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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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荒山大捷

황산전투(荒山戰鬪)
시기
1380년 9월 (음력)[1]
장소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서무리, 인월리 일대
원인
고려 말 왜구의 침입
교전 세력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진압군)


왜구
(침략군)


주요 인물
지휘관

이성계 (삼도 도순찰사[2])
지휘관

아기발도
참가자}}}
이지란, 이방과,
변안열, 배극렴,
정몽주, 우인열
도길부, 박임종,
홍인계, 임성미,
이원계, 왕복명
처명[3]
참가자}}}
후지 츠네미츠
병력
1만 명 ~ 2만 명(추정)
2만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최고 지휘관 전사
생존자 약 70 명
결과
왜구 연합 세력의 전멸.
영향
고려의 대(對) 왜구 전쟁에 전환점 마련.
이성계의 정치적 입지 상승.

1. 개요
2. 배경
2.1. 세기 말의 동아시아와 고려
2.2. 이성계의 종횡무진 활약
2.3. 파탄이 나버린 고려의 재정
4. 사근내역 전투
5. 황산대첩
5.1. 이성계, 드디어 출전하다
5.2. 전라도로 이동한 왜구
5.3. 양군 전력의 추정
5.4. 일대 결전
5.5. 영웅의 귀환
6. 의의와 영향
7. 황산대첩비
8. 기타



1. 개요[편집]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최영, 《태조실록》1권, 총서 66번째 기사 #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9월 이성계가 사령관으로 있던 고려군이 현 전라북도 남원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기세가 절정에 오른 왜구 무리와 싸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전투. 순서상으로 보면 진포해전(鎭浦海戰)과 사근내역(沙近乃驛) 전투에 이어서 연달아 벌어진 1380년의 대 왜구 전쟁의 종결판이다. 이 전투들은 별개의 전투이면서도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진포해전으로 시작해 황산대첩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 한 항목에서 합쳐서 서술한다.

1380년의 전쟁은 고려 말기를 장식했던 왜구와의 치열한 사투에서 가장 극적인 반격이었는데, 황산 전투의 왜구들은 진포해전에 상륙했던 500여 척의 역대 최대 규모 함대 외에도 고려의 내륙에 흩어져 있던 왜구들이 집결한 연합 세력이었다. 이때의 왜구들은 해안가나 노략질하던 과거 해적 세력과는 다르게, 대규모로 내륙까지 침략하여 최영을 유인하여 수도를 빈집털이하는 국가 규모의 전략 기동, 고려의 행정 시스템을 파악하거나, 기병까지 동원하는 훈련받은 정규군에 가까운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이전 우왕 3년(1377년) 왜구는 개경의 방어를 담당한 고려 수군을 전멸시켜 서부 경기 지역을 석권하기도 하였다. 우왕 4년(1378년)에는 개경의 길목인 승천부(昇天府)에 왜구가 상륙하여,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겠다고 하여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이때도 최영과 이성계가 막아내어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이렇듯 고려 말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 이상의 군벌집단이었으며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으니, 고려는 실질적으로 국가적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렇게 총 집결한 왜구들은, 마찬가지로 정예군을 집중하여 조직적인 반격에 나선 고려군에게 궤멸되면서 급격하게 몰락했다. 작게는 침입 대상이 한반도의 서부 지역에서 동부 지역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였으며, 침입의 규모나 횟수도 현저하게 감소되기에 이르렀다.[4]

황산대첩은 바로 그 고려군의 반격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아시아의 막장 시대에서 한반도 주변이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기에 벌어진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잔존한 왜구들은 1383년 5월 정지(鄭地)가 이끈 관음포 해전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이후, 창왕박위의 대마도 원정으로 이어진다. 또한 그간의 숱한 전투에서 이미 몇 차례나 나라를 구했던 명장 이성계는 황산대첩을 기점으로 완전한 국가적 전쟁영웅이 되어 조정에서 막대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이며, 이성계 개인의 입장에서도 큰 전환점이 되는 일생일대의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편집]



2.1. 세기 말의 동아시아와 고려[편집]


파일:external/oi68.tinypic.com/34dk9ac.jpg
공민왕(恭愍王)
태조 왕건 이후 여요전쟁(麗遼戰爭)을 극복하며 국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려는 12세기부터 문관들의 전횡과 이에 반발한 무신정변의 혼란으로 인하여 국력이 급전직하하였고, 결국에는 몽골제국의 압도적인 힘에 유린되어 원 간섭기에 접어들며 번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충자 돌림 왕들은 대부분 주색을 즐기는 일에 탐닉했으며, 그 사이 원의 권세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의 힘은 강대해졌다.

이후 시간이 흘러 세계 전역에 번진 몽골의 불꽃이 차츰 약화되기 시작했을 즈음, 고려에는 공민왕이라는 영걸이 등장했다. 공민왕은 고려의 부흥을 꿈꾸며 여러 조치를 취했고, 제1차 요동정벌을 시도하여 약 445년만에 요동성에 진출해 보이기도 했다.

당시의 동아시아는 몽골 제국 체제가 붕괴하며 중국한반도, 일본 등이 모두 가히 세기말적 현상을 보이던 난세였다. 우선 중국은 초원로를 따라 흑사병이 퍼진데다 멜서스 트랩에 빠져버렸다. 여기에 원나라의 가혹한 지배가 이어지자 홍건적(紅巾賊)을 비롯한 반란군이 천지를 가득 채울 정도로 들끓었으며, 결과적으로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은 고려에까지 번져서 수많은 홍건적의 대군에게 수도가 함락당하는 초유의 사건도 전개되었다. 또한, 원나라 군벌들이나 기황후 일파의 사주를 받은 병력이 고려 국경을 수시로 넘어오는 사건까지 빈번했다.

이렇듯 고려는 북방으로부터의 압력도 버티기 어려웠는데, 마침 일본에서도 남북조시대가 전개되면서 생긴 혼란으로 인하여 무수한 도적세력들이 발생하였고, 이들은 왜구로서 고려의 해안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다. 왜구의 갑작스런 증가에 대한 의견들로는 일본 남북조 시대가 전개되면서 전란이 지속되는 통에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 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어서 먹고 살기 힘든 왜구들이 침략했다는 주장이 있고, 또는 왜구가 대규모로 침략을 시작한 시기가 일본 남조와 북조의 대결이 극심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왜구를 군량미와 전비 마련을 위한 정규군 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경우 왜구는 자발적인 해적이 아니라 국가나 다이묘들의 비호와 지원 아래 마치 정규군이나 사병처럼 활동한 용병으로도 본다.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2차례에 걸쳐서 정벌한 바 있는 규슈 지역이 한반도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해양 진출이 용이해서 고려와 중국을 노략질한 왜구는 규슈 출신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규슈 지역은 일본 남북조 시대에 남조에 충성하던 지역으로 전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앞장섰을 수 있다. 실제 왜구들은 규슈 지역에 위치한 히라도번의 다이묘 마쓰라 가문, 사쓰마번의 다이묘 시마즈 가문의 비호를 받으며 사병처럼 활동하기도 했다. 그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에서도 악명을 떨쳤으니 바로 원균이 박살났던 칠천량 해전이 시마즈 가문의 시마즈 요시히로가 나섰던 전투이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함대를 지휘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박살났다. 시마즈 가문은 현재 오키나와에 있던 류큐 왕국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왜구들의 배후였던 시마즈 가문이 지배하던 사쓰마번은 일본 해군의 기원이기도 하다. 규슈 지역의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는데, 조슈번은 일본 육군의 기원이 되었고, 사쓰마번은 일본 해군의 기원이 되었다. 그래서 제국주의 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전함 함명이 '사쓰마'이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다고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도 사쓰마번 출신으로 시마즈 가문의 측근이였다. 알고 보면 왜구와 한반도와의 악연은 길고 긴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들은 자신들이 남조를 계승한다고 믿었다. 일본 남북조 시대에 결국 북조가 승리했고, 수백 년이 흘러 메이지 천왕도 혈통적으로 북조를 계승했지만 메이지 천왕이 남조 초대 천왕이던 고다이고 천왕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편 이에 맞서야 할 고려에서는 권문세족들이 계속 권력을 독점하면서 폐해가 누적되어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일어났다. 국방이 허술해졌으며 중국도 원 제국이 분해되는 내란을 겪고 있었다. 왜구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당시의 왜구들은 전기왜구(前期倭寇)로 불린다.[5]


2.2. 이성계의 종횡무진 활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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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 이후의 왜구>와 마쓰우라토(松浦黨) 中 ─ 이영
고려가 막장이라고 해서 외적들이 침략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1373년 무렵이 되어 왜구는 한양부(漢陽府)까지 쳐들어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이에 수백 리의 지방이 그 충격에 진동하였다. 강화도 근처는 아예 완전히 왜구의 뱃놀이터가 되어 수도 없이 왜구가 쳐들어오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벌벌 떠는 지경이었다.

