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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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ふく(ざわ((きち[* 1946년에 신자체가 도입되면서 澤가 沢로 바뀌었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손들이 福沢가 아닌 福澤를 성으로 쓰고 있어 현대 일본에도 후쿠자와 유키치를 福澤諭吉로 쓰는 경우가 많다. 또한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후쿠사와 유키치라고 읽었다고 한다.]|Fukuzawa Yukichi

파일:Yukichi_Fukuzawa.jpg

출생
1835년 1월 10일
에도 막부 셋쓰국 오사카 도지마하마
(現 오사카부 오사카시 후쿠시마구)
사망
1901년 2월 3일 (향년 66세)
일본 제국 도쿄부 시바구 미타 니초메
(現 도쿄도 미나토구 미타)
직업
계몽운동가, 철학자, 언어학자, 교육인, 언론인
학력
데키데키사이주쿠
사상
일본의 자유주의, 계몽주의(탈아론), 자유제국주의
종교
무종교(무신론)
국적
[[에도 막부|

에도 막부
display: none; display: 에도 막부"
행정구
]]
1835~1868
[[일본 제국|

일본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일본 제국"
행정구
]]
1868~1901
신체
173cm[1], 70kg
아호
산쥬잇코쿠진 (三十一谷人)
배우자
후쿠자와 긴


파일:유키치의 초상화.jpg

초상화

1. 개요
2. 상세
2.1. 계몽 운동가
2.2. 민중 경멸론자
2.3. 조선과의 관계
2.4. 탈아론과 제국주의
3. 영향
4. 평가
5. 후손
6. 여담
7. 매체
8. 저서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근대 일본계몽운동가철학자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전신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경응의숙)를 설립한 교육인, 現 산케이 신문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 시사신보)를 창간한 언론인이자 Democracy(→民主主義), Government(→政府) 등 영어의 여러 어휘를 번역해 한자문화권에 소개한 언어학자이기도 하다.

당대 일본 지식인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700여 년 간 이어져 온 막부 정치를 종식하고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여 개혁할 것을 역설하였다. 한때는 진보주의 성향을 띠어 인권 운동가적 면모를 보였고, 이웃나라 조선에도 관심을 가져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윤치호등의 스승이 되어 구한말 급진 개화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1884년 갑신정변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현대 일본에선 대체로 그를 자유주의자로 평하며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일본의 자유주의의 시조 중 하나로 여긴다.

그러나 한편으론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을 멸시하며 그들을 정벌할 것을 꾸준히 주장했고, 이른바 탈아론을 내놓아 근대 이후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 감) 경향과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한 복합적인 인물이다. 나중에 가선 주변국뿐만 아니라 자국 일본의 민중까지도 우민(愚民: 어리석은 백성)이라며 멸시하는 자유주의 엘리트로 변모하였다.

1984년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10,000엔권 지폐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이 실려 있으며, 2024년부터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교체되어 발행될 예정이다.

2. 상세[편집]



2.1. 계몽 운동가[편집]



天は人の上に人を造らず、 人の下に人を造らずといへり。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학문의 권유>의 첫 문장.[2]


一身獨立して一家獨立し、一家獨立して一國獨立する。

일신독립하여 일가독립하고, 일가독립하여 일국독립한다.#

<학문의 권유>


일본 나카츠 출신으로 1835년 하급 무사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3] 아버지는 성리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나카츠번[4]에서 오사카로 올라와 하는 일은 회계 담당 겸 창고 담당이었다. 그는 유키치가 2살 되던 해 사망했고 저명한 성리학자인 형 역시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는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보고 실력이 있어도 성공할 수 없는 신분제 사회에 대한 강력한 증오감을 품게 된다.

이후 쿠로후네 사건이 벌어지고 서양의 대포 이야기가 전국에 퍼지자 그는 포술을 공부하기 위해 1855년 오사카의 테키주쿠(현, 오사카대학)에서 난학(蘭學)[5]을 배웠고 난학을 통해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당대 최고의 난학자가 되어 1858년 도쿄(당시의 에도)에 네덜란드어학교(語學校)인 난학숙(蘭學塾)을 세우고 계몽 운동에 기여를 한다.

그러나 이듬해 쿠로후네 사건의 진원지이자 서양인의 거류지가 된 요코하마를 방문한 유키치는 이곳에 머물면서 네덜란드어가 통하지 않는 사실에 충격을 먹고, 네덜란드는 이류 국가에 불과했으며 영국이 당대 세계 강대국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후쿠자와는 과감히 난학을 때려치우고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막상 영어를 공부해보니 네덜란드어와 비슷한 점이 많아 쉽게 터득했다고했다.[6] 그래놓고 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한 영국의 공문서를 오역해서 사쓰에이 전쟁의 원인을 유발하기도 했다는 야사도 있다.

1860년, 25살이 되던 해에 그는 에도 막부 소속 카츠 카이슈의 미국 특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반년 간 방문했다. 이때 이미 미국을 경험한 스승격 되는 존 만지로와 함께 서점에서 영어 사전을 구입해와서 최초의 일영 사전을 만들었다. 1862년에는 유럽을 1년간 여행했으며 이때 막부의 통역 담당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1867년에는 다시 반년간 미국을 방문했다.

