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족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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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2. 작위 서임 기준
3. 특권
4. 패전 이후
5. 화족이거나 관련 있는 인물
5.1. 실존인물
5.2. 가상인물
6. 일본의 역사상 존재한 귀족 목록
7. 같이보기

華族 (かぞく)
본래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집안이나 자손으로 전근대 일본에서 2등급 공가(公家)인 청화가(淸華家)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다가 근현대 일본에 존재했던 귀족의 명칭으로 쓰이게 된 낱말.

1. 설명


메이지 유신 이후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개편하면서 1884년에 생긴 새로운 계급이다.
기존의 사농공상 제도를 없애면서 모두를 같은 계급으로 내리고,[1] 그 상태에서 당시 유력한 정치인들과 고위 계층 (다이묘들과 공경들), 그리고 부르주아를 묶어 새로운 귀족인 화족으로 분류했다. 화족에는 고대 중국 서주의 봉건제에서도 쓰였던 오등작의 다섯 계급인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 있었다. 이는 서양의 귀족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화족을 5등작으로 나누려 한 것은 아니었다. 제출된 초안들을 보면
  • 화족을 공(公), 경(卿), 대부(太夫), 사(士)의 4계급으로 나누고, 공과 경을 2계급, 대부와 사를 3계급으로 나누어 9계급으로 하는 안 (1869년)
  • 화족을 상공(上公), 공(公), 아공(亜公), 상경(上卿), 경(卿)의 5계급으로 나누는 안 (1871년 9월)
  • 화족을 공(公), 경(卿), 사(士)의 3계급으로 나누는 안 (같은 해 10월)
  • 화족을 공(公), 백(伯), 사(士)의 3계급으로 나누는 안 (1876년)
으로 계속 변했다. 공후백자남 5등작 안이 제출된 것은 1878년의 일로, 『예기(禮記)』에 등장하는 王者之制禄爵 公侯伯子男 凡五等』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작위명이기도 하다.
첫 서임은 1884년 7월 7일 거행되었는데 공작 11명, 후작 24명, 백작 76명, 자작 324명, 남작 74명으로 총원 509명이었다.
화족 대우를 받는 사람은 화족과 같은 호적에 있는 사람들 뿐으로, 화족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차남 이하로 태어나서 분가하면 평민 취급을 받았다. 다만 화족들끼리 양자를 활발하게 주고받았고, 양자 또는 서자에 의한 계승도 드물지 않았는데 친자+적자가 아니면 작위를 계승할 수 없었던 유럽 귀족들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고위 화족가문에서 작위가 낮은 분가가 파생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 예로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 히데마로도 분가하면서 자작위를 받았다.[2]
대한제국의 황실 역시 이 체계에 편입되어서 이왕가(李王家)로 불렸다. 정확하게는 왕공족(王公族)이라 하여 화족과는 별개의 규범으로 신분이 규정되었는데, 왕공족의 위치는 명목상으로는 "황족 이하, 화족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2. 작위 서임 기준


