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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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에 전시된 화랑의 복식[1]
1. 개요
2. 유래
3. 조직
4. 주요 활동
4.1. 수양
4.2. 교육
4.3. 호국
5. 정체성
7. 의의
8. 후대의 계승
8.3. 화랑의 몰락, 변질, 그리고 융화
10. 유사 기구
10.1. 청소년 수련단체
10.2. 무력 집단
10.2.1. 외국
10.3. 교육 기관
10.3.1. 한국
10.3.1.1. 국립
10.3.1.2. 사립
10.3.2. 외국
11. 문서가 개설된 화랑 목록
12. 현대 창작물
12.1. 소설
12.2. 영화
12.3.3. 대왕의 꿈[2]
12.3.5. 해신
12.4. 게임
12.5. 만화
13. 같이보기


1. 개요[편집]


한자
花郞[3]
영어
Flower Boy, Flower Knight, Hwarang[4]
화랑은 고대 신라에 있었던 소년들로 이루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 단체이다. 주 목적이 심신 수련이지만 사실 창설 초창기부터 주 목적은 관리, 군인 양성이었다. 소년뿐만 아니라 젊은 청년들도 많았다.

실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으므로, 사실상 국가가 운영하며 주도한 소년병 제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화랑들끼리 주도해 전쟁에 참여하였다.

화랑은 전신 원화의 편성 목적에서 알 수 있듯 전국의 인재를 화랑의 매력으로 모으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렇게 모인 인재를 화랑과 휘하에 모인 낭도들 간의 공동 생활로 결속력과 단합력을 다지고 교육하여 그 중에서 능력이 우수한 자를 천거해 뽑아 신라의 군인 즉 문무관직에 올리는 역할이었다. 즉 교육과 선발이 하나로 합치된 관료 양성 시스템으로도 작용했다는 것. 이런 교육과 인재 등용 목적은 682년 국학이 설립되면서 일정 부분 그 역할을 넘겨주었지만 그 이후에도 신라 말기까지 전통적 교육 제도로서는 계속 기능했다.[5]

화랑은 내면의 수련뿐 아니라 외면을 가꾸는 것 역시 중요하게 보았으므로 단순한 수련 단체를 넘어 현대로 치면 나라를 대표하는 홍보대사에 해당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특이사항으로 화랑의 외모에 관한 서술이 삼국사기에 서술되어 있는데 「신라본기」4 진흥왕37년를 보면, 곱상한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라고 적혀 있다.

한편 화랑이 창설된 6~7세기 신라는 주변국[6]과 전쟁이 계속되고 안보가 매우 불안했기 때문에 화랑은 위급한 상황에서 예비군, 학도병 역할로 동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영남 지역에서 남자 무당을 '화랭이'라 하고 그 무당의 연주 집단을 '냥도'라고 불렀는데, 이는 각각 화랑과 낭도로부터 비롯되었음이 유력하다.


2. 유래[편집]


그 시작은 진흥왕 때로 기원은 신라에서 제일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7] 둘을 뽑아 그들을 매개로 인재를 모으는 원화 제도였는데, 두 여성 원화 남모준정이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한 나머지 살인 사건이 일어나 원화 제도는 폐지되었고, 이후 같은 역할이지만 여자 대신 곱상한 남자들을 모집해서 화랑이라고 부르게 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화랑 제도를 만들었다는 576년 이전에도 사다함 같은 화랑이 존재하였으므로 이전부터 신라에 비슷한 개념의 청소년 조직이 존재는 하고 있었고, 삼국사기 576년의 기사는 화랑 제도를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진흥왕 말년인 576년 한 해에 원화를 만들었다 없애고 다시 화랑을 창설했다고 되어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원화를 만들었다 폐지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 화랑을 만들었다고 되어있어서 1차 사료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 진흥왕 시대는 과거 경상북도와 주변 일대에 머물던 신라의 영토가 고구려, 백제, 가야와의 전쟁 승리를 통해 함경남도경기도, 경상남도 등 3~4배 이상으로 늘어났고 통치하는 백성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획득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능력을 갖춘 관료가 '갑자기 많이' 필요했으며, 마침 진흥왕 재위 후반에 화랑제도를 창설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화랑의 교리를 담은 경전 '선사(仙史)'라는 책이 있었다고 하며,[8] 책 자체는 현대에 전해지지는 않지만 삼국사기에서 간추린 내용상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고, 사회와 동떨어진 가르침이 아니라 백성들과 밀접하고 교화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주보돈 교수는 진흥왕 재위 후반부에 창설한 화랑 제도는 바로 당시의 대신이던 거칠부가 주도해 추진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거칠부 본인이 어릴 적 승려로 출가해 지식을 쌓거나 유명한 승려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적국 고구려 땅까지 포함해 천하를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경험을 쌓은 뒤 조국으로 돌아와 인재로서 활약하는 생애 전반부 자체가 훗날 화랑의 교육과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마침 화랑제도를 창설한 진흥왕 말년 시기에 거칠부는 이사부의 뒤를 이어 최고위직에 있었으므로 충분히 임금에게 이런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할 수 있는 위치였기도 하다.