1868년 난학숙을 게이오기주쿠로 이름을 변경하고 메이지 유신 때 신정부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으며 대신 언론 활동과 교육에 전념하며 일본의 개혁과 근대화를 주장하는 한편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면서 대중적인 토론과 회의 등을 통해 전국적인 논의가 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이후 1867년부터 1870년까지 유명한 『서양사정(西洋事情)』을, 1872년부터 1876년까지는 아직도 널리 읽히는 『학문의 권장(學問のすゝめ)』을 펴내 단숨에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저술가이자 계몽 운동가로서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만국공법과 함께 서양 사적이 당대 최고의 관심을 받는 서적이었다. 그가 학문의 권장에서 남긴 일신독립(一身獨立)하여 일국독립(一國獨立)한다는 구절은 과거 일본 근대 사극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강조될 정도로 일본의 계몽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쿠자와는 만인이 각기 불가침의 권리를 갖는 평등하고 독립적인 인간임을 강변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학문과 실업에 힘써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일신의 독립이 국가의 독립과 직결되는 이유는 무지하고 게으른 인민은 정부의 압제를 초래하고 국력을 약화시켜 외국의 침략을 불러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란 주장.

바꿔 말해 국가의 근대화에는 개인의 근대화, 곧 시민적 자유를 향유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형성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정부와 인민 관계가 상하 관계가 아니라 인민이 주인이고 정부는 대리자인 서로가 대등하며 국법에 의해 서로의 권리 존중하고 의무를 이행해야하는 계약 관계임을 설파했다. 학자건 상인이건 관(官)의 일만 선호하고 정부를 견제할 사립의 중요함을 모른다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풍토에 대한 비판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나왔다. 후쿠자와가 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끝까지 민간에서 활동한 것도 이러한 사상 때문으로 보인다.

『학문의 권장』에서 드러난 문제 의식을 구체적으로 써내려간 후쿠자와의 또다른 고전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 역시 1875년의 저술로, 이 시기의 유키치는 그야말로 일본 근대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았다. 보통 여기까지를 후쿠자와의 생애 전반으로 보며, 일본에서는 후쿠자와의 옹호자이건 비판자이건 이 시기의 업적은 모두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쿠자와는 당대 기준에선 상당히 진보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였고 일본 내에서는 진보주의자로 간주된다. 가령 그는 봉건질서 자체를 극도로 혐오하였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을 통한 왕정복고로 왕권이 강화되는 당대 일본 제국의 시스템에 회의적이었으며, 시민 중심의 의회민주주의를 선호하였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덴노제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는지, 일본은 자칭 만세일계로 덴노제가 꾸준히 이어진 국체가 있기 때문에 그런 토대 위에서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제국의 주류 정치권 기준에서도 철저하게 야인에 가까웠고, 당시에는 거의 좌파로 간주되던 성향이었다.[7] 일본 제국 정치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후쿠자와 같이 상당히 개혁적 성향을 가진 이들은 주류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후쿠자와 본인도 1890년 설립된 제국의회 정치 시스템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2.2. 민중 경멸론자[편집]


젊은 시절 민중 계몽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민중을 비판하고 천시했다. 그는 사상가로서의 명망과는 달리 원칙없는 언행을 일삼았는데 예를 들어, 그는 초기에 쓴 『학문의 권장』에서 인간 평등 사상을 내보이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이것을 부정한다. 물론 사상가가 사상이 원고부동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는 변화한 후가 너무 막장이라는 게 문제. 특히 교육 문제에 대하여 그의 입장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자면,

학문의 권유
→ 강박 교육론(강제 의무 교육론)
→ 강박 교육 반대론
→ 최하등 교육론(3년제 간이 소학교 용인)
→ 신 학문의 권유
공장 노동 아동에 대한 교육 거부

변천한 내용을 보면 단순히 원칙이 없는 것을 떠나서, 과연 교육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악질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막부 정치를 그리워하는 당시 시골 사람들을 보며 우매한 대중이라고 경멸했다. 물론 계몽 사상가 입장에선 이런 사람들이 답답한 우민들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후쿠자와는 이들을 계몽할 생각보단 걍 우민이라고 멸시하기 바빴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8]

이것은 그의 또다른 특징인 우민 멸시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초창기의 개혁적 성향과 달리 흑화된 이후 후쿠자와는 우민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사상으로 변화해갔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천황제의 본질이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하는 사술임을 알고, 그것을 지적하긴커녕 적극적으로 선택하였다. 또한 그는 초기에는 천부인권의 인간 평등을 주창하다가 나중에는 대중을 바보 같은 구제 불능의 우민 집단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종교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를 이용해 백성을 통제하고자 한 논리는 이후 국가신토라는 우상숭배로 나타나게 된다.

후쿠자와는 종교는 허황된 미신,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고 종교를 비판했다. 그런데 그는 우매한 사람들을 통제하는데는 종교가 최고라는 역설을 하였다.