  • 공작: 조선의 왕족, 교토 조정의 오섭가(五摂家: 고셋케)[3], 도쿠가와 가문 종가, 다이묘 가문 중 공훈이 있거나[4], 그 외에 무가나 공가 중 국가에 큰 공(偉功)이 있는 자를 배출한 가문[5][6]들이 공작위로 책봉되었다. 또한 규정상으로는 황족 중 친왕이 신적강하하는 경우 공작을 부여한다는 내규가 존재했으나 실제 화족제도 존속기간 중 이 규정으로 인해 공작을 부여받은 사례는 없었다.
화족 체계에서의 공작은 러시아 공작처럼 영어로는 Duke가 아니라 Prince라고 번역했다. 우리가 지금 시각에서 보면 호칭 인플레로 보일만 하지만 서양 기준에서 작위 체계는 Prince가 Duke보다 절대 높지 않다. 프린스 항목을 참고하자.[7] 그래서 서구에서는 고노에 후미마로를 황족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8]
  • 후작: 교토 조정의 청화가(清華家: 세이가케), 도쿠가와 가문의 고산케(御三家)[9] 및 실소출 15만석 이상의 다이묘[10] 류큐 왕국 왕가인 쇼(尚)씨 종가, 덴노가 황족 중 신적강하한 가문, 기타 국가에 훈공 있는 자의 가문이 후작에 책봉되었다.[11] 한편, 공가 중 나카야마가의 경우 가문의 격은 우린케에 불과하나 매이지 덴노의 외가인 점이 배려되어 후작위에 책봉되었으며, 이완용이나 박영효 등 네임드급 친일파나 조선 왕족 중 몇몇 인물 또한 일본의 후작위를 받았다.
  • 백작: 교토 조정의 대신가(大臣家)와 일부 당상가(堂上家), 도쿠가와 가문의 고산쿄(御三卿)[12]. 5만 석 이상의 다이묘, 쓰시마 섬 도주(島主)인 (宗)씨[13], 서본원사(니시혼간지), 동본원사(히가시혼간지)의 세습 주지, 기타 국가에 훈공 있는 자[14]등의 가문이 이에 해당한다. 특이사례로 큐슈 히라도 번의 마츠우라 가는 원래는 쌀 소출량 산정에 포함되지 않는 분가의 소출까지 아득바득 합친 수치를 기준으로 백작위에 책봉되었는데 이는 마츠우라 가가 메이지 덴노의 외조모의 친정 가문이었기 때문에 외가인 나카야마 가를 후작으로 책봉했던 것과 비슷한 특혜로 여겨지고 있다.
  • 자작: 기타 당상가, 기타 다이묘[15], 분가한 공/후작가의 차남, 기타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운 자
  • 남작: 메이지 유신 이후에 화족이 된 자, 류큐 왕국 방계 왕족들(쇼타이 왕의 두 아들과 방계인 이에(伊江)씨와 나키진(今帰仁)씨), 주요 신사(神社)에서 세습해 신직(神職)을 맡은 14가문, 정토진종(浄土真宗)계 세습 주지 4가문, 남조 조정의 충신의 후손,[16] 기타 국가에 훈공 있는 자
이토처럼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작위가 점점 상승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한편 여자는 화족 가문의 당주가 될 수 없어서, 남자 계승자가 끊기면 작위는 반납되었다.[17] 아니면 화족 작위를 받은 본인이나 후계자가 1대화족주의자여서 습작 수속을 하지 않아 작위가 끊기기도 했다. 1928년 당시 공작 18, 후작 40, 백작 108, 자작 379, 남작 409가문(조선 귀족 제외)으로 총 954개의 가문이 화족이었고, 이 숫자는 1944년에 1,016 가문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1907년 이후로는 후계자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은거가 가능해졌다.
참고로 위의 다이묘의 작위 서임 고쿠다카 기준은 보신전쟁 이후에 새로 산출한 고쿠다카 기준이다. 따라서 에도 시대 중후반 기준으로 생각하면 대입이 안되는 가문들이 있다. 이것 때문에 고쿠다카를 새로 조사할 때 호리에 번(堀江藩)을 다스리던 하타모토 오사와 모토스미(大沢基寿)가 실제로는 5,500석도 안되는데 메이지 정부에 1만석 이상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가 작위가 박탈된 사건도 있다.[18]

3. 특권


  • 귀족원(貴族院) 의원이 될 자격. 30세 이상의 공후작 의원은 종신, 백작, 남작 의원은 7년 임기로 선출되어 귀족원에 소속되었다.
  • 황족과의 결혼 자격이 주어짐.[19]
  • 제국대학에 결원이 있으면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음. (1922년까지)
  • 가쿠슈인에서 낙제를 해도 화족 집안의 자녀라면 고등과까지의 진학 보증.
  • 유작자는 궁내대신의 인허를 받아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집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인 "가범(家範)"을 정할 수 있었다.표지 가범으로는 배우자 및 입양 자격,[20] 재산 처분의 절차[21]를 정할 수 있었고, 가범을 위반한 경우 궁내대신은 화족령의 규정에 따라서 징계 처분을 내릴 수 있었다.
일문 위키피디아에선 공작, 후작 항목에 역대 화족들 명단이, 백작 자작 남작 항목에 해당 가문 명단이 있다. 그리고 화족 작위를 받은 사람들 명단 (승계자 제외)은 여기를 참조.