왜구의 준동이 절정으로 치닿기 시작한 1370년대 후반부의 왜구가 침공해온 횟수, 공격한 지역, 그리고 쳐들어온 집단의 숫자인데, 가히 동네 옆집에 놀러오듯 틈만 나면 들이닥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1377년은 심각했다. 고려는 그 전해인 1376년 최영홍산대첩(鴻山大捷)에서 왜구를 대파했지만 왜구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6] 오히려 이 해는 고려로서도 굉장한 군사적 위기 상황이었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길, "왜적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와, 돛대와 돛대가 서로 이어질 지경이며, 이미 군사를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게 했으나 적의 형세가 장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 한 도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조전 원수를 보내주십시오."

- 고려사절요 1377년 3월


바다를 뒤덮는 왜구로 시작된 이 3월의 공격은 경상남도 전 지역을 유린하며 공포를 안겨 주었으며, 심지어 울산에서 지리산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이 싸움은 북방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후 6년만에 현장 지휘관으로 복귀한 이성계가 이틀치 진격로를 하루에 돌파하며 부하들의 만류도 무시하고 다짜고짜 탱크처럼 밀어 붙여서 왜구들을 멘붕 시키는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간신히 격파할 수 있었다.[7]

그러나 이성계의 활약만이 전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경상도가 이렇게 털리는 와중에, 이미 강화도 부근에서는 또다른 왜구와 고려 관군이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양광도에서도 같은 시기 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난장판을 좀 더 와닿게 표현하자면,

1. 경상도 앞바다에 바다를 뒤덮는 대규모 왜구가 나타나 이성계, 우인열, 박위가 토벌.
2. 같은 시기 강화도에서 왜구의 공세.
3. 비슷한 시기 양광도에서 왜구와 교전.
4. 그 즈음에 전라도로 왜구가 침입해서 전라남도 순천에서 정지가 왜구를 격파.
5. 서해도[8] 지역에 대규모 왜구 출몰.
6. 제주도에 2백여 척의 왜선 출몰.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가뜩이나 북쪽에서도 세기말적인 혼란 때문에 홍건적 등의 침략군이 많은 상황에서, 고려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디를 막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진퇴양난이 펼쳐진 것이다. 당시 고려가 마주한 전황을 간추려서 말하자면, (규모가 적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이 한 해에 동시에 펼쳐지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도 이성계는 고려 각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자신의 입지를 계속해서 키워 나갔다.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단번에 격파한 이성계는 고려 영토의 정반대 방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대활약을 했는데, 임견미(林堅味) 등이 달아나는 와중에도 화공으로 적을 물리쳤다.

무엇보다 최고의 활약은 승천부(昇天府)에 몰려든 왜구들이 대놓고 개경을 공격하려 할 때였다. 고려의 수도가 해적떼에 함락될 지경이었을 때, 심지어 조정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피난할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이 싸움에서는 최영과 이성계가 활약하여 승리했는데, 특히 이성계는 전황이 불리할 때마다 자신의 정예 기병을 동원하여 왜구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이 시점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이미 나라를 구했다.


2.3. 파탄이 나버린 고려의 재정[편집]


그러나 여러 무장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황산대첩 이전까지 왜구의 기세가 약화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개경에서 숨가쁜 대승리가 있은 직후에도 수원이 털렸고, 청주가 공격당해 관병들이 달아나는 사건도 있었다. 혹시라도 이 무렵에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을 보게 되면, 끝도 없이 쳐들어오는 왜구와 끊임없이 이와 싸우는 최영, 이성계, 정지, 우인열, 배극렴, 박수경, 오언 등의 사투에 눈물 날지도.

반면에 고려의 내정은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구조적인 문제와 부정부패가 겹치면서 총체적 난국이라 할 만했던 상황. 예를 들어 양백연(楊伯淵) 같은 인물은 오히려 왜구보다 더 악랄해서 백성들은 "차라리 왜적을 만나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수탈을 행했다. 말하자면 왜구는 강한 도둑이고, 부패한 고려의 관리들은 약한 도둑이였다. 물론 부패한 관리 개인의 탓도 크지만 아래 단락에 후술되어 있듯이 당시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토지 문제는 당시 고려 재정에서 가장 긴급한 현안이였으나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토지의 분배와 세금은 곧 백성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데, 소수의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장악하고, 이들의 토지가 이어져 산천을 경계로 표시하였으니, 왕조는 유지되고 있었으나 왕권은 매우 불안정하여 몇 차례 개혁은 모두 실패하였다. 걸출한 군주로 평가받는 공민왕의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은 훌륭했으나 그가 정치 전면에서 퇴장함으로써 개혁도 실패하였다. 그래서 공민왕의 죽음을 고려 왕조의 실질적인 종말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독점한 관계로 국가는 급료를 제대로 지급할 수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관료제를 운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재산 증식을 도모하지 않는한, 고관들도 경제적 곤란을 피할 길이 없었다. 조준의 지적에 따르면 360석을 받을 재상이 고작 20석밖에 받지 못했다. 고관들이 그런 상황인데 일반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조준은 "병사와 밭(田)이 함께 망했다"고 했다. 즉 병사들에게 급료를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기아 상태에 직면했으며, 국가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나라 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1380년 해도도통사를 겸임하게 된 최영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많은데 이 직함까지 역임하긴 힘들 것 같다. 그리고 수군을 꾸리려고 해도 지금 전함이 딱 백여 척에 수병도 불과 3천 명밖에 안 되는데, 제대로 싸우려면 1만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창고가 비었잖아, 우린 글렀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에 대한 우왕의 답변은 가히 가관인데, "돈이 없어서 1만 명을 꾸릴 수 없다. 3천 명의 병사가 한 명이 백 명씩 대적하라." 는 무개념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국정이 무너지고, 조정이 국고에만 신경 쓰는 상황에서는 왜적과 싸우는 장수들도 힘들 수밖에 없었다. 왜적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정지가 순천(順天)ㆍ조양(兆陽) 등지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결국 패배하자, 최영경복흥(慶復興), 우인열, 황상(黃裳) , 이인임(李仁任) 등을 만나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해도 주변에서 도와주질 않는데 어쩌겠냐? 왜적이 이 지경인데 재상들이란 작자들은 뭐하는 짓이냐?" 고 일갈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원 제국 간섭으로 국력이 쇠한 데다, 수도까지 함락됐던 홍건적의 침입, 뿌리 깊은 권문세족의 권력 독점과 나라 전체의 토지 및 토지를 미끼로 한 인력 겸병의 후폭풍이 더해지면서 제대로 망국 테크를 밟고 있었으니, 당시 장수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왜구 소탕에 난국을 겪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파일:external/oi63.tinypic.com/333ftw4.jpg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피해 상황.
어찌 보면 임진왜란 때도 털리지 않았던 나라의 조운선들도 털리기 일쑤였으니 임란 때보다 심각한 부분마저 존재한다. 이때 당시 상당수의 고려 문화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애초에 이 시기의 왜구들은 왜구라기보다는 정규군에 가까웠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서 왜구의 체계성 항목 참조.

왜구는 수만에 달했던 홍건적, 원의 잔당에 못지 않게 고려의 행정을 위협하는 군대였다. 물론 절대적인 군세로만 보면 원(몽골)이나 홍건적이 더욱 강성했지만, 왜구들은 양민 학살이나 약탈에 대한 집착이 더 심했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가 컸던 면이 있다. 특히 왜구들은 식량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잡아가는 것도 목표로 했다. 왜구들은 주로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잡아 목에 밧줄을 얽어서 끌고 갔다. 노예로 삼아 매매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지옥 같은 시간이 이어지는 도중, 드디어 반격의 전기가 마련되기 시작한다.