"세상에 병신들이 있는 한 종교 또한 매우 유용하다. 바보와 병신에게 종교는 꼭 맞는 구색이 아니랴."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 민권 운동 당시 이 운동을 "잡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하던 메이지 정부를 옹호했다는 점을 보면 곡학아세라고 볼 수도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 민권 운동을 두고 "너무 쓸데없이 시끄럽게 군다."라고 조롱하는 만평을 신문에 싣기도 하는 등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정부가 세금을 내라고 명령하면 민중은 아무런 불만없이 고분고분 세금을 내는 것이 의무."라면서 국민의 절대 복종을 정당화했다.

아울러 후쿠자와 유키치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사회주의와 같은 서구의 민중 운동이 일본의 서민들에게 전해질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한 자가 지혜를 갖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이 왜 가난한 지에 대해서 알게 되면, 차티스트 운동이나 사회주의 같이 권리를 달라고 시위를 하면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근대화와 인권을 설파했던 사람이면서도 정작 하층민의 인권 이슈에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30만 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해외에 성노예로 팔려갔던 가라유키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가라유키상을 두고 "매춘부의 해외 진출은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되며, 자유롭게 하는 것이 경세상 필요하다(1896년 1월 18일)"라고 긍정했다.

그의 우민 멸시는 일본 국민들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근대화되지 못했다고 간주된 조선, 청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 조선과 청의 민중들을 경멸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인 독립당의 처참한 최후는 그의 민중 경멸을 합리화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민중을 경멸했고, 스스로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였음에도 바보와 병신을 위한 종교 진흥론을 1백편 이상 집필하였다. 그 밖에도 '타인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거나, 고소해하는 속이 배배 꼬인 인간'들은 의외로 사회에 많다, 그런 속이 배배 꼬인 사람들의 심리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몰라도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라는 사디스틱한 말도 남겼다.[9]

그는 당시 일본인들이 신사에 가서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을 어리석고 미개한 짓이라며 조롱했다. 그럴 시간에 노동을 더 해서 돈을 더 벌거나, 기술을 연마하는게 더 본인에게 도움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 천년간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인들의 습관, 힘들고 어려울 때 점술이나 종교에 의탁하는 버릇을 쉽게 고칠 수는 없었다. 동시대의 일본인 중에는 그를 비애국자라고 비판하거나 그가 일본을 강도(强盜)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의견들도 있었다.

참고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사회에 기독교를 보급하는 일도 반대했다. 자신의 글에서 "예수교의 교의 따위는 엿 먹어라."고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조롱하기도 했는데, 이유는 일본인들이 기독교를 믿으면 기독교를 믿는 서양 나라들을 형제라고 여길테니, 장차 그들과 전쟁을 하는 일을 주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과[10] 사랑과 평화를 내세운 기독교의 교리가 제국주의를 긍정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우습게 여겨진 탓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그가 무신론자였다는 점과 자유주의적 사상을 감안했을때 종교적 권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반교권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포함한 당대 일본의 상당수 이른바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대중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소수의 지식인이 다수의 대중을 이끌고 지도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하고 절제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후쿠자와 자신은 민권과 입헌을 제창하기는 하지만 특정 체제를 문명 등급과 연계하지는 않았는데, "군주정치가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으며 공화 정치도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 명분이 어떠한가를 막론하고 다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그러니 한 방식의 체제가 어떠한지만 보고 문명의 실질을 판단할 순 없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공화 정치 얘기 잘못했다간 암살당할 수도 있는 당시 일본의 시대 분위기도 감안해야할듯.

2.3. 조선과의 관계[편집]


후쿠자와는 생애 전반에는 조선에 별다른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나, 강화도 조약를 앞두고는 조선에 대해 "스스로 조정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우습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임오군란 사후 처리 사절로 방일한 김옥균과 만나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김옥균은 당시만 해도 후쿠자와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스승으로 모셨으며[11], 후쿠자와도 김옥균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가 정치적 실각 위기에 처하자 갑신정변에 직접 개입해 반란의 성공을 위해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자택이 수색되고 재판정에 불려나가기도 했다.

실제 후쿠자와를 통해 무기를 조달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김옥균, 박영효 등 일파의 거사는 당초부터 선생이 관여하고 듣고 계신 바이다. 선생은 단지 그 대본의 작자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배우를 선택하고 배우를 가르치고 또한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등 만반의 수단을 강구한 사실이 있다"는 증언을 남겼다. 물론 후쿠자와는 자서전인 후쿠옹자전에서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조선 근대화에 대한 개입은 단순히 '조선의 근대화에 열의를 보인 후쿠자와'라는 평가에서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조선에 강요한 후쿠자와', 심지어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후쿠자와'에 이르기까지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다만 갑신정변 시기까지는 후쿠자와가 어느 정도 아시아 각국의 연대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며, 조선인에게는 한글이 가장 알맞으니, 국한 혼용체를 사용하여야 한다며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도 하였다. 게이오기주쿠를 세우고 교육이야말로 문명화, 근대화의 열쇠라고 주장했던 만큼 한자만으로는 서양의 학문이나 사상의 습득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자신의 사재로 한글 활자 주조 비용도 지원을 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국한 혼용 신문이 바로 한성주보였다.