4. 패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들어선 미군정에 의하여 1947년에 새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화족 제도는 사라졌다. 참고로 원래 덴노가의 방계 중에 전통적으로 왕(王) 작위를 칭하던 가문들이 있었는데 이때 모두 취소당했다. 이런 가문을 미야케#s-3(宮家)라고 한다. 본래 친왕(親王) 작위를 칭하던 4개의 가문, 즉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22]가 있어서, 덴노 직계가 끊어지면 이 가문 출신들이 대를 이었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미야케가 대거 생겨났다가 1947년에 11개 미야케에 소속된 51명이 대거 평민으로 되었다. 이게 바로 신적강하라 불리는 사건이다. 참고로 이 해에 화족제 폐지로 인해 궁색해진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안조 가의 무도회」(安城家の舞踏会)라는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는데, 몰락한 화족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전 최후의 무도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상당한 재산을 모은 화족 가문들도 많아서 미군정 이후에도 대부분 명문가로 남았고, 지금도 여전히 일본의 상류층으로 군림하고 있다. 물론 모두 그런 것도 아니어서 신직계 화족 가문들은 메이지 시기에 재산 관리 실패로 연금 외의 재산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고, 공경계 화족들도 최상위 가문들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다이묘 집안으로서 작위를 받은 화족들은 재산이 많았지만 이마저도 후작 이상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석고 (고쿠다카) 5만석 이하 다이묘에서 시작된 화족들은 다이쇼 시대에 접어들면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23]
정말로 돈 걱정이 없던 화족들은 당대에 재산을 모아서 귀족원 의원이 되고 남작위를 받은 소수 부르주아들 뿐이다.[24] 사실, 황족들조차 돈이 없어서 처가에 신세를 지는 판국이었다.[25] 이방자 비가 막대한 재산을 운용하는 이왕가의 영친왕에게 시집가던 때, 황족들이 부러워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왕가의 경우는 합병 전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거의 다 물려받았다. 또한 관리하는 전답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일본 황족들과 달리 이왕직이라는 기관에서 돈을 원하는 만큼 가져다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화족의 사전적인 정의는 전근대의 귀족과 같이 법률로 규정한 특권집단이지만 실제로 세간에 통용되고 인식되던 화족의 이미지는 전근대 유럽의 귀족보다는 근대의 부르주아, 정치인, 고위 관료, 군인 등의 기득권층 집합체에 가깝다. 특히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재벌이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미지인데, 예를 들자면 게임 화려한 나의 일족에 나오는 미야노모리 가문이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하나인 소설 이누가미 일족에 나오는 이누가미 가문의 모습이 바로 세간에 흔히 알려진 모습에 가깝다. 즉, 화족의 서열은 작위순으로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단순히 작위만 높은 가문보다는 작위는 다소 낮더라도 재력이나 영향력이 컸던 가문이 세간에 알려진 화족의 이미지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화족들의 친목 단체였던 화족회관은 1947년 이후 카스미 회관(霞会館)이라는 사단법인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26]
그러나 살아남은 화족 가문은 현재 일본/정치, 일본/경제, 일본/사법체계에서 막대한 영향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 정치인들이 자신의 혈족이나 측근들에게 자신의 선거구를 물려주는 관습도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총선이나 재보궐에서 한번 패배했더라도 다음 공천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을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선거 때 격전지에 속하는 일이 드문 지역의 경우는 아예 대를 이어 수성하기도 한다.
다만 현대 화족들의 대다수가 흔히 생각되는 이미지의 극우에 가까운가 하는 점은 의문이 있는데, 일단 상황 아키히토, 나루히토 덴노, 하토야마 유키오, 호소카와 모리히로[27] 등 오히려 화족 서열에서 최상위에 있는 이들이 극우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는 데다가, 일본 국내외의 정치학계에서도 현재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기는 세력으로는 일본회의를 언급하지 카스미 회관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카스미 회관은 구 화족들의 친목 단체이지, 정치적인 집단으로 보기 어렵다. 이는 실제 카스미 회관에서 소개하고 있는 주요 활동들도 일본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연구 및 계승 등 학술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증명할 수 있고, 관련 인터뷰 등을 보더라도 귀족들의 사교 클럽 정도의 이미지다.
이에 대해선 그 일본회의 자체가 화족 구성원이 많은 준 혈족 집단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기도 하나, 사실 일본 현지에서는 일본회의의 사상적 구심점은 생장의 집(生長の家)이라는 신흥종교가 담당하고 있어 전통적인 의미의 신토와도 동떨어져 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옆 동네의 이 집단이 생각나면 지는 거다 사실 일본 황가와 일부 최상위 화족들의 경우는 패전 이후에 벌어진 신적강하의 직접적인 피해자들로, 황가는 법의 개정 없이 대를 잇기가 어려워졌고 그 밑의 화족들은 황위 계승권을 원천 박탈 당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걸었던 군국주의에 대해 좋게 생각해주기 어렵다. 그리고 화족이 존재했을 때도 '작위 수여자와 같은 호적에 있는 사람 및 그 상속자'만이 화족이고 나머지는 제아무리 혈족이라도 평민이었으므로, 가령 화족의 방계 자손이 일본회의에 들어갔다 해도 화족 구성원이라 부르는 건 언어도단이다.