3. 진포해전[편집]


진포해전에서 고려는 500여 척의 대함대를 100여 척으로 격파하는 대반전을 보여준다. 이는 한반도에서 함포가 대대적으로 사용된 첫 번째 해전으로 유명하다. 이 시점에서 전기 왜구들의 기세는 한풀 꺾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박해 있던 500여 척의 대함대를 격침시켰음에도 약탈을 위해 육지로 상륙한 왜구가 남아 있었다. 오히려 퇴로가 차단된 왜구들은 육지에 있던 왜구들과 합세해 내륙 깊숙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살인, 약탈을 일삼았다. 진포해전 승리의 달콤함도 잠시, 고려 백성들의 악몽이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왜구는 옥주(沃州)[9]와 영동, 금산, 선산, 상주로, 상주에서 성주를 거쳐 함양까지 지속적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4. 사근내역 전투[편집]


진포 대첩에서 살아남은 일부 왜구들은 내륙의 옥주로 이동했다. 진포에서 옥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당시의 왜구들은 고려의 도로망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금강의 중류, 상류 지역은 기세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하천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10][11]

이렇게 한반도 깊숙이 들어선 왜구들은 이미 상륙해 있던 여타 왜구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상황으로 보면 여기저기서 고려를 약탈하고 있던 병력들이 합세하여 상당한 규모였다. 이 병력은 충청북도의 이산(利山)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어모(禦侮)를 거쳐 경상북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대 최대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학살당했다. 중모(中牟)ㆍ화령(化寧)ㆍ공성(功城)ㆍ청리(靑利) 등을 불바다로 만든 왜구는 경상북도의 상주에 이르렀다.

당시 상주는 경상도 지역의 중심지로서, 상주목 지역에는 상주목, 안동부, 경산부 등 3개의 주현과 53개의 속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비교적 규모가 있던 상주 역시 왜구의 잔혹한 칼날에 처참하게 유린되었는데, 상주에 들어선 왜구들은 장장 6일간 머물며 상주를 잔혹하게 도륙하고 불태웠으며,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면서 완전히 제 세상처럼 활보하였다.

이때, 전라도 원수 지용기(池湧奇)의 휘하에 있던 배검(裵儉)이라는 인물은 이 기세등등한 왜구를 직접 정탐하겠다는 요청을 했고, 고려군의 원수들은 이를 승낙하여 배검은 왜구가 분탕질을 치고 있는 상주로 찾아가는 짓을 했다. 배검을 본 왜구들은 즉시 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배검은 "천하에 사신을 죽이는 일이 어디에 있느냐!"되려 성화를 내었고 "우리 군의 장수들이 네놈들을 날려버리려고 하고 있다. 근데 우리가 너희들 죽인다고 뭐가 남냐?"는 발언을 했다. 여기에 대해 왜구들은 "너희가 우릴 살려주려고 하면 왜 진포에서 우리를 공격했냐."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12] 여하간 배검은 왜구들에게 술 한잔 받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왜구들은 가히 천인공노할 일을 벌이고 있었다. 겨우 나이가 3살, 4살인 어린 여자아이를 하나 잡아오더니, 씻긴 이후에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씻고 생쌀을 넣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기괴한 만행을 부린 것이다.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왜구가 도덕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무너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참 그 짓을 한 왜구들은 일이 끝나자 아이의 시체를 불태우고는, 점괘가 불리하게 나오자 "여기에 있으면 패하겠다." 싶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13]

이때 남하한 왜구들은 선주(善州)[14]와 현재의 성주군(星州)인 경산부(京山府)를 침공했다. 이렇게 경상북도 역시 철저하게 유린한 왜구는 이제 경상남도까지 이동하여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인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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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제 맘대로 활보하고 있는 왜구를 계속해서 두고만 볼 순 없었다. 사근내역 전투 당시 고려군은 9명의 원수가 결집했는데, 배극렴은 주로 경남 지역에서 왜구를 막고 있었고 김용휘, 정지, 오언, 도흥은 몇 달 전인 1380년 5월부터 전라도 광주, 화순 등에서 움직이며 왜구를 상대하고 있었다. 또한 지용기는 몇 달 전에 전라도의 정읍, 명량에서 왜구를 물리친 참이었다. 배언은 명나라에 갔다가 6월 경에 귀국한 후 급히 투입되었다. 즉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던 고려군의 주요 사령관들이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힘을 합쳤던 것이다.

당시 사근내역에 모인 이 고려군의 숫자는 어느 정도나 되었을까? 대체로 원수 1명 당 최소 1,000여 명 정도를 지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15], 그렇게 된다면 사근내역 전투에 참여한 고려군은 9,000명에서 1만을 넘는 상당한 대군이 된다. 왜구가 좀 더 잠잠해진 후에 고려가 전력을 기울여 탈탈 털어내서 시도한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총병력이 5만이고 그중에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 3만 남짓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대군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 이들은 자신의 담당 지역에서 왜구와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기 때문에 전 병력을 데려오진 않았을 수 있다. 어찌되었건 9명의 원수라는 이름값을 고려하면 적어도 5,000명 정도는 모였을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사근내역에 주둔한 왜구와 고려군은 격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 고려군은 박수경과 배언, 두 명의 원수가 참살당하고, 500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도륙되는 엄청난 참패를 겪었다. 5,000여명 중에서 단순히 십분지 일의 병력이 없어졌다고만 해도 적지 않은 타격인데,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보통 대패했다고 하여 살상율이 아주 높지는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한 참패였을 것이다.[16]

여기에 모인 정지 등의 원수들이 원균 같은 졸장도 아니고, 치열하게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노련한 장수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의 왜구가 가진 기세는 어마어마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자신들을 가로막는 관군도 사라지자 왜구는 마음 놓고 함양을 초토화했다. 옥주에서부터 함양에 이르기까지 그 근방을 불태워버린 왜구에 대하여 당시의 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적이 진포에서 패한 뒤로 군ㆍ현을 쳐서 함락시켰으며, 살육과 약탈을 멋대로 하여 왜적의 기세는 더욱 치성해졌다.

3도(道) 연해의 땅은 쓸쓸하게 텅 비어 버렸다. 왜란이 있던 이후로, 여지껏 이와 같이 참혹한 일은 또 없었다.

- 고려사절요 1380년



5. 황산대첩[편집]



5.1. 이성계, 드디어 출전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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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
사근내역에 지방의 원수들이 집결하고 왜구와 싸우려고 하던 도중,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巡察使)로 임명하니, 드디어 이성계는 고려 왜구 토벌군의 수장으로서 출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찬성사(贊成事) 변안열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부장으로 하게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과 평리 우인열, 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 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 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 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 척산군(陟山君) 이원계를 원수로 삼아 모두 이성계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승리를 위해 선별된 군대가 출진할 무렵, 흰 무지개가 마치 를 뚫는 듯한 모양새가 나오자 일관이 "싸움을 이길 징조다."면서 군대의 사기를 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군대의 사기를 올리려던 것도 잠시, 이성계가 도착하기도 전에 고려군은 사근내역 전투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고 만다. 이성계의 군대가 이동하는 중에도 여기저기서 도륙된 시체들이 널려 있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참담한 모습을 본 이성계는 경험 많은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측은하고도 분한 마음에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체로 늘어진 길을 지나 이성계의 군대는 남원(南原)에 도착했는데, 왜구와 120여 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던 고려군의 배극렴 등은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대단히 기뻐했다. 앞선 전투에서 패배하여 군대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을 텐데 다행히 지원군이 도착했으니 군대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은 당연한 것.

그런데 이성계는 도착하자마자 "오늘은 쉬고 내일 곧바로 싸운다." 고 작전을 정했고, 여타 장수들은 "적군이 험지에 들어가서 지금 싸우면 힘듭니다. 좀 기다렸다 나오면 싸웁시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되려 화를 내며 "내가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적을 보지 못하는 것밖에 없는데, 이제 적을 봤는데 싸우지 말라고? 개소리 집어쳐!" 라며 소리쳤고, 고려군은 지원군이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적군과 교전하기 위하여 움직이게 된다.


5.2. 전라도로 이동한 왜구[편집]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남원으로 이동하고 있을 무렵, 당시의 왜구는 상술했듯 그 기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을 완벽하게 때려눕힌 왜구들은 남하하는 대신 팔량치(八良峙)를 건너 이번에는 전라도 지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주, 합포, 울주 등 왜구의 침입이 자주 있었던 경남 지역에서 상당수의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의견대로라면 왜구는 고려군의 포위망에 토끼몰이 당한 셈이 되는데, 이런 주장에서는 사근내역 전투가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되기도 한다.