3. 조직[편집]


화랑도 조직은 여러 곳에 퍼져 있었고 각각 우두머리격인 1명의 화랑이 있었는데 이 화랑은 주로 귀족의 자제로 이뤄졌으며[9] 화랑들을 통솔하는 총지도자격인 위치로 국선(國仙)이 있었으며 국선에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 김유신도 국선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국선이 되려면 무조건 진골 아니면 성골이어야만 하며 6두품 이하는 국선이 될 수 없었다[10] 그리고 이 위에 화랑들을 관리하는 '화주'(花主)가 있다.[11][12]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화랑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할 뿐 자세한 기록을 찾기 어려워서, 현대 창작물들은 대부분 자세한 설정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일종의 '설정집'처럼 참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영향으로 화랑의 수장의 명칭을 풍월주라고 알고 있는 경우도 많으나 삼국사기에는 화랑의 직제나 우두머리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풍월주라는 단어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삼국유사에서는 국선(國仙)이라 나오는데 여기에도 풍월주는 등장하지 않는다. 풍월주라는 명칭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제외하면 15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다만 국선이 딱히 화랑의 우두머리 같은 것이 아니라 화랑과의 동의어, 이칭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각 화랑도 조직들은 화랑 아래에 평민부터 하급 귀족으로 구성된 '낭도(郎徒)'를 적게는 수십 이상, 가장 많게는 수천 명 단위까지 거느리고 지휘했으며,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진 단체를 향도(香徒)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향도로 김유신을 중심으로 모였던 용화향도가 있다.[13] 이들은 미시랑 설화에서 보이듯 불교의 미륵 사상과 일체화된 존재로 종교적 신성성까지 갖추어 신라 사람들에게 경외시되었다.

화랑도 조직의 교육은 주로 승려가 담당했다. 승려는 기본적으로 한문 불경을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다, 불교가 이제 막 서역과 중국에서 도입되던 고대에는 중국이나 일부는 서역, 인도까지 유학을 가장 활발히 다녀오는 계층이었고 그들은 유교와 도교까지 같이 접하고 도입하며 삼교에 능통한 고대의 지식인 계층이었으므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었다. 다만 승려는 큰 범주에서 보면 화랑도 조직의 일원이긴 했지만 정식 구성원은 아니고 미성년인 화랑과 낭도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교사 역할을 하였다.


4. 주요 활동[편집]



4.1. 수양[편집]


화랑의 수양 방법으로 기록된 것은 아래와 같다.


화랑은 낭도들을 데리고 신라 땅 이곳저곳 금강산, 지리산과 같은 깊은 명산과 계곡을 유랑하며 국토애를 기르고 심신을 단련하였다. 모험이라고 하면 뭔가 RPG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깊은 산 속 바위에 화랑들이 'A랑과 B랑 왔다감' 하는 식으로 새겨놓은 것이 지금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런 명산대천을 답사하는 것은 화랑의 활동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지, 기록 상으로도 거리가 멀어도 화랑이 안 간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고(遊娛山水, 無逺不至. ) 지금까지도 화랑이 왔다 갔다고 남겨놓은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전해오고 있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건 임신서기석이나 울주 천전리 암각화 등. 울진군 쪽에도 있으며 대체로 경주에서 가까운 원 신라 영토에 많지만 금강산 삼일포 같은 곳에도 있을 정도다. 허구헌 날 고구려, 백제와 싸움을 벌이던 신라였고 산에 산적은 물론 호랑이표범 같은 맹수들도 떡하니 버티고 있던 시대이니 아직 어린 화랑들끼리 으슥한 곳을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던 것.[14] 실제로 부례랑처럼 북쪽 국경지대로 유람을 갔다가 도적에게 납치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는 나당전쟁도 끝난 이후인 효소왕 시절이였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제천시 점말동굴[15] 등 전국 각지에 화랑의 주요 성지순례 장소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당시 여러 화랑들이 직접 새긴 이름이 남겨져 있다. 참고로 이 화랑들의 이름을 화랑세기에 있는 인명과 교차검증을 하였으나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4.2. 교육[편집]


미디어의 영향으로 화랑이라고 하면 아래 단락처럼 무력 쪽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은 학문적인 수련도 했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풍류(風流)의 도'라는 화랑 이념의 사상이 있고 '선사(仙史)'라는 책에 그 사상이 자세하게 전한다고[16] 하고 있지만 선사라는 책은 고려시대 이후로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유불선 3교를 포괄해 중생을 교화하는 내용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적당히 섞여있는 사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물 임신서기석에 의하면 사서삼경 같은 유교 경전 공부도 했으며, 많은 향가를 짓는 등 문학활동도 했다. 향가라는 것 자체가 짓고 이해하려면 한자의 음과 훈, 한국어의 언어학적 지식 둘 다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공부가 반드시 필요했다.


4.3. 호국[편집]


나라가 어려울 때는 학도병처럼 화랑이 실전 전쟁에 나서기도 했다. 다만 화랑의 본래 의도는 세계의 고대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청·소년층 집단교육 풍습이 국가기관화된 것으로 삼국 말기의 전쟁에서의 활약은 대부분 보조 병력으로 참여하는 위주로 부수적이었다. 워낙 신라의 국방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보니[17] 화랑이 나서는 일이 많아졌고, 어린 화랑이 공을 세우는 '특별한 상황'이 기록에 많이 남았다. 즉 본업이 군인이 아니고, 황산벌 전투관창은 화랑으로서도 상당히 특별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기록에 남은 것이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현대로 치면 한창 공부하며 성장하는 청소년 계층이었고 전쟁에는 황산벌 전투 같이 대단히 중요한 전투거나 나라가 위태한 상황에만 제한적으로 참가했던 것이다. 그 외에 화랑 병력이 참여한 가야멸망전이나 김헌창의 난 기록을 보면 어디까지나 '우리도 싸우겠다'고 윗선 책임자들한테 간청해서 보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692년에 부례랑말갈족에게 납치되자 안상(安常)[18]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1천여 낭도들이 겁을 먹어 어쩔 줄 몰라했다는 기록을 들어 통일신라 들어 화랑이 문약해졌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실 화랑이 전문 무사집단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통일전쟁이 끝나고 20년 가까이 지나서 평화로운 시대밖에 겪어보지 못하고 대부분 일반 청소년에 불과한 낭도들이 이민족과의 싸움에 겁을 먹어 바로 목숨 걸고 나서지 못한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김헌창의 난 때는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종군을 요청해 휘하 낭도 병력으로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5. 정체성[편집]


