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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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보르본 왕조 추존 국왕
후안 3세
Juan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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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후안 카를로스 테레사 실베리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바텐베르그
(Juan Carlos Teresa Silverio Alfonso de Borbón y Battenberg)
출생
1913년 6월 20일
스페인 왕국 산 일데폰소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
사망
1993년 4월 1일 (향년 79세)
스페인 왕국 팜플로나 나바라 대학 병원
장례식
1993년 4월 7일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엘 에스코리알
배우자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1]
(1935년 결혼)
자녀
필라르, 후안 카를로스 1세, 마르가리타, 알폰소[2]
아버지
알폰소 13세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형제
알폰소, 하이메, 베아트리스, 마리아 크리스티나, 곤살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스페인의 왕위 요구자이자 추존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다.


2. 생애[편집]


후안 3세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의 3남이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다. 스페인 제2공화국스페인국(프랑코 정권) 때문에 실제로 재위하지는 못했다.

본래 후안은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큰 형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 알폰소는 평민과 귀천상혼을 해서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고, 둘째 형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는 청각장애를 이유로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3] 그래서 셋째 아들인 후안이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후안은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국경을 넘어 국민군 합류를 타진했지만 몰라 장군은 그대로 후안을 프랑스로 추방해버렸다.

1941년 알폰소 13세의 사망 이후 스페인의 왕위 요구자로서 "바르셀로나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 바르셀로나 백작은 스페인 국왕이 갖는 작위 중 하나로, 그가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수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4] 하지만 프랑코 정권은 상당 기간 동안 보르본 왕가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후안은 히틀러에게 스페인에 압력을 넣어 왕정을 복고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대가로 스페인의 참전을 제시했지만 히틀러는 군주정에 대해 노골적인 혐오를 보이면서 무시했고 1942년 이후에 후안은 추축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연합국 쪽에 줄을 댔다. 히틀러의 패망이 다가오면서 돈 후안은 프랑코는 추축국의 도움으로 권력에 올랐으니 히틀러와 같이 손잡고 망해야 한다면서 온건파 장군들의 궐기를 호소했지만 프랑코는 돈 후안의 도전을 분쇄했다. 이때부터 돈 후안은 온건파들과 좌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입헌군주정, 지방자치, 자유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프랑코는 돈 후안이 거슬렸기 때문에 그에게 스페인에게 귀국할 권리를 대가로 협상을 제시했지만 돈 후안은 왕위 없는 귀국을 거부했다.

프랑코는 돈 후안의 거부를 무시하고 스페인의 군주정은 복고되지 못한다. 이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지원 속에 포르투갈에 정착하여 스페인 정치 상황을 면밀히 감시하였다.

자유주의 성향을 갖고 있어서 프랑코 독재에 항의했고, 프랑코는 그런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을 경계하여 그의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며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후안은 프랑코의 압력을 거부하며 계속해서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고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민주화 개혁에 나서는 것을 보고, 아들을 스페인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계승권 주장을 포기했다.

사후 왕위 요구자 시절 사용했던 왕호인 후안 3세[5]라는 이름으로 엘 에스코리알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면서 추존되었다. 이로써 그의 왕위 요구는 완전히 마무리 지어졌다.

현재 스페인 해군의 주력함인 알바로 데 바잔급 이지스함의 2번함 함명이 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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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시칠리아 왕국의 3대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4남 카세르타 백작 알폰소(이복형 프란체스코 2세의 사후 명목상 왕위 계승, 1894년~1934년 사이에 양시칠리아 왕가 수장)의 차남인 카를로 왕자의 3녀이다.[2] 15세 때 가족과 휴가를 보내던 중 총기사고로 요절했다. 공식적으로는 알폰소가 권총을 만지다가 실수로 총을 발사하여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후안 3세의 큰아들이자 알폰소의 형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총이 장전된 줄 모르고 장난으로 동생을 쏘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그 출처로 지목하는 사람들이 형제의 어머니와 누나라는 점에서, 단순한 루머로 치부하기 힘들다.[3] 하이메의 배우자는 프랑스 귀족인 에마누엘라 드 당피에르(1913~2012)이다. (1935년 결혼, 1947년 이혼. 이후 하이메는 1949년에 재혼함) 엄밀히 말하면 귀천상혼이지만, 알폰소 13세는 하이메가 알폰소처럼 평민과 혼인하는 걸 원치 않아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하이메의 결혼을 인정한 것이다. 다만 프랑스 왕위, 즉 카페 왕조의 수장이라는 자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위트레흐트 조약 탓에 스페인 왕이 프랑스 왕을 겸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재 카페 왕조의 수장,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루이 20세/루이 드 부르봉)은 하이메의 손자이다. 여담으로 루이스의 어머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카우디요의 외손녀이다.)[4] 유럽에는 유사사례가 많은데 보르본계 프랑스 왕위 요구자들은 자신이 펠리페 5세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앙주 공작을 자칭하며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은 파리 백작을 자칭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요제프 2세도 프랑스에 비밀 방문했을 때 아버지 프란츠 1세의 작위였던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루이 16세를 만난 적이 있다.[5]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후안 1세, 후안 2세의 넘버링을 계승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