즉, 사근내역 전투는 9명의 원수과 모여 일대 대결전을 치르고 패배한 전투가 아니라, 고려군이 왜구를 여기저기서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추격하는 도중에 왜구가 배언과 박수경의 부대를 격파하고 남원 쪽으로 도주한 전투라는 이야기. 사근내역 전투의 패배 이후에도 특별히 여타 지휘관들이 처벌 받은 정황이 없기에 꽤 그럴듯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왜구는 위풍당하게 전라도로 이동한 것이 아닌 경상도로 도주하지 못해 전라도로 피한 것이다.[17] 전략적으로 왜구들은 진포해전 때문에 고려에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경상도 해안 지대를 훑고 규슈로부터 지원군을 받아 귀환하는 것이 최선의 진로였을 텐데 굳이 방향을 꺾어 멀리 전라도로 향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다. 설령 사근내역 전투에서 대결전을 벌여서 승리했다쳐도 언제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할지 모르는 이상 전라도로 향해 고립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래에서 서술하듯 왜구들이 북으로 치고 올라가겠다고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허장성세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는 경상도를 통해서 일본으로 귀환하려다가 사근내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한번 해볼만한데 이 기회에 아예 고려라는 나라를 접수해봐? 하고 방향을 틀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다만 여기까지 이르면 사료로는 더 확증할 수 없는 추론의 영역이기에 뭐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어찌되었건 확실한 것은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했으며, 왜구는 더 이상 경상도로 움직이지 않고, 전라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fe85c82adab7aad82de211255042d01ef43eaf4e73594cb2c15602f625943d30.png이후 왜구는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까지 이동했으며, 여기서 남원산성(南原山城)을 공격했다. 그러나 남원산성은 왜구의 매세운 공격을 어찌어찌 막아내었다.[18] 1378년 고려 조정은 각 도에 사자를 보내 산성의 수축을 명령한 적이 있었는데,[19] 왜구의 침범이 특히 잦은 남해안 지역의 산성들은 그 시기를 기점으로 수비가 강화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어찌 되었건 요지에 자리 잡은 남원산성을 떨어뜨리는 일이 쉽지 않자 왜구는 일단 물러났는데, 대신 운봉현(雲峰縣)을 불태워버리고 인월역(引月驛)에 자리를 잡았다. 인월역의 남쪽은 험준한 지리산의 기슭에 임하고 서북쪽에는 황산이, 동북쪽에는 성산이 있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방어하기에 쉽고, 역으로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았다.[20][21] 그리고 왜구는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다.

"장차 광주의 금성(金城)[22]

에서 말을 먹여 북으로 올라가겠다!"[23]


북으로 올라가겠다는 것은 수도 개경을 공격하겠다는 소리였다. 이 말에 수도와 지방이 모두 패닉 상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 고려군의 주력이 북쪽에 수비진을 만들면 그 사이에 왜구가 남쪽 해안가로 나가 바다로 다시 나가려는 의도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하간 저런 망발을 당당하게 할 수 있고 고려 조정이 이를 그저 개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왜구의 기세를 짐작케 한다.

이성계가 남원에 도착했을 때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고려군이 패배한다면 왜구가 전력을 보존하여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수도 개경마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5.3. 양군 전력의 추정[편집]


황산대첩에서 맞서 싸운 양군의 규모를 알기는 쉽지 않다. 이성계가 조선 왕조의 태조이며, 황산대첩이 무인으로서 이성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인 만큼 과장이 들어갈 수 있다는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규모에 대한 확실한 언급이 없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황산대첩에서 군대의 숫자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패배 이후 살아남은 왜구 70여 명 가량이 산으로 도주했다는 부분과, 아군의 병력이 적에 비해 10배나 열세였다는 부분 정도다.

여기서 적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과장이거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여기는 의견도 있다. 혹은 이것이 고려군 전체보다 10배 많다는 것이 아닌 이성계의 친병(親兵)보다 10배 많다는 이야기라는 시각도 있다. 정부군과는 별개의 '가별초(家別抄)'라는 사병을 가지고 있던 이성계는 전투에 있어 여러차례 자신의 친병을 활용했고, 사서에는 몇 차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성계는 1361년 박의(朴儀)를 토벌하면서 1,500명의 친병을 동원했고, 1362년의 개경 수복 작전에서는 친병 2,000여 명을 동원했으며, 1364년에는 최유를 무찌르기 위해 1,000명의 병력을, 1370년에는 친병 1,600여 명을 동원했다. 아무래도 이성계가 전투에 나서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친병이며, 여타 작전도 친병 위주로 움직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성계의 친병이 대략 2,000여 명이고 적군의 숫자가 이보다 10배라면 적은 20,000명 정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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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통나무 배 유물
군대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것은 왜구나 고려군이나 어느 정도가 충원되고 어느 정도가 사라졌는지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진포 대첩에서 처음 왜구가 나타났을 시기의 병력은 당시 왜선이 500여 척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다. 당시 왜선 승선인원이 대략 소함 25명, 중함 50명, 대함 100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중함을 기준으로 2만~3만 사이가 된다. 물론 포로나 말 등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려면 이보다는 적을 것이다. 1992년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수중 갯벌에서 발굴된 소위 '진도 통나무배' 유물은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3~14세기 무렵의 중국 고선박 또는 왜선으로 짐작되는데,"中 고선박 추정 '진도 통나무배' 왜선인 듯"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략 중함 규모다. 다만 진포해전 기록에는 당시 왜선 함대에는 승선인원이 100명에 이르는 대함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진포 대첩에서 사망하거나 전투 불능이 된 왜구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선 알 방법 같은건 전혀 없다. 주력은 육지로 상륙했다지만 진포 대첩에서 함선과 포로를 지키다가 죽은 사상자 수를 알 수 없다. 고려사절요에서는 거의 다 죽였다(殆盡)는 식으로 언급이 되고 있긴 하나 대략적인 숫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한 이 왜구가 내륙으로 이동한 뒤 여타 세력과 합쳐지게 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추정도 어렵다. 진포 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가 몇 명인지, 여기에 더해 합류한 왜구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 황산대첩을 연구한 이상훈은 『고려 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에서 고려군의 숫자는 2만 가까이는 되고 왜구는 1만명 이하일 것이라 추정하기도 했는데, 이상훈의 연구에서도 고려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주장에 근거가 있지만 왜구의 규모에 대해서는 별다른 근거 제시가 없는 편이다.

다만 황산대첩 이후 고려군이 왜구에게서 1,600여 필이나 되는 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죽은 전마를 제외하고 노획한게 이 정도라면 실제 전투에서는 최소 2,000여 기 정도는 되는 기병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구의 규모를 가볍게 생각 할 수 없다. 유사 이래 대부분의 전투에서 보병이 기병보다 숫자가 더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기(步騎)의 비율이 1:2만 되어도 왜구는 4,800여명이 넘고, 1:4 정도에 이르면 만 단위를 육박한다. 그러나 이 말들이 기병용 군마가 아닌 물자를 수송하는데 쓰인 말일수도 있다. 대량의 노획물을 운송을 하던 말을 노획했을수도 있다는 것. 다만 황산대첩에서 왜구가 철기병을 운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전세가 기울자 왜구들이 타던 말들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갔다가 포위를 당해 살육당하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말들과 함께 했던 것을 보면 기병일 확율이 높고, 또 일부는 운송수단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왜구는 사근내역 전투에서 9명의 원수가 이끈 5,000여명 ~ 1만 가량의 고려군을 대파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사근내역 전투가 일대 결전이 아닌 왜구가 일부 포위망을 돌파하는 전투였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전이었다는 일반적인 의견에 따를 시에 저 정도 대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왜구의 숫자는 상당했을 수 밖에 없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보았을때 왜구의 숫자는 간격이 좀 크긴 하겠지만 최소 5,000여명에서 최대 3만 가까이, 그 중간치를 보자면 1만에서 1만 5천여명, 2만명 남짓 정도가 될 수 있다. 가장 적은 추정치인 오천여명도 보통 해적떼의 숫자는 아니다. 후대에 확실한 국가간의 대결인 임진왜란에서 중요 전투인 이치 전투 등도 이보다는 적은 규모다. 반대로 최대치로 추정할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다음으로는 고려군의 규모인데, 원수들의 숫자가 거론되기 때문에 왜구들보다는 숫자에서 고려해볼만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여기도 명확하진 않다. 우왕이 최영에게 "일 대 백으로 싸우셈." 이라는 드립을 친게 바로 이 해였으니 고려로서도 썩 대군을 동원하기 쉬운 여건은 아니었고, 상황이 호전된 시점에서 요동 정벌에 전력을 기울일 때도 고려가 동원한 병력은 5만이였으며, 이조차도 보급 병력을 제외한 순수 전투 병력은 3만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1380년의 전선에서 고려가 일대 회전 한방에 내놓을 수 있는 병력은 무슨 수를 써도 2만 명 가량 이상은 힘들었을 것이 자명하다.

