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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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祖
?~208
1. 개요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4.2. 부정적 평가
5.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의 강하태수이자 유표 휘하의 장수. 다만 단순히 유표의 직속 부하나 부장으로 보기엔 영향력이나 세력이 막강한 정도가 상당했기 때문에 독립 군벌로 보는 시각도 있다.


2. 정사[편집]


유표의 밑에서 강하태수를 지냈다. 원술의 명령으로 유표를 치러 온 손견과의 전투에서 손견이 전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손씨 일가와 대대로 대립하였다. 정사에는 손견이 황조군의 군사에게 활을 맞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며, 전략에 따르면 이때 손견은 황조의 복병에 의해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다만 영웅기에는 손견을 죽인 것이 여공으로 되어 있다.

손책의 대에는 유훈을 돕기 위해 아들 황역을 보내 싸우게 하지만 황역은 참패했다. 오나라쪽 기록에 있는 손책의 표에는 황조와 싸워 이기고 수천, 수만 명을 죽이거나 혹은 포로로 잡아갔다고 하는데, 애초에 표라는 것 자체가 뻥이 심한 거라 수치 그대로 믿기는 좀 그렇다.

황조는 자신에게 신세를 지고 있던 예형의 문재를 아껴서 우대하였다. 어느 날 연회를 열었는데 예형의 말이 불손하였다. 이에 지적을 하자 아예 쌍욕을 날리므로 편형을 부과했다. 예형은 그칠 줄 모르고 되레 더 패악질을 부려댔다. 결국 홧김에 사형에 처했는데 평소 예형을 싫어했던 관리가 즉시 형을 집행하였다. 예형과 친했던 황역이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황조도 이내 후회하여 후하게 장사지냈다.

그리고 손권의 대에는 203년에는 손권군에 의해 수군은 격파당했지만 손권 측 장수 능조[1], 서곤[2]이 전사하고 농성하는 동안에 후방에서 산월과 여타 지역의 반란으로 손권군은 후퇴한다. 207년 손권의 재침공으로 관리와 백성들을 끌려갔다.

208년, 손권은 또 다시 강하를 침공한다. 황조는 강을 막기 위해 몽충 두 대를 엮어 가로로 놓고 돌에 새끼줄을 달아 닻으로 삼아 고정시킨 뒤에 몽충의 위에는 천여 명의 궁수를 둬서 쇠뇌와 화살을 퍼붓는다.

이에 진격하지 못하고 있던 손권군이었지만 선봉 여몽이 황조군의 진취를 직접 베고 오강 방면으로 진격한 능통장석을 죽인 것에 이어 동습이 백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충 안으로 돌입해서 닻줄로 쓰고 있던 새끼줄을 끊어 몽충을 표류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이후 황조는 성이 함락되어 도륙된 이런 상황을 보고 홀로 달아나려 하였으나, 손권 휘하의 기사(騎士) 풍칙(馮則)이 쫓아가 그를 죽이고 효수하였다. 건강실록에는 생포해서 성문에 효수했다고 되어 있다.


3. 연의[편집]


유표 휘하에서 권력과 비중은 크지만 무능한 장수로 나온다. 작중 제대로 활약하는 장면이 아예 없으며 덤으로 이런 인물을 중용하는 유표의 무능함도 간접적으로 돋보인다.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다가 유인책에 걸려 전사한 후 틈을 타 손견군을 공격하다 도리어 황개에게 역관광당해 포로가 된다. 이는 손책이 손견의 시체와 황조를 교환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괴량은 협상에 응하지 말고 아예 이 기회에 강동을 통째로 치자는 제안을 하지만 유표는 아끼는 황조를 죽게 둘 수 없다며 협상에 응한다.

이후 감녕을 수적 출신이라며 괄시하거나 예형의 악담을 듣고 살해하는 등 그저 장군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장군으로 묘사되다가 후에 손권이 보낸 감녕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연의에서는 손견의 죽음과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씨 일족과의 원수 관계는 여전히 유지된다.


4. 평가[편집]



4.1. 긍정적 평가[편집]


손견, 손책, 손권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손오 세력과 싸워 오면서도 야전에서는 패해도 결과적으로는 강하를 점령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며, 특히 손씨 일가 측에서도 대장인 손견, 능조, 서곤이 황조 정벌 중 전사한 것을 보면 그와의 싸움이 꽤나 격렬하고 험난했음을 알 수 있다.[3]

여기에 손책, 손유, 주유, 정보, 황개, 한당, 여몽, 동습, 주태, 장흠, 서곤, 능조, 능통 등 쟁쟁한 장수와도 전투에서 살아남는다.