이렇듯 후쿠자와 유키치는 생애 전반기에는 아시아 인민들의 각성과 계몽을 통해서 연대를 도모하고, 거세게 밀려오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다같이 근대화에 나서자는 주장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민중 경멸 발언과 제국주의 야욕이 엿보이는 주변국 혐오 발언 또한 서슴치 않았다.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김옥균 등이 1884년 일으킨 갑신정변에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해서 갑신정변을 지원하였고 일본 자유당의 민병대 청년들을 보내 추가 지원하려고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갑신정변이 끝나고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반역죄였기 때문에 반역죄에 적용하던 조항대로 처벌을 내렸다.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독립당의 처형'이라는 글을 게이오기주쿠에서 발행하던 신문 '시사신보'에 싣는다.# 이 글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를 처형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조선 정부가 죄 없는 부모, 조부모와 처 자식, 나이 어린 손자까지 처형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야만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한 글이었다.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세 달 뒤인 1885년 3월탈아론을 발표한다.

조선의 민중이 크게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조선의 멸망이다. 조선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병자와 같다. 진보의 길을 모르고 도덕이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함과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오만방자하다. 조선은 논할 가치가 없다. 조선 민중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민중을 구제하는 길이다. 조선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며, 지배층은 국민의 권익 보호에 관심이 없고 일반 백성들조차도 부패와 탐욕, 위법 행위를 자행하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의 세습과 부정부패판인 조선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므로 머지않아 조선이 멸망할 것임을 예견하며 조선 민중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 조선은 부패한 유생의 소굴로서 뜻이 큰 인물이 없고, 국민은 노예로 살고 있다. 조선은 학자는 있지만 다만 중국의 문자만 알 뿐이다. 그 나라를 평가한다면 글자를 아는 야만국이라 하겠다.


人間娑婆世界(にんげんしゃばせかい地獄(じごく朝鮮(ちょうせん京城(けいじょう出現(しゅつげんしたり。我輩(わがはいはこの(くに(もくして野蛮(やばん(ひょうせんよりも、むしろ妖魔悪鬼(ようまあっき地獄国(じごくこくといわんと(ほっする(ものなり。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한양에 출현했다. 나는 조선을 보고 야만국보다는 요마악귀의 지옥국이라 평하고자 한다.


조선 인민 일반의 이해(利害)가 어떤지를 논할 때는 (조선의)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이라는 말 역시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제적이고 봉건적인 조선 정부가 멸망하고 (일본의 메이지 정부와 같은) 근대적 정부가 성립해야만 조선 인민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원문. 그는 "인민의 생명도 지키지 않고,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졌을 당시에는 "조선 인민은 , 돼지와 같다,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비난하였다. [12]#

2.4. 탈아론과 제국주의[편집]


1885년 그는 일본아시아에서 탈피하여야 한다는 '탈아론(脫亞論)'을 제창하였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탈아론을 두고 그의 주변국 멸시나 제국주의적 면모는 갑신정변 이후 생겼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갑신정변 이전부터 많은 저술과 논설을 통해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을 멸시했다. 야스카와 주노스케(安川壽之輔) 교수는 저서를 통해 후쿠자와의 주변국 멸시 어록과 정복 주장을 밝히며 당시에는 인지도도 미비하고 비판받던 그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작업을 통해 후대에 미화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강화도 조약, 동학군 토벌, 임오군란, 갑신정변 같은 근세 한일관계사의 뒤에는 후쿠자와의 책동과 개입이 있었고, 일본의 침략과 외교정책으로 이어졌다.# 1882년 그가 창간한 지지신보(時事新報)의 사설은 그가 독점 집필하다시피했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조선과의 개전을 주장하는 사설이 외무성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두 번이나 사설 없이 발행되었다. 발행정지 처분도 있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출병해) 조선 경성의 지나(중국)병을 몰살하고…해군과 육군을 대거지나에 투입시켜 북경성을 함락 시키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은 “수도뿐만 아니라 중국 400주를 유린하라”고 요구했으며, 천황의 친정준비를 촉구하는 다음 날 사설에서는 “천황의 위세로써 아군의 대공(大攻)을 기하는 것이 만전의 책”이라하였다.

“조선은 아시아 중에서도 조그만 야만국으로 그 쪽에서 조정을 찾아와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다.”- 1875년 10월


“조선인은 그저 완고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외국선만 발견하면 다짜고짜 발포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지난날과 같다.” - 1876년 11월


“조선인은 미개한 백성이다. 극히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흉포하다.” - 1882년 4월


“조선인은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우며 거만하다.” - 1882년 9월 6일.


“우리 일본은 동양의 선구자이자 우두머리로서 지나와 조선을 유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이 필요” - 1883년 1월.


“조선의 사절이 미국에 가면서 중국인을 동반했다는 것은 거지와 천민이 함께 가는 것과 같다.” - 1883년 8월.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 이전에도 제국주의적-팽창주의적 성향을 띈 발언들을 남겼다.

“즉 영국과 같이 왕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받들고 왕명으로써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입군 체제다. 전국의 귀족이 상원에 모여서 정사를 돌보는 것은 귀족정치다. 문벌을 따지지 않고 인망을 얻은 사람을 선거하여 하원을 설치하는 것은 공화정치다. 고로 영국의 정치제도는 세 가지 정치를 혼합한 일종의 유례가 없는 제도다.”

