수준인데 굼벵이 잡아먹고 눈 안에 점이 커졌다는 홍국영의 최후도 황인경이 야사를 채록한 덕에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다.

  • 2017년 출간한 의빈 성씨와 정조의 사랑을 다룬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홍국영의 인 '덕로'로 등장한다.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보필하며 권력의 정점에 오르지만 선을 넘는 행동으로 몰락한다.


  • 강희찬 작가의 2023년 역사 소설《의리주인》은 홍국영 삶의 전반기를 좇아 영조 정조 시대를 살펴보고 있다.


4.2. 만화[편집]



  • 윤승운 화백의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는 7권에 등장한다. 부친 홍낙춘 때문에 벼슬길이 변변치않았던 젊은 시절, 어찌어찌 궁궐에 들어간 뒤[45] 세손영조의 엄격한 교육과 세손을 해치려는 세력의 음모로부터[46] 필사적으로 지켜낸 유능한 면모, 그러나 정조가 즉위한 이후 권력의 맛에 타락해버려 세도 정치를 펼친 어두운 면과, 그로 인해 34세의 나이로 사망한 초라한 말년까지 다뤄졌다. 홍국영 바로 다음에 비중있게 다뤄지는 인물이 매우 대비되는 인품과 이력을 보낸 채제공이라는 점이 공교로운 부분.



4.3. 드라마[편집]


  • 1978년 TBC 드라마 《상노》에서는 배우 임동진이 연기했다. 권력다툼을 다루기보다는 홍국영의 집안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가 주류이다.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 편에서는 배우 김동현이 연기했다. 사실상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드라마의 후반부를 주도하는 캐릭터로 위기를 겪던 세손을 보필해 정조로 즉위하게 하고 정적들을 제거하는 등 큰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보이지만 차츰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삼는 등 권력의 정점으로 오르려하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홍국영의 퇴장과 함께 드라마도 종료된다.

  • 1991년 KBS 드라마 《왕도》에서는 배우 김영철이 연기했다. 검열삭제 부분은 당연히 안 나오고 원작을 가장 잘 구현한 작품으로 김영철의 열연을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방영 당시 그다지 인기는 없었고 홍국영을 너무 미화했다고 사극 속 역사 왜곡으로 본다고 하는 사학자의 책도 나온 바 있다. 마지막회에는 유배지에서 정조 임금이 찾아오는 환상[47]을 보며 홍국영이 기뻐하면서 "전하! 오셨군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유언을 남기며 그대로 숨을 거두고 지인이 슬퍼하는 마무리로 끝난다.

  • 2001년 MBC 드라마 《홍국영[48]에서는 배우 김상경이 연기했다. 사극인데도 지나치게 현대적 분위기에다 자주 삽입되는 무협 장면도 극의 사실성을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결과 시청률 저조 탓인지 40부작만에 조기 종영되었다.

  •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배우 한상진이 연기했다. 정조의 세손 시절 때부터 온갖 위기를 이겨내는 대담한 책사로 대활약하다가 정조 즉위 후에는 자기 권력 강화에 집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작품에서 워낙 정조의 고생이 심한지라 이를 극복하는 조력자인 홍국영의 활약도 엄청난 편. 전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홍국영 루트를 따라가지만 마지막에 자신이 정조를 배신했다는 것에 대해 참회한다는 점이 차이점. 혜경궁 홍씨가 홍국영에게 우호적이라는 점도 역사와는 큰 차이다.

  • 2011년 SBS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는 '양초립'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본래 이름인 홍국영으로 돌아갔다.

  • 2021년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배우 강훈이 연기했다. 정조의 최측근으로 등장하는데 원작 소설처럼 '홍덕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홍국영이 평소 미남자였다는 사실을 반영해서 아역 캐스팅에서부터 제작진이 공을 들인 티가 난다. 궁녀들에게 인기많고 성덕임과도 친하게 지내는 사근사근한 성격의 미남이지만 본모습은 성덕임이 동덕회 회합 장소로 오자 서슴없이 죽이려 하는 냉혹한 성격이다. 이후 끔찍히 아끼던 여동생 원빈 홍씨의 죽음으로 완전히 폭주해 중전인 효의왕후를 모함할려다 들통나면서 정조에게 버림받는다. 그러나 정조의 마지막 정으로 유배나 파직이 아닌 스스로 사임하는 선에서 처벌을 끝낸 이후 조용히 서민의 삶을 살다가 병사했다. 정조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권력을 중시하는 면모도 있으며 결국 몰락했지만 정조의 마지막 배려로 나쁘지 않은 곳에서 생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까지 실제 역사에 부합하다.