단재 신채호는 화랑을 전쟁에 나타나는 사료를 바탕으로 무사 집단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이러한 무사집단 및 사회적 중추 인재 양성집단의 성격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유는 당연히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정신 고취와 상무적 기풍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대적 연구가 보다 축적된 지금에는 귀족자제 출신인 화랑과 하층민 쪽 출신인 낭도가 모인 청년 집단으로 본다. 여기에 추가로 종교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고 보는 정도이다. 주로 난랑비서문, 화랑이 신궁제사에 참여하거나, 국선(國仙)이라는 호칭이나 용화향도라는 기록 등에 근거하는 것인데, 고대사회에서 종교의례의 집전은 지배층과 관련이 깊다는 점[19]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지도.[20]

이러한 미성년 남성들의 집단생활이나 단체 활동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습속이며 남방계 원주민 아이들의 합숙이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또래집단, 독일의 부르센샤프트 즉, 소규모봉건집단에서의 우두머리(마스터)의 집에서 생활하는 것, 그리고 일본의 와카슈 전통에서 나타난다. 특히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성도 아닌 연령의 남자, 즉 와카슈(약중)를 자연의 거친 성질로 비유한 황신(荒神)의 대표자로서 인식하고 이들을 이끄는 와카슈 가시라(약중두)를 정점으로 하여 마을 생활의 한 축을 담당하게 하는 일본식 와카슈 전통은 화랑의 판박이라 할 수 있다.

화랑의 화장하고 산천을 떠도는 행위는 바로 이 숭신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들이 전사역할을 하는 것은 무리의 물리력의 대표로서 사역하는 일이 된다.

6. 세속오계[편집]


자세한 것은 세속오계 문서로.

  •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죽이고 살리는 데에는 가림이 있다.

도덕 교과서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침으로 삼고 숭상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 이게 화랑 전체의 계율이라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에게 계율을 받은 건 사실이나 화랑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젊은 지식인으로서 삶의 지침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21] 헌데 신라시대 청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랑으로 치부하고 화랑 전체의 규율로 일반화시켜 버렸다. 다만, 김원술의 예를 보면 아무 상관없는 건 아니고 꽤 널리 알려진 계율이기는 했던 듯하다.


7. 의의[편집]


이래저래 말이 많긴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화랑이 삼국통일에 일조한 신라의 청소년 수련 시스템 중에 하나였다는 것.

많은 통일 공신과 장수들이 화랑 출신이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화랑 제도의 인재 양성 효과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비록 골품제에 기반한 철저한 신분 사회인 신라였지만 화랑과 낭도는 서로 다른 신분의 청년들이 같이 모여 공부하고 수련하러 돌아다니면서 유대감과 결속력을 쌓았기에 신분 계층 간 갈등을 적절히 조절하여 국가적 재난 앞에서 서로 단결하는데 꽤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면 모죽지랑가의 주인공 죽지랑은 자기 낭도가 부(部)의 일로 징발되어 끌려가자 술과 떡을 들고 찾아가는 한편 책임자에게 그의 휴가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우두머리인 화랑과 아랫 사람인 낭도 간에 신분을 초월한 책임감과 유대감이 있었다는 예로 꼽히고 있다.

다만 모죽지랑가의 배경설화를 보면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화랑도 조직 자체에 상당히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삼국 통일 전쟁에 참전하고 국선까지 지낸 유명한 화랑의 간곡한 부탁을 일개 지방 호족이 무시하다가 뇌물을 2차례나 받고서야 겨우 들어준다던지, 그 보복을 한답시고 화랑 측에서 왕을 움직여 그 호족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죽이고 연좌제를 걸어 그 호족과 동향인 인사들을 전부 공직에서 추방했다던지 등 당대 이미 만들어진지 백여 년이 지났던 화랑도의 폐단의 사례가 모죽지랑가의 배경설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통일기에도 간간히 전란이 일어나면 화랑은 활약한다. 김헌창의 난에서는 화랑 명기안락이 자신의 낭도 무리를 이끌고 반란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것.

참고로 일부 인터넷 상에서 화랑이 후기에 남창이나 사병 집단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도 떠돌고 있으나 본디 진골이나 6두품 귀족 출신들이 모인 화랑이 '사병'이 되었다고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에 가깝다. 성장해서 사병들을 '지휘하는' 입장이 됐다면 몰라도. 전쟁이 끝난 후 눈에 띄는 기록이 없다고 해서 화랑이 지위가 낮아졌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답이 없다. 당장 헌안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후에 왕이 된 신라 경문왕이나,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도 엄연한 화랑 출신인데, 화랑이 약화되었거나 또는 남창으로 전락했다면 왕좌까지 가는 루트를 타기는 어려웠을 터. 화랑에 대한 동성애적 코드를 현대적 시각 하에서 확대해석한 것에 기인한 심각한 오류이다. 당장 그런식으로 기술된 역사서도 없다. 일본에서 화랑들을 창부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반박도 있으니 참고하면 괜찮겠다. 보통 역사에서 외모가 뛰어난 집단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경우에는 이런 낭설이 쉽게 떠돌기도 한다.