-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중.


화친 조약이나 만국 공법은 대단히 우아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명목상 그런 것이며, 교제의 실제는 권위를 다투고 이익을 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백 권의 만국 공법은 여러 대의 대포만 못한 것이며, 여러 화친 조약은 한 상자의 탄약만 못한 것이다. 각국 교제의 도는 죽느냐 죽이느냐에 있을 뿐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대외의 진퇴.

후쿠자와 유키치는 국제 관계에서 만국 공법과 같은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힘의 논리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주장하며 힘을 기를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후 일본을 제국주의 침략 국가로 만드는 데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육지에 수십만의 용맹한 전사들을 갖추고, 바다에는 수백 척의 군함을 띄우고, 지구상에 바닷물이 통하는 곳에서는 일본 군함을 만나지 않을 곳이 없다. 일장기로 동양 전체를 뒤덮고, 그 깃발이 멀리 서양 제국에까지 휘날려 미치게 하는 그러한 광경은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나는 다름 아닌 동양 제일 강국의 백성이다. 아시아의 동쪽 변두리에 제일가는 새로운 영국을 출현시키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을 상상하면 오늘의 사소한 고통은 호소할 정도가 못 된다.”

이렇게 그(후쿠자와 유키치)는 국민을 설득하여, 아시아의 동쪽 변방에 영국과 같은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꿈을 꾸게 하면서 관민의 조화를 호소했다. 그의 ‘관민조화론’은 ‘황실론’을 바탕으로 출발한 것으로, 이렇게 특수한 ‘황실’을 보유한 일본 같은 나라에서나 나올 수 있는 논의였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언젠가 한 번은 인도, 중국의 현지인 등을 다스리는 것에서 영국인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그 영국인까지도 노예처럼 압제해 그 수족을 속박시키고 동방의 권세를 우리 한 손에 움켜쥐자고 장년 혈기가 넘치던 시절에 내밀히 마음속에 약속했다.”

- 1882년 12월의 논고에서.


“세계 각국이 서로 대치하는 것은 금수가 서로 잡아먹으려는 기세로, 잡아먹는 자는 문명의 국민이고 먹히는 자는 미개한 나라이므로 우리 일본국은 그 잡아먹는 자의 대열에 서서 문명국민과 함께 좋은 먹잇감을 찾자.” - 1883년 10월.


출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야스카와 주노스케/ 역사비평사

다만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명이 없는 익명의 논설이기에 본인이 쓴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13] 또한 탈아론은 1885년 발표된 이후에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으며, 다른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패전 이후인 1950년대 이후부터이고, 많이 알려진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라고 한다.[14]

후쿠자와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도 멸시했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일본군 병사들에 의한 청나라 백성들의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일본군이 점령했던 요동 반도에서 청나라 백성 6만 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고, 이것이 하필 일본인 신문 기자에게 발각되어 언론 보도를 타고 세상에 알려졌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 보도되어 일본이 비난을 받게 되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청나라를 상대로 한 무차별 학살과 약탈을 선동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우리 일본군은 문명의 민족이어서 학살 같은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할 리가 없다. 아마 청나라 군사들이 저질러 놓고 그 책임을 일본에 덮어씌우는 조작."이라 하였다.

"조선은 본래 논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중국)이기 때문에 우선 병사를 파견해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하고 바다와 육지로 대거 지나에 진입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다. 온 북경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관민 가릴 것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빠뜨리지 말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와라."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대만에서 대만인들이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자, "일본의 지배에 반항하는 대만의 야만스러운 미개인들은 모조리 전멸시켜라."는 잔인한 내용을 담은 글을 몇 번이나 계속 발표하기도 했다.

"대만인은 오합지졸 좀 도둑떼"


"청국 병사는 돼지 꼬랑지 새끼"


"대만의 반민 등은 필사적으로 저항을 시도하나 대수롭지 않은 오합지졸의 좀도둑떼. 무지몽매한 오랑캐 대만인을 모조리 바깥으로 쫓아내고 일체의 권력을 일본인이 장악하고 그 전토를 모두 과감히 일본화하는 방침을 확정하고."

- 1895년 8월 14일


"대만에 있어서는 섬 전체를 소탕하고 원주민 같은 존재는 안중에도 두지 말라. 비록 무기를 들고 저항하지 않아도 우리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하루도 그냥 놓아둘 수 없다. 조금이라도 우리 병사에 저항하는 자는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가릴 것 없이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주살하고 살육하여 살아 있는 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

- 1895년 8월 14일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대만인은 닥치는 대로 주살하고, 그렇지 않아도 불순한 자들은 모두 쫓아내야 한다."

- 1895년 8월 22일.


"대만인의 완고무식함은 그들의 성질로서 도저히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아니므로 섬멸하는 것 외에는 수단이 없다. 풍속습관에 대한 법률 같은 것은 일본 국내와 똑같이 집행하고 조금이라도 못 본 척 봐주어서는 안 된다."

- 1896년 1월 15일.