5. 화족이거나 관련 있는 인물



5.1. 실존인물



5.2. 가상인물



6. 일본의 역사상 존재한 귀족 목록



7. 같이보기



[1] 화족에 편입되지 못한 무사 계급은 사족으로 분류되었으나, 현실적으로 호적에 사족이라고 기재되는 외에 아무 특전이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사실상 화족 이외의 특권계급은 사라진 것이다. 사족같은 경우는 메이지 유신때 일시적으로 공채를 일괄 지급하고, 나중에 유상몰수를 했다. 이 기간 도중에 공채를 미리 처분하고 사업에 뛰어든 사족들만 개이득.[2] 보통 공작가에서는 자작가, 후작가에서는 남작가가 분가되는 게 표준이었다.[3]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후지와라 씨의 혈통을 이은 다섯 가문으로 이치죠(一條), 니죠(二條), 쿠죠(九條), 고노에(近衛), 다카쓰카사(鷹司). 관백이나 섭관은 셋케 출신만이 될 수 있었다.[4] 유신을 주도한 사츠마 번의 번주가문 시마즈(島津) 종가, 쵸슈 번의 번주가문 모리(毛利) 종가가 이에 해당[5] 무가 중에서는 사츠마번의 실세이던 시마즈 가문의 방계 타마자토 시마즈가가 시마즈 히사미츠의 공으로 공작위에 책봉되었고, 공가 중에서는 세이가케인 산조가가 산조 사네토미의 공으로, 우린케인 이와쿠라가가 이와쿠라 토모미의 공으로 공작위를 받았다. 또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요시노부의 경우 다른 가문들보다 약간 늦은 1902년에 도쿠가와 종가와는 별도로 본인을 시조로 하는 분가인 요시노부가 자격으로 공작위를 받았다,[6] 이후 이토 히로부미(백작, 후작을 거쳐 1907년 공작으로 승급)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유력 유신지사의 가문이나 공가의 사이온지 가문, 무가의 미토 도쿠가와 가문처럼 최초에는 백작 또는 후작가였던 가문이 공작가로 승급하는 사례도 있었다.[7] 물론 왕가(통치가문)의 후손들은 작위와 상관없이 Prince를 관습적으로 쓰는데, 진짜 왕자도 있고 그냥 듣보잡 방계 혈족도 있다. 다만 서양에서는 동아시아와는 달리 의 후손들은 쓸 자격이 없다. 적법한 혼인에서 태어난 적자만 해당.[8] 사실 오해할 만한 것이, 일본인들이 직계 황족인 친왕(親王)이나 방계 황족인 왕(王)의 경우도 닥치고 Prince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가령 쇼토쿠 태자의 경우에도 영어로는 Prince Shotoku로 표기하고 있다. 태자면 Crown Prince로 번역하면 될 텐데 당시 덴노와 직계존비속이 아니고 조카라서 그런 듯 하다.[9]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분가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 기이 도쿠가와 가, 미토 도쿠가와 가의 3개 가문을 말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오와리 번), 10남(기이 번), 11남(미토 번)의 후손들이다.[10] 무가 중에서 이 조건에 해당하는 다이묘 가문인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가,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가, 돗토리 번주 이케다 가, 후쿠오카 번주 쿠로다 가, 쿠보타 번주 사타케 가, 사가 번주 나베시마 가, 도쿠시마 번주 하치스카 가, 쿠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가, 카나자와 번주 마에다 가, 고치 번주 야마우치 가가 후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후쿠이 번주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 우와지마 번주 다테 가가 기존 백작위에서 승급되어 후작위를 받았다.[11] 유신삼걸의 일원인 키도 타카요시의 키도 가, 오쿠보 도시미치의 오쿠보 가 등이 공훈으로 후작위를 받았으며, 화족제도 도입 시점에 이미 고인이었던 사이고 타카모리의 사이고 가도 1895년에 타카모리의 동생 츠구미치가 백작에서 승급, 1902년에는 타카모리의 유신의 공이 인정되어 타카모리의 적남 토라타로가 각각 후작위를 받았다.