애초에 화랑은 무사 집단이나 정규적인 군사 자원이 아니다. 당장 삼국사기에서 인용된 화랑세기의 구절인 "어진 보좌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겼다"를 봐도 화랑이 단순히 무사 양성소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당장 임신서기석만 해도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학문적인 맹세만 쓰여져있다. 기본적으로 화랑은 다양한 신분을 가진 수천 명의 아이들이 산을 뛰놀면서 학문과 무술을 서로 갈고닦아 결속을 다지고 문무 양면의 능력을 키우는, 신라판 보이스카웃과 비슷한 것이다. 애초에 사병으로 쓴다고 해도 당연히 20대의 건장한 병사들을 쓰지 무슨 이유로 기껏해야 1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밖에 안되는 젊다 못해 어린 아이들을, 그것도 귀족층도 포함된 화랑을 사병으로 쓰겠는가.


8. 후대의 계승[편집]



8.1. 고려시대[편집]


복희씨가 천하의 왕이 된 이래, / 自伏羲氏之王天下

태조삼한의 왕이 된 것보다 높은 것이 있는가? / 莫高太祖之三韓

막고사산에 있는 신인은, / 邈姑射山之有神人

분명히 월성의 네 사람이다. / 宛是月城之四子

(운운)[22]

복숭아 꽃이 흘러간 물은 없어지고, / 桃花流水杳然去

참된 발자취는 비록 찾기 어렵지만, / 雖眞跡之難尋

고가의 유속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 古家遺俗猶有存

황천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믿는다! / 信皇天之未喪

(운운)

의 조정은 아니래도, / 非高[23]

之庭

백수를 통솔하는 노래의 예를 얻으니, / 得詣百獸率舞之列

무릇 의 선비들이, / 凡周[24]

之士

모두 소자유조의 노래를 부르고 있도다. / 皆歌小子有造之章

- 파한집 권하에 기록된 고려시대 선랑에 관한 표문. 곽동순 作.[25]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화랑제도가 부활하지는 못했지만 신라의 화랑 문화가 어느 정도 계승되었다. 국왕이 팔관회에서 신라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하면서 귀족 자제 몇을 뽑아 춤을 추게 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를 선랑이라 하였다. 무당들이 굿판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이는 고려시대 불교의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려가 신라 불교의 전통을 받아들였다는 자의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인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화랑들이 모여서 승려들의 지도를 받고 학문을 연마하던 것처럼 고려 사회에서도 승려 밑에서 글을 배우던 사람들 중 얼굴과 머리카락이 고운 남자를 선랑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 이들은 불교신앙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조직인 향도에 구성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어릴 때는 반드시 승려를 따라가 글을 익혔는데, 그 중 면수(面首)의 경우 승려든 속세 사람이든 모두 그들을 받들어 선랑(仙郞)이라 불렀고, 따르는 무리들이 때로는 1백 명이나 1천 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충렬왕민적이라는 인물은 천성이 명민하고 용모가 훤칠하여 한번 본 사람은 모두 사랑할 정도였고 충렬왕이 이 소식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국선으로 지목하였다고 한다. 즉 고려 후기인 원 간섭기까지도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들과 같은 화랑제도의 기본 뼈대에 해당하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 외에 귀족 자제의 호송임무를 맡은 잡류직[26]을 선랑이라고 부르거나 # 고려시대 행사의 연행자(진행자)를 선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

특기할 만한 점은 고려시대에는 화랑이라는 말은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고 주로 선랑으로 지칭된다. 팔관회도 고려시대에는 불교적 색채가 옅어지고 토속문화 혹은 도교적 색채가 다소 강해졌던 것처럼 화랑의 경우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예종(고려)서경(현 평양시)의 용덕궁에 들러 내린 말에 의하면 고관자제들이 국선이 되는 걸 기피하게 되었다고 언급하는데 공식 출세코스이자 사회의 핵심조직이었던 신라의 화랑제도와는 달리 선랑문화는 일종의 민간풍습으로 명맥을 이어가게 되면서 음서과거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고 또한 유교적 색채가 강해진 문벌귀족 자제들이 기피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군사교육제도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화랑제도와는 달리 선랑문화는 그러한 성격은 완전히 탈피하게 된다.


8.2. 조선시대[편집]


조선시대에 들어서 재야의 주술사나 무당들을 화랑, 화랭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그런 표현이 남아있다.[27] 이 밖에 고려시대의 토속 신앙 성격의 향도 조직과 난랑비서문과 조선조 단학파의 삼교합일적 철학 사상과 연결지어서 종교적 계승성을 보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신라시대의 화랑 조직 그 자체와는 거리가 멀어 우리가 아는 화랑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8.3. 화랑의 몰락, 변질, 그리고 융화[편집]


