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민트 사건

최근 편집일시 :




[ 펼치기 · 접기 ]
구성
인사
여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연립여당
자유민주연합 · 민주국민당
정책 및 방향
햇볕정책 · 대중참여경제론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국민PC · 국립대학구조조정계획 · 전자정부 · 인사청문회 ·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 노사정위원회 · 국가인권위원회 · 경제자유구역 · 소프트웨어 산업 진흥법 · KAMD · 한국형 전투기 개발 추진 · 한국형 우주 발사체 개발 추진 · 한국형 무인 전투기 개발 추진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논란이 있는 평가 · 햇볕정책/평가
타임라인
1998년
1998년 재보궐선거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휴민트 사건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 지리산 폭우 참사 ·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 · 정부대전청사 개청
1999년
제1연평해전 · 1999년 재보궐선거 · 1999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 · 국정원 출범 · 국민PC 보급 시작 · 국민연금 의무 가입 실시 ·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문화재청 개청 · BK21 · 신지식인 · 옷로비 사건 · 민주민족혁명당 사건 ·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 ·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2000년 재보궐선거 · 제1차 남북정상회담 · 6.15 남북공동선언 · 햇볕정책 추진 ·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 진승현 게이트 · 의약 분업 · 새천년 NHK 사건 · 정현준 게이트 · 주한미군 독극물 한강 무단 방류 사건 ·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연쇄추돌 참사 · 의문사위 출범
2001년
2001년 재보궐선거 · 제7호 태창호 사건 · 2001 한일 컨페더레이션스컵 · 이용호 게이트 · 여성부 출범 · 인권위 출범 · 테러방지법 파동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족 · 육군 CH-47 올림픽대교 추락 사고 · 인천국제공항 개항 · 예지학원 화재 사고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02년 재보궐선거 ·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 한일 월드컵 · 제2연평해전 · 이석기 검거 · 홍삼 게이트 · 최규선 게이트 ·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1.25 인터넷 대란 · 대구 지하철 참사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김대중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김대중 참고






1. 개요
2. 상세
3. 유사사건
3.1. 이명박 정부
3.2. 문재인 정부


1. 개요[편집]


1998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함과 동시에 대공요원 및 대북 휴민트(HUMINT)[1]가 조직적으로 숙청되었다는 주장. 관련 기사로서 중앙SUNDAY 기사, 신동아 기사[2], 한겨레 기사[3]가 있다.

참고로 '휴민트 사건'은 '인적정보자원 사건'이라는 뜻으로, 직역을 하자면 이러한 사건을 지칭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외국어를 본 의미와 다르게 차용한 예는 일상에도 흔히 있으므로 크게 문제될 수준은 아니다.


2. 상세[편집]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변하면서 인사물갈이가 크게 있었다. 1998년 4월 안기부 ‘1차 쇄신’의 대상은 부이사관급 140명을 포함해 서기관급 581명이었다. 동시에 안기부 밖에선 대공 경찰 2500명, 기무사 요원 600여 명, 공안검사 40여 명이 해직됐다. 8개월 뒤 12월 안기부 ‘2차 쇄신’ 내용은 300명의 추가 명퇴였다. 대북 공작국과 대공 수사국이 없어졌지만[4] 면직되진 않아 ‘일 없이 남은 직원’ 들이 대거 나갔다. 8개월 사이 900여 명 안기부 직원이 나가면서 수백 명 북한 담당 인력도 함께 사라졌다. 당시 안기부 내 북한 분석관이었던 P씨는 “이사관급 이상 간부 수백 명이 당시 쫓겨나는 것을 봤다”고 했다. 두차례의 쇄신이후 안기부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쫓겨난 자리를 500명 새 직원이 채웠다.