이성계의 군대에는 8명의 원수들이 참전했다. 원수가 대략 1천여 명을 지휘한다고 보면 이성계의 지원군은 8,000명 ~ 1만 명 정도가 될 수 있다. 다만 사근내역 전투에는 전라도나 경상도에 있던 원수들뿐 아니라, 전투 직전에 귀국한 배언 등도 급하게 투입되었는데 그렇다면 당시에 고려 중앙의 병력이 투입되었을 테니, 재차 원수를 보낸다고 해도 그만한 군대가 주어졌을지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진포 대첩이 벌어지는 무렵에 급하게 양광도와 서해도에서 병력을 징발하는 언급이 있는데, 당시 조정에서도 군사를 부랴부랴 급하게 끌어모으던 게 아닌가 싶은 부분이다. 이럴 경우에는 이후 파견되는 이성계의 군대가 급하게 끌어모아 숫자나 수준에서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 이 이성계의 군대는 사근내역 전투에서 패배한 고려군과 합류했다. 사근내역 전투에 참여한 병력의 숫자도 애매모호하기에 양군이 합쳐져서 얼마나 될지는 알기 힘들다. 또한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하면서 전사한 500여 명 외에 탈주한 병사들이 있다면[24] 어느 정도나 수습했을지도 알기 어렵다.

최대로 잡으면 고려군은 이 당시 2만 명은 되었을 것이며, 최소로 잡는다면 1만여 명 안팎을 오갔을 것이다.


5.4. 일대 결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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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지원군으로 도착한 다음날 아침 바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이성계는 높이 477미터의 여원치(女院峙) 고개를 넘어 운봉(雲峰)에 이르렀고, 운봉 분지를 지나 황산 서북쪽에 도달하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 적진을 살폈다. 이 시점에서 이성계와 일본군의 거리는 불과 수십 리 정도의 거리였다.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적진을 살피고 계획을 세운 이성계는 그렇게 말하며 정산봉 오른쪽의 작은 길로는 자신이 부대를 이끌고 나아가고, 대신 나머지 부대는 평탄한 길로 나아가게 했다. "후면을 공격할 것이다." 는 이성계의 언급을 보았을 때, 이는 고려군이 평탄한 길로 나아갔을 때 왜구가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공격하려고 하는 점을 예측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정산봉은 황산의 한 줄기로 황산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성계가 나아간 정산봉 오른쪽의 길은 고려군을 기준으로 볼 때 황산의 동쪽 자락에서 동북으로 난 길로 추정되며, 평탄한 길은 정산봉 오른쪽의 동무와 서무로 이어지는 길로 추정된다.

동무와 서무 방향으로 나아간 고려군의 여타 병력은 조금 전진을 하다가 강력한 적군의 기세를 보고는 무리하지 않고 우선 물러났다. 그 무렵, 왜구들은 반대편의 길을 통해 재빠른 기병 등을 동원해 고려군의 뒤를 잡으려고 움직였다. 그러나 이는 이성계의 예측대로였기 때문에, 왜구의 기병들은 고려군의 뒤를 치지 못하고 그 길로 오고 있던 이성계와 교전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군의 병력은 둘로 나뉘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친병을 다른 장수에게 맡길 리가 없으니 이 당시 왜구 기병과 교전했던 고려군은 이성계의 친병 위주라 여겨진다. 이성계가 여진족 사이에 영향력이 막대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실제로 여진족이 포함된 기병을 동원했던 사례로 추측이 되는 만큼[25] 이 싸움은 고려,여진 기병 VS 왜구 기병이라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직접 을 잡고 대우전(大羽箭)과 유엽전(柳葉箭) 수십 발을 쏘아대며 왜구를 죽였다. 이렇게 벌어진 난전은 3차례를 이어졌는데, 나중에 이르러서는 진흙탕에서 교전을 벌일 정도였다. 좁은 오솔길에는 크게 교전을 벌일 만한 뻘판은 없으므로,3번의 교전이 진행되는 동안 이성계가 적을 점점 평탄지로 유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서 평탄한 길로 나서다가 회군한 고려군이 합세하여 같이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니 고려군의 뒤를 치려던 왜구를 오히려 고려군이 협공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난전을 벌이며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싸우다가 어느 정도 적을 물리치고 보니, 대부분의 사상자는 왜구들이었고 고려군은 의외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앞서 평탄한 길로 가던 고려군이 회군하던 무렵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보면 이 싸움은 저녁까지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등에서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두 소탕해 버렸다."는 식으로 전투가 단 하루만에 끝났다고 되어 있는데 여러 정황을 보면 이는 실제하고는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26] 이후에 이성계가 하늘의 해를 가리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미 진 해를 가리킬 순 없으니 전투가 이틀에 걸쳐 벌어진 것은 확실하다.

관련 기록에서는 특별히 날짜의 변경을 가리키는 기록은 없으나 저 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날짜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날에 벌어진 싸움에서 고려군은 왜구의 기병을 되려 역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렇게 되자 다음날 왜구는 험준한 위치를 살려 굳게 버티고만 있으면서 싸우려고 하질 않았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왜구는 고려군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참 공격하기 뭐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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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왜구를 이끌던 대장은 아기발도(阿其拔都)라는 자였다. 아기발도는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용맹하고 날랬다. 아기발도는 처음에는 고려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워낙 용맹해서 왜구들이 청하여 대장으로 모시고 왔다. 왜구 두목들이 아기발도에게 무릎을 꿇었고, 아기발도가 군령을 주관하고 있었다. 아기발도는 이성계의 포진을 보자 "저 장수는 지금까지 봐온 장수들과는 다르니 단단히 준비하라. 오늘 전투는 너희들 마땅히 각기 조심하라"고 말했다.[27]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성계가 거느리고 있던 친병들은 보통 전투력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거의 모든 전투세력과 싸웠던 경험을 지닌 가별초였으니 여타 고려군과 다른 면모가 보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자 이성계는 일단 요해지에 군대를 배치한 후, 적을 끌어내기 위해 휘하의 이대중(李大中) 및 10여 명을 시켜 싸움을 걸었다.[28] 그렇지만 이후 기록에서 적이 계속 위에서 내려치는 포지션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별 소득이 없었던 모양.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직접 적을 보며 군대를 동원해 아래서부터 쳐올리게 했지만, 왜구들도 자신들이 현재의 지리적 이점을 잃어버리면 꼼짝없이 죽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왜구들이 위치한 곳은 야트마한 야산이 아니라 관악산보다도 더 높았다. 그런 곳에서 왜구도 죽을힘을 다해(死力) 버티며 위에서 공격을 퍼부어대니 고려군도 당해 낼 방법이 없었던 것. 이렇게 되자 고려군은 교전에서 패배를 당하고 다시 내려와야 했다. 이성계는 그 모습을 보고 여타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꽤나 지리적 여건이 불리했던 모양.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본 이성계는 다시 한 번 공격을 시도했다. 나팔을 불어 군대를 정돈시킨 이성계는 재차 적진과 부딪혔다. 고려군은 마치 개미가 절벽에 붙어 가듯 어렵게 어렵게 공격을 했는데, 이성계 역시 이 전투에서 직접 나섰다.

그런데 한참 그렇게 험지에서 난전이 벌어지던 중에, 왜구의 장수 한 명이 창을 들고 이성계에게 다가가고 있자 이지란은 깜짝 놀라 이성계에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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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란(李之蘭)

"영공(令公),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29]


그러나 한참 난전 중인 이성계는 전장의 소음 때문에 이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러자 이지란은 직접 활을 쏘아 그 장수를 죽였다. 자신이 죽을 뻔한 위기도 알지 못했을 정도니 당시 전투경험이 쌓일 대로 쌓였던 이성계에게도 정말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표적이 되어 쓰러지자 이성계는 급하게 다른 말을 탔으나, 바꿔 탄 말도 또 화살에 맞아 쓰러져 말을 연거푸 바꿔 타야 할 정도였다.[30] 그런 상황이니 이성계 본인도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적의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고 만다. 관련 전투 기록에서 본인의 무용 + 창업자 버프로 절대무적으로 나오는 이성계가 적에게 당하는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

하지만 이성계는 억지로 화살을 뽑아내고 참고 일부러 더 열심히 싸워서, 여타 병사들은 이성계가 부상당한 줄을 몰라 사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하간 정산봉의 난전에 버금가는, 그야말로 혈투가 펼쳐졌다. 이성계 자신도 죽어라 싸우다 보니 적에게 포위되기 일쑤였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의 기병들과 힘을 합쳐 돌격하는 충격력을 사용해 포위망을 돌파하곤 했다. 게다가 워낙 괴물같이 싸우며 적을 죽여대자 적도 기세에 주춤해서 이성계에게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게 싸우는 와중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이성계는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맹세하고 주위에게 소리쳤다.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것이다(怯者退 我且死賊)!"