"대만의 미개한 야만인에게 문명의 법률을 시행하려는 것은 수레꾼이나 말구종의 무리에게 무가 집안의 예법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 1896년 7월 29일


후쿠자와는 저서인 『학문의 권장』에서 아시아 민족의 전근대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을 문명의 선도자로 좋게 평가하면서도 그 폭력적 성격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다. 또한 일본과 일본인은 거짓말을 일삼고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비굴하다며 디스를 했고, 그렇게 몇백년간 몸에 밴 근성을 뿌리 뽑으려면 국민 개개인이 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업(實業)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 평등사상을 내세우면서, 일본인도 할 수 있는데 왜 서양인만 만나면 굽신거리기 바쁘고 말도 제대로 못하냐며 한탄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당대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적, 사회 진화론적 가식과 그 뒤에 있는 시커먼 탐욕의 본질을 파악했음에도 이걸 도덕적 차원에서 배격하고 대체할 만한 인본주의적 주장을 펼친 게 아니라 오히려 저 탐욕을 긍정하고 내재했다. 후쿠자와는 두 번의 미국 여행과 한 번의 유럽 여행만으로 당대의 흐름이었던 제국주의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를 사는 사람은 그 당대의 시간적, 공간적 인습과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우며, 그런 인습과 편견 없이 사물을 파악하는게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시공간을 초월한 안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러한 국제 정세의 부조리를 비판하기는커녕 도리어 적극적으로 그 비법을 배워서 일본이 제국주의에 올라타도록 주도했다. 그리고 이런 근대화의 억압적, 차별적인 면모에 대한 긍정은 갈수록 인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더욱더 심해졌다.

이 사람의 어록을 보면,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 영향[편집]


그가 설립한 게이오기주쿠(경응의숙)에서 많은 신진 민권론자들이 배출되었고 1800년대 중반부쯤 되어서는 자유 민권 운동이 활발해졌는데 이때부터 일제는 교과서 검열 제도를 실시했고 『학문의 권장』도 그 대상이었다. 천황과 황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데 "사람 위에 사람 없고~"라는 말 자체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국가의 교육 방침 자체가 국가주의, 군국주의 일변도를 가면서 자유주의 사상 역시 탄압 대상이 되었는데 만주 침략, 태평양 전쟁 시기에 게이오의숙은 반정부주의의 소굴로 취급되었고 극심한 감시를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후쿠자와는 그저 미국과 영국 문화를 소개한 사람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다시 인기를 회복한 것은 패전 후였다. 패전으로 천황의 정치 일선 후퇴, 군부의 퇴출, 그리고 민주주의가 들어오면서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캐치 프레이즈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 이는 전후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내 정통 극우파들에게 후쿠자와 유키치는 좋은 평을 못 듣는다.[15] 근대적 보수주의에 가까웠던 이토 히로부미와 달리 당대 기준에서는 진보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였으며, 일본 제국 시절 자유민권운동의 사상적 뿌리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 그가 세운 게이오기주쿠대학도 일본 기준에서는 혁신적인 편에 속하고, 태평양전쟁 당시 반정부주의자들의 소굴이였다.


4. 평가[편집]


일본인들은 대체로 계몽가, 일본 근대사의 위인 등으로 좋게 평가하며 일본 내에서 존경받을 위인 같은 주제로 조사 통계를 내면 항상 상위권 내에 든다.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일본 엔 중 최고액권인 만엔 권의 도안 인물이기도 하다.[16] 허나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아무래도 제국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더 드러나기 마련이기에 부정적인 평이 많다. 다만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들은 개화에 기여하는 인물로 부분적인 평가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과거 일본 정치, 사회의 여러가지 면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지금까지 일본에는 "정부의 역사"는 있어도 "국민의 역사"는 없었다고 까내린 적도 있다. 근대에 들어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정권민중에 의해 바뀌거나 민중의 요구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걸 보면서 한 말이다. 스스로 참여해서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준수하는 구미인들과 정부의 필요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정부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일본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인들을 비교하며 깐 것이다. 자유주의자적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언행불일치를 자주 보여주었다. 당대 제국주의가 하나의 사상적 조류이기는 했지만, 당대에도 제국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은 있었고, 현대에는 일본에서 종종 주장되는 '방어적 제국주의론'[17]과 겹치기 좋기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 등에서는 당시 일본 사정을 이해한다 치더라도 마냥 긍정적으로 봐주기 어렵긴 하다.

그는 근대주의자로서 전근대적 요소를 혐오했음에도 자국의 전쟁범죄나 성매매 등 요소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옹호하는 언행을 자주 보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30만 명의 여성들을 해외 각지에 성노예로 팔아넘기는 가라유키상이 1920년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후쿠자와는 이에 대해서는 비판은 커녕 오히려 "매춘부의 해외 진출은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되며, 자유롭게 하는 것이 경세상 필요하다(1896년 1월 18일)."라고 장려했다.