황조와 손씨와의 대결은 '~가 -와 싸웠다' 식의 일방적인 기록만 있을 뿐, 전황이나 전투의 전개를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 전무하여 교차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록의 신뢰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다만 황조가 손견손책, 손권에 이른 손씨 일가 3대의 공격을 연이어 상대하면서 적어도 16년 이상 살아남았다는 건 교차검증 없이도 증명가능한 부분이다.

승자 측 기록인 오서에 기록된 사건은 승전 혹은 국지전만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고 정사 오범전을 보면 '이길수 없었다' 라는 말을 써서 우회적으로 황조에게 패배하였다고도 해석될 수 있는 방향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가 전사한 후에도 유표의 아들 유기가 채씨 호족을 피해 강하의 서쪽 끝인 하구긴 해도 강하태수로 부임하는 것을 보면 오나라는 황조 전사 후에도 강하 전지역을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소 재고할만한 게 반대로 말하자면, 어쨌든 강하군 일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후에 익양대치에서 (위군 영토가 아닌 나머지) 강하군을 오나라에 귀속하기로 했는데, 촉이 오에 강하를 반환하였다는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선, 이미 강하군 대부분은 오나라 관할이었던 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 등에서는 고순처럼 숨은 명장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가끔 나온다. 권력만 막강했던 채모와는 달리 이쪽은 아예 무수히 전투를 치른 무장인데 창작물에서의 대우는 영 좋은 편은 못 된다.


4.2. 부정적 평가[편집]


그렇다고 이것만으로는 결론을 내기는 어려운 게 황조는 잦은 전투에 패하면서, 숱한 장수들을 잃는다. 유표의 조카 유호부터, 한희, 진취, 등룡 등이 손씨 일가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오서에 손권이 203년 황조의 성을 점령하는데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황조의 능력 덕분이 아니라 산월의 반란 때문에 실패했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저걸로 황조의 능력으로 보기엔 미지수다. 거기에 이 때 능조가 전사한 것은 황조의 용병술 덕이 아니고, 황조군이 패하여 추격을 당하는 와중에 쫒아가던 능조가 감녕에게 사살당한 것이니 이걸로 황조를 칭찬하면 오히려 일종의 굴욕이고 감녕의 무용이 돋보이는 일화일뿐이다.

기록상에서 아무리 편파적이라고는 해도 뭇 오군 장수들에게 전투력 측정기 취급의 뉘앙스가 강하다. 이것은 아들 황역도 마찬가지이다.[4] 존재감이 은근 없어서인지 이 인물에 대한 평가도 거의 없는데, 그나마 있는 것도 오나라로 귀순한 감녕의 '황조 걔 늙어서 판단력도 흐려짐'이라는 디스[5] 뿐이다. 실제로 능력이 있었다면 주석으로라도 어떤 평가가 달리기 마련인데, 영웅기를 통해 어떤 인물상인지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고순과는 달리, 황조의 경우 진짜로 아무것도 없다.[6]

인품을 볼 수 있는 사례에서는 예형을 죽인 것이 있는데, 예형의 조롱을 더이상 참지 못해 홧김에 저지른 것이었다. 같은 상황을 겪은 조조랑 유표와는 도량 차이가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죽이고 나서 바로 후회하며 예형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고 한다. 또 예형의 죽음은 어느 정도 본인이 자처한 면이 있으며 그런 걸로 따지자면 학자 고대가 자기를 깔보는 것 같다며 트집잡아 죽인 손책의 죄는 더 크다.


5.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황조/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황조가 손권군에게 패하여 추격받는 위급한 상황에서 감녕이 능조를 사살했다.[2] 서곤은 이때 인지 207년인지 확실하지 않다.[3] 손책전 주석 오력.[4] 서성군 200명에게 패한다.[5] 참고로 예형도 황조에게 "다 죽어가는 늙은이"라고 깐다.[6] 삼국지 위서 유표전에는 황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후한서 유표전에서도 손견이 죽는 부분과 황조가 죽는 부분에서만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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