장수가 저러는데 옆에서 "예, 저는 겁나니 도망가겠습니다."(...) 할 사람은 없을 테니, 같이 싸우는 고려군도 사기가 충천해 싸웠다고 한다.[31] 그런데 고려군이 이성계의 분투로 힘을 낼 때, 왜구의 기세도 여전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왜구의 대장 아기발도가 여기저기서 날뛰며 흰 말을 타고 돌격하자 기병의 충격력에 여타 고려군은 계속 돌파당했고, 이게 반복되다 보니 고려군은 아기발도가 보이기만 해도 물러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아기발도의 무용이 워낙 대단했는지, 이를 본 이성계는 저도 모르게 감탄해서 이지란에게 사로잡을 수 없겠느냐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이성계는 과거, 적이었던 처명(處明)[32] 등을 항복시켜 부하로 만든 경험이 있어서 그런 목적에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워낙 치열한 난전이 펼쳐졌던 데다 말에 탄 아기발도가 그 난전의 주역으로서 마음대로 휩쓸고 있는 지경이라 생포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이지란은 "그러려면 사람이 많이 상할 겁니다." 라면서 어렵겠다는 말을 했고, 이에 이성계는 아기발도를 생포할 생각을 포기하고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아기발도는 중갑옷을 입고 투구로 얼굴과 목을 감싸고 있어 화살을 쏠 만한 틈이 없었다.[33][34] 그러자 이성계는 이지란에게 "내가 저 녀석 투구 꼭지를 쏠 테니까, 네가 마무리해라." 라고 말하고 그대로 아기발도의 투구 꼭지를 쏘아 맞췄다. 투구 끈이 끊어진 아기발도가 투구가 떨어지기 직전 붙잡아 다시 투구를 고쳐 쓰려고 할 때 이성계는 다시 화살을 쏘아 투구의 꼭지를 맞추니 마침내 투구가 떨어졌다. 투구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이지란은 화살을 쏘아 저격에 성공, 아기발도를 죽여 버렸다.

이렇게 무협지에서나 볼법한 일이 벌어지자 왜구의 사기도 크게 꺾였다. 전투의 분위기는 완전히 넘어가 버렸고, 이성계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휘저어대자 대장을 잃은 적은 변변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정예군을 속절없이 잃었으며, 이 시점에서 전세는 완전히 고려군 쪽으로 기울어 왜구는 타던 말들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왜구들의 비명소리가 일만 마리 소의 울음소리 같았다고 한다. 고려군은 적이 붕괴하는 통에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완전히 사기가 올라 진격, 또 진격했다. 사면에서 공격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다수 왜구들은 도주에 실패하고 포위되어 살육당한 듯하다.

마침내 고려군은 왜구를 완전히 포위 -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왜구는 전부 다 몰살당하고, 70여 명의 병력만이 간신히 지리산으로 도망쳤을 뿐이다. 이성계는 그 남은 왜구에 대해서는 "어차피 적의 정예군은 다 섬멸했다." 며 추격하진 않았다.[35] 워낙 대살육이 벌어진 통에 냇물이 모두 피로 붉어져 6일,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36] 바위는 왜구의 피로 붉게 불들어 혈암(血巖)이라 했다.[37] 그밖에 말 1천 6백여 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의 황산대첩 장면.
여담으로 이 장면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자세한 건 아래의 '기타' 부분 참조.


5.5. 영웅의 귀환[편집]


없애버린 적의 숫자도 대단하고 전리품도 굉장히 많이 얻은 대승이라, 여러 번 승리를 거둔 이성계도 내심 본인이 기특했는지(?) "적군을 물리치려면 이렇게 해야지!" 하고 자화자찬 하기도 했다.[38] 그래도 본인이 워낙 고생하여 대승을 거둔 마당에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군악을 울리며 승리의 즐거움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민가에는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대승을 거둔 이성계는 위풍당당하게 군단을 이끌고 개경으로 귀환했다. 이 때 조정에서도 승리 소식을 듣고 분위기가 되어 판삼사(判三司)였던 최영은 노구[39]를 이끌고 직접 백관을 이끌고 나와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이성계를 맞이했다. 말을 타고 오던 이성계는 최영 등이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에서 내려 최영에게 절을 했고, 이성계의 절을 받은 최영도 맞절을 하더니 감격에 겨워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했겠소이까?"


최영의 모습을 본 이성계는 황급이 고개를 숙이며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라는 식으로 말을 했는데, 감정이 북받힌 최영은 이제 거의 오열하면서 소리쳤다.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40]


그도 그럴 것이 고려가 왜구에 농락당한 것이 40여 년이 되어가는데, 40여년을 왜구에 야금야금 뜯어먹히다가 대반격을 먹였으니 최영의 심정도 보통 감회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왕은 이성계에게 금 50냥을 내렸는데 이것은 이성계가 사절했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의 승리로 완전히 고려의 영웅이 되었고, 이색(李穡), 김구용(金九容), 권근(權近)은 그의 무용을 칭송하는 시를 올려 승리를 하례하였다.

한 고조 유방(劉邦)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듯,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 전주(全州)에 들러 오목대에서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과 지역 토호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드디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포부를 드러냈다.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황거중, 정몽주, 이백유가 함께 했고 직제학 최용갑은 군사들에게 술을 제공했다. 이 자리에서 고려의 충신이었던 정몽주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꿈꾼다는 걸 알아차리고 답답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전주 외곽까지 말을 달려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운명을 걱정하는 우국시 '석벽제영(石壁題詠)'을 읊었다. 그래서 남고산 자락 바위에는 당시 정몽주가 읊은 시가 암각서로 남아있다. 정몽주가 비록 조선 개국에 반대하다 죽기는 하였지만 절개의 상징으로 조선조에서도 추앙받았고 사림파 계보의 대부격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가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 일화와 조선 왕조의 발흥지가 전주라는 것 때문에 전주를 '풍패(豊沛)' 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고 전주 객사를 풍패지관(豊沛之館), 전주성 남문을 풍남문(豊南門), 전주성 서문을 패서문(沛西門)으로 명하였다.


6. 의의와 영향[편집]


"신(臣) 등이 생각하기를, 왜놈들은 표독하고 날래며 죽음을 가벼이 여겨 단병(短兵) 을 잘 사용하므로 만약 틈을 타서 근접해 예리한 칼로써 서로 접전(接戰)한다면 우리가 이기지 못할 것은 십상팔구(十常八九)이니, 전조(前朝/고려) 의 말기를 거울삼을 수가 있겠습니다. 운봉(雲峰)의 싸움에 우리 태조(太祖)의 신무(神武)가 없었더라면 삼도(三道)의 백성이 거의 남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 《세조실록》 1457년 2월 25일 기사


"왜인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했고 우리는 보전에 약했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이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으로 된 것은 아니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14권 발황산대첩비(跋荒山大捷碑)


황산대첩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왜구를 물리친 대승리였지만, 진포해전과 같이 연결시켜서 보면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전까지 왜구에 완전히 농락당하며 한반도 전역을 유린당하던 고려가, 더 나아가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바다' 에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된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왜구와의 싸움은 왜구가 여러 고을을 초토화하고 있으면, 지방의 병력이 힘겹게 버티다가 뒤늦게 도착한 정규군이 간신히 막아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진포 대첩을 기점으로 드디어 고려는 해상에서 왜구에 대한 반격을 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역으로 대마도를 공격하는 정도에 이를 수 있었다. 이후 고려는 물론이고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국가는 일본의 육상 병력에 해를 입더라도 해상에서는 적을 압도하였다.[41] 그 이전까지 해전에서는 어차피 발리니까 수군 키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 대놓고 나오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일대 반격의 시점이 왜구의 가장 거대한 침략이 이루어진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어찌보면 극적이다. 이는 이성계의 친병을 비롯한 고려의 정예군이 후대의 사람들의 생각보다 강성했다는 점을 증명하기도 한다. 즉, 500여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여러 지점의 왜구들이 하나의 장소에 결집했기 때문에, 이성계에게 박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진포해전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승리였지만, 육지에 상륙한 병력은 내지의 왜구와 연계하여 거대한 규모가 되었고,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 관군이 무참하게 적에게 대패할 정도였다. 만약에 또 다른 대패를 당한다면 대규모의 왜구가 무사히 살아나가서 또다시 한반도를 유린하거나, 더 최악의 가정으로는 영국을 침공해서 알박았던 덴마크 바이킹들처럼 일본 본토에서 패한 남조 조정이 아예 점령한 한반도 남부로 옮겨와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버렸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게 목적이었다는 학설 역시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산대첩은 왜구의 세력이 총 집결하여 건너온 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심리적으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혼란기의 마무리를 장식한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국가 영웅으로서 대하는 이성계에 대한 찬양은 장장 40여 년간 왜구에 유린되어온 고려 조정의 심정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진포 전투 - 황산대첩은 장기적으로 보았을때 왜구의 세가 약해지는 기점을 가져왔다. 물론 왜구는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이후 관음포 해전이 벌어진 후 즈음에도 침입 자체는 계속되었지만, 500척을 동원했던 정규군 수준의 왜구의 힘은 분명히 해적 노략질 수준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도 진포 전투 - 황산 전투의 승리는 왜구의 공격에 있어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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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21년(1372년) 이후 水軍 체계의 재검토 中 ─ 이강욱, 군사지 제 82호