4.4. 영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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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4월 5일[2] 선조의 부마 홍주원의 5대손.[3] 영조48년 정시(庭試: 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4]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던 정7품직[5] ‘오늘은 신이 임진년에 성명(聖明)을 처음 만난 날입니다.’,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9월 26일 정미 1번째 기사.[6]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정9품직} 후보자에 대한 특별 시험을 말함. 적임자를 선발하여 임금께 아뢰면, 왕명으로 시(詩)•부(賦)•논(論)•책문(策問) 등의 시험을 보아 합격자를 임용하였음.[7] 1773년 4월에 한림소시(翰林召試)[6] 합격[8] 정3품 당상관직, 승지로서 당연직으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임, 주로 공방(工房)담당[9] 1773년에서야 初職을 시작해서 불과 3년만에 정3품 당상관직에 올랐다는 것인데, 이는 조선 전기 세조 시기의 구성군 이준, 남이와 비견될 수도 있을 정도이다.[10] 주로 호방(戶房)담당[11] 승정원의 장이자 홍문관의 직제학(直提學)과 상서원(尙瑞院)의 정(正)을 겸함, 주로 이방(吏房)담당[12] 무조건 1단계씩 거쳐서 승진하는 승정원의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최말단인 동부승지에서 넘버2인 좌승지까지 일주일에 1단계씩 승진한 셈.[13]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을 이유로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하였는데,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14]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규장각 설치 이후 첫 임명),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15] 김종수는 정조를 보좌하며 홍국영과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가 정조가 홍국영을 숙청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16] 홍국영의 몰락 후에야 1786년 '인명원'과 '효휘궁'의 이름은 강등되었다.[17] 봉호에 본향 표기가 가능한 것은 상보 급인 국구나 최고급 공신 뿐이다.[18] 조선에서 종2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의 관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퇴직시에 받는 명예직으로 실제 정사는 보지 않고 예식 등에만 참여하였다. 현직보다는 적지만 녹봉도 지급된다.[19] 홍국영이 사직하면서 숙위소도 혁파되었으나, 홍낙순은 이때 좌의정에 임명됨[20] 송시열의 현손자이지만 학문적인 성취나 수준은 할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어서, 정조가 재위 초에나 좀 쓰다가 그리 미더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제자들 관리도 잘 못했는지 송덕상이 홍국영의 일로 옥에 갇히자 그의 제자였던 문인방, 이경래 등이 《정감록》 같은 도참서를 이념으로 삼고, 스승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일으킬려다가 주살당했고 송덕상도 이 사건으로 다시 옥에 갇혀 울분을 토하다가 분사했다.[21] 현재의 동대문구 제기동[22] 이 야사가 과장되어 《자치통감강목》을 영조가 금서로 지정했다는 말이 덧붙여지기도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자치통감강목》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주자가 '강'(綱)과 '목'(目)이라는 항목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책인데, 조선 사회에서 《자치통감》과 주자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 위치는 결코 낮지 않았다.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경연에서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을 자주 진강할 정도로 이 들을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이다. 심지어 영조는 세손에게 《강목》에 대해 질문하고 그 대답을 칭찬한 적도 있다.[23] 훗날의 정조[24] 임금을 속인 죄[25] 다시 살아나게 한 은혜[26] 네 어미는 종년이다.[27] 전국시대 제나라 위왕이 이름뿐인 주나라 천자 주현왕을 꾸짖으며 한 말이다. 이 발언을 제위왕이 한 연유는 전국시대 당시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바닥을 쳐서 아무도 입조를 오지 않았고 제후국에서 조공도 제대로 바치지 않았으나 오직 제위왕만이 주현왕의 전왕인 주열왕에게 입조하였다. 