[12] 고산케처럼 도쿠가와 막부 계승권은 있으나 영지가 따로 없었던 가문[13] 쓰시마 번은 석고만으로 보면 본섬과 히젠의 월경지를 포함해도 2만석 미만으로 자작급에 불과하나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지역 특성 상 에도 막부에서 10만석급 다이묘의 격으로 대접받았는데 신정부에서도 이러한 특수성이 그대로 인정되어 백작이 되었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전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도 이에 포함된다.[14]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카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이고 츠구미치 등 주요 유신지사들의 가문이 처음에는 이 백작위를 받았다.[15]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들의 경우 자작 작위를 받는다.[16] 예를 들면 닛타 요시사다의 후손.[17] 다만 서양자(壻養子: 사위를 양자로 삼는 것)나 외손에 의한 계승은 가능했다. 그래서 후계 단절로 반납된 가문은 공작가문은 없고 후작 가문이 각각 딱 1가문이 있다. 후작 중 후계 단절로 작위가 반납된 가문은 당시 황족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의 둘째 아들이라 양자를 딱히 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 공작가문의 경우는 후계 단절의 사례는 없고, 작위 반납 사례는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아들인 마쓰카타 켄(松方巌)이 금해금으로 인한 쇼와 대공황의 책임으로 작위를 반납한 것이 유일하다.[18] 그래서 판적봉환 때 제출된 각 번의 고쿠다카를 보면 가관이다. 화족이 되려면 다이묘가 되어야 하고 다이묘로 인정받는 기준은 1만석인데, 어떻게든 1만석을 채우겠다는 하타모토들과 실제 고쿠다카가 1만석에 미달되는 소규모 다이묘들이 어떻게든 1만석을 인정받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별짓들을 다 했었다.[19] 다만 직계황족은 화족 중에서도 오섭가(五摂家: 고셋케)나 황족, 또는 왕공족과 결혼해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귀천상혼 위반으로 신적강하를 당한다.[20] 화족 이상에 한한다 등[21] 가문의 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등[22] 후시미노미야, 카츠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간인노미야[23] 그나마 석고 5~10만 석 이상 재산이 많았던 다이묘 출신 백/후작 이상되는 집안조차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사기 (...) 등에 걸려서 몰락하거나, 땅만 넓었지 수익이 낮은 부동산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24] 에도 시대 중기 이래로의 상인 집안이던 미츠이, 스미토모의 당주 집안이나 미츠비시 재벌의 창립자인 이와사키 남작가 정도. 그 외에 세계 최초로 진주의 인공양식에 성공한 후 진주 판매로 소득세 납세액 1위를 기록하면서 귀족원 의원이 된 미키모토 집안 정도가 있다.[25]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는 사가 번주 나베시마 후작 가문의 딸인데, 나베시마 가문에서는 매달 2천엔씩 화장품이라는 명목으로 시집간 이츠코에게 돈을 보내왔다고 한다. 나베시마 가문이 다스리던 사가 번은 오랫동안 일본 유일의 개항장이던 나가사키가 있었는데, 여기서 무역을 해 많은 돈을 벌었다.[26] 2017년 마이니치신문 기사(유료)에 따르면 '구 화족가의 남성 당주와 성인이 된 직계 자식을 회원으로 하여 650가문 740명의 회원'이 있다고 하며 천황 부부도 매년 1월에 1회 방문하여 교류한다고 한다.[27]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로, 제7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었다.[28]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이토를 언급할 때는 '이등후작'이라고 표기하는데, 이 때 이토는 공작으로 승작되기 전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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