호림공(虎林公)에 대한 피휘 문제로 박창화의 『화랑세기』에 대한 진위 논란이 생기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상고 시대를 다룬 기록물이 대부분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아 큰 아쉬움이 따른다. 그러나 마음 먹고 흔적을 찾아내고자 한다면 복원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위의 글과 같이 화랑은 명맥을 단단히 유지했으나, 초기 신라에는 토속 집단으로써 정치적 단체로 꽃을 피우다 삼국을 통일하고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후일 불교, 유교도교 등을 흡수하면서 쇠퇴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화랑은 원래 원화(源花) 집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사상을 유입하느냐에 따라 그 지휘가 바뀌었을 것이고, 또한 샤머니즘적 또는 불교적인 집단, 외향적이거나 내성적인 집단 등으로 분열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인 화랑은 신라 시대에 정치에도 관여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러나 고려 조에는 춤도 추고 공부도 하는 어린 귀족 자제들의 무리로 변질되다가, 조선 시대 때 유교적 원리주의가 도래하면서 유교적인 고위 자제들은 샤머니즘, 불교와 도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랑을 나오며 결국 샤머니즘, 불교와 도교밖에 남지 않게 된다. 허나 불교는 이미 조선을 거치며 몰락했고, 따라서 화랑 집단은 낮은 대우를 받으며 추락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흔적은 끊긴 것이 아니라 존속하여 내려왔다. 향가를 부를 때마다 음악은 시나위의 사뇌(詞腦)의 형태로 남아있다. 역시 향가의 발전 과정을 보면 구체가 점차 늘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28]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로 흐를수록 4구체가 12구체까지 늘어난다. 그렇게 명맥이 끊이지 않고 계속 불려지면서 후렴구는 사라지고 구체는 30구체 내외로 늘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무가(巫歌)들이 향가로부터 계승한 것일 수 있다. 다만 향가 중 시적이고 서정적인 것들은 사라지고 종교적이고 무속적인 행위를 하는 화랑들만 남아 향가는 무가(巫歌) 형태만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향가 내에도 처용가처럼 주술적으로 쓰인 향가도 보인다. 신라속악 목주가(木州歌)를 근본하여 만들어진 『시용향악보』의 사모곡(思母曲)을 들어 보면 일본에 남아 있는 고려악[29]과 비교해 보았을 때 유사점을 지닌다. 즉, 신라의 속악은 시나위 혹은 무악(巫樂)으로 내려오고, 향가는 무가(巫歌)의 형태로 지속적인 발전을 거치며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화랑(花郞) 곧 무부(巫夫)니 방언(方言)으로 광대(廣大)라 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中 실재 지금도 경상도에선 무당을 화랭이 무당권속을 냥도라고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조창(漕倉)[30]을 열려고 할 때 포구에 잡류가 찾아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파(優婆, 사당), 창기(娼妓), 주파(酒婆), 화랑(花郞, 무당의 지아비인 광대), 악공(樂工), 뇌자(櫑子, 초라니), 마조(馬弔, 투전), 도사(屠肆, 소나 돼지의 도살) 등 팔반천류(八般賤流)가 그것이다. 남사당패 광대들에서 곱상한 여장남자들을 부린것도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파일:E1233foVUAATZfn.jpeg.jpg

무속에서 보이는 고깔 삼국시대 보이는 절풍 조우관 양식의
계승이다


신라속악 목주가를 근거로 한 고려가요 사모곡.


일본의 고려악 소리.[31]


시나위에서 사뇌를 부를때 연주한 반주나 음악을 옅볼 수 있다.


경기도당굿 같은 무악에서 신라의 음악과 향가를 옅볼 수 있을 것이다.

종래에는 향가의 개념을 중국 시가에 대응하는 우리나라 노래 또는 우리말 노래로 이해하여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우리말로 된 노래라면 모두 향가로 이해했으나 최근에는 그 가운데서도 작자가 분명한 개인 창작의 시가 또는 젓대나 가야금·향비파 같은 선율악기를 동반한 세련된 고급의 가악으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 향가로 이해하던 〈해가〉·〈지귀주사〉·〈비형랑주사〉 같은 주술가요나 〈풍요〉와 같은 민요, 〈무애가〉(원효가 지음)와 〈산화가〉 같은 화청(和請 : 불교의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 생성된 교술적인 弘法가요로서, 북이나 목탁·꽹과리 같은 장단악기의 반주가 따름.) 등의 노래는 개인 창작의 고급음악이 아니므로 향가에서 제외한다.


무가에서 향가를 옅볼 수 있고 추임새가 향가의 후렴구와 일맥상통할 수 있다.


9. 화랑세기 필사본에서[편집]


통일신라 초기에 살았던 김대문이 화랑을 다룬 화랑세기를 저술하였으나 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89년에 박창화의 유족들이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필사본이 남아있다.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를 보면 신라의 개방된 성문화를 묘사하고 있다. 그간 남자다움, 호국무사 정도로 묘사되어 왔던 화랑이었지만,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됨에 따라 논란에 불이 붙었다.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의 동성애, 파벌 다툼, 문란한 성의식 등의 기존 사학계의 관점에서 '전혀 아닌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사학계나 재야사학자들간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켜 10년 동안 논란이 지속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 사회에서 동성애[32]는 어느 국가에서든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진솔한 사랑은 소년과의 사랑이다."라고 할 정도로 동성애가 성행했으며 오히려 고결하고 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33] '아직 피우지 못한 꽃'에 비유되는 소년들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확인된다. 이 동성애는 유명한 소크라테스플라톤도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겼으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도 보다 예술적이고 정적인 관점에서 동성애를 즐겼다. 또한, 남자다움으로 상징되는 사무라이들도 동성애를 즐긴 흔적들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구태여 화랑이 동성애를 했다해서 폄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34]

다만 폄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얘기가 곧 화랑의 동성애가 사실이라거나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인 것 또한 아니다. 고대의 동성애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고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의 경우에는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문헌 자체가 없다. 문화적인 연관관계가 희박한 타국의, 분명한 증거가 남아있는 사례를 들어 별 증거도 없이 화랑의 동성애를 추단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또한, 예전에는 남성들끼리 매우 친하거나 매우 존경하는 관계일 경우 '친하다' 정도가 아니라 '사랑한다' 수준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35]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작품 일부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개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친하다', 혹은 '매우 존경한다'는 것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랑세기에 묘사된 동성애적인 이야기가 동성애가 아닌 '매우 친하다' 정도의 표현일 수 있다. 당장 조선시대의 시사를 보면 신하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연모의 감정으로 표현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걸 두고 조선 양반사회에서는 동성애가 만연했다는 근거로 삼는 사람은 없다.