전 나고야 대학 교수인 야스카와 주노스케 역시 기존에 일본에서 이뤄진 후쿠자와 연구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에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의 아시아 멸시 발언 어록도[18] 부록으로 들어가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한번 읽어보자. 그 외 2015년 7월자로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도 번역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흑화' 혹은 '전향'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국주의적인 인물이었으며, 이러한 면모가 감춰지는데 마루야마 마사오가 깊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5. 후손[편집]


오늘날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손들은 정치보다는 사업이나 연예 쪽으로 진출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이 혈연을 이용했는지 게이오기주쿠대학을 나왔다.(가타야마 지에코는 예외)

  • 증손자인 후쿠자와 다케시(福澤武)는 미쓰비시그룹에 속한 부동산 개발 회사 '미쓰비시지소'(三菱地所)에서 사장직을 지냈다.

  • 또 다른 증손자인 후쿠자와 사치오(福澤幸雄, 1943–1969)는 주행 중 사고로 요절한 미남 카레이서로 일본 내에서 유명하다. 그리스계 혼혈이며 전성기에는 패션모델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 외고손자인 가타야마 지에코(片山千恵子)는 NHK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다.


6. 여담[편집]




  • 오늘날 일본어에서 외래어의 /v/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를 창안하기도 했다.

  • 10,000엔권 엔화의 얼굴 마담으로도 유명한데, 1984년 11월 1일부터 현재까지도 엔화 10,000엔권에 초상이 실리고 있다. 덕분에 1만엔 지폐를 '유키치'라고 돌려 말하기도 한다.[19] 세뱃돈으로 '유키치 3장' 하는 식이다. 다만 2024년 발행될 예정인 신 10,000엔권 엔화 지폐에서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40년만에 도안 인물의 교체가 확정되었다.


  • 그 당시 일본인답지 않게 고기를 매우 좋아했으며, '육식을 말한다'라는 글을 쓰는 등 고기를 기피하던 일본의 국민들에게 육식 예찬론을 설파했다. 그래서 그런지 키가 당시로선 상당한 장신인 173cm에 달했으며 체격도 제법 건장했다.

  •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으로 인해 아관파천 직후 망명한 이두황, 황철, 조희연 등이 영웅인 것마냥 일본에서 활개치고 다녔는데, 이를 보고 자기 국모를 살해한 것들이 은인자중하지 못한다고 질책하였다.


7. 매체[편집]


  •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걸작인 "왕도의 개"는 후쿠자와를 정말 강하게 디스한다. 후쿠자와 특유의 형용할 수 없는 느글거림 역시 제대로 묘사된다. 또한 조선이 러시아에 빌붙으려는 모습을 보인다면서 이런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실망했다고 무시한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스스로의 말과 어긋나지 않느냐는 주인공의 지적에 "그러니까 학문을 배우라는 말이다. 그런 것도 모르는가?"라는 소리만 늘어놓는다. 실제로 후쿠자와의 사상과 언행이 이러했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주인공인 이선과 개화파를 칭찬하는데, 이선은 유키치의 본심을 아는지라 그를 대놓고 무시한다.

  • 전 세계의 근현대 문호들을 이능력자 캐릭터로 재창조한 이능력 배틀 액션 만화 문호 스트레이독스에 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 후쿠자와 유키치가 등장한다. 실제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력 활동은 문학 작품 창작은 아니었지만, 후쿠자와가 일본의 근현대 인문학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그가 일본사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를 반영하여 스토리 작가가 본작에 등장시킨 것으로 간주된다.
훤칠하고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이며,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아무 탈 없이 각자의 이능력을 제어하게 해 주는 이능력 "사람 위에 사람 없다"를 지니고 있고, 검과 창 등 각종 냉병기를 매우 능숙하게 다룬다. 평등고양이에 큰 가치를 부여하며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 무장탐정사 사원들에게 겉으로는 엄격하지만 속으로는 따스하게 대해준다. 또한 실제 인물의 그 영향력이 반영되었는지 작중 최강급의 인물로 등장한다.


8. 저서[편집]