그 덕택에 명분에서 우위를 얻은 제나라는 제위왕의 훌륭한 정치와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날로 강성해져 갔다. 이후 주열왕이 죽고 주현왕이 즉위했을 때 제위왕이 늦게 도착했는데 이때 주현왕이 제위왕을 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제위왕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주현왕을 이렇게 한 것이다. 노중련의 말에 따르면 이 발언으로 제위왕만 오히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실권 없는 천자라지만 그렇게 주나라를 섬겨놓고서는 천자가 그를 처벌한다고 하니 대놓고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을 모욕한 대역을 저지른 이상한 꼬락서니가 되었기 때문이다.[28] 전체는 질차(叱次) 이모비야(爾母婢也)로 여섯 글자다. "'네 어미는 노비다'라고 꾸짖었다"는 뜻이다.[29] 해당 영상[30]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채제공의 기록을 반영하고 위 야사를 변형시켜 영조가 읽지 말라 한 책을 《사기》 <노중련전>으로 바꾸었고, 여주인공 생각시 '덕임'의 기지로 책을 찢어 보냈는데 홍국영이 이를 자신이 했다고 거짓말한 것으로 설정한다.[31]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예능인들은 딴따라라고 불리며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32] 홍인한과 홍국영은 6대조가 같은 10촌 할아버지 손자뻘 관계다.[33] 홍주원. 선조의 사위로 인목왕후의 소생인 정명공주의 남편이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과 홍국영 집안은 모두 홍주원의 후손이다.[34] 드라마 《이산》에서는 이 부분을 따와 원빈 홍씨 사후 효의왕후와 홍국영이 대립 관계가 되는 걸로 그렸다.[35] 이는 '결막모반'(conjunctival pigmented nevus)이라는 현상이다. 눈을 자주 비비거나 눈이 먼지에 자주 노출되면서 결막이 자극되면 생긴다.[36] 다만 비대(肥大)하다는 표현은 번역자가 새로 덧붙인 의역으로, 원문 한자는 體幹頗磅礴 (신체가 자못 방박하다) 이다. 여기서 '방박하다'는 형용사로서 크고 단단한 모양을 뜻한다. 번역자 의역대로 비대한 몸집일 수도 있으나 원문은 '방박하다' 하였으니 작은 키에 비해 몸집이 크고 단단했으며 비리비리한 인상은 아니었다는 수식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측된다. 심노숭은 기해년(1779)에 둘째 외삼촌집을 방문하였는데 때마침 홍국영이 이곳을 찾았고 심노숭은 이날 홍국영을 처음 봤다고 한다.[37] 일을 능히 처리하는 힘[38] 혜경궁 홍씨가 홍국영을 욕하기 위해 쓴 말이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작은 것에 구애되지 않았고 상당히 담대한 성격이었다는 의미도 된다.[39]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의 이복동생.[40] 혜경궁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41] 애초에 10대 초중반에 혼인하는 게 당연시되었던 조선 시대에서 홍국영의 나이에 자식은 그렇다 쳐도 아내조차 없는 게 더 이상하다.[42] 사실 전근대시대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자신의 성지향성을 숨기고 혼인하여 자손을 두는 경우는 그다지 드물지않다. 일례로 동성애자아이슬란드의 전(前) 수상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커밍아웃하기 이전에 남성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얻었고, 호주 출신의 방송인인 샘 해밍턴의 아버지도 동성애자였던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이는 동성결혼의 합법화는 고사하고 성소수자들이 양지에 나와서 활동할 수 있게 된 시기가 동서를 막론하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탓이 크다.[43] 다만 아이만 낳지 못했을 뿐 시할머니 정순왕후와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신임받았고 정조와의 사이도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의빈 성씨가 정조가 평생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라면 효의왕후는 정조와 살얼음판을 걷던 세손 시절부터 동거동락한 오래된 좋은 친구에 가까웠다.[44] 《풍운정감록》이라고도 한다.[45] 그 과정이 깨끗하지 않았다고 묘사된다. 과거 시험 심판관의 집의 청지기를 매수해 홍국영의 시험지에 미리 합격 표시를 해놨다고.[46] 화완옹주, 문 소의, 홍인한, 정후겸 등. 이 중 홍인한은 아버지 홍낙춘을 들먹여 자신의 벼슬길을 막았다며 더욱 이를 갈고 있었다.[47] 사실 유배지로 찾아온 지인을 잘못 본 것.[48] 이재갑 연출, 임충 극본. 최불암이 영조, 정재곤이 정조, 정웅인정후겸이라는 후덜덜한 배역을 자랑했다. 크레딧에서는 역시 《사설 정감록》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지만 원작과 관련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