2001년 탈북한 북한군 상좌(한국군 대령 대응)출신인 김유송[5]의 주장에 의하면 같은 시기인 1998년 10월 북한에서는 교도훈련 지도총국장 임태영 상장(한국군 중장 대응), 총참모부 2전투 훈련국장 우명훈 중장, 64저격여단 이상일 소장 등이 다 잡혀갔다고 한다. 그는 보위부 사람으로부터 “남한 정권이 북한 사람을 고용했던 자료를 북조선에 넘겨줘서 잡은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본인도 체포되었다가 '힘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풀려난후 탈북했다고 한다. 당시 장군 100여 명, 당 간부 150명 이상이 체포되고 일부는 사형됐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태의 관계에 대해 한나라당 권영세 국회 정보위원장은 이 두 사건의 관련성은 알 수 없으나 이와 관계없이 과거 남쪽에서 북한 내 첩보망을 일부러 공개시켰었다는 주장이 국정원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이와 관련해 앞선 1998년 3월,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이종찬 원장은 "지난 대선과정에서 북풍을 이용한 배후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드러났다"면서 안기부 내에서 ‘북풍공작’을 한 사실이 있었음을 밝히며 "앞으로 관련자들에 대해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해 관련자를 사법처리하거나 문책할 것임을 발표했었다.# 퇴임 이후에는 이같은 논란[6]에 대해 이종찬 전 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안기부국정원으로 개편하며 중점을 둔 사안이 과거처럼 국내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가안보에 충실한, 그리고 해외역량을 보다 강화한 정보기관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종찬은 과거 중앙정보부 재직시[7] 정보기관이 공천개입, 선거개입 등 국내정치에 광범위하게 개입하는것을 현장에서 많이 겪었으며, 정치에 참여한후 신한국당의 9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경쟁할때 안기부가 엄청나게 자신을 탄압하여 중도에 사퇴했고, 이때 정보기관이 아직도 옛날과 똑같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79년 정보기관의 수장이 국가원수를 시해한 10.26 사건이 있어 80년에 개혁을 한번 했는데 98년에 가보니 좀 줄여놨던 국내파트가 도로 늘어나 있더라"며 "대공수사와 국내 보안정보 수집을 주로하고 개입은 하지않게 구조조정을 했다."고 해명했다.언론 인터뷰 다른 인터뷰에서도 이 논란에 대해 언급하면서 "퇴직자 중에는 과거의 정치공작에 관여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미림팀이라 불린 불법 도청에 연루된 직원들도 포함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강제 퇴직자들이 이종찬 원장이 대공 분야 베테랑인 자신들을 내보내 국정원의 대공 정보 수집 기능이 약화됐다고 주장한다'는 기자의 질문에는 "천만의 말씀이다. 대공 정보 쪽 인력은 강화시켰고 국내 정치 정보 쪽 기능을 축소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논란이 된 1998년의 안기부 대공라인 숙청논란 이후인 1999년국가정보원은 반체제 지하정당인 '민주민족혁명당(민혁당)' 조직을 적발하였고, 그 구성원인 하영옥, 김영환, 이석기, 박경순, 김창현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한 민족민주혁명당 사건[8]이 있었다. 이 중에 박경순, 김창현은 문민정부 때인 1997년 민혁당 조직의 영남위원회 소속이라는 혐의로 이미 한차례 기소된바가 있으나 체포 후 일관된 부인으로 민혁당이 상부 조직이라는 것은 밝혀지지 않고 넘어 갔었지만, 1999년 재수사결과 혐의가 밝혀져 다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공안사건 문서에서 볼수 있듯이 김대중 정권 동안에도 여러건의 공안사건 적발로 공안사범들이 검거되었다. 당시 정보기관들의 대공라인이 완전히 없어졌다면 이런 공안사건들을 적발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김대중 국정원 의혹을 제보했던 ‘국정원을 사랑하는 모임’의 송영인 대표는 한나라당 서청원 사무총장과의 친분을 이유로 '면직 및 재택근무' 처분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이종찬 안기부장은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개편하며 중점을 둔 사안이 과거처럼 국내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가안보에 충실한 그리고 해외역량을 보다 강화한 정보기관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국정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언론 인터뷰에서 이종찬은 과거 중앙정보부 재직시[9] 정보기관이 공천개입, 선거개입 등 국내정치에 광범위하게 개입하는것을 현장에서 많이 겪었으며, 정치에 참여한후 신한국당의 9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경쟁할때 안기부가 엄청나게 자신을 탄압하여 중도에 사퇴했고, 이때 정보기관이 아직도 옛날과 똑같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내 휴민트 숙청논란을 제기한 김유송[10]씨의 증언에서 대북 휴민트 250명 이상이 체포되고 일부는 사형되었다고 하는데, 증언의 사실 여부나 신빙성과는 별개로 당시 북한에서는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 심화조 사건, 황장엽 탈북 등으로 인한 대규모 숙청이 한창이었다.