저서, 번역서가 많고 기고문도 수두룩한데 주저는 아래 네 저서이다. ()는 한국어 번역서 명이다. 취소선 친 것은 절판.
  • 学問のすゝめ(가쿠몬노스스메/학문의 권장/학문의 권유/학문을 권함)
  • 文明論之概略(문명론의 개략[20]/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문명론 개략)
  • 福翁自伝(후쿠옹자전/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21]
  • 西洋事情(서양사정[22])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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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동양인으로서는 상당한 장신이었다. 현재 일본 성인 남성 평균키보다도 크다.[2] 본인이 한말이 아니라 '~라고 한다'라는 인용체이며 이 구절 뒤에 "그럼에도 사람마다 빈부귀천의 정도가 다르고, 삶의 형상이 천차만별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배움의 여부에 있다. 대체로 어려운 일을 하면 높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쉬운 일을 하면 낮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쉬운 일은 육체 노동이고, 어려운 일은 정신 노동이다.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배움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학문을 열심히 닦아 사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귀한 사람이 되고 부자가 되며, 무학(無學)인 사람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된다."라고 쓰여있으며 실학을 배울 것을 주장한다.[3] 아버지는 유키치가 태어나던 날에 그 전부터 읽고 싶었던 대명률의 상유조례(上諭條例)라는 책 한 질을 구했다. 그래서 諭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는데, 정작 그 아들은 훗날 서양 학문을 공부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 책을 팔았다.[4]오이타현 나카츠시[5]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 학문을 뜻함. 전국 시대 일본에선 네덜란드의 별칭으로도 쓰이는 홀란트(Holland)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올란다(Holanda)라는 이름으로 네덜란드를 처음 접했고 이에 따라 네덜란드를 "오란다(현재 가타카나 표기는 オランダ)"라고 부르며 한자 화란타(和蘭陀), 또는 화란(和蘭)으로 표기했는데 여기에서 약칭 란(蘭)이 나왔다.[6] 애초에 영어나 네덜란드어나 다 같은 게르만어파 소속이니 네덜란드어를 깊이 공부한 그에겐 상대적으로 배우는데 조금은 유리했을 것이다.[7] 이보다 더 왼쪽인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들은 아예 극좌로 분류되었다.[8] "농사꾼과 수레꾼의 논의를 한쪽에 두고 정부권력의 균형을 잡으려는 것은 제등을 저울추 삼아 범종의 무게를 다는 것과 같다. 농사꾼과 수레꾼에게 학문을 가르쳐서 그들에게 기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은 삼나무 묘목을 심어놓고 돛대를 구하는 것과 같다. 터무니없는 바람이지 않은가."- 1875년 6월./ "홋카이도의 토착민 자제를 양육하고 이들에게 학문을 배우게 하여 고생고생 가르쳐도 유전의 지덕이 부족하다. 호농, 부농, 양가의 자제는 이미 유전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 1882년 3월. 가난한 저소득층은 원래 무식한 자들이므로 애써 가르쳐봐야 헛일이라는 말이다. 덧붙여 인간은 빈부의 격차에 따라 그 유전자를 물려받는다는 기상천외한 유전학까지 제시.[9] 비슷하게 속이 배배 꼬인 중국의 루쉰과 비교할 때, 당대의 제국주의 하에서 ‘나쁜 놈이 잘나가는’ 현실에 대해 루쉰의 경우 ‘패자’로 나타난 자국에 대한 혐오를 보였다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 ‘패자로 있는 것보단 더러워도 그나마 승자로 있는 것이 낫다’는 식의 결론하에 그 ‘더럽고 치사함’에 대해 냉소적 긍정을 보인 것으로 추론해볼 여지도 있다. 물론 속마음은 본인만 알 일이다.[10] 다만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면 유키치의 쓸데없는 걱정인게, 기독교 국가인 독일 제국, 나치 독일은 1, 2차 세계 대전에서 같은 기독교를 믿고 인종이나 문화도 비슷한 서구 국가들인 미국, 영국, 프랑스와 잘만 싸웠다. 거기다 유럽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독교 국가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끼리도 서로 싸워댔던 역사가 수두룩하다. 물론 개중엔 반전주의자들도 있을테니 연대할 싹조차 잘라내야 된다는 후덜덜한 의미면 할 말 없다만.[11] 물론 애초에 조선 개화파의 시초는 박규수가 있었고, 김옥균은 박규수->유홍기->김옥균 라인이긴 했다.[12] 참고로 후쿠자와는 청일전쟁 당시 중국에 대해서도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다."고 비난하면서 일본을 옹호했는데, 타국의 아픈 점은 잘 건드리면서도 자국의 문제에는 눈을 감던 아니 오히려 조장하는 측면도 있던 당시 유키치의 모습을 보여준다.[13] 이다신야,『歴史とテクスト 西鶴から諭吉まで』光芒社, 2001년 12월[14] 히라야마 요우 (2004). Fukuzawa Yukichi no shinjitsu (福沢諭吉の真実). Bungei Shunju. pp. 193–239.[15] 산케이신문의 경우 지지신보 시절과 달리 보수화되었다.[16] 2024년부터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교체된다.[17] '일본이 제국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살려면, 혹은 안보를 지키려면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권 안에 두는 게 필요하다' 정도의 논리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살아있을 시절에도 일본 내에서 거론되던 주장이었다.[18] 이 발언들은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에서 발췌한 것들이다.[19] 한국에서 1만원권 지폐를 '세종대왕', 5만원권 지폐를 '신사임당'으로 돌려부르는 것과 비슷하다.[20] 제이엔씨 출판사 것인데, 사지 마라. 번역자 임종원은 보기 드문 국내 후쿠자와 연구자로 후쿠자와 입문서도 냈으나 번역은 개판을 친다.[21] 여느 자서전과는 좀 다르게 부정적으로 평가될 만한 부분도 스스럼 없이 많이 드러내는 게 특징이다. 경건한 의식에 쓰는 종이를 가지고서 귀신과 천벌이 진짜 있는가 함 보겠다며 똥 닦은 이야기, 괜히 장난으로 별 죄 없는 상인한테 갑질해서 시장바닥에서 쫓아낸 이야기, 기생집 양치 그릇 훔쳐서 잘 써먹은 이야기, 길 가다 건너편 나그네한테 지레 쫄아서 스치는 순간 줄행랑 친 이야기, 막부랑 신정부 중 어느 편에 붙어야 이득이겠냐 노골적으로 물었다가 가토 히로유키(훗날 도쿄대 총장)한테 쿠사리 먹은 이야기 등등.[22] 2021년 초편부터 외편, 2편, 3편을 한 권으로 묶은 완역본이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