가장 큰 변화는 왜구의 침입 루트의 변화다. 진포해전과 황산대첩 이전까지 한반도 전 지역을 들쑤시고, 특히 수도와 가까운 강화도 부근에서 어정거리며 개경을 수도 없이 위협했으며 서남해와 서해의 세미를 완전히 털어먹던 왜구는 사라지고, 대신 동해안을 비적거리는 정도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 40여 년간 고려의 조창 및 조운선이 완전히 왜구에게 털렸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변화이다. 왜구는 이제 직접적으로 서해안의 조운선 루트를 털어먹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상륙해서 깊숙하게 진군하면서 어떻게든 내륙으로 들어가 식량을 얻으려고 하는 정도로 바뀌었으며, 이 역시 잇달은 대승으로 자신감과 경험을 얻은 고려 조정 등에서 대책을 마련해가며 점점 근절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커진 자신감은 드디어 박위제1차 대마도 정벌로 이어졌다. 물론, 결정적으로 왜구 자체를 박멸하게 된 건 세종 초 상왕이던 태종이 주도적으로 시행한 1419년 대마도 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군사 - 정치적 호전을 제껴두고 보자면, 이성계 개인의 위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하다. 이전까지 이성계는 변방 출신에 별도의 세력을 가진 역전의 무장이었지만, 이제 황산대첩의 승리로 북방뿐만 아니라 고려 전국에서 손꼽히는 영웅이 되었다. 흔들리는 나라, 전쟁 영웅, 그리고 별도로 가진 강력한 세력. 이렇게 되면 판이 짜여졌다고 할 만할 텐데, 유일하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과거 무신정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여기에 명분을 더해줄 지식인의 존재밖에 없었다.


7. 황산대첩비[편집]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103호

104호

105호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
남원 황산대첩비지
금산 칠백의총

굉장한 대승, 그것도 조선 왕조의 창업자가 거둔 승리였으니 당연히 이를 기념하는 물건들도 만들어졌다. 오히려 좀 의외로 늦었다고 할만한 선조 시절 1577년에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의 청으로 전라북도 남원에 황산대첩비가 만들어졌다. 이 황산대첩비는 수 백년을 지나도 별 일 없이[42] 무탈하게 있었는데, 광복이 눈 앞이던 1945년 1월에 일제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여타 이야기에서는 일제가 민족 문화 말살 차원에서 남원 경찰이 소방대를 이용해 부수어버렸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관련된 증언 하나는 좀 다르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는 향토 사학자 이만기(李萬器)의 말에 따르면, 1945년 1월 16일 밤에 술에 꽐라가 된 남원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와서는 술김에 폭파시켜 버리고 총질까지 했다고 한다.[43] 다만, 폭파가 우발적이었건 계획적이었건 그 전부터 황산대첩비를 날려버리자는 계획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경에 '반시국적 고적은 없애버려야 한다.'공문이 내려왔기 때문.[44] 여하간 완전히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다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고 나서야 복원한 게 현재의 모습이다. 이 때문에 비석을 보물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비가 있던 자리로서 사적으로 지정이 된 것이다.


8. 기타[편집]


이렇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투들 가운데 하나임에도 각종 매체에서 그 존재감이 없는 편이다. 사실 매체들 대부분이 이성계가 뛰어난 명장이었다는 사실보다는 개창군주로서의 이성계를 더 강조하기 때문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잘 보여주지 않는 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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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소설인 「시골무사 이성계」는 드물게 황산대첩을 다룬 2차 창작물이다. 이 책의 전부분에 걸쳐 황산대첩이 주요 무대로 떠오르는데, 통쾌한 싸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독한 처절함이 묻어나오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성계는 조선 태조나 전쟁 영웅으로서의 위풍당당한 모습이라기보다는 변방에서 오랜 시간 사투를 거듭하며 늙은 무장이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 일생의 전기를 만나는 서사가 주를 이룬다. 그 외에 정도전이 이성계의 책사로 나오는데, 작가 본인이 언급하듯 정도전은 이 때 이성계와 만난 적이 없다.[45] 소설은 꽤 괜찮은 평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작가 서권은 2009년 5월 11일에 별세했다.

위화도 회군 시점에서 시작하는 용의 눈물에서는 당연히 전투가 다뤄지지는 않고, 등장 인물의 대사에서 언급된다. 이성계와 정몽주가 대화를 나누다가 정몽주가 황산대첩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고, 말년의 이성계가 손자 이제에게 황산에서의 무용담을 이야기해 주자 양녕이 이를 흥미진진하게 듣는 장면이 나온다. 장면만 놓고 보면 할아버지와 손자의 훈훈한 대화 장면이지만, 한때는 전장의 공포였던 용장이자 조선을 개국한 왕인 이성계가 이제 권세도 젊음도 다 잃은 뒤의 신세를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해서 어찌 보면 굉장히 씁쓸한 장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온 양녕은 할아버지의 처지를 가엾게 여긴다.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위의 용의 눈물과 비슷한 시대를 다룬 KBS 사극 정도전에서 작품 초반의 중요한 전투로 나온다.(위의 '일대 결전'문단의 마지막에 나온 영상.) 여기서도 이성계, 이지란의 무쌍이 펼쳐진다.

다만, 한겨울에 촬영을 했고, 워낙 격렬하게 찍은 탓인지 이성계 역의 유동근은 손가락에 상처를 입기도 하였고, 특히나 이지란 역의 선동혁은 무려 세 번이나 낙마한 탓에 갈비뼈를 다치고 의식마저 잃을 뻔했다고 하는 등[46] 촬영 내내 고생이 많았다고.