또한 흑금성 사건도 거론된다. 그 사건으로 중국 연변 일대의 대북 정보조직이 와해된 이후 복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흑금성 사건은 김대중 정부로의 정권교체 직후 안기부 간부가 살아남기 위해 안기부 기밀자료[11]를 언론, 정치인에게 노출하면서 발단이 됐다.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정보원 한 사람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10년씩 기다려야 한다"면서 "흑금성 사건은 대북 정보조직의 뿌리를 흔드는 이적행위로 비판받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


3. 유사사건[편집]



3.1. 이명박 정부[편집]


이명박 정부 당시 원세훈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내 대북 휴민트 자산이 물갈이 되었고 이 결과로 2011년에 북한 김정일이 죽은 것도 북한 조선중앙TV 방송을 통해서야 알게 된 것이라는 정두언한나라당 의원의 주장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여권의 한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정권출범 직후 국정원에서 북한의 고위층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해왔던 고위직들이 밀려났는데 대표적으로 서훈같은 인물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서훈은 남북대화와 비밀접촉을 총괄하는 국정원 3차장이었는데 그는 2000,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참여했으며, 국내에서 북한 김정일을 가장 많이 대면한 인물 중 한명이고, 북한의 장성택 당 행정부장(국방위 부위원장)과도 밤새워 통음할 정도로 북한 고위층과 관계가 밀접했다. 또한 1996년 KEDO 북한사무소 대표를 역임해 북한의 협상 방식을 잘 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며 "이런 인물들이 제거됨으로써 대북 인적정보망이 지금처럼 붕괴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또 다른 관계자도 언론에 “원세훈 국정원장이 3차장 산하의 대북전략국을 해체했다"며 "대북전략파트에는 오랜 시간 북한 문제를 다뤄온 요원 200여명이 근무중이었는데, 실무자들은 대부분 국내 파트로 전출됐고 고위급들은 대부분 옷을 벗었다”고 주장했다.#1 #2 #3 #4 #5

앞서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당시 김성호 국정원장이 "칫솔질은 가능한 수준"이라고 정보를 공개해 첩보원 노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데, 이로 인해 김정일의 주변 인사들이 대거 교체되면서 정보가 끊긴 것이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정부 고위관계자는 언론인터뷰에서 “이번에는 국정원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인적 정보인 ‘휴민트’ 역할이 컸다.”고 밝혀버리기도 했다. #### 김정일 중병설이 나돌 때 정보당국이 김정일의 뇌 MRI 사진을 입수해 분석해 뇌졸중으로 쓰려졌음을 알수 있었다. 이 사진은 네 달 뒤에 한 월간지에 유출돼 보도됐다. 당시 정보당국에서 활동했던 소식통은 언론에 “북한은 즉각 정보가 새나간 경로를 추적해 혐의가 있는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고 관련 암호체계도 싹 바꿨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휴민트가 크게 약화됐다”고 전했다. 논란이 일자 정부 인사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햇볕정책을 펴온 탓에 대북 첩보활동이 약해졌다”고 주장하는 반면, 야권에서는 “이명박 정권 들어 남북 교류를 끊고 대결구도가 형성되면서 휴민트 활동이 어려워졌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출신의 한 인사는 “원인을 단정해 말하긴 어렵지만 교류와 접촉이 많을수록 정보원 포섭과 유지가 쉽고, 상대방도 이런 활동을 어느 정도 용인해주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또한 2011년에 북한에서 대남 대화파 30여명이 처형됐던 사건과 관련해 대북 공작원이었던 흑금성 박채서는 "대남파는 빨치산세력에 맞설 실용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30~40명씩 공개 처형 등 다 숙청됐다. 숙청 자료를 우리 정보기관에서 줬다. 과거 10년 동안 남북교류하면서 뒷돈 준 자료를 다 준 거다. 한 예로 본명이 권민인 권영욱이라는 김일성대 나오고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항상 북측 대표단장으로 나온 유연한 사고의 실용주의자, 그 친구도 날짜별로 돈 받은 게 나와 숙청됐다. 그런 식으로 대남파들이 결딴나면서 북한 내 강경파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것이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도 있다. 1977년 수학여행 중 전라남도 홍도에서 북한에 의해 납북된 이민교의 어머니 김태옥에게 당시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있는 휴민트들을 이용해 이민교씨와 또 다른 납북자에게 가족의 소식을 전하려고 시도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정부의 한 관계자도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북한 내부 협조자를 통해 소식을 전달해주려 노력했다”면서 “그래서 여러 차례 편지를 써보라고 권했지만 이씨의 어머니 측이 아들의 안전 때문에 포기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대북 휴민트 라인의 씨가 말랐다는 일각의 주장과 상충되는 증언이다. #