문란한 성의식 같은 경우도 화랑세기의 것은 마복자(磨腹子) 등과 같이 압권인 것도 있으나, 당시 삼국의 성의식이 오히려 현대의 대한민국보다 개방되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들이 곳곳에 퍼져 있으니, 굳이 신라에 국한시켜 화랑을 폄훼하는데 사용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신라시대 토우들을 보면 온갖 체위로 성행위를 즐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하지만 아직 화랑세기는 사료로서 가치 여부가 논란 중임을 고려해야 하며, 이 내용을 실제 역사로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화랑세기 위서론 중 박창화가 쓴 일종의 역사 동인지()라는 설은 상당히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화랑세기 문서로.

사실 국문학계의 반발 때문에 논란이라고 하는 것이지 실상은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혀져 가는 중이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결정적인데 여기에 적혀져 있는 화랑들의 이름이 화랑세기에 적힌 화랑들의 명단과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다. 천전리 각석에 명단이 없는 것은 신라 모든 화랑 천전리에 갈 이유는 없어 교차 검증되는 이름이 없을수도 있지만, 빼도박도 못하는 위서증거가 나왔다. 자장율사의 아버지 무림공이 그것인데, 당시 일연은 국왕 이름인 무를 피휘하여 호림공으로 적었으나, 박창화의 화랑세기에는 호림공이라고 적고 마치 본명같이 쓰고 있다.


10. 유사 기구[편집]



10.1. 청소년 수련단체[편집]




10.2. 무력 집단[편집]



10.2.1. 외국[편집]




10.3. 교육 기관[편집]



10.3.1. 한국[편집]



10.3.1.1. 국립[편집]




10.3.1.2. 사립[편집]



10.3.2. 외국[편집]




11. 문서가 개설된 화랑 목록[편집]


신라중기~통일신라 초기까지 화랑 제도가 쇠퇴하기 이전의 대다수 귀족 남성들은 화랑에 소속되었다. 이러한 귀족 요소보다는, 화랑이라는 제도에서 파생된 전설 그 자체로서 유명한 인물들을 언급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현대에 유명한 화랑들의 이미지를 확립한 영웅들이다.

  • 계원
  • 기파랑 - 찬기파랑가의 주인공.
  • 김원술 - 비극 원술랑의 주인공. 삼국 통일 전쟁 이후 최전선에서 마지막 전설을 남긴 화랑으로 유명하다.
  • 김유신 - 전설적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화랑 출신의 영웅. 역사적으로는 삼국통일전쟁, 백강 전투가 유명하다.
  • 김응렴 - 제48대 경문왕.
  • 김춘추 - 무열왕. 화랑 활동이 아닌 외교관, 내정군주로서 유명하지만 김유신과의 우정을 다루는 설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 김흠춘
  • 문노
  • 무관랑
  • 미시랑
  • 반굴, 관창 - 비령자(丕寧子) 등과 함께 황산벌에서의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현대에는 가장 대표적인 화랑들로 알려져 있다.
  • 백운 - 해당 항목으로.
  • 부례랑
  • 사다함 - 김유신과 함께 영웅 이미지를 대표하는 화랑이다.
  • 삼화랑(三花郞) - 신라의 전설속에 나오는 3명의 화랑
  • 설원
  • 숙종랑
  • 신라사선 - 영랑, 술랑, 남랑, 안상. 전국 각지[36]에서 이들이 수련하면서 거쳐갔던 명승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고려, 조선시대까지 문인들에게 유명했다고 하며 예를 들어 관동별곡 등에서도 언급된다. 기록이 부족해도 일단 실존인물은 맞는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신선 비슷한 존재로 윤색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 요원랑
  • 죽지 - 삼국통일전쟁에 참전한 화랑, 향가 모죽지랑가가 헌정된 인물로 유명하다.
  • 김효종 - 효녀 지은 설화에 등장.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버지. 전성기가 한참 지난 신라 말기 화랑 중에서는 그나마 존재감이 있다.


12. 현대 창작물[편집]


어리고 잘생긴, 화랑이라는 단어 그대로 재색과 문무를 겸비한 남자들이 집단을 이루어 함께 수련하고 전쟁에서 활약하는 이미지는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에, 신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 등의 창작물에서는 거의 필수 요소로 등장하는 편이다.

창작물에서 나오는 화랑 캐릭터의 외모는 남자답게 생기기 보다, 선이 가늘고 고운 미인 이미지가 주로 채택된다. 또한 기록처럼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를 사용해 눈가를 붉게 칠하는 화장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 성격과 후신이 무속과도 관련이 있고, 당대 기록에도 길달 등의 요괴나 요술이 등장하는 설화가 많다 보니 퇴마물과 자주 결합되는 시도가 보인다. 사이비들도 본인이 화랑의 후예라고 주장할 정도 2020년에는 바로 이런 시도를 성공적으로 선보인 판타지 웹소설 진혼기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일본의 음양사가 본디 과학자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나 오컬트적 이미지에 주목해 적극적으로 재생산하고 즐긴 결과 동양의 퇴마사 하면 떠오르는 막강한 소프트 파워를 자랑하게 되었듯, 화랑 역시 콘텐츠의 활로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37]

한편 삼국시대가 배경일 경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인지 백제싸울아비[38], 고구려조의가 화랑에 대응하는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는데 싸울아비는 실제로는 기록이 없으며 조의는 이름은 전하기는 하지만 화랑과 유사한 무사집단이었는지는 확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해외에서는 선덕여왕, 화랑(드라마)[39] 등의 드라마를 통해 해외의 한류팬들에게 알려졌다.