전투 묘사가 기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몇 안 되는 기록에 토대를 두고 각색을 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이성계가 화살을 맞았어도 기죽지 않고 병사들에게 호령을 하는 장면이나, 난전 중 뒤에서 이성계에게 활을 쏜 왜구들을 이지란이 죽이는 장면 등은 기록을 토대로 각색한 묘사로 보인다. 원래는 이성계와 휘하 기병이 활약했다고 하지만, 역사 기록상의 이성계조차 험한 지형에서 적군의 공격을 받아 말을 몇번 갈아 탔어야 할 정도였고, 조선시대 선비들도 "이런 지형에서 기병이 어떻게 활약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을 정도였으므로 그 점은 묘사되지 않았다. 또한, 전쟁 뒤의 승리의 함성 같은 것도 외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처절함이 위의 소설 못지 않게 드러나며 호평을 받았다. 여담으로, 그 장면을 당시 나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왜구의 공격으로 인해 이리저리 떠돌던 정도전도 간접적으로나마 이성계를 멀리서 보기도 하였다.
[1] 우왕 6년[2]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3] 제1차 요동정벌 당시 항복하여 귀순한 장수.[4] 엄밀히 말하자면 침입 자체는 이후에도 있었다. 다만 1380년의 정규군에 필적하는 충격과 공포 수준의 포스는 보이지 않게 된다. 황산대첩 직전에는 작은 국가 하나쯤은 굴복시킬 만한 규모의 병사들에 가까웠으나, 이후에는 그냥 잘 무장한 해적, 즉 일반적인 왜구로 돌아갔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의 왜구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5] 이 전기 왜구는 이후 나타나는 16세기의 후기 왜구에 비해서는 관심이나 연구 성과가 적은 편이다. 사료가 후기 왜구사에 비해 부족한 탓도 크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도 참조하자.[6] 홍산 대첩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왜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이영 교수는 "소규모의 병력을 대상으로 했고 전과도 불분명하다. 홍산 전투가 장렬하게 기록된 것은 '심리적인 반격' 의 부분이 더 크다." 는 식으로 말을 했다. 규모가 커서 대승이 아니라, 100여년의 혼란기를 거쳐서 몰락한 고려군이 패배만 하다가 제대로 한방 먹여준 것이 홍산 전투이기에 특별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홍산·진포·황산대첩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中).[7] 이 싸움에는 미래의 정종(定宗)인 이방과(李芳果)도 참전한 것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이방과는 지리적 요건에서 밀리니 싸우기 힘들다고 말렸지만, 이성계는 "개소리하지 마라." 라고 무시하고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충직한 아들이었던 정종은 어려운 전투에도 끝까지 아버지 곁을 지키며 싸웠다.[8] 현 황해도.[9] 충북 옥천.[10] 홍산·진포·황산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 이영.[11] 이에 대한 일본에서의 일부 시각은 "왜구가 내륙으로 익숙하게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체가 고려인들이어서 아닌가?" 하는 식의 시선이 있다. 금강을 따라 이동하는게 어렵지 않다는 것은 이에 대한 반박의 차원에서 나온 연구의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의 왜구들은 고려의 행정 자체를 꿰뚫고 전략적인 기동을 하는 양상도 나타나기에, 더욱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거나 다양한 세력의 영향이 보인다는 반론도 있다.[12] 왜구들의 이런 자존심이나 나름대로 수준이 높은 기마병을 이용한 활약으로 볼 때, 단순히 가난한 주민들이 주축이 되었던 다른 시대의 왜구들과는 다르게, 남조 세력의 지원이나 호족들 혹은 다른 곳의 해양 세력이 연합했다는 가설도 있다. 말 그대로 높으신 분들이 생존을 위해서 고려를 공격했다는 것. 비슷한 예시로 원나라 잔당, 홍건적들이 생존을 위해서 침입했을 때도 쳐들어온 쪽이 고려에게 화내는 (...) 상황이 있었다.[13] 이 부분을 두고 고려 말 왜구는 일본의 남조 세력이었고, 남조 세력에 소속된 집단들은 산에서 도를 닦던 야마부시 같이 미신주술적인 사고에 젖은 자들이 많았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 잊혀진 전쟁 왜구/ 이영 지음[14] 경상북도 선산군이었다. 1995년 구미시에 통합되었다.[15] 고려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16] 다만 사근내역 전투에 대한 전혀 다른 주장도 있다. 아래의 '전라도로 이동한 왜구' 항목 참조.[17] 고려 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18] 남원은 전형적인 분지로 성을 쌓지 않아도 지형 자체가 요새의 기능을 한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 시킨후 5소경을 세웠던 곳중 하나가 남원이다[19] 『고려사절요』 권31, 우왕 6년 7월조[20] 홍산·진포·황산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 이영[21] 실제 이성계에게 여러 장수들이 "왜적이 공격하기 어려운 곳에 들어섰다." 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22] 담양이다.[23] 조선 세조 때에 편찬된 역대병요라는 책에 나오는 기술이다.[24] 전근대 이전의 병력 피해는 전사보다는 오히려 이런 경우가 많았다.[25] 조선 왕조 실록 태조 1권 총서 76번째 기사에는 황산대첩은 아니지만 여진족이 전투에 참가한 기록이 있다. 왜구와 전투에서 이미 승기를 잡아 승세가 아군 측으로 기울었는데, 여진족 군인이 왜구를 마구 죽이자, 이성계가 적이 불쌍하니 이제 그만 죽이고, 생포하라고 한 기록이다. 다만 보병인지 기병인지는 확실치 않다.[26] 황산대첩비 자체가 후대에 세워진 일이니 고증은 좀 맞지 않을 수 있다. 전투를 정확히 기록하기보다는 태조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이 주 목적이기도 하고.[27] 나중에 고려군에게 잡힌 포로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28] 고려사절요에는 이대중 및 10명 정도로 언급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모두 언급된다. 이대중 외에 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이다.[29] 기록에서는 令公視後 라는 말을 연달아 두 번을 하는 것으로 쓰여져 있는데, 당시의 급박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또한 이를 통해 이지란은 이성계와 떨어져서 따로 자기 휘하 친병들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마침 왜장을 발견해 직접 도우러 가기에는 여의치 않아 급히 외쳐서 알려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옆에서 싸웠다면 굳이 알려주기보다 직접 왜장을 처리했거나 최악에 경우 이지란 역시 왜장을 보지 못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30] 이성계가 타고 다니던 여덟 마리의 말 가운데 운봉에서 왜구를 칠 때에 탔다는 함흥산 말 유린청(遊麟靑)과 지리산에서 탔다는 강화 매도산 말 사자황(獅子黃)이 알려져 있다.[31] 이성계의 주변에서 같이 싸울 정도면 이성계의 친병이었을 테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32] 제1차 요동정벌에서 이성계가 활로 위협해 그를 아군으로 만든 일화로 유명하다. 처명은 이성계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자 은혜에 감동하여 자신의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볼 때마다 목이 메여 울면서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했고 한다. 제1차 요동정벌 항목 참조. 처명은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를 따라 죽어라 싸웠다. 이성계의 말 앞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이렇게 이성계의 친병들이 이성계를 호위하며 싸우니 괴물 같은 이성계의 무용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면도 있다.[33] 당시 왜구가 훈도시 하나 걸치고 있는 수준이 아닌 제대로 된 무장 집단이었다는 이야기도 된다.[34] 일본 갑옷인 오오요로이는 완전히 차려 입으면 화살에 대해 상당히 잘 막아내며 아예 활을 이용한 사격전을 상정하고 제작된 갑옷이다. 훗날 조선 시대에 쳐들어온 어느 왜구 두목은 갑옷을 입고 있어서 몸에 화살을 10발이나 맞고도 덤벼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 임란기쯤 되면 유럽권이나 아시아권이나 "아무리 화살을 쏴도 갑옷에 막힌다" + "총으로 쏴버리니 갑옷도 뚫린다" 는 기록이 다수 나타나며 화약이 주력이 되는 시기다.[35] 다음 해 4월, 지리산에서 무등산으로 이동하는 왜구 무리가 기록 상으로 확인되는데, 이 잔당들이 지리산에서 겨울을 보내고(용케 안 얼어죽고 살아남아) 서쪽에 위치한 무등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거기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다수는 사망했으며 극소수의 생존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왜구 - 일본 관계사 : 이영 참조[36] 실제로 피가 물에 섞이면 삼투압때문에 혈구세포가 터지면서 물이 철분으로 붉게 물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철분이 가라앉고 맑은 물은 윗층으로 분리된다. 생물학에서 혈액속의 혈청이나 혈장을 추출할 때 쓰는 방법도 이런 원리와 연관이 있다.[37] 물론, 실제 바위가 피로 물들리 없겠지만, 황산대첩의 임팩트가 얼마나 강했는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직접 가서 확인까지 했다. 정약용은 원래 바위 색이 붉은 듯하다고 하며, 고려의 운명은 위화도 회군이 아니라 황산대첩에서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였다.[38] 조선 태조 이미지와 말년에 이방원에게 당한 서러운 늙은이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무인으로서 지낼 때의 이성계를 보면 자기 활 실력을 자랑하며 웃어제끼거나 지지부진한 다른 장수들보고 "왜 이리 못 싸워?" 하다가 곤경에 처해지기도 하는 등 굉장히 활달하고 소탈한 성격이었다.[39] 이 때 최영의 나이가 65세~66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다. '100세 시대'라 할 수 있는 21세기인 지금은 아직 혈기왕성(?)할 수는 있겠지만, 저 당시만 해도 저 나이까지 산 사람이 거의 드물 정도였다. 사실 21세기도 나이 60이면 자자다 죽거나, 한번 넘어졌다 못 일어나는 사람이 유의미하게 많은 노인이다.[40] 최영과 이성계의 사이는 상당히 돈독했다. 특히, 최영은 이성계를 꽤 아꼈는데, 이성계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직접 따졌을 정도. 권력의 풍향에 민감했던 이인임이 이성계의 미래를 예견하는 말을 했을 때도 최영은 이간계로 취급하며 무시했지만, 훗날 이인임의 말을 듣지 않았던 걸 후회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다만 이인임도 이성계와 결탁한 최영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된다는 건 아이러니.[41] 이순신이 대단하긴 하지만, 사실 원균처럼 말아먹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한반도의 역사를 통틀어도 '최대의 정예군 해체'를 그토록 완벽하게 수행한 인물은 전무하다.[42] 심지어 정유재란 와중에 남원 전투까지 벌어졌는데도 무사했다.[43] 동아일보 1976년 10월 28일 기사[44] 한겨레 1996년 12월 03일 기사[45] 정도전이 이성계와 만난 때는 황산대첩 이후인 1383년이다.[46] 종영 당시 해피투게더에서 두 사람을 비롯해 박영규, 조재현, 이광기가 출연하면서 뒷 이야기를 할 때, 이소룡을 오마주하던 선동혁의 동작을 보고 유동근이 "왜 저런 사람이 낙마를 했나?"면서 황산대첩 장면 당시 이야기를 했는데,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선동혁은 그대로 촬영에 임하는 투혼을 발휘했고, 제작진까지 심기일전으로 임한 까닭에 해당 씬 전체가 호평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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