위의 정두언 의원의 주장에서 국정원 인사 이동의 피해자로 언급되던 당사자인 서훈도 당시 이런 주장에 대해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전혀 모르는 일로, 정권이 바뀌면 정무직이 물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인수위 시절 당선자 보좌역이었던 정두언을 만난 일은 있지만, 당시에는 정두언 뿐 아니라 남북관계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인수위 쪽 인사들과도 두루 만났다"고 반박했고,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을 때 국정원 후임 인선이 늦어져, 정보업무에 공백은 바람직하지 않아 후임 인선을 빨리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었다. 정두언이 과잉해석을 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3.2. 문재인 정부[편집]


문재인 정부 당시 군 검찰이 현직 국군정보사령부 대령들을 대상으로 무리한 수사를 벌인 것으로 2022년 드러났다. 20년 이상 대북 공작 활동을 한 이들은 지난 2016년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등을 주도해 당시 내부에서 발군의 공작관이라는 평가를 받던 인물들이었다. 전·현직 정보사 관계자들은 “사실상 휴민트망의 핵심에 있는 두 현직 대령을 문재인 정부에서 3년간 재판장에 세워 수족들을 묶었다”면서 “이에 따라 정보사 내 핵심 휴민트망이 모두 붕괴된 상태”라고 밝혔다.

이 중에서도 한 특정 부대에 핵심 휴민트가 몰려 있었는데 재판을 받은 두 대령은 모두 이곳 소속이었다. 한 정보사 관계자는 “부대 내 모든 사항이 극비인 만큼 세간에서는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문재인 정권하에 이 조직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고 증언했다. #

그리고 문재인 정부 집권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국정원에서 탈북민 정보원들을 차단한 것이다는 증언이 나온다. 실제로 대북정보 활동을 하던 대부분의 탈북민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활동을 모두 중단하였다. 정보 활동에 기여하던 한 탈북민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탈북민 휴민트를 말살했다”면서 “문 정부는 이들이 북한 정보를 가져와도 쓸모없게 만들어 더는 정보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일조했다”고 밝혔다. 또 “문재인 정부가 탈북민 휴민트들의 활동을 차단하고 북한에서 정보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전화해 실제 국정원과의 정보 거래 여부를 확인까지 했다”고 증언했다. #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12:17:23에 나무위키 휴민트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휴민트란 휴먼(human)과 인텔리전스(intelligence)의 합성어로 인적정보(人的情報)를 의미하며, 쉽게 말해 스파이를 이용한 정보 빼내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인공위성 등을 이용한 기계적인 정보(TECHINT, 테킨트)와 함께 양대 축을 이루는 전통적인 정보 습득 방법이다.[2] 다만 이 기사는 안기부 직원 해고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 이른바 대북 휴민트가 숙청된 것에 대한 언급은 찾기 힘들다.[3] 북한 주민과 탈북자들이 왜 대북 정보 수집에 동원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다.[4] 2003년초 국정원 개혁을 주제로한 특집기사에 보면, 부서가 아예 없어진건 아니고 '대공정책실' 등으로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5] 그는 당시 총참모부 산하 함경도 무역회사 책임자였다고 했다.[6] 휴민트 사건 의혹을 제기한 국정원 강제퇴직자 모임인 ‘국정원을 사랑하는 모임(국사모)’의 송영인 대표는 새 지부장으로부터 ‘면직 및 재택근무’를 통보받았는데 사유는 ‘한나라당 서청원 사무총장과의 친분’이었다고 한다.#[7] 이종찬은 김대중 정부 이전에도 정보기관에서 근무한바 있는데 박정희 정부때는 중앙정보부에서 기획조정실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전두환 정부때는 민주정의당 창당 참여와 국보위에서 활동했다.[8]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더 알려져있다.[9] 이종찬은 김대중 정부 이전에도 정보기관에서 근무한바 있는데 박정희 정부때는 중앙정보부에서 기획조정실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전두환 정부때는 민주정의당 창당 참여와 국보위에서 활동했다.[10] 98년 당시 북한 총참모부 산하 함경도 무역회사 책임자였으며 99년 체포되었다가 풀려난후 2001년 탈북했다고 증언했다.[11] '이대성 파일'이라고 불렸다. 안기부 해외공작실장 이대성이 작성한 문건이다.