12.1. 소설[편집]




12.2. 영화[편집]



12.2.1. 영화 황산벌[편집]


반굴관창 그리고 기타 화랑들이 전형적인 화랑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눈을 붉게 칠하고 화장을 한 모습 등.


12.2.2. [편집]


달례의 약혼자인 화랑 모례가 등장한다. 조우관을 쓰고 무예를 선보이는 등의 화랑으로서의 모습이 짧게나마 나온다.


12.3. 드라마[편집]



12.3.1. 태조 왕건[편집]


초반에 위홍의 화랑 시절이 묘사된다. 비록 너무 짧긴 하지만 그나마 신라말의 화랑을 묘사한 얼마 안된 사극.


12.3.2. 드라마 선덕여왕[편집]


남장여자 덕만낭도로 들어가 활약한다(...) '낭장결의'나 '할복' 같은 오리지널 설정을 많이 가져다 붙였다.


12.3.3. 대왕의 꿈[40][편집]


선덕여왕의 낭장결의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분칠 화장을 한 모습으로 등장. 눈가는 붉게 칠하고 얼굴 전체에 새하얀 분칠은 닌자가 검은 흑포를 입는 것처럼 화랑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잡혀가는 듯 하기도 하다.


12.3.4. 드라마 화랑[편집]


등장인물 대부분이 화랑이다. 화랑제도를 현대의 사관학교와 비슷한 이미지로 묘사했다.


12.3.5. 해신[편집]


악역으로 등장하는 민애왕이 자신이 과거 화랑들의 대장임을 자랑하고 장보고와 1대1 대결을 했으나 패배한다.


12.3.6. 화랑전사 마루[편집]


KBS 어린이 드라마 화랑전사 마루는 화랑을 소재로 한 특촬물이다. 화랑의 힘이 현대 어린이들에게 깃들어 부활한 적과 싸운다는 내용이다.


12.4. 게임[편집]



12.4.1. 도미네이션즈[편집]


철기 시대의 한국 고유 유닛이다.


12.4.2. 던전앤파이터[편집]


풍월주 비화랑이라는 화랑이 등장하며, 시로코 레이드에서 적으로 나온다.


12.4.3. 천년의 신화[편집]


삼국시대를 다룬 실시간 전략 게임 천년의 신화에선 신라측 궁기병 유닛인 '낭도'가, 그리고 화랑 관창이 신라 영웅으로 등장하여 화랑도의 짝을 이룬다. 후속작 천년의 신화2에서는 신라 유닛으로 '화랑'과 '낭도'가 등장한다.


12.4.4.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편집]


한국 문명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하며 궁수 계열 유닛을 대체한다. 그런데 화랑처럼 묘사되는 건 기본 단계의 화랑 뿐이고 이후엔 조선 군관 같이 생긴 디자인으로 변한다.


12.4.5. 크루세이더 퀘스트[편집]


기파랑은 궁수 계열의 화랑을 모티브로 했다. 애초에 기파랑이 화랑이다.


12.4.6. 문명 시리즈[편집]




12.4.7. 철권[편집]


화랑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캐릭터가 있다. 다만 실제 화랑하고는 딱히 관련없다.


12.4.8. 봄이 오면 꽃이 피고[편집]


화랑들을 공략하는 오토메 게임이다.


12.4.9. 트리오브세이비어[편집]


아처계열의 클래스로 화랑(트리오브세이비어)이 존재한다. 스킬중, 세속오계에 해당하는 교우이신이 존재한다.


12.4.10. 인피니티(게임)[편집]


화랑(인피니티) 참조.


12.5. 만화[편집]




13. 같이보기[편집]






[1] 기록을 바탕으로 재현된 실제 화랑의 복식은 아니다. 화랑의 복식과 구체적인 외모에 대한 자료가 없기에 외모에 대한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2] 사람들에 화랑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준 드라마였다. [3] 花(꽃 화) / 郞(사내 랑)[4] 현지 발음을 따서 이렇게 부르는 경우도 많다.[5] 전통적인 화랑제 교육 과정과 통일 이후 도입된 중국식 교육기관 국학 과정을 병행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신라 국학은 입학 나이제한이 꽤 널널한 편이었다. 참고 대상이었던 당나라 국학의 입학연령이 14 ~ 19세로 제한됐던 반면 신라 국학의 입학연령은 30세까지였다. 입학으로부터 9년제 과정 교육기관이란 점과, 현대에 비해 빨랐던 당시의 활동연령과 평균수명까지 감안하면 굉장히 늦은 나이의 입학까지 받아들였던 것.[6] 6~7세기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말갈, 중국, 일본과 각각 모두 한 번 이상 전쟁이 있었다.[7] 외모에 대한 언급을 잘 하지 않는 정사에서 미녀라고 대놓고 써 있다.[8] 김대문화랑세기와 같은 책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2번 단락의 필사본이 아닌 1번 단락[9] 단 고아 미시랑국선까지 오른 것 등, 신라관직 진급상한선과는 달리 반드시 골품이 있어야만 화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10] 국선 중 신분을 초월한 사례로 미시랑이 있는데, 미시랑 일화는 설화적 성격이 강하다.[11]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화랑의 지도자를 '풍월주'라고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설원이 최초의 국선이라고 쓰고 있는데, 화랑세기에서는 초대 풍월주는 위화랑이고 설원은 7대 풍월주라고 나온다.[12] 근래 '화랑세기'의 기록을 근거로 '화주'를 관리가 아닌 '풍월주'의 아내가 맡는 직책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생겼으나, 화랑세기가 논란이 많은 문서이고 이 외에도 다른 반박도 많아 아직은 소수의견에 머물러 있다.[13] 향도 자체는 불교를 기반으로 한 신도 집단을 뜻한다.(관련 내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말하자면 향도>화랑인 셈.[14] 조선시대에도 호랑이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부대가 조직되어 있을 정도였다. 한반도에서 산짐승들의 씨가 마른 것은 일제가 해수구제사업을 단행하면서부터다. 이 사업 이후로 산짐승 출몰은 거의 사라졌으나 그 후유증으로 현재 한국 토종 야생 짐승 연구에 애를 먹고 있다.[15] 사실 제천 점말동굴은 석기시대 유적으로 더 유명하지만, 화랑들이 순례와서 새긴 글자가 지금도 남아있는 등 신라 때에도 영험한 성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6]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17] 비록 가야를 복속시켜 그나마 백제까지는 만만하게 보지 못 할 수준까지 국력을 끌어올렸지만 그 뿐, 진흥왕 이전까지는 여전히 삼국 최약체였다.[18] 안상은 나중에 신라사선 중 한 명이 된다.[19] 특히 천제나 국가 수호신 제사.[20] 사실, 여자 대신 소년들을 가까이서 기르며 성적인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그리스중국 등지에서 간간히 있어왔으나, 그렇다고 남자들이 화장하고 모여 있으면 다 게이라는 말은 아니다. 스파르타의 전사 훈련 과정 같이 어린 소년을 나이 든 전사 한 명이 맡아서 개인지도로 양성하는 과정을 동성애로 오인하고 다루던 역사학자들도 있다.[21] 단 귀산과 추항이 세속오계를 따라 아막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자신들의 목숨을 버려 승리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매우 컸던 듯하다. 좋은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22] 편집됐다는 뜻이다. 파한집은 시를 발췌해서 실었다.[23] 고려 제3대 임금 정종 왕요(堯)의 휘를 피한 것이다.[24] 고려를 주나라에 비유한 것으로 외왕내제 성격이 드러난다.[25] 전문은 동문선 제31권에서 볼 수 있다.[26] 지금으로 치면 말단 공무원이지만 고위층 자제를 수행하는 수행원 쯤 된다고 볼 수 있다.[27] 김시습소격서의 한 도인에게 준 시에 '현도관 안에서 화랑을 보니'라는 구절이 있기도 하다. 다만 이 구절은 '현도관 안에서 꽃구경하는 이'라는 중의적 해석도 가능. 자세한 내용은 정재서 저,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서적으로.[28] 아쉽게도 삼대목이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아 신라 시대 당시의 단어와 언어를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따른다.[29] 우방으로 신라악, 백제악과 고려악을 통틂.[30] 조선 시대에 세곡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창고.[31] 고려악에 우방으로 백제악, 신라악과 고려악을 넣었는데 신라어로 되어 있다.[32] 정확히는 성인 남성과 소년, 소년간의 동성애가 크게 번졌다.[33] 사실 이것은 여성과의 사랑이 번식에서 나오는 욕구라는 식으로 여겨져서 그렇다. 게다가 당시 여성 간의 사랑은 가장 미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여러모로 성차별적인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34]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써놓은 철학자도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겠지만.[35] 일단 영어의 'love'를 보자. 그리고 라틴어에서 친구를 의미하는 'AMICUS'는 사랑하다라는 뜻의 'AMARE'에서 온 단어. 그리고 한국어에서도 '사랑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깊게 생각하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즉, '곁에 있지 않아도 언제나 그 사람을 계속 깊게 생각하게 된다 → 사랑한다'라는 식의 의미 변화라고 하는데, 곁에 있지 않아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굳이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지극히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흔한 일 아닌가?[36] 주로 지금의 강원도 지역[37] 앞의 사이비 드립이 단순히 농담이 아닌 게, 일본 퇴마물에서 뻑하면 등장하는 주인공 설정이 '아베노 세이메이의 후손'인데 이때 일본인은 물론 서브컬처에 익숙한 외국인들도 듣자마자 바로 '퇴마사 집안이겠군' 하고 받아 들인다. 그만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십 년간, 시도때도 없이 이어져 온 모에화(...)이기 때문. 즉, 화랑 역시 국내에서 이미지화가 활발해지면 언젠가 단순히 '화랑의 후손'이라고만 설명해도 자연스레 영적 능력이 있는 캐릭터적 특성이 연상될 수도 있는 것이다.이미 지금도 미모 하나는 누구나 떠올리는 것처럼[38] 백제의 싸울아비라고 쓰여 있지만 이 말은 1935년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이차돈의 사(異次頓의 死)』에서 사용된 단어다. 즉 근대에 창작된 단어로 이전 사료에는 없던 말이다. 비슷하게 언급되는 '무절' 역시 사료에 존재하지 않는다.[39] 방탄소년단 멤버 의 출연으로 해외 A.R.M.Y들 사이에서 주목을 끌었다.[40] 사람들